[storycubic]할로윈퍼레이드_포천허브아일랜드_111030(일)
- 제작년도
- 2011
목포국도1호선독립영화제 현장 나는 목포가 고향이다. 태어난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목포에서 학교를 다녔고, 대학 진학 때문에 서울로 가게 되었다. 그 시절에는 다 그렇다. 고향을 떠나고 싶어 하고 서울로 가고 싶은 마음. 학창 시절에는 목포를 꼭 벗어나고 싶은 그런 마음이었다. 작가가 되고 싶었고, 글을 쓰고 싶었고, 글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은 문예창작과를 가게 됐는데, 아마도 내가 다녔던 시기가 학생운동의 마지막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사회에 관해 이전과는 다른 시선을 갖게 된 계기가 어릴 적 봤던 5.18 민주화운동 사진집이었고 광주 비디오였다. 성당에서 봤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꿈을 안고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마주했던 첫 풍경은 아직은 어렸던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지하도 통로 옆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던 주거를 상실한 사람들의 모습은 당시 목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폭력적인 서울의 모습이기도 했으니까. 대학을 졸업할 즈음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당시 한겨례문화센터에 있는 비디오 제작학교를 수료했다. 그때 만들었던 작품이 ‘인권운동사랑방’에 관한 다큐멘터리였다. 나와 팀을 이뤄 두 명이 만들게 됐는데, 아마도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목포로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목포는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성인이 되고 달라졌던 것 같다. 평소 바라보지 못했던 목포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면서 목포의 장점과 역사, 그리고 문화를 알게 되고, 목포에서 영화를 계속 해봐야 겠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광주 근교에 있는 대학의 연기·영상학과에 다시 진학했고, 본격적으로 영화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영화 공부를 하고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방송국에서 VJ를 했었다. KBC광주방송과 광주 KBS에서 소위 꼭지 프로그램이라 불렸던 내용을 촬영하고 편집을 하며 작업을 이어갔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갈망이 컸던 것 같다. 그런 과정에서 독립영화 상영회를 만들어 봤으면 하는 고민과 함께, 2014년에 작은 카페공간에서 다섯 편의 단편과 함께 공동체 상영을 시작하게 됐다. 이 작품 중에는 내가 만든 단편도 포함돼 있었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상영이 지속될 것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객석을 가득 메워 주셨다. 반응도 너무 좋았다. 그때, 목포에서 독립영화를 상영할 때도 관객들이 찾아와준다는 점을 확인하고, 그다음 해를 준비했던 것이 목포국도1호선독립영화제의 시작이었다. 목포국도1호선독립영화제 현장과 대학생 자원봉사자들 / 사진: NR1FF , 필자 제공 목포 국도 1호선은 당시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연결되어있는 도로이기도 해서, 끊어진 도로가 다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평화 통일에 대한 가치를 지향하는 마음으로 영화제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목포에서도 일상적으로 독립·예술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상영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고, 2018년 3월, 전남 최초의 독립영화관 시네마엠엠(MM)을 개관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제와는 이제 1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다섯 편의 단편으로 출발해 이제 지역에서 개최되는 독립영화제 중 가장 많은 영화를 상영(2025년 기준 장·단편 포함 76편)하며 한 해의 중간에 독립영화를 평가하고, 돌아보고, 공유하는 자리가 됐다. 더불어, 곧 개관 8주년을 맞는 독립영화관 시네마엠엠은 단순히 영화를 상영하는 작은 극장이 아니라, 목포 지역에서 독립·예술영화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플랫폼이다. 영화관, 교육 공간, 창작자 지원과 지역 커뮤니티 허브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복합적 문화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목포에서 독립영화를 안정적으로 상영할 수 있는 유일한 기반이 된다는 점이 무척 중요하다. 상업영화관에서는 보기 힘든 작품들을 꾸준히 소개하면서 지역 관객의 영화적 감수성과 취향을 확장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지역에서 영화 관람의 다양성이 끊기지 않도록 지켜내는 자리이기도 하다. 비록 좋은 컨디션을 가지고 있는 상영관은 아니지만 이 공간을 매개로 목포국도1호선독립영화제를 비롯해 여러 소규모 상영회와 토크 프로그램들이 운영된다. 지역의 젊은 영상 창작자들이 실제로 작업하고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촬영, 리허설, 상영 테스트가 가능하고, “MM 큐레이션” 프로그램을 통해 신진 감독들의 단편영화 제작도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현실은 긍정적이지 않다. 전남은 제작지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도시이기에, 별도의 공모사업을 활용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제 중 시네마엠엠 옥상 상영 전경 그래도 영화제를 개최하고 독립영화관을 만든 후 느낀 가장 큰 변화는, 지역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목포에서 독립영화를 본다는 것이 어렵거나 낯선 일이었는데, 이제는 “시네마엠엠에 가면 새로운 영화를 만날 수 있다”라는 기대감이 생겼다. 지역 관객들이 ‘감상하고 싶은 작품의 선택지’로서의 독립영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이 흐름이 지역 문화의 다양성을 넓혀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창작자들이 목포에서 실제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는 점이다. 촬영할 장소, 상영할 공간, 전문가의 조언, 시사회 같은 ‘영화 한 편을 완성하는 과정’이 시네마엠엠을 중심으로 가능해졌다. 그동안 수도권에만 존재하던 창작 생태계의 일부를 지역에서도 구현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특히 “MM 큐레이션”과 같은 제작지원 프로그램과 관객 프로그램을 경험한 젊은 감독들과 관객들은, 자신의 첫 작품을 목포에서 만들고, 그 영화를 통해 다시 시네마엠엠에서 관객을 만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아, 정말 지역에서도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 창작과 상영이 같은 도시에서 순환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는 것, 이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생각한다. 시네마엠엠 주관 신진작가 시사회 전남 목포에서 독립영화관을 운영한다는 것은 늘 ‘불안정함’과 함께 걷는 일이다. 비상설 영화관이기 때문에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하는 구조이기도 하다. 특히 2년 동안 전액 삭감되어 버린 지역 영화 예산은 절망감을 가져다준다. 독립영화관에 대한 지자체와 정치인들의 이해가 부족한 것도 문제다. 지역균형발전을 이야기하지만 지역 영화는 여전히 뒤로 밀려나 있다. 문화 활동을 하는 것보다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쓴다”라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창작자 지원이나 교육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이다. 지역에서 새롭게 도전하는 감독이나 학생들 의 열정은 크지만, 그들을 충분히 지원할 수 있는 제도나 구조 가 갖춰져 있지 않다는 한계를 계속 느끼게 된다. 결국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아지고, 그만큼 부담도 커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간의 활동을 지역에서 꾸준히 이어가고 있는 것 같다. 시네마엠엠 주관 글로컬 영화교육 포럼, 청소년 영화교육 현장 가장 기본적으로는 지속 가능한 지원 구조 가 필요하다. 지역에서 영화를 만들고 상영하는 일은 시장만으로는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에 정책과 예산이 꾸준히 뒷받침되어야 한다. 일회성 지원이 아니라, ‘올해도 가능하고 내년에도 가능하다’라는 예측 가능성이 생겨야 창작자들도 안심하고 작업을 이어갈 수 있다. 특히 독립영화관 운영비, 장·단편 제작 지원, 지역 영화제 운영비 등 지역 영화의 핵심 인프라에 대한 안정적인 예산 배정 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지역 영화가 살아남는 힘은 결국 관객 에게서 나온다. 관객이 많아서라기보다 ‘이 공간이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을 가진 관람객 한 명 한 명이 영화관의 생존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시네마엠엠은 월 만 원의 구독료를 내면 개봉하는 모든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운영된다. 모든 비용을 엠엠에서 부담하고 티켓을 발권하면서 독립영화를 언제든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관람 시스템으로 관객을 만나고 있고, 현재 회원은 160명 정도 된다. 지역 관객들이 독립영화를 선택지로 받아들이는 태도, 선호의 폭을 넓히려는 마음, 지역에서 만든 영화를 응원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활동가 들 역시 버티는 힘과 공동체성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한 사람의 열정만으로 유지되는 공간은 오래가기 어렵다. 일을 함께 나누고, 감정적으로 기댈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어야 한다.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고, 지역 문화 기반을 ‘함께 만든다’라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영화는 결국 사람이 지키는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관객 한 명, 활동가 한 명, 창작자 한 명이 이 생태계를 유지하는 결정적 존재다. 지역 영화를 바라볼 때 ‘이 작은 불씨가 사라지지 않도록 서로 조금씩 숨을 불어넣어주는 것.’ 그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느낀다. 해마다 8월이 되면 우리는 전국에서 모여드는 영화인과 관객을 만난다. 이 지면을 통해 만난 여러분들을 올해 8월 여름, 목포 시네마엠엠에서 만나고 싶다. * 현장 사진: 필자 제공 정성우(시네마엠엠 대표) l 목포에서 영화교육과 영화제를 만들어 가고, 가끔 영화도 만든다. 최근에 만든 극영화 < 너만 보이는 시간 >(2024)과 다큐멘터리 < 갈 수 없는 나라 >(2022), 그리고 웹드라마, 광고 등 다양한 작업들을 지역에서 만들어 간다.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때로는 기록영상의 맥락을 탐구하는 과정이 어떤 종류의 영화를 떠올리게 할 때가 있다. 주인공은 작은 물건이나 단서 하나에 호기심을 느껴 관련자들을 찾아다니며 탐문을 시작한다. 이렇게 영화가 시작하고 2시간 가량이 흐를 때까지는 건조하고 반복적인 장면들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우연한 계기로 지금까지의 모든 사소한 정보들 뒤에 있던 거대한 맥락이 폭발하듯이 드러난다. 엔드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에도 관객의 머릿속은 분주하다. 지금까지의 플롯들이 복기되고 재정의된 이후에야 비로소 영화는 결말을 맞이한다. 순차적으로는 설명되지 않고 작은 부분정보들이 서로를 설명하고 보완하여 전체의 윤곽을 이루는 구조의 이야기는 기록영상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이번에 소개할 이야기는 비슷한 주제를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세 개의 미군 기록영상에서 시작한다. #1. 불친절한 세 개의 영상 < 미국 NA II 기록영상컬렉션 (2) >에서 ‘제이드 민사처병원’ 필터를 체크하고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세 개의 영상이 뜬다. (편의상 앞으로 각 영상을 알파벳 부호로 지칭하겠다) ● <A> , DEDICATION OF X CORPS CIVILIAN HOSPITAL, KOREA; [ETC.] ● <B> , BUILDING OF NEW KOREAN HOSPITAL, HYUN-NI, KOREA; [ETC.] ● <C> , ARMED FORCES ASSISTANCE KOREA, IP SONG NI, SOUTH KOREA 여기에는 건설이라고 하기 민망한, 작은 1층 벽돌 건물의 건설에 관한 미군의 원조 관련 장면이 포함돼 있다. 병원(Hospital)이라기보다는 의원이나 진료소(dispensary)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할 듯하다. 영상의 제목, 그리고 해당 장면의 슬레이트 정보와 화면 속 표지판 등 문자 정보를 간추리면 1차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A> , 세 곳의 서로 다른 원조 현장이 촬영됐는데, 그 마지막 순서가 제이드 민사처병원(Jade Civilian Hospital)의 민간 이양식 광경이다. “미 제10군단과 UNCACK(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의 협조로 제4통신대대가 건립했다”라는 내용의 1953년 6월 3일자 준공표지판이 찍혔다. <B> , 1954년 3월 18일에(제목에 따르면) ‘현리에서 새 병원을 건설’하는 현장에서 제4통신대대장 모리스 중령이 한국인 병원장 ‘Dr. Kim’을 인터뷰하는 모습이 담겼다. 이 영상만으로는 어느 병원인지 알 수 없다. <C> , ‘입송리’의 AFAK(미군대한원조) 프로젝트 후원 현장 세 곳 [1] 을 담았다. 그중 세 번째 시퀀스가 시멘트를 발라 벽돌을 쌓고 있는 제이드 병원 건설 현장의 모습이다.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는 곳을 찍은 두 번째 시퀀스에는 <영상 B> 에서 제이드 병원 시퀀스에 등장했던 모리스 중령이 나온다. 세 영상의 화면과 파편 정보는 서로 같은 듯 달라서 뭔가 개운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촬영 소대는 카메라의 시선을 좁혀 ‘원조라는 행위와 원조의 유형’만을 담았고, 자신들이 공유하고 있는 맥락 속에서 당연한 정보들은 슬레이트에 기록하지 않았다. 이로써 누락된 전체적인 맥락은 이제 단서 수집과 추리의 몫이다. 일단, 순수하게 영상들의 쇼트를 비교하는 것만으로 이 세 영상이 같은 장소의 같은 병원 건물에 관한 것이라는 점은 알 수 있다. <A>와 <C>에서 보이는 ‘준공표지판’과 ‘병원팻말’은 같은 것이다. 그리고 <A>와 <B>에 나오는 건물 모습은 서로 다르지만, 이 모두가 담긴 <C>를 통해 <A>가 병원의 앞을, <B>가 병원의 뒤뜰을 촬영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안내팻말 (왼쪽: <A>, 오른쪽: <C>) 준공표지판 (왼쪽: <A>, 오른쪽: <C>) 천막의 위치에 의해 공사 장소가 병원의 뒤쪽임을 알 수 있음 (모두 <C>) 그러니까 1953년 6월 3일, 미 제10군단 민사처는 UNCACK(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과 협조하여 예하 제4통신대대를 통해 이 병원, ‘Jade Civilian Hospital’ 건물을 짓고 민간에 이양했다(<A>). 이듬해 3월, AFAK 프로젝트의 형태로 병원 뒤뜰에 공사 원조가 있었고(<C>), 그 공사 현장을 배경으로 제4통신대대장이 직접 병원장을 인터뷰하는 장면을 촬영했다(<B>). 마지막으로, 10군단 민사처가 관리 주체임을 명확히 밝힌 안내표지판(<A>, <C>)에 의해, 이 병원은 ‘민사처병원’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2. 정리됐다는 착각 이제 이 병원이 어디에 있었는지 추리하는 단계로 접어든다. <C>는 제목에서 ‘IPSONG-NI(입석리)’를 언급하고 있지만 이는 입석리국민학교 건설 현장에 대한 첫 시퀀스에만 해당하는 무성의한 작명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B>의 제목은 ‘HYUN-NI(현리)의 병원’이라고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라면 전쟁 중후반기 미 제10군단의 영향력 아래 있던 지역인 만큼 신빙성이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문건도 발견했다. OEC(유엔군사령부 경제조정관실)의 강원도 의료 시설 현황 보고서(이하 「OEC 보고서」라 칭하겠다)에는 ‘인제-제이드 병원(장로교 선교회)’이라는 항목 아래 제이드 병원이 ‘Sang Nam, Maechon, Naepyong and Kirin’에 있었다고 적혀 있다. 이로써 기린면에 있었다 는 증거를 잡았다. 이 이름이 붙은 병원이 여러 군데 있었던 이유는 ‘제이드’의 의미를 파악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제이드 병원을 이양받은 민간 조직이 장로교 선교회였다는 정보도 덤으로 확인된다. 하나 더, <B>의 인터뷰 장면에 등장했던 ‘Dr. Kim’이 누구인지도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미 육군 통신대 아카이브의 푸티지를 활용하여 제작됐던 미국 TV 시리즈 The Big Picture 의 한 에피소드, 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미군대한원조)에 이 푸티지가 실린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 [2] 여기서 장면에 덧씌워진 내레이션에 그의 본명이 나오는데, 미국인의 발음으로 ‘김방모’, ‘김봉모’와 유사하게 들릴 뿐 특정할 수 없다. 그러나 「OEC 보고서」에는 그의 이름이 ‘Dr. Kim Bong Mu, director, grad. from Nippon University, Japan(일본대를 졸업한 병원장 김봉무 박사)’라고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이제 확인해야 할 부분은 얼추 정리된 것 같다. (이렇게 끝나는 줄로만 알았다.) #3. 기록문서의 발견, 그리고 힘겨운 재구성 시간이 엄청나게 오래 걸리는 일이지만, 이런 컬렉션에서 최대한 정확한 맥락을 캐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National Archives의 원조사업 관련 문건에서 영상 속의 원조사업 관련 정보를 찾는 것이다. 특히 AFAK 프로젝트는 열람이 가능한 문서만 해도 3개 문서군에 흩어져 있는 수백 건 이상의, 어림잡아 50만 쪽이 넘는 엄청난 분량이다. OCR이 되어 있지 않은 문서 파일을 일일이 눈으로 확인하는 일은 매우 고된 일이었고, 시간이 무한정 주어지지도 않았으므로 최대한 찾을 수밖에 없었다. [3] 그래도 AFAK 프로젝트 보고서는 UNCACK 관련 문서에 비해 정보가 구체적이다. 그리고 식별된 장소나 건물명으로 찾는 것보다 그나마 조금 나은 경우는 영상에 AFAK 프로젝트 안내지, 그중에서도 프로젝트 번호가 찍힌 경우다. 다행히 <C>에는 프로젝트 번호 ‘9219’가 영상에 찍혔고, 이로부터 시작하여 제이드 민사처병원과 관련한 3건의 AFAK 프로젝트 보고 문건을 찾았다. 그리고 대혼란에 빠졌다. 모두 동일하게 장소가 ‘Chaun-ni’라고 적힌 것이다. AFAK 안내지(<C>)에 프로젝트 번호가 희미하게 적혀 있다. AFAK #9219 보고문서, National Archives RG 338, Entry A-1 255, Box 2197, p.126. AFAK #9221 보고문서, National Archives RG 338, Entry A-1 255, Box 2197, p.123. AFAK #9239 보고문서, National Archives RG 338, Entry A-1 255, Box 2197, p.118. (*이상, 각 보고문서의 첫 쪽 일부 모습임) 아무리 전에 그럴 듯한 결론이 나 있더라도, 이 증거는 반박할 수 없다. 돌이켜 보면 슬레이트 어디에도 장소 명이 구체적으로 적힌 곳은 없다. 오히려 National Archives의 관리용 제목이나 「OEC 보고서」에 ‘Inje-Jade’라는 표현이 나오는 이유에 대해 다른 추정을 해야 할 상황이다. AFAK 문서의 내용은 구체적이고 정확했다. “민간 이양식 때 병실 사진을 찍었으나 보고 시점(8월 13일, 14일)에 사용할 수 없어 추후 제출하겠다”라는 문구가 있어 <A>의 내용을 지칭하고 있다. <B>, <C>의 병원 뒷편에서 하던 공사는 증축 또는 구획변경을 통해 수술실과 의료용품 공간을 추가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료용품 공간에는 침구 보관 및 회의실 공간도 마련할 예정이었다. 이 병원에는 같은 시기에 다른 소규모 AFAK 프로젝트 두 건이 동시 진행 중이었다. 대략 1954년 2월 중순에 프로젝트 기획안을 제출, 승인받았으며 3월에 착공하여 7월에 완공됐다. 미 제45공병단이 일부 자재를 공급한 시기는 4월. <B>, <C>는 아직 자재도 오지 않은 공사 초기의 장면이다. 보고서의 제출자가 ‘제57통신지원중대’인 이유는4월 29일자로 제4통신대대로부터 이 후원 프로젝트를 이관받았기 때문이고, 이때 재고대장 등이 빠진 불완전한 상태로 서류가 넘어왔다는 메모도 있다. 이제 다시 따져봐야 한다. ‘Chaun-ni’는 어디일까? 강원도 지역에서 미군, 미국인이 이렇게 표기할 만한 곳은 두 군데로 추려졌다. ● 홍천군 내면 자운리 ● 홍천군 두촌면 자은리 홍천 일대의 기록에 언급되는 군 조직은 보통 미 제9군단이므로 10군단이 설립한 병원의 장소라고 생각하기가 더 어렵다. 그러다가 혹시라도 ‘인제군’과의 접점은 없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에 명분을 주는 사실을 발견했다. 내면은 원래 인제군에 속해 있다가 1954년 10월에 제정된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 [4] 의 부칙에 따라 홍천군으로 편입됐다. 본래 인제군은 강원도에서 가장 넓은 영역을 포괄하는 행정구역이었으므로 미군의 입장에서 그 인근은 대략 ‘인제’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고, 영상과 문서가 생산된 시점은 개편 전이었으므로 실제로도 그렇게 부르는 것이 맞았다. 내면 자운리가 10군단 관련 지역, 그리고 「OEC 보고서」에서 언급한 제이드 병원들의 분포 지역과 다소 떨어져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말이다. 원래 인제군이 아니었던 두촌면 자은리보다는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4. 마지막 반전, 드와이트 멀스배리 선교사의 흔적에 닿다 그런데 ‘제이드’는 무슨 의미로 쓰인 이름이었을까? 혹시 병원을 이양받아 운영했던 장로교 선교회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해서 관련 정보를 찾다가 드디어 ‘드와이트 멀스배리(Dwight R. Malsbary)’, 한국 활동명 ‘마두원’인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가 관심 범위에 들어왔다. 그는 1929년 숭실전문학교에 초청된 것을 계기로 한국 최초의 음악선교사로서 한국에 서양 음악을 보급하고 저명한 제자를 배출하는 등의 족적을 남겼고, 1940년에는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했던 인물이다. 해방 후에 다시 한국에 와서 교회, 신학교, 병원 등의 설립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이 정도의 삶을 살았지만 다른 내한 선교사들에 비해 그에 관한 기록은 매우 드물다. 같은 교단 내 교파 갈등으로 인해 주류 학계에서 소외된 것이 원인이라고들 한다. 이것이 그가 강원도 사역에 전념했던 이유로 거론되기도 한다. 그의 선교활동 자체에 대해 참고할 수 있는 논문은 거의 없고, 그의 삶을 다룬 서적은 있으나 고증에 충실한 연구서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의미에 방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참고할 수 있는 정보는 2025년 3월에 그를 주제로 열렸던 세미나 [5] 중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이종전 교수(전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두 분이 앞의 책과 다른 여러 문헌을 종합하고 견해를 더해 발표한 것을 촬영한 영상, 그리고 홍천 출신의 강정식 시인이 《홍천신문》에 기고한 여러 글이 사실상 전부이다. 이 소스들은 앞에 언급한 서적 등 참고 문헌에 오류가 있을 수 있거나, 기억에 의존한 구술에 의한 것이므로 약간의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다만, 멀스배리 선교사가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을 중심으로 사역활동을 했으며, ‘미군의 요청으로 제이드 병원 을 운영했다 [6] ’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가 일관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서로 내용과 견해의 차이는 다소 있지만 종합하면 이렇다. 6.25 전쟁 이후 멀스배리 선교사는 홍천군 두촌면을 거점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여 무려 26개에 달하는 교회를 세웠는데, 이 교회들은 44번 국도를 따라 속초까지 [7] 주변의 산골짜기에 분포돼 있었다. 그 이유는 당시 이 지역의 인구 대부분이 군사적 요충지를 따라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다. 44번 국도와 미 제10군단 및 멀스배리 선교사의 상관관계 (* 내면 자운리는 우하단에 떨어져 있음) 이런 맥락에서 ‘미 제10군단의 요청으로 군단이 운영하던 제이드 병원을 맡아 관리하게 됐다’라는 주장 [8] 도 개연성이 있다. 그와 관련됐던 병원의 위치에 대해서는 홍천군 홍천읍(지금의 홍천군청 서쪽 ‘명동보육원’ 터), 홍천군 두촌면 자은리, 속초의 세 군데가 언급되고 있으며, 두촌면 자은리의 제이드 병원을 제외한 나머지는 의사 부족 등의 문제로 먼저 문을 닫았다는 것에 대해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9] 실제로 미 제10군단 본부였던 인제군 관대리, 멀스배리가 관여했다고 알려진 병원들의 위치, 「OEC 보고서」가 언급하는 제이드 병원의 소재지 등을 보면 실제로 44번 국도에 인접하거나 부근에 있는 반면에, 인제군 내면 자운리는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다. 이 정도라면 ‘Chaun-ni’는 ‘두촌면의 자은리’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이게 뭐라고, 반전에 반전이 거듭된 ‘위치 논란’이 드디어 마무리됐다. 더 확실한 자료가 발견되면 좋겠지만, 현재까지의 자료전쟁의 승자는 처음에는 예상하지도 못했던 두촌면 자은리다. #5. 가장 나중에 밝혀진 ‘Jade’의 의미 그래도 마지막으로 어떻게든 확인하고 싶었던 ‘Jade’라는 명칭의 의미. 혹시라도 이에 따라 또 무슨 반전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계속 나를 괴롭혔다. 이것이 미군의 호출부호를 딴 것이라는 말이 있어서다. [10] 최소한 지금까지 경험한 전문(telegram)에서 그런 종류의 부호를 본 적은 없다. 부대라는 것은 이미 부대명 약어로 충분히 구분되고, 대외비를 송수신한다고 해도 어차피 전문에 적힌 APO(Army Post Office)만으로 각 시기의 부대 정보가 대략 노출된다. 그보다 1950년대라면 필요한 경우에 어떤 기계나 알고리듬 [11] 에 의해 전문 전체를 암호화하여 송신하던 시대 아니었나? 이를테면 그 유명한 독일의 에니그마(Enigma)라든지, 태평양전쟁기에 미군이 일본의 암호체계(또는 기계)에 붙인 코드네임인 퍼플, 레드, 제이드 같은 것들 말이다. (이때의 ‘제이드’는 지금의 맥락과 무관하므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애초에 호출부호라는 것은 항공 관제탑이나 선박 구분에 쓰이는 것 아닌가. 영상 <A>, <B>, <C>를 처음 본 순간부터 기약 없이 밤낮으로 찾아 헤매던 이 물음은 어느 순간에 허무하게 풀렸다. 답은 제이드 병원 원조 건설사업을 진행했던 제4통신대대의 부대사(史)문서 중에서 발견됐다. 이 컬렉션의 거의 모든 영상이 통신대 소속의 사진 및 영화 촬영 소대에 의해 촬영됐다고 해도, 통신대의 본 임무는 통신선로를 설치하여 통신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제4통신대대는 미 제10군단 본부가 전선을 따라 이동할 때마다 해당 지역, 이를테면 함흥-원산, 인천-김포 등의 영역 내에서 본부와 각 부대를 이어 구축했던 통신망의 다이어그램을 문서에 남겨 놓았다. 통신망 다이어그램은 각 노드, 즉 망이 모이고 분산되는 허브 역할을 하는 곳 또는 그곳의 통신장비에 대해 코드네임을 붙여 놓고 노드 사이를 선으로 연결해 놓은 그림이다. 본부가 어디로 옮겨 가든 제4통신대대의 통신망에서 늘 통신선이 집중되는 주 노드에는 ‘JADE’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그래서 추정컨대, ‘JADE’는 미 제10군단 본부에 설치되는 통신시설 또는 그 위치를 나타내는 식별부호일 것이다. 즉, ‘JADE’는 다른 노드에서 본부에 연락을 취할 때 호출명으로 사용됐을 수 있다. 다시 말해 통신 호출명 ‘제이드’는 그 자체로 군단을 대표하여 지칭하는 이름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제이드 병원’의 정체는 10군단 민사처가 설립, 운영하던 모든 병원이었다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통신 노드와의 관련성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증거로 영상 속의 AFAK 안내지를 다시 떠올려보면, 프로젝트 번호 아래 후원 부대가 좀 더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R&M OPN Co. 4th SIG BN CORPS” - 즉, 군단직속 제4통신대대 무선 및 교신(Radio & Message) 작전 중대. 에필로그. 짧은 기록영상 세 개에 이렇게 골몰할 일인가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하지만, 그 결과로 마치 필름 현상 과정을 거쳐 잠상(latent image)이 드러나듯이 보다 다층적이고 구체적인 정황을 읽을 수 있게 됐다. 1950년대 강원도에서는 두 가지 플롯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한 줄기는 이름도 몰랐던 먼 나라에 와서 사상 처음 경험하는 형태의 전쟁 한복판에 있던 미군, 그리고 그들이 전시 후방 안정화 및 전후 주둔지 스킨십 강화를 위해 여러 가지로 골몰했던 민사 활동들에 관한 것이다. 다른 한쪽에는 스스로를 ‘평양 마씨’라고 일컬을 정도로 사랑한 나라 한국에서 1929년부터 종교적 신념에 따라 선교를 계속하던 미국인 선교사의 사연이 있다. 미군과 선교사는 44번 국도를 따라 홍천에서 인제를 거쳐 속초까지 전쟁이든 선교든 각자의 일을 했다. 미 10군단은 서서히 본토로 귀환했고, 선교사는 외로운 사역을 계속하다가 1977년에 두촌면에서 홍천읍으로 가던 중 추돌사고로 사망했다. [12] 2025년, 한국의 한 아키비스트는 제이드 병원 영상을 보고 1950년대의 44번 국도 여기저기를 헤매며 오랫동안 가려졌던 사연에 접근한다. 흔한 영화 줄거리처럼 느껴지지 않은가? 이를 영화화한다면 제목은 <44번 국도에서 만나요> 정도가 좋을 것 같다. 흥행은 어렵겠지만. * <A>, <B>, <C>의 VOD와 각 장면에 대한 설명은 < 미국 NA II 기록영상컬렉션 (2) >에 있습니다. <참고문헌> 1. 이승구, 「말스베리 선교사와 김홍전 박사」, 초기 내한 선교사들에 대한 세미나7(2025. 3. 21, 한국개혁주의 연구소 주최, (주)유나이티드문화재단 후원) / Youtube 영상 2. 이종전, 「마두원의 해방 이후 사역에 관한 고찰」, 같은 세미나 / Youtube 영상 3. 강정식 시인, ⟪홍천신문⟫의 여러 기고글 4. “20. Kangwon-Do”, Unclassified Subject Files, ca. 1955 - 11/03/1961, RG 469, Entry P 321, Box 34, National Archives. p. 70. / 원문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사료철 코드: AUS014_81_00C0311) 5. “AFAK [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Project Completion Reports, FY 55: July 1954”, Project Files, 1954 - 1963, RG 338, Entry A-1 255, Box 2197, National Archives. p. 118, 123, 126. / 원문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사료철 코드: 사료계열AUS004_103) 6. “SGBN-4, History-4th Signal Battalion Corps, Nov. 1950”, Command Reports, 1949 - 1954, RG 407, Entry NM3 429, Box 4745, National Archives. p.13. / 원문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사료철 코드: 사료계열AUS037_01_10C1079) 7. “SGBN-4, History-4th Signal Battalion Corps, Aug. -Sep. 1950”, Command Reports, 1949 - 1954, RG 407, Entry NM3 429, Box 4745, National Archives. p.27. / 원문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사료철 코드: 사료계열AUS037_01_10C1077) *** [1] 두 번째 장소는 최소한의 정보도 식별되지 않는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중 어느 곳의 한 장면일 수도 있다. [2] 정영신(2021), 「미군의 대한원조 영상 속에서 재건되는 전후 주체: The Big Picture 시리즈의 ‘미군대한원조’와 ‘한국과 당신’을 중심으로」, 『역사연구』, 41, pp. 117-159. [3] 타이핑된 문서가 고품질의 OCR을 거치지 않은 상태라면 AI도 그리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자동 OCR 프로세싱의 결과를 토대로 AI가 신뢰할 만한 결과를 내놓기는 어렵다. 또한 PDF는 의외로 구조적인 포맷이 아니므로 현재 AX(AI 전환) 분야의 큰 화두 중 하나는 AI를 위한 기존 문서의 전처리 및 구조화 기술 수준을 높이는 문제이다. [4] 6.25 전쟁의 결과 경기도와 강원도의 38선 이북 일부 지역이 우리의 영토가 됐는데, 이를 ‘수복지구’라고 한다.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는 전후 수복지구를 감안한 행정구역의 조정 사항이 포함됐다. [5] <초기 내한 선교사들에 대한 세미나7>(2025. 3. 21), 한국개혁주의 연구소 주최, (주)유나이티드문화재단 후원 [6] 선교회가 병원을 운영하는 것은 일제강점기부터 계속된 미국 내한 선교사들의 ‘트라이앵글 선교’, 즉 선교지역에 기지를 세운 후 이를 거점으로 교회-학교-병원을 함께 키워 연계하는 선교 방법론에 따른 것이다. 멀스배리 선교사도 해방 후에 부산, 강원 등지에서 끊임없이 교회, 학교, 병원을 건립하는 등 철저히 한국 내 전통적인 선교전략에 입각하여 활동을 전개했다. [7] 이종전, 앞의 세미나; (글쓴이 추가) 발표 자료에 해당 교회들의 분포가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44번 국도는 6.25 전쟁 후반기 미군의 거점들을 포함하고 있고 지리적으로도 중요한 보급로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이를 따라 군집한 촌락이 주 선교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맞다. [8] 멀스배리 선교사는 이전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북한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했던 이력도 있고, 그의 강원도 선교 범위가 홍천과 인제 일대의 미 제10군단 작전 지역을 따라 형성됐으므로 지역 거주민들을 대변하여 미군의 각종 원조사업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다. - 이종전 교수(앞의 세미나)의 견해를 중심으로 정리함. [9] 면허 의료진의 부족 및 민간 이양 후의 재정문제로 병원이 사실상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폐쇄됐다는 등의 상황은 「OEC 보고서」에서도 동일하게 언급됐다. 다만, 여기서 언급된 ‘제이드 병원’의 소재지 중에는 위 세미나 및 회고글에서 말하는 병원 중 홍천면 병원이 없고 대신 내평, 상남 등 다른 곳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두촌면 자은리 병원, 범위를 넓히면 속초 병원까지만 제이드 병원이고 다른 곳은 제이드 병원과 무관한 선교사 병원이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10] 이승구, 앞의 세미나; 발표에 참고했던 서적 중 김광섭, 전민수 공저, 『마두원 선교사: 한국음악의 아버지, 강원도 선교의 아버지』(영창서원, 2019)가 출처인 듯하다. [11] 이 의미로 흔히 쓰이는 알고리즘(algorism)은 수학의 계산법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문제 해결의 흐름 및 절차를 뜻하는 경우에는 비록 알고리즘이 통용된다고 할지라도 원칙적으로 알고리듬(algorithm)이 맞는 표현이다. [12] 이승구, 앞의 세미나에서 앞의 책 인용.
1. “헤시피 거리를 좋아한다. 헤시피 거리를 좋아한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클레버 멘도사 필루는 주문처럼, 다짐처럼 같은 문장을 두 번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이 대사를 넣을까 말까 편집하면서 망설였다. 같은 말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은 강조해야 한다.” 친근하고도 나른한 목소리의 보이스 오버에 담긴 이 간명한 말, 좋아하는 건 강조해야 한다는 이 마음을 알 것 같다. < 아쿠아리우스 >(2016)와 < 바쿠라우 >(2019)의 감독 클레버 멘도사 필루의 두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 < 유령들의 초상 >은 오로지 좋아하는 걸 강조하려는 마음으로 만든 영화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관을 좋아하고, 그리고 브라질 북동부에 위치한 고향 헤시피를 좋아한다. 그 좋아하는 것을 한 편의 영화에 온전히 다 끌어 담기 위해, 계획이나 의도는 일단 접어두고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30년 전부터 이 영화를 준비했다. 지금 찍고 있는 게 무엇이 될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헤시피의 거리와 영화관을 카메라에 담았던 1990년대 초, 저널리즘을 공부하는 대학생이었던 클레버 멘도사 필루는 이제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브라질을 대표하는 거장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문득 지난 시절 틈틈이 기록해둔 개인적인 아카이브들을 들여다본 게 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바쿠라우>를 찍기 전인 2017년의 일이니 7년이 소요된 프로젝트다. 영화는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헤시피를 담은 신문기사와 사진, 영상 등 온갖 아카이브 자료 위에 여러 단편영화부터 <아쿠아리우스>까지의 영화 클립을 이음매 없이 끼어 넣고 그 자신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얹어 사적인 에세이 영화로 완성되었다. 여기에 35mm부터 슈퍼 8mm, 16mm, VHS, 베타캠 SP, 미니 DV, HD, 아이폰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에 걸친 카메라의 변천사가 담기고, 다양한 질감과 제 각각의 톤을 지닌 이미지 위에 두 세기에 걸친 도시와 극장의 변천사가 쓸쓸하게 또 애틋하게 담긴다. 이쯤에서 예비 관객들은 <유령들의 초상>이 대략 어떤 영화인지 알겠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엔 이르다. 클레버 멘도사 필루는 “연구방법론을 다루려는 게 아니다. 이건 사랑 이야기다”라고 말한다. 영화에서 역사학자인 어머니의 인터뷰 영상을 보고 한 말이지만 이 영화에 관한 코멘트이기도 하다. 그는 영화 후반부에 “영화는 멜로드라마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도 했다. 멜로드라마로 기우는 게 영화 매체 본연의 속성이라는 듯, <유령들의 초상>에는 이제 더 이상 여기 없는 것들이 안기는 아득한 그리움이 멜로의 기운으로 배어있다. 또 이런 장면도 있다. 1970년, 더 없이 화려했던 어느 극장의 개관식 장면 다음에 텅 비어버린 극장의 공중전화가 신경 곤두서는 쇳소리를 내며 오래도록 울려댄다. 아무도 받지 않는 전화. “인생의 많은 시간을 이 극장에서 보낸 탓에 감정적이고 혼란스러운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감독의 보이스 오버가 들리고,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불가능한 시공간을 연결한 탓에 멈칫하게 되지만, 이 기묘한 매치 컷의 의미는 단순명료하다. 이제 영화관은 그의 전화에 응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모두 기억하고 있다. 영화 포스터로 가득했던 거리, 극장 앞의 긴 줄, 매표소 티켓 기계에서 나던 딸깍대던 소리, 꽉 찬 객석이 뿜어내던 흥분과 열기, 극장 문을 나서는 즐거운 얼굴들. 여기서 클레버 멘도사 필루는 이제 더 이상 여기 없는 것들이 안기는 애상과 여전히 우리 안에 존재하는 환상 사이를 오가며 한 도시의 시공에 담긴 감정의 지도를 그려나간다.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이며, 물리적이면서도 영적인 탐험이 이제 시작된다. <유령들의 초상>은 자신을 길러준 이 도시와 극장에 바치는 클레버 멘도사 필루의 지극한 헌사이자 무엇보다 사랑 이야기다. 2. “행복한 결말은 없어”라고 노래하는 톰 제의 곡 ‘해피 엔드’가 영화에 흥겨운 바이브를 연신 뿜어대며 ‘1부’가 시작된다. <유령들의 초상>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세투바우 아파트’라는 제목이 달린 1부는 70년대에 헤시피의 해안가 마을로 이사를 와서 40년을 살았던 필루 감독의 집을 주 무대로 한다. 이혼한 어머니가 대출을 받아 산 아파트는 두 번의 공사를 거치면서 크게 바뀌었는데 그 집의 구석구석은 20여 년간 그곳을 스튜디오 삼아 만든 10여 편의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클레버 멘도사 필루는 초기 단편부터 < 네이버링 사운드 >(2013)와 <아쿠아리우스>에 이르는 영화 클립을 가족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숏들 사이에 과격하게 툭툭 끼어 넣었다. 그러자 가족들이 식사하고 아이들이 뛰어 놀던 거실은 발밑으로 피가 쏟아지고 권총에 한 남자의 뒤통수가 날아가는 공포영화의 무대가 된다. 한 공간에 담긴 수십 년의 시간을 더듬는 방식치고는 유별나게 특이하다. 이 편집은 연대기적이지도 선형적이지도 않다. 전적으로 사적이며 별나다. 그 탓에 관객을 따돌리려는 건가, 혼자 추억에 잠겨 자기도취적인 에세이를 쓰는 중인가 하는 의심이 피어오를락 하는 순간 여기 매 숏들이 미스터리한 얼룩들로 우리의 시선을 잡아채고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 여기엔 영(靈)적인 기운이 담겨 있다. 우선 감독이 오래전 거실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보자. 무언가 형체를 알 수 없는, 흐릿한 유령의 형상이 포착된 이 사진은 영화 제목 <유령들의 초상>을 직관적인 이미지로 구현하고 있다. 해명되지 않는, 해명할 수 없는 이 이미지보다 우리의 뇌리에 더 깊은 인상을 남기는 유령은 이웃집 개 니쿠일 것이다. 니쿠는 깨어있는 한 내내 짖어대는 통에 필루 감독의 전작들에 불가피하게 배경 사운드로 새겨지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한밤, 필루 감독은 니쿠의 짖는 소리에 잠에서 깬다. 어? 니쿠는 벌써 몇 년 전에 죽었는데. 알고 보니 TV 공중파에서 방영하는 그의 영화를 온 동네가 보고 있는 중이었다. 클레버 멘도사 필루의 영화에서 니쿠는 여진히 활기차게 짖어대고 지칠 줄 모르고 울어대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니쿠는 유령이 되었’고, 그 유령은 영화를 통해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2부 헤시피 시내의 영화관’에서 클레버 멘도사 필루는 마침내 집을 나서서 헤시피 거리를 쏘다니다 영화관을 찾아간다. 우울한 잿빛의 도시 헤시피, 과일 향과 오줌 냄새가 뒤섞인 거리를 그는 여전히 사랑한다. 인파로 북적대던 거리는 이제 텅 비었고, 13살부터 25살까지 그가 살다시피 한 영화관은 문을 닫은 지 오래다. 극장의 마지막을 기록했던 청년 클레버의 영상 속에서 우리는 영사기사 알렉산드르를 만나 2차 대전 당시 헤시피의 극장이 나치 프로파간다의 전초기지가 될 뻔한 이야기, 4개월간 상영된 < 대부 >에서 니노 로타의 음악이 지긋지긋해져서 상영 마지막 날 도망친 이야기, 정권의 검열 이야기를 듣는다. 이 영화의 유일한 인터뷰 씬으로 그를 향한 클레버 멘도사 필루의 마음이 온전히 전해지는 순간이다. 영사기사 알렉산드르씨도 유령이 되었다. 그는 그렇게 여기에 있다. ‘3부 신전과 성령들’은 오래전 교회의 자리에 지어올린 상 루이스 극장이 다시 복음주의 교회로 바뀌는 과정을 담은 장이다. 교회에서 극장으로, 극장이 다시 교회로 바뀌는 동안, 의미심장하게도(어쩌면 우연이겠지만) 영화와 종교는 무언가를 공유하게 되었다. 스크린과 의자가 그대로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스크린에 매혹된 관객의 표정과 기도하는 신도들의 얼굴에는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다. 믿음, 열광 그리고 사랑. 하지만 헤시피에서 극장과 교회는 공존하지 못한다. 클레버 멘도사 필루의 진단으로는, “극장이 죽고 교회가 부활했다.” 이제는 사라진, 흥분과 즐거움으로 들썩이던 극장 객석을 보며 “이토록 하나가 되는 공간이 헤시피에 또 있을까”라며 경탄 혹은 탄식하는 감독의 목소리가 긴 감정적 파장을 남긴다. 3. 다시 말하지만 <유령들의 초상>은 음울하고 무거운 영화가 아니다. 때때로 향수에 젖고 가슴 한편이 저릿해오는 순간도 있지만 영화는 대체로 경쾌하고 친근하고 별나면서 유머러스하다. 그리고 마지막에 영화 전체를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특별한 시퀀스가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재밌는 장면으로 꼽을 만한, 그리고 우리에게 좀 더 생각해보라고 요청해오는 듯한 그런 장면이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필루 감독은 지금 우버 택시를 타고 있다. 차에는 허브 앨퍼트의 트럼펫 연주곡 <라이즈 Rise>가 흐르고, 택시 기사와 필루 감독은 트럼펫을 연주하는 일과 영화를 만드는 일에 관해 소소한 대화를 나눈다. 운전석과 뒷좌석을 나눠 찍은 방식으로 보나 그들의 대화로 보나 분명 이 시퀀스는 배우를 기용하여 연출한 픽션 장면이다. 그 사실을 확증해주듯 택시 기사는 문득 자신의 초능력에 대해 털어놓는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능력’, 즉 사라지는 능력을 가졌다는 그의 고백은 곧장 증명되고, 필루 감독은 운전석은 비었지만 여전히 잘 굴러가는 택시 뒷좌석에서 옅은 미소를 짓는다. “거기 있는 거죠?” “네, 여기 있어요.” 클레버 멘도사 필루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작동하는 어떤 존재/비존재들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하더라도 투명인간 시퀀스는 왜 여기 있는가. 픽션으로 다큐멘터리를 매듭 짓는 클레버 멘도사 필루의 선택은 2부에서 “픽션 영화는 최고의 다큐멘터리야”라고 주인공 청년(아마도 감독의 페르소나)의 귀에 비밀처럼 속삭인 에이젠쉬테인의 대사와 정확히 접속된다. 단편 <에이젠쉬테인>에서 가져온 이 장면에 대해, 그리고 이 대사에 대해 필루 감독은 아무런 논평도 덧붙이지 않았지만, 픽션과 논픽션의 접속에 관해서라면 극영화는 물론 현대 다큐멘터리 제작에서도 유연하게 수용되는 편이니 덧붙일 말이 필요했을까 싶다. 그보다 더 의미심장한 것은 ‘보이지 않는, 그러나 존속하는’ 존재 혹은 비존재들과 관련한 대목일 것이다. <유령들의 초상>이라는 제목이 지시하는 바대로, 이 영화에는 유령들이 즐비하다. 여기서 유령의 모티프는 가시적인 유령의 이미지를 담은 심령사진으로 시작해서 이웃집 개 니쿠,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밤거리를 활보하는 남자(드라큘라), 영사기의 빛과 함께 사라진 영사기사 알렉산드르로 차츰 확장된다. 이들 ‘유령들의 초상’과 더불어 <유령들의 초상>은 보이지 않는 유령들도 담고 있다. 2부 끝자락에서 우리는 텅 빈 극장에서 승강기와 극장 문이 저절로 열리고 닫히는 걸 보았고, 인적 없이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를 들었다. 그는 유령들에 둘러싸인 공간에 살고 있다. 고향 헤시피의 거리와 극장에서 클레버 멘도사 필루가 하려던 것이 과거에 있었지만 현재에 사라진 것들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이라면, 본질적인 속성 상 영화는 언제나 그래왔던 게 아닐까. 모든 영화는 과거의 흔적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스크린으로 보는 모든 것은 그때 거기에 있었지만 지금 여기에 없는 것들이다. 과거에 존재했었지만 현재 여기 없는 것. 혹은 소멸되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것. 유령 혹은 시네마. 영화의 역사가 사자(死者)들의 발자취이듯, 개별 영화는 유령들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유령들의 초상>은 그 사실을 문득 일깨운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불멸화하는 클레버 멘도사 필루의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