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의 수염
- 감독
- 이성구
- 제작년도
- 1968
- 출연
- 신성일, 윤정희, 김승호, 김성옥, 김동원, 김신재, 곽규석, 박옥초, 전창근, 한은진, 정민, 정애란, 문오장, 여운계, 박기택, 유하나, 조덕성, 임해림, 임성포, 권일정, 윤신옥, 황인철, 백일섭, 이일웅, 최창호, 송창수, 공시훈, 이영호, 박철, 손전, 장현호, 김세라, 김웅, 고설봉
한국영화의 못다 한 이야기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도시 공간'에서 계속되기도 합니다. 조금의 시차는 있지만, 카메라가 남긴 이미지와 함께 그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이 글을 접하는 누구나 한 번쯤은, 일상의 답답함과 울적함을 주체할 수 없어서 기차를 타거나 마실을 나가는 것으로 어떻게든 해 보고자 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그러한 일상에서 비일상으로의 탈출이 본질적인 해답은 되지 못하곤 한다.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훌쩍 떠나간다 해도 완전히 야반도주라도 하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머지않아 반드시 본래의 거처로 돌아와야 하며,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일상과 마주해야만 한다. 바로 귀로(歸路)에 서야 하는 것이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 < 귀로 >(1967)는 바로 이런 현대인의 고뇌를 서울과 인천이라는 두 도시 간의 이동을 통해 명징하게 드러낸 수작이다. 지금까지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 연재에서는 당대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 1960~80년대의 여러 한국영화를 돌아보았지만, <귀로>와 같이 주인공의 심경과 처한 상황이 두 도시 간의 반복적인 이동(통근과 통학이라는 ‘일상’이 아닌)을 통해 비유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은 드물었다. 이미 많은 비평에서 <귀로>를 ‘멜로드라마 최고의 걸작’ 혹은 ‘세월의 흐름을 타지 않는 세련된 구도’ 등으로 호평하고 있는 만큼, 본 연재에서는 본 작품의 또 하나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공간적 배경에 대해 주목해 보고자 한다. 주인공 지연( 문정숙 )은 한국전쟁의 상이군인으로, 하반신 마비로 인해 성불구자가 된 남편 최동우( 김진규 )와 14년째 그 어떤 것도 만족되지 않으며 족쇄와 같은 결혼 생활을 인천의 어느 양옥집에서 이어 나가고 있다. 지연에게 있어서 족쇄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는 남편의 신문 연재소설 원고를 서울 서소문의 신문사에게 전달하러 가는 시간뿐이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이러한 지연의 인천(지연의 집)-경인선 열차 3등 칸-서울역-서소문(신문사 소재지)을 오고 가는 이동 동선을 반복적으로 비춘다. 집을 떠나 인천역에서 경인선 디젤동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서 서소문으로 향했다가, 잠시 남산 중턱에서 시내의 경치를 내려다본 후 다시 서울역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열차에 올라타는 행적의 시퀀스를 되풀이해 목도하다 보면, 마치 지연의 일탈을 몰래 지켜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카메라는 1967년의 서울-인천 간의 이동을 세련되게 잡아낸다. 지연의 궤적을 뒤쫓아가며, 주목할 만한 공간적 배경을 짚어보도록 하자. 경인선 열차 지연은 서울에 원고를 전달하러 오고 갈 때마다 항상 경인선 열차, 3등 칸을 이용한다. 이 시기 경인선은 복선화가 완료되어(1965년), 시간당 1편의 열차가 운행되었으며 차내 모습은 극 중에서도 비치듯이 긴 의자에 손잡이가 달린 사실상 지금의 수도권 전철과 유사한 분위기를 띠었다. 지연은 열차를 타는 본인의 심경을 딱 한 번 대사로 읊는데, “지나가는 기차를 보면 시원스러워서 타고 싶은데 막상 타고 나면 답답해요(36:52경)”가 바로 그것이다. 본인을 옥죄는 가정에서 벗어나 서울행 기차를 타지만, 그곳조차도 완전한 도피가 되지는 못하는 상징으로서 경인선의 디젤동차 열차가 등장한 것이다. 인천역에서 서울역으로 향하는 경인선 디젤동차의 내부 모습 경인선 열차를 타는 이유를 강 기자에게 털어놓는 지연 서울역과 인천역 인천역은 지연에게 있어서 족쇄와 같은 일상을 상징하는 공간일 것이다. 반면에 서울역은 그러한 일상에서 조금이나마 물리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관문이자, 동시에 그마저도 남편의 원고를 전달해야 한다는 일상의 연장선상이라는 점에서 지연에게 경인선 열차와 유사한 공간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작중에서 서울역과 그 앞 지하도는 총 네 차례 등장하는데, 처음 두 번은 지연 혼자서, 세 번째는 지연에게 한눈에 반해버린 강 기자( 김정철 )와 함께, 그리고 네 번째는 강 기자 혼자서 지하도의 계단을 오르내린다. 자연스럽게 지하도가 지연의 원치 않았던, 하지만 거스를 수 없었던 일탈의 상징적 공간으로서 기능하는 셈이다. 나아가 서울역의 1번 플랫폼 또한, 지하도와 유사하게 지연의 일탈과 포기(혹은 체념)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으로서 비친다. 서울역 1번 플랫폼에 도착한 경인선 열차. 현재 이 플랫폼에서는 천안행 1호선 급행열차가 발착한다. 서울역 지하도를 올라가는 지연의 뒷모습. 일부러 사선 구도를 취함으로써 60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어색함이 전혀 없다. 서소문 건널목과 서소문 고가차도 서울 도심 유일의 기차 건널목인 서소문 건널목을 이렇게까지 중요한 공간적 배경으로 담아낸 영화는 아마 본 작품이 유일할 것이다. 나아가 당시에 갓 준공되었던 서소문 고가차도(당시엔 ‘서소문 육교’라고도 불렸다)도 함께 등장함으로써 단절(건널목)과 소통(고가차도), 혹은 고즈넉한 인천의 집과는 다른 복잡한 근대도시 서울을 효율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서소문 건널목은 작중에서 지하도와 마찬가지로 총 네 차례 등장한다. 처음 두 차례는 서울역과 서소문의 신문사를 오고 가는 지연 혼자서, 세 번째는 지연을 무작정 뒤쫓는 강 기자의 갈팡질팡하는 시선(1:01:01경)으로, 네 번째는 다시 지연 혼자서 건널목 앞에 멈춰 서는 시퀀스에서 서소문 건널목은 등장인물들의 막막한 심정을 대변하듯이, 마치 단절을 의도한 것 마냥 육중한 기관차가 스크린을 가로지른다. 지연을 무작정 뒤쫓는 강 기자의 시선에 서소문 육교와 사방으로 향하는 도로 안내판이 담긴다. 아마도 지연에게 마음을 빼앗겨 갈팡질팡하는 강 기자의 마음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인천의 집까지 쫓아온 강 기자 앞에서 외마디 비명을 내지른 직후, 지연은 서소문 건널목 앞에서 육중한 화물열차에 길이 가로막힌다. 참고로, 작중에서 딱 한 번, 지연이 서소문 건널목이 아니라 그 위를 가로지르는 서소문 고가차도를 도보로 건너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예나 지금이나 서소문 고가차도는 자동차 전용 도로로서, 보행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이와 같은 서소문 고가차도 보행 장면은 <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한형모, 1966)에서도 등장한 바 있는데, <귀로>에서의 해당 씬은 <워커힐에서 만납시다>의 그것과 거의 유사한 위치에서 촬영되었다. 물론 맥락과 의도는 두 영화가 완전히 다르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1년 간격으로 똑같은 씬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여러 의미를 고려하게 만든다. <워커힐에서 만납시다>에 등장한 서소문 고가차도 보행 씬 본 작품에서 유일하게 서소문 건널목이 아닌 고가차도를 건너가는 시퀀스. 오른쪽 뒤편으로 중앙일보 사옥, 대한빌딩 등이 관찰된다. <귀로>는 대사량이 그렇게 많은 영화가 아니다. 물론 주인공 지연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외마디 비명처럼 내뱉는 중요한 대사가 삽입되어 있지만, 러닝타임의 상당 시간은 지연의 뒷모습(어떤 비평에서는 문정숙을 ‘뒷모습이 아름다운 배우’라 칭하기도 했다)을 비추며 한 마디의 대사도 없이, 음악과 공간적 배경만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시간으로 채워져 있다. 이러한 연출 덕에, 처한 상황이 지연과는 다소 다를지라도 1967년 공개 당시는 물론이요, 거의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귀로>를 보며 지연의 심경에 공감하거나 나아가 감정 이입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귀로>를 보고 난 후, 시청 앞과 서소문 일대를 거닐며, 철거 공사 중인 서소문 고가를 올려다보고 그대로 서울역으로 향해서, 경인선 열차에 올라타 인천역에 내려보는 일종의 <귀로> 성지순례 체험을 해 보는 것 또한, 본 작품을 온전히 즐기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다. 그만큼 현대인에게 주는 울림이 큰 작품이니 말이다. 김영준(도쿄대학 특임연구원) ㅣ일본 도쿄대학에서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계획사로 박사학위 취득 후, 연구원으로 일하며 '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라는 필명으로 도시 경관을 기록해오고 있다. 영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배경 속 도시 공간을 읽어내는 법을 계속해서 탐구한다. 『영화와 서울: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2022), 『새시각 #01 : 대전엑스포'93』(2021) 집필(공저).
이와사키 아키라 환영회 중 문예봉(좌)과 한은진(우)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영화의 발흥 이래 재현의 사실성에 대한 추구는 극장가의 화두로 떠올랐다. 카메라가 구현해 낸 재현의 정밀성은 실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영화에 익숙해진 관객들이 늘어나면서 선행매체인 연극 역시 사실적 환영을 만들어내는 작업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연극과 영화가 하나의 공간을 함께 점유하며 관객을 나눠 가졌던 식민지 조선의 극장 속에서 그 영향관계는 훨씬 긴밀했을 것이다. 대체 불가능한 지위를 획득한 ‘여배우’는 재현의 사실성에 대한 식민지 조선 극장문화의 지향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존재였다. 재래의 관습이었던 여형배우는 여배우의 등장과 함께 전근대적 유습으로 낙인찍혔다. 이것은 배우와 배역의 생물학적 동일성이 여성성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데 있어 근원적인 조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생겨난 변화였다. 무대와 스크린의 주역으로 급부상한 여배우의 일거수일투족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공공의 시선 속에 노출된 육체의 감각적 즉물성이야말로 여배우의 지위를 굳건한 지반 위에 올려놓은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든 시각적 쾌락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었으며, 여배우들의 육체는 관객의 관음증적 욕망 앞에서 품평의 대상으로 격하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더욱이 여배우들을 향한 응시는 극장 속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모든 이들은 직업적 영역에서의 공공적 삶뿐 아니라 일상을 영위하는 개인으로서 사적인 삶 또한 살아간다.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이라는 표현이 함의하듯 두 영역의 분계선을 명확히 하는 일은 누구라도 품을 법한 보편적 욕망이겠지만, 유독 여배우에게만큼은 직업과 일상의 분리가 허용되지 않았다. 우수진이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이것은 여배우가 문화적으로 ‘ 구성 ’된 존재였기 때문이다. *주1 육체를 통해 현시된 여배우의 존재감은 재현의 사실성을 담보했지만, 그로 인해 생겨난 강력한 동일시의 기제와 이에 기반한 극장 체험의 여파는 관객들로 하여금 허구적 배역과 실제 배우의 삶을 혼동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배우의 사생활은 ‘스캔들’의 형식으로 소비되는 일이 잦았다. 특히 여성의 사회활동을 억압했던 전통적 관념이 맞물린 결과, 여배우의 ‘사생활’은 단순한 관심거리의 수준을 넘어 도덕적 단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식민지 조선 사회에 여배우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던 이월화 또한 이러한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는데, 배우 활동만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기 어려웠던 그는 기생과 여급 일을 병행한 바 있다. 이월화에게 사치와 허영심이 강한 여성이라는 프레임을 덧씌워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한편 토월회가 해산한 후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던 복혜숙 은 ‘비너스’라는 카페를 직접 운영하면서 마찬가지로 비난의 시선을 견뎌내야 했다. (좌) 이월화 (사진: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우) 복혜숙 특히 성욕이 강한 여성이나 신여성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의 경우, 사생활 또한 문란할 것이라는 의혹의 시선에 둘러싸였다. 이러한 시선은 비단 식민지 조선의 배우들뿐 아니라 할리우드의 영화 스타들에게도 투사되었는데, 그들의 사생활을 다룬 가십성 기사들이 신문 연예란의 단골 메뉴였던 것은 대중적 관심의 향배를 잘 보여준다. 여배우들은 수없이 애인을 갈아치우는 왕성한 남성 편력을 지닌 이들로 지목되었으며, 사소한 이유로 이혼을 일삼는 부도덕한 존재라 낙인찍혔다. 물론, 스타의 화려한 삶과 막대한 재력에 대해 찬탄하는 시선도 엿볼 수 있다. 전 세계적 인기를 구가하던 그들의 천문학적 주급이나 으리으리한 대저택은 물론이고 사치스러운 취미활동 등이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열악한 조선의 연예계에서 여배우는 헐리우드 스타와 같은 동경의 대상으로만 여겨지지 않았다. 즉, 여배우는 자신의 힘으로 직업적 성취를 이뤄낸 당당한 여성이 아닌, 생활난에 시달리는 가련한 존재이거나 끝내 ‘첩살이’ 신세를 피할 수 없는 비참한 운명을 지닌 이들로 인식될 따름이었다. 여배우의 전도, 남배우의 전도- 이것이야말로 한번 신중하게 생각할 문제이다. 오늘날 만사가 초창 혁신기에 잇는 조선에 잇서서 더 크게 더 탐탁하게 바랄 수는 업다고 치드라도 인생의 흥망을 기약하는 청춘기에 잇서서 다시 돌이키기 쉽지 않은 직업에 몸을 붙이게 되는 때 장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없을 수는 없다. 우선 여배우 여류 무용가가 되면 나중에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 대답은 극히 간단하다. 『아무래도 시집을 가야지』 여자로서는- 더욱히 경제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자립하기가 어려운 조선의 여성에게는 마지막 닥치는 문제는 반드시 이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에게로 가게 될까. 『첩!』 그것이야 참으로 참으로 예술가를 극도로 모욕하는 말이다. 『재산가의 부인!』 그것은 좋기는 하나 졸연히 얻어 걸리기가 어려운 사정이 있으니 재산가치고 조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여배우니 무엇이니 하는 동안에 어느덧 이십이 넘고 나서 사면을 둘러보아야 모두가 기혼 남자들뿐이다. 『그러면 착실한 신사』 아직도 조선서는 소위 착실하다는 청년 쳐 놓고는 사리 잡힌 가정 쳐 놓고는 배우 안해이나 여배우 며느리 얻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머리 길게 기르고 누더기 가튼 양복을 입고 다니는 같은 경우 같은 식경에 도취되어 있는 예술가이나 그렇지 않으면 처음에는 펄펄 뛰다가도 나중에는 하는 수 업시 『하는 수 있나. 사랑만 해 주면 그만이지. 첩 노릇이라도 해야지!』 눈물겨운 탄식이나 나아올 것이다. 이미 여배우 노릇을 하든 사람이 그러하였으며 장차 나아올 여배우의 운명이 그러하다. 이것은 여배우 자신의 잘못도 아니요 그 단체 그 사회의 죄도 아니다. 오직 조선의 민도가 일반의 머리가 아즉도 예술- 더욱히 무대예술에 존경을 갖지 못한 탓이다. 그러함으로 적어도 배우 노릇을 하고자 나서는 분은 우선 이담에 크게 고려를 하야 사랑에서 사랑으로 자유스럽게 날아다니랴는 무거운 결심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더라도 상당한 배우자가 나기까지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기막힌 결심을 갖든지. 『잘 놀면 그만이지』 여배우 노릇을 부자의 눈을 호리는 수단으로 알고 무대를 매음부의 전람회 같이 알든지 이 세 가지 길의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다. -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9 』, 1035쪽 이춘풍, “ 생활로 본 그들의 내막 - 배우, 레뷰껄, 딴써 등등 ”(5), 《중외일보》, 1929. 11. 12. 이춘풍이 연재한 글은 사뭇 직설적이면서도 신랄하다(‘이춘풍’은 이서구 의 필명으로 추정된다). 그는 여배우를 비롯하여 여류 무용가나 레뷰걸과 같은 여성 연예인들의 생활상을 자조섞인 어조로 소개했다. 그의 글 속에서 여성 연예인의 생활상은 사실상 성노동자의 삶과 유비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자립하기 어려운” 조선 여성의 처지에서 결혼은 피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재산가의 부인”이 되자니 그들은 대부분 조혼을 해서 본부인이 있는 상태이고, “착실한 신사”에게 시집가자니 집안의 반대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나마 여배우들의 사정을 이해해 줄 법한 이들은 “가난한 예술가”들뿐이겠지만, 그게 싫다면 누군가의 “첩”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여배우들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서구는 예술가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한 식민지 조선 사회 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던 여배우의 처지를 동정한다. 그가 보기에 결국 여배우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뿐이었다. 방종한 여성이 되어 자유를 구가하거나, 결혼 자체를 포기하거나, 아예 대놓고 “부자의 눈”을 홀리기 위해 극장을 “매음부의 전람회”처럼 만드는 일이 그것이다. 영화 < 아리랑 >(나운규, 1926)을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신일선 은 배우 활동을 오래 이어나가지 못하고 능주(전남 화순군) 지역 부호의 자제인 양승환과 결혼하게 된다. 이른바 ‘신일선당’이라고 불렸던 열성팬들은 그의 결혼 소식에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정성껏 행복을 빌어 주었다. 이는 신일선이 <아리랑>에서 쌓아올린 이미지와도 관련된 반응일 것이다. 신일선은 주인공 영진( 나운규 )의 여동생 영희 역을 맡았는데, 호색한의 위협을 받는 순진무구하고 어린 여동생의 모습이 관객들의 동정심을 유발했기에 그러한 이미지가 배우 신일선에게도 겹쳐졌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다만, 양승환에게는 본처가 있었기에 결국 신일선도 ‘첩살이’의 운명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게다가 신일선이 가난한 집안살림을 돕기 위해 친오빠의 강권으로 양승환과 결혼하게 된 것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동정 여론이 빠르게 확산되기도 했다. 결혼과 함께 영화계를 떠났지만 신일선의 근황, 특히 그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견뎌내고 있다는 소식이 지속적으로 전해졌던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신일선 이야기는 여배우의 박복한 운명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 사례로 거론되었던 것이다. 신일선 반대로 사랑을 쟁취하려 하는 여배우의 적극성은 어디까지나 남성 편력에 불과하다고 치부되는 데 그쳤다. 잔인하게도 여배우의 사랑이 진실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정사 사건’과 연관되었을 때, 즉 죽음을 담보로 사랑의 진정성을 증명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했다. 조선의 유명 성악가이자, 토월회에서 배우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던 윤심덕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는 다수의 연애 스캔들에 휩싸여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지나, 극작가이자 연극운동가인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서 실종된 이후 ‘낭만적 사랑’의 화신으로 재규정되기에 이른다. 영화 < 아리랑 후편 >(이구영, 1930)에서 신일선의 뒤를 이어 ‘영희’ 역으로 출연했던 임송서 역시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음독자살을 택한 바 있다. 미수 사건에 그치진 했지만 이애리수 의 ‘정사 사건’도 세간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유행가 가수이자 배우로 인기가 높았던 이애리수는 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배동필과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약속했으나, 배동필의 부모는 여배우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며 극력 반대했고, 결국 그들은 다음 생에서라도 못 다한 사랑을 이루고자 동반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그들의 소식은 신문 지상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결국 배동필의 부모가 이애리수의 연예계 은퇴를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된다. 그러나 훗날 배동필의 본처가 찾아오게 되자 위협을 느낀 이애리수는 재차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으며, 작고할 때까지 자신의 연예계 활동 이력에 대해 철저히 함구했다고 전해진다. (좌) 윤심덕 (우) 이애리수 이처럼 여배우를 둘러싼 시각은 냉랭했으며, 때로는 음험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배우들은 대상화된 육체의 지위에 머물기보다 예술의 주체 로 거듭나기 원했으며, 서서히 자신의 목소리를 담론장에 기입하기 시작한다. 변화의 전조는 1930년대에 접어들며 점차 가시화되었다. 1931년에는 ‘Y.Y생’이라는 필명을 내세운 필자가 《동아일보》를 통해 “여배우 언 파레이드”라는 제목으로 식민지 조선의 여배우들을 소개하는 장문의 글을 연재한 바 있다. *주2 비슷한 시기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무대 스타- 순방기”는 매 회차마다 남성 배우와 여성 배우를 한 쌍으로 묶어 주요 활동이력과 연기의 고유한 스타일에 대해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1934년에 서광제 는 《조선중앙일보》 지면을 빌려 헐리우드의 여배우들을 다룬 “세계영화계 행각”을 연재했는데, 이 글들은 여배우를 가십의 대상으로 다루기보다 예술의 완성을 위해 정진하는 직업적 전문인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시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춘풍이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여배우는 이제 공공적 담론장에서 ‘예술가’로 조명받게 된 것이다. 특히 ‘여배우’가 타고난 외형이나 신체적 조건을 전시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기예’를 연마하기 위해 기울여 온 노력을 전경화 한다는 점에서 시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여배우들의 목소리가 인터뷰나 대담을 통해 노출되는 사례도 빈번해졌다. 신카나리아 는 유명 여성인사들의 새해 포부를 밝히는 지면을 통해 장차 연극을 연구하며 일생을 배우로 살아가리라 다짐했으며, 새해에는 연극 이론서를 집중적으로 독파할 것이라 밝혔다. *주3 1933년에 《매일신보》가 개최한 신년 좌담회에 참석했던 이경설과 이애리수는 여배우의 사생활이 난잡할 것이란 세간의 추측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여배우가 오히려 남배우들보다 “책임 있게 일을 잘 한다”고 주장했다. *주4 최초의 조선어 발성영화 < 춘향전 >(이명우, 1935)의 주역이었던 문예봉 은 발성영화에 좀 더 “적합한 억양”을 연구하겠다고 밝혔으며, 극예술연구회의 대표적 여배우인 김복진 또한 “어린애 역부터 늙은이 역까지” 어떠한 역할이 주어지더라도 철저히 연구하여 제몫을 해낼 것이라 다짐했다. *주5 1937년에 《동아일보》를 통해 장기간 연재된 “스타의 기염” 시리즈에서도 여배우들의 포부를 엿볼 수 있다. 차홍녀 , 한은진 , 남궁선과 같은 연극배우는 물론이고, 문예봉, 김소영 을 비롯한 영화배우들까지 총망라된 이 시리즈에서 여배우들은 자신이 곧 예술의 주체라는 자의식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좌) “여배우 언 파레이드”에서 다뤄진 복혜숙 (사진: “ 여우언파레이드 영화편 (9) 인기도 한떄런가 복혜숙양 ”, 《동아일보》, 1931. 8. 9.) (우) "스타의 기염"에서 다뤄진 남궁선 (사진: “ 스타의 기염 (2) 그 보푸계획자랑야심 극은 일생사업연극인 남궁선 ”, 《동아일보》, 1937. 11. 25.) 같은 맥락에서 < 미몽(죽음의 자장가) >(양주남, 1936)의 한 장면에 주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발성영화로 알려진 이 작품의 주연배우는 당대의 최고 인기스타였던 문예봉이었다. <미몽>의 주인공 애순(문예봉)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나머지 가정까지 버렸던 인물로, 그의 일탈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어찌보면 이른바 ‘신여성’에 대한 처벌 서사처럼 보이는 작품이지만, 실제로 <미몽(죽음의 자장가)>을 둘러싼 해석의 결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아래의 쇼트들은 내연남인 창건과 함께 무용 공연에 참석했던 애순이 박경림( 조택원 )의 독무를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구성한다. 흥미롭게도 이 장면은 <미몽(죽음의 자장가)>에서 온전한 형태의 시선 편집(eyeline match)이 거의 유일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시선의 주체와 시선의 대상을 연속적으로 배치하게 될 경우, 시각 주체의 욕망과 그것이 투사된 대상의 정체를 가리키게 된다. 그렇다면 <미몽(죽음의 자장가)>에서 이 장면만큼 주인공 애순의 욕망이 직설적으로 노출된 순간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미몽(죽음의 자장가)> 중 이 장면이 문제적인 것은 시선의 엇갈림을 통해 식민지기의 극장 속에 착종된 욕망 들을 압축적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즉, 객석에 앉은 애순의 모습은 시선의 주체인 동시에 시선의 대상으로서 포착된다. 시선의 주체로서 애순은 무용가의 춤에 대한 애호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지만, 동시에 그는 주변 남성들의 시선 속에서 대상화된 존재로 재현되고 있다. 더욱이 그들의 응시는 창건이 자리를 비운 직후부터 보다 노골적으로 이어진다. 더욱이 객석에 앉은 애순을 향한 남성들의 응시는 부재하는 창건의 자리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 여성이 남성의 울타리를 벗어날 경우, 무제한적인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남성들의 왜곡된 시선은 애순의 주체성을 훼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순은 시각적 주체로서의 지위를 끝내 포기하지 않으며, 잡담을 주고받는 산만한 남성들과 달리 무용가의 춤에 집중하면서 극장의 본래 취지에 걸맞는 ‘이상적 관객’의 형상을 드러낸다. 이 장면이야말로 <미몽(죽음의 자장가)>이 지닌 미묘한 해석의 결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데, <미몽>은 ‘신여성’을 부정적 표상으로 낙인찍고 대상화하려는 사회적 시각을 보여주면서도, 이러한 시각으로 결코 포합될 수 없는 여성의 주체성 또한 재현해 내기 때문이다. ‘애순’의 모습처럼 식민지 조선의 여배우들은 그들을 둘러싼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폭압적인 시선을 예술적 주체를 향한 주목으로 바꿔놓기 원했던 이들이었다. 사회의 무지함에 대해 항변하는 대신 그들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겸허히 채우고자 했으며, 극장문화의 공진화적 발전을 목표로 삼았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통해 영화가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논한 바 있다. 기계장치의 냉혹한 메커니즘 속에 짓눌린 현대인들은 스스로의 인간성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지만 영화를 통해 해방의 서사를 발견한다. 즉, 배우는 카메라라는 기계장치 앞에서 끊임없이 시험받게 되지만, 그 가혹한 테스트를 의연하게 버텨낼 뿐 아니라 적극적 상호침투를 통해 가장 인간다운 형상을 제시하는 데 성공한다는 것이다. 대상화된 육체의 지위를 넘어 예술적 주체로 발돋움하기 원했던 식민지 조선 여배우들의 인정투쟁이야말로, 영화를 현대사회의 냉혹한 논리에 ‘복수’를 가하는 장치라고 보았던 발터 벤야민의 생각과 상통하는 대목이 아닐까? *** 주1. 우수진, 「여배우의 사회문화적 구성과 이월화」, 『현대문학의 연구』 82, 한국문학연구학회, 2024. 주2. ‘Y.Y생’은 김유영의 필명으로 추정된다. 주3. 기사, “직업여성의 가두에서 맛는 1931년 - 신산한 그들의 생활에서 새해의 출발을 보자!”, 《조선일보》, 1932. 1. 2. 주4. 기사, “직업여성의 좌담회”, 《매일신보》, 1933. 1. 3. 주5. 기사, “백화요란한 음악, 미술, 극, 영화, 무용 각계의 성관 - 예원에 활약하는 여성들”, 《동아일보》, 1936. 1. 1.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사진: “ 졸업 ”, tvN 올 한 해 TV와 OTT를 통해 공개된 시리즈들을 필자의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관심을 끌어모은 화제작부터, 스쳐 지나갔지만 돌이켜 볼 만한 문제작들까지 정리합니다. 이 글을 구상할 즈음 ‘비상계엄’이 도둑처럼 선포됐다. 용감하게 국회로 달려간 많은 시민들과 사명감을 가지고 사투를 벌인 공직자들 덕분에 비상계엄은 해제됐지만, 한국사회의 시간은 ‘12.3 내란 사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이 모든 상황이 차라리 ‘드라마’였으면 하고 생각하다가 지난 여름에 본 < 돌풍 >(김용완, 2024)이 떠올랐다. 한국 정치사를 압축한 것 같은 <돌풍>이 재현한 한국사회는 ‘대의 민주주의’ 대신 음모와 폭로가 난무하는 세계였다. 당시 나는 이 드라마의 위험한 상상을 비판했었다. 그러나 그 위험한 상상은 몇 달 뒤 현실이 됐다. 참으로 유해한 것들이 도처에 깔려있다. 비상계엄이 아니더라도 이 세계는 이미 비상시국이다. 먼 곳에서 전쟁 소식이 끊이지 않았고, 기후위기가 코앞까지 도달했음을 절감했고, 경기침체로 인해 온갖 사회 지수는 지속적으로 나빠졌다. 사회적 갈등뿐 아니라 여성, 장애인, 이민자, 퀴어 등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혐오도 지긋지긋하게 반복됐다. 마치 지구 종말 200일을 앞둔 < 종말의 바보 >(김진민, 2024) 풍경처럼. 이런 유해한 세상을 견디기 위해 우리는 자극적인 맛, 즉 도파민을 상승시킬 무언가를 찾고 또 찾았다. 드라마 세계도 마찬가지다. 사적 복수극, 고자극 장르물, 이번 생은 망했으니 과거로 돌아가서라도 욕망을 실현하는 ‘회·빙·환(회귀·빙의·환생)’ 서사가 줄을 이었다. 남편에 의해 살해당한 여성이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역사를 바로 세우며 남편에게 복수하는 <내 남편과 결혼해줘>(박원국, 한진선, 2024)가 주목을 받았고, < 살인자ㅇ난감 >(이창희, 2024), < 더 에이트 쇼 >(한재림, 2023), <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모완일, 2024) 등 사적 복수물이나 고자극 장르물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이런 드라마들이 예전처럼 큰 화제를 모으지는 못했다. 넷플릭스를 중심으로 생산되던 고자극 드라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다 보니 피로감을 느끼게 된 탓이다. <돌풍>, <종말의 바보> (사진: 유튜브 넷플릭스 코리아) 뜻밖에도(!) 올해 가장 인기가 높았던 드라마는 <눈물의 여왕>(장영우, 김희원, 2024)이다. 이 드라마는 ‘너무 늦게 도착한 과거’와 같은 드라마이다. ‘퀸즈’로 대표되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재벌가(가부장제)를 선하고 무해한 집단으로 재현하며 무너진 퀸즈 일가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여기에 불치병과 기억상실증 등 한국 드라마의 클리셰가 빠지지 않았다. 위기를 통해 부부 관계와 가족애를 회복한다는 방향성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혈연·혼인 중심 가족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가 주목받은 이유는 간단하다. “생각 없이 편하게 볼 수 있는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일상의 피로감이 높아질수록 단순한 맛을 찾기 마련이다. 맵거나 달거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자극 드라마에 피로감을 느낀 우리는 순하고 달달한 드라마를 도피처 삼아 그 세계에 몰입하여 울고 웃었다. <눈물의 여왕>은 그런 우리의 필요를 잘 반영했기에 진부한 설정에도 선택을 받은 것이다. 시청률은 낮았지만 마니아층이 생길 정도로 인기를 모았던 <선재 업고 튀어>(윤종호, 김태엽, 2024)나 시원하고 무해한 제주도의 풍경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던 <웰컴 투 삼달리>(차영훈, 김형준, 2023~2024) 등도 비슷한 이유로 관심을 모았다. 사진: “ 눈물의 여왕 ”, “ 선재 업고 튀어 ”, tvN “생각 없이 편하게 볼 수 있는 드라마” 곁에는 서로를 구원함으로써(쌍방구원) 위로를 전하며 치유적 기능을 한 드라마들도 있었다. 얼마 전까지 ‘먼치킨’ 주인공이 위험으로부터 인간-사회를 구하거나 악을 제대로 응징하여 ‘사이다맛‘ 정의를 구현하는 히어로물이 인기를 모았으나 그 히어로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히어로’가 사라진 자리에 ‘힐러(healer)’가 찾아왔다.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조현탁, 2024)은 우울증, 불면증, 비만이라는 ‘현대인의 질병’에 걸려 초능력을 상실한 가족 이야기다. 이들이 초능력을 상실한 이유는 화재 참사로 인한 상실감과 죄책감 때문이었다. 어디 드라마 속 인물들뿐일까? 사회적 참사가 반복되는 한국사회 속 우리들 또한 같은 이유로 현대인의 질병에 걸린 게 아닐까? 드라마는 상처로 인해 무기력에 빠졌던 인물들이 “히어로는 아니지만” 서로의 행복을 바라며 구원하고자 애쓰는 것에서 희망은 시작된다는 걸 보여주었다. < Mr. 플랑크톤 >(홍종찬, 2024)은 뿌리를 모른 채 딛고 설 땅을 상실한 채 부유하는 “모든 물고기들의 밥”이자 “먹이사슬의 맨 밑바닥, 바닷속 가장 미천한 존재”인 플랑크톤과 같은 인물들이 서로를 위로하며 구원했다. 세상은 유해한 것들로 가득하지만, 인간은 끝까지 ‘선함’의 본능을 잃지 않고 서로를 구원하고야 만다는 단단한 신뢰를 이런 드라마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히어로는 아닙니다만>, <Mr. 플랑크톤> (사진: “ 히어로는 아닙니다만 ”, JTBC / 유튜브 넷플릭스 코리아) 드라마가 단지 도피처, 위로와 치유적 경험만 제공한 것은 아니다. 장르를 망라하여 저마다의 방식으로 ‘오늘’을 구현함과 동시에 ‘내일’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다면 올해 드라마가 담은 오늘과 내일은 어떤 모습일까? 우선 다양한 가족의 형태와 가능성을 보여준 드라마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눈물의 여왕>이 절절하게 보여주었듯 기성사회와 미디어는 여전히 가부장적이며 혈연·혼인 중심 가족을 대표적 가족 모델로 반복재생 하지만, 한국사회의 전통 가족 모델은 빠른 속도로 해체되고 재구성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사회적 변화는 전통 가족의 모순성을 보여주거나 가족의 경계를 허물어 확장하는 지향성을 가진 드라마들을 통해 구현됐다. <정숙한 세일즈>(조웅, 김미진, 2024)나 <가족X멜로>(김다예, 2024) 등에서는 가부장 중심 가족의 해체를 보여주었고, <우리, 집>(이동현, 위득규, 2024)이나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송연화, 2024)를 통해서는 가족이라는 관계가 신뢰와 애정으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 의심과 오해로 조각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가족이라서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우리는 이 드라마들을 통해 씁쓸하고 서늘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낭만적 사랑과 결혼이 당연하지도 않고 심지어 불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드라마들도 있었다. < 트렁크 >(김규태, 2024)는 ‘계약결혼’이라는 파격적 설정을 통해 가족과 부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결혼이나 혈연을 넘어선 가족들도 등장했다. <조립식 가족>(김승호, 2024)과 <손해 보기 싫어서>(김정식, 2024)와 <Mr. 플랑크톤>은 ‘정상’ 세계에 속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인간들이 혈연·혼인이라는 관습과 제도를 넘어 서로의 ‘가족’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가족이 아니라면 무엇이 가족일 수 있을까? 가족의 재구성의 문제는 관계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생활고 때문에 관계마저 소원해진 젊은 부부가 돈을 벌기 위해 불륜 커플을 협박한다는 신박한 설정의 < LTNS >(전고운, 임대형, 2023)는 ‘불륜’이라는 키워드로 (부부) 관계의 복잡성을 상기시켰다. 부부, 가족, 인간관계가 복잡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이란 존재가 원래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이토록 친밀’한데 ‘배신자’ 일수도 있는 법이다. 드라마는 이런 인간의 복잡성을 흔들리거나, 해체되거나, 재해석되고, 재구성되는 가족을 통해 다채롭게 보여주었다. (상) <우리, 집>,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사진: “ 우리, 집 ”, “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 MBC) (하) <트렁크>, <LTNS> (사진: 유튜브 넷플릭스 코리아 / 유튜브 CJ ENM 글로벌) 최근 몇 년 동안 꾸준하게 늘어난 여성서사가 올해도 다양한 얼굴로 우리와 만났다. 여성서사는 주인공 혹은 중심인물 다수가 ‘여성’인 경우를 의미하지만, 그 여성‘서사’에 무엇을 담았는가도 중요한 문제다. 올해도 드라마들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얼굴을 응시했고, 용감하고, 슬기롭고, 끈질기게 사회적 관습에 저항하는 여성들을 통해 새로운 인간-사회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낮과 밤이 다른 그녀>(이형민, 최선민, 2024)는 뜻밖의 사건으로 낮에는 ‘아줌마’로 호명되는 50대 여성으로, 밤에는 ‘취준생’ 20대 여성인 본래 몸으로 살게 된 이미진/임순을 통해 사회적 존재감을 잃어버린 여성들이 존재감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담았다. <졸업>(안판석, 2024)에서는 대치동 학원가 1타 강사, 서혜진( 정려원 )이 퍽퍽하고 고단한 30대 여성 직장인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밤에 피는 꽃>(장태유, 최정인, 이창우, 2024)은 사별한 여성에게 자결하여 열녀가 될 것을 강요하는 사회적 관습을 거부하고 의적으로 활동한 조여화( 이하늬 )의 액션 활극을 시원하게 보여주었다. <정숙한 세일즈>는 1992년 지방 소도시를 배경으로 생계를 위해 성인용품 방문 판매를 하게 된 여성들을 통해 여성들이 ‘정숙’하기를 강요하는 사회에 도발적 질문을 던졌다. 또한 무능하고 유해한 가부장들과 능동적이고 협력적인 여성들의 연대를 대비시켰다. 1992년이라는 시대적 배경 때문에 낡은 서사로 여겨질 뻔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지향은 오늘날의 여성들과 공명하기에 충분했다. <굿파트너>(김가람, 2024)는 ‘이혼 전문 변호사’ 차은경( 장나라 )을 중심으로 가족의 의미를 다시 묻게 하며 여성들의 연대와 성장 서사를 보여주었다. 그런가 하면 <손해 보기 싫어서>는 ‘위탁모’로 봉사한 어머니를 둔 손해영( 신민아 )과 ‘위탁아동’으로 연결된 또 다른 ‘딸들’의 자매애를 보여주었다. <피라미드 게임>(박소연, 2024)은 한 달에 한 번씩 비밀 투표로 왕따를 정하는 ‘백연여고’ 2학년 5반을 통해 계급화된 사회의 문제를 환기하고 여성 청소년들이 연대하여 힘의 세계관에 저항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담았다. < 정년이 >(정지인, 2024)는 1940년대 후반부터 50년대 중후반까지 유행한 ‘여성국극’을 재현하여 남성중심 사회 속에서 꿈을 포기하지 않는 여성들과 여성들의 관계를 보여주었다. ‘여성국극’은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의 사회’라는 대안적 상상을 해보게 하는 담대한 시도였다. 여성서사를 표방하지 않더라도 드라마 속 여성들은 꾸준하게 진화하고 있다. 드라마 속 여성서사는 장르도, 시대도, 인물들이 처한 상황도 다르지만 지금-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처한 현실과 그에 대항하는 페미니즘적 지향성과 상상력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중요한 흐름이다. 사진: “ 밤에 피는 꽃 ”, MBC / “ 굿파트너 ”, SBS 드라마에서 여성서사의 공간이 늘어난다는 것은 단지 여성들의 이야기가 많아졌다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퀴어서사의 공간도 함께 늘어나게 됨을 의미한다. <피라미드 게임>, <웨딩 임파서블>(권영일, 2024), <엄마친구아들>(유제원, 2024)과 같이 퀴어 캐릭터가 주요하게 등장하는 ‘퀴어프렌들리’ 드라마들이 있었고, <정년이>, < 대도시의 사랑법 >(허진호, 홍지영, 손태겸, 김세인, 2024), <옥씨부인전>(진혁, 2024) 등 퀴어가 중심이 된 드라마도 제작됐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소설가 박상영의 소설을 영화와 드라마로 각색하여 호응을 얻었는데 게이 남성 고영( 남윤수 )을 통해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동성애’도 당연하고 보편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옥씨부인전>은 노비에서 양반으로 신분이 바뀐 여성, 구덕( 임지연 )을 중심으로 여성, 노비, 성소수자 등 ‘소수자’ 문제를 전면에 등장시켰다. <정년이>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퀴어서사에 관해 고민하게 했다. 동명의 웹툰 원작에서 정년이와 복잡한 관계를 형성하는 인물인 ‘부용’이 드라마에는 삭제됐다는 면에서 그렇다. 부용은 페미니즘과 퀴어서사를 담당한 중요한 캐릭터였기에 타협적이고도 퇴행적 각색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한편 <대도시의 사랑법>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보수 단체의 거센 항의에 예고편을 삭제하기도 했다. 이 두 드라마를 둘러싼 논란은 드라마가 처한 모순적 상황을 절감하게 했다. 이화여대 퇴임교수 김훈순의 진단처럼 드라마는 “우리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과정에 적극 개입하는 문화적 생산물”임과 동시에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다양한 가치를 담아내는 문화적 공론장”이자 “시대 흐름 속에서 충돌하는 가치들을 담아내는 역동적인 텍스트”이다. 그렇기에 순응하거나 퇴행하는 면도 있지만, 관습의 저항을 피하기는 어려운 순간도 있다. <정년이>나 <대도시의 사랑법>은 충돌하는 가치들을 ‘뚫고’ 나아가는 서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 사진: “ 정년이 ”, tvN / “ 옥씨부인전 ”, JTBC 한 해 동안 우리가 주목했던 드라마들의 흐름을 톺아봤다. 지난 1년 동안 우리는 유해한 현실의 도피처로서 무해한 드라마를 보며 울고 웃다가 위로를 받았다. <옥씨부인전>에서 구덕의 말처럼 드라마가 “하루하루 수고한 사람들한테 행복을” 주고 “시름을 잊게” 한 것이다. 또한 드라마가 구현한 작은 세계를 통해 우리의 ‘오늘’을 돌아볼 수 있었다. 드라마라는 거울은 우리의 ‘오늘’뿐 아니라 ‘내일’로 나아갈 길을 발견케 했다. 드라마가 비춘 현실은 자주 절망적이었지만, 관습을 깨고, 더 나은 세계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꾸준하게 성장하는 여성서사와 꿋꿋하게 등장하는 퀴어서사를 통해 우리 사회가 다양하게 넓어지고 있다는 희망적 생각을 해보게 됐다. <정숙한 세일즈>에 등장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 무대처럼 어떤 시도는 “시대를 앞서간 느낌” 때문에 저항에 부딪히지만 곧 그 시차를 극복할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가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은 질문이며,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인간다움’과 ‘가족’으로 상상된 사회공동체다(그렇기에 가족의 범위가 확장되는 걸 보여준 드라마들이 반갑다). 올해 본 드라마 중 가장 좋아한 드라마가 무엇이냐고 내게 묻는다면 <졸업>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졸업>은 한국사회의 욕망이 집약된 ‘대치동 학원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정답’이 아닌 ‘지문 바깥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역량과 ‘인간다움’에 관해 이야기한다. 드라마는 자신의 삶과 연인을 지극히 사랑하는 성실하고 윤리적인 직업인 혜진을 통해 ‘인간답게 사는’ 길을 보여주었다. 혜진은 수업 시간에 에리히 프롬의 글을 학생들에게 들려준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다.” 이것은 나와 우리, 그리고 ‘유해한’ 세상을 향한 조언이기도 하지만, 드라마의 소명과도 같다. 사진: “ 졸업 ”, tvN 오수경(드라마평론가) l 인간과 사회에 관심이 많아 문학을 전공했고, 신앙인으로 살고 있으며, 드라마를 들여다본다. 여러 매체에 칼럼 기고. 『을들의 당나귀 귀 』(2019) 공동 집필, 『드라마의 말들 』(2022)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