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오브 로큰롤
- 감독
- 앤드류 솔트
- 제작년도
- 1995
- 출연
- 이기 팝, 뉴욕 돌스, 더 라모네스, 리차드 헬, 크리스 프란츠, 데이비드 바이언, 더 클래쉬, 마크 마더스보, 커티스 블로우, 마이클 잭슨, 런 디엠씨, 마돈나, 퍼블릭 에너미
1987년에 도착한 < 영웅본색 >은 그 매혹의 강도에서 보자면, 적어도 어떤 세대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만한 것을 만들어냈다. 동시대의 그 어떤 한국영화도 이 영화가 불러일으킨 것과 같은 열광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졌다’는 저 고색창연한 대사는 소년들의 마음을 움켜잡았다. 그렇다. 의리는 땅에 떨어졌으나, 이 세계의 유일무이한 가치인 바로 그 의리를 세우기 위해 우리의 ‘따거(大兄)’ 주윤발은 홀홀단신 적진을 향해 나아가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소년들은 일시에 검은색 선글라스와 롱코트에 사로잡혔으며, 너도나도 성냥개비를 질겅질겅 씹어대고 싶어했다. 실상 <영웅본색>의 시작은 그렇게 창대하지는 않았다. 이 영화는 서울의 화양, 명화, 대지극장에서 1987년 6월 23일부터 7월 9일까지 개봉되었으며, 9만 4천 604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개봉관에서 ‘신통치 않은’ 성적을 거둔 이 영화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한 것은 “뒷골목과 변두리의 ‘동시상영’ 프로가 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급기야는 주인공의 웃차림과 제스추어를 모방하고 수십번씩 같은 영화를 되풀이해 보는 1) 열광적인 팬덤을 낳았다. 팬덤은 이제 막 불붙기 시작한 새로운 매체를 기반으로 장르에 대한 탐닉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1988년을 기점으로 VCR 대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영웅본색>을 필두로 한 홍콩영화는 비디오 가게 선반이 나눠놓은 분류 속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로 카테고리화되었다. 이 ‘장르’는 이제 가장 충실하고 열정적인 관객을 갖게 될 터이다. 비디오라는 새롭게 추가된 매체의 영향은 있었으나, 여기에는 분명 1970년대 이래로 동시상영관을 채워왔던 이런 영화들(이른바 1970년대의 홍콩 권격영화)의 관객의 세대적, 젠더적 상속이 있었다. 이들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것은 10대에서 20대의 젊은 남성관객들이었다. 장사치들은 발빠르게 이에 조응하였다. <영웅본색> 이후 단 1년 만에 홍콩영화의 한국 판권은 2배에서 3배까지 치솟았으며, 1988년의 시점에 홍콩영화의 주요 수출국 중 3위로 랭크된 한국은 1990년에 이르면 대만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오우삼과 서극과 임영동의 이름은 이제 막 등장한 ‘시네필’들의 경전에 올랐고, 주윤발, 장국영, 왕조현, 유덕화, 적룡, 이수현, 여명 등 한국식 한자 발음으로 통용되는 이름들은 그 발음만큼 ‘친숙한’ 스타가 되었다. 이 열광을 가능케 한 조건과 근원은 무엇인가? 왜 이곳에서 <영웅본색>은, 나아가 이로부터 촉발된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소위 ‘홍콩 느와르’ 2) 로 불려진 일련의 홍콩영화들은 그토록 강렬한 매혹을 불러일으켰는가? 왜 그때 한국의 10대와 20대 젊은 남성들은 이 세계에 그토록 ‘진지하게’ 심취할 수 있었는가? <영웅본색>은 1987년과 88년 사이라는 한국 사회의 기점적 시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시작된 홍콩 느와르에 대한 열기는 1990년대를 전후하여 절정에 이르렀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분명 <영웅본색>이 불러일으킨 열광의 강도는 놀라운 것이지만, 누가 어떻게 향유, 소비했는가의 방식은 한편으로는 1970년대 이후 이 지역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획득했던 (그러나 그 하위문화적 성격상 거의 담론의 영역에서는 논의되지 않았던) 홍콩산 액션영화(이거나 종종 한국, 대만, 동남아시아 일대의 영세 영화자본들이 합종연횡하면서 만들어낸 출처 불분명의 ‘무국적’ 액션영화)가 소비되었던 방식을 답습하는 한편, 당연한 말이지만 1980년대 중후반이라는 사회적·미디어적 조건과 결부되어 향유되었다. 즉, 여기에는 한국에서 홍콩영화가 차지했던 독특한 위상이라는 종적 맥락과 <영웅본색>이 도착한 1987년부터 이 장르에 대한 열광이 사그라드는 199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이라는 횡적 맥락이 서로 연동되어 개입되어 있다. 1960년대 중후반 한국의 영화관객이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계층별, 세대별, 젠더별 분화를 시작하던 무렵 이른바 무협영화의 형태로 처음 한국 영화시장에 도착한 이래 홍콩영화는 재개봉관, 도시 변두리 소극장과 같은 지극히 남성 동성사회적(homosocial) 공간에서 지속적으로 소비되며 젊은 남성들의 주요한 하위문화적 자원으로서 기능하였다. 특정 공간과 특정 세대, 젠더가 결합되어 있는 이 향유의 방식이야말로 홍콩영화에 관한 한국 담론 특유의 세대적 노스탤지어의 감각이 생겨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홍콩영화에 관한 서술이 종종 개인적 기억과 그것이 놓여진 시간과 장소로 이끌리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3) 10대, 20대의 남성 하위문화와 강하게 결부되어 있던 홍콩영화에 관한 이해는 내셔널 시네마 히스토리에 기반한 영화사적 계보 이전에 개인적 기억과 결합되어 수용되어왔다. 강력한 스타 시스템으로 운용되는 홍콩영화가 전시하는 친밀한 인종의 얼굴, 스타의 몸이야말로 바로 이 개인적 열망들의 투사체로 작용하였다. 이것은 홍콩영화의 향유 방식에 내재된 독특한 세대론적 감각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세대적 응집성은 강렬한 체험의 강도를 동반한다. 홍콩영화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이 영화들이 한국영화사에서 차지하는 기묘한 위치이다. 홍콩영화는 일본영화가 전면 금지된 이곳에서 오랫동안 한국영화를 제외하고 같은 동양인의 얼굴이 등장하는 유일한 영화였으며, 또한 한국영화와 가장 빈번하게 결합된 영화이기도 하였다. 1970년대 내내 도시 변두리 극장에서 가장 긴 흥행 사이클을 보여주었던 액션영화의 절대 다수는 소위 한국-홍콩 혹은 한국-대만의 ‘위장합작’ 영화들이었다. 1986년의 외국영화 수입 자유화 이후에야 완전히 사라진 이 오래된 관행 속에서 종종 한국어 더빙 버전의, ‘한국영화’로 알려지기도 한 홍콩영화는 익숙한 풍경과 언어를 지닌 것으로 감각되었으며, 그 속에서 홍콩영화의 외래성은 습관적으로 또 의도적으로 지워졌다.(홍콩 영화배우들의 이름이 한국식 한자 독음 표기로 호명되었던 사실은 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홍콩영화에 대한 이곳에서의 감각은 외화와 방화 사이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마도 이 친밀성이야말로 홍콩영화에 대한 한국에서의 ‘번역가능성’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일 게다. 4) 바로 이와 같은 친밀한 방식 속에서 이 영화들에 열광한 절대적인 관객층이 10대와 20대 젊은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영화들이 이 시기 이들의 열망과 분노, 상상적 극복과 같은 것, 즉 어떤 정동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절반쯤 토착화된 영 컬처로서 <영웅본색>은 이 영화가 도착한 바로 그 시간인 1987과 1990년대 초까지 들끓었던 혁명적 열망과 정념과 관련되어 있다. 1987년의 6월 항쟁이 이끈 직선제 개헌 관철의 결과 그해 12월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6월 항쟁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함을 보여주었다. 7, 8월의 노동자 대투쟁과 전대협 결성, 이듬해의 노동법 개정투쟁, 6.10/8.15 남북학생회담 투쟁, 1989년의 전교조 결성, 노동자 총파업, 그리고 문익환 목사, 전대협 대표 임수경, 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 신부 등의 방북, 1990년의 전노협 결성 등 대규모의 노동자 투쟁과 통일 투쟁이 이어졌다. 한국 사회의 역사적인 동시에 정치, 사회, 경제적인 모순에 대한 거대한 저항이 분출하고 있던 이 시기는 정확히 오우삼 영화에 대한 열광의 시간과 겹쳐져 있다. 한국영화를 포함해서 그 어떤 영화도 이 순간 그의 영화만큼 젊은 남성들의 열광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영화가 1987년의 정치와 정동과의 예기치 않은 충돌 혹은 밀착을 이루어내고 있는가를 역설해주는 것일 게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 <영웅본색>을 필두로 한 홍콩 느와르는 이 영화들의 과도한 폭력성이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로 점철되었다. 그것은 심지어 구체적인 숫자까지 동반하였다. 당시 한 시민단체가 주최한 ‘폭력영화와 청소년 문화환경’이라는 심포지움의 발표에 따르면, 1988년 관객 28만명을 동원한 <영웅본색 2> 전체의 21.9퍼센트가 폭력장면이고 89년 25만명을 동원한 <첩혈쌍웅> 24.3퍼센트가 폭력장면이다. 5) 라는 ‘구체적인’ 퍼센티지까지 제시되고 있다. 이 영화들에 대한 히스테릭한 우려는 더 이상 저질이라는 모호한 어휘를 맴도는 것이 아닌 직접적으로 ‘폭력’에 대한 과도한 염려였으며, 이 영화들에 대한 매혹 또한 액션의 ‘폭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 87년 6월 항쟁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의 죽음이라는 기폭제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대중이 애도의 공동체로서 형성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자, 또한 국가폭력이 저지른 이 무구한 죽음의 형상은 그 자체로 대항폭력을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대항폭력은 ‘87년을 전후로‘ ‘정당한 약자의 무기로 자리잡았’다(김원). 그것은 가두에서 백골단과 구사대가 휘두르는 곤봉과 최루탄에 맞서는 화염병과 쇠파이프의 저항이었으며, ‘약자가 최대한의 도덕적 힘을 발휘한 가장 치열한 무기’(최장집)로서의 분신이었다. 즉, 이 격렬한 대중투쟁의 시간은 도저한 국가 폭력에 저항하는 대항폭력의 시간이기도 하였다. 대항폭력의 정당성이야말로 공안정국을 유지하고자 했던 이 정권으로서는 가장 염려스러운 것이자 하루빨리 탈취해야 할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말해 폭력의 카테고리 안에 묶인 <영웅본색>의 힘은 그야말로 거리의 힘의 상상적 투사물일 수 있었다. 1990년 국군보안사령부가 각계 주요인사들을 사찰한 ‘청명계획’이 내부고발자에 의해 폭로된 직후 국면전환용으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노태우는 “저는 우리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동원해서 이를 소탕해나갈 것입니다”라고 선언하였다. 범죄와 폭력이 ‘와’로 병렬되고 있는 이 연설은 대항폭력을 범죄화함으로써 이 폭력의 정당성을 삭제하고자 하는 언설 전략의 전형적인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폭력) 대 대항폭력. 한국에서의 홍콩 느와르 전성기와 함께 하는 이 두 폭력의 구도는 왜 이 영화들의 폭력이 어떤 이들에게 그토록 과잉 의식되는지 왜 이 영화들의 향유자들에게는 그토록 매혹적인 것인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해준다. 저 영화적 폭력이 죽음과 애도와 긴밀히 연결된 대항폭력의 영화적 형상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다만, 여기에는 분명 폭력 형상이 있으며, 나아가 그것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쾌감이 있다. 게다가 그 폭력은 오로지, ‘형제’를 위해서만 발현되는 것이다. <영웅본색>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이 정념의 활극은 오로지 형제애에 기초해 있다. 한때 조직에 발 담갔으나 갱생의 의지를 다지는 남자, 그러나 그의 이전의 삶이 그의 발목을 잡아끄는 이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영웅본색>이 느슨하게 관련된 1967년의 동명 영화로부터 비롯되었다. 감독 용강(龍剛)의 광동어 사회파 드라마인 이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하면서 오우삼은 원작에는 존재하지 않는 마크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였다. 오우삼은 이 인물을 구축하는 여타의 서사를 지우고, 이 캐릭터를 송자걸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마크는 오로지 이 관계의 도덕, 의리라는 하나의 정념으로 움직인다. 젊은 남성들을 열광케 했던 소위 이 영화의 ‘명장면’들이 마크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컨대 위조화폐에 담뱃불을 붙이는 주윤발, 화분에 심어놓은 총을 꺼내어 춤추듯 유려한 동작으로 총을 쏘는 주윤발. 왜냐하면 이 캐릭터는 클로즈업과 슬로우모션을 통해 제스추어와 표정으로 특권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크에게 가족이 있는가, 그는 어떤 역사를 지니고 있는가. 우리는 여기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송자걸이 서사의 캐릭터라면, 마크는 제스처의 캐릭터이다.(1974년이라는 구체적인 시간을 배경으로 마크의 전사를 그리고 있는 < 영웅본색 3 >는 영화의 성취와는 별개로 이 시리즈의 팬들을 얼마나 실망시켰던가. 3편에서 마크는 땅으로 내려왔고, 심지어 여자와 ‘연애’를 한다.) 오우삼은 마크를 통해서 신화적 공간을 창출한다. 단적으로 말해 그 공간은 ‘협(俠)’의 세계이고, 이 ‘협’이라는 세계의 기본원리를 그 자체로 현현해내고 있는 마크-주윤발이야말로 이 세계를 온전히 하나의 세계로서 형성시켜내고 있는 자이다. <영웅본색>을 비롯한 홍콩 느와르의 중요한 특질 중 하나는 이 세계가 ‘아버지’ 없는 세계라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아버지적 존재’는 행위의 동기 혹은 주체로서 기입되어 있지 않다. 이 세계에서 행위의 동기이자 주체가 되는 것은 동년배의 남성들이며 연대란 오로지 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형제를 위해!). 이 세계를 온전히 하나의 세계로서 구성해내는 원리라고 할만한 것은 다름 아닌 형제들 사이의 ‘의리’와 세계에 대한 ‘인의’이며, 형제를 배신하는 행위야말로 이 세계의 악이다. 오우삼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의 영화가 폭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의(仁義)와 형제애에 관한 영화임을 역설하였다. 그것은 단지 그의 영화가 과도하게 폭력적이라는 비난에 대한 변명이 아니다. < 첩혈속집 >에 출연했던 쿠니무라 준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오우삼은 진심으로 자신의 영화 모티브가 인의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소위 인의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삶과 죽음 사이에서도 상대를 지키는, 혹은 상대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인간의 관계성의 극단과 같은 것이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남자들 간의 우정이라고 할까. 그것이 내가 영화를 찍을 때의 기본 모티브다.” 6) 오우삼이 인의를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삶과 죽음 사이에서도 상대를 지키는……남자들 간의 우정’이라고 언급할 때, 그것은 그의 영화 스승인 장철(張徹)이 ‘피의 형제애 blood brothership’라고 불렀던 것을 상기시킨다. 오우삼 스스로 경외를 바쳐 마지않는 영화사의 선배들 이름을 즐겨 거론하지만(이를테면 장철부터 샘 페킨파, 장 피에르 멜빌까지) 적어도 <영웅본색>에 한해서 말하자면 이 영화는 거의 전적으로 장철에 대한 오마쥬로 보인다. 오우삼이 장철의 영화적 인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 다량의 피, 파열하는 신체, 죽음의 순간을 지속시킬 수 있는 영화적 장치로서의 슬로우모션 등을 반복할 때 그것은 단지 스타일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장철 영화의 미학인 ‘비장’을 발현하는 데에 핵심요소들인 이 인장들의 반복이야말로 <영웅본색>을 그토록 비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장철은 홍콩의 주류 장르를 젊은 남성들의 영화로 옮겨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홍콩 내의 산업적, 인구적 변화와 맞물려 등장한 젊은 남성 관객들을 대상으로 한 그의 영화는 젊은 남성이 말 그대로 ‘죽도록’ 싸우는 영화에 심취해 있었으며, 장철의 관심은 시종 이 싸우는 신체가 어떻게 파열되고 부서지는가에 있었다(<영웅본색>의 적룡은 장철이 사랑해마지 않았던 그 부서지는 젊은 신체 중 하나였다). 이 이야기는 단지 그의 영화가 얼마나 익스트림한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스스로의 영화를 즐겨 ‘양강(陽剛)’ 영화라고 칭했던 장철에게 강력한 남성성(陽剛)은 비장미를 자아내는 데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비장미는 세계와의 대결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미학이다. 이 대결은 패배를 예정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장을 쏟아가며 선 채로, 끝까지 버티면서 죽음에 이를 때 비장미가 발현된다. 홍콩 영화 최초로 등장한 이 젊은 남성들의 영시네마가 홍콩의 가장 격렬한 정치적 저항의 시기인 1967년과 1968에 등장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우삼이 장철을 다시금 불러오고 있을 때, 이 영화들은 마찬가지로 불의와 폭력의 세계에 대한 정치적 주체의 정동을 반영한다. <영웅본색>이 홍콩영화 사상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던 그해 홍콩은 다가오는 1997년을 어둡게 만드는 사건으로 들끓고 있었다. 1986년 홍콩 센트럴에서 약 50미터 거리인 다야만에 설립될 중국의 핵발전소 건립계획은 홍콩 내의 격렬한 반대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해 4월에 발생한 체르노빌 사건은 이 반대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학생, 노동자, 시민단체 등이 결집한 ‘다야만 핵발전소 건설보류 연석회의’가 중국정부에 제출한 반대서명에는 참여한 숫자는 당시 홍콩인구의 1/5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오우삼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받는 < 첩혈쌍웅 >은 1989년 천안문 사태와 ‘본토’의 폭력을 목격한 홍콩 시민들의 광범위한 불안을 반영하였다. 1987년부터 90년대 초반까지 홍콩 느와르에 대한 한국의 젊은 남성들의 열광은, 홍콩의 정치적 맥락과 전혀 상관없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하나의 정동을 공유하는데, 그것은 인의와 그 인의를 보장하는 투쟁중인 집단의 형제애라고 할만한 것이었다. 왜, 한국의 젊은 남성들에게 주윤발은 ‘따거(大兄)’가 되었는가? <영웅본색>이라는 저 정념의 활극의 핵심은 형제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감내하는 헌신적인 형제애이다. 주윤발의 몸이 말 그대로 무수한 총알구멍들로 뚫려질 때, 그는 온몸을 부서뜨리며 이를 수행한다. <영웅본색> 2편에서 죽은 마크-주윤발의 총알구멍으로 너덜너덜해진 코트가 등장할 때 그것은 형제를 위한 이 죽음의 순간을 거의 물신의 영역으로까지 끌어올린다. 죽음을 무릅쓰는 이 형제애의 감정경제는 1987의 저 광범위한 연대, 세계의 폭력에 저항하고자 하는 (남성) 동지들의 연대와 그 속에 작동하고 있던 상징적이고 실질적인 젠더적 편향성까지를 모조리 담아낸다. 다시 말해 이 의리란 세계의 부정과 대치하고 있는 (남성) 형제들 간의 의리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영웅본색>의 ‘번역가능성’이었던 셈이다. 말하자면 1987의 <영웅본색>은 한국과 홍콩영화 사이의 독특한 관계 속에서 일종의 외주제작된 정념의 ‘번안물’로서 이곳에 도착하고 있었다. (이 글의 내용 일부는 필자의 「형제애의 로망, 1987의 정동—<영웅본색>과 홍콩-한국 커넥션」을 가필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 1) ”구회영,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 한울, 1991, 205쪽.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홍준이 구회영이라는 필명으로 로드쇼에 연재한 글을 묶어 출간한 이 책은 새롭게 등장한 시네필들의 관람 실천의 안내서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한국에서 홍콩영화가 최초의 ‘컬트적’ 향유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은 이 관점에서 보자면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 관객들이 처음으로 시네필이라는 ‘세계’관객의 시민성을 향유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2) <영웅본색> 이후의 홍콩 갱스터 영화를 일괄했던 이 표현은 일본과 한국의 저널리즘에서 즐겨 유통되었다. ‘필름 느와르’라는 매우 특화된 역사성과 내러티브-이미지를 지닌 영화 장르명을 원용해오고 있는 이 용어에 대해 우다가와 코우요는 <영웅본색>의 일본에서의 공개 당시, 일본 배급회사 선전부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전한다.(野崎歓・宇田川幸洋対談「香港犯罪映画の魅力」, 夏目深雪、石坂健治、野崎歓編, 『アジア映画で<世界>を見る』, 作品社、2013, p.110) 대개의 저널리즘적 표현이 그러하듯 엄밀한 의미를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직관적인 포착이 가능한 이 용어는 거의 같은 시기 한국에서도 즐겨 사용되었다. 한편, 홍콩에서는 <영웅본색> 이후 등장한 일련의 갱스터 영화들에 대해 ‘영웅편(英雄片)’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였다. 3) 홍콩영화 향유의 초기부터 있었던 개인적 기억과 결부된 ‘체험’으로서의 홍콩영화에 대한 매혹적인 서술의 사례들로는 다음을 참조. 오승욱, 「어느 장철교 신자의 신앙고백- 나는 왜 그렇게 장철 영화를 좋아하나?」, 『KINO』 2003.7/ 정성일, 「장철의 무협영화에 바치는 피끓는 십대 소년의 막무가내 고백담」,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바다출판사, 2010. 4) 1971년 쇼브라더스에서 장철의 조감독으로 영화 경력을 시작한 오우삼 자신이 1970년대의 홍콩-한국 커넥션을 직접 경험한 자라는 점은 꽤 의미심장해 보인다. 그의 공식적인 감독 데뷔작 <여자태권군영회 女子跆拳群英會>는 한국 관객들의 홍콩영화에 대한 저 친밀함이 1970년대의 어떤 시각적 경험을 통해서 저변화되어갔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73년 불어닥친 이소룡 영화의 붐 이후 국가적 전략으로까지 제시된 ‘태권도 영화’와 호응하여 만들어진 이 합작영화는 한국에서 올로케 촬영되었다. 김창숙과 남산식물원과 경복궁을 주된 시각적 재료로 삼고 있는 이 영화는 한국에서 1974년 제작사 골든하베스트와 감독 오우삼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동아수출공사가 제작하고 김명용이 감독한 ‘한국영화’ <위험한 영웅>으로 개봉되었으며, 1980년대 후반 오우삼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여자태권군영회>라는 원제목을 달고 한국에서 VHS로(세경) 출시된 바 있다. 5) 『동아일보』 1990.9.20 6) 「国村準インタビュー」, 宇田川幸洋編集, 『キネ旬ムック フィルムマーカーズ⑫ ジョン・ウー』, キネマ旬報社, 2000, p.74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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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세계에는 역사가 없다. 비애극은 죽은 자들을 그 유령의 세계로 보낸다. -발터 벤야민, 『독일 비애극의 원천』 지난 역사 속 특정 시공을, 재현representation의 매체medium라 흔히 일컫는 영화로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공동체에 트라우마를 안긴 사건의 경우는 더하다. 필자의 얕은 안목으로는, 지난 삼십 년간 광주항쟁을 다룬 어떤 영화도, 적벽가 한 대목을 꿇어앉은 배우들이 주야장천 부를 뿐인 연극 <이야기의 방식, 노래의 방식 - 데모 버전>(2014, 극단 그린피그 / 연출 윤한솔)만큼 마음을 끈 작품은 없었다. 최근 전두환 회고록이 출간되고, 5.18 당시 헬기 기총소사 증언 등이 나오는 와중에 본 한국 영화 < 택시 운전사 >는 이러한 편견을 더욱 굳혔을 뿐이다. 한편, 작년과 올해 본 라브 디아즈와 존 토레스의 신작 덕에 3백 년이 넘는 스페인 식민 지배와 미국 강점에 이은 마르코스의 장기 독재를 ‘피플 파워’로 끝냈던 필리핀 역사와 이를 담은 영화들을 한국의 경우와 비교해 보게 된다. 1989년 하와이에서 죽은 마르코스의 시신이 2016년 11월 고향 마을에서 국립 ‘영웅묘지’로 이장되었고, 1983년 암살당한 베니그노와 코라손 아키노의 아들 베니그노 3세를 뒤이어 대통령이 된 두테르테의 통치 방식을 전해 들으며 소스라치곤 한다. 필리핀에서 장편극영화가 처음 제작된 해는 1912년으로 필리핀을 지배하던 미국인들이 만든 작품 두 편이 하루 차이로 공개되었다 한다. 둘 다 호세 리살의 전기 영화였는데, 앨버트 이어슬리(Albert Yearsley)의 <호세 리살 박사의 처형 El Fusilarmiento de Dr. Jose Rizal>과 해리 브라운(Herry Brown)의 <호세 리살의 생애 La Vida de Jose Rizal>였다. 작가이자 의사였던 호세 리살은 필리핀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반제국주의 혁명가이다. 리살은 소설 『나를 만지지 마라 Noli Me Tangere』(1887)를 써서, 7천 개가 넘는 섬에 흩어져 살며 여러 언어를 쓰는 필리핀 사람들에게 1521년 이래 이어진 스페인 식민지배에 맞설 저항정신과 ‘국민국가’를 향한 열망을 일깨우려 했다. (『엉클 톰스 캐빈』(스토우), 『사냥꾼의 수기』(투르게네프) 등과 더불어 “제국의 시대”를 “혁명의 시대”로 이행시킨 19세기 소설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나를 만지지 마라』는 2015년에야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호세 리살의 문학 작품들은 필리핀 영화에도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를테면, 라야 마틴은 『나를 만지지 마라』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 부에나스 노체스 에스파냐 >(2011)를 시작한다. 또, 라야 마틴의 첫 장편 < 필리핀 인디오에 관한 짧은 필름 >(2006)에서 면벽하고 신부에게 벌을 받을 준비를 하는 성당 종치기 소년은 바로 『나를 만지지 마라』의 주요 인물 바실리오다. 바실리오는 라브 디아즈의 <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 >에도 이사가니의 동료로 등장한다. 한편 라브 디아즈의 전작 중 < 엔칸토에서의 죽음 >(2007)의 시인에게도, 1892년부터 1896년 사이 민다나오 다피탄에 유배되어 있던 호세 리살의 체취가 배어 있다. 『나를 만지지 마라』의 주인공 크리소스토모 이베라는 호세 리살 자신을 투영한 인물로 보인다. 리살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 크리소스토모 이베라처럼 개혁을 꿈꿨지만 제안한 개혁안이 반란으로 간주되어, 필리핀 혁명을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1896년 처형당한다. 『나를 만지지 마라』 대단원에서 주인공 후안 크리소스토모 이베라 막살리는 스페인 식민당국 순찰정을 피해 도망치고, 마치 몬테 크리스토 백작처럼 『엘 필리부스테리스모』의 보석상 시모운이 되어 돌아온다. 『나를 만지지 마라』의 속편 격인 『엘 필리부스테리스모 El Filibusterismo(‘폭로자’라는 뜻)』(1892)에 호세 리살은 ‘필리핀 소설 novela filipina’이라는 부제를 붙인 바 있다. 현재 필리핀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 라브 디아즈는 바로 『엘 필리부스테리스모』의 일부를 <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 >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한다.(<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는 2016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영화 예술의 새로운 차원을 연 작품에 수여한다”는 알프레드 바우어상도 받았다.) 호세 리살과 그의 소설을 연구해 『상상의 공동체』, 『비교의 유령: 민족주의, 동남아시아, 세계』 등을 쓴 베네딕트 앤더슨이 『엘 필리부스테리스모』와 제국주의에 맞선 쿠바 혁명, 아나키즘 투쟁의 삼각지대를 분석한 『세 깃발 아래에서: 아나키즘과 반식민주의적 상상력』(서지원 역, 2009, 도서출판 길)에 따르면, 『나를 만지지 마라』를 통해 리살은 “필리핀 ‘사회’의 전체상(이자 동시대상)을 상상 속에서 창조해냈다. 한편, 리살이 “『엘 필리부스테리스모』에서 한 일은 이 사회의 정치적 파멸 및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의 제거나 다름없는 것을 상상해 낸 것”이었다. 그리하여 앤더슨은 『엘 필리부스테리스모 』를 ‘세계 소설 novela mundial’이라 칭한다. 『엘 필리부스테리스모』의 결말 즈음에는 ‘미스터리(El misterio)’라는 짧은 장이 있는데, 베네딕트 앤더슨에 따르면 원본 원고 7쪽 중 3쪽을 호세 리살이 검게 지워버렸다. 라브 디아즈가 붙인 영화 제목의 기원을 유추하게 하는 일화다. 남아있는 소설의 ‘미스터리’ 장은, 영화 <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 > 초반처럼 오렌다 가 습격 직후의 혼란을 묘사한다. 사랑하는 파올리타의 목숨을 구하려 램프를 탈취해 강에 뛰어든 학생 이사가니는 보석상 시모운의 무장 피습 계획을 뜻하지 않게 좌초시키고, 『나를 만지지 마라』의 시모운처럼 사라진다. 한편, 영화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에서는, 소설에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도피한 시모운이 호세 리살의 유고시 「나의 마지막 이별」을 길에서 읊는 가난한 모녀에게 은전을 베푸는 시퀀스가 이어진다. 호세 리살이 창조한 인물이 리살을 추모하는 “보르헤스적“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역사와 픽션이 함께 머무르고 흐르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서사는 8시간이 넘는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가 가장 야심차게 시도하는 바일 터다. . (전략) 내 영원히 사랑하고 그리운 나라 필리핀이여 나의 마지막 작별의 말을 들어다오 그대들 모두 두고 나 이제 형장으로 가노라 내 부모, 사랑하던 이들이여 저기 노예도 수탈도 억압도 사형과 처형도 없는 곳 누구도 나의 믿음과 사랑을 사멸할 수 없는 곳 하늘나라로 나는 가노라 (후략) 소설 『엘 필리부스테리스모』의 마지막 페이지들은 죽어가는 시모운과 그를 돌보는 필리핀인 신부 플로렌티노의 긴 대화로 채워졌다. 라브 디아즈의 영화는 이 부분이 리살의 소설과 이 부분이 꽤 다르다. 필리핀의 스타 배우 존 로이드 크루스와 피올로 파스쿠알이 이사가니와 시모운으로 분한 <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 >에서, 부상을 입고 이사가니의 도움으로 플로렌티노의 거처에 도달해 임종을 맞는 시모운이 남기는 말은 많지 않다. 그가 죽자 플로렌티노와 이사가니는 시모운의 시신과 더불어 “터전을 태워” 없애고 혁명을 위한 배수의 진을 친다. 한편, 이미 『나를 만지지 마라』에서 사랑은 물론 터전도 모두 버린 소설 속 시모운은 죽음을 기다리며, 신부에게 “이반 카라마조프가 던졌을 법한” 질문을 건넨다. 신이 자신을 용서하겠냐는 시모운의 물음에, 플로렌티노는 신은 시모운의 모든 고통을 이해하며 용서할 테지만 그가 가치 있는 목적을 위해 사악한 방식들을 택한 것은 용인할 수 없다 한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엘 필리부스테리스모』를 『나를 만지지 마라』와 비교하여, 영웅이 없고, 플롯은 실패와 좌절, 죽음에 대한 이야기라 더 어둡고, 문체도 한층 냉소적인데다 당시 필리핀 식민 사회와 다른 점이 많아 필리핀에서도 인기가 덜하다고 썼다. 앤더슨에 따르면, 리살은 “필리핀 소설”인 『엘 필리부스테리스모』에서 주로 스페인에서 경험했던 사건과 감정들을 필리핀으로 옮겨, 필리핀에 “임박한 미래의 그림자”로 명멸하는 스페인 제국 내 혁명의 불꽃(스페인의 또다른 식민지 쿠바에는 이미 도래했던)을 현시presentation하려 했다. 임박한 미래에의 예감은 소설 출간 당시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웨일레르 총독 시대에 뿌리내린 현실 인식으로 더욱 단단해진 것이었다. 다시 앤더슨의 분석에 기대자면, 소설 속 시모운은 전작 『나를 만지지 마라』에 근원을 둔 인물이며, “스페인으로부터가 아니라 상상된 쿠바로부터, 그리고 지구를 도는 방랑으로부터 소설에 입장”한다. 리살에게 시모운은 한때 공상되던 “인터내셔널이라는 감추어진 마키아벨리적 네트워크”의 거울상이었으며, 장차 필리핀에 출몰하게 될 (혁명이라는) ‘세계적 유령’의 일종이었다. 마치 그의 민족처럼, 아직 현실에는 없지만, 이미 상상되었으므로, 곧 도래할. 한데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의 시모운은 무력함과 타락을 오가며 공포와 연민만을 불러일으키는 인물로, (『독일 비애극의 원천』(최성만/김유동 공역, 2009, 도서출판 길)에서 벤야민이 쓴 표현을 따르자면) “순교하는 폭군”처럼 군림하며 “도취된 상태에서 권력을 펼” 뿐이다. “현란한 빛을 받는 별도의 장면”에 등장하는 웨일레르 총독 등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아나키즘이 경합했던 19세기의 정복자이기 보다는 벤야민의 분석을 따르는 전형적인 바로크 드라마의 적대자들 같다. “그들을 움직이는 동기들은 대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바로크적 음모는 마치 열린 무대 위에서 무대장식이 바뀌듯 이루어진다. 음모 속에서 환상이 의도되지 않음에 따라 이러한 대립 플롯의 조직도 강하게 두드러진다.” “동작은 기민하나 표정은 무력한” 프로타고니스트 이사가니도, 비애극 속 전형적 인물들처럼 역사의 격랑 속에 “동요하는 육체적 충동”만으로 빛과 어둠을 오가는 신화적 형상으로 보인다. 이에 더해 독일 비애극에 등장하는 ‘라이엔 Reyen(독일 바로크 비애극의 각 막 끝에 있는 코러스를 가리키는데, 대개 극 중 사건을 일반화하여 해석하고 가치평가를 내린다.)과 흡사한 필리핀 악령 틱발랑 셋이 등장하여, 실존인물 웨일레르 총독 일행과 어울려 황음무도하는 시모운을 지켜보는 한편, <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 >의 또다른 주요인물(이자 소설『엘 필리부스테리스모』에는 등장할 수 없었던 진정한 ‘미래의 이브’)그레고리아 데 헤수스(라브 디아즈 전작들의 스태프와 배우로 계속 작업해온 헤이즐 오렌시오가 분했다.)가 남편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의 시신을 찾아 헤매며 떠도는 길을 동반한다. 호세 리살에게 소설은 미래를 예지하는 것이었는데, 라브 디아즈가 그의 소설을 실제 역사적 과거를 픽션과 교차시키며 영화에는 다른 분기점이 발생한다. 각기 남성, 여성, 양성구유인 세 탁발랑은 닥쳐올 비극도 목도할 것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다. 『엘 필리부스테리스모』가 출간된 지 5년 뒤,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살해당했다. 호세 리살이 죽은 지 5개월 남짓 지난 뒤였다. 보니파시오는 독학으로 역사 등을 공부한 뒤 1892년 혁명운동 조직 ‘카티푸난’을 창시하여 반스페인 무장항쟁에 나섰다. 리살의 동의를 얻지 못했음에도, 카티푸난을 창설하며 보니파시오는 리살을 명예 의장으로 추대했다. 1895년 3월 카티푸난 하급자로 입회한 뒤 재빨리 자신의 파벌을 키웠으나 테헤로스 선거에서 보니파시오에게 진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를 그의 형 프로코피오와 함께 붙잡아 1897년 5월 10일 반혁명 혐의로 처형했다. 스페인을 이어 필리핀을 침략한 미국과의 전쟁 중 1901년 3월, 아기날도가 붙잡히자마자 “재빨리 워싱턴에 충성을 맹세하자 혁명은 끝났다”. 그리고 아기날도는 ‘공식적인’ 필리핀 초대 대통령이 된다. ‘혁명 영웅’ 보니파시오도 호세 리살처럼, 필리핀 영화의 단골 주인공이다. <영생 Ang Magpakailanman>(1983)의 감독 레이몬드 레드는 학살자의 내래이션으로 보니파시오 형제의 삶을 증언하는 <영웅들 Bayani>(1992)을 연출했다. 라야 마틴의 < 오토히스토리아 >(2008)와 <연인들>(2008)이, 증인도 없고 시신을 영영 찾지 못해 재현할 도리도 없고 잊힐 수도 없는 보니파시오 형제의 죽음과 카티푸난 진압이라는 기억을 현시하려는 시도임도 익히 알려진 바다. 미국인들이 필리핀에서 영화를 처음 만들기 전에, 필리핀에서 영화라는 매체를 먼저 소개한 것은 기실 1521년 필리핀을 점령한 뒤 300년 넘어 식민지로 삼았던 스페인인들이었다. 『아시아 영화의 이해』(주윤탁,김지석 편, 제3문학사, 1993)에 따르면, 1897년 1월 1일 포토그라피아 페르티에라Fotographia Pertierra 극장에서 45초 미만의 수입 단편영화 6편이 최초로 상영되었다. 뤼미에르 형제의 작품들이 여기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큰데, 라브 디아즈와 영화 속 틱발랑들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최초의 영화를 관람하던 스페인 식민관료들과 고위 인사들은 화면 밖으로 튀어나오는 (‘기차’가 아니라) 틱발랑을 보고 혼비백산한다. 이 날은 호세 리살이 처형된 1896년 12월 30일로부터 불과 이틀 뒤였다. <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 >의 이 장면은 리살의 죽음이 드리운 어둠의 자장 속에서 관객들이 보았을 초기 영화를 재구성한 것이었으리라. <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 >에는 학살(과 전후)을 재현한 신도 여럿 있다. 바로크 비극의 ‘엠블렘’과도 같은 전장의 시체들이 영화 속 곳곳에 즐비하다. (필리핀 역사의 큰 ‘트라우마’인)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노상에서 죽임당하는 장면조차 직접 보여진다. 스페인 군대가 실랑에서 필리핀인들을 죽이기 직전에는, 불을 피워놓고 망을 보던 농민군 중 한 사람이 기타를 잡고 노래를 부른다. 노래를 부르는 반란군으로 분한 이는 필리핀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현업 뮤지션 엘리 부엔디아(Ely Buendia)이고, 그가 부르는 ‘민족의 아들 Anak ng Bayan’은 라브 디아즈가 존 지안비토의 <비행운(클라크) Vapor Trail(Clark)>(2010) 대단원에서 직접 불렀던 저항가다. 한데, 형언하기 힘든 비극을 앞둔 이 시점, 이 장면, 이 노래는 한없이 애처로우면서도 연극적으로 “과장된 한탄조”가 담겨있다. 또, 혁명군들이 주둔하고 있는 이 밤의 숲은 확연히 인위적인 세트처럼 보인다. 발터 벤야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전쟁과 전쟁으로 인한 고난에 대해 쓴 모든 저술에는 거의 애처롭게 들리기까지 하는 과장된 한탄조가 고정적으로 담겨 있다. 말하자면 절망에 찬 표현방식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일이 보편적이었던 것이다. 비참함은 그것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 정도의 변화가 있는 반면, 비참함을 기술하는 데에서 당대의 저술들은 뉘앙스의 차이를 거의 알지 못했다. ”는 에르만스되르퍼의 말을 인용하며, 바로크 시대 ‘비애극’을 연극무대가 역사무대에 동화된 것에 대한 극단적인 결과라 일컫는다. ‘독일 비애극’은 17세기 ‘30년 전쟁’ 전후에 “잔인한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잔인한 사람들을 위해 씌어진 작품들”이다. 벤야민은, “전쟁과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의 분위기 속에서 살던 그 시대 사람들은 이러한 장면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있었고, 그들에게 제공된 그들 자신의 풍속도였”기에 비애극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필요했다고 분석한다. “그들은 그들에게 제공된 쾌락을 소박하고 노골적으로 맛보았다.” 한편으로 그들은 강변한다. “당신께선 저희들이 이 역사를 쓰라린 마음으로 기술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따라서 저희는 일련의 사건을 엮어냈다기 보다는 그것이 지닌 비참함을 비극이란 방식으로 엮어낸 것입니다.” 어쩌면, 예컨데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피살은 ‘미망인’ 그레고리아 데 헤수스 뿐 아니라 “민족 해방”을 꿈꾸었던 20세기의 ‘제3세계’인들이 모두 증인이 되고 싶었던 사건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 트라우마를 직시하여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터이다. 라브 디아즈도 480분에 걸쳐, 호세 리살과 보니파시오의 삶과 죽음이 여전히 피워올리고 있는 불꽃, 그리고 사건과 문학이 지닌 마법의 힘을 빌어 이 비극을 정면으로 바라보려 한다. 그 ‘미스터리’의 기술이 이토록 슬프고 쓰라림은 그러므로 잘 알겠다. 그러나, 벤야민은 “보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격렬한 사건들 속에는 바로 연극적인 요소가 강하게 표현되고, 이론까지도 연극장면적 효과를 종종 강조한다”고 일갈했다. 안드레스를 찾아 그레고리아 데 헤수스 일행이 헤매는 산과 강 등은, 최근까지도 국가에 대항하는 본거지가 되었던 동남아시아 ‘조미아’ 산악지대가 표상하는, 지배자의 역사와 대립하며 저항한 실재하는 자연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풍경을 탐닉하며 “역사적인 것을 세속화하는 바로크의 세계 도피”를 낳는 세트 역할에 충실하다. 이 세트 속에서, 보니파시오 사후에 보니파시오의 측근이었던 훌리오 낙필과 재혼하고 투쟁을 지속했던 실제 그레고리아 데 헤수스의 삶과는 꽤 달리, 오시리스를 찾는 이시스와 같은 여신의 형상이 되어 “민족(국가)의 혼”을 찾는다고 독백하는 그레고리아 데 헤수스가 맺는 영화의 결말은 자못 퇴행적이다. “역사가 무대로 세속화”되니 이 시간들의 움직임은 필리핀의 밀림 속에 갇혀 버리고 만다. 라브 디아즈는 이미 < 멜랑콜리아 >(2008년에 나온 이 작품의 주인공 알베르타는 그레고리아 데 헤수스처럼 남편의 시신을 계속 찾아다닌다)라는 작품을 상재하기도 했는데, <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 >에서 본격적으로 바로크 시대 독일 비애극 작가가 되기를 자청한다.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에서 퇴행적으로까지 만개한 멜랑콜리는, 독일 비애극에 편재하는 주된 정동이기도 하다. 벤야민에 따르면, 비애의 이론은 멜랑콜리적인 인간의 시선 아래 드러나는 세계의 묘사 속에서만 펼쳐진다. 슬픔은 자신의 의도를 특별하게 상승시키고 지속적으로 침잠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침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것 앞에서 연대기적 세계사의 거대한 상황들은 일종의 유희로서, 즉 신뢰할 만하게 해독될 수 있는 의미를 위해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기는 하지만, 그 끊임없는 반복으로 멜랑콜리적 삶의 혐오가 절망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촉진하는 일종의 유희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독일 비애극의 멜랑콜리를 분석하며, 발터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집요하게 침잠하는 멜랑콜리는 죽은 사물을 구제하기 위해 그것을 자신의 명상 속으로 받아들인다. 나머지는 침묵이다.(햄릿이 남긴 말) 왜냐하면 살아본 적이 없는 모든 것은 구원받지 못한 채 지혜의 말이 오직 기만적으로 유령처럼 떠도는 공간 속에서 쇠퇴해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령의 세계로의 쇠퇴는 영원한 잠을 낳을 뿐이고, 저항을 깨끗이 소거한 ‘자장가’만 들려줄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며, <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 > 속 사건은 역사와 멀어지며, 시공은 비애극 속 공허한 신전이나 궁정을 닮아간다. (연극 세트와 닮은 건물을 그린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 포스터는 뚜렷한 자기 고백으로 보였다.) 흑백 이미지를 선호하는 라브 디아즈가 근작에서 저화질 디지털 카메라 대신 HD 포맷을 채용하며, 비애극의 폐허와 흡사한 무대 효과를 자아내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콘트라스트는 더욱 두드러지는 듯하다. 전작 대부분과 달리,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가 구사하는 4:3 화면비가 인물들의 행위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고, 스크린을 하나의 무대처럼 만든다는 분석도 있다.(김소희, 「기울어진 세계: 라브 디아즈의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와 < 떠나간 여인 >」, 2017, 《오큘로》 4호) 두테르테 집권 후 국가폭력이 노골적으로 발현되고 있는 참이니, 민족과 국가의 ‘혼’을 찾고 싶어하는 바람이 이해되지 않는 바도 아니다. 그러나 파국의 이념을 밝히는 대신, 예술이 "자연주의적 재현"을 택한다면 퇴행과 복고에 기여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트라우마를 안긴 역사를 비애극 속 무대로 삼는 재현보다는, 이를테면 1987년 ‘피플파워’라는 사건과 베트남전이라는 기억을 함께 거하게 하며 현전하는 영화 이미지와 사운드 자체를 역사의 질료로 여기고 발굴을 시도하는 존 토레즈의 신작 < 피플 파워 폭탄 선언: 베트남 장미의 일기 >(2016) 같은 시도가, 호세 리살이 지운 검은 페이지를 해독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지 않을까. 다른 기회가 있다면, <피플 파워 폭탄 선언: 베트남 장미의 일기>에 대해서 따로 쓰고 싶다.
재작년인가, 어느 뜨거운 여름날에 이사 준비를 하던 친구가 있었다. 미대를 졸업하고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먹고 자고 하던 친구였는데, 어떤 이유 때문에 미술 작업을 그만두고 본가로 들어간다고 했다. 엄마 캥거루가 어쩌고, 주머니에 들어가 웅크리고 있다가 저쩌고, 하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말했는데 나는 그 수수께끼 같은 표현이 무슨 말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지만 다 알아듣고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의 작업을 늘 좋아했기 때문에 지금 너의 결정이 슬프고,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 상황이 무척 속상하다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기 때문에 그 마음에만 집중했던 것이다. 이삿짐 차에 주로 실릴 물건들은 그동안 작업한 캔버스 그림들과 자질구레한 미술용품들뿐이었다. 그런데 딱 하나, 이걸 그냥 버릴지, 아니면 팔아서 짜장면이라도 사 먹을지 고민했던 물건이 하나 있었다고 했다. 그건 자취방에 흔히 볼 수 있는 50리터짜리 소형 냉장고였는데, 내가 알기론, 그 냉장고에겐 이름이 있었다. ‘폴 앤 니나 (Paul & Nina)’라고... 그러니까 그 친구의 애칭이 ‘폴’인데, (당시) 그의 여자 친구의 애칭은 ‘니나’였고, 그 두 사람이 작업실 겸 자취방으로 함께 쓸 원룸을 계약하던 날, 그 냉장고도 구입하여, ‘폴 앤 니나’라는 이름을 붙여서.. (한...숨) 암튼, 뻔하기 짝이 없지만 닭살 돋게 소중한 히스토리의 물건이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재활용품센터나 중고물품 가게에 들고 가서 짜장면값이라도 받고 팔려고 했는데 막상 천 원짜리 몇 장 받아서 오자니 발길이 안 떨어지더라는 것이다. 하긴, ‘폴 앤 니나’라는 이름까지 붙어있는 냉장고니까... 그래서 그냥 들고 나왔는데 막상 뜨거운 한여름 낮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자니 그만 짜증이 확, 치솟아서 당시 걷고 있던 다리 밑 하천으로 냉장고를 ‘풍덩!’ 떨어뜨렸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 그 광경이 지나가던 경찰의 시야에 고스란히 잡혔고 친구는 하천 아래로 가라앉지 않고 수면 위에 둥둥 떠 있던 냉장고를 ‘직접’ 건져서 파출소로 끌려갔다. 지금부터 나는 이 친구가 그 후 파출소 테이블에 앉아서 경찰들의 눈총을 받으며 써내려간 반성문을 ‘약간만’ 옮겨보려고 한다, 파출소에서 나올 때 담당 경찰에게 복사를 부탁해 갖고 왔다고 했다. 힘들 때 가끔씩 읽어보고 싶었다나? (예술가들이란~~) 그가 나에게 보여준 이 글을 읽으면서 난 이 반성문을 트리트먼트 삼아 단편영화를 하나 만들어보라고 친구의 예술가적 허세를 부추겼다. “반성문. 안녕하세요. 저는 아침만 해도 이사를 가려고 준비 중이었습니다. 아직까지 쓸 만한 냉장고를 버려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재활용센터 사장님으로부터 그냥 버리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듣고서부턴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어서 좀 더 시원하게 버릴 수 있을 때까지 무작정 가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하천 아래로 가라앉지 못하고 반쯤 둥둥 떠 있는 냉장고를 보면서 그제야 제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근래 집주인 아주머니께서도 그런 제가 못 미더워 몇 달째 했던 말을 반복하고 계시는데, 밀린 월세를 내라고 하며, 환경을 바꿔보는 게 좋을 거라고도 하고, 제가 너무 게으르다고도 했습니다. 냉장고만 잘 처리하고 나면 이사를 갈 것입니다. 50리터 냉장고... 완벽한 냉동실도, 완벽한 냉장실도 아닌 이 애매함은 그저 예전 여자친구가 남겨놓고 간 것입니다. 또 남은 것들 중에는, 제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선물했던 비싼 색연필과, 한 여자가 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 한 점이 있는데... 그녀는 늘 사는 게 헤엄치는 것이라 했습니다. 저희는 이 동네 미대를 나왔습니다. 남들이 인정할만한 직업은 없고, 종종 벽화로 돈을 벌었습니다.... (하략)” 자, 여기까지가, 중고 냉장고를 무단투기하는 현장이 경찰에 적발되었지만 다행히 전후사정이 참작되어 반성문을 쓰는 것으로 훈방 조처된 ‘내 친구’의 이야기로 ‘포장’한 단편영화 <중고, 폴>의 소개 글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영화는 이 반성문을 보고 들으면서, 주인공 남자에게 어떤 일이 생겼던 것인지, 어떤 이유로 냉장고를 버리려고 했으나 결국 버리지 못하고 이사를 가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실제로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자취방과 작업실을 공유하며 미술 작업을 하는 젊은 작가 커플이 이 영화의 제작과 연출을 맡았는데, ‘애지중지 키우던 고추 모종을 몰래 훔쳐간 범인을 찾아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여자’가 주인공인 이야기 <고추가 사라졌다!>가 이들의 첫 영화였다는 걸 떠올려 보면, 이들은 진짜로 자신들에게 벌어졌거나/벌어졌던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거의 아름다울 정도로 단편스러운 러닝타임에 맞춰서 생각해내는 단단한 아티스트들이다. 그리고 나는 이 두 영화가, 비록 영화적인 센스는 위의 소개 글이 주는 기대치만큼 재치가 넘치거나 세련되지는 않지만, 무엇보다 이것이 실제로 그들에게 벌어졌던 진실한(authentic) 에피소드처럼 ‘보인다’는 것에 나는 즉각적인 호감을 느낀다. “진짜로 있었던 일 맞지?” 친분을 이용해 고집스레 물어봐도 이들은 제대로 말해주지 않는다. ‘지난밤의 숙취로 어질어질하면서도 도둑맞은 고추 모종을 찾으러 다닌다는 이야기’는 실제로 이 여성감독의 귀여운 경험이고, ‘벽화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하고 성실한 미술작가들’은 이들 커플에 대한 실제적인 묘사이지만, 높은 건물에서 벽화 작업을 하다가 크레인이 추락해 사망한, 가난한 미대생의 안타까운 죽음은 어쩌면 순수한 픽션이라서 할 말이 없었거나, 그 세계 속에 살아보았던 사람들끼리만이 짐작하고 숨길 수 있는 비밀이자 상처라서 꼭꼭 숨겨야 했기에 차마 말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영화에서 내가 좀 더 보고 싶었지만 나오지 않았던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런 가난하고 어두우며 무서운 세계에 대한 이들만의 코멘트였을 것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도 연출자를 붙잡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이러더라. 못한 말이 있으면 다음 작업에서 하겠다고. 그래서 나는 이들 커플이 내놓을 세 번째 영화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는데, 요즘 이들은 장편 그래픽 노블 작업에 열심이라고 한다. 암튼, 최근 애니메이션 작업이 추가되어 완성된 < 중고, 폴 >이 첫 번째 영화 보다는 좀 더 많은 상영기회를 얻게 되어 이들 커플에게 기분 좋은 차기 작업의 동기가 되었으면 바라는 마음에서 추천사를 참 길게도 써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