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발
- 감독
- 장일호
- 제작년도
- 1974
- 출연
- 남석훈, 진평, 이해숙, 진봉진, 김무영, 이병희, 고상미, 고선애, 신찬일, 이승일, 곡봉, 주영, 오일수, 홍성중, 왕청하
현재 열리고 있는 성대한 프로그램 ‘프랑수아 트뤼포 특별전’의 주인공인 프랑수아 트뤼포는 영화를 몹시 사적으로 대했던 연출자, 자신의 삶을 곧 영화로 만들고자 했던 연출자다. 그런 그의 태도를 기리며, 이 글에서는 평소보다 더 사심을 담아 트뤼포의 영화 세 편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혹은 ‘여자를 좋아했던 남자’ 트뤼포의 세 여자를. 공교롭게도 세 여자는 모두 범죄의 세계에 발을 들이고 있지만, 세 여자의 운명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된다. 이건 트뤼포의 영화니까. 첫째, 〈 미시시피의 인어 〉 혹은 카트린느 드뇌브. 미리 말하자면 이 영화는 당대에나 지금이나 트뤼포의 수작으로는 거론되지 않는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이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트뤼포 영화다. 일단 〈미시시피의 인어〉는 〈 비련의 신부 〉와 마찬가지로 미국 범죄 소설계의 거장이요, 밤과 서스펜스의 시인인 윌리엄 아이리시/코넬 울리치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가장 훌륭한 울리치 영화는 아니더라도, 〈미시시피의 인어〉에는 울리치 특유의 논리를 넘어서는 휘몰아치는 낭만이 존재한다. 또 〈미시시피의 인어〉는 트뤼포의 장편 연출작 중 유일하게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한 작품이며, 이 형식을 과시하듯 사용한다. 60년대의 제임스 본드 영화처럼 극장의 큰 스크린에 가득 찬 이미지를 구경하는 호사를 누리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휴가용 영화’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카트린느 드뇌브가 어마무시하게 아름답다. 물론 드뇌브는 〈셰르부르의 우산〉에서도, 〈 로슈포르의 숙녀들 〉에서도, 〈 세브린느 〉에서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미시시피의 인어〉는 드뇌브를 향한 숭배 의식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그녀는 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이에 대해 생색을 내거나 자의식적 윙크를 던지는 일도 없이 그저 ‘해는 동쪽에서 뜨고 나는 아름답지요’라고 말하는 듯 아름다움을 무심하게 발산해댄다. 이 드뇌브가 악당이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명백하다. 그런데도 넘어갈 것인가. 말하자면 〈미시시피의 인어〉는 장-폴 벨몽도와 관객들을 상대로 카트린느 드뇌브라는 패를 보여준 채 벌이는 게임인데, 벨몽도와 우리는 알면서도 질 수밖에 없다. 둘째, 〈 나처럼 예쁜 여자 〉 혹은 베르나데트 라퐁. 베르나데트 라퐁은 이번에 상영되는 단편 〈개구쟁이들〉에서 개구쟁이들이 환상을 품고 흠모하는 묘령의 아가씨로 출연하는 배우로, 그 작품은 트뤼포의 첫 연출작인 동시에 라퐁의 첫 출연작이기도 했다. 그 후 15년 만에 두 사람이 재회하여 만든 영화가 〈나처럼 예쁜 여자〉다. 제목부터 뻔뻔한 이 영화에서 라퐁은 자신의 행실에 한 점 후회 없는 범죄자로 출연하여 자신을 연구하고자 하는 순진무구한 사회학자 앞에 속어를 쏟아내며 얼을 빼놓는다. 범죄자의 행적을 여러 개의 플래시백으로 재구성한다는 소재와 구조는 필름 누아르에서 온 것이지만, 그보다는 막스 브라더스나 바보 삼총사(Three Stooges) 유의 슬랩스틱 코미디, 루니툰 애니메이션, 그리고 장-뤽 고다르의 60년대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인공적이고 과장된 세계를 전면에 내세우는 코미디다. 베르나데트 라퐁은 이 안에서 거의 시종일관 달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정도로 기운차게 고함을 지르고 질주하며 형형색색의 패션을 과시하고 모든 남자들을 때려눕힌다. 아드레날린과 깔깔거림을 원한다면 바로 이 영화다. 셋째, 〈 신나는 일요일 〉 혹은 파니 아르당. 〈신나는 일요일〉은 트뤼포의 유작이지만, 여기에서 억지로 죽음의 기운을 찾을 필요는 없다. 그런 영화가 필요하다면 〈녹색방〉을 찾아가시길. 이것은 트뤼포가 할리우드식 B무비의 기운을 불어넣고자 일부러 촬영을 재촉하며 경쾌하게 찍은 작품이다. 줄거리만 봐서는 여러 사람이 죽어 나가고 밤과 매춘과 폭력으로 얼룩져 있는 이야기이지만, 실제로는 범인도 잡고 연애도 하는 하워드 혹스 풍의 로맨틱 미스터리다. (시네마테크KOFA 단골 관객 여러분께서는 얼마 전 상영한 〈 빅 슬립 〉을 기억하시리라.) 여기서는 누구보다도 트뤼포가 마지막으로 사랑한 여자, 파니 아르당을 잊을 수 없다. 영화는 파니 아르당이 활기차게 길을 걷는 모습에서 시작한다. 바로 그 걸음걸이가 〈신나는 일요일〉의 주제나 다름없다. 아내를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사장을 가게에 가둬둔 채 트렌치코트를 입고 돌아다니며 사건을 수사하는 흑발 비서의 모험담. 이 사랑스러운 소품을 통해 트뤼포는 흡사 자신의 스승인 알프레드 히치콕에게 반기를 드는 듯하다. 누명 쓴 사나이는 누명 쓴 채로 가만히 계시라. 차가운 섹스어필 가득한 금발 미녀도 안녕. 수다스럽고 활기찬 흑발의 비서가 나가신다! 그리고 히치콕식 범죄극으로 시작하여 혹스식 말다툼으로 발전하는 이 영화는 드뇌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잘 알고 있는 아르당의 패션쇼와 다리 과시를 거친 다음 문득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장난을 바라보며 막을 내린다. 영원한 영화 소년 트뤼포의 마지막 인사로 이보다 더 어울리는 영화는 없으리라.
가끔 밤늦게 허전해서 TV를 틀 때가 있는데 무의식적으로 리모컨을 누르다가 눈여겨보게 되는 채널이 하나 있다. 선댄스 영화제에서 상영된 작품들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선댄스 채널. 해외 독립 영화를 안방에서 시청할 수 있는데, 특히나 영화제에서 인상 깊게 봤던 영화들이 TV로 방영될 때는 옛 친구를 만났듯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날도 그랬다. 선댄스 채널에서 방영하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에 확 꽂혀 버린 것이다. 잠깐만이 어느새 한 시간이 되고 90여 분의 영화 한 편을 극장이 아닌 TV로 올곧게 본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 니콜라스 바클레이의 진실 The Imposter >(2011). 이 영화는 3년 전 사라진 소년이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면서 그동안 숨겨졌던 진실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미국 샌 안토니오 출신 소년이 갑자기 사라지고, 3년 후 스페인 길거리에서 여행객들에 의해 발견된다. 실종된 기간 동안 소년은 유괴된 채 온갖 성적 학대와 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가족들은 그가 있는 스페인으로 소년의 누나를 먼저 보낸다. 그곳에서 처음 소년을 만난 누나는 소년의 달라진 외모가 유괴기간 겪은 시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는 그동안 익숙한 가족의 해후를 다룬 따뜻한 휴먼 다큐멘터리처럼 비친다. 그러나 그가 가족들이 있는 미국으로 귀향하면서 하나씩 밝혀지는 사실들과 반전. 영화는 여러 이면들의 진실을 한꺼번에 풀어내기보다는 하나씩 하나씩 관객의 감정이 점점 증폭되는 구조로 휴먼 다큐가 아닌 스릴러 영화를 만들어 냈다. 금발을 가진 푸른 눈의 소년이 사라지고 난 후 어떻게 흑발에 갈색 눈동자로 변할 수 있을까? 옛 사진 속에 보이는 소년의 귀 모양(일종의 지문과 같다고 한다)과 돌아온 소년의 귀 모양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가족들은 알면서도 왜 모르는 척하는 걸까? 사건을 기억하는 모두(탐정, 관련 공무원 및 수사관, 언론 등)가 사라진 소년이 그(니콜라스)가 아님을 주장하지만 가족들은 오히려 그들의 주장을 외면하거나 때로는 분노하며 돌아온 소년을 변함없이 가족으로 인정한다. 왜일까? 진실과 거짓. 영화제목 그대로 한 사기꾼의 협잡극으로 영화는 시작하지만 누가 사기를 당하고 누가 사기를 쳤는지는 점점 모호해지는 영화다. 나 또한 불리한 조건에서 뜻하는 답을 찾지 못할 때 그 원인을 내가 아닌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할 때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어’, ‘내가 아닌 누구도 이렇게 할 수밖에 없을 거야’ 등등. 자기최면, 자기만족은 개인의 심적 고통과 부담을 해결해주는 일종의 방어기제 같은 것이다. 영화는 인간 모두가 외부의 충격과 닥쳐진 사실이 던지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자주 스스로를 반복해서 최면화 하는지, 그 안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때로는 스스로도 판가름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인 한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확장될 때 가질 수 있는 충격적 공포도 함께 말하고 있다. 또 하나, 영화에서 눈여겨 볼 것 중 하나는 실종 소년과 가족들의 증언을 배우를 통해 ‘재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간의 다큐멘터리가 재연의 범위를 현실에서 찍기 어려운 과거의 사건들을 극화하는 것에서 머물렀다면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 고유의 장치로 여겨지는 ‘인터뷰’까지 그 범위를 확장해 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장치는 영화를 끝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고 보게 만드는 아주 매력적인 ‘장치’로 활용되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수많은 증언들 안에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끊임없이 추리해야 하는 영화, 마치 감독은 “자 여기까지 봤을 때, 누가 사기를 치는 거 같아?” 라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고 관객은 영화의 ‘퍼즐 맞추기’가 끝날 때까지 긴장을 놓칠 수가 없다. 그리고 마지막 ‘퍼즐 하나’가 보여주는 충격의 여파는 시간이 지나도 긴 여운으로 남을 것이다. 나에게는 이 영화가 주는 ‘질문’이 영화 안에서만이 아니라 지금 이곳,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충격적 사건과 집단의 ‘사기극’에서도 변함없이 적용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기당하지 않고 끊임없이 ‘진실’을 목도해야 하는 것, 그리고 또 다른 니콜라스가 반복 재생되지 않도록 이처럼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로 여기 한국에서도 수많은 다큐멘터리스트들에 의해 생산되어 관객과 함께 소통되어지기를 바라본다.
김기영 감독의 영화 < 하녀 >를 말할 때 주로 강조되는 것은 주인공 동식( 김진규 ) 부부의 2층 양옥 안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지만, 이 영화의 분위기를 주조하는 것은 비단 이 밀폐된 공간만이 아니다. 초반부 동식과 여공 곽선영(옥경희) 사이의 에피소드는 뒤에 이어질 동식의 운명을 예견케 하는 복선인 동시에, 상경한 여성들의 불안정한 지위와 이를 방치하는 비정한 사회를 보여주는 독립된 사건이기도 하다. 여기서 곽선영에게 정직 처분을 내리는 사감 선생으로 나오는 이가 바로 고선애 (高善愛)다. 동식의 신고에 처벌을 잠시 주저하지만 사감실로 불려온 선영에게 정직 처분을 통보하는 그녀의 표정은 단호하다. 이 장면에서 무엇인가 분위기를 압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고선애의 얼굴이다. 양미간의 찌푸린 주름과 직삼각형 모양으로 힘을 준 눈매, 깎아지른 양볼 위로 윤곽이 드러나는 광대뼈, 그리고 단호하게 다문 작지 않은 입은 뒤돌아 서 있는 곽선영의 처연한 어깨와 확연히 대비를 이룬다. 그 입술 사이로 굵고 건조한 그녀의 음성이 ‘에누리’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고선애 는 특유의 인상과 목소리로 프레임을 장악하는 힘을 지닌 배우였다. 이를 알아본 것은 역시 김기영 감독이었던 것 같다. 고선애가 본격적으로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한 첫 작품은 김기영의 두 번째 장편 < 양산도 >였고 이 작품에서 그녀는 억울하게 죽음을 맞은 아들을 둔 어머니로 나온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필름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반 실성한 상태로 아들 수동(조용수)의 무덤 앞에서 곡을 하다가 혼례 가마를 타고 그 앞을 지나는 아들의 연인에게 비수를 꽂는 여인을 연기한다. 탈춤을 추며 언덕을 올라오는 혼례 행렬과 그 사이로 비틀거리며 걸어 들어가는 수동 어머니, 칼을 맞고 수동의 무덤으로 기어가는 옥랑( 김삼화 )의 모습이 연극적으로 이어지는 이 장면에서 고선애는 원시적인 모성을 발산하며 내러티브를 주술적인 단계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이 직후에 옥랑과 수동의 영혼이 줄을 타고 승천 하는 장면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로서는 필름이 유실되어 볼 수가 없다). 1911년 함경남도 북청(北靑)에서 태어난 고선애 는 대구고등여학교를 졸업한 후 한동안 교편을 잡은 적이 있는 인텔리 여성이었다. 스물넷이 되던 해에 순회공연 중심으로 신파극과 희극을 주로 상연하던 극단 신무대(新舞臺)에 입단하면서 무대생활을 시작한 것이 그녀를 배우로 살아가도록 바꿔놓았다. 해방 전까지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나 한때 극단 금성좌(金星座)를 경영했을 정도로 무대생활에 깊이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49년 박제행 (朴齊行), 고설봉 (高雪峰) 등과 함께 해군본부 정훈감실 보도과 소속으로 극단 예술극회(藝術劇會)를 창립해 활동했으며, 국방부 정훈국 후원으로 제작되어 전쟁 직전인 1950년 6월 21일에 개봉한 영화 < 나라를 위하여 >를 통해 영화 데뷔했다. 전쟁 중에는 피난지 부산에서 신극무대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전쟁이 끝난 후 1955년에 < 구원의 애정 >과 < 양산도 >를 통해 영화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녀의 비범함을 알아본 김기영 감독의 작품과는 달리 다른 대부분의 작품에서 고선애 는 비중이 적은 단역을 맡아야 했다. 작은 역할일지라도 연기의 폭은 상대적으로 넓은 편이었는데, 평범한 아낙네에서부터 교사처럼 지적인 여성이거나 상층계급의 부인까지 소화해냈다. 열사 유관순의 이화학당 스승(< 유관순 >)이나 YWCA 총무(< 상록수 >)처럼 식민지 시기의 엘리트 여성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교편을 잡았던 배경 덕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하면 < 양산도 >의 비극적인 어머니라든가 < 서울의 지붕밑 >에서처럼 미신을 믿는 교육수준이 낮고 가난한 아낙 역할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녀만의 장기가 발휘된 작품은 상대적으로 드문 편이었는데 신필름의 영화들은 그런 그녀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본처들의 모임 ‘꿀벌회’의 회장으로 단호한 리더십을 보여주는 < 로맨스그레이 >나 YWCA 총무로서 농촌계몽을 위해 젊은 학생들을 불러모아 가르치는 백현경 역할을 맡은 < 상록수 >는 고선애 의 지적인 인상을 정형화해서 사용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이 기회를 십분 활용했다. 신상옥 감독의 눈에 들었던 것인지 큰 역할은 아니더라도 지속적으로 신필름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고 그런 그녀를 ‘신상옥 사단’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일찍부터 < 천지유정 >이나 < 언제까지나 그대만을 >로 한·홍합작 영화에 출연했던 그녀는 신필름의 합작영화 제작에도 함께 했다. < 대폭군 >, < 반혼녀 >, < 흑발 > 등 필모그래피 후반의 영화들 상당수가 합작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며, 특히 <반혼녀>에서는 주인공 연화(리칭)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이승과 저승을 잇는 주선자 역할을 하는 늙은 유모로 극을 끌어가고 있다. / 글: 김한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