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아그네스
- 감독
- 노만 제이슨
- 제작년도
- 1985
- 출연
- 멕 틸리, 제인 폰다, 앤 밴크로프트, 앤 피토니악, 윈스톤 레커트, 그래티엔 겔리나스, 가이 호프만, 가브리엘 아칸드, 프랑소와즈 파우쳐, 자크 토안그리, 재닌 플루엣, 데보라 글로버, 미셸 조지
‘봉테일’이 화제다. 봉준호 영화의 매력을 설명하는 단어인데 아카데미 4관왕 이후 초등학생도 아는 말이 된 것 같다. 봉테일은 그가 촬영현장에서 보여준 모습 때문에 붙여졌다. 미리 완벽한 스토리보드를 만들어서 촬영에 임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봉준호는 준비된 감독이다. 머리 속에 찍고 싶은 영화의 그림이 이미 완벽하게 들어 있으니 꼼꼼하고 치밀하게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는 것이다. < 살인의 추억 >(2003)에서 형사가 갖고 다니는 수첩에 농협 마크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거나 < 기생충 >(2019)에서 부잣집과 가난한 집이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는 점 등이 사례로 거론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영화에서 디테일을 이렇게만 이해하면 곤란하다. 영화에서 디테일이란 성격이 세심하다거나 준비를 철저히 한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다. 디테일은 영화라는 매체의 가장 흥미로운 속성 중 하나다. <기생충> 1막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일명 ‘믿음의 벨트’ 시퀀스가 있다. 기택 가족이 박사장 집의 가정부 문광을 내쫓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대목. 문광에게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택이 병원 진료를 기다리는 문광의 모습을 촬영하고 마침내 문광이 기침을 하는 사이 휴지통에서 핫소스 묻은 휴지를 끄집어내는 장면까지 5분여의 장면이다. 물 흐르듯 우아하게 편집된 장면들은 관객을 현란한 사기극의 현장에 초대한다. 기택 가족의 계획은 착착 맞아 떨어져서 그것이 악행이라 하더라도 마음 졸이며 응원하는 심정이 된다. 마침내 휴지통에서 핫소스 묻은 휴지를 집어들 때 저절로 웃음과 박수가 터져 나온다. 여기서 봉테일은 소품이나 세트의 문제가 아니라 한 장면 한 장면이 어떻게 설계되고 이어지는가에 있다. 피자 가게에서 기택 가족이 피자를 먹으며 핫소스를 뿌리는 장면은 휴지통의 핫소스와 연결되고, 감정이 고조된 기택의 대사는 기우가 연기 연습을 시키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리는 장면들이 마치 복잡한 퍼즐을 맞추는 듯한 쾌감으로 상승된다. 영화사에선 몇몇 범죄영화에서 이런 류의 디테일에 특별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 줄스 다신의 < 리피피 >나 장 피에르 멜빌의 <형사>같은 영화다. 범죄의 모의와 실행을 정밀하게 묘사한 영화들로 디테일이 어떻게 영화적 감흥을 만들어내는지 잘 보여준다. 장면들이 빈 틈 없이 연결되어 만들어지는 이런 극적 흥분은 잘 만든 액션영화에서도 두드러진다. < 본 얼티메이텀 >의 워털루 역 장면 같은 경우다. 제이슨 본이 비밀정보를 가진 기자와 만나는 장면에서 영화는 워털루 역에 한번도 못 가본 관객도 그곳을 알 수 있게끔 정확하게 촬영됐다. 카메라가 있어야 할 곳에서 꼭 필요한 시각적 정보를 주기 때문에 관객 또한 인물의 동선을 정확히 그릴 수 있다. 덕분에 영화는 현장에 있는 듯한 긴장감을 전달한다. 아마도 우리는 반대의 사례를 더 많이 알 것이다. 장소와 동선과 연기가 제대로 조율되지 않은 영화들은 배우들이 그냥 영화를 흉내 내는 느낌을 준다. 값 싼 전쟁영화 속 총격 장면에서 총소리만 나면 아무 데로나 나뒹굴며 죽어가는 군인들의 모습을 연상해보면 알 수 있다. 디테일이 없으면 영화는 아이들의 병정 놀이가 되고 만다. 디테일이 특정한 장르영화에서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나루세 미키오의 < 흐트러지다 >에서 등장인물이 처한 경제적 상황을 묘사하는 장면을 보자. 새로 생긴 슈퍼마켓의 식료품 가격이 얼마나 싼 지를 수치까지 들어 정확히 알려주는 대목에서 나루세 감독 특유의 디테일이 두드러진다. 영화는 당대 사회의 현실을 날카롭게 투영한 경제적 디테일을 더하며 비범해진다. 이처럼 영화에서 주인공의 가난 혹은 경제적 조건을 설명하는 장면은 흔하지만 그런 만큼 예리한 묘사가 필요하다. <기생충>에서 무선 인터넷을 잡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 그렇듯 단순한 디테일로 많은 것이 설명될 수 있다. 켈리 레이차트의 < 웬디와 루시 >에선 주인공이 수첩에 돈의 수입, 지출을 기록하는 장면으로 한눈에 그런 디테일을 전달한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이 장면 하나만으로 주인공이 처한 난관이 실감나게 전해지는 것이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를 하면 어쩔 수 없이 영화에 대한 평가를 하게 된다. 작품 선정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에도 당연히 디테일이 들어간다. 다른 영화나 TV 드라마, 뮤직비디오에서 너무 반복해서 지겹게 느껴지는 장면 묘사, 앞뒤가 연결되지 않는 디테일 같은 것을 보면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다. 디테일이 좋은 영화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감독이 완벽주의자여야 한다거나 자잘한 세부가 전체보다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다. 영화가 원래 디테일의 예술, 이라 그렇다.
“쿵딱 똑뚜르르 똑뚝딱... 쿵딱 똑뚜르르 똑뚝딱...” 뜨개질 바늘 부딪히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루핑 되면서 끝없이 뜨개질을 이어가는 단편애니메이션 <마지막 뜨개질 The Last Knit>(로라 네우본넨, 2005)은 최근 생기고 있는 지역중독센터의 주요 정신치료대상이 되기 시작한 ‘인터넷, 모바일 게임 중독’이나 ‘웹툰 중독’처럼 반복되는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벗어나기 힘든 말초적 감각의 즐거움으로 채워진 중독과 같이, 갇힌 시야로 인해 한 가지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미궁(迷宮)과 같은 병적인 ‘집착’에 관해 다루고 있다. 필자는 이번 추천 애니메이션에 ‘집착으로 쌓인 내공’이라는 주제로 화두를 풀어가려고 한다. 2006년 일본 도쿄아니메페어 출장으로 신주쿠역을 출발해 도쿄역에서 환승, 역사를 막 벗어나려고 할 때였다. 당연히 우리나라와는 기후, 환경, 그리고 지하철에서 풍기는 독특한 냄새 등 생활문화가 여러 가지로 다를 것이라고 짐작을 한 여행이었지만, 서울역을 중심으로 여러 전철역의 선로 옆 도심과의 경계를 위해 위협적으로 세워진 철조망, 콘크리트 방음벽, 오랜 세월 달리는 철마의 분진으로 바닥과 벽들이 온통 빨간색으로 물든 철도변의 모습과는 달리 동경 전철역과 선로주변은 경계석을 제외하고는 철조망이나 방음벽을 볼 수 없었다. 때문에 수없이 지나가는 전철의 소음 속에도 고양, 일산 신도시의 고급 주택가처럼 깔끔하고 멋 부린 주택들이 올망졸망 늘어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난밤 일본어 회화책에서 얄팍하게 배운 감탄사를 조용히 내뱉는다. “스고이...!” 전철은 이제 서서히 속도를 더하는데 “아뿔사!” 한 수 더한 ‘깔끔한’ 상황에 열린 입을 다물기가 쉽지 않았다. 아담한 2층집 계단의 난간 손잡이가 스텐레스 봉으로 설치되어 있었는데, 마침 그날은 일요일 아침이라 집주인이 바깥 청소를 시작한 모양이다. 주인장은 스텐레스 손잡이에 광택제를 뿌리고 헝겊으로 빡빡 문지르기 시작한다. 3월 하순의 아침햇살과 동경 시내 풍경이 집주인이 닦아낸 거울 같은 손잡이에 영롱하게 교차되면서 반사 굴절된다. 필자에게는 넋 나가는 충격이었지만 일본 전철선로 옆집 아저씨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인 상황으로 보였다. 이는 일본 전철역 주변 사람들만의 ‘청결’에 대한 집착으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습도 높은 섬나라 민족의 위생강박관념에 의해 오랫동안 진화된 변종 염색체의 고착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일본 사람들의 청결과 위생의 집착에 관한 또다른 에피소드가 있는데, 2005년 히로시마페스티벌로 가져간 PISAF(부천국제학생애니메이션페스티벌) 홍보물 박스를 버리려고 휴지통을 찾았지만 행사장이나 시내 어디에서도 찾지 못해 결국 한국으로 되가져온 방증만으로도 그 순위를 마땅히 세계 1위에 올릴 수 있다. 이러한 데는 일본의 지역적 기후, 풍토 등 환경적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만화와 애니메이션분야에서는 이렇게 깔끔한 민족성이 오히려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배경이 된 것으로 판단한다. 그래서 16세기 우키요에(浮世繪) 이후 명작 만화와 애니메이션들이 일본에서 많이 나오는 나름대로의 연유가 되는가보다. 문화와 예술작품에 관해서도 이러한 집착과 내공의 함수는 비례한다. 그래서 잔인하게도,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에 대해 우리 민족의 고유 창작품으로서 평가하고 찬사를 보내기에는 찰흙이 아닌 거친 화강암을 수없이 두들겨야만 형태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물리적 속성의 모순을 풀지 않고는 그 찬사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하여 부득불 공염불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엿판처럼 질긴 화강석에 망치질을 해보지 않은 여러 미학자들과 평론가들은 우리나라의 천재 석공이 단번에 두들긴 정질에 유아독존 석굴암이 탄생했다고들 감히 평가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추천 애니메이션을 이야기 해보자. 1987년 도쿄 판타스틱 영화제에 특별 초대되었던 이색 옴니버스 애니메이션 < 미궁물어 迷宮物語 >는 평단으로부터 아낌없는 극찬을 받았고 일련의 비디오물들 보다는 월등하게 탁월한 작품의 완성도 때문에 2년 뒤인 1989년 극장에서 다시 개봉하였다. 또한 이 작품은 현재 거장이 된 린타로, 가와지리 요시아키, 오토모 가츠히로 3명의 감독들이 미궁(迷宮)이란 이름에 걸맞게 마유무라 타쿠(眉村卓) 동명 원작소설의 난해한 이야기를 감독별로 작가적 감성과 색채를 진하게 녹여서 풀어내고 있어 감독들의 발자취와 축적되어가는 작업의 내공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오프닝작 <라비린스 라비린토스 ラビリンス ラビリントス>의 린타로(りんたろう) 감독은 < 우주해적 캡틴 하록 >(1978) < 은하철도 999 >(1979) < 안녕 은하철도 999 >(1981) < 환마대전 >(1983) < 카무이의 검 >(1985) <불새-봉황편>(1986) < 메트로폴리스 >(2001)를 통해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린타로 감독의 이전의 스타일과는 많은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이 작품은 ‘라비린스 라비린토스=미궁, 미로’라는 작품제목과 같이 몽환적인 상상력으로 옴니버스 전체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줄거리는 데이브 맥킨의 몽환적 작품 < 미러 마스크 >(2005)의 설정처럼 서커스 극장의 환상으로 시작하는데, 여자아이 사치와 고양이 치치로네가 이상한 피에로를 쫓아 환상의 미로를 지나 이제 막을 올린 서커스 극장 속으로 들어간다. 작품 후반부의 미궁 같은 골목길에서 3D CG처럼 재현된 모호한 공간지각에 대한 상상력은 가히 대단하다. 두 번째 작품은 < 요수도시 >(1987) < 마계도시 신주쿠 >(1988) < 수병위인풍첩 獸兵衛忍風帖; 무사쥬베이 >(1993)으로 유명한 카와지리 요시아키(川尻義昭)의 <달리는 남자 走の男>다. 이 작품은 감독의 분위기가 강하게 드러나는 그림체와 연출 등이 이후의 명작들을 낳게 한 초기 작품으로 충분히 가늠된다. 1등에 대한 집착이 강한 카레이서 ‘잭 휴’가 생명을 담보로 레이싱을 펼쳐 경쟁 카레이서들을 물리치고 1등을 하지만 자동차와 함께 그도 결국 산화해간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린타로나 오토모 가츠히로 감독에 비해 3D 공간감과 구조적인 상상력이 다소 아쉬웠다. 하드고어한 하이프리얼 해부학적 묘사와 유려한 동작, 스토리에 몰입감을 점증해가는 매끄러운 전환을 특징으로 하는 카와지리 요시아키 감독의 ‘옥의 티’로 슬쩍 넘기고 싶다. 세 번째 작품은 한번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인상 깊게 기억하는 < 아키라 >(1988)와, <노인Z>(1991)의 감독 겸 만화원작자로서, 혹은 < 메모리즈 >(1995)에서 히치콕의 오마주로 22분 18초 동안의 롱 테이크로 연출된 <대포의 거리>와 < 스팀보이 >(2005)의 감독으로 잘 알려진 오토모 가츠히로(おおともかつひろ)의 데뷔작 <공사중지 명령 工事中止命令>이다. 필립 글래스의 ‘자푸라 강 Japura River’처럼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단조로운 반복음이 좌우, 앞뒤에서 소리의 정위감(Sound localization)으로 울리면서 정글이 있는 아로아나 공화국의 444프로젝트 공사장 이정표에서 3인칭 시점을 슬로우 아웃으로 멈추면서 작품은 시작된다. 줄거리는 444프로젝트를 중지하기 위해 주인공을 파견하지만 오직 로봇으로만 작업되고 있는 거대한 공사현장의 책임자 로봇은 오히려 파견된 주인공을 감금하고 공사를 계속해서 진행시키려 한다는 내용으로 자연파괴와 기계적인 현실에 갇힌 현대 사회의 인간모습을 풍자하고 있다. 오토모 가츠히로의 모든 작품이 그러하듯 이 작품 역시 세밀한 자연생태와 인공구조물, 그리고 설계도까지 가미되어야만 정확한 움직임이 구현될 수 있는 다양한 기계류에 대한 복잡한 상상력과 세세한 묘사력은 ‘감독’이라는 호칭에 앞서 실로 ‘기계와 구조 컨셉의 달인’이라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 미궁물어 >가 개봉된 후 오랜 경험과 수련으로 쌓인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업계의 내공이 수많은 명작들을 남겼음은 더할 나위가 없지만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995년에 개봉한 3편의 중편(그녀의 추억;彼女の想いで, 모리모토 코지 감독 / 최취병기;最臭兵器, 오카무라 텐사이 감독 / 대포도시:大砲の街, 오토모 가츠히로 감독)으로 구성된 114분의 또 다른 옴니버스 애니메이션 < 메모리즈 メモリ?ズ >는 완성도와 밀도에서 <미궁물어>의 신선, 난해함을 실사영화보다 더 사실적인 치밀함과 회화적인 묘사에 블랙유머의 여유까지 더해서 업데이트한 일본 중편애니메이션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영화관객 수로 법석을 피운 알폰소 쿠아론의 < 그래비티 >(2013)나 크리스토퍼 놀란의 < 인터스텔라 >(2014)는 <메모리즈>의 ‘그녀의 추억’과 ‘최취병기’의 오마주가 아닐까, 라고 치부하고 싶다. 박수근 화백의 ‘낙엽 떨어진 나무’를 팩션과 언어의 향연으로 풀어낸 ‘나목’이 박완서 작가의 공력을 쌓아올린 등단작이 되었듯이 섬세한 감성과 오랜 기간의 수련에서 체득한 내공이 작품에 배어난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 시대를 창작하는 젊은 작가들에게 난해하면서도 복잡한 상상력으로 어우러진, 풀기 어려운 방정식 같은 작품 < 미궁물어 >를 감히 추천한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내친김에 < 메모리즈 >까지 보시고... 바흐의 ‘평균율 1권 1번 프렐류드’에서 반복되는 피아노 음이나 필립 그래스의 ‘라비린토스, ‘해변의 아인슈타인 Einstein on the Beach’과 와크티(Uakti)가 연주한 ‘자푸라 강’, ‘아마존 강 Amazon River’의 난해하지만 형이상학적 감성의 신비로움과 환상을 자아내는 단조로운 반복음이 창조해낸 음율의 감미로움을 최면술로 즐기는 사람들은, 오늘처럼 겨울을 더해가는 진눈깨비가 내릴 때, 브람스 4번 교향곡과 스파클링 와인 모스까토 큰 한잔으로 이 계절을 즐겨야 하는 예술가의 사명감을 당연히 수행하듯 소위 엘리트예술은 아는 만큼 보이고 이해하는 만큼 들릴 수밖에 없다. 뵈프 브로기뇽을 배불리 먹지 말고, 맛있게 먹어야 하는 것처럼.
어릴 적부터 본 애니메이션 작품 수를 세어보면 족히 수 천 편은 될 듯하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나의 애니메이션 탐식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2000년대 들어서고 나서다. 그리고 지금은 특별히 관심이 가는 작품이 아니면 보지 않게 되었다. 세월 탓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러기에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과거 작품들을 찾아보는 횟수는 반대로 더 늘었다. 무엇 때문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함량미달의 작품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함량이란 애니메이션 창작에 대한 공부를 말한다. 공부가 부족한 애니메이션. 신선한 테마도 드물고, 신선한 표현양식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새롭다고 우기는 스토리텔링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 말했듯이 ‘카피의 카피의 카피’다. 이것은 세기말을 지나고 세계 모든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지극히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주변사람들도 역시 많이 공감하는 부분임에 틀림없다. ‘때깔은 좋은데, 보고 나면 특별히 기억나는 것도 없고 다시 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 시간 죽이기 볼거리’가 현재 애니메이션을 바라보는 일반적 시각. 소장해 계속 보고픈 작품이 드무니, DVD나 블루레이의 판매도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그냥 인터넷에서 후딱 다운로드 받아서 한번 보고 휴지통으로 휙, 삭제버턴을 누르는 상황이 현재 애니메이션 소비의 냉혹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몇몇 감독이나 작가들의 사투 속에 인상적인 애니메이션이 종종 발표되기는 한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이 시장 전체에 영향력으로 퍼지기에는 공부하지 않고 비주얼에만 치중한 창작풍토가 세계 애니메이션 시장상황에 너무 굳어진 상태다. 해마다 여름이나 겨울 방학시즌이면 쏟아져 나오는 미국의 극장용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들은 자의든 타의든 그런 흐름을 주도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들만의 방식으로 공부를 하며 새로운 도전들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 공부 또한 블록버스터 공식에 따라서 재단될 뿐, 진정 새로운 시도와는 다른 방향의 궤도를 그린다. 그렇다면 대작 이외의 작품들은 공부를 하고 있으냐 묻는다면, 그 역시도 그리 녹록치 않다. 제작비가 많지 않으니 상황은 절박해 상업성은 더 요구될 터이고, 공부를 한 낯선 작품보다는 시장에서 팔리는 비주얼 일변도의 익숙한 작품으로 갈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왜 공부하는 애니메이션이 필요한 것일까? 이는 디지털환경 속 경쟁에서 애니메이션이란 미디어가 갖는 존재감이 점점 약해져가는 위기감 때문이다. CG기술의 발달로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영화의 경계가 허물어져버린 이유가 가장 크다. 즉, 실사쪽은 애니메이션 고유의 매력을 끌어들였지만, 애니메이션 쪽은 입체감과 이펙트 외에는 특별한 매력을 끌어들이지 못했다. 결국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영화의 크로스오버로 애니메이션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실정에까지 이르렀다. 어쩌면 CG기술을 받아들임으로써 애니메이션 제작이 편해지고 효율도 높아졌을 수 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만의 정체성은 그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위협을 받지 않나 생각된다. 설령 흥행성적은 좋다고 해도, 애니메이션에 관한 고유인식은 예전만 못한 것이 현실이다. 애니메이션인지 실사인지 모호한 상태로 관객에게 다가오는 것이 오늘날의 영화이다. 테크놀로지와는 무관하게 애니메이션만의 장점을 살린 공부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애니메이션의 정체성은 미래에 온전히 보존되기 쉽지 않을 듯싶다. (사진설명) 2012년 발표된 픽사의 < 메리다와 마법의 숲 >. CG 애니메이션의 대명사임에도 ‘만화영화’ 장르를 확고히 구축한 픽사의 작품치고는 여러 면에서 부족함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