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부와 흥부
- 감독
- 이경선
- 제작년도
- 1950
- 출연
- 황남, 주증녀, 현지섭, 추석양, 허영, 노경희, 송재로, 정득순, 박경주, 박섭, 구종석, 김은봉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사진 클릭 시 유튜브 인터뷰 영상으로 이동) 1895년에 개관한 극장 1895년에 개관한 애관극장은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극장이자 13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한국 근대 문화예술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조선 말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영화·공연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란 점에서 애관극장의 연혁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895년, 인천의 사업가인 정치국이 애관극장의 전사인 협률사를 설립했다. 협률사는 서울 정동에 지어진 동명의 공연장인 협률사보다 7년, 종로의 영화관인 단성사보다 12년 앞선 시기에 세워진 극장이다. 정치국은 현재의 애관극장 터에 벽돌 건물을 쌓아 올렸고 협률사를 <박첨지> <흥부놀부전>과 같은 인형극부터 창극, 신파연극, 남사당패 등의 공연을 올리는 공연장이자 영화관으로서 활용했다. 이곳을 중심 무대로 활동했던 배우 서일성은 한국은 물론 일본, 중국에서까지 명성이 자자했으며 그를 중심으로 구성된 ‘7면 구락부’는 우리나라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극작가 진우촌과 함세덕 그리고 연출가 정암을 배출했다. 애관극장 역사를 전시하고 있는 통로 1911년, 협률사는 개항장 인천의 이미지에 맞춰 잠시 축항사로 이름을 바꿨다가 1921년경에 애관으로 개명했다. 이때부터 애관은 연극과 영화의 상설관으로 탈바꿈했다. 그로 인해 한동안 애관극장 부근의 경동거리는 ‘시네마 천국’과 다름없었다. 1927년 애관극장은 관객 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르네상스식 건축물로 증축됐으며 이 건물에서 1930년, 인천 최초로 발성영화인 <야구시대>가 상영되었다. 1935년에는 애관극장의 한 해 입장객이 총 15만 명을 돌파하는 기록을 남겼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고 인천상륙작전 때 함포사격으로 인해 인천의 경동 일대가 폐허가 됐다. 경동에 위치한 애관극장 또한 피해를 입었다. 사람들은 극장이 무너진 자리에 임시 건물을 올려 영화를 계속 상영했고, 1960년 새롭게 지어진 건물이 지금의 애관극장이다. 1972년에는 현 애관극장 대표인 탁경란 씨의 부친 탁상덕 전 대표가 애관극장을 인수했다. 1989년에는 인천 최초로, 그리고 전국에서 네 번째로 70mm 상영관이 개관했다. 이는 현재 애관극장의 1관이다. 1관은 영화 상영관인 동시에 나훈아, 하춘화 등 유명한 가수들이 돌아가며 공연을 펼친 무대였다. 당시 애관극장에 걸린 공연과 영화를 보고 박정자, 한명숙, 최불암, 전무송 등의 가수와 배우들이 꿈을 키웠다. 2000년에는 현 애관극장 대표인 탁경란 씨가 극장을 인수했다. 탁경란 대표는 멀티플렉스 극장에 대항할 목적으로 2004년 5개관으로 증축했다. 접근성이 좋은 극장 동인천역에서 신포역 방향으로 15분 정도 걸어 내려간 뒤 개항로로 좌회전해 올라가면 좌측에 파란색과 노란색의 구조물이 번갈아 놓인 애관극장이 나타난다. 애관극장의 본관 입구로 들어서면 1관과 휴게실, 작은 매점 등이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애관극장은 본관과 신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관에는 1관, 신관에는 2~5관이 위치한다. 특히 1관은 공연장처럼 1, 2층으로 나뉘어 있으며 스크린 아래에 큰 무대까지 마련되어 있는데 한때 공연장으로도 활용됐던 애관극장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본관과 신관은 긴 복도를 통해 이어져 있다. 해당 복도에는 애관극장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연표, 신문 기사, 포스터, 사진 등의 자료가 걸려있다. 한때 오락기가 놓여있던 신관의 휴게 공간도 현재는 오락기를 빼고 그 자리에 극장 관련 자료를 걸어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1,2층으로 구성된 애관 1관 내부 1895년 인천 중구 개항로에 신설된 애관극장은 계속 같은 곳에 터를 잡고 있다. 극장 근처엔 인일여자고등학교, 제물포고등학교, 송도중학교,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등 총 6개의 학교가 있으며 극장의 오른편에 인천중구청, 차이나타운, 동인천역부터 답동사거리까지 길게 뻗은 동인천 지하상가가 위치한다. 애관극장은 접근성이 좋은 극장이다. 동인천역과 인천역, 신포역에 둘러싸인 모양새인데 1호선 동인천역과 분당선 신포역에선 극장까지 도보로 10분, 1호선 동인천역에선 버스로 10분밖에 소요되지 않는다. 또한 840m 떨어진 곳에 인천항이 있어 애관극장 옥상에 오르면 바다를 볼 수 있다. 항구 근처에 자리한 경동은 오래전부터 인천의 문화적 중심지였다. 교통의 요지이자 답동성당, 능인사 등의 종교 시설도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유동 인구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인형극장, 동인천극장, 동방극장, 키네마 등 한때 동인천 일대에 19개의 독립예술극장이 자리했던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전부 문을 닫고 애관극장과 미림극장만이 남아있는 상태다. 미림극장은 애관극장에서 약 70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한국영화사의 과거와 현재가 오롯이 기록된 공간으로서, 애관극장은 128년째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존을 위한 움직임 2017년, 애관극장에 관한 다큐멘터리 <보는 것을 사랑한다>(2021)를 촬영할 당시 윤기형 감독이 탁경란 대표를 인터뷰하면서 극장의 매각 소식을 전해 들었고, 유동현 굿모닝인천 전 편집장이 관련 칼럼을 게재하면서 애관극장의 경영난 소식이 처음 알려졌다. 인천 시민들과 인천시의 움직임으로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코로나 팬데믹을 맞이하면서 2021년 애관극장의 매각 가능성이 다시금 거론됐다. 극장을 지키기 위한 일환으로 지난 2022년 4월 18일, 탁경란 애관극장 대표, 박남춘 전 인천광역시장, 이원석 인천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 애사모(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 이희환 대표가 모여 ‘애관극장 보존 및 활용을 위한 상호 협약’을 맺었다. 하나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후 인천광역시장이 바뀌었고 애관극장의 향후 향방에 관해선 현재 명확히 정해진 바가 없다. "We ♥ 애관"이 적힌 현수막. 현수막에는 애관의 공공매입과 공공적 활용을 후원하는 개인 및 단체의 이름이 적혀있다 공간 및 운영개요 1. 위치: 인천 중구 개항로 63-2 2. 설립일: 1895년 3. 대표자: 탁경란 4. 규모: 264.4m² (스크린 크기 1관 16.4*7m, 2관 7.5*3.2m, 3관 8.5*3.5m, 4관 6.7*3.8m, 5관 6.3*3.3m) 5. 극장 구성: 총 5개관 (좌석수 1관 403석, 2관 114석, 3관 112석, 4관 98석, 5관 81석) 6. 운영시간: 평일 10:00~23:00 금토 9:00~23:00 (금, 토 심야 상영 있을 경우 9:00~2:00) 7. 입장료: 조조, 경로 5,000원, 학생 7,000원, 일반 8,000원 8. 공간 구성: 상영관 5관, 매점 1개, 휴게실 3개 (1관 휴게실 50석, 2~3관 휴게실 26석) 인터뷰: 윤기형 감독(<보는 것을 사랑한다> 연출) 윤기형 감독 조현나 _자기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윤기형 _안녕하세요. 저는 윤기형 감독입니다. 인천에서 태어났고요. 얼마 전에 <보는 것을 사랑한다>(2021)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습니다. 조현나 _<보는 것을 사랑한다>는 어떻게 만들게 되셨나요? 윤기형 _애관극장이 1895년에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극장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더라고요. 최초의 극장인데 왜 이렇게 사람들이 잘 모를까. 그래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고 결심했고 5년 정도 극장에 관해 공부하고 관련 자료들을 준비하며 만들었습니다. 조현나 _애관극장에 관한 자료 중 기억에 남는 것들이 있으신가요? 윤기형 _개항장에서 서울로 가는 길이 지금의 극장 바로 위였어요. 다른 길이 없었고 서울로 가려면 무조건 이 도로로 가야 했기 때문에 그 길목에 극장이 설립됐어요. 당시 개항장 쪽은 일본인 마을, 지금 차이나타운이 위치한 곳엔 중국인 마을, 여기는 조선인 마을이 있어서 이곳에 조선인이 극장을 세운 거였죠. 1928년 <별건곤>이라는 대중잡지에 이 외리에 관한 묘사가 재미있게 돼 있는데요. “쨍쨍거리는 불당소리, 땡땡거리는 성당 소리와 기생의 장구 소리, 그리고 극장에서 관객들을 모으는 악대의 소리가 어우러진 곳이 이쪽 외리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옆에 능인사라고 절이 있거든요. 또 옆에 답동성당이 있고요. 그리고 인천 중구 용동 일대엔 기생집들이 많았습니다. 여기에 또 극장이 있었고. 극장에서는 관객들을 모으려고 밥을 팔고 했거든요. 불당과 성당과 기생집과 극장이 한 거리에 어우러져 당시의 모습이 굉장히 재밌게 묘사가 됐던 거죠. 조현나 _애관극장은 인천 신포역과 동인천역 사이에 있고 근처에 학교나 상가도 많습니다. 인천의 번화가에 자리한다는 점으로 인해 생긴 특성도 있을까요? 윤기형 _동인천역, 신포동, 경동 이쪽이 인천의 명동이었죠. 현재는 옮겼지만 전엔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 10여 개가 근처에 다 몰려 있었어요. 그러니까 늘 사람이 바글바글했죠. 인천에 70mm 상영관을 설립한 극장도 애관극장이 최초입니다. 서울에서 좌석제를 실시할 때 인천은 아직 좌석제를 실시하지 않았었거든요. 관객들이 하도 많아서 자리를 잡으려고 영화 끝나기 5분 전에 극장에 들어가고 그랬어요. 간신히 자리를 잡고 보면 이제 영화 결말을 두 번 보는 관객도 있었죠. 그 정도로 어마어마했어요. 서서 보는 관객들이 앉아서 보는 관객의 두 배는 됐으니까요. 애관극장 4, 5관 영사실과 조상열 영사기사 조현나 _애관극장의 실내 시설에 관해서도 취재를 진행하셨습니다. 어떤 점이 인상적이던가요? 윤기형 _지금의 극장은 1950년대에 실추된 뒤, 1960년에 새로 지어진 거거든요. 옛 극장의 흔적이 사라진 게 좀 아쉬워요. 여기 영사실에 옛날 35~70mm 겸용 영사기가 있어요. 영사 기사님께서 아직 잘 돌아간다고 한번 보여주셨거든요. 디지털 영사기 옆에 옛날 아날로그 영사기가 있으니까 그런 점도 되게 신기했죠. 애관극장 1관 영사실에 보존되어 있는 필름 영사기 조현나 _다큐멘터리를 위해 100여 명 정도를 인터뷰하셨죠. 애관극장에 관한 추억이 있거나 애관극장에서 영감을 받아 꿈을 키운 영화인들이 영화에 등장하는데요. 어떤 분들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셨는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윤기형 _박정자 선생님은 어릴 때 극장 근처에 사셨고, 당시 극장에서 공연을 보며 감동 받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리고 한명숙 선생님은 인천의 태양 악극단에서 활동하며 첫 데뷔 무대를 애관극장에서 올리셨죠. 전무송 선생님은 애관극장에서 간판 그리는 일을 하셨다고 하셔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조현나 _관객의 경우 주로 어떤 분들이 애관극장을 찾으시던가요. 윤기형 _젊은 사람들은 드물고 저같이 추억이 있거나 저보다 나이 드신 분들이 주로 오시죠. 제 아이가 여기에 왔을 때 극장에 대한 느낌을 들어보니 '매우 낡았다, 오고 싶지 않다, 여기서 영화를 보고 싶지 않다'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조현나 _인천 시민들에게 애관극장은 어떤 공간인가요? 윤기형 _제 나이 또래의 인천 시민들에게 애관극장은 당연히 한 번쯤은 와봤던 극장입니다. 안 와볼 수가 없는 극장입니다. 저 역시도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 연애 시절, 결혼 후에도 와서 엄청나게 많은 영화를 봤으니까요. 그러니까 인천 시민이라면 마음 속에 애관극장에 관한 추억이나 사연 하나씩은 무조건 있다고 보면 돼요. 조현나 _애관극장 말고 미림극장도 같이 취재를 하셨잖아요. 두 극장의 특성은 어떻게 다른가요? 윤기형 _애관극장은 최초의 극장이고 미림 극장은 1957년도 전쟁 이후에 생긴 극장입니다. 전쟁 후에 극장들이 동네마다 들어섰는데 그때 송현동에 들어선 게 평화극장이고, 1958년에 평화극장의 이름이 바뀌어서 미림극장이 됐습니다. 미림극장도 잠시 폐관했다가 '추억극장 미림'으로 재개관했으니까 그런 걸 따지고 보면 대단한 극장이죠. 애관극장 1관 로비 전경 조현나 _탁경란 대표 취재를 하면서 애관극장의 매각 소식을 접했고, 유동현 굿모닝인천 전 편집장이 관련 칼럼을 쓰면서 해당 내용이 대대적으로 알려졌죠. 이후로 극장을 돕기 위한 활동이 다양하게 이루어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윤기형 _코로나19를 겪으면서 극장 관객이 점점 줄어드니 경영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죠. 애사모(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가 결성이 돼서 많은 분들이 애관극장을 살리고자 했고 인천시에서도 협상에 나섰습니다. 현재로선 인천시가 극장을 매입해 기증하는 방법이 가장 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현나 _그밖에 애관극장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윤기형 _가장 좋은 건 관객들이 많이 찾아주는 거죠. 근데 젊은 사람들은 극장에서 영화를 잘 안 보려고 하고, 나이 드신 분들이 추억 삼아 오시니까 그런 것들이 안타까운 거죠. 조현나 _애관극장은 어떤 의미를 지닌 그장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요? 윤기형 _유일무이입니다. 다른 극장이랑 비교할 수가 없어요. 고일 선생님의 <인천석금>이라는 책 그리고 최성연 선생님의 <개항과 양관역정>이라는 책에서 '1894년~1895년 청일전쟁 때 정치국이 벽돌로 극장 협률사를 지었다'는 문구를 확인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애관극장의 기원을 알 수가 있습니다. 축항사, 애관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놀라운 극장입니다. 조현나 _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윤기형 _아직 애관극장이 오랜 역사가 있는 최초의 극장인 걸 모르시는 분들도 많아요. 애관극장에 많이들 오셔서 좋아하는 영화도 보고 애관극장이 이런 역사를 갖고 있는 극장이구나 같이 알아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인터뷰: 이희환 교수(인천대학교, 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 대표) 이희환 교수 조현나 _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희환 _저는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의 학술연구교수로 연구 활동하고 있는 이희환이라고 합니다. 조현나 _애관극장에 관해 오랜 시간 연구를 이어오셨는데요. 이를 토대로 애관극장의 변천사 그리고 역사에 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희환 _사실은 개항장이 제일 먼저 생긴 곳이 바로 인천이거든요. 또 조선인이 극장을 만든 것도 인천이 최초이고 그것이 바로 애관극장의 전신이었던 협률사라는 극장입니다. 협률사라는 극장은 청일전쟁 전후에 만들어졌다는 회고록이 남아있습니다. 1900년대 넘어가면서 여러 가지 운영상의 어려움을 겪다가 처음에 극장을 만들었던 정치국이라는 사람이 매각을 하면서 축항사로 이름이 바뀝니다. 거기서 이제 일본에서 유입돼 들어오는 신파 연극이 공연됐던 장소가 되는 거죠. 축항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신파 공연장으로 많이 활성화됐던 이 극장은 1910년대로 넘어가면서 일본의 무단 통치 속에서 많이 위축됩니다. 1920년대 새로운 인수자에 의해 지금의 애관이라는 이름이 극장명으로 사용되고, 애관극장이 조선 식민주의 시대에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문화시설로 자리를 잡습니다. 이때 영화의 전신인 활동사진도 상영하고 때로는 학생들의 학예회, 정치적인 집회도 열리고 공간을 변형해 권투 시합도 하고 무용 발표회도 하고, 복합 문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식민지 시대 내내 담당했던 극장인 셈이죠. 그래서 애관극장이야말로 살아있는 인천 근대 문화의 자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식민지 시대에 인천의 문화, 조선인의 문화를 일구는데 중요한 근거지가 됐던 곳이 바로 애관극장입니다. 1945년부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50년까지도 굉장히 많은 공연들이 여기서 펼쳐졌습니다. 전쟁 때 일부 피해를 받기도 했습니다마는, 1960년대 이후에는 극장도 새로 신축해서 더 확장되고 영화의 전성기를 거치면서 풍성한 시기를 거쳐 온 것 같습니다. 로비에 전시된 애관극장 연표 사진 조현나 _최초 애관극장이 경동의 현재 자리에 건물을 올리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희환 _애관극장 앞의 길이 인천 개항장에서 서울로 가는 육로였어요. 그리고 일본 조계와 조선인 조계의 경계가 바로 극장 앞의 도로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일본이 전관 조계지역에 극장을 만들었고 정치국이라는 사업가가 ‘극장이 흥행이 되겠구나’라는 사업적 발상에서 시작해 조선인 조계에다 극장을 만든 겁니다. 이 거리를 사리재라고 하는데, 사리재는 일제시대에도 조선인 상권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일본 상권과 연결되어 있는 조선의 상권 지역에 극장이 만들어진 것이 의미가 있고, 1899년에 경인선이 만들어지고 전철역과 그렇게 멀지 않은 지역에 극장이 위치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극장 바로 앞에 프랑스 성당도 있고 또 길 건너에는 미국의 감리 교회가 있고, 그러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장소에 극장이 만들어진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조현나 _애관극장이 한국 영화사, 한국 극장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시나요? 이희환 _조선인이 만든 최초의 극장으로서 전통 연희 공연을 시작으로 근대 공연장, 근대 영화관으로 바뀌어 간 극장, 식민지 시대 우리 극장의 역사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극장이 애관극장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본인들이 1883년 인천을 개항시킨 다음에 인천을 교두보로 삼아서 경성으로 진출하려는 목적 하에 자기들의 극장 문화를 가져왔는데, 이것에 맞서서 조선인이 조선인 극장을 만들었다는 게 아주 실험적이면서도 획기적인 역사의 한 장면이 아닌가 합니다. 근대 문화를 만들어 나가려고 했던 그 움직임이 애관극장의 전신인 협률사로부터 시작해 126년이 넘는 역사가 끊기지 않고, 지금까지도 이 단관극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굉장히 소중하고 귀중한 역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애관극장 2관 내부 조현나 _과거의 애관극장은 여러 공연을 올리고 다양한 영화를 상영할 만큼 번영했지만, 현재는 운영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교수님께선 현재 애사모(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의 대표를 맡고 계시기도 한데, 애관극장을 위해 모임 차원에서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희환 _애관극장이 멀티플렉스 극장에 밀려서 복합상영관 형태를 만든 것까지는 지켜봤지만, 자주 오진 못했죠. 그런데 4년 전쯤 갑자기 매각 소식이 들려왔어요. 그렇게 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저희가 나서기도 하고 또 인천시도 나서서 사정을 알아보면서 상황이 가라앉았었는데, 2021년 3월에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을 받아서 더 이상 못 견디겠다는 소식이 전해졌죠. 다시 2차 애사모 모임을 갖고 기자회견도 하면서 나서게 됐고요. 이번엔 극장주 개인에게 손해 보면서까지 이 극장의 역사를 유지하라고 해서는 안 되겠다, 인천시가 나서는 방법밖에 없겠다고 주장하면서 인천시와 민관협의체도 구성하고 협의를 계속 벌여왔죠. 그래서 이번 4월 즈음에 박남춘 전 인천광역시장님과 탁경란 애관극장 대표, 이원석 인천영상위원회 위원장과 모여서 애관극장이 역사를 이어나가도록 서로서로 역할을 분담해서 노력하자는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조현나 _마지막 인사 부탁드립니다. 이희환 _바뀐 시장님께서 꼭 애관극장을 인처의 소중한 문화공간으로, 공공 공간으로, 역사의 자부심을 지닌 공간으로 발전시켜 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시민들도 애관을 더 많이 찾아주시고, 영화 관람과 더불어 근대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명소로 애관극장이 거듭났으면 좋겠습니다. 필자: 조현나(씨네21) 사진촬영: 최성열(씨네21) 인터뷰 일자: 2022년 6월 24일
① 동명극장(東明劇場), 대보극장(大寶劇場) 1923년 조선인상공업자로 구성된 함흥상업회 산하 흥행단체 흥화조합(興化組合)에서 건립한 영화관이다. 연극 공연은 물론 함흥의 대표적인 집회장소로 활용되었다. 함흥의 3개 영화관이 경쟁하던 1932년 당시 동명극장의 입장원은 대인 33,667명, 소인 19,646, 금액 7,563원으로 함흥극장보다는 미치지 못하지만 진사관과 비슷한 수준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었다. (<咸興三映畵館七年度成績>, 《朝鮮新聞》, 1933.01.20) 1936년 함흥상업회는 흥화조합을 주식회사 동명극장으로 바꾸었다. 당시 극장운영을 맡았던 김영선연예부(金永善演藝部)는 극장 임대료로 한 주당 12원 50전씩 지불했다. ( <분규 거듭하든 동극(東劇) 문제 단락(段落)>, 《동아일보》, 1936.05.19) 1940년 들어서서 동명극장은 대보극장(大寶劇場)으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이며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이성주(李成周), 지배인은 김하룡(金河龍)이며 총 505석의 객석을 갖추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② 진사좌(眞砂座), 진사관(眞砂館), 본정영화극장(本町映畵劇場) 함흥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극장으로 함흥부 본정에 있었다. 진사좌를 운영하던 시마네(敷根角市)는 함흥의 실업인으로 재목점, 운송점과 더불어 진사좌연예부를 거느리고 있었다. 1925년 5월 운영자 시마네(敷根角市)가 기존의 낡은 건물을 수리하여 확장하였다. 1927년 1월 진사좌는 문화연예사 직영의 영화상설관으로 전환된다. 이때 이름을 진사관으로 바꾸었다. 문화영화사는 경성 희락관 악장으로 이름이 높던 시라이(白石蘇山)와 마츠무라(松村英)가 진사관을 경영하기 위해 만든 회사였다. (<眞砂舘の老人優待>, 《朝鮮新聞》, 1927.05.14) 1930년 무렵 진사관의 흥행권을 인수한 쿠니이 (國井勝英)는(<咸興眞砂舘開業一周年>, 《朝鮮新聞》, 1931.05.31) 1931년 5월 개업 1주년을 맞아 낡은 건물을 신축하기로 결정한다. 1931년 8월 신축 허가를 득하고 공사에 들어가 1931년 11월 새로운 건물이 완공되었다. 공사비는 6만원이었다. 이즈음 진사관은 쇼치쿠의 북선 봉절장이었다. (<廣告>, 《朝鮮新聞》, 1933.07.03) 진사관은 1940년대 들어 본정영화극장(本町映畵劇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츠무라(松村茂信)이며 총 505석의 객석을 갖추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③ 함흥극장(咸興劇場) 1923년 자본금 15만원의 주식회사 함흥극장이 조직되어 이 자금으로 함흥부 대화정에 건립한 극장이다. 공사비 1만 6천여원이 들었다. 초기 운영자는 타마키(玉置省三)였으며, 1928년 4월부터는 츠지(辻平三)가 1년에 3천원 씩의 임대료를 내기로 하고 운영을 시작했다 .(<大咸興の展望>, 《朝鮮新聞》, 1933.07.03) 1933년 당시에는 닛카츠와 신코키네마의 북선 봉절장이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츠지(辻ヤス子)였으며 고바야시(小林豊三)이 지배인이었다. 총 755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④ 명보극장(明寶劇場) 1940년 함흥부 소화정에 이기진(李基進, 창씨명 芝山基進)이 건립했다. 3층 콘크리트 건물로 함흥역 가까이 위치했으며 1,050석의 대극장이었다. 박노홍은 경성의 명치좌에 지지 않는 극장이라고 평한 바 있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이기진, 지배인은 다케모토(武本光洋)였다. ⑤ 함흥문화극장(咸興文化劇場) 함흥부 소화정에 있었던 문화영화 상영관으로 객석은 200석이었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오쿠야마(奧山歲一)였으며 지배인은 하야시(林英一)였다. ⑥ 원산극장(元山劇場), 유락관(遊樂館) 원산극장은 1921년 9월 원산부 천정(泉町)에 설립되었다. 개관 당시 일본 코우카츠(國活)와 제휴하였다. 이후 연극, 영화의 상영은 물론 각종 집회의 장소로도 활용되었으나 1925년 11월 15일 발생한 화재로 전소되었다. 피해액은 6만 5천원이었다 .(<원산극장 전소(全燒)>, 《동아일보》, 1925.11.17) 원산극장이 있던 자리는 한동안 빈터로 있었다. 후쿠이(福井伊三郞)를 중심으로 주식회사 유락관이 설립되어 이곳에 극장건립이 추진된다. 1926년 11월 30일 건물이 완공되어 영업을 시작했고, 1930년 활동사진관 수좌가 등장하여 경쟁체제를 갖추게 되자 닛카츠와 쇼치쿠 등과 계약을 맺고 혁신을 꾀하기도 했다. (<大改革の元山遊樂館披露>, 《朝鮮新聞》, 1930.12.03) 1933년에는 경영합리화를 이유로 수좌와 합병을 꾀하지만 무산된다. (<元山の兩常設館合併問題具體化>, 《朝鮮新聞》, 1933.10.26) 일제말기까지 원산의 대표적인 영화관으로 있었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후지사와(藤澤正人)이며 지배인은 고이즈미(小泉昇三)였다. 객석수는 750석이었다. 해방 후 신영관(新映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⑦ 수좌(壽座), 대승관(大勝館) 원산부 경정(京町) 36번지에 있던 극장이다. 원산의 토목건축청부업자인 우메다(梅田市治郞)의 주도로 조직된 주식회사 수좌에서 1930년 설립했다. 도아(東亞), 데이키네(帝キネ)의 영화를 상영하며 유락관과 더불어 원산의 양대 일본인 영화관으로 등극했다. 1931년에는 경영합리화를 이유로 주식회사 유락관과의 합병 문제로 잠시 휴관을 했다. (<元山の毒座>, 《朝鮮新聞》, 1931.06.14) 1933년 주식회사 유락관과 합병 직전까지 갔으나 무산되었고 1935년 6월 21일 새벽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1935년 주식회사 수좌는 소실된 수좌의 재건을 추진한다. 새롭게 건축된 극장의 이름은 대승관(大勝館)이었다. 극장 신축을 위해 주식회사 수좌는 자본금을 12,100원에서 20,000원으로 늘려 주식회사 대승관으로 전환한다. 1943년 당시 대승관의 흥행주는 고이즈미(小泉昇三), 지배인은 요시오카(吉岡玉男)이었다. 객석수는 8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⑧ 원산관(元山館) 원산부 북촌정에 건립한 활동사진관으로 1928년 1월 23일 구정을 맞아 개장했다. 1927년 1월, 원산시영회(元山市榮會)의 알선으로 공회당 겸 극장을 짓기로 하고 노기만(盧紀萬) 등 원산 거주 조선인 실업가들이 발기하여 조직한 주식회사 원산관이 설립을 맡았다 .(<『원산관』 발기>, 《중외일보》, 1927.01.20) 원산관의 흥행주는 보통 주주총회에서 결정되었는데 설립 이후 김창준(金昌俊) 등이 맡아 운영했다. (<원산관 쇄신>, 《중외일보》, 1930.03.30) 흥행주인 김창준은 1930년 원산관 산하에 원산관연예부를 조직하여 연극 공연 등을 펼쳤는데 호응이 좋아 인근 함흥의 동명극장에서도 공연이 이루어졌다. (<원산관연예부에 초차관(初次舘) 외 출연>, 《중외일보》, 1930.10.04) 1933년 3월 원산관에서는 원산 최초로 토키영화가 상영되기도 했다. 1943년 현재 흥행자는 김낙진(松平洛鎭)이며 660개의 객석을 보유하고 있었다. 해방 후 원산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⑨ 희락관(喜樂館) 흥남읍 구룡리에 위치한 극장으로 언제, 누가 건립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38년 12월 흥남의 교통사고 기사에서 사상자들이 희락관에서 영화를 관람하고 조선질소비료회사 사택으로 가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면 관객의 대부분이 조선질소비료회사의 사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흥남 뻐스열차 충돌사건 상보(詳報)>, 《동아일보》, 1938.12.06) 1943년 당시 흥행주는 마에다(前田長太郞)였으며 지배인은 삼촌건삼이었다. 5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⑩ 흥남관(興南館) 흥남읍 천기리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누가 건립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경성 중앙관의 흥행주인 오이시(大石貞七)이며 지배인은 가메야마(龜山嘉介)였다. 총 56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 흥남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⑪ 소화관(昭和館) 흥남읍 송상리에 있던 극장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0년 11월 극단 고협이 이곳에서 공연 중 극장 2층이 붕괴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토와타(砥綿啓太), 지배인은 타치바나(立花三郞)였다. 총 870석의 좌석을 가지고 있었다. ⑫ 흥남문화영화극장(興南文化映畵劇場) 흥남읍 호남리에 있던 문화영화 전용극장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카도타니(門谷淸), 지배인은 마츠오(松尾辰次郞)였다. 3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⑬ 용흥극장(龍興劇場) 흥남읍 용흥리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루야마(丸山野虎雄)였다. 92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⑭ 단천좌(端川座) 단천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오오모토(大元貞珪), 지배인은 시라키(白木義信)이었다. 742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⑮ 단천극장(端川劇場) 단천읍 내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설립자는 함흥출신의 최두진(崔斗鎭)으로 흥행계통에서 일하던 인물이다. (<흥행계에 권위 단천극장주 최두진(崔斗鎭)씨>, 《동아일보》, 1939.10.03) 1943년 단천군총력연맹에서 막간 강연을 추진할 장소로 단천좌와 함께 지목된 곳이다. 하지만 1943년 『영화순보』 영화관 목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영화관이 아닌 연극장으로 구분되었거나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⑯ 혜산극장(惠山劇場) 혜산진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야스다(安田隆一)이며 객석수는 455석이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⑰ 신포극장(新浦劇場) 신포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나카야마(中山賢一)이며 객석수는 400석이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⑱ 고사관(高砂館) 북청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츠무라(松村康弘)이며 좌석수는 489석이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⑲ 홍원좌(洪原座) 홍원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홍춘선(洪春善, 창씨명洪村春善)이며 4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⑳ 흥락관(興樂館), 고원극장(高原劇場) 흥락관은 고원읍에 있던 극장으로 1936년 12월 23일 어린선(魚麟善), 조경삼(趙京三) 등이 합자하여 7천여원의 경비를 들여 만들었다. 고원을 대표하는 장소로 뒷날 고원극장(高原劇場) 으로 개칭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교우코쿠(岐谷亮吉)이며 3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1. 삼우회관(三友會館) 천내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즈노(水野長一郞)이며 3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2. 영흥극장(永興劇塲) 1935년 10월 12일 영흥군에 건립된 극장으로 개관 당시, 함흥의 동명극장을 경영하던 김영선연예부가 운영을 맡았다 .(<영흥극장 수(遂) 개관>, 《동아일보》, 1935.10.13) 1943년 『영화순보』 영화관 목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연극장으로 구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자료] ≪매일신보≫, 1936.12.29. 고원(高原)에 극장, 입삼일(廿三日) 개관 【고원】 약진도상에 잇는 고원은 발전 여지가 풍만하여 점차 도시의 기풍을 정(呈)하고 잇다. 그러나 아직 오락기관이 업서 간혹 순업흥행단이 차저주면 일대(一大) 울회(鬱懷)를 느끼든 시민의 위안이나 되엿지만 겨우 가설극장에서 풍우설한(風雨雪寒)이면 불편무비(不便無比)하든 바 시내 어린선(魚麟善) 조경삼(趙京三)씨 등 유지 제씨가 합자하야 약 七천여원의 경비로 흥락관(興樂館)이란 극장을 건축하엿는데 거(去) 二十三일에 낙성식을 거행하고 동일(同日)부터 三일간 개관기념을 하게 되여 매야 입장객에게 추첨권까지 배부하여 좌기와 여(如)한 경품을 수여하엿다. 一등 一인 백미 一叺 二등 一인 궤종시계 一座 三등 一인 경대 一座 (사진은 건축된 흥락관) [자료] ≪朝鮮新聞≫, 1931.06.14. 元山の壽座 開館に决定 (元山)元山壽座は活動常設遊樂館に對抗し優秀な活動や芝居等を上映興業してフアンを喜ばせるたが突如休館遊樂館に合倂問題が起り一時は一般から成行を注視されてるたが重役會議で開館續行に決定し今後三村敏郞氏が經營の任に當り從來の東亞,帝キネの外新に日活とも特約嶄新なる映畵を上映してフアンの待望にそひ開館隆盛を期することゝなつた [자료] ≪중외일보≫, 1927.01.26. 본보(本報) 독자위안(讀者慰安) 대흥행, 함흥 진사좌(眞砂座)의 개관 기념 함흥에 잇는 극장의 효시로 일반사회에도 공헌이 만튼 진사좌는 근래에 미미(微微) 부진 중에 잇든 바 래(來) 二十五일부터 문화연예사의 직영으로 상설관이 되얏는데 기(其) 벽두로 래(來) 二十五일 야(夜)에는 봉황의 면류관을 봉절할 터이라 하며 래(來) 二十七일 오후 七시반부터는 본보 독자를 위하야 三일간 무료로 흥행하리라는데 단(但) 하족료(下足料)만 받으리라더라(함흥) (우대권은 欄外에) [자료] ≪시대일보≫, 1925.11.20. 원산극장 전소(全燒) 손해(損害) 六만원 【원산】 원산 오락기관의 하나로 또 원산의 유수한 건물인 원산극장은 十五일 오전 三시 四十분에 발화되어 소방대의 전력을 빌엇으나 겨우 五시 三十분에 소화되어 극장은 전소되고 인가(隣家) 二三동까지 소화되엇는데 손해는 약 六만원이라고 [자료] ≪매일신보≫, 1918.10.29. 함흥 활동상설 개관(活動常設 開館) 금춘(今春) 이래 신축 중이던 만세관(萬歲館)은 유유(愈愈) 기(其) 내부의 설치 등이 완성되야 十월 二十五일 야(夜)부터 개관한바 비상한 호평을 박(博)하더라 [자료] ≪동아일보≫, 1935.03.12. 동명관(東明舘) 기념 【함흥】 함흥부 내에서 오직 하나만인 군선인 경영 영화상설관인 동명극장(東明劇場)은 수난에 수난을 거듭하야 이제 개관 八개년 기념으로 자축하는 의미에서 지난 九일 함흥 일반 유지를 춘경원(春慶園)에 초대하야 간담회를 개최하고 고급영화를 일반 부민에게 저렴한 요금으로 공개하엿다는 바 지금은 함흥부내에서 다른 영화관에 손색이 없을만큼 모든 설비를 하엿다고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40.04.28. 흥남에 각 극장 수입, 四개월간 六만여원 【흥남】 지난 四월부터 七월까지 四개월간 흥남읍내 각 연극장에서 흥행한 활동사진과 연극들의 관람료금을 조사한 통게 수자는 六만四천五백六원 五十전으로 이에 대한 인원수는 一六六,七三二명이라 한다. 작년 동기에 비하면 약 二활 증가라 한다.
[사진] 영화 <물망초>에서 주증녀 남편 유지 이은 <조국의 어머니> 주증녀는 1950년대를 눈앞에 둔 1949년 3월 윤대룡 감독의 <조국의 어머니>로 스크린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독립운동을 하던 남편이 일본 헌병에 체포돼 모진 고문으로 죽자 아내가 그 유지를 이어 싸우다가 광복을 맞게 되는, 이른바 이 시기의 특징인 항일 영화이다. 잇따라 황정순, 주선태, 황해, 최남현, 이민 등 신인이 몇 달 사이에 쏟아져 나온다. 이렇게 이름을 알린 주증녀는 16밀리로 찍은 최초의 천연색 극영화 <여성일기>(홍성기, 1949)에 이어 <여인애사>(신경균, 1950), <흥부와 놀부><이경선, 1950) 두 편에 출연한다. [사진] <여성일기> 현장 사진(앞열 왼쪽이 주증녀, 오른쪽이 황정순) 하지만 6.25 전란 후 주증녀가 다시 활동을 재개한 것은 전쟁으로 헤어졌던 연인이 재회하는 김성민 감독의 <애원(哀怨)의 향토>(1954)부터였다. 잇따라 <자유전선>(김홍, 1955), <인생역마차>(김성민, 1956), <애인>(홍성기, 1956), <처와 애인>(김성민, 1957), <실낙원의 별>(홍성기, 1957), <청실홍실>(정일택, 1957), <인생화보>(이창근, 1957), <별아 내가슴에>(홍성기, 1958), <실낙원의 별 후편)(홍성기, 1958), <모녀>(최훈, 1958), <별만이 아는 비밀>(이선경, 1958), <마도의 향불>(신경균, 1958) 등 11편에 기용된다. 대부분이 당시 작고한 김내성의 「애인」, 「실낙원의 별」 류의 인기 통속소설과 방송극을 원작으로 한 것이었다. [사진] <실낙원의 별> 스틸 사진(중앙이 노경희, 우측이 김동원) ‘국산 갱스터 ’(「영화주평」. 『한국일보』, 1956.09.16) 를 지향한 <인생역마차>는 신문기자와 암흑가의 두목(이향, 1인2역) 사이에서 사랑을 선택해야 하는 비운의 여성을 보여 주는가 하면, <처와 애인>에서는 월남한 남편의 외면 속에 참고 견뎌야 하는 실향민의 비애를, <실낙원의 별>과 <실낙원의 별 후편>에서는 애독자(노경희)와 사랑에 빠진 인기 작가 아내(옥영)의 좌절과 반전의 삶을, <청실홍실>과 <별만이 아는 비밀>에서는 전쟁미망인과 딸의 행복을 위해 참고 견디는 애틋한 모성애를 각기 표출해 낸다. 주증녀는 특히 <실낙원의 별>의 호연으로 보다 더 좋은 의미의 대중성을 갖게 되었다. (유동준, 「영화로 보는 실낙원의 별」, 『경향신문』, 1957.09.28.). [사진] <청실홍실>의 한 장면, 좌측은 영화배우 엄앵란(사진제공 김종원) 그 이후 <낭만열차>(박상호, 1959), <그 여자는 행복했던가>(송국, 1959), <아내>(김묵, 1959) 등 주로 여성 멜로물에 출연했으나 자신이 제작한 <그 여자는 행복했던가>(기획 허영)의 흥행 실패와 잇따른 언론계 종사자와의 스캔들로 인해 이미지에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나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 <고려장>(1963)에 이어 김수용 감독의 <만선>(1967)과 <산불>(1967) 등 1960년대의 출연작에 이르면서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상투적인 내용과 도식적인 인물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작품 선택에 변화가 온 것이다. 재봉틀 일로 가계를 도우며 두 자녀와 가정부의 유혹에 빠진 남편(김진규)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하녀>의 아내, 잘못된 효행의 악습에 따라 산채로 버려져야할 운명에 처한 <고려장>의 할머니, 바다에 나간 두 아들을 잃고, 실성해버린 <만선>의 어머니(곰치 아내), 마을에 숨어들어온 인민군 탈영자를 사이에 두고 다른 과부와 성적 비밀을 공유해야 하는 <산불>의 과부 점례 등 다양한 캐릭터가 그런 예이다. 이 같은 질적 성취는 결국 제5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산불)과 제11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산불), 그리고 제6회 대종상 여우조연상(만선) 등 세 개의 큰 상을 받게 되는 경사로 나타난다. [사진] <하녀>의 한 장면 [사진] <고려장>의 한 장면 여덟 살 연극소녀에서 은막의 유망주로 강렬한 눈매와 우수의 그늘을 드리운 독특한 마스크로 팬들에게 사랑받은 주증녀는 1925년 2월10일 함경남도 영흥군 엄기면 덕하리에서 태어났다. 부농의 무남독녀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함남여고를 졸업하자 동경하던 극단 고협(高協)에 들어갔다. 1943년 열여덟 살 때였다. 그녀가 처음 무대에 선 것은 <무영탑>(연출 유치진)의 단역인 시녀 구슬아기 역이었다. 이후 <청춘의 윤리>, <맹진사댁 경사> 등 연극에 출연하며 연기력을 다졌다. 이 무렵 그녀는 극단 예원좌(藝苑座)에서 고협(高協)으로 옮겨온 배우 허영(許影)과 눈이 맞아 혼인하고, 대건사(大建社)의 직속극단 청탑(1946년 11월23일~)의 첫 연극 <보검>(3막4장)에 김승호, 허영 등과 함께 출연했다. (『자유신문』, 1946.11,09) 조용하고 섬세하면서도 선이 뚜렷한 그녀의 연기는 보는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런 그의 재능은 얼마 못가 새 얼굴을 찾는 윤대룡 감독에 의해 발견된다. 허영 외에 손전과 권일천이 공연한 <조국의 어머니>였다. [사진] <만선>의 한 장면(사진제공 김종원) 이렇게 은막에 진출한 주증녀는 1950년대까지 ‘잘 나가는 배우’로, 60년대 이후에는 ‘연기파 배우’로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다. 그 사이 신변에도 변화가 있었다. 허영과 헤어지고 가십에 오르내리던 언론계 종사자 윤호중과 재혼한 것이다. 하지만 70년대 초반부터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정상적인 연기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1974년 검객영화 <철면객>(이형표, 장청천)에 출연할 무렵이었다. 종합 진단 결과 뇌종양이었다. 수술을 포기한 채 스스로 육체를 갉아먹는 고통 속에서 약물 치료만 계속했다. 다만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열일곱 살 큰 딸이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듣는 일이었다. “추석이 며칠 안 남았구나. 추석빔을 마련해야 할 텐데…” 유족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주증녀는 1980년 9월18일 동트는 새벽 6시30분 남편과 1남 1녀, 정들여 가꾼 정원의 나무와 마지막 작품 <청색시대>(1976, 정인엽) 등 3백여 편의 영화를 남기고 25년에 이르는 연기생활을 마쳤다. 당시 56세였다. “예술인마을에 정착한지 벌써 5년이 돼간다. 시골도 아닌 서울의 주택가에 무슨 마을이냐고 하겠지만 기실 이 마을이란 어휘에 나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정감과 향수를 느끼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어쩌면 유일한 안식처가 될지도 모르는 이곳 예술인마을- 이름처럼 황토색 짙은 옛날의 마을은 아닐지라도 서울에서 유일한 ‘마을’이라는 희소가치가 있다.” 이는 주증녀가 뇌종양을 앓을 무렵 영화진흥공사 발행 월간 《영화》(1974년 5월호)에 발표한 수필 「예술인마을 우거기(寓居記)」의 한 대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