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서기
- 감독
- 김주원
- 제작년도
- 2017
5월 31일 월요일 500미터쯤 걷고 카프성모병원에서 처음으로 멈추었다. 거기서부터 서쪽으로 꺾어 걸어갈 생각이었다. 카카오맵으로 아람누리도서관 방향을 헤아렸다. 이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알겠다. 오전에 영상자료원 담당자에게 메일이 왔다. 바쁘신 와중에 혹여 (이미 한 번 미룬) 마감일을 잊으셨을까 하여 리마인드 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럴 수 없다, 지금은 안 된다, 이 시점에 한국 영화계가 이런 글을 읽어서는 안 되며 우리는 이 마감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노트북과 기계식 키보드, 그 외에 필요한 책들을 백팩에 챙겼다. 슬리퍼는 새것이고 푹신해서 충분히 믿을 만했다. 걸어서 가면 어리석은 초고를 돌이킬 수 있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거라는 확신을 품고, 나는 아람누리도서관으로 향하는 최단 거리의 도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전히 혼자이기를 원했다.* 어제까지 내가 쓴 초고는 왜 우리의 비디오 에세이가 박무석이 곽철용 앞에서 ‘불나비’를 부르는 < 타짜 >의 장면에서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었다. 금정연(V.O.) : 저는 늘 최동훈을 한국의 셰익스피어라고 생각해왔어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 배역 대신 배우의 이름을 말하는 게 훨씬 자연스러운 다른 많은 영화들과 달리 고니나 아귀 같은 이름은 제게 이아고나 오셀로처럼 대체할 수 없는 고유명으로 느껴집니다. 둘. 영국인들이 셰익스피어를 즐겨 인용하듯 한국인들은 <타짜>를 인용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하지만 그와 별개로 나는 <타짜>가 21세기 한국 영화 산업에 대한 은유, 나아가 일종의 선언이라고 생각한다. 흥행=도박이라는 오래된 비유. 두 개의 충무로가 있다. 올드 충무로와 새로운 충무로. 올드 충무로는 충무로에 있다. 새로운 충무로는 강남에 있다. 그런데 왜 충무로지… 최동훈의 영화에서 올드 충무로를 대표하는 건 곽철용이다. 그는 올드 충무로의 큰손으로 박무석 같은 감독들을 고용해서 영화를 찍어내는 제작자다. 새로운 충무로를 대표하는 건 물론 고니다. 그는 신진 제작자 정마담, 동료 감독 겸 시나리오 작가 고광렬과 손잡고 올드 충무로의 아성에 도전한다. 아귀나 짝귀 같은 타짜들이 올드 충무로를 대표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들은 올드 충무로의 대표적인 감독들이다. 다만 지나치게 성공한(성공했던) 아웃라이어일 뿐, 제작자 중심의 시스템 속의 플레이어들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고니를 가르친 평경장 역시 타짜지만, 다른 타짜들과 달리 시스템에 한 발만 걸친 일종의 독립영화감독이라고 할까, 상대적으로 인지도는 떨어지는 편이다. 결국 <타짜>의 심층 서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고니가 박무석이 만드는 독립영화에 우연히 제작부로 참여하며 영화라는 도박판에 발을 들이고, 독립영화계의 거장인 평경장 밑에서 본격적인 연출을 배우며, 신진 제작자 정마담과 의기투합해 메이저 영화판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오지만, 정마담 또한 기존의 제작자들과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절-홀로서기 하는 이야기, 다시 말해 충무로가 제작자 주도의 영화판에서 감독 주도의 영화판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 혹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선언하는’ 영화다… 금정연: 박무석이 노래하는 장면의 메시지는 분명해요. 그는 자기 자신이나 관객이 아닌 사장의 눈치를 봐야 하는 월급 감독입니다. 따라서 박무석은 곽철용에게 망한 흥행은 뒤로 하고, 두 번째 기회를 허락해주기를 구걸하고 있는 거죠. 노래를 통해서.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닌 것이, 그가 부르는 노래 가사를 들어보세요. "얼마나 사무치는 그리움이냐~ 밤마다 불을 찾아 헤매는 사연~" 이는 그가 마음 속에 아직 도박/영화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무엇보다 그가 노래를 부르는 게 정확히 영화의 중간, 정확히 중간점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영화의 구조에서 주인공의 결심이나 변화, 커다란 고난이나 가짜 희망 같은 중요한 사건에 할애되어야 할 중간점을 박무석에게 주고 노래를 부르게 한다? 이는 박무석 또한 고니와 같은 꿈을 꾸던 감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며, 박무석이 고니와 손잡고 곽철용의 뒤통수를 칠 거라는 복선이잖아요. 더불어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안 좋으셔도 어쩔 순 없지만, 최동훈이 선배 감독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윙크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그리고 이제 최동훈은 감독인 동시에 스스로 거대한 기업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런 최동훈의 윙크를 전유하고 싶은 겁니다. 정지돈: …… 금정연: 지돈 씨, 평경장의 죽음을 생각하세요! 정마담의 제작부장인 빨치산에게 하필 ‘오른팔’을 잘려 ‘기차’에서 떨어져서 죽음에 이르렀다는 게 과연 우연일까요? 정지돈: (대체 무슨 말인지?????) 머릿속으로 정지돈과 대화를 나누며 나는 계속 걸었다. 숏/리버스 숏. 그런데 그걸 대화라고 할 수 있나. 아까부터 정지돈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모르겠다. 이참에 나는 그를 JD로 부르기로 한다. 불만 있으면 말을 하겠지… 문득 장 루이 뢰트라가 [영화의 환상성]에서 소개한 일화가 떠오른다. 앙토냉 아르토의 장례식에서 알랭 게르브랑은 퍽 기이한 일을 겪는다, 아르토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가 게르브랑의 앞을 막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영구차의 운전사가 고개를 돌려 게르브랑을 바라보았고, 그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는데, 그때 운전사의 얼굴이 다름 아닌 죽은 아르토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걸 마주침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의 대화도 대화가 아닐 리 없다. 그리고 나는 대화를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적어도 우리가 도서관에 도착할 때까지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백일 정도 지났을까, 아직 아기 티를 벗지 못한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풀숲에 앉아 울고 있었다. 뭐라도 주고 싶었지만 가진 게 없었다. 르네 도말은 아내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주려고 하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걸 알게 된다고 썼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손에 무언가 넣으려고 한다, 손에 무언가 넣으려고 하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무언가가 되려고 욕망한다, 무언가가 되려고 욕망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살게 된다. 오늘은 5월의 마지막 날이고, 생일을 맞은 영화인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콜린 파렐, 그리고 JD. 나는 여전히 피곤한 얼굴의 JD를 위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다. 생일 축하해요, JD. 6월 1일 화요일 영화 보기를 미루는 건 영화 만들기를 미루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책 읽기를 미루는 건 책 쓰기를 미루는 것이다. 예전에는 읽기=쓰기가 싫어질 때면 영화를 봤다. 그때 내가 보던 것은 농담으로라도 훌륭하다거나 예술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영화들이었다. < 나이스 가이즈 > < 털기 아니면 죽기: 제한시간 30분 > < 위험한 패밀리 > < 홀패스 > < 쥬랜더 리턴즈 > < 베일리 어게인 > <비트윈 투 펀스: 투어 스페셜> <미스터 롱> < 22 점프스트리트 > <기동순찰대> < 젠틀맨 > 등등… 도대체 왜 그런 영화를 보면서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는 거죠? 모르겠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좋다고 말하는 영화는 안 보고 쓸데없는 영화만 보는 마음에는 약간 판도라의 상자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1)호기심에 이끌려 영화라는 상자를 엶 2)형편없는 영화들의 면면에 화들짝 놀라 상자를 닫음 3)상자 속 깊은 곳에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좋은 영화들이 남아 있음 4)세상엔 내가 아직 보지 못한 좋은 영화들이 무척 많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거친 현실을 묵묵히 살아갈 용기를 얻음… 영화를 만들기로 한 다음부터 모든 종류의 영화를 보기가 싫어졌다. 아니, 싫어졌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 선박왕과 그 아내의 관계, 다시 말해 아내를 사랑하는 유부남이지만 아내를 최대한 안 보려는 관계 같다고 할까. 그때 JD가 오만상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그는 소리 없이 입모양만으로 무언가를 말했는데, 아마 ‘꼰대’라고 하는 것 같았다. 확신할 순 없다. 코로나 이후로 많은 것들이 종종 흐릿하게 보인다. 심지어 내 머릿속에 있는 것들도… 나는 예전에도 볼라뇨의 저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유부남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유부남이라는 것. 유부남이 하는 유부남 농담만큼 소름 끼치는 것도 없다. 군필자가 하는 군대 이야기를 제외하면… 어젯밤에는 아내와 함께 영화 VOD 몇 편을 구매했다. 이사하며 IPTV를 바꾸고 사은품으로 받은 5만원 쿠폰의 사용기한이 어제까지였던 것이다. 우리는 일종의 의무감을 가지고 영화를 지독히도 증오하는 사람이 만든 게 분명한 IPTV의 영화 메뉴를 탐색한 끝에 7편의 영화를 선정했다. < 포드 V 페라리 > < 더 파더 > < 스파이의 아내 > < 노매드 랜드 > < 테넷 > < 소울 > < 자산어보 >. 대여 아닌 영구소장으로. 남은 500원은 가볍게 포기하기로 했다. 나도 아내도 딱히 그 영화들을 보고 또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영구소장의 매력은 지금 당장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러니까 일석이조인 셈이다. 쿠폰도 쓰고 영화도 안 보고, 원한다면 영원히 보지 않을 수도 있고… 최근 내가 가장 사고 싶은 책은 크리스티안 키슬리와 제이슨 미텔과 캐더린 그랜트가 함께 쓴 [비디오 에세이 만들기The Videographic Essay]다. 출판사는 이모션북스. [The Films of Bong Joon Ho](Rutgers University Press, 2020)를 쓴 Nam Lee의 트위터에서 표지 사진과 함께 올라온 출간 소식을 본 게 5월 26일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아직까지 어느 서점에도 DB가 등록되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인터넷 서점에서 제목을 검색했다. 그러면서 당장 책을 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간절함도 더해졌다. 이걸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1985년 제니 홀저는 뉴욕 타임스퀘어의 전광판에 이렇게 썼다.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줘(Protect me from what I want). 그럼 나는 내가 읽고 싶은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책을 사려는 걸까(Protect me from what I want to read by buying them)? 그와 함께 기껏 책을 만들어놓고 팔지는 않는 출판사에 대한 의구심도 생겼다. 어쩌면 이건 일종의 복수 같은 게 아닐까? 영화도 출판도 모르는 세상에 대한? 밑도 끝도 없지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이모션북스의 대표는 임재철이다. 이사 온 집은 1층, 우리집 베란다 앞 작은 풀밭에 자리를 잡고 아직 눈곱도 제대로 떨어지지 않은 새끼 세 마리를 키우는 고양이 가족에게 사료와 물을 챙겨주고 집을 나왔다. 작업실에 도착하니 택배 상자가 쌓여 있었다. 일을 할 수 없는 주말에 인터넷 서점을 신경질적으로 뒤지며 헌책 새책 가리지 않고 산 책들이었다. [르 코르뷔지에 - 자연, 기하학 그리고 인간] [보이는 기호학 제3판] [영화음악의 실제] [그림편지] [나의 할아버지 피카소] [알기 쉬운 현대미술의 개념풀이] [얼트 문화와 록음악 1] [파운드 푸티지] [소외과 가속] [밀수 이야기] [젊음의 코드, 록] [영화 같은 시간] [매체로서의 영화] [영상 미디어와 보도] [하이퍼건축] [영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소프트웨어가 명령한다] [영화 음악의 이해] [예술가로 살아남기] [나의 사랑 씨네마] [할리우드의 영화산업] [데뷔의 순간]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죄수 운동법] 등등. 모두 읽지 않아도 되는 책들이다. 책의 단점은 VOD와 달리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몇 주 전에는 읽지도 않을 책을 쌓아두기만 하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서관에서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라는 책을 대출했는데, 아무것도 바뀌진 않고 연체만 되었다. 정작 책은 읽지도 못했어. 6월 2일 수요일 2016년 가을 나는 지금은 사라진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열린 임재철의 6강짜리 강의 ‘스탠리 카벨의 세계’를 들었다. 어느 날의 강의에서 임재철은 이렇게 말했다. 도서관이 없다고 상상해야 한다. 자기 집 책장에 있는 책들을 가지고 해결해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일을 할 필요가 있다. 고민하고 준비하고 모으고 계속해서 부족한 부분을 찾으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끝이 없다. 목숨을 건 도약이 필요하다(비평가들이 이 말을 할 때마다 500원씩 받았다면 나는…). 그는 또 예전에는 외국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책이나 잡지에 소개된 짧은 글만 보고 영화를 상상해야 했는데 나중에 영화를 보면 십중팔구는 자기가 상상했던 영화가 훨씬 더 재밌었다는 말도 했다.* 그날 임재철과 함께 택시를 타고 돌아오며 나는 충무로 아저씨들과 함께 시나리오를 썼는데 끔찍한 경험이었다고, 내가 요즘 하고 싶은 일은 비디오 에세이를 만드는 건데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유튜브는 곧 시작할 거라는 등의 말을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택시가 밤의 도시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불빛들. 그림자들. 사라지는 시간들. 차창에 비친 임재철의 얼굴이 유령처럼 창백하게 보였다. 그는 내게 언제 유튜브를 시작할 거냐고 물었고, 나는 2023년이라고 대답했다. 그때는 그게 좋은 대답처럼 느껴졌는데. 모르겠다. 그날 이후 나는 많은 것을 잊고 복사꽃을 좋아했던 것만 기억하기로 했다. 오늘도 [비디오 에세이 만들기]는 등록되지 않았고, 나는 머릿속에서 나의 [비디오 에세이 만들기]를 빠르게 훑어본다. 그리고 JD에게 말한다. 금정연: 그러니까 일종의 '제텔카스텐' 같은 거예요. 인덱스카드와 펜, 그리고 상자만 있으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거죠. 자, 인덱스카드의 한쪽 면에 영화 정보를 적어요. 제목, 감독, 배우, 몇 분 몇 초에 나오는 씬이다 같은 걸. 그리고 뒷면에는 해당 씬에 대한 짤막한 메모를 남기는 거죠. 그런 다음 이걸 레퍼런스 박스에 넣어두는 거예요. 그리고 얼마가 지난 다음, 상자를 열어 짤막한 메모를 들여다보면서 생각을 정리해요. 그리고 새로운 상자를 열고 빈 인덱스카드에 방금 레퍼런스 박스의 메모를 보며 떠오른 아이디어, 이런저런 생각들을 적어서 넣는 거죠. 여기서 중요한 건 하나의 카드에 하나의 생각만 적는 거예요. 물론 각각의 카드의 한 면엔 레퍼런스가 되는 영화의 씬 정보를 적고요. 그리고 거기에 적절한 흐름대로 번호를 매겨서 새로운 상자(영화 메이킹 박스라고 할게요)에 보관해요. 추가할 카드가 생기면 역시 적절한 위치에, 이를테면 97과 98사이에 넣어야겠다면 97-A라는 식으로 번호를 매겨서, 끼워넣고요. 시간을 들여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날 상자가 꽉 차게 되고, 그안에서 자기들끼리 상호작용하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거죠. 그러다 적당한 시간이 지난 어느날 상자를 열고 인덱스카드를 꺼내서 차례대로 늘어놓으면 짜잔, 한 편의 비디오 에세이가 완성되었습니다! JD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쯧쯧, 혀를 차는 것도 같았다. 나는 조금 억울한 기분이 되었다. [제텔카스텐 – 글 쓰는 인간을 위한 두 번째 뇌]는 [죄수운동법]과 함께 다름 아닌 JD가 내게 권해준 책이었기 때문이다. 정연 씨, 새로운 육체에 새로운 정신이 필요하지 않으세요? 책을 추천하며 정지돈이 말했다. 그 책들의 제목을 들으니 문득 조정래가 떠오르네요. 그러자 정지돈이 반문했다. 조정래…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무언가를 말한다는 투였다. 예전에 등단 40주년을 맞아 [황홀한 글감옥]이라는 제목의 자전적 에세이를 냈거든요. 저도 모르게 황홀한 글감옥에서 죄수운동법으로 운동을 하면서 제텔카스텐으로 글을 쓰는 이미지가 떠올라 버렸네요. 네… 정지돈이 한숨을 내쉬듯 대답하더니 덧붙엿다. 조정래랑 정연 씨랑 두 분이 비슷한 연배신 거죠? 6월 3일 목요일 나는 날씨에 따라 사는 것 같다. 업과 다운을 반복하면서. 맑은 날에는 그늘 찾고 흐린 날이면 짜증난다. 비가 내리는 동안에는 거의 죽어 있다.* 우리는 메세나폴리스에서 만났다. 정지돈과 나 그리고 ㅍ출판사의 편집자 s. 만남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 않다. 나는 비가 와서 반쯤 죽어 있었고, 정지돈은 마감에 치여 반쯤 죽어 있었다는 것 말고는. s와 헤어지고 정지돈과 둘이 남아 밥을 먹으러 갔다. 우리는 닭콩국수를 먹으며 글쓰기와 인간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글을 쓰는 일은 쓰는 사람을 강퍅하게 만들고 주변을 짜증나게 만든다, 물론 우리가 글을 안 쓴다고 더 좋은 사람이 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당장의 작은 마감들이나 이런저런 쪽글들을 줄일 필요는 있다, 그렇게 남는 시간과 체력을 큰 기획이나 한 권의 책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쪽글을 안 쓰고 큰 기획이나 한 권의 책에 집중하려면 먼저 큰 기획이나 한 권의 책이 상업적으로 터져줘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쪽글을 안 쓰고 큰 기획이나 한 권의 책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예전에는 글을 쓸 때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건너뛰거나 비약하거나 반복하거나 스스로의 말을 취소하고 모순된 말을 하는 게 두렵지 않았는데 요즘에는 자꾸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움츠러들게 돼요.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정연 씨, 정연 씨가 올해 몇 살이에요? -서른아홉이요, 만으로… -하, 우리 아빠보다 나이 많아! 나는 깜짝 놀라 정지돈을 쳐다봤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먼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약이라는 감각은 인식의 너비와 관련되어 있어요. 반복이나 모순도 마찬가지죠. 만약 지적인 거인이 있다면 우리의 어떤 말도 비약이라거나 모순이라고는 느끼지 않을 겁니다. -문제는 제가 지적인 거인이 아니라는 사실 아닐까요. 뱁새가 황새 쫓아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 모르세요? 정지돈이 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도 뭐라도 찢었네요… 그날 저녁 작업실로 돌아온 나는 < 고양이를 부탁해 >를 봤다. 얼마 전에 올해로 개봉 20주년을 맞았다는 소식을 SNS를 통해 들었다. 시간 참 빠르다는 생각을 하면서 볼 수 있는 곳을 검색했는데 온라인에는 서비스하는 곳이 없었다. 어째서?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작업실을 뒤지다 먼지 쌓인 디비디를 발굴한 것이다. 오프닝. 인천의 만석 부두에서 교복을 입고 깔깔 웃으며 함께 사진을 찍는 다섯 명의 친구들. 이제는 일종의 유사 아날로그적인 감성마저 느끼게 하는 지글지글한 저화질의 디비디를 통해 그 장면들을 보는 순간 과거의 기억들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20년 전에 내가 이 영화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더라? 모르긴 해도 엄청나게 공감하거나 몰입하면서 봤던 것 같지는 않다. 내 이야기라기보다는 여자친구들의 이야기, 서울 아닌 인천의 이야기라고 생각했겠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순전히 내가 있는 우물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도 재미있게 봤고, 디비디로도 몇 번 더 봤을 것이며, 특히 모임 별이 작업한 사운드트랙 씨디는 닳도록 들었다. 하지만 중반을 향해가면서 영화는 내게 점점 낯설어졌고, 후반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영화처럼 느껴졌다. 예전에는 그냥 흔들리는 청춘?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 친구들의 이야기? 라고만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계급과 주거에 관한 이야기였고, 그것도 노골적인 계급과 주거에 관한 이야기였어. 특히 지영의 집이 무너지고 경찰의 강압적인 태도에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선택하며 감옥에 들어가는 부분은 지금-여기의 상황에서도 곱씹어 볼 부분이 많을 것 같았다. 내가 곱씹어 보기에는 너무 큰 조각처럼 느껴지기는 하지만… 집 앞 고양이 가족들에게 써보고 싶었지만 한 번도 쓰지 못했던 고양이 번역기 어플로 조부모의 장례식장에서 상복을 입은 지영의 품에 안겨 야옹야옹 우는 고양이의 말을 번역해보았다. 고양이: 기분이 좋지 않아요. 고양이: 엄마 아빠는 어디 있어요? 밤. 아내와 와인 마시며 TV 보다가 예전에 사놓았지만 당연히 읽지 않은 [씨네21]을 충동적으로 펼쳐들었다. ‘영화를 향한 질문들’이라는 기획으로 유운성과 김소영과 정성일의 글들이 두 호에 걸쳐 실려 있었다. 그중 김소영의 '영화의 피는 응고하지 않아 - <기생충>을 중심으로 쓴 영화의 (신)물질론'을 읽다가 번쩍!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액체 근대 사회에서는 “사회 같은 것은 없다”라는 마거릿 대처의 악명 높은 구호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된다. 기정의 발언, “그 누구도 돌보지 마”가 번개 천둥을 불러왔다면”이라는 구절을 읽는데, 머릿속에 순간 번개 천둥이 쳤다. 움찔하며 놀라는 JD를 뒤로하고, 나는 급히 노트북을 열어 정지돈에게 메일을 쓰기 시작한다. 금정연(V.O.): 저 역시 가끔은 깜짝 놀랄 만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연결되는 걸 느낍니다. 그것들은 순간이지만 놀라운 형태의 연결성을 보여줍니다. 아니면 단지 제가 취했거나요. 그러나 의식은 그 자체로 소통할 수 없습니다. 연결은 내용에서 일어나지 않으며 내용을 설명하는 것은 핵심을 빼놓는 행위입니다. 텍스트가 매순간 스스로 재현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오늘 지돈 씨를 만나고 돌아온 후 제 머릿속에서는 21세기 첫 20년의 한국 영화사가 새롭게 쓰여졌습니다. 결론부터 말할게요. 지돈 씨, 박무석과 '불나비'는 잊으세요. 우리의 비디오 에세이는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시작해 <기생충>에서 끝날 것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지만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그렇다면, 나중의 나중은 어떨까요? 이것은 계급과 거주과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인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집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길고양이를 자기보다 조금 형편이 나은 친구에게 '부탁'하는 것과 모략으로 다른 사람들을 자리를 차지한 후 "그 누구도 돌보지 마"라고 말하는 것 사이의 거리에 대한 이야기, 김소영이 말하는 <기생충>의 큰 비=도시의 유동성=액체근대와 고양이의 액체성=청춘의 유동성의 이미지를 대비시키는 이야기, 동시에 그것은 어느 소설가가 일간지의 지면을 통해 “나는 속으로 ‘공각기동대’ 실사 영화를 다시 찍는다면 세트를 만들 필요 없이 그냥 여기서 촬영하면 될 거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사이버펑크 전사가 아니므로 그 단지에 살면 틀림없이 불행해질 거라고 느꼈다”*라는 문장을 아무런 수치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쓸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것이 크리스티앙 메츠가 말한 시네마의 실행, 적어도 실행의 한 시도가 될 수 있다고 느낍니다. 여기, 두 영화에서 생각나는 장면을 급히 쓴 인덱스카드를 스캔한 이미지 파일을 동봉합니다. 지돈 씨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두서없는 메일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무척 살고 싶습니다. 당신의 K정연 나는 발송 버튼을 누르고, 그리고 기다린다. 정지돈의 답장을 [비디오 에세이 만들기]가 출간되기를 충동구매한 존 그레이의 [고양이 철학]이 배송되기를 밝은 미래를 아마겟돈을 핵폭탄을 나는 늘 기다린다 come, come, come, nuclear bomb…* *참고자료 [얼음 속을 걷다](베르너 헤어초크, 안상원 옮김, 밤의책, 2021) (*첫 문단 전체는 위 책의 서문과 1974년 11월 23일 일기의 일부를 변형한 것이다) [영화의 환상성](장 루이 뢰트라, 김경온 긴김, 동문선, 2002) (*알랭 게르브랑의 일화를 19쪽에서 인용했다) [마운트 아날로그](르네 도말, 오종은 긴김, 이모션북스, 2014) [참을 수 없는 가우초](로베르토 볼라뇨, 이경민 옮김, 열린책들, 2013) [담배와 영화](금정연, 시간의흐름, 2020) (*임재철에 관한 일화를 149쪽에서 인용했다) [제텔카스텐-글 쓰는 인간을 위한 두 번째 뇌](숀케 아렌스, 김수진 긴김, 인간희극, 2021) [I Seem to Live: the New York Diaries, 1950-1969: Volume 1](Jonas Mekas, Spector Books, 2020) (*1950년 1월 1일 일기의 일부를 변형했다) '영화의 피는 응고하지 않아' (김소영, [씨네21] 1301호) [모든 것은 영원했다](정지돈, 문학과지성사, 2020) (*159쪽에서 연결과 재현에 관한 부분을 인용하며 인용자가 일부 변형했다) ‘지금 무엇이 끝나고 있는 걸까’ (장강명, https://news.joins.com/article/24077719) Morrissey, 'Everyday Is Like Sunday'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본 게재글은, 17-19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국영화박물관 교육 프로그램 ‘청소년을 위한 영화 글쓰기 키트’의 최종 과제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영화 자서전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의 서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영화에 관해서는 망설임이 더했고 지금도 그렇다. 이는 남에게 지적받을 것도 없이 바로 나 스스로 순수한 영화인이 아니라는 자각이 있기 때문이다.” TV 프로그램의 AD와 다큐멘터리 연출자의 시절을 거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본인의 영화 언어가 텔레비전 방언이 밴 변칙적인 언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스스로를 ‘순수한’ 영화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2018년 5월, 그는 <어느 가족>(2018)으로 제 71회 칸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다. 최고의 권위를 가진 영화제에서 전 세계의 영화인들에게 가족 영화의 대가임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영화 언어의 순도가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 그가 전하는 밀도 높은 감정일 것이다. 이별 후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는 이야기(<환상의 빛>), 뒤바뀐 가족에 대한 이야기(<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어머니가 다른 가족의 이야기(<바닷마을 다이어리>), 헤어진 가족의 이야기(<태풍이 지나가고>) 등 줄곧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영화 속에 담아낸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느 가족>에서도 다시 한번 가족의 의미를 재정의한다. 도둑질과 납치 <어느 가족>의 원제는 '만비키 가족'으로, 해석하면 '좀도둑 가족'이라는 뜻이다. 가르칠 것이 도둑질밖에 없다는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세탁 업체에서 일하며 주머니 속 물품들을 빼돌리는 노부요(안도 사쿠라) 부부는 성매매 업소에서 여동생의 이름으로 돈을 버는 가출 청소년 아키(마츠오카 마유), 열 살 정도 되어 보이지만 초등학교에 다니지 않는 쇼타(죠 카이리), 죽은 남편 덕분에 연금을 받는 할머니 하츠에(키키 키린)와 함께 살아간다.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좁은 집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 ‘가족’은 하츠에의 연금과 상습적인 도둑질로 생계를 이어간다. 쇼타는 문득 노부요에게 질문을 던진다. “물건 훔치는 건 나쁜 일이야?” 잠시 고민하던 노부요는 쇼타에게 되묻는다. “아빠(오사무)는 뭐라고 했어?” 쇼타는 답한다. “가게에 진열된 물건은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니래.” 한편, 시간이 흘러 취조를 당하는 노부요는 하츠에를 땅에 묻은 사실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 “버린 게 아니라 주운 겁니다. 누군가가 버린 걸 주웠습니다. 버린 사람은 따로 있는 거 아닙니까?” 어쩌면 정말 좀도둑 가족은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주인 없는 것을 가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의 다툼을 피해 밖으로 나와 있던 5살 유리(사사키 미유)는 방치된 아이였고, 이 가족은 그런 유리를 품었을 뿐이니 말이다. 사람에게 버림받은 이들이 뭉쳐 서로를 보듬어주는 가족이 되었다. 누구의 것도 아닌 물건을 가지고서 겨우 겨우, 그렇지만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가게가 안 망할 정도로만, 사회에 커다란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로만 살아가려 했는데 세상은 그것조차 내버려두지 않는다. 상처를 알아봐주는 존재 “팔 좀 보자꾸나. 여긴 왜 이러니?” 유리를 처음 만난 날, 하츠에는 유독 말라 있는 유리를 걱정하며 온몸에 난 상처를 살핀다. 상처에 꼼꼼하게 약을 바르는 하츠에의 행동은 애정을 표현하는 그의 방식이다. 무심해 보이던 쇼타 또한 유리의 상처를 발견한다. “그 상처 왜 났어?” “넘어졌어.” “그거 화상자국이잖아.” 쇼타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유리에게 “나한테 애써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유리의 상처는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이제껏 겪은 내면의 상처까지 포함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하츠에와 쇼타의 관심 덕분에 유리는 신체의 상처와 함께 마음의 상처도 거의 회복한 것처럼 보인다. 치유 받는 입장에 처해 있던 유리는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난다. 유리는 샤워하는 노부요의 팔을 보고 묻는다. “거기 왜 그랬어?” 그리고는 이내 자신의 팔을 내밀며 자신에게도 같은 위치에 상처가 있음을 보여준다. 얼굴이나 성격은 달라도 흉터의 모양이 꼭 닮은 둘은 정말이지 ‘모녀’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유리가 노부요의 팔을 쓰다듬는 이 장면은 결이 비슷한 단편영화 <손님>(2011)을 떠올리게 만든다. 특히 <손님>은 한국의 고레에다 히로카즈로도 불리는 윤가은 감독의 초기작이라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손님>의 주인공 자경(정연주)은 잔뜩 화가 난 채로 아빠의 불륜녀가 살고 있는 집에 찾아간다. 하지만 그곳에는 죄 없는 어린 남매만이 있을 뿐이다. 남매 중 동생인 기림(송예림)은 이마에 밴드를 붙여주는 자경의 눈썹에 흉터가 있음을 발견한다. “언니 왜 그래. 아파?” 밴드를 붙이는 자경과 눈썹의 흉터를 만지작거리는 기림은 오늘 처음 만났지만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공감하는 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손님>과 <어느 가족>에서 ‘상처를 알아보는’ 행위는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영화의 후반부, 원래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 유리는 친엄마의 상처를 발견한다. 유리가 상처를 만지자 친엄마는 “만지지 말랬잖아.”라며 짜증 섞인 말을 내뱉는다. 친엄마와 노부요의 차이는 여기에서 나타난다. 만지면 아플 정도의, 그러니까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아이의 위로를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물론 아이의 상처 또한 보듬어주지 못한다는 것. 홀로서기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이 각자 다른 프레임 속에서 취조 당하는 이 영화의 후반부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초기작 <원더풀 라이프>(1998)의 장면과도 닮아있다. 화면을 꽉 채우던 가족들은 온데간데없이, ‘혼자’가 된 사람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족의 분리를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는 면회 씬에서도 적확하게 드러난다. 투명 유리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쇼타와 노부요는 사실상 같은 장소에 있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들을 철저하게 떼어놓는다. 동그란 대화 구멍의 은색 테두리라는 또 하나의 프레임을 만들고 노부요의 얼굴을 가두어버린다. ‘집에서 공부할 수 없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거 아닌가요?’라는 쇼타의 질문은 이제껏 쇼타의 세상이 얼마나 좁았는지 말해주고 있다. 양쪽 손끝을 맞대고 검지를 빙글빙글 돌리다가 주먹을 쥐어 얼굴에 콩. 훔친 물건을 숨기던 파란 가방 대신 책이 들어 있는 새 가방을 멘 쇼타는 이제 학교에 다닌다. 오사무 또한 “아빠는 이제 아저씨로 돌아갈게.”라고 말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영화 초반부의 쇼타는 유리에게 밀개떡을 사준다. 천국에 있는 유리 할머니의 존재를 알고 “그러면 이제 잊도록 해.”라고 말한다. 이제는 쇼타와 유리가 노부요와 오사무, 그리고 야키와 하츠에를 잊어야 할 차례가 되었다. 버스 창문 너머의 오사무가 사라지고 나서야 마침내 ‘아빠’라는 말을 내뱉는 쇼타, 쇼타네 가족들과 부르던 노래를 아파트 복도에서 홀로 부르는 유리. 이름을 숨기고 살아가는 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름이나 호칭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 가족들은 서로가 함께였던 순간들을 쉽게 잊지 못할 듯하다. 사실 <어느 가족>을 따뜻한 영화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지만 마냥 슬프고 비극적인 영화로 해석하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보통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 가족은 마음뿐만 아니라 돈 문제로도 얽혀있는 보통 가족이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서로를 ‘선택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이제는 홀로 서야 할 때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비혈연 가족의 이야기가 아닌 모여 있는 가족과 흩어진 가족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1980년대 한국영화 제작 자유화 이전 다큐멘터리와 교육영화, 뉴스영화 등 논픽션 영화를 통칭하는 용어였던 ‘문화영화’는 그 자체로 약간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단어였다. 그 이유의 첫 번째는 ‘문화인이 되도록 교육받는다는 느낌’ 때문에 영화감상보다는 교양교육의 일환으로 여겨졌던 까닭이고, 두 번째는 정부 주도로 제작된 영화들이 대부분인 탓에 감독과 제작자의 순수한 의도보다는 그 이면에 있는 ‘정치적 목적’이 더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극영화 상영 전 ‘무조건’ 상영되는 형태 때문에 ‘강제적’으로 영화를 봐야했고, 이러한 관람형태는 영화관람 전 이미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문화영화에 대한 평가 역시 미학적 완성도보다는 정치적 목적성에 맞춰진 경우들이 많았다. 하지만 수십 년에 걸쳐 수천 편 만들어진 문화영화에서 교육적, 정치적 의도만이 담겨있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문화영화들 중에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따뜻한 한국인의 심성을 그려내며 상처를 어루만지고 함께 발맞추어 살아가길 기대하는 영화들이 있다. 그리고 그 영화들을 만든 감독 중에 배석인 감독이 있다. 소년, 영어를 통해 세상에 눈을 뜨다 배석인 감독은 일제강점기가 한창인 1929년 경상남도 창원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귀한 3대 독자인 아들의 교육을 위해 조금 더 큰 도시였던 김해로 이사를 갔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던 탓에 배석인 감독은 어린 시절부터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에 참석하였다. 이를 눈여겨 본 젊은 목사님은 그에게 영어로 된 성경 한 권을 선물하고, 자신과 함께 영어로 성경공부를 할 것을 제안한다. 현재 80세가 넘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서를 영어로 줄줄 외우고 있을 정도로 그 시절 영어공부는 그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조금씩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영어 단어와 문장은 단순히 번역을 넘어 언어를 해석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하였다. 또한 성경을 통해 접하는 이야기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지속적인 성찰을 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 일본인 선생님의 어이없는 발음과 영어 실력에 실망한 그는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구입해 혼자 영어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중학교 졸업과 함께 해방을 맞이하고, 1946년 부산 동아대학교에 입학한다. 이때는 미군정 시기로 많은 미군들이 부산에 상주해 있었고, 영어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한 그는 대학 재학 중 야간학교와 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주한미군 정보기관 요원에서 영화 <자유전선>의 주인공이 되다 배석인 감독이 대학을 졸업한 1951년 한국은 동족상잔의 전쟁 중이었다. 전투의 현장을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지만 피난민과 가난 등 전쟁의 상처는 그가 살고 있는 부산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주한미군정보기관에 지원하여 정보사령관의 한국담당 정보관으로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한국말을 모르는 정보사령관의 통역을 담당하면서 한국의 여러 상황을 알려주고 조언을 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이 일을 하면서 그는 국제교류의 중요성을 깨닫고 외교관이 되기로 결심한다. 이후 미국 시라큐스 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고, 출국을 기다리던 중 부산 광복동에서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김홍 감독이었다. 훤칠한 외모에 미군복을 입고 있던 그에게 김홍 감독은 미군을 비롯한 UN군의 참전에 고마움을 표하는 영화 <자유전선>을 제작할 예정인데, 그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달라고 부탁한다. 영화배우라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배석인 감독은 거절하였지만, 김홍 감독은 한 달여 동안 그를 설득하고 결국 출연을 수락하게 된다. [사진 1] 영화 <자유전선>의 북에서 내려온 창환(조항)과 논쟁하는 성호(배석인). 오른쪽부터 배석인, 조항, 주증녀 영화의 배경이 된 한국전쟁의 참혹함 못지않게 당시 한국의 영화촬영 현장은 맨주먹밥에 소금물로 끼니를 때우고 거적을 깔고 잠을 청해야 할 정도로 열악했다. 하지만 주증녀, 황해, 조항 등 선배들과 함께 1년여 간 이어진 촬영 속에서 영화에 대한 매력과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라는 점을 느끼게 된다. [사진 2] 영화 <자유전선>에서 브라운 대위를 구하는 육군 중대장 성호(배석인) 이 영화는 전쟁이 끝난 1955년 서울 시공관에서 개봉하였는데, 러시아와 미국의 격전장이 된 한반도와 그 속에서 피어나는 UN군과 국군의 우정을 그린 영화로 전쟁의 참혹함보다는 우방과의 연대에 초점을 맞춘 것에 주목을 받았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배석인 감독은 이후 여러 영화에서 섭외요청을 받았다. [사진 3] 영화 <자유전선>의 홍보전단지 USIS를 거쳐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다 유학과 영화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던 배석인 감독에게 영어교사로 일할 때부터 친분이 있던 미국공보원(USIS, 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원장은 ‘교사는 자신의 생각을 칠판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고, 감독은 영상에 담아 전달하는 것’이라면서 USIS 영화과에서 함께 일할 것을 제의한다. 평소 생각과 마음을 나누는 것에 관심이 많던 그는 부모님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것보다는 부모님 옆에서 꿈을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에 USIS에서의 근무를 택한다. 그곳의 라이브러리에서 수많은 영화들을 보았고, 동시녹음 카메라, 편집기 등을 통해 영화적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마산일보》를 배경으로 지방 독립지가 제작되는 과정을 담은 <지방신문편집자>(1958)라는 문화영화를 처음으로 제작하였다. USIS에서 일한 지 3년째가 되던 1958년, 국립영화제작소로 자리를 옮긴다. 국립영화제작소는 1957년 중앙청 내에 건물을 새로 지어 세트장, 현상소, 녹음실 등을 갖추고, 본격적인 문화영화제작을 하고자 여러 인재들을 영입하던 중이었다. 배석인 감독은 미국의 시각보다는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영화를 만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고, 상대적으로 국가의 지시나 통제에서 자유로운 ‘촉탁’으로 근무를 시작하였다. 촉탁은 과장, 계장 등의 직급이 없는 대신 경력을 인정받아 자신이 제작하고자 하는 작품의 기획안을 올려 통과가 되면 예산과 장비, 인력 등의 지원을 받아 영화를 제작하면 되는 자리였다. 의무적으로 뉴스영화나 홍보영화를 찍을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옮겨간 국립영화제작소의 상황은 듣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영화 관련 장비를 갖추었다고 하였지만, USIS에 비하면 장비의 수준이 낮았고, 장비가 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기술진이 없었다. 영화 관련 용어들도 일본어와 영어, 한국어가 혼재되어 있어 서로 소통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배석인 감독은 먼저 영화 인력에 대한 교육을 시작하였다. 영어로 된 영화사전을 번역하여 직원들에게 나누어주어 익히도록 하였고, 미국 시라큐스에서 파견된 영화교육단의 통역을 맡아 영화에 대한 지식과 기술들을 전달하였다. 시라큐스의 교육으로만은 부족하다고 느낄 때면 따로 직원들을 모아놓고 영화기술에 대해 교육을 하기도 하였다. [사진 4] 국립영화제작소 로고 [사진 5] 중앙청 내에 위한 국립영화제작소 건물. 오른쪽에서 6번째에 서 있는 사람이 배석인 감독 (출처: 국가기록원)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60년 4.19 의거가 일어나고, 혼란스러웠던 당시 중앙청에서 몸을 피해 어느 화장실로 숨었다가 신문 한 장을 발견하게 되는데, 거기 쓰여 있던 것이 노산 이은상 선생의 기행문 『피어린 600리』 였다. 끝없이 철썩거리는 동해의 물결! 백사장(白沙場)가에 박아 놓은 철조망의 마지막 쇠말뚝을 붙드는 순간, 나는 그만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그래, 이것이 피어린 휴전선의 마지막 철조망, 마지막 쇠말뚝이냐! 그래, 내가 이 마지막 쇠말뚝 하나 잡아 보려고 600리를 허위허위 달려왔더냐. 길이 끝났네, 더 못 간다네. 병정은 총 들고 앞길을 막네. 저리 비키오. 말뚝을 뽑고 이대로 북으로 더 가야겠소. 바닷가 모래 위에 주저 앉아 파도도 울고 나도 울고. - 노산 이은상의 기행문 『피어린 600리』 중에서 이은상 선생이 휴전선의 서쪽 끝부터 동쪽 끝까지 600리 길을 걸으며 보았던 분단의 비극, 만나지 못하는 아픔을 영화화하기로 결심했다. 기행문을 참고하여 직접 나레이션을 쓰고 DMZ 지역까지 들어가 촬영한 끝에 17분짜리 문화영화 <피어린 600리>(1962) 1 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1963년 제2회 대종상 문화영화상을 수상하였으며, 제10회 아시아영화제 비극부문과 제13회 베를린영화제에 출품되어 호평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배석인 감독에게는 출품과 수상이라는 공적인 지표보다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 더 큰 기쁨이었다. [사진 6] 영화 <피어린 600리> 한반도에 그어진 38선의 이미지 [사진 7] 영화 <피어린 600리> 철로가 끊어진 채 더 이상 올라 갈 수 없는 금화지구 [사진 8] 영화 <피어린 600리> 금화지구 내 폐허 속에 방치된 부서진 열차 [사진 9] 영화 <피어린 600리> 600리의 마지막 동쪽 끝 해안에 위치한 철조망 이후에도 배석인 감독은 대중들의 감성에 말을 거는 영화를 많이 만드는데, 그 중에서 <새길>(1962) 2 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전쟁 고아들의 비행과 일탈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던 시대에 그들이 일탈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적 문제와 어른들의 책임을 묻고, 비록 죄를 지었지만 자신을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를 다룬 세미다큐멘터리였다. 실제 구두닦이 소년을 캐스팅하여 실감나게 연출한 덕분인지, 이 영화가 전국적으로 상영되었을 때, 영화를 본 마을 사람들은 주인공 소년을 실제 범죄자라 착각하여 범죄자가 된 소년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소년을 마을에서 쫓아낸 웃지 못할 일화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새길>은 궁극적으로 당시 문제아 혹은 범죄자로 터부시되던 전쟁고아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포용을 이끌어 내는 역할을 했다는 점과 극영화의 연출 기법을 차용하여 30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지루하지 않게 한 소년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었다. [사진 10] 영화 <새길> 판사 역할로 출연한 배석인 감독 [사진 11] 영화 <새길> 실형을 선고 받는 광민 [사진 12] 영화 <새길> 감옥에 들어온 광민을 쇠창살 너머에서 보여주는 장면 [사진 13] 영화 <새길> 즐거운 위문공연 장면을 통해 소년원 수감자들도 행복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동등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 한국을 알리고 싶은 노력의 결과물 <팔도강산>(1967) 배석인 감독은 1964년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배우 김희갑과 함께 미국의 영화촬영 현장을 견학할 기회를 얻는다. 이때 미국 남가주 대학에서 특강을 하게 되는데, ‘6.25전쟁’은 알지만 ‘대한민국’은 모르는 미국 학생들과, 텍사스 도서관 내 한국관에 자료가 없어 텅텅 비어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이 충격은 배석인 감독을 다큐멘터리스트로 새롭게 자각하게 만들었다. 아직은 열악한 한국영화산업 환경에서 극영화로 세계무대에 진출하자고만 목소리를 높일 것이 아니라 한국을 알릴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 기반을 튼튼히 닦아 놓는 것이 먼저이고 자신의 사명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독일과 스페인을 거쳐 한국에 돌아온 그는 사비를 털어 책을 구입하여 텍사스 도서관에 한국관련 서적들을 비치하였고, 스페인에서 영화 시작 전 국가를 트는 것을 본 떠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촬영한 영상과 함께 국도극장에서 처음 영화상영 전 애국가를 틀었다. 난데없는 애국가에 관객들이 당황하는 것도 잠시, 한두 명씩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애국가를 제창하던 그날의 기억을 그는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이어 가장 중요한 두 번째 작업에 착수한다. 그것은 극영화 <팔도강산>(1967)을 만드는 일이었다. 당시는 경제 개발과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행은 커녕 자신의 거주지 주변을 벗어나보지도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에 직접 가서 보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나라의 구석구석 아름다운 모습을 영화로라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고, 한 달여 간의 밤샘 작업을 통해 <팔도강산>의 초고 시나리오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극작가 신봉승에게 각색을 부탁하여 몇 개의 씬을 추가하고, 김희갑, 황정순을 비롯하여 최은희, 김진규, 김승호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을 캐스팅하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서울에서만 3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였고, 다른 감독들에 의해 속편도 제작되었다. <팔도 기생>(김효천, 1968), <팔도 사나이>(김효천, 1969) 등의 아류작도 쏟아져 나왔다. [사진 14] <팔도강산>(1967)의 개봉극장인 국도극장 앞에 모인 사람들(출처: 국가기록원) [사진 15] <팔도강산>(1967)의 포스터 [사진 16] <팔도강산>(1967) 사돈(김승호)의 안내에 따라 속리산 법주사를 구경하는 김희갑과 황정순의 모습.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장면 중에 하나이다. [사진 17] <팔도강산>(1967) 사위(김진규)의 안내에 따라 삼천리 시멘트 공장을 구경하는 김희갑과 황정순. 우리나라의 큰 공장과 발전된 산업을 보고 놀라는 황정순의 표정이 재미있다. [사진 18] <팔도강산>(1967) 비행기에서 담뱃불을 붙이는 김희갑에게 “이륙 시에는 답배를 피울 수 없다”고 안내하는 모습이 흥미롭다. TV 다큐멘터리 제작과 63빌딩의 아이맥스 영화관 설립 국립영화제작소에서 꼭 10년을 보낸 1968년, 배석인 감독은 국립영화제작소를 나와 홀로서기에 나선다. 1971년 영화제작자이자 평론가인 호현찬과 함께 한국문화프로덕션을 설립하고, <한국의 美> 등 TV용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KBS에 납품한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의 수익성은 매우 낮았고, 회사는 1년만에 문을 닫게 된다. 이후 배석인 감독은 독자적으로 배프로덕션을 설립하고 프랑스에서 『직지심경』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우리의 출판문화를 알리는 영화 <한국의 출판문화>(1972)를 제작하여 세계도서 엑스포에서 상영하였다. 또한 <게릴라전>, <화생방교육> 등 신병들을 대상으로 한 군교육 영화도 제작하였는데, 당시 시도되기 시작했던 셀 애니메이션 기법을 도입하여 실사영화보다 더 많은 제작비를 들여 영화를 제작하였다. 이렇게 수익성이 없음에도 사재를 털어서까지 문화영화에 매진했던 것은 일종의 책임감이었다. 우리 문화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리고 싶은 마음, 국경을 넘어 해외에 한국을 알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늘 경제적인 이득보다 앞에 있었다. 또한, 언제 실전에 투입될지도 모르는 군인들에게 시뮬레이션을 통해서라도 전술을 완벽하게 체험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책임감도 그의 다큐멘터리 작업을 이끌었다. 1984년 국내 굴지의 기업이었던 대한생명은 우리나라 최고층 건물인 63빌딩을 건설하면서 이 건물 내부에 우리나라의 첫 아이맥스 영화관을 설립하기로 하고, 총책임자로 배석인 감독에게 스카웃 제의를 한다. 늘 새로운 분야의 도전에 주저함이 없었던 그는 곧 문화영화사를 정리하고 아이맥스의 본고장인 캐나다로 떠나 공부를 시작한다. 그리고 돌아와 만든 영화가 <아름다운 대한민국 Dance of the East>(1986)이었다. 20여 년전 <팔도강산>을 촬영할 때 그러하였듯이 대한민국 곳곳을 다니며 장소를 물색하고, 영화를 기획하였다. [사진 19] <아름다운 대한민국>(1986) 촬영 중인 배석인 감독 [사진 20] <아름다운 대한민국>(1986) 촬영 중인 배석인 감독과 촬영기사 박한춘 이 영화는 남북적십자 회담장에서도 상영되었고, 세계 곳곳의 아이맥스극장에서도 상영되었다. [사진 21] <아름다운 대한민국>(1986) 부채춤 장면 [사진 22] <아름다운 대한민국>(1986) 농악놀이 장면 [사진 23, 24] <아름다운 대한민국>(1986) 해외 상영을 위한 시놉시스 문서 하지만 기술과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아이맥스 영화를 만들기는 어려웠고, 이후에는 주로 해외 아이맥스 영화를 수입하여 상영하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했다. 13년 동안 63빌딩 아이맥스영화관을 이끌었던 배석인 감독은 1997년 은퇴하였다. 다큐멘터리스트 배석인 구술의 의의 본 연구자가 배석인 감독의 구술 인터뷰를 진행한 것은 2009년의 일이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물론 현재도 그렇지만) 문화영화는 대부분 소재가 불분명하여 볼 수 있는 작품이 많지 않았고, 감독이나 스태프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또한 당대의 검열서류가 공개되지 않은 탓에 정확한 작품명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된 극영화 <자유전선>(김홍, 1955), <팔도강산>(1968)과 <지상최고의 여정>(1968), 그리고 국립영화제작소에서 함께 일했다는 양종해 감독의 증언, 63빌딩 아이맥스영화관의 개관 책임자였다는 몇 가지 단편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첫 만남을 진행하였다. 극영화 영화인들과의 만남은 많은 자료를 가지고 토론하듯 인터뷰가 진행될 수 있는 반면, 자료가 없는 다큐멘터리 감독들과의 만남은 1차적으로 구술자의 증언에 기댄 채 어둠 속을 더듬어 나가는 듯 한걸음 한걸음 진행되지만 잊혀졌던 작품 하나, 정보 하나를 찾을 때마다 마치 고고학자가 된 양 희열을 느끼게 하는 작업이 될 수 있다. 이런 작업을 통해 발견된 영화들을 볼 때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문화영화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조금은 더 애정 어린 시선으로 감독들이 추구하려고 했던 영화의 핵심에 다가서게 한다. 이 구술을 통해 찾을 수 있었던 두 편의 문화영화 <피어린 600리>와 <새길>이 그러하였다. 분단이나 교화 등의 키워드로만 알려졌던 영화들을 실제로 관람하면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용어로만은 담을 수 없는 당대 대중들의 감성과 소통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구술자와의 만남 이후에 다시 보게 된 영화 <팔도강산>은 ‘한국의 경제 발전상을 알리는 국책영화의 효시’로서만이 아니라 최고의 스타들을 한 영화 안에서 볼 수 있고, 실제 가보기 힘든 전국 방방곡곡을 구경하는 대리만족을 얻으며, 거기에 적절한 위트와 감동까지 선사하여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당대 최고의 오락물이라는 의미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이후 수많은 속편과 아류작이 제작된 것뿐만 아니라 KBS 일일연속극 <팔도강산>(윤현민 작, 김수동 연출)이 무려 3년 동안 방송되면서 전국을 넘어 해외까지 로케이션을 다니며 인기를 구가한 것은 대중들의 호응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구술을 통해 국립영화제작소와 독립프로덕션의 초기 제작형태에 대한 기본적인 지형도가 그려졌다. 이후 국립영화제작소와 문화영화, 그리고 관에서 혹은 독립프로덕션에서 문화영화제작에 대한 연구를 위해 영상자료원에서 2012년 문화영화에 대한 주제사 구술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기본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국 문화영화의 역사와 위치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기를 바란다. 1) 이 영화는 KTV국민방송 e영상역사관(http://www.ehistory.go.kr)에서 볼 수 있다. 2) 이 영화는 KTV국민방송 e영상역사관(http://www.ehistory.go.kr)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