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기 가족영화
- 감독
- 황병기
- 제작년도
- 1969
화제의 예능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의 할배들 중 단연 돋보이는 건 박근형 이었다. 미중년 대신 ‘미노년’이란 타이틀을 붙여주고 싶을 정도로 매너와 패션센스가 일품인 할아버지였다. 최근엔 드라마에서 중후하고 카리스마 있는 회장역 단골 배우로 기품 면에서도 으뜸인 배우기도 하다. <꽃보다 할배>의 나온 ‘젊은 박근형’의 사진을 보면서 배우 박근형의 궤적이 궁금해졌다. 스크린 속 배우 박근형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증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발견한 한 장의 스틸이 바로 유현목 감독의 < 문 >에 출연할 당시였다.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 복장, 서구인 같은 또렷한 이목구비, 특히 날카로운 눈매가 주는 카리스마가 돋보였다. 젊은 시절의 그에게는 지금의 우아함을 넘어선 번득일 정도의 엣지가 엿보였다. 스틸 한 장을 실마리 삼아 그렇게, 아름다운 영화 <문>을 접하게 됐다. < 문 >은 < 오발탄 >과 < 잉여인간 > 같은 작품을 통해 현실 참여적인 색깔을 견지했던 유현목 감독의 작품과는 사뭇 다른 가치를 논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더해지는 작품이다. 큰 틀은 일본 전통 악기 고또(아악)의 거장이 자신이 평생 매달려온 음악에 회의를 느끼고 한국 가야금의 명인을 찾아오는 내용이다. 얼핏 한국의 문화 우월주의에 입각한 민족주의적 가치 설파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더해지지만, 유현목 감독의 논지는 어느 한쪽을 향한 편들기와는 거리가 멀다. 이야기의 화자는 일본 고또의 독보적인 거장 야쯔바시 세이준( 박근형 )의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 한국행을 택한 아들 야쯔바시 중( 이영하 )이다. 컴퓨터 공학도의 길을 걷고 있는 그는, 한라산에서 비명횡사한 아버지의 사인을 알지 않고는 자신의 미래도 없다고 생각하고 길을 나선다. 연고도 없는 곳에서 아버지가 죽은 원인을 찾던 중 그는 세이준이 일본에서 가야금 가실( 방희 )의 가야금 연주를 듣고 가실의 아버지이자, 한국의 가야금 명인 우단 선생( 최불암 )을 만나러 한라산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부친의 시신을 확인하러 간 영안실, 동석한 경찰은 중에게 “왜 당신의 아버지는 일본에서 험준한 백록담 가까이까지 가서 이렇게 수수께끼 같은 죽음을 맞이하셨을까요?”라고 묻는다. 경찰은 아버지가 손에 꼭 쥐고 있던 것이라며, 뜻 모를 한자가 가득 적힌 은박 종이를 내민다. 전통 가락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긴박한 미스터리 형식을 도입함으로써 한층 흥미로운 시선을 견지하는 장치다. 중은 마치 형사라도 된 것처럼, 아버지의 최후를 떠올리며 일본에서 가져온 공연 팸플릿 한 장과 가실이라는 가야금 연주자의 이름만 가지고 우단 선생을 찾아 나선다. 극의 미스터리 장치를 한층 더 해주는 것은 신비로운 우단 선생의 존재다. 백록담 정상에 산다는 그는 벌써 세속의 인연을 끊은 지 여러 해째인 인물이다. 중은 그를 수소문하지만, 마을 사람은 우단에게 말 못할 곡절이 있다며 “만나러 올라가봤자, 만나주지 않을거”라며 손사래를 칠뿐이다. 우단의 존재와 함께 기후가 험난한 한라산은 미스터리 구조를 한층 강화해주는 도구이자, 속세를 떠난 우단 선생이 견지하는 예술의 경지를 드러내 주는 훌륭한 장치로 사용된다. 중은 ‘이 계절엔 대낮에도 올라가기 힘든 곳’이자 ‘한라산 특유의 변덕스런 날씨를 조심하라고’ 일컬어지는 한라산을 기어이 거슬러 올라가는데, 정일성 촬영감독이 설계한 이 장면의 신비로움은 가히 압권이다. 한치 앞을 가늠하기조차 힘든 안갯속, 등산복도 아닌 슈트 차림의 중이 미끄러지는 가운데, 멀리서 들려오는 가야금 소리가 그를 혼미하게 한다. 슈트 케이스의 추락과 함께 기절한 그는 결국 우단 선생의 별채에서 일하는 산장지기의 도움을 얻게 되고, 그렇게 힘겹게 바라던 만남을 갖게 된다. 사실 중의 아버지가 우단 선생을 찾아간 건 필연적 선택이었다. 자신의 가업을 이어주길 바랐던 아들은 가업계승을 두고 ‘한 인간의 자유의사를 옭아매는 낡은 인습’이라며 반목하고, 그런 아들의 뜻에 따라 가업계승 제도인 ‘이에모토’ 해체를 선언하자, 아악계에선 ‘큰 망신’이자 ‘고또 음악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라며 그를 힐난하고 나선다. 세이준이 우단 선생을 알게 된 건 바로 이때, 자신이 평생 매달려온 음악에 대한 회의에 가득 차 있던 때였다. ‘고또의 소리지만 더 오묘하고 깊은 울림을 가진’ 가야금 소리는 그가 어떻게든 찾아내어야 하는 원류의 소리였다. 우단 선생은 세이준의 바램도 무시한 채 몇 차례나 그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고, 마침내 막무가내로 세이준이 그의 방에 침입하면서 두 예인의 만남은 이루어진다. 유현목 감독은 세이준과 우단 선생의 극적인 만남을 ‘문’ 안에 꼭꼭 숨겨둔다. 문을 통해서 스며 나온 건 엄청난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낼 수 없는 가야금 명인의 연주였고, 이후 그곳을 나와 돌아가던 중 세이준은 최후를 맞게 된다. 작은 방안에서 이루어진 둘의 대면은 결국 영화의 말미, 우단의 플래시백으로 재구성되는데 그 긴장감의 연출은 하나 버릴 것 없이 영화의 정수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세이준은 항일투쟁에 앞장선 우단 선생이 일본인에게 고초를 겪고 칩거하게 된 점을 사죄하지만, 우단 선생은 “예도는 그런 것을 초월해야 하는 것이요.”라며 응수한다. 자신의 음악적 한계를 타파하고자 고또의 원류를 찾아왔고,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각오에 대해서도 “당신이 그런 정도의 속된 생각에 사로잡혀있는 한 이 땅에서도 원하는 소리를 찾을 수 없다.”고 꾸짖는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을 연 우단 선생이 들려주는 연주, 가야금의 가락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손에 의해 빚어진다는 ‘낙이불류, 애이불비(樂而不流 哀而不悲)’의 정수가 표현된다. 클로즈업된 화면 속, 손가락과 가야금 줄에 피가 흥건하게 묻어나지만, 우단 선생은 끝까지 연주를 감행한다. 일본의 문화말살정책으로 고초를 당했던 손가락 병 때문에 연주를 중단했던 그가 그 아픔을 딛고 한 마지막 연주인 것이다. 이 심오한 소리의 세계를 경험하는 세이준, 배우 박근형 의 절절한 클로즈업 컷은, 무려 5분 동안 영화 음악 참여한 가야금 연주자 황병기의 연주로 방 안 가득 빽빽하게 감동의 울림을 채워준다. 1977년 발표한 < 문 >은 60년대 초기작인 < 오발탄 >과 < 김약국의 딸들 >로부터 십수 년 후의 작품이다. 사회 참여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던 유현목 감독이 인터뷰에서 “내 작품으로 이 사회를 개조시켜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절박감, 절규. 그런 수준이었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는 “다시 영화를 만든다면 평화로운 미의 세계를 연추하고 싶다. 아름다움 속에 진리가 있다. 그것이 인간의 마지막 이상이자 인생의 도달점이 아니겠는가?”라고도 말했다. 굳이 가야금과 교토, 한국과 일본, 항일투쟁이라는 첨예한 재료를 빌려와 현실을 넘어선 예인의 경지를 다룬 <문>은 바로 유현목 감독 자신의 이 같은 작가적 고뇌를 표현한 가장 극명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안타깝게도 개봉 당시 < 문 >은 관객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원래 외화수입쿼터용으로 제작된 터라, 제대로 된 극장 개봉 기회를 얻지 못한 이유가 크다. 동갑인 최불암 과 박근형 은 당시 37세로 TV 배우로 더 알려져 있던 때였다. 내면의 번뇌를 표현하는 감정 연기, 대담한 클로즈업샷을 버텨내며 두 배우는 악기가 아닌 연기 대결을 펼치며 명배우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아들 중을 연기한 이영하 는 이 영화가 데뷔작으로, 그의 풋풋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나는 상상해본다. 만약 4.19 민주화 혁명이 5.16의 군홧발에 짓밟히지 않고 순리대로 흘러왔다면 1970년대는 한국영화의 지독한 암흑기가 아니라 전성기가 되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만약 그랬다면 1970년대는 민주화의 경험을 했던 4.19 세대들의 의식과 기타와 청바지로 상징되는 청년문화가 만나 한국영화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하길종 은 이런 암울한 시기에 한국영화계에 등장했다. 그리고 그의 주위로 패기 넘치는 젊은 영화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영상시대라는 이름을 내걸고 패악적인 한국의 제도권 아래에서 영화를 통해 파문을 일으키고자 했다. 그 도전이 성공이었는지 실패였는지에 대한 평가는 이 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 동인의 한사람이었던 홍파 감독의 77년 작품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를 보면서 그들의 위풍당당함이 어떻게 큰 불꽃을 만들지 못하고 사라져야만 했는지 나름대로 짐작해 보고 안타까워할 뿐이다. 한국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한국적이라 할 만한 것들을 찾아나서는 여정일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와 주체적 이미지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야말로 이 땅에서 영화예술을 한다는 사람들의 사명이었을 것이고, 영상시대 동인들도 그 부분을 고민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고민했을 법한 한국적 이야기와 이미지를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와 함께 하길종 감독이 비슷한 시기에 발표한 < 한네의 승천 >을 보며 어렴풋이 짐작해 본다. 이 두 편의 영화는 전통적으로 한국적 스토리라 이야기 되어온 한恨이라는 정서를 밑바탕에 두고, 불교의 윤회설을 끌고 들어온다.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는 과거와 현재라는, 두 개의 이어지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과거의 이야기는 승려가 된 남편 광덕을 둔 아내의 이야기 - 그녀가 아내인지는 영화에서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내가 스토리를 통해 유추한 것이다- 로 아내는 성욕을 억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지만 탈을 쓰고 침입한 남자에게 강간을 당하고 절벽에서 떨어져 자살한다는 이야기다. 이 스토리는 현대에 와서 그들의 환생이라 할 대학생 커플 엄장우와 현진 커플과 중첩된다. 탈춤을 추는 장우는 갑자기 탈을 쓰고 춤을 추는 것을 거부한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환영에 시달린다. 장우는 탈을 보면서 기이할 정도로 불안정함을 느끼는데, 결국 그 원인은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죄의식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과거 비극의 진원지였던 안동 하회마을에서 다시 만나 장우와 현진은 과거에 있었던 사건과 똑같은 방식으로 강간사건을 겪는다. 과거 광덕이 아내의 강간과 죽음을 막지 못했듯, 현재에서 장우는 애인이 강간당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결국 이 영화도 < 한네의 승천 >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비극적 상황을 순환시켜 패배주의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가하고 불편해 할 때 쯤, 영화는 작은 반전을 준비한다. 나는 장우와 현진의 미래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윽 몇 초 끼워 넣은 장면이 참 좋았다. 이 몇 초가 관객을 편안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하길종 감독이 <한네의 승천>에서 끊어지지 않고 윤회를 통해 반복되는 비극을 그리며 끝나지 않는 고통을 강조하고 있는데 비해, 홍파 감독은 강간범의 체포, 장우와 현진의 결혼으로 마무리 한다는 점에서 이런 결말이 더 현대적이라고 믿고 싶어진다. 결국 장우의 죄의식은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불행할 수밖에 없었던 모든 여성들에 대한 죄의식이기도 하겠고, 좀 더 의미를 확장하자면 당시 유신 독재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던 민중에 대한 죄의식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이 알레고리를 동원한 우회적 사회비판일 수밖에 없을 때 느껴지는 영화작가의 자괴감도 동시에 느껴진다. 그래서 현생의 에피소드에서 절벽에서 떨어지는 사람의 목소리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극중 인물인 장우든, 감독의 것이든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것은 유신과 독재를 막지 못한 모든 남자들 혹은 지식인들의 목소리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더더기처럼 붙어있는 마지막 시퀀스, 뜬금없이 삽입되는 “회개하시오”라는 기독교적 외침을 이해 못할 것도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불친절한 것은 어쩔수가 없다. 민속과 윤회를 통해 한국적 스토리와 영상미에 대한 고민은 분명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전생과 현생을 오가는 편집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끊임없이 몰입을 방해하는 편이다. 이러한 시도가 분명 상업적 헐리우드 영화 스타일에 대한 대항마로서 끌고 왔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적절하게 절제되지 못하고 지나치게 과해 지다보니 오히려 혼란만 부축이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아쉽게도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는 외화 쿼터를 따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로 전락해 창고에 처박혀 버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개봉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대중과 만나지 못한 한국적 영상 혹은 소수의 대중만이 본 한국적 영상미는 관객들의 취향을 변화시키지 목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도전과 오류를 보면서 영상시대가 혁명이 되지 못했던 원인을 관객에 대한 배려부족에서도 찾아보게 된다. 하지만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듯, 영상시대 동인들의 이러한 도전정신은 시나브로 한국영화계에 단비가 되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비록 뒤집어엎지는 못했지만 그 영향력은 서서히 깃들었다. 이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한국적 스타일은 이듬해 임권택 감독이 <족보>에서 좀 더 섬세하게 구현한다. 영상시대 동인이든 아니든 의식 있는 동시대 영화인들의 노력이 결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영상시대의 끝자락에 나온 홍파 감독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의 실패가 사랑스럽다. 김윤택 유정희 윤영실 장두이 감독 홍파 각본 이원영 촬영 권재홍 음악 황병기 미술 조경환 편집 장길상 1977년 100분 칼라 판매원 (주)일진프로덕션 영상도서관 배가번호 0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