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일, 시저!
- 감독
- 조엘 코엔, 에단 코엔
- 제작년도
- 2016
- 출연
- 스칼렛 요한슨, 채닝 테이텀, 조쉬 브롤린, 랄프 파인즈, 조지 클루니, 틸다 스윈튼, 조나 힐, 크랜시 브라운
올해의 테마를 정리한다면 어린이, 노인, 여성, 퀴어가 되나보다. 일부러 테마를 정리해서 영화를 고른 건 아닌데, 뽑다 보니 그렇게 됐다. 클래식 할리우드에 대한 내 페티시를 자극해 은근슬쩍 리스트에 오른 < 헤일, 시저! >를 제외한다면 리스트에 선정된 모든 영화들이 여기 어딘가에 서 있다. 이중 몇몇은 두 개 이상의 테마를 공유한다. < 캐롤 >과 < 아가씨 >는 여성중심인 동시에 퀴어물이다. < 우리들 >의 주인공들은 여성인 동시에 어린이다. < 어둠의 여인 >의 주인공은 성인 여성과 어린 소녀이다. < 45년 후 >와 < 다가오는 것들 >은 모두 여성의 노년을 다룬다. 어린이를 청소년으로 넉넉잡아 본다면 < 비밀은 없다 >는 저 테마 중 세 개를 커버한다. 이 테마를 연장해서 다른 영화들도 몇 편 더 언급했으면 좋겠다. 여성 + 퀴어 테마의 영화로는 얼마 전에 개봉한 < 연애담 >과 개봉을 기다리는 < 꿈의 제인 >을 뽑았으면 좋겠고, 노인에 대한 영화로 빠진 작품으로는 <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가 빠지면 아쉽다. < 우리들 >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로는 엉겁결에 정지우 의 최고 걸작이 된 < 4등 >이 있다. 이들이 리스트에 오른 영화보다 덜 마음에 든다거나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이번 리스트를 만들 때는 그냥 저 영화들을 넣고 싶었고 여기에 완벽한 줄 세우기가 개입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나는 <연애담>을 < 아가씨 >보다 더 좋아한다고 할 수 있고 <아가씨>에 대한 내 입장은 거의 매일, 심지어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휙휙 바뀌는 편이다. 하지만 적어도 올해는 내가 <아가씨>에 대해 생각한 시간이 엄청나게 많았음은 부인할 수 없다. 올해는 한국영화를 조금 넉넉하게 뽑았다. 해외영화와 한국영화를 반반씩 뽑아도 되었을 것 같다. 이유가 무엇이건 2016년은 한국영화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분노하고 열광할 시간이 많았다. 이들 중 몇 편은 아쉽게도 그 가치에 맞는 관객들을 끌어들이지 못했다. 오늘 내가 고른 영화는 이경미 의 < 비밀은 없다 >이다. 흥행을 생각해보면 이 영화가 가장 아쉽다. 거의 수정처럼 투명하고 보편적인 < 우리들 >이나 감독과 원작자의 명성을 입고 해외에서 호평세례를 받고 있는 < 아가씨 >와는 달리, 이 영화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관객은 한국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어처구니없는 비열함에 대한 지식과 분노가 있고, 사투리와 억양을 구별하는 귀를 구별할 수 있는 한국어 사용자. 사전지식 없이 자막으로 보는 외국 관객들이 이 영화의 뉘앙스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반대로 본다면 21세기 초의 한국사회를 보여주기 위한 영화로 <비밀은 없다>만큼 좋은 작품은 없다. 다른 영화들이 이 나라의 표면만을 보여준다면 이 영화는 산 채로 해부해 보인다. 설정을 보자. 텔레비전 앵커 출신인 종찬은 고향인 경상북도 대산에서 국회의원 선거 중이다. 원래 여당 텃밭이지만 이전 여당 국회의원이었던 무소속 후보 때문에 경쟁이 만만치 않다. 그런데 선거 유세 첫날, 중학생인 딸 민진이 사라져버린다. 이 영화에 대한 사전정보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이런 정보를 준다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야기와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한국 영화계는 정치판을 무대로 한 스릴러 영화가 모자란 편이 아니다. 심지어 이런 내용을 전에 다른 영화에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 비밀은 없다 >의 도입부는 아주 좋지만 전형적인 한국 스릴러가 될 수 있는 재료를 다 갖추고 있다. 주인공을 종찬으로 만들면 영화는 당연히 그 길을 갈 것이다. 심지어 그는 그리스 비극에나 나올 법한 처절한 아이러니의 희생양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종찬을 주인공으로 만들지 않는다. 배우에서부터 스토리에 이르기까지 온갖 준비가 되어 있는데도 그렇게 안 한다. 제작자이고 공동 각본가인 박찬욱은 이 캐릭터의 분량이 줄어든 걸 아쉬워했는데, 내 생각엔 이 분량이 딱 맞다. 종찬이 근사한 상황에 빠진 훌륭한 캐릭터라는 사실은 여전하지만 < 비밀은 없다 >의 장점은 그의 분량과는 상관이 없다. 오히려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은 상식적으로 보았을 때 주인공이어야 마땅한 이 인물을 당연하다는 듯 조연으로 밀어버리는 무심함에 있다. 대신 영화는 주인공 자리를 종찬의 아내 연홍에게 준다. 이 사람이 주인공임을 선포하는 오프닝의 클로즈업을 제외하면 사실 초반에서 연홍은 그렇게 눈에 뜨이는 존재는 아니다. 남편의 대업을 위해 온몸을 바치는 예쁘장한 30대 여성. 하지만 딸이 사라지고 어쩔 수 없이 혼자 탐정 일을 시작하면서 이 정상적이고 평범한 가면에 균열이 생긴다. 그리고 영화가 결말을 향해 달려갈수록 이 균열은 점점 커지면서 연홍의 얼굴을 떠나 연홍이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였던 세계 전체로 퍼져간다. 연홍의 수사과정은 하드보일드 소설과 필름 누아르의 영역에 있다. 퍼즐 추리물과 하드보일드 물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을 설명하는 그럴싸한 이미지가 있다. 퍼즐 추리소설이 파편화된 정보들을 모아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해가는 과정을 그린다면 하드보일드 물은 어둡고 좁은 미로 속에서 망치로 벽을 깨부수며 목적지까지 길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랄까. 개인적으로는 로스 맥도널드의 60년대 이후 소설과 이 영화를 비교하고 싶다. 거대한 비리와 소소한 가족의 비밀이 얽혀 뜻밖의 미로를 완성하는 그 과정이 많이 닮았다. 단지 < 비밀은 없다 >에는 루 아처가 없다. 지도를 완성하는 역할은 실종된 딸의 어머니에게 넘어간다. 이제 이 모든 것은 개인적이다. 그리고 연홍이 미로를 찾아가는 과정은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우리’ 안에서 자신이 늘 타자였음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만약 공식대로 종찬이 주인공이었다면 그가 몰락하는 과정 속에서도 그를 만든 남성 중심적인 정치판의 세계는 그대로 유지되고 그의 몰락은 흔한 일화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이고 호남 출신이고 지금까지 위태롭게 ‘정치가의 아내’의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성인 여성에겐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정신적인 성숙 따위엔 단 한 번도 도달한 적 없는 이 미숙한 영혼은 중2병 아이들에 걸맞은 파괴력으로 그 주변의 세계를 박살 내버린다. 이런 한국 영화를 전에 몇 번이나 보았는가. 그렇다고 < 비밀은 없다 >가 남자들에게 희생된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냐면 사실은 정반대이다. 민진의 실종으로 시작되는 영화 속 드라마의 대부분은 여자들에 의해 저질러졌고 여자들 때문에 일어났다. 여자들이 가만히 있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다. 물론 가장 먼저 잘못한 것이 누구냐를 따진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이 영화는 거기에 그렇게 신경 쓰는 편이 아니다. 그리고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페미니스트의 모범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아니며 자신을 그렇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이 영화에 나오는 여자들의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이유가 무엇이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 더 덧붙인다면 주변 여자들과의 관계가 극단적으로 격렬하다는 것도.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남자들의 존재감은 이상할 정도로 흐릿하다. 심지어 거의 궁중 사극처럼 남자 한 명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설정일 수밖에 없는데도 그렇다.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민진의 마지막 대사는 그 남자의 마지막 존재감마저도 날려버린다. 이 모든 것은 여자들의 사정이다. < 비밀은 없다 >의 파괴력도 여기에 있다. 앞에서 종찬이 주인공이었고 그의 몰락이 이야기의 중심이었다면 세계는 바뀌는 게 없다고 말했다. 그건 그의 몰락이 그 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큰 의미가 없고 그의 자리는 언제나 비슷비슷한 남자들이 채울 것이기 때문이다. 균형의 측면에서 보면 달라지는 게 없다. 하지만 <비밀은 없다>의 세계를 뒤흔드는 것은 모두 (정신적으로 조금씩 미숙한) 여자들이고 청소년들이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정치하는 중장년 남자들의 세계관과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다. 이들은 여자와 아이들의 자리에 안주하지도 않는다. 따귀를 한 대 맞으면 세 대 받아치고 친구에게 해를 끼치면 차로 세 번 밀어버린다. 그렇다. 이 영화의 청소년 주인공 중 한 명은 심지어 운전을 한다. 지금까지 사회가 허용하지 않은 힘을 가지고 그 사회에 어떤 미련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무심하게 세계를 때려 부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정도면 거의 묵시록적인 영화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기존 사회에 대해 어떤 기대도 아쉬움도 없는 관객들에게 이 영화의 묵시론적 비전은 즐겁기 그지없다.
< 헤일, 시저! Hail, Caesar! > 조엘 코엔, 에단 코엔 감독 | 조시 브롤린, 조지 클루니, 엘든 이렌리치, 랄프 파인즈, 요나 힐, 스칼렛 요한슨, 프랜시스 맥도먼드, 틸다 스윈튼, 채닝 테이텀 이 영화를 기대하는 모든 이유가 ‘코엔 형제의 신작’이라는 네 마디에 다 들어 있다. 코엔 형제의 영화는 언제나 장르의 관습을 아무렇지 않게 뒤틀며 우리의 기대를 보기 좋게 빗겨난다. 그 예상치 못한 길의 끝에는 우리네 삶의 소소한 진실이 자리 잡고 있다. < 헤일, 시저! >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950년대 할리우드,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든 대작 영화의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주연배우 베어드(조지 클루니)가 사라진다. 이에 할리우드의 해결사 에디(조시 브롤린)가 그를 찾아 나선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코엔 형제의 영화에서 주인공의 진실 찾기는 늘 보잘것없는 답을 구하는 데서 끝난다는 사실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요지경 같거나 허무한 풍경 그 자체다. 그렇다면 <헤일, 시저!>가 그리는 그 풍경은 1950년대 할리우드 황금기의 찬란했던 모습일 테다. 과연 코엔 형제가 지금의 스타 배우들의 몸짓과 표정과 목소리를 통해 바라본 할리우드 황금기는 어떤 시대일까. < 워 머신 War Machine > 데이비드 미코드 감독 | 브래드 피트, 벤 킹슬리, 에모리 코헨, 토퍼 그레이스 < 트리 오브 라이프 >(2011) < 머니볼 >(2011) < 노예 12년 >(2013) < 셀마 >(2014) < 빅쇼트 >(2015)로 확실해진 사실 하나. 최근 할리우드에서 가장 실험적이며, 완성도 높고, 문제의식 가득하며, 대담한 영화를 만드는 제작사는 바로 플랜B라는 사실이다. 맞다. 브래드 피트가 소유한 바로 그 영화 제작사다. < 워 머신 >은 플랜B가 2016년에 선보이는 코미디 전쟁 영화다. 미국 저널리스트 마이클 헤이스팅스가, 전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인 스탠리 맥크리스털의 이야기를 쓴 동명 논픽션(2012)이 원작이다. 맥크리스털은 2010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오바마 대통령을 비난한 것이 문제가 돼 사령관직을 사직했다. 플랜B는 이 영화에서 맥크리스털(브래드 피트)이란 인물을 통해 미국의 대테러 전쟁을 얼마나 신랄하고 기발하게 풍자할까. 더욱이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메가폰을 잡은 이는 호주의 기대주 데이비드 미코드 감독이다. 최근작 < 더 로버 >(2014)는 실망스러웠지만, 그의 첫 장편 < 애니멀 킹덤 >(2010)이 안겨줬던 충격을 생생히 기억한다. 플랜B가 선택한 미코드 감독의 연출력을 한 번 더 믿기로 한다. < 곡성 > 나홍진 감독 | 곽도원 , 황정민 , 천우희 첫 장편 연출작 < 추격자 >(2008)로 강렬하게 증명했듯, 나홍진 감독은 한국영화 특유의 사실성을 극대화함으로써 장르의 박진감을 증폭하는 전략을 쓴다. 그의 두 번째 장편 < 황해 >(2010)는 그 실험이 더 극한으로 치달았던 작품이다. 연변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구남( 하정우 )의 수난기는 사실적이다 못해 극단적이었고, 대형 트럭이 맞부딪치고 나뒹구는 액션 장면은 기존 한국영화 속 자동차 액션의 규모와 스펙터클을 뛰어넘겠다는 야심이 엿보였다. 그 욕심이 과했던 걸까. 극단적 사실성과 장르적 쾌감 모두 배가하려는 <황해>의 시도는 그 둘의 불균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과연 나홍진 감독은 <황해>의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 답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바로 < 곡성 >이다.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기이한 소문과 사건을 그리는 미스터리 영화라는 것밖에, 지금으로서는 알려진 게 별로 없다. 이 지독한 감독의 절치부심이 어떤 작품을 낳았을지, 나홍진 감독의 세 번째 실험의 결과가 궁금하다. < 단지 세상의 끝 Juste la fin du monde > 자비에 돌란 감독 | 가스파르 울리엘, 나탈리 베이, 마리옹 꼬띠아르, 레아 세이두, 뱅상 카셀 자비에 돌란이란 이름이 그저 ‘젊고 잘생기고 재능 있는 인물’에 열광하는 힙스터들의 전유물이 아님을, 돌란 감독은 < 마미 >(2014)를 통해 똑똑히 증명해 보였다. <마미>에서 보듯 그의 영화에는 흡사 뮤직 비디오 같은, 젊고 감각적인 영상이 있는가 하면, 낡고 나이 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순간이 있다. 한눈에 세상을 뒤흔드는 사랑에 빠지는 순수가 있는가 하면, 그것이 영원하지는 않다고 말하는 애늙은이 같은 면이 있다. 매혹의 뒤편에 공포와 슬픔을 그리고, 희망의 뒷면에 절망을 새긴다. 돌란은 한마디로 똑 떨어지는 단순한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단지 세상의 끝>은 만드는 영화마다 자신의 세계를 한 발씩 넓혀온 돌란이 <마미> 이후 선보이는 신작이다. 12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가족들에게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작가 루이스(가스파리 울리엘)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 안에 돌란의 더 넓은 우주가 담겨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촬영현장 < 레스터 버티컬 Rester Vertical > 알랭 기로디 감독 | 크리스티앙 발레트, 인디아 헤어, 로르 칼라미 2013년 한 영화제에서 알랭 기로디 감독의 < 호수의 이방인 >을 봤을 때를 기억한다. 남성 동성애자들이 노골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호숫가에서 벌어진 살인에 얽힌 진실을 찾아가는 이 영화는, 그 무엇도 거리낄 것 없는 대담한 표현과, 한 순간 영화의 분위기를 뒤흔드는 강렬한 연출로 알랭 기로디란 이름을 관객의 뇌리에 박아 넣었다. <호수의 이방인>이 등급 심의 문제로 여전히 국내 개봉을 못하고 있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기로디 감독은 그동안 벌써 다음 영화의 촬영을 끝냈는데 말이다. 그의 신작이 바로 < 레스터 버티컬 >이다. 그는 이 영화의 줄거리를 비밀에 부치며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의 심장 깊숙한 곳에서 피어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집에 가까이 가는 긴 여정에서 믿기 어려운 것을 믿게 되는 광경을 그리고자 했다.” 배짱 넘치는 그의 신작을 기대하게 만들기 충분한 말이다. 올해 영화제에서 볼 수 있기를 첫손에 꼽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