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의 두 사람
- 감독
- 게리 샤먼
- 제작년도
- 1982
- 출연
- 존 포사이스, 프리실라 포인터, 노아 베리 주니어
사이버 세상에 대한 몽상 일주일 내내 밤을 샜다. 조너선 크레리의 [24/7 잠의 종말]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책이 없었다. 어차피 읽을 시간도 없었다. 언제부턴가 집에서 책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책장 구석에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포털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될 정도다. 처음에는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한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에게 책을 빌려준 게 언제였더라? 정지돈에게 프랭크 커머드의 절판된 [종말 의식과 인간적 시간]을 빌려준 건 기억나는데. [유령과 파수꾼들](2018) 출간 기념으로 유운성 님과 함께 북토크를 하느라 그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아닐 수도 있고. 분명한 건 아직 책을 돌려받지 못했다는 건데, 괜찮아요 지돈 씨… 그런데 정말 그 행사는 뭐였을까? 나는 구글에 ‘유운성 정지돈 북토크’라고 쳐보았지만 내가 찾는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이라고 할까? 에이아이는 내게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사람들’과 ‘Kmdb 정지돈’이라는 관련 검색어를 제시해주었는데,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유운성 님을 뵈었을 때 조너선 크레리 책을 번역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게 떠올랐고,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하는 생각도 든다. 신이 있다고 해도 아마 그것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무언가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에이아이가 유일하지 않을까. 요 며칠 트위터에서 화제를 모았던 n행시 짓는 에이아이가 지은 삼행시를 보면 심증은 더 강해진다. 허공에의 질주 내가 밤을 샌 건 김쿠만과 나일선의 소설집에 해설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두 작가의 작품 모두 영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개들만이 안달루시아에서 산다’라는 단편으로 시작하는 나일선의 소설집에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루이스 부뉴엘, 리차드 라우드, 앙리 랑글루아, 차이밍량, 장 뤽 고다르, 장-마리 스트로브 같은 영화인들의 이름들이 이어진다. 네이버에 검색하면 AI가 알아서 김주만이라고 정정해주는 김쿠만이라는 이름은 실은 쿠엔틴 타란티노와 이만희에게서 한 글자씩 빌려온 것이다. 어차피 돌려주지 않을 것을 빌렸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지돈 씨… 덕분에 나는 [축음기, 영화, 타자기](프리드리히 키틀러), [소리의 정치](이화진), [경성과 도쿄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정충실), [영화와 소리]와 [영화의 목소리](미셸 시옹)처럼 영화에 관련된 책들을 읽고,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앨런 식수), [음악 인류](대니얼 J. 레비틴), [사탄 박사의 반향실](루이 추데 소케이), [역사](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내용 없는 인간](조르조 아감벤), [아케이드 프로젝트](발터 벤야민), [미래가 사라져갈 때](자넷 폴), [레트로 마니아](사이먼 레이놀즈), [리믹솔로지에 대하여](데이비드 건켈), [소설의 이론](게오르그 루카치), [미래 이후](프랑크 베라르디 ‘비포’), [자본주의 리얼리즘](마크 피셔), [허구세계의 존재론](미우라 도시히코)처럼 영화와 큰 관련은 없는 책들을 읽었지만 원고는 쓰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비평, 평론, 해설, 뭐라고 부르건, 다른 사람들의 작품에 대해 쓰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고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 작품에 대해 말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말하지 않기. 둘. 최후의 최후까지 마감을 미루고 있다가 더는 미룰 수 없는 순간이 닥치면 눈을 감고 후다닥 써버리기. 한기 씨는 글이 안 써지면 눈을 감고 쓴대요, 언젠가 정지돈은 내게 말했고 그것은 분명 효과가 있다. 가끔(실은 자주) 내가 무엇을 쓰는지 나조차 몰라야 글을 쓸 수 있는 때가 있는 것이다. 중력을 모르기 때문에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처럼. 나는 지금 <루니 툰Looney Tunes>의 로드러너와 와일 E. 코요테의 클래식 루틴을 떠올리고 있다. 배고픈 코요테는 호시탐탐 로드러너를 노리지만 잡을 수 없다. 로드러너가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무슨 방법을 써도 로드러너의 발끝도 못 쫓아가던 코요테가 로드러너를 앞지르는 순간이 오는데, 그건 로드러너가 절벽 앞에서 급제동을 할 때다. 절벽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코요테는 걸음을 늦추지 않고, 로드러너를 지나쳐 허공으로 질주(Running On Empty)한다. 짧은 순간이지만 그때 코요테는 의기양양하고, 자신감에 차 있으며, 공중에 떠 있다. 자신이 공중에 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 전까지는. 비극 주인공이 종국에 도달하는 앎은 자신의 불행을 낳은 오류에 대한 앎이었다, 라고 랑시에르는 [모던 타임스: 예술과 정치에서 시간성에 관한 시론]에서 말한다. 나는 내가 공중에 떠 있어도 절대 모를 거야. 꿈에도 모를 거야, 라고 TV를 보던 어린 나는 다짐한다. 정지돈의 말마따나 내가 “대체로 정신이 나가 있다고 할 수 있다”면 아마 내가 어린 시절의 다짐을 아직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연과 상상 1) 어제와의 이별 - 김쿠만 해설의 결말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아 괴로워하며 트위터 타임라인을 새로고침 하고 있는데 나일선의 트윗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영화 이미지 두세 컷과 직접 찍은 책의 구절(혹은 부감으로 찍은 커피잔)의 이미지를 데쿠파주한 잠언풍의 트윗이었다. 첫 두 장은 검은 화면 위에 적힌 독일어 문장의 이미지였는데, 그 아래 “우리를 어제와 이별하게 만드는 것은 / 균열이 아니라 위치의 변화다”라는 한글 자막이 달려 있었다. 이건 어디에 나오는 거죠? 나는 나일선에게 멘션을 보냈고, 알렉산더 클루게의 어제와의 작별 시작 부분입니다, 라는 친절한 답을 받았다. 그때 나는 비로소 며칠을 끌어오던 김쿠만 해설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마지막 단락은 이렇게 시작한다. “알렉산더 클루게의 영화 < 어제와의 이별 >(1966)은 “우리를 어제와 이별하게 만드는 것은 균열이 아니라 위치의 변화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그것이 김쿠만이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을 통해 하는 일이다…” 2) 메멘토 - 이번 ‘한영한사’는 시간에 대해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영화가 시간을 공간으로 바꾸는 픽션의 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시간이 없고, 가난한 사람이 돈을 생각하듯 내가 시간을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물론 돈도 생각하고… 그런 생각으로 트위터 타임라인을 보고 있는데, 내가 지난해 12월 4일에 ‘한영한사’ 업데이트 소식을 알리며 “쇼미는 끝났지만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한 것 같네요 이번 화에서는 자비스 코커와 토니 블레어와 노엘 갤러거와 벤앤제리가 혼톨로지 음악의 리듬에 맞춰 노래합니다 그래요 뮤지컬이죠”라고 쓴 트윗을 누군가 리트윗 했다는 알림이 떴다. 뜬금없이? 이 시대를 살아가며 SNS를 하는 다른 많은 작가들처럼 혹시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그게 지금 털린 건가? 벌벌 떨며 링크를 클릭해 ‘한영한사’ 9화를 읽었는데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나는 내가 이번 화에 쓰려던 모든 것을 그때 이미 써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론적으로 순수한 선행 기억상실’이라는 소제목을 붙인 단락을 나는 이렇게 쓰고 있었다. 모든 것은 시간 문제다. 요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원고를 마감하는 것도 시간 문제고, 밀린 책을 쓰는 것도 시간 문제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우리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돈? 물론 중요하지. 그렇지만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그러니까 시간이 있기만 하다면. 시간과 관련된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시간과 관련된 문제는 또 있다. 뭘 보고 듣고 읽고 생각하건 약간의 시간만 흘러도 까맣게 잊혀진다는 사실이다. 정지돈이 말하는 몇몇 고유명사들은 나도 익히 아는 것들이었다. 나는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축음기, 영화, 타자기]를 읽었을 뿐만 아니라 역자 유현주 선생을 모시고 출간 기념 북토크를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내용은 내개 전혀 새롭게 들렸다. 혼톨로지? 물론 알지. 사이먼 레이놀즈의 [레트로 마니아]와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물론 혼톨로지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책은 아니지만)을 두어 번은 읽었으니까.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도 읽었다. 반쯤. 나원영과 강덕구가 번역한 마크 피셔의 글들도 읽었고, 큰 상관은 없지만 베리얼의 첫 두 앨범을 최근 LP로 구입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것들은 내게 매번 새롭게만 느껴지는 걸까… 3) 긴 복도 그렇다면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새롭게 하자, 지금껏 내가 한 번도 가져오지 않았던 레퍼런스를 가져오자, 나는 생각했고 조너선 크레리의 [24/7 수면의 종말]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책이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책은 보이지 않았고, 책장 구석에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포털이 있는 건 아닌지 투덜거리면서 트위터 타임라인을 보고 있는데, 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과 e-flux가 연계 온라인 상영을 해서 정여름의 < 긴 복도 >를 볼 수 있다는 트윗이 올라왔다. 나는 링크를 따라 e-flux에서 <긴 복도>를 플레이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책들이 사라지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환상의 빛 김쿠만 해설, 나일선 해설, 한영한사, 그리고 정지돈 작가론까지… 4중의 마감에 시달리다 정지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내 전화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국 영화 속 싸대기 액션, 혹은 액션으로서의 싸대기에 대해서. 혹시 그건 제 싸대기를 때리고 싶다는 뜻인가요? 나는 묻지 않았다. 마감에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는 데 그중 하나는 크고작은 피해망상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지돈은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싸대기는 할리우드에는 없는 한국의 고유한 액션입니다. 그것의 목적은 단순히 상대를 제압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계도 나아가 계몽의 수단인 거죠. 정연씨, 모르시겠어요? 뺨을 맞으면 눈 앞에 빛이 번쩍하는 빛이 바로 계몽의 빛이라는 걸! 라이트 오브 엔라이트먼트(Light of enlightenment)! 과거에 싸대기는 부정적인 액션이었습니다. ‘아부지 뭐하시노?’라는 김광규의 대사, 그리고 이어지는 무자비한 싸대기를 떠올려보세요! 그때 싸대기는 권력의 부조리하고 억압적인 폭력을 상징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그것은 참교육이라는 이름의 사이다가 되어버렸죠. < 베테랑 >이 천만 관객을 넘은 건 황정민이 유아인의 뺨을 때리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장면에 아트박스 사장으로 나오는 마동석을 기억하세요. 황정민에게 바통을 이어받은 마동석이 싸대기 액션의 대명사가 되어 헐리우드까지 진출한다는 사실을요! -하지만 싸대기는 김치 싸대기 아닌가요? -뭐요? -김치 싸대기요. -그게 뭐죠? -김치 싸대기라고요 지돈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그러니까 미래는 드라마다. 정서경 작가가 각본을 쓴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티저 예고편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짧은 영상을 통해 내가 파악한 바로는 가난하지만 구김살 없이 살아보려는 세 자매 앞에 어느날 700억이 든 가방이 나타나고 가질 것인가 돌려줄 것인가 고민하는 사이 사건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게 된다는 내용인 것 같았다. 이건 드라마보다는 영화에 어울리는 시놉시스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던 기억도 난다. 그래서 의아하다기보다는 더욱 기대가 됐다. 지난 원고에서 정지돈은 맨날 보는 애들만 보면 뭐하냐, 안 볼 사람도 봐야 진짜 예술이지, 그래서 문학은 끝났고 영화는 아직 가능성이 있다, 라는 임재철 님의 말씀을 인용했다. 내 생각은 다르다. 기나긴 팬데믹을 거치며 영화 역시 이제는 보는 사람만 보는 매체가 되어 가고 있다. N차 관람러들 아니었으면 내 인생은 공허했을 거라는 박찬욱의 말을 떠올려보라. ‘그’ 박찬욱의 영화도 거듭 관람하는 팬들이 아니었으면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나만 해도 그렇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영화는 거의 보지 않지만, 올해 본 드라마만 해도 벌써 <스물다섯 스물하나>(마지막 두 편은 안 봄), <우리들의 블루스>, <나의 해방일지>, <우린폭망했다wecrashed> 그리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까지. 모두 더하면 영화를 최소한 40편은 볼 수 있었을 시간이다! 마담 보바리, 그것은 바로 나다, 라고 플로베르는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바로 대중이라고 말해야겠다. 지금보다 어리고 민감하던 시절엔 나도 내 취향이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안다. 내 취향은 정확히 대중적이라는 것을, 다만 남들보다 조금 느릴 뿐. 요즘 내가 즐겨 듣는 노래는 2010년대의 히트곡들이다. 정작 그때는 그게 히트했었는지도 몰랐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 마감 때문에 마음이 소금밭인데 홍대에 갔다.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진행하는 영화인 교육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오진우 평론가의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 특강. 길지 않은 특강이었지만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특히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을 직접 제작하는 사람으로서의 경험담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던 점이 특히 좋았다.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의 위상이 너무 애매해서 만들다 보면 차라리 글을 열심히 쓰거나, 영화를 만들거나, 유튜버가 되거나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같은 부분이… 한국의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의 역사와 현황을 일별하는 와중에 박유정의 <The Futures of Future 1>, 정여름의 <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 같은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 작품뿐 아니라 김병규 평론가 같은 분들이 [씨네21] 지면을 통해서 이미지들과 텍스트를 병치시키며 그 자체로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에 대한 스크립트가 될 수 있는 작업을 한 것들을 예로 들며 우리의 ‘한영한사’가 지나가듯 언급되기도 했다. “그리고 정지돈 작가와 금정연 작가가 연재하고 있는 ‘한국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이 있는데… 거의 유일하게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을 이야기하시는 분들이죠. 글쎄요, 영상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데, 뭐랄까, 영상화가 되기를 바라지만… 이루어지기는… (크흡) 모르겠습니다…” 오진우 평론가가 최근에 하고 있는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 작업도 잠깐 소개했는데, 매일매일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모은 <덧 없는 이미지들>(2022)도 그렇고 아이폰으로 직접 촬영한 영상만으로 만든 <영상자료원 가는 길>(2022)도 그렇고, 다른 영화의 장면들을 직접적인 재료로 하지 않는다는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이 글을 통해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엥? 어느 부분이? 라고 되물으신다면… 한국 영화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인용)을 하지 않는다는 부분이…? (*출처: 오진우 평론가의 블로그 https://blog.naver.com/jinu_montage/222855477268 )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지돈 씨에게, 우리가 통화한 게 화요일이던가요? 전화를 끊기 전에 제가 그랬죠. 지돈씨 걱정마세요, 10시까지 제가 김쿠만 해설 쓰고 아침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한영한사 원고 써서 보내드릴게요. 그러니까 와, 좋아요, 하더니 이렇게 물었잖아요. 근데 정연씨, 여태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어요? 그때도 말했지만 있습니다. 최소한 한 번은, 어쩌면 두 번쯤, 생각을 백 번 했다면 그중에서… 지금은 금요일 아침이고 저는 오늘도 밤을 꼬박 새고 말았네요. 그렇지만 김쿠만 원고에 이어 이렇게 한영한사 원고도 마감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제가 그랬잖아요. 저는 무척 대중적인 사람인데 단지 조금 느릴 뿐이라고. 원고도 마찬가지에요. 저는 마감을 칼 같이 지키는 사람입니다. 단지 조금 느릴 뿐이죠… 사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고 싶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지돈씨가 좋아하는, 그리고 저도 좋아하는 요아킴 트리에의 신작을 개봉하는 날이었거든요. 게다가 트위터를 보니(이번 원고에 트위터란 말이 몇 번이나 나오는지 정말 알고 싶지도 않네요) 아트나인 9관에서 8시에 영화를 관람하는 모든 관객들에게 <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 모자를 준다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무척이나 예쁜 초록색 모자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극장에 가지 않았어요. 그리고 이 원고를 썼죠. 결과적으로는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나일선 해설과 정지돈 작가론 두 개만 남았으니까요. 하하. 가끔은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누구도 잘못하진 않았어요. 저도 알아요. 제가 궁금한 건, 그렇다면 왜 저는 매일 이렇게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걸까요? 가끔은 정말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쓸데없는 말이 너무 길어졌네요. 하지만 너무 걱정마세요. 지돈씨 원고의 도입부는 벌써 생각해두었거든요.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에 붙인 나탈리 레제의 서문의 한 구절을 인용하려고 합니다. 이런 부분이에요. 바르트가 죽었을 때 그의 타자기 위에는 스탕달에 대해 진행하던 연구의 원고 한 장이 끼어 있었고, 그 제목은 "인간은 항상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데 실패한다......"였다. 이만 총총. (*출처: 그린나래 미디어 트위터 https://twitter.com/greennaraemovie )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본 게재글은, 17-19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국영화박물관 교육 프로그램 ‘청소년을 위한 영화 글쓰기 키트’의 최종 과제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영화 자서전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의 서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영화에 관해서는 망설임이 더했고 지금도 그렇다. 이는 남에게 지적받을 것도 없이 바로 나 스스로 순수한 영화인이 아니라는 자각이 있기 때문이다.” TV 프로그램의 AD와 다큐멘터리 연출자의 시절을 거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본인의 영화 언어가 텔레비전 방언이 밴 변칙적인 언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스스로를 ‘순수한’ 영화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2018년 5월, 그는 <어느 가족>(2018)으로 제 71회 칸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다. 최고의 권위를 가진 영화제에서 전 세계의 영화인들에게 가족 영화의 대가임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영화 언어의 순도가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 그가 전하는 밀도 높은 감정일 것이다. 이별 후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는 이야기(<환상의 빛>), 뒤바뀐 가족에 대한 이야기(<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어머니가 다른 가족의 이야기(<바닷마을 다이어리>), 헤어진 가족의 이야기(<태풍이 지나가고>) 등 줄곧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영화 속에 담아낸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느 가족>에서도 다시 한번 가족의 의미를 재정의한다. 도둑질과 납치 <어느 가족>의 원제는 '만비키 가족'으로, 해석하면 '좀도둑 가족'이라는 뜻이다. 가르칠 것이 도둑질밖에 없다는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세탁 업체에서 일하며 주머니 속 물품들을 빼돌리는 노부요(안도 사쿠라) 부부는 성매매 업소에서 여동생의 이름으로 돈을 버는 가출 청소년 아키(마츠오카 마유), 열 살 정도 되어 보이지만 초등학교에 다니지 않는 쇼타(죠 카이리), 죽은 남편 덕분에 연금을 받는 할머니 하츠에(키키 키린)와 함께 살아간다.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좁은 집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 ‘가족’은 하츠에의 연금과 상습적인 도둑질로 생계를 이어간다. 쇼타는 문득 노부요에게 질문을 던진다. “물건 훔치는 건 나쁜 일이야?” 잠시 고민하던 노부요는 쇼타에게 되묻는다. “아빠(오사무)는 뭐라고 했어?” 쇼타는 답한다. “가게에 진열된 물건은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니래.” 한편, 시간이 흘러 취조를 당하는 노부요는 하츠에를 땅에 묻은 사실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 “버린 게 아니라 주운 겁니다. 누군가가 버린 걸 주웠습니다. 버린 사람은 따로 있는 거 아닙니까?” 어쩌면 정말 좀도둑 가족은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주인 없는 것을 가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의 다툼을 피해 밖으로 나와 있던 5살 유리(사사키 미유)는 방치된 아이였고, 이 가족은 그런 유리를 품었을 뿐이니 말이다. 사람에게 버림받은 이들이 뭉쳐 서로를 보듬어주는 가족이 되었다. 누구의 것도 아닌 물건을 가지고서 겨우 겨우, 그렇지만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가게가 안 망할 정도로만, 사회에 커다란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로만 살아가려 했는데 세상은 그것조차 내버려두지 않는다. 상처를 알아봐주는 존재 “팔 좀 보자꾸나. 여긴 왜 이러니?” 유리를 처음 만난 날, 하츠에는 유독 말라 있는 유리를 걱정하며 온몸에 난 상처를 살핀다. 상처에 꼼꼼하게 약을 바르는 하츠에의 행동은 애정을 표현하는 그의 방식이다. 무심해 보이던 쇼타 또한 유리의 상처를 발견한다. “그 상처 왜 났어?” “넘어졌어.” “그거 화상자국이잖아.” 쇼타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유리에게 “나한테 애써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유리의 상처는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이제껏 겪은 내면의 상처까지 포함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하츠에와 쇼타의 관심 덕분에 유리는 신체의 상처와 함께 마음의 상처도 거의 회복한 것처럼 보인다. 치유 받는 입장에 처해 있던 유리는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난다. 유리는 샤워하는 노부요의 팔을 보고 묻는다. “거기 왜 그랬어?” 그리고는 이내 자신의 팔을 내밀며 자신에게도 같은 위치에 상처가 있음을 보여준다. 얼굴이나 성격은 달라도 흉터의 모양이 꼭 닮은 둘은 정말이지 ‘모녀’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유리가 노부요의 팔을 쓰다듬는 이 장면은 결이 비슷한 단편영화 <손님>(2011)을 떠올리게 만든다. 특히 <손님>은 한국의 고레에다 히로카즈로도 불리는 윤가은 감독의 초기작이라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손님>의 주인공 자경(정연주)은 잔뜩 화가 난 채로 아빠의 불륜녀가 살고 있는 집에 찾아간다. 하지만 그곳에는 죄 없는 어린 남매만이 있을 뿐이다. 남매 중 동생인 기림(송예림)은 이마에 밴드를 붙여주는 자경의 눈썹에 흉터가 있음을 발견한다. “언니 왜 그래. 아파?” 밴드를 붙이는 자경과 눈썹의 흉터를 만지작거리는 기림은 오늘 처음 만났지만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공감하는 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손님>과 <어느 가족>에서 ‘상처를 알아보는’ 행위는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영화의 후반부, 원래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 유리는 친엄마의 상처를 발견한다. 유리가 상처를 만지자 친엄마는 “만지지 말랬잖아.”라며 짜증 섞인 말을 내뱉는다. 친엄마와 노부요의 차이는 여기에서 나타난다. 만지면 아플 정도의, 그러니까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아이의 위로를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물론 아이의 상처 또한 보듬어주지 못한다는 것. 홀로서기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이 각자 다른 프레임 속에서 취조 당하는 이 영화의 후반부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초기작 <원더풀 라이프>(1998)의 장면과도 닮아있다. 화면을 꽉 채우던 가족들은 온데간데없이, ‘혼자’가 된 사람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족의 분리를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는 면회 씬에서도 적확하게 드러난다. 투명 유리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쇼타와 노부요는 사실상 같은 장소에 있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들을 철저하게 떼어놓는다. 동그란 대화 구멍의 은색 테두리라는 또 하나의 프레임을 만들고 노부요의 얼굴을 가두어버린다. ‘집에서 공부할 수 없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거 아닌가요?’라는 쇼타의 질문은 이제껏 쇼타의 세상이 얼마나 좁았는지 말해주고 있다. 양쪽 손끝을 맞대고 검지를 빙글빙글 돌리다가 주먹을 쥐어 얼굴에 콩. 훔친 물건을 숨기던 파란 가방 대신 책이 들어 있는 새 가방을 멘 쇼타는 이제 학교에 다닌다. 오사무 또한 “아빠는 이제 아저씨로 돌아갈게.”라고 말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영화 초반부의 쇼타는 유리에게 밀개떡을 사준다. 천국에 있는 유리 할머니의 존재를 알고 “그러면 이제 잊도록 해.”라고 말한다. 이제는 쇼타와 유리가 노부요와 오사무, 그리고 야키와 하츠에를 잊어야 할 차례가 되었다. 버스 창문 너머의 오사무가 사라지고 나서야 마침내 ‘아빠’라는 말을 내뱉는 쇼타, 쇼타네 가족들과 부르던 노래를 아파트 복도에서 홀로 부르는 유리. 이름을 숨기고 살아가는 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름이나 호칭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 가족들은 서로가 함께였던 순간들을 쉽게 잊지 못할 듯하다. 사실 <어느 가족>을 따뜻한 영화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지만 마냥 슬프고 비극적인 영화로 해석하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보통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 가족은 마음뿐만 아니라 돈 문제로도 얽혀있는 보통 가족이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서로를 ‘선택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이제는 홀로 서야 할 때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비혈연 가족의 이야기가 아닌 모여 있는 가족과 흩어진 가족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