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주의 집
- 감독
- 이다훈
- 제작년도
- 2020
- 출연
- 정윤경
사진: “ 세계의 주인 ”, 네이버영화 * 본 글에는 극중 일부 장면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세계의 주인 >(윤가은, 2025)을 아무런 정보 없이 관람할 때, 관객은 필연적으로 오류 혹은 함정에 빠지게 된다. 초반의 시퀀스들은 수수께끼에 가까운 불규칙한 배열처럼 보인다. 영화의 시작은 교복을 입은 커플이 학교로 보이는 폐쇄된 장소에서 키스에 몰두한 모습이다. 곧 영화의 중심이 될 주인( 서수빈 )은 키스 도중 남자 친구( 김예창 )의 얼굴이나 손을 지속해서 교정한다. 이 장면은 성행위를 묘사한 웹툰 스케치로 넘어가는데, 마치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처럼 보인다. 방금까지 키스를 나누던 주인은 단짝 유라( 강채윤 )가 그린 웹툰이 담긴 화면을 바라보면서 다음 상황을 궁금해한다. 체육 시간에는 운동장에서 배구 연습을 하는 도중 자리를 이탈해 장난을 치다가 다른 학생에게 부딪히기도 한다. 이때 부딪힌 남학생 수호( 김정식 )와 주인은 이후에도 부딪히는 일이 잦다. 수호의 어린 여동생은 주인의 엄마( 장혜진 )가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다닌다. 주인은 엄마를 따라 방문한 병원에서 팔에 깁스를 한 수호의 동생을 만난다. 그날 수호는 동생을 씻기다가 목덜미 근처에 난 꼬집힌 자국을 본다. 다음날 어린이집에 찾아가 CCTV를 보여달라고 말하지만, 어린이집 교사는 곤란해하며 자리를 피한다. 수호는 마을 어귀 담벼락에는 빨간색 라카로 성범죄자의 집이라고 적힌 곳을 지나친다. 주인의 동생 해인(이재희)은 마술을 배워서 가족 앞에서 상연하는 것을 좋아한다. 빨간 공을 손안에서 사라지게 하는 마술 등 대부분 무언가를 사라지게 하는 마술이다. 해인은 주인의 앞으로 온 편지를 몰래 숨겨두거나, 신발에 흙을 묻혀 오는 등 어떤 비밀이 있어 보인다. 주인의 엄마는 텀블러에 양주를 넣어서 몰래 마시곤 한다. 주인은 진로를 정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선생님( 이상희 )과 개별 면담 시간에 파티션 위에 놓인 사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숨쉬기 곤란해하는데, 알레르기가 있냐며 당황해하는 담임에게 주인은 장난이었다며 웃어버린다. 정확한 숏의 순서를 정리하기 어려운 일련의 몽타주 속에서 특정 인물이나 상황에 마음 두기 힘들다. 그러다 개별적인 상황을 한데 모으는 꼭짓점 같은 사건이 벌어진다. 복역 기간을 끝낸 성범죄 피의자의 학교 인근 마을로의 복귀가 임박해지자, 수호는 전교생을 대상으로 성범죄자 복귀 반대 서명을 받는다. 주인은 홀로 서명에 반대하는데, 이유는 서명을 독려하는 문구 중 피해자의 아픔을 과장해서 묘사한 부분 때문이다. 피해자는 이 일로 인해 평생 씻을 수 없는 고통 속에 살아야 한다는 문구는 클리셰에 가깝지만, 이것이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과 피해자성을 강요하는 문구가 될 수도 있다. 주인이 문구에 이의를 제기하는 순간, 어쩌면 그가 성폭력 피해 생존자일 거라고 짐작하게 된다. “네가 뭐 성폭력 피해자라도 돼?”라는 일갈에 주인은 “그래, 나 성폭행 피해자다.”라고 답한 뒤 곧이어 농담이라고 무마해 버린다. 하지만 그것이 농담이 아님을 관객은 알게 된다. 그와 동시에 주인과 그를 둘러싼 모든 비밀스러운 상황과 행동에 하나의 질서가 생긴다. 아버지의 부재도, 편지를 숨기거나 마술을 배우는 동생도, 술을 마시는 엄마도, 주인의 활발함도, 모두 성폭력 트라우마와 관련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불규칙한 것처럼 보였던 배열이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질서로 통합되는 것을 느끼면서, 이에 대한 경계와 의심이 동시에 피어오른다. 이러한 해석이 결국 인물을 사건에 가둬두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서명문 속의 클리셰와 비슷한 짓을 내가 인물에게 가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여기에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동시에 느낀다. 서명을 부탁하는 수호와 반대하는 주인 (사진: “ 세계의 주인 ”, 네이버영화) 사실 확정을 위한 고백은 일종의 법정에서 이뤄진다. 문구를 수정했다는 수호의 말이 거짓임을 간단히 확인한 주인은 자리를 피하지만, 수호가 끈질기게 붙잡으면서 몸싸움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표출된 주인의 분노는 그가 가진 본래의 성격만을 표시할 수 있는가. 그 안에 잠재한 성폭행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그의 행동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문제의 그 문구를 상연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과연 영화가 지속하는 동안 인물은 이러한 잣대에서 놓여날 수 있을까. 교장실에 불려 간 주인과 수호는 서로를 마주 본 위치에 앉는다. 수호는 서명받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하고 싶다고 제안한다. 주인은 끝까지 서명을 거부하며 결국 자신이 성폭력 피해자라는 사실을 차분히 고백한다. 가장 문제적인 장면이 이어진다. 차 앞좌석에 나란히 앉은 엄마와 주인은 세차장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것은 다소 노골적인 의식이자 클리셰다. 세차가 이뤄지는 공간 내부의 소음이 주인의 울부짖음을 가리는 동안, 주인은 엄마를 향해 원망의 말을 마구 쏟아낸다. 세차가 끝나고 울음이 잦아질 즈음 엄마는 말없이 휴지와 물을 건넨다. 그러고는 ‘한 바퀴 더 돌까?’라고 묻는다. 이 장면에서 수호가 쓴 서명문 속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문구가 속절없이 떠올랐다. 세차장 장면은 이를테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씻으려 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상처의 당사자인 이들은 상처의 내부에 자리 잡고 있다. 다행히 그 안에서 주인은 혼자가 아니다. 주인의 엄마는 바깥에서 상처를 바라보거나 낫게 할 수 없다. 다만 그는 상처 안쪽에 함께 있는 사람이다. 이들과 함께 뒷좌석에 무단 탑승한 카메라 역시 상처 안쪽에 자리 잡으려 한다. 세차장 장면의 핵심은 무언가를 씻어내는 정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들의 위치에 있다. 외면했던 안쪽에서 여전히 울부짖거나 억눌린 상처들이 존재하고, 주인은 잠시 그 상처가 되어 아우성쳐 보았을 뿐이다. 세차장 기계 속 차 안, 엄마 태선과 주인 (사진: “ [세계의 주인] 메인 예고편 ”, 바른손이앤에이) 안쪽에 자리한 사람들이 있다. 법정 장면에서 친족 성폭력 피해자인 미도( 고민시 )가 피고 측 변호인의 심문에 맞서 증언할 때, 미도의 뒤편에서 슬쩍 손수건을 건네주는 인주( 백현주 )와 동료들은 상처의 안쪽에 있는 사람이다. 심문을 마치고 식당 부엌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미도는 가족이 찾아왔다는 동료의 말을 듣는다. 두려운 듯 커튼 뒤에서 슬쩍 바깥을 내다보았을 때, 뜻밖에도 창밖에 있던 주인이 시선에 잡힌다. 미도는 주인을 그 장소에서 가장 깊은 곳인 주방 안쪽으로 들인다. 둘은 그렇게 상처의 안쪽에 있다. 사건 이후 주인은 무리 짓던 친구들과도 어쩐지 데면데면해진다. 주인의 교실 책상 서랍 안쪽 깊숙한 곳이나 책 사이에서는 적대적인 느낌을 주는 쪽지가 발견되기 시작한다. 그 쪽지를 쓴 자가 누구인지는 관객 역시 알 수 없다. 그리고 복도를 촬영하는 카메라의 시점이 불현듯 등장했을 때, 카메라 뒤에 있는 자가 쪽지를 쓴 미지의 인물일 거라고 짐작하게 된다. 그런데 방금 카메라 앞을 스치고 지나간 주인이 갑자기 렌즈 가까이로 얼굴을 들이밀면서 방금까지의 미스터리한 분위기는 깨어진다. 카메라를 든 사람은, 사건 이후 유독 멀어진 친구 유라다. 유라와 주인은 머리를 대고 방금 찍힌 영상을 함께 확인한다. 이로써 유라, 혹은 미스터리한 쪽지를 쓴 이들 역시 상처의 안쪽에 자리한 사람이 된다. 카메라를 든 사람은 대개 카메라 안에서 벌어진 일들의 바깥에 존재하는 이들이라 여겨지지만, 이들 역시 내부에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침범과 공유다. 영화는 거의 모든 이들을 상처의 안쪽으로 초대한다. 나 역시 주인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 켄 로치의 영화, < 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에서 제목이 곧 개인의 존엄을 표시하는 모두의 구호가 된 것처럼, <세계의 주인>에서도 ‘나, 주인’임을 기억할 수 있는 이들을 소환한다. 내 몸과 내 상처의 주인은 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 상처의 안쪽에서 때로는 욱하는 마음이 들고, 상처의 바깥에서 이 마음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의심스러워도 상처와 함께 살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물론 여기에 동참할 수 없는 이들이 존재하리란 것을 안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의 탓은 아닐 것이다. 사진: “ 세계의 주인 ”, 네이버영화 김소희(영화평론가) ㅣ 영화를 보는 동안 느낀 감정의 격랑이 내가 쓴 글 안에 거짓 없이 찍혀 있기를 바랍니다.
(사진: “ Häxan ”, IMDb)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반드시, 라고 단언하고 싶은데, 자신을 시네필이라고 자처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일시적으로 이상한 영화를 찾아보느라고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는 재빨리 빠져나오고 다른 누군가는 여기에 머문다. 그 영화들이 ‘불법적인’ 대상이 아니라면 (이를테면 스너프 필름, 아동성애 영화, 기타 등등) 각자의 취향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이 영화들을 ‘이상한 영화’의 수호성인 아모스 보겔은 ‘전복적인 예술영화(subversive art film)’라고 불렀다. 아모스 보겔을 이야기할 자리는 1974년까지 기다려주길 바란다. 여기서 질문은 영화사의 순간들에서 ‘이상한 영화’라고 부르는 영화가 언제 나타났느냐는 것이다. 물론 방점을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다른 계보를 열거하게 될 것이다. 다른 예술들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사회적 위반, 법적 금지의 경계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했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선을 넘고 싶어 했다. 누군가는 한계를 부수길 원했고, 다른 누군가는 돈을 원했다. 누군가는 예술적인 실험을 하고 싶어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거기서 쾌락을 향유했다. 여러 영화 제목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여기서 시작해보겠다고 결심했다. 세계영화사의 순간들은 그렇게 가끔 하나의 선처럼 느껴지는 앞과 뒤를 따라가다가 갑자기 옆으로 빠져나올 것이다. 내가 ‘이상한 영화’의 계보를 따라 올라가다가 가장 멀리서 마주친 영화는 벤야민 크리스텐센의 스웨덴 영화 < 헥산 >(1922)이다. “Häxan”은 번역하면 ‘마녀’라는 뜻이다. 벤야민 크리스텐센은 19세기인 1879년에 태어났다. 처음에는 배우가 되기를 원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18년부터 ‘흑마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고서점을 뒤지던 벤야민은 독일 베를린 서점에서 『마녀의 망치(Malleus Maleficarum)』 사본을 구하게 되었다. 이 책은 1486년 독일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하인리히 크라메르가 쓴 마녀 처단에 관한 책이다. 주술을 이단으로 규정하면서 마녀로 규정된 여자의 마법의 악을 ‘끝내기 위해서’ 자백을 끌어내는 고문 기술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이 책이 출간될 무렵에 유럽에서는 마녀로 내몰린 여자들이 산채로 화형당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하인리히 크라메르는 마녀의 존재를 신학적으로 증명된 것처럼 주장하고, 더 나아가 마녀사냥을 제도화하는 데 기여하고, 심지어 이 책은 마녀재판의 법전이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소설에서 사용된 장면들, 마녀들은 악마와 계약을 맺어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들이 여기 실려 있다. 교회 내부에서도 이 책은 논쟁이 되었으며, 오히려 그래서 많은 독자를 얻게 되었다. 1519년에 야콥 스프렝게르가 이 책에 새로운 저자로 나서서 마치 개정 증보판처럼 추가해서 1533년에 출간하였다. 손에 손을 거쳐 이 책은 마녀를 자백시키는 안내서가 되었고, 잔인한 고문 기술자들은 상상으로 쓰인 이 책의 내용을 감옥에서 불행한 여자들에게 실행하였다. 『마녀의 망치』는 일시적으로 판금 되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왕실 궁정에서 공공연하게 읽히는 금서가 되었으며, 16세기 이후에 마녀재판에서 더 잔인한 기술을 정당화시켜 주었다. 『마녀의 망치』 표지와 <헥산> 포스터 (사진: “ Häxan ”, IMDb) 벤야민 크리스텐센이 구한 사본 『마녀의 망치』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여러 개의 판본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본이 15세기라는 것을 셈에 포함해주길 바란다. 1부에서는 먼저 마녀의 존재와 악행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2부에서는 마녀들이 저지른다고 여겨지는 다양한 범죄와 악마와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리고 3부에서 마녀재판의 실제 절차와 고문을 통한 자백 유도 방법을 자세하게 소개한다. 『마녀의 망치』에 만족하지 않고 벤야민은 1919년부터 거의 2년 동안 마녀사냥과 재판에 관한 상세한 규정들, 사례, 실제로 실행하는 집행과정을 담은 삽화들, 여기에 더해 각종 문건을 모았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벤야민은 1920년까지 발표된 마녀들에 관한 소설과 희곡도 모았다. 그런 다음 자료들을 바탕으로 영화제작을 결심하였다. 벤야민이 준비한 것은 단지 마녀에 관한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준비한 <헥산>은 유럽 중세로부터 400년에 걸친 마녀사냥과 재판에 관한 백과사전이었다. 벤야민은 제작자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구한 도판들을 그 앞에서 전시하다시피 했고, 상상하기 힘든 끔찍한 재판기록과 집행을 낭송하기도 했다. 이 기괴하지만, 분명히 야심적인 프로젝트에 스웨덴 필름 인더스트리가 관심을 보였다. 벤야민과 촬영 감독 요한 안케르스트예르네는 덴마크에 오직 <헥산> 촬영을 위한 영화 스튜디오를 사들였다. 그런 다음 야외는 중세를 재연하였고, 실내는 모두 밀폐시킨 다음 어두운 그림자와 빛으로만 이루어진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해가 떨어진 다음에만 촬영을 시작해서 새벽이 오면 멈추었다.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헥산>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연장이라기보다는 중세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제단화를 스크린 위에 펼쳐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가장 비싼 무성영화가 되었다. <헥산>은 1921년 2월에 촬영을 시작해서 그해 10월까지 이어졌다. 빛과 그림자 간 대조가 두드러지는 장면 / 우주를 둘러싼 천사 합창단의 모습 (사진: “Häxan( 1 , 2 )”, IMDb) 영화 <헥산>은 7개의 연대기로 나누어져서 진행된다. 첫 번째 시작은 마치 학술 발표를 위한 도판 설명처럼 이어진다.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고, 주변에 공기와 불이 둘러싸고 별들이 주변을 떠돌면서 천사 합창단이 보인다. 그런 다음 악마와 마녀의 조각상, 목판화, 삽화를 차례로 소개한다. 이 화면자료들이 펼쳐지면 IMAX 스크린으로 벽화처럼 보고 싶을 것이다. 사탄이 나타나서 부부가 잠든 침대에서 아내를 유혹하고, 질식시키고, 살해하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사랑의 묘약을 구하는 여인, 성에 눈뜨는 여인, 그 여인이 몰래 먹이는 묘약에 흥분하는 승정(僧正), 게걸스러운 폭식, 들린 자들(the possessed)이 사탄의 북소리에 맞춰 한밤중에 불을 피우고 춤을 추는 축제, 벤야민 크리스텐센은 이 장면들을 종종 멜리에스 영화에서 본 특수효과를 이용해서 펼쳐 보인다. 하지만 이 장면들이 우스꽝스럽기는커녕 오싹해지는 것은 만들고 있는 쪽에서 지금 이걸 진심으로 믿고 있구나, 라는 설득을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민담과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들처럼 보였지만 여기에 교회가 개입하면서 고문이 등장한다. 벤야민 크리스텐센은 그 과정의 세부를 묘사하는데 망설임이 없다. 여기서 이 영화가 그런 이야기들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시기에 만들어졌단 생각을 해야 한다. 게다가 신성모독 장면을 재연하는데 망설임이 없다. 그래서 <헥산>을 보고 있으면 이래도 괜찮은 것일까, 라는 장면들과 마주치게 된다. (상) 마녀와 악마에 관한 삽화 / (하) 사탄의 북소리에 맞춰 춤추는 들린 자들(the possessed) (사진: “Häxan( 1 , 2 )", IMDb) 벤야민 크리스텐센이 1921년에 이 영화를 만들면서 프로이트의 저술을 읽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알지 못한다. 프로이트는 아직 살아있었고, 『쾌락원칙을 넘어서』를 발표한 직후이다. <헥산>의 마지막 연대기는 동시대에 이른다. 중산층 가정의 평범한 여성은 몽유병에 시달린다. 그리고 그녀는 몇 가지 과정을 거쳐서 정신병원으로 보내진다. 그 당시 정신병원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미셀 푸코의 책에 잘 설명되어 있다. 고문 장면뿐만 아니라 성상 모독, 마녀에 관한 찬양, 중세 교회에 대한 적나라한 재판 장면과 함께 여성의 누드, 신체 훼손, 시체 손상에 이르는 장면들이 등장하면서 개봉 당시 스웨덴과 덴마크의 검열은 통과했지만, 독일과 프랑스, 특히 미국에서는 검열에서 문제가 되어 개봉을 위해 재편집이 불가피했고 상당 부분이 삭제되어 국가별로 여러 판본이 남아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여러 판본이 만들어졌다. (내가 보지 못했지만) 가장 흥미로운 판본은 1968년 메트로 픽쳐스 코퍼레이션이 <헥산; 옛날 옛적부터의 마녀들(Häxan; Witchcrafts through the ages)>이다. 이 판본에서는 『네이키드 런치』의 윌리엄 버로스가 영어 나레이션을 한다(고 한다). 이 무렵 윌리엄 버로스는 마약중독 상태에서 장 주네를 둘러싼 친구들과 친교를 맺던 시기였다. 어떻게 궁금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정작 이 판본의 복원 소식은 들리지 않고 1976년부터 1922년 판본을 원본에 가깝게 몇 차례에 걸쳐 복원하고 있다. 물론 원본을 복원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윌리엄 버로스의 판본이 궁금하다. 아마 언젠가는 될 것이다. 나는 기다릴 수 있다.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책에는 저자의 후기가 없다. 책을 끝낸 단상만 있을 뿐이다. 그곳에는 이 책이 박사논문을 보완한 것이라는 정보와, 기억과 망각에 대한 상념과, 고마운 이들에게 전하는 문장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글은 책에 싣지 않은 후기, 모두 떠난 뒤에 도착하려고 일부러 늦게 출발한 이의 기록이 될 것이다. 박사논문을 쓰면서 나는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먼저 드는 질문은 왜 사람들은 누아르에 대한 인상이 다들 제각각일까 하는 것이었다. 개인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읽어 보면 한국의 대표적인 누아르 영화로 박훈정 감독의 < 신세계 >(2012)를 꼽는 이들이 많다. 몇몇 이들은 김성수 감독의 < 아수라 >(2016)를 언급하기도 한다. 혹은 이해영 감독의 < 독전 >(2018)이나 변성현 감독의 <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2017)을 거론하기도 한다. 대부분 범죄자의 세계를 다룬 영화들이다. 많은 이들이 누아르는 어두운 세계를 어둡게 묘사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두운 세계는 무엇이고 어두운 묘사는 무엇인가? 나의 논문은 이 질문에서 시작하였다. 두 번째 질문은 누아르 문헌들을 읽으면서 생겨났다. 여러 연구자가 글을 시작하면서 누아르 영화는 장르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은 누아르 영화는 분위기나 스타일이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왜 이런 주장을 펴는 것일까? 이것이 두 번째 질문이었다. 논문은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첫 번째 질문은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두 번째 질문은 글을 마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책에서 적었듯이 한국 누아르는 시대와 지역을 가로지르며 합치되고 분기되는 혼종성의 산물이다. 시대의 경로에 지역의 특수성이 결합한다. 할리우드 고전 누아르에서 한국 누아르에 이르는 길에는 시대와 지역의 여러 흔적이 흩어져 있다. 누아르 장르가 혼종성의 산물이고 장르 역시 혼종성의 산물이기에 이는 당연한 일이다. 고전 누아르도 어느 날 불쑥 솟아난 지대가 아니다. 프랑스의 시적 리얼리즘과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와 미국의 하드보일드 소설의 영향을 받았고,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와 실존주의 담론도 가세했다. 기원에 대한 추적은 기원을 해체한다. 기원이나 종점도 없이, 이상이나 목적도 없이, 그렇게 휩쓸리고 뒤섞이며 흘러온 결과가 지금의 한국 누아르 영화이다. 나는 책에서 이 과정을 추적했다. 내가 원했던 것은 명확한 지도가 아니라 흔적들의 성좌였다. 그렇다면 연구자들이 누아르는 왜 장르가 아니라고 했는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 역시 어렴풋이 드러난다. 결국 나는 연구자들이 누아르 글을 시작하면서 짧게 언급한 한두 문장을 오랜 시간에 걸쳐 추적한 셈이다. 그렇지만 이 작업이 허망하지는 않다. 연구자는 앞선 연구자들이 남긴 가벼운 문장에 의문을 품고 긴 주석을 남겨 놓기도 한다. 『누아르의 타자들』은 연세대학교에 박사논문으로 제출한 「한국 누아르 영화의 위상과 표상」(2022)을 편집한 책이다. 일련의 과정은 영화의 편집 공정과 유사했다. 어쩌면 논문을 쓰고 책으로 펴내는 과정 전체가 나에겐 영화를 제작하는 공정을 상기시킨다. 차이가 있다면 영화를 만드는 작업에서는 프로듀서의 역할을 했지만, 책을 만드는 공정에서는 영화감독의 입장이 되었다는 점이다. 영화감독들과 오래 일하면서도 몰랐던 그들의 내면을 훔쳐본 셈이다. 책을 출간하면서 논문의 앞부분을 크게 줄였다. 논문에는 장르 이론과 필름 누아르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구성도 바꿨다, 장과 절로 나뉜 논문을 책에서는 장만으로 엮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박찬욱 영화에 관한 비평 글을 실었다. 영화로 치면 마지막 편집본을 수정해 극장 개봉을 한 것이다. 편집본의 앞부분을 덜어내고 전체 구성을 손보고 보충 촬영을 실행한 셈이다. 나는 책에서 누아르의 계보와 계열을 정리했다. 고전 누아르에 영향을 끼친 사조에서 시작해서 고전 누아르, 네오 누아르, 홍콩 누아르를 거쳐 글로벌 누아르에 이르는 여정과 이 지류들이 한국 누아르로 편입되는 흐름을 추적했다. 여기까지가 한국 누아르의 위상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나머지는 한국 누아르 영화들에 대한 비평이다. 앞부분이 한국 누아르의 계보에 해당한다면 뒷부분은 한국 누아르 영화의 계열이다. 책을 쓰면서 나는 두 가지 목표를 가정했다. 하나는 누아르라는 울창한 숲을 조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뻗어 있는 나무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독자들이 누아르의 검붉은 숲길을 함께 걷길 바랐다. <말타의 매>(존 휴스턴, 1941)와 <첩혈쌍웅>(오우삼, 1989) 중 (사진: " The Maltese Falcon ", " Dip huet seung hung ", IMDb) 한국 누아르 영화는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한국 누아르 영화가 세계 관객에서 주목받은 이유는 이 잔인하고 폭력적인 감각 때문일 것이다. 단지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장면들로만은 설명되지 않는 이 극단의 감각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이를 해명하기 위해 나는 필름 누아르의 장르 특성과 한국 현대사의 지난 상흔을 탐색했다. 필름 누아르는 이름 그대로 ‘검은 영화’이다. 그렇다면 ‘검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책에서 이 단어의 문화적 의미를 탐색했다. ‘검다’라는 것은 폭력과 섹스의 기표이다. 검은 것은 따라서 두렵고 매혹적이다. 검게 내려앉은 도시에서 낯선 남녀가 만나는 것은 두렵고도 매혹적인 일이다. 누아르가 그리는 세계가 이런 풍경이다. 빗물이 고이고 네온이 비치는 거리에서 낯선 남녀가 만난다. 유혹과 살인의 예감이 얼굴을 스친다. 누아르는 명암대비가 선명한 키아로스쿠로 조명으로 이 공간을 채색한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는 할리우드의 누아르이다. 여기에 낭만과 비애와 비정이 교차하는 홍콩 누아르가 접속한다. 누아르는 시각적이고 촉각적이다. 한국 누아르 영화는 시각적이고 촉각적일 뿐 아니라 후각적이기까지 하다. 한국 누아르에는 피 냄새가 난다. 피의 비린 내음이 관객의 감각을 적신다. 그래엄 그린(Graham Greene)은 누아르 영화를 ‘피의 멜로드라마(Blood Melodrama)’라고 칭했는데 이는 한국 누아르 영화에 적절한 표현이다. 나는 누아르의 계보를 그리기 위해 고전 누아르, 네오 누아르, 글로벌 누아르를 탐색했다. 이 과정이 한국 누아르에 이르는 궤적의 수평선이라면 홍콩 누아르와 일본 누아르는 수직선이다. 이 선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한국 누아르가 있다. 이 지도는 평면도가 아니다. 여러 굴곡이 있는 입체적인 도형이다. 구릉은 솟았다 꺼지고 길은 사라졌다 나타난다. 책에도 적었듯이 한국 누아르에 영향을 준 두 편의 영화가 있다. 오우삼 의 < 영웅본색 >(1986)과 쿠엔틴 타란티노의 < 펄프 픽션 >(1994)이다. <영웅본색>은 홍콩 누아르를 세계에 알린 영화이고 <펄프 픽션>은 글로벌 누아르를 견인한 영화이다. 할리우드의 필름 누아르는 1950년대 이후 주춤하다가 1970년대 과도기를 거쳐 1980년대 초에 네오 누아르로 부활했다. 1992년은 필름 누아르의 분수령이 되는 해였다. 이 해에 < 원초적 본능 >(폴 버호벤, 1992)과 < 저수지의 개들 >(쿠엔틴 타란티노, 1992)이 개봉했다. <원초적 본능>은 네오 누아르의 정점을 찍은 영화이고 <저수지의 개들>은 네오 누아르에서 글로벌 누아르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되었던 영화이다. 1992년은 또한 한국 누아르의 시작을 알린 < 걸어서 하늘까지 >(장현수, 1992)가 개봉한 해이기도 하다. 한국 누아르의 연대기에서 내가 주목하는 시기는 2000년 전후와 2010년 이후이다. 2000년을 전후해 < 해피엔드 >(정지우, 1999), < 텔미썸딩 >(장윤현, 1999), < 복수는 나의 것 >(박찬욱, 2002)이 개봉했고, 2010년 이후에 < 황해 >(나홍진, 2010), < 악마를 보았다 >(김지운, 2010), <아수라>(김성수, 2016)가 나왔다. 2000년 전후는 한국 누아르가 성숙한 시기이고 2010년 이후는 한국 누아르가 숙성한 시기이다. 달리 말하면 한국 누아르가 화려하게 꽃을 피운 시기가 2000년 전후라면 2010년 이후는 한국 누아르가 독한 향기를 내뿜던 시기였다. 그 향기는 비린 피 내음이기도 했다. <악마를 보았다> 중 <복수는 나의 것>에서 이미 조짐은 보였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간을 씹어 먹고 아킬레스건을 자른다. <황해>는 칼로 쑤시고 도끼로 찍는다. 피와 살점이 사방에 튄다. <악마를 보았다>에선 신체를 절단하고 인육을 먹는다. <아수라>는 집단 학살로 끝난다. 한국 누아르는 왜 이렇게 잔혹한 것일까?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나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한국 현대사의 사건들을 돌아보았다. 내가 주시한 역사의 현장은 1997년의 IMF 외환위기와 2014년의 세월호 참사였다. IMF 외환위기는 신자유주의의 도래를 알리는 사건이었고, 세월호 참사는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폭로한 사건이었다. 한국 누아르 영화는 한국인들이 조우한 집단 외상의 표현이다. 집단 외상이 유혈과 학살의 드라마로 펼쳐진다. 가학과 자학의 피의 멜로드라마가 전개된다. 시대의 외상이 한국 누아르를 검붉게 물들였다. 한국 누아르의 집단적 자멸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은 한국 누아르에 대한 영화 비평인 동시에 한국 사회에 대한 문화 비평이다. 책의 저자가 자신의 책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쩐지 민망하다. 그래서 일부러 책에 저자 후기를 넣지 않았다. 저자는 숨어 있는 것이 좋다고 여겼다. 그러나 일부러 약속 장소에 늦게 도착한 이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터이니 쑥스러운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강봉래(영화문화비평가) l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 전공으로 문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임상수 감독의 < 눈물 >(2000)과 허진호 감독의 < 외출 >(2005) 프로듀서를 했고, 허진호 감독의 < 행복 >(2007)을 제작했다. 저서로 『누아르의 타자들』(2025)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