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그라운드
- 감독
- 허욱
- 제작년도
- 2019
< 삼각의 함정 >(1974)은 이만희 감독이 자신의 작품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제작 당시 개봉하지 못했던 < 휴일 >(1968)과 같은 모더니즘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기도 했지만 이만희 감독의 장기는 장르 영화였다. 그를 1960년대의 대표적 감독 중 하나로 만든 < 다이알 112를 돌려라 >(1962)는 최무룡 과 문정숙 을 주연으로 내세워 만든 스릴러물이었고, 이만희 감독을 한국 영화 산업 내에 각인 시키는 계기가 생긴다. 이 영화는 1969년에 < 여섯 개의 그림자 >라는 작품으로 리메이크가 된다. 윤정희 , 신성일 , 남궁원 , 허장강 등 당대 최고의 스타시스템을 가동한 야심작이었고, 비평과 흥행 면에서도 성공을 거둔다. 두 작품 중 현존하는 것은 <여섯 개의 그림자>인데 한국영화의 전성기였던 60년대가 저물어 가는 시기에 만들어졌지만 장르영화를 이끌어 가는 완숙미를 엿보기에는 충분하다. 그리고 또 한 번의 리메이크를 시도한 작품이 <삼각의 함정>(1974)이다. 김기영 감독이 < 하녀 >(1960) 이후 < 화녀 >(1971), < 충녀 >(1972), < 화녀82 >(1982)로 자신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사실은 잘 알려진 편이다. 생전에 김기영 감독을 만났을 때 왜 이렇게 리메이크를 했는지 응당 물어볼 수밖에 없었던 질문에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제작자들이 원했고, 그게 돈이 되는 거였다는 식으로 답을 한 기억이 또렷하다. 1970년대의 한국영화는 유신시대의 등장과 함께 검열과 통제에 의한 자기 폐쇄성의 몰락을 걷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제작자들은 자신들이 속한 극장에서 상영할 해외영화 수입권을 얻기 위해 속성으로 한국영화를 제작하였고, 그 결과 속류와 아류가 판을 치는 시대가 열렸다. <삼각의 함정>도 이러한 시대성을 피해가기는 어려웠다. 이만희 감독의 연인이었던 문숙 을 포함하여 상국 역의 오지명 , 영일 역의 유장현 그리고 두 남자를 등쳐먹으려고 하는 건달 역의 춘호 역의 백일섭 은 당시에는 유명세와는 거리가 있었다. 영화의 장면들이 넘어가는 부분이나 연기를 보여주는 부분에서도 공을 들이기보다는 대략적으로 넘어갔다는 인상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70년대 이만희 영화 중 <삼각의 함정>을 고른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1970년대가 한 감독, 혹은 한 작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만희 감독은 같은 해에 < 들국화는 피었는데 >, < 태양을 닮은 소녀 >, < 청녀 >라는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의 말년이기도 했던 이 시기에 얼마나 빠르게 영화를 제작했는가를 숫자만으로도 짐작할 수가 있다. 그 중 <청녀>는 <하녀>나 <화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하지만 제목에서는 의식한 흔적이 보인다.) 앙드레 지드의 원작 <전원교향곡>을 한국의 섬으로 옮겨와 만든 일종의 문예영화였다. 순수한 영혼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원작 소설을 근간으로 섬을 돌며 사람들을 돌보는 의사와 한 소녀의 사연을 지고지순하게 보여준다. 1970년대는 이러한 시대였다. 한쪽에서는 문예영화라는 이름으로 작품성을 과잉되게(때로는 신파조로) 강조하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영화수입권을 따내기 위해 속성을 제작되는 영화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필자에게 제시된 <청녀>와 <삼각의 함정> 중 <삼각의 함정>을 고른 것은 이 작품에 이만희 감독의 특징이나 관심사가 더 들어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완성이 된 이만희 감독의 자기 복제는 출발점이 되는 <다이알 112를 돌려라>는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듯이 알프레드 히치콕의 <다이알 M을 돌려라>의 영향 아래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어떤 면에서 이식된 영화라고 할 수 있고, 이만희 감독 뿐만 아니라 1960년대에 장르적 탐구를 한 주요 감독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할리우드 혹은 일본 그리고 간헐적으로 유럽 영화를 어떻게 한국적인 이야기로 옮기는가 하는 것이 주요한 과제였다. 히치콕의 영화가 아내를 청부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운 남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듯이, 이만희가 만든 세 편의 영화는 한 여성을 둘러싸고 그녀의 돈을 갈취하려는 남성들의 욕망과 범죄가 이야기의 얼개를 이룬다. 반복된 욕망과 범죄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지숙은 밤중에 집으로 오던 중 건달 춘호에게 추행당할 위기에 처한다. 지나가던 영일이 이를 구해준다.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그런데, 이전에 자신에게 범죄를 저지르고 임신을 시킨 상국이 출옥을 하면서 지숙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지숙은 남편의 유산을 요구하는 상국을 기차에서 살해하고, 영일과 결혼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살인을 저지른 지숙의 행동은 더 큰 위험을 가져온다. 모든 상황은 상국과 영일 그리고 춘호가 벌인 음모였고, 영일은 그 과정을 목격했다며 협박을 가한다. 이어지는 춘호의 협박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상국이 돌아오면서 세 남자와 한 여자를 둘러싼 욕망의 드라마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서로가 물고 물리는 연쇄적인 파국과 그 안에 번뜩이는 인간의 욕망은 이만희 감독의 영화세계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1968년에 제작되었지만 오랫동안 창고에 잠들어 있다가 2005년에 발굴 및 공개가 된 <휴일>은 표면적으로 보거나 스타일상으로는 <삼각의 함정>과 완전히 다른 영화 같지만 본질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서로 상통한다. 한 여성의 임신에 대한 이야기, 친구의 돈을 훔쳐 도망치는 주인공 허욱의 이야기에 다뤄지는 인간의 탐욕과 집착 그리고 일요일이라는 하룻 동안의 이야기이지만 교회의 종소리가 들릴 때에도 이 세계에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허무의 인식에 이르기까지 이만희 감독의 영화는 모던한 영화에서든, 장르적 영화에서든, 걸작에서든, 장르의 답습에서든 반복적으로 곰씹는 세계였다. <휴일>의 주인공 허욱이 수술을 위해 훔친 돈으로 여자 친구에게 가지 않고 술집에서 놀아나는 기이한 장면은 비상식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비이성이 일상이 되어 버린 시대성을 건드리는 기이한 인간의 행적이었다. <삼각의 함정>에서도 상국의 집착과 광기 그리고 이러한 범죄에 동참했다가 지숙을 보호하려고 변모하는 영일의 모습은 악당들의 세계라기보다는 일상의 욕망에 휘둘리는 인간 군상에 가깝다. 그 가운데 폭력과 착취를 당하는 지숙이 기차 안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상국을 살해하는 장면은 최동훈 감독의 < 타짜 >(2006)를 미리 선취하면서 결혼이라는 새로운 욕망에 눈이 먼 인간의 이중성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짧은 기간 동안 5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 걸작과 범작을 오갔지만 이만희 감독이 항상 중심에 두었던 것은 욕망에 번뜩이는 인간의 변모였고, <삼각의 함정>에서도 서로가 뒤엉킨 욕망의 추격전을 살펴 볼 수가 있다. >> 삼각의 함정 고화질(HD) VOD 보러가기 <<
< 휴일 >의 주인공 허욱( 신성일 )은 몹쓸 인간이다. 돈도, 직업도 없는 남자가 여자를 임신시키고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내뱉는다. 아무 대책도 없는 남자임을 뻔히 아는 여자는 남자에게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묻거나 결혼에 대한 계획을 이야기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안다. 아이는 둘을 낳을지, 셋을 낳을지, 결혼식을 예배당에서 할지 어디서 할지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남자는 여자가 임신중절을 염두에 두자 그래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훈계부터 내놓지만 그 외에 아무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닫고 수술비를 마련하러 나선다. <휴일>은 허욱이 연인의 임신 소식을 듣고 그녀의 수술비를 마련하러 돌아다닌 하루를 다루고 있다. 허욱은 “난 언제나 거짓말을 했다”고 말한다. “난 차라리 바보”라고도 한다. 택시비도 없는 그가 택시를 타고 택시기사에게 담뱃값까지 덮어씌우는 장면은 그가 거짓말을 잘 하는 남자라는 진실을 보여준다. 커피 한잔 살 돈도 없으면서 길에서 만난 점쟁이에게 오늘의 운세를 보는 걸 보면 그가 바보인 것도 사실이다. 허욱은 그런 자신을 잘 안다. 그래서 그걸 자신의 핑계로 삼는다. 난 원래 그런 놈이니까, 라는 것이다. 허욱이 못난 남자인 것은 그가 겁쟁이의 면모를 보여줄 때 가장 도드라진다. 여자와 산부인과 병원을 찾아간 남자는 당장 임신중절 수술을 하는 것이 필요하고 수술 자체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여자를 혼자 두고 병원을 나온다.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다 낯선 여자를 만나 함께 술에 취한다. 심지어 육체적 관계를 맺기까지 한다. 휴일의 끝을 알리는 교회 종소리를 듣고서야 그는 병원을 찾는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여자가 죽어버린 후이다. <휴일>은 영화의 암울한 분위기 때문에 당대에 개봉을 못 했다. 지금 다시 봐도 <휴일>에는 내일의 희망을 꿈꿀만한 여지가 없다. 영화 초반부에 연인이 대화를 나누는 늦가을 남산의 풍경은 <휴일>이 감상적인 로맨스영화로 해석될 길을 열어놓지만 영화가 전개될수록 그런 기대는 무참히 짓밟힌다. 모래바람이 계속 불어대는 남산 공원의 메마른 나무 옆에 가녀린 여자가 커피 한잔 마실 돈이 없어 차가운 바람을 견디며 서 있다. 남자는 수술비를 마련하겠다고 여자 혼자 남산에 남겨둔 채 떠난다. 어떻게 보면 가난이 원죄일 수도 있다. 그들이 다방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도,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없는 이유도 수중에 돈이 없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돈만 있으면 그들의 시련이 해결될 것인가? 영화는 가난의 원인을 추적하거나 가난의 양상을 펼쳐 보이는 데 관심이 없다. <휴일>은 여기서 보통의 리얼리즘영화들과 다른 결을 보여준다. 가난이라는 조건 안에서 영화는 그저 한 남자의 자기 파괴적인 행보를 쫓는다. 허욱은 거짓말을 하고 허세를 부리며 돈을 훔치고 여자를 배신한 뒤 후회하고 자책한다. 모든 잘못은 이미 저질러졌고 돌이킬 수 없다는 절망감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휴일>의 정조를 완성한다. 이것을 ‘60년대의 비관’이라 부르건 ‘시대의 우울’이라 부르건 이 정조는 <휴일>의 독보적인 성취이다.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 이 영화에서 돋보이는 것은 이야기나 캐릭터가 아니라 무드이다. 지독히 낭만적인 무드에서 참으로 암울한 무드까지 <휴일>을 보는 경험은 어떤 무드에 흠뻑 젖어 드는 일이다. 오직 영화를 통해 시를 쓰는 대가들만이 이런 영화를 만든다. <휴일>은 이만희 감독이 그런 대가였음을 충분히 입증하고 남는다. 어떻게 보면 <휴일>은 시종 기다리는 사람과 그날 그곳에 뒤늦게 도착한 사람이라는 단순한 구도로 이뤄진 영화다. 영화는 다방 앞에서 기다리는 여자와 뒤늦게 도착해 “왜 안 들어가 있냐?”고 묻는 남자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남산을 향하고 남자가 돈을 구해올 동안 여자는 그곳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남자를 기다린다. 그들은 다시 병원에서 헤어진다. 여자는 병원에서 남자를 기다렸을 테지만 그를 다시 보지 못한다. 남자는 그 시간에 다른 여자와 술에 취해 있었다. 남자는 오직 연인이 죽은 뒤에야 그곳에 도착한다. 영화의 엔딩에서 남자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곳에,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시간에 서 있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머리부터 깎아야지”라는 중얼거림뿐 이다. 남자는 그를 기다리는 사람을 배반한 대가로 전차의 종점에서 비틀거리는 중이다. 불현듯 이곳이 이 남자가 맞이할 삶의 종점일 거란 생각이 든다.
1968 년 만들어져 검열 문제로 상영되지 못했다가 2005년 관객들에게 소개된 < 휴일 >은 일순간에 당대의 시네필을 사로잡았다. 주변으로 밀려난 청춘의 모습과 모던한 영화의 짜임새가 시간을 가로 질러 다가 왔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도시의 자연에 놓인 나무, 풀, 소품, 조형들은 인물과 불화한다. 휴일의 위안은 오지 않는다. 영화는 시네필적 현현의 순간이라고 부를 만한 시각적, 감정적 동요와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흙바람 날리는 공원에 서있는 무기력한 연인 그리고 그 프레임을 침범하는 나뭇가지들은 치유불가능한 듯 보이는 삶의 비극들을 슬그머니 주입한다. 영화 오프닝 ,기울어진 앵글, 사각으로 포착된 명동성당과 소나무가 실루엣으로 보인다. 이어 남자의 발걸음이 클로즈업된다. 보이스 오버가 들린다. ‘그 여자의 이름은 지연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일요일에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몇 개의 깃발이 펄럭대는 장충 체육관 외부에서 남자 허욱 ( 신성일 )이 안에서 들리는 관중들의 함성을 지나쳐간다. 이러한 사운드와 이미지의 디자인은 전체 영화의 톤을 응축 적으로 전달한다. < 휴일 >은 일요일 오전 10시 17분, 허욱이 택시를 공짜로 얻어 타는 것에서 시작해 , 전차 운행이 끝나는 시간 , 원효로 종점 무렵에서 끝난다. 이 하루가 못되는 시간, 우리는 허욱이 지연( 전지연 )과 남산에서 만나고, 그녀의 중절 수술비를 위해 친구의 돈을 훔치는 등의 사건들을 보게된다. 이 가난한 연인의 이야기 보다 이 영화를 전체적으로 조율하는 것은 어떠한 무드다. 무드는 관찰 가능한 심리적 상태이자 감정의 조합이다. 예의 사각 앵글과 프레임 중앙을 벗어난 인물의 배치 , 그 프레임을 틈입한 공원의 빈 나뭇가지들, 시멘트 빌딩, 애조 띈 음악의 반복은 이 무드를 오케스트레이션 하는 스타일로 다가온다. 가난에 몰린 하릴없는 청춘. 노동도 휴식도 가능하지 않은 휴일의 죽은 시간과 공간을 배회하는 아름다운 젊은 남녀가 처한 위기, 청춘의 빛나는 삶의 약동은 여기엔 없다. 우울이 지배한다. 1968년 이러한 우울은 반사회적이고 무기력한 것이라기보다는 소극적인 저항의 함의를 가질 수 있다. 박정희 시대의 개발동원체제, 군대식개발동원체제 하에서 노동과 생산, 동원에 부적합한 이러한 정조는 오히려 반국가적 범주에 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허욱이 머리를 깎고 군대에 가는 것으로 영화의 결말을 처리하면 통과시켜 주겠다고 한 검열당국의 지적은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의 정조를 잘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72년의 10월 유신을 몇 년 앞둔 3기 (1968-1972) 에 만들어져 이런 검열의 요구에 응하는 대신 상영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 < 휴일 >의 경우 이 우울 무드는 당시 수출 드라이브 사회, 1969년 신년사인 ‘싸우면서 건설하는 해’라는 사회적 조증을 거스르는 것이다. 수출 드라이브라는 경제적, 정치적 명령이 사회를 지배할 때 지식인 층에 속하는 개인과 집단의 심리적 드라이브는 죽음을 향한 드라이브 ( the death drive, todestrieb) 로 기울어져 가며 특히 청춘이 그러한 경사로의 하향선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현재 프린트가 남아있지 않는 < 다이알 112를 돌려라 > ,< 만추 >등은 당시 <영화세계>나 <주간한국>,<조선일보>등의 평을 보면 , 평단의 호감이 이만희 가 자아내는 무드에 집중하고 있다. <만추>에 대해 조선일보는 “ 66년도 수작. 짜릿한 시정과 함께 가슴 메는 인간의 고독, 뛰어난 영상과 ‘무드’의 66년도 수작”이라고 평했다. <휴일>은 개봉되지 않아 평을 확인할 수 없으나 이만희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 이 무드를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폭압이 전제하던 시절, 일요일이라는 노동, 생산, 동원의 시간체로부터 상대적으로 벗어난 단위의 시간, 휴일을 선택해 이만희의 무드와 스타일은 죽음의 드라이브를 수출의 드라이브와 오버랩 시킨다. 그 무심한 듯 보이는 포개짐에서 드러나는 것은 수출 드라이브 사회의 죽음에 이르는 비활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