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난][영상] 신인배우 유다인 첫 주연 〈혜화,동〉언론시사회에서 만나다
- 제작년도
- 2011
일상에서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자면, 대화 당사자들 이외의 청자를 반드시 요하는 대화(예컨대 공개토론회), 그러한 청자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대화(삼삼오오 어울려 길을 걸으며 재잘거리는 이들부터 서로 고성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다투는 이들까지), 마지막으로 그러한 청자를 철저히 배제하는 사적인 대화가 있을 것이다. 영화는 이 모든 대화들을 담아낼 수 있지만, 일종의 ‘부재하는 청자’로서의 카메라/마이크가 대화당사자들의 묵인 하에 채록한 것 같은 인상 - 극영화든 다큐멘터리든 이러한 묵인의 인상이 없다면 그것은 순전히 도청이나 몰래카메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을 주는, 세 번째 범주의 대화 상황의 구성에 특별히 관심을 쏟는 매체다. 물론 이 사적인 대화는 그 내용에 따라 고백이나 약속 같은 친밀한 것으로부터 모의나 협박 등 적대적인 것까지 수준을 달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대화 상황의 특수성에 걸맞은 영화적 표현은 어떤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은 유성영화가 탄생한 이래 감독들에게 부과된 중요한 과제다. 굳이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 올해 몇몇 한국독립영화를 보면서 거기 묘사된 대화 상황이 지극히 단조롭고 편향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인데, 특히 많은 평자들로부터 상찬을 받은 윤성현 의 < 파수꾼 >은 내겐 오히려 리얼함이 과장된 적대적 대화나 그도 아니면 대화가 실패하는 상황이 교차되는 상황을 제법 기교를 부린 내러티브, 카메라워크 및 편집으로 눈가림한 좀 미숙한 영화처럼 보였다. (이와 유사한 인상을 주었던 독립영화로 윤종빈 의 < 용서받지 못한 자 >가 떠오른다.) 특히 또래 남녀학생들이 지하철 안에서, 길 위에서, 그리고 중국집에서 주고받는 대화 상황을 연출한 방식 - 아이들의 모습을 잘게 나눈 쇼트들로 분할해 보여주면서 음악만 얹어 뮤직비디오 풍의 장면을 만들거나, 대화의 전체 맥락을 그려내지도 않은 채 한 두 마디 말만 불분명하게 들려주고는 그에 반응해 웃는 광경만을 보여주는 TV드라마 같은 방식 - 을 보면, 과연 이 감독이 일부 평자들이 상찬한 대로 동시대 아이들의 초상을 제대로 다룬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진다. 윤성현이 사소한 것으로 치부한 이 장면들은, 예컨대 앤드류 부잘스키나 알렉스 로스 페리 같은 미국독립영화계의 ‘멈블코어’(mumblecore) 작가들에게서라면 그 자체로 훌륭한 영화적 소재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감독은 ‘파수꾼’이라는 제목이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가져온 것이라 했다지만 그는 J.D.샐린저가 <프래니와 주이>의 작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 같다. 적대의 언어가 아니라면 대화 상황을 의미 있게 영화적으로 구성해내지 못하는 난점은 (개별 영화들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많은 다른 독립영화들에서도 발견된다. 내밀함을 요하는 대화 상황은 어쩐지 진부하고 낯간지러운 방식으로만 묘사되고, (홍상수의 영화나 부당하게 냉대 받은 배창호 의 < 여행 >같은 중견감독들의 ‘독립영화’, 그리고 노영석 의 < 낮술 >이나 윤성호 의 영화 정도를 제외하면) 평범한 대화의 이면에서 혹은 그것을 굴절시켜 다양한 감정적 효과를 끌어내려는 연출의 사례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다수의 한국독립영화들이 장르적이기보다는 리얼리즘적이기를 - 혹은 적어도 장르의 리얼리즘을 - 추구한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경묵 의 < 줄탁동시 >는 적대적이거나 진부한 대화 상황, 그도 아니면 침묵의 순간들로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지극히 동시대적인 한국독립영화다. 어쩌면 오늘날 한국독립영화에선 대화의 기술을 잃은 자들의 도착적 자기표현으로 폭력( 양익준 의 < 똥파리 >와 전규환 의 < 애니멀 타운 >)과 침묵( 박정범 의 < 무산일기 >)만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 독립영화의 제목을 빌려 말하자면 ‘짐승의 (대화의) 끝.’ 보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말을 걸어오는 쪽이 있다면 그건 여성들이다. 때로 그녀들은 거의 당혹스러울 만큼 직설적인 표현으로 - 이서 의 < 사람을 찾습니다 >나 양익준의 중편 <미성년>에서처럼 - 단조로운 (남성적) 대화의 세계에 신선한 공기를 더한다. 혹은 오직 그녀들만이 세속적인 소통의 기술과 그 필요성을 안다( 민용근 의 < 혜화, 동 >과 박정범의 <무산일기>). 비언어적 표현(제스처와 폭력) 혹은 반언어적 표현(적대의 언어)은 남성의 편에 언어적 표현은 여성의 편에 할당하는 식으로 전통적 역할에 있어서의 전도(顚倒)가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야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지만, 대체 이러한 전도가 겨냥하고 있는 영화적 지향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올해는 수확이 괜찮은 편이었다. 열정적인 영화광은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새로운 영화가 나오면 챙겨보는 관객인 나는, < 무산일기 >, < 애니멀 타운 >, < 파수꾼 >, < 혜화, 동 >, < 엄마는 창녀다 > 등의 영화를 보며 기분이 좋았다. 이 영화들은 상업영화에 전혀 뒤지지 않는 완성도와 재미를 가졌으며, 성찰의 기회를 덤으로 얹어주는 뿌듯한 꾸러미였다. 앞으론 ‘돕는 기분’으로 독립영화를 보러가는 일이 줄어들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 무척 기뻤다. 하지만 그 기분이 계속 유지되지는 못했다. 서울독립영화제, 미장센 영화제 등을 찾으며 느낀 낭패감은 앞서 느꼈던 즐거움을 다시 고민하게 만들었다. 아, 어쩌지. 재미가 없는데. 이상하게도, 과거 단편영화에서 이루어졌던 실험들이 근래에 들어선 오히려 장편영화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최근의 단편들은 세련된 연출과 높은 퀄리티의 장비들로 보기는 훨씬 좋아졌지만 보고나서 내가 뭘 봤는지 자문했을 때 스스로 답을 내놓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가장 많은 종류는 스타일에 함몰돼 본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잊고 있는 부류이다. 몇몇 영화제에서 이런 류의 영화가 무려 상까지 받는 모습을 보고 ‘이 사람들 편먹고 짜고 치고 있는거 아닌가?’라는 극단적인 상상까지 해보기도 했다. 물론 아닐 것이다. 그만큼 나는 이해가 안 갔다. 정말, 상 줄 영화가 그렇게 없었단 말인가? 단편영화의 매력은 과감함과 새로움이다. 적은 제작비와 짧은 시간으로 치고 빠지는 이 제작 형태에서 들어있어선 안될 것이 ‘안전함’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제를 찾았을 때 시간이 없어서 단 1편만의 영화를 볼 수 있다면 난 항상 단편 모음을 선택하고는 했다. 3-4편의 영화 중에 무조건 1편 정도는 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너무 안전하다는 느낌이다. 단편영화가 스스로 생명력을 가진 하나의 작품이 아닌, 장편 영화를 위험 징검다리로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만약 그렇다면 단편은 장편을 위한 이력서에 불과 하지 않는 것인가? 그럼 단편 영화는 투자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단편 영화도, 그런걸 보고 실망한 나도 너무 불쌍하다. 관객은 앞질러가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의 영상을 섭취하고 있는 것이 이 나라의 관객들이다. 그들은 판단할 뿐 아니라 온갖 플랫폼으로 자신의 의견을 설파한다. 게다가 성격도 고약해서 좋은 소리도 잘 안한다.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라는 얘기다. 잘 보이려고 해봤자다. 누구나 접할 수 있고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어설픈 흉내와 주류에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이 빚어내는 것은 지루함 뿐 이다. 일개 관객에 불과한 내가 굳이 자료원의 페이지를 빌려 주제에 어울리지도 않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불안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죽여주는 단편영화가 나오지 않으면 어쩌지? 멋진 단편을 발견해 주변에 알리고, 그 감독이 진짜 멋진 작품을 찍어 냈을 때 ‘나는 이미 알아봤다.’고 말하는 쏠쏠한 재미를 이제 포기해야하나? 상상만 해도 인생의 재미가 반감되는 느낌이다. 보기에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 맛있는 음식은 먹기 어려운 경우가 더 많다. 지금 이 시간에도 새로운 영화를 고민하고 있는 많은 감독들에게 말하고 싶다. 두려워 말라고. 관객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어쩌나. 어떻게 하면 보기에 좋고 더 받아들이기 편한 영화를 만들까. 부탁이니, 본인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바란다. 영화가 관객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일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영화가 아니다. 감독이 내게 줄 수 있는 것은 감독이 가진 목소리로 형성되는 단 하나의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단편을 장편으로 넘어가는 이력서로 생각하지 않는 그런 감독이 만든 살아있는 단편 영화를 보고 싶다. 나는 계속 극장을 갈 것이다. 그리고 그런 영화가 출연한다면, 매우 기뻐하며 힘닿는 한 주변에 알릴 것이다. 곧 만나게 되길 빈다. 죽여주는 단편영화. 날 좀 죽여다오.
몇 미터만 걸어도 땀이 삐질삐질 흐르던 지난 7월 초, 올 상반기 개봉작 중 1만 관객을 돌파한 독립영화의 젊은 피 3인과 자리를 함께 했었다. < 혜화, 동 >의 민용근 감독, < 파수꾼 >의 윤성현 감독, < 무산일기 >의 박정범 감독이 그들이었다. 상복도 많았고, 관객들의 사랑도 담뿍 받은 만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인터뷰가 진행됐다, 고 기억된다. 세 감독 모두 서로 동년배 친구사이거나 이미 영화제 등을 통해 얼굴을 익힌 사이인지라 따로 인사를 나눌 필요가 없을 만큼 인터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상반기에 특히나 사랑을 받았던 만큼 각자의 소회도 남달랐다. 상처받은 스물 셋 혜화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했던 민용근 감독은 이제는 독립영화계에서 유행이 되어버린 ''''찾아가는 GV''''에 대한 뒷얘기를 들려줬다.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았던 터라 매일 자신의 데스크톱 컴퓨터를 켜 트위터로 약속을 잡고 관객들을 만나는 ''''출퇴근 생활''''의 반복이었다는 토로를 들을 수 있었지만 그 기저엔 당시의 설렘과 데뷔 감독으로서의 흥분이 묻어나고 있었다. 연이은 국제영화제에서의 수상으로 받은 상금을 바탕으로 차기작을 만들 수 있게 됐다는 박정범 감독은 탈북자를 친구로 둔 고등학생에게 지속적으로 메일을 받았노라 털어놨다. 그만큼 < 무산일기 >가 탈북자를 둘러싼 한국사회의 비정함을 기민하게 포착했다는 반증이리라. 박정범 감독은 민감한 주제인 만큼 탈북인들에게 누가 되지나 않을까, 또 탈북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나쁜 영향을 끼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렇기에 박정범 감독은 ''''작가가 가져야 할 사회적 책무''''란 표현을 썼을 터다. 전날 새벽까지 이어진 작업 덕에 이날 가장 늦게 도착한 윤성현 감독은 할 말이 가장 많아 보였다. 세 사람의 젊은 피 중 가장 혈기왕성하다랄까? 기사에서는 전부를 실을 수 없었지만, 그가 첫머리부터 꺼낸 화두는 배급환경에 대한 문제였다. 독립영화 감독이라면, 아울러 독립영화를 사랑하고 지켜주고 싶은 이라면 누구라도 생각해 봤을 바로 그 문제. 데뷔작에서 남다른 주목을 받은 것은 차치하더라도 감독이라면 제 새끼와도 같은 완성품을 더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고픈 마음, 그 누구도 다르지 않으리라. 사실 이 세 명의 감독과 얘기를 나누며 귀결되는 것 또한 바로 이 배급환경의 문제였다. 천만 관객 시대에 1만 돌파가 큰 뉴스거리가 될 수밖에 없는 독립영화의 배급환경 말이다. 첫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영화진흥위원회가 직접 운영하는 인디플러스가 개관한 것이 올 3월이다. 많은 독립영화인들이 전용관의 복구를 안도해야 할지 반신반의했던 것은 점점 축소되고 있는 독립영화, 작은영화 상영관의 숫자들 때문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일 터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도 자연스레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지방극장들의 브랜드화랄지, 멀티플렉스를 소유한 거대 배급사들의 적극적인 움직임과 같은 실질적인 논의가 오고갈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언제, 어떤 독립영화인과 이야기를 나누어도 솔깃하고 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방안은 시군구 단위 구청이나 시민회관 등의 스크린을 이용, 독립영화를 평소 접하기 힘든 관객들과의 만남을 실질적이고 효율적으로 추진하는 내용일 수밖에 없다. 독립영화를 지속적으로 지지하는 관객들만큼 향후 힘을 보태줄 수 있는 관객들이 바로 독립영화를 처음 접하고 그 오묘한 맛을 알아가는 대중들일 테니 말이다. 며칠 전 해외의 작은영화를 수입하는 한 영화인을 만났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독립영화''''란 정의가 유효한가 물어왔다. 그러면서 좋은 영화를 알아보는 관객의 힘은 변함이 없다, 그런 만큼 멀티플렉스에서 운영하는 예술영화전용관들에 힘을 실어주는 기사를 좀 더 많이 쓸 필요가 있는 것 아니냐고 힘을 주듯 말했다. 관점은 다를 수 있겠지만, 결국 질문은 하나로 귀결되는 듯 했다. 멀티플렉스가 점령한지 오래인 현 지형도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관객들과의 접점을 넓혀갈 수 있을까. ''''좋은 영화는 결국 관객이 알아본다''''식의 낙관주의에 빠져있는 독립영화인은 분명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비관주의에 빠지기엔, 상업영화들의 게으름을 반성케 하는 독립영화들이 예나지금이나, 더욱이 요 몇 년 연이어, 더 활발히 출현하고 있다. 지내온 시간만큼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배급환경에 대한 다양하고 성숙한 논의들이 쏟아져 나오길 기대해 본다. 물론 이 배급환경을 어떻게 만들어갈지에 대한 열쇠를 함께 쥐고 있는 문화부와 영진위 그리고 관련 민간 자본들의 자성과 변화가 수반되어야 할 터다. 개인적 바람이 있다면, 내년 여름 이 세 감독과 다시 만나 개선된 배급환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