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훗의 복수
- 감독
- 조지 셔만
- 제작년도
- 1958
- 출연
- 데이빗 헤디슨, 준 라베릭
※ 본 게재글은 17-19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교육 프로그램 ‘2021 청소년을 위한 영화 글쓰기 키트’의 최종 선정작입니다. 흰 캔버스 위에 흑연을 든 손이 나타난다. 화가들에게 둘러싸인 여인이 그림을 지시하던 중 어떤 작품과 마주치고 누가 저것을 꺼냈냐며 묻자 카메라는 그 그림을 클로즈업한다. 그림의 제목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한 여인이 젖은 몸을 이끌고 섬 깊이 들어가 거대한 저택에 다다른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이 저택에 온 여성 화가다. 언니의 운명을 물려받아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하는 엘로이즈와 그의 결혼을 위한 초상화를 그리는 마리안느. 그는 모델이 되길 거부하는 엘로이즈에 의해 ‘산책 친구’로 위장하곤 엘로이즈의 얼굴을 훔쳐보며 초상화를 그린다. 엿본 얼굴의 조각들을 짜 맞추듯 완성한 초상화를 본 엘로이즈는 그것이 자신과 비슷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 혹평에 마리안느는 그림엔 ‘규칙과 관습’이 있다고 자신을 변호하지만, 그에 엘로이즈는 ‘생명력과 존재감’은 없냐며 되묻는다. 마리안느는 분에 차 그림을 뭉개버리고, 영화의 2막이 시작된다.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의 모델이 되겠다고 나서며 본격적인 초상화 작업에 들어간 그들은 서로를 관찰하고 응시하며 불꽃이 번져오르듯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진다. 당신이 날 볼 때, 난 누구를 보겠어요? 엘로이즈는 응시하는 존재다. 그는 소피의 임신중절수술 현장에서 고개를 돌려버리는 마리안느에게 고개를 돌려 마주하라고 말하며, 관찰자의 시각으로 자신을 묘사하려는 마리안느에게 “우린 똑같은 위치에 있어요. 아주 동등한 위치죠. 당신이 날 볼 때, 난 누구를 보겠어요?”라고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엘로이즈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영화는 거듭 평등을 강조한다. 엘로이즈, 마리안느, 소피 세 여성이 나란히 담긴 부엌 신과 오르페우스 신화에 대해 논쟁하는 신은 18세기 프랑스의 신분 제도를 배제해버린다. 한 폭의 명화 같기도 한 수평 앵글은 그 어떤 굴곡도 확대도 없이 고요하게 그들을 투과한다. 오직 타닥거리는 난롯불 소리, 세찬 파도 소리, 캔버스 위를 방황하는 붓 소리와 때때로의 정적만이 존재하는 화면 안에서 그들은 서로를 동등하고 평등하게 응시한다. 이러한 응시는 여태껏 남성적 시각에서 배척받아 온 여성의 이슈인 생리와 임신중절 또한 굴곡 없이 묘사한다. 소피의 임신중절수술을 재현해 그리자며 일어서는 엘로이즈를 따라 기억은 기록으로 진화하는데, 이는 여태껏 외면받아 온 여성의 역사에 대한 추상이기도 하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서로를 닮아가고 있다. 이는 복식을 통해 찾아볼 수 있는데, 첫 번째로 영화의 오프닝 속 마리안느다. 그는 엘로이즈의 것과 비슷한 모양의 짙은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학생들 앞의 모델이 된다. 두 번째로 연주회장에서 울 듯 우는 엘로이즈의 옷은 저택서 조율이 안 된 피아노를 연주하던 마리안느의 옷과 닮아 있으며, 심지어 정사를 나누던 중 엘로이즈의 눈동자가 마리안느의 것처럼 검게 변하기도 한다. 이처럼 영화는 지속적으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를 일체화함으로써 화가와 모델, 관찰자와 피관찰자의 관계를 뒤집는다. 그리고 이는 앞서 말한 평등의 메시지와도 맞닿아있다. 뒤돌아봐. 마리안느는 자신 이전의 화가가 완성하지 못한, 얼굴이 지워진 엘로이즈의 초상화에 불을 지른다. 마리안느가 붙인 가슴께의 작은 불씨가 캔버스에 번져 올라 엘로이즈를 삼키는 모습은 오르페우스 신화에서 에우리디케를 빨아들이는 지하 세계를 닮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신화에서 오르페우스는 지하 세계에서 자신의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하던 중 하데스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뒤를 돌아봐 또다시 아내를 잃는다. 오르페우스 신화에 대한 엘로이즈의 재해석에 따르면 이 이야기의 실상은 이렇다.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게 한 것은 그의 얕은 인내심이나 충동이 아닌, 에우리디케의 “뒤돌아봐요”라는 한마디 작별 인사다. 시간은 흐르고, 마리안느는 작별하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담긴 그림을 출품한다. 이때 그는 자신의 그림 속 오르페우스의 것과 같은 푸른 망토를 두르고 있으며 에우리디케는 흰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이는 마리안느가 마주한 엘로이즈의 마지막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헤어짐의 순간에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말했다. “뒤돌아봐.” 엘로이즈는 지하세계에 남겨진 것일까? 그 옛 신화 속 에우리디케처럼. 뭐예요? 좋아하는 곡이요. 영화는 이들의 사랑을 다분히 정적으로 묘사한다. 눈빛이나 표정을 통해 절제된 채 묘사된 감정선은 영화 내에서 음악과 함께 두 번 고양되는데, 첫 번째는 하모니 신이다. 어두운 밤 모닥불 앞에 모인 여성들은 ‘그들은 도망칠 수 없다.’라는 노랫말을 반복해 부르며 하모니를 이룬다.(이 의문스러운 하모니는 상당히 성스럽고 웅대하게 들린다.) 이 음성과 함께 마리안느를 응시하던 엘로이즈의 치맛자락에 불이 붙고, 마리안느는 그 모습을 홀린 듯 지켜본다. 이 장면은 곧 마리안느에 의해 기억, 기록되며 추후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회상하며 그려낸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다. 두 번째는 엔딩 신이다. 이별 후 마리안느는 연주회장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엘로이즈를 마주한다. 영화가 시작된 이래 줄곧 최소한으로 제한되었던 음악은 일방적인 재회의 현장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외딴 작은 섬에서 조율되지 않은 피아노 소리로 연주되던 비발디: 사계 여름이 거대한 연주회장에서 오케스트라와 재연주되고, 동시에 관객은 줌 인하는 카메라를 통해 빨려 들어가듯 엘로이즈의 내면세계와 동화된다. 이처럼 의도적으로 배제되던 음악이 절정의 순간에 느닷없이 튀어 오르는 연출은 셀린 시아마의 전작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 걸후드 >에선 ‘Diamonds’가, < 톰보이 >에선 ‘Always’가, 그리고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에선 비발디: 사계 여름 3악장이 화면 밖으로 솟구치며 굴절을 만들어낸다. 후회하지 말고 기억해요. 외딴 섬이라는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18세기 프랑스라는 시간적 배경과 맞물려 영화의 피륙을 낭만적으로 직조한다. 해안가와 저택을 오가며 전개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유독 공간적 배경이 강조되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포스터 속 파도 신이다. 이별을 앞둔 것을 실감한 후 다툰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거센 파도 앞에서 얼굴을 맞대고 흐느낀다. 이때 그들 너머에서 휘몰아치는 파도와 파도 소리는 이들의 소망과 현실 사이의 갈등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허나 이 판타지적인 시공간적 배경과 대조적으로 이들 멜로의 결말은 꽤나 사실적이다. 이 파도 앞에서 마리안느는 용서해달라 말한다. 결혼하지 말라 청하는 것이 아니라. 감독은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손을 잡고 몰래 섬을 빠져나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어요-같은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이별을 선택한 것처럼 사랑의 도피가 아닌 일주일간의 추억을 택하며, 후회하지 말고 기억하기를 약속한다. 사랑에 빠진 순간은 결코 명확할 수 없다. 그들이 처음 얼굴을 마주한 바닷가에서였는지, 은밀히 훔쳐본 얼굴을 되짚어보며 캔버스에 옮기던 낮이었는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하던 밤이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 모든 순간을 후회하지 않고 기억할 뿐이다. 나아가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함께 행하는 그리기는 휘발성을 지닌 기억을 영구적이며 쌍방향의 입체성을 띠는 기록으로 승화시켜낸다. 어떠한 굴곡도 확대도 없이 올곧은 시선으로 그려진 사랑. 고요한 응시와 약간의 흑연으로 ‘기록’된 28페이지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한 번쯤은 티셔츠를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운동장에서 자유롭게 뛰놀고 싶은 욕망이 있다. 마치 ‘남자처럼’ 말이다. 그런 나의, 우리의 어릴 적 욕망을 닮은 아이가 있다. 영화 <톰보이>의 주인공 로레다. 짧은 머리를 하고 군살 없이 마른 몸을 가진 로레는 외형만으로는 소녀인지 소년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자신에게 미카엘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그는 스스로를 온전하게 받아들이기에 아직 미숙하고, 사회의 요구와 자신의 욕망이 들어맞지 않아 혼란스럽기만 하다. 로레는 리사와 만나면서 소년 미카엘의 삶을 시작한다. “넌 이름이 뭐니?” 첫 만남에서 리사의 질문에 미카엘이라고 답한 로레는 리사가 소개해준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미카엘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다른 남자아이들처럼 웃통을 벗고 침을 뱉기도 하고, 서툰 가위질로 자신의 수영복을 잘라내 남성용 수영복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남성 성기 모양의 찰흙을 만들어 수영복 안에 집어넣기도 한다. 남자아이들 사이에서도 축구를 잘하는 편이며 주먹도 꽤 쓰는 로레는 리사와 숲속에서 뽀뽀도 나누고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완벽히 미카엘로 거듭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로레와의 싸움에서 진 남자아이와 그의 어머니가 집으로 찾아와 부모님에게 거짓말이 들통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가족 안에서의 로레는 사랑받는 딸이자 언니이지만, 여성으로서 존재해야 하는 답답함과 동생을 돌봐야 하는 책임감에 무겁게 짓눌리고 있다. 입을 꾹 다물고 공백의 표정을 지은 로레는 어딘가 억눌린 것처럼 보인다. 그런 로레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 즉 미카엘로 존재할 때는 한결 표정이 가벼워진다. 연신 웃는 얼굴의 자유롭고 즐거운 아이의 모습이다. 여기엔 공간의 힘도 존재한다. 규정이나 사회적 편견이 깃든 학교가 아니라, 속세에서 벗어난 숲은 로레와 친구들에게 자유로움을 선사하고, 아이들은 어느 것에도 구속되지 않은 채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 비록 거짓으로 만들어낸 가면극이지만, 로레는 잠시나마 억압에서 벗어난다. 미카엘로 존재하고픈 욕망은 집에서도 이어진다. 영화에는 거울에 비친 로레의 모습, 즉 로레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때 로레는 미카엘로서 존재한다. 콧수염을 붙이고 남성의 말투를 따라 하거나 웃통을 벗은 모습, 찰흙 성기를 넣은 모습에 만족스러워 한다. 자신이 본 다른 남성의 모습을 모방하며 남성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갈망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숲과 달리 집이나 학교에선 로레가 미카엘로 존재할 수 없고, 가면극은 학교에 갈 시간을 앞두고 집에서 끝이 나버린다. 거짓으로 시작된 존재는 위태롭고, 드러난 진실이 로레에겐 버겁다. 하지만 영화는 흔들리는 로레를 방치하지 않는다. 그를 지탱해주는 가족이 곁에 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로레는 바람을 만끽하다 운전대를 잡는다. 어린아이는 운전대를 잡는 게 미숙하고, 그 때문에 어디로 나아갈지 알 수 없어 위험하다. 아빠는 그런 아이와 함께 운전대를 잡아준다. 잘못된 길로 들지 않게 그가 갈 방향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로레의 거짓말이 들통난 순간, 엄마는 로레에게 다소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으로 대응한다. 손찌검을 하고, 원피스를 억지로 입힌다. 그러나 이내 로레에게 행동의 이유를 설명하고 그를 차분히 설득한다. 로레도 엄마의 행동이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안다. 친구들 앞에서 여자임이 드러나고 홀로 남은 로레가 상처받은 모습이 그려진 뒤 이어지는 장면은 로레가 평화롭게 가족과 함께 있는 장면이다. 가족 안에 있는 로레는 길을 잃어도 돌아갈 곳이 있으며, 좌절하더라도 나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 가족들의 사랑이 부재해 엇나갔기 때문에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로레의 사랑스러운 동생 잔도 버팀목이 되어준다. 잔은 미카엘을 찾는 리사에게 굳이 로레의 거짓말을 밝혀내지 않고, 끝까지 비밀을 지킨다. 로레를 오빠라고 부르며 오빠여서 더 좋다고 말하기도 한다. 잔은 미카엘을 인지하고 존중하는 존재이며, 가장 편견 없이 로레를 바라본다. 그렇기에 잔의 시선으로 바라본 로레의 모습이 영화의 메인 포스터를 장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잔은 로레와 달리 전형적인 여자아이의 형상이다. 분홍색으로 꾸민 방과 그 안에 채워진 인형들,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발레를 하는 모습이 이를 보여준다. 이러한 잔이 미카엘을 꿈꾸는 로레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얼마나 다르건 서로 이해하고 함께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리사 역시 로레의 성장을 돕는 인물이다. 리사는 로레에게 이름을 물어봐 주는 존재다. 영화는 초반부와 엔딩 장면에서 리사가 로레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며 수미쌍관을 완성한다. “넌 이름이 뭐니?” 자신이 누군지 스스로 정의하고 대답할 수 있게 해주는 이 질문은 로레가 정체성을 만들어나가는 계기가 된다. 영화는 내내 사용하는 색상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타이틀 ‘Tomboy’는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다시 파란색과 빨간색이 뒤섞인 색깔로 바뀐다. 이는 기존 성별에 관한 고정관념을 뒤엎겠다는 것을 예고하고, 예고한 대로 영화 안에서 ‘남성의 색’, ‘여성의 색’은 뒤집혀 사용된다. 로레가 자신을 미카엘이라고 처음 소개할 때 입은 바지와 찰흙으로 성기를 만들어 넣었던 수영복의 색깔은 빨간색이고, 반대로 로레가 여자임을 친구들에게 밝힐 때 엄마가 억지로 입힌 원피스나 리사에게 화장을 받을 때 입은 후드는 파란색이다. 사회적 인식을 뒤틀어 사용한 색상은 성 고정관념에 대한 반발이며, 우리 안에 여성성과 남성성이 공존함을 보여준다. <톰보이>는 단순히 여성성, 남성성을 규정하는 사회의 강압적 분위기를 지적하고, 성 소수자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영화는 어린 시절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자신을 찾아가는 로레의 성장 과정을 그려낸다. <보그 이탈리아> 인터뷰에서 셀린 시아마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영화가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모두에게 전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시기에 옷을 차려입고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하지 않나.” 감독의 말처럼 우리는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은 게 아니더라도, 혼자만의 고민을 했고, 어떤 모습을 갈망했고,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로레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의 어린시절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에서 돋보이는 지점이자 이러한 <톰보이>의 메시지 전달을 더욱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감독이 ‘소녀’를 그려내는 방식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데뷔작 <워터 릴리스>에서도 보여줬듯이 소녀를 욕망의 대상이 아닌 주체로 그리며 소녀라는 이름에 투영된 사회적 인식을 깨부순다. 소녀라는 이름을 되찾아준 것이다. <워터 릴리스>는 플로리안을 향한 마리의 사랑, 키스를 꿈꾸는 안나의 환상, 누군가의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던 플로리안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톰보이> 역시 로레가 남성의 모습을 열망하며 정체성 혼란을 겪는 것을 과장되거나 자극적이지 않게 담아낸다. 이들은 모두 순수하고 서툰 욕망을 가진 주체로, 욕망 앞에 솔직하고, 아픔을 겪으며 성장해나간다. 그렇기에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에서 그려지는 소녀는 불편함 없이 자연스럽게 다가오고, 어린 시절 우리들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나의 <보이후드>를 떠나보내며 근래 본 영상 중 가장 가슴이 두근거렸던 건 올해 블리즈컨에서 공개된 <디아블로4>의 시네마틱 트레일러였다. 호러 분위기가 물씬 묻어나는 이 영상은 단편영화라 해도 손색없는 완성도로 보는 이를 홀린다. 트레일러는 게임을 위한 일종의 예고 영상이지만 게임 <디아블로>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영상 속 소환된 악마 릴리트의 오싹한 자태를 마주하는 순간 감각적으로 반할 만 하다. 무표정하게 허공을 응시하던 시선이 아래로 흘낏 향할 때 형용하기 어려운 감흥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이건 독립된 창작물로 충분히 즐길만한 영상이다. 하지만 <디아블로>의 설정과 사전 정보를 숙지할 때 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쾌감을 선사하리라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한 단계 나아가 이 영상을 접한 시청자는 게임을 실제로 플레이 하면 릴리트의 오묘한 눈빛을 계속 떠올리며 또 다른 생생함을 체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본래 시네마틱 트레일러의 목적이니 말이다. 다시 말해 <디아블로>의 시네마틱 트레일러는 9분 20초의 단독작품인 동시에 안팎으로 연결되는 의미망을 통해 확장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엉뚱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비슷한 사례를 픽사의 애니메이션 < 업 UP >(피터 닥터, 밥 비터슨, 2009)에서 발견한다. <UP>이 픽사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고 말하긴 어려워도 <UP>의 초반 칼의 인생을 압축한 무성 몽타주 시퀀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상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열 개 남짓한 쇼트로 구성된 이 몽타주 시퀀스의 역할은 이후 전개될 영화를 위해 캐릭터의 전사(前史)를 설명해주는 쪽에 가깝다. 하지만 감히 단언컨대 이 우아한 몽타주 시퀀스는 <UP>의 전체 서사보다 훨씬 격렬하고 효과적으로 관객의 마음을 뒤흔든다. 고전무성영화를 연상시키는 이 몽타주 없이 <UP>의 정점은 성립되지 않는다. 반대로 칼의 70년 인생을 3분 남짓한 시간에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 시퀀스는 <UP>을 다 보지 않더라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완결성을 지닌 짧은 영상들에 감탄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문득 한 편의 영화를 어떻게 감상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다. 한 편의 영화는 감독에 의해 창조된 고유의 호흡과 리듬 안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종종 단일영화에 구속되지 않는 순간들을 마주하며 ‘어떻게 즐길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피어오른다. < 어벤져스: 엔드게임 >(2019)(이하 <엔드게임>에 별 네 개 반을 준 뒤 한동안 ‘영화 보는 안목이 형편없다’는 쓴 소리에 시달렸다. 별점은 최소한의 가이드라고 생각해온 입장에서 별점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만 비판이 따라올 걸 짐작하면서도 굳이 <엔드게임>에 높은 평가를 남긴 건 일종의 고백이자 포스트 시네마를 향한 탐색 때문이었다. <엔드게임>이 잘 만든 영화냐고 묻는다면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어렵다. 단순히 기계적인 완성도로만 놓고 봐도 전작인 <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2018)가 좀 더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인피니티 워>가 발상을 뒤집어 타노스를 중심으로 히어로들의 역학관계를 재배치했다면 <엔드게임>은 벌려 놓은 이야기들을 수습하는데 공을 들인다. 전 우주를 무대로 하면서 흩어진 이야기들을 모아나가는 방식 역시 <인피니티 워>가 <엔드게임>보다 좀 더 영리하고 실수가 적다. <인피니티 워>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대단원의 서막답게 이야기의 탁월한 균형 감각이 빛난다. 수많은 캐릭터를 적재적소 배치하는 조율 능력이야 말로 오늘날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완성한 원동력이다. 반면 <엔드게임>은 서사는 좋게 말해 안정적이고 나쁘게 보자면 다소 밋밋하다. 우연과 행운이 남발되는 등 이야기의 구멍이 꽤 있는 편이고 토니의 장례식과 캡틴의 은퇴 등 후반부 사족도 적지 않게 늘어진다. 무엇보다 <인피니티 워>가 깔아놓은 무대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그다지 놀라움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게 나를 뒤흔든 쪽은 <엔드게임>이었다. <엔드게임>에는 11년간의 축적이 있었기에 가능한 반칙 같은 감동이 있다. 나 역시 개별 영화는 각각의 성취로만 판단되어야 한다는 걸 모르진 않는다. 거장의 작품이라고 더 보탤 것도 없고 신인의 영화라고 얕봐서도 안 된다. 영화는 러닝 타임 안에 구축된 독립된 세계이며 온전히 영화 내적인 완성도로 평가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겐 <엔드게임>을 한 편의 영화로만 감상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상영 시간 내내 불쑥불쑥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다른 영화들이 치고 들어와 마치 추억의 앨범을 꺼내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과거로 돌아간 토니 스타크가 아버지를 대면할 때 < 아이언맨3 >에서 홀로그램으로 재현된 자신의 기억을 마주하는 장면이 생각났다. 배불뚝이가 된 토르가 과거의 아스가르드로 몰래 잠입할 땐 < 토르: 라그나로크 >는 물론 고전 오페라 같던 < 토르 > 1편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캡틴 아메리카가 < 어벤져스 > 1편 시점의 스타크 타워로 잠입해 들어가는 장면은 또 어떤가. 캡틴이 귓속말로 “헤일, 하이드라”라고 속삭이며 < 윈터 솔저 >의 유명한 엘리베이터 씬을 재현할 때의 즐거움을 개별영화에서 느낄 수 있을까. <엔드게임>은 한 편의 영화라기보다는 차라리 연속극의 최종장에 가깝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11년의 세월동안 개별영화 간의 경계를 허물고 세계관을 이어 붙여 거대한 우주를 창조했다. 이건 단순히 설정과 정보를 공유한다는 차원을 넘어 관객의 시간이 축적되어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체험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영화들은 일견 매우 느슨하면서도 강력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개별영화로도 충분히 즐길 만 하지만 22편의 경험들이 축적되었을 때 발생하는 쾌감과는 비교가 안 된다. 이 새로운 종류의 어트렉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전통적인 영화의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쉽지 않다. 혹은 평가 절하 할 수 밖에 없다. <엔드게임>을 철저히 개별영화로 논하자면 무난한 완성도의 기획영화의 범주를 벗어나기 힘들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3시간의 상영시간이 기계적인 조립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 아이리시맨 >(2019)이 비슷한 3시간동안 한 호흡으로 감싸여 있다면, <엔드게임>은 1시간은 분절된 3편의 에피소드가 연속되는 형태다. 첫 1시간은 타노스의 핑거 스냅으로 전 우주의 절반이 날아간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상실감을 다룬다. 이 에피소드는 한적한 행성에서 소임을 마치고 농사를 짓고 있는 타노스의 목을 날려버리는 것으로 시작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문제의 원인을 제거했지만 상처는 회복할 수 없고 남겨진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오늘을 버텨야만 한다. 블록버스터 프렌차이즈 영화에서 이렇게 무겁고 정적인 분위기로 시작하는 건 이례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전작에서 한껏 끌어올렸던 피날레의 분위기를 차분히 가라앉힌다는 점에서 영리하고 합리적인 판단이다. 이어지는 1시간은 시간여행을 통해 인피니티 스톤을 모아오는 미션을 보여주는데 <어벤져스> 초창기의 아기자기한 맛이 살아있는 에피소드다. 무엇보다 이 파트는 11년을 이어온 팬들을 위한 서비스라는 인상이 강하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지난 시간으로 돌아가 숨겨진 얼굴을 다시 대면하는 건 개별영화 바깥으로 체험을 확장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단원의 1시간은 그야말로 블록버스터답게 물량을 쏟아 붓는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미리 본 미래의 계획이 발동하여 모든 히어로들이 한 자리에 집결할 때 짜릿한 전율이 관통한다. 이건 <엔드게임>의 피날레가 아니라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11년 동안 준비한 피날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난한 완성도와 쉽게 가라앉히기 힘든 흥분 사이에는 거대한 괴리가 있다. 이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어떻게 설명할지가 나의 고민과 질문이었다. 다시 돌아가, 명쾌한 답을 낼 순 없었지만 우선 내가 느낀 ‘감정’에 충실하기로 하고 높은 별점을 매겼다. 시간이 지나 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들려왔다. 얼마 전 마틴 스코세이지는 <아이리시맨> 개봉과 함께 마블영화에 점령된 극장가에 일침을 가하며 ‘시네마’ 논쟁을 촉발시켰는데 그가 자신의 견해를 밝힌 뉴욕타임즈의 기고문을 읽으며 무릎을 쳤다. 글의 제목은 “왜 마블영화는 시네마가 아닌가”였지만 나는 거꾸로 거기서 마블영화의 가능성을 보았다. 마틴 스콜세이지는 말한다. “히치콕 자체가 하나의 프랜차이즈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달리 말해 그는 우리의 프렌차이즈였다. 새로운 히치콕 영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이벤트였다....(중략) 극장 안에 형성된 관객과 영화 사이의 팽팽한 교감 혹은 화학작용 때문이었고, 이를 실제로 체험하는 것은 가히 짜릿했다.” 여기서 ‘히치콕 영화’를 ‘마블 영화’로 바꾸면 이상한 짓일까. <엔드게임>은 21세기의 프렌차이즈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이벤트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 <엔드게임>과 같은 종류의 영화들은 극장이란 한정된 공간에 국한되지 않고 영화 바깥으로 촉수를 넓혀나간다는 점이다. 개별영화가 가지는 팽팽한 교감과 화학반응은 분명 <아이리시맨>과 같은 시네마(좁혀서는 내러티브 영화)에 비해 떨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엔드게임>은 3개의 분리된 에피소드를 느슨하게 조립한 구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 분리된 에피소드들, 조각난 시퀀스들은 몇 년 전 다른 영화에서 뿌려놓은 떡밥들을 회수하고 연결되기 시작한다. <엔드게임>은 관객의 체험 속에서 <아이언맨>의 특정상황과 연결되고, < 앤트맨 >의 장면들과 이어지며, < 닥터 스트레인지 >의 세계와 겹쳐진다. 요컨대 이것은 한 편의 영화가 아니다. 한 편의 영화, 극장이라는 밀폐된 시공간으로 볼 땐 느슨하고 조악해보였던 조각들이 11년의 세월동안 뿌려놓은 다른 조각들을 소환하며 전혀 다른 종류의 서사를 구축해나가는 것이다. 나는 도저히 <엔드게임>을 한 편의 영화로 감상할 수 없다. 굳이 비슷한 사례를 찾는다면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12년 동안 촬영한 < 보이후드 >(2014)를 봤을 때 유사한 감흥을 느꼈다. <보이후드>에는 서사의 절정이 없다. 매 순간 진실이 묻어있고 각자의 정점을 발견할 수 있도록 관객을 향해 열려 있는 영화다. <보이후드>가 시간을 압축하는 방식을 통해 시간 흐름 자체를 목격할 수 있다면, <엔드게임>은 11년의 체험과 축적을 통해 각자의 시간을 기억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아이언맨>의 탄생을 목격한 내가 핑거스냅을 튕기는 아이언맨의 대사 ‘나는 아이언맨이다’를 듣는 다는 건 단순히 한 편의 영화 안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엔드게임>이 영화사에 남을 걸작이라고 칭송하고 싶진 않다. 그것이 의도된 것인지, 미학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는지도 아직은 모르겠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이른바 세계가 ‘변했다’는 사실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아니 <엔드게임>은 비록 영화의 껍질, 영화산업의 육체를 빌리고 있지만 이미 ‘(전통적인 개념의) 영화가 아닌 어떤 것’이다. 21세기 프렌차이즈의 결과물을 보며 새로운 종류의 체험이 당도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엔드게임>의 피날레에서 느꼈던 전율은 단지 3시간의 결과물이 아니라 미처 의식하지 못한 사이 어느덧 11년의 세월동안 길들여진 끝에 나온 보상이었다. 가치판단을 잠시 미뤄두고 이야기해보자. 이제 영화를 온전히 영화라는 틀 안에 가둬놓을 수 있을까. 여전히 전통적인 개념을 갈고 닦아 나가는 시네마들도 있겠지만 동시에 이제 극장의 문이 열려버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우주의 탄생 역시 사실 우연이었다. <아이언맨>의 성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오늘의 결과를 낳았다. 시작은 우연이었지만 끝은 필연과 의지의 산물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니 드디어 한편의 영화가 끝이 났다. 물론 또 다른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계속 태어날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다시 그 세계에 첫 발을 들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교통사고처럼 나를 덮쳤던 2008년 <아이언맨> 이후 11년 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즐거움만큼이나 피로도 안겨주었다. 어쩌면 <엔드게임>을 향한 나의 찬사와 박수에는 이별의 홀가분함도 약간은 묻어 있으리라. 이렇게, 아니 이제야 한 편의 영화를 떠나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