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 면회
- 감독
- 김태곤
- 제작년도
- 2012
- 출연
- 심희섭, 김창환, 안재홍, 김꽃비, 황미영, 최형선, 김아람, 진태철
2017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좋아하는 일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순간은 위험하다. 순진하다고 여겨지는 그 말을 내뱉는 순간, 경제적인 위협은 물론이고 사회적인 비난까지도 분연히 개인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전고운 감독의 장편 데뷔작 < 소공녀 >는 그 위험한 ‘지금 여기 개인’의 편을 드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감독이 주인공 미소를 바라보는 시선은 ‘우정’에 가깝다. 묵묵히 스스로의 길을 걷는 친구의 등을 토닥거리듯이 연출자는 스스로가 만든 캐릭터의 옆과 뒤를 든든히 떠받치고 간다.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아동 소설 <소공녀>는 부유했던 한 소녀의 극적인 삶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주인공 사라는 부유한 집안의 ‘소공녀’에서 아버지의 죽음으로 갑작스레 하녀로 전락하지만 결말에는 다시 부자로 돌아간다. 그러나 전고운 의 영화 < 소공녀 >의 주인공 미소는 부자였던 적이 없다. 일당 사만 오천 원에 가사도우미 일을 하는 미소의 유일한 행복은 하루의 일을 마무리한 후 마시는 위스키 한 잔과 손가락에 반지처럼 끼워진 담배뿐이다. 난방이 전혀 되지 않는 작은 방에서의 연애는 시리도록 슬프고 갑자기 오른 담배 값은 미소의 삶에 절체절명의 위기가 된다.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 집을 포기한 그녀는 오래 전 친구들의 집을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집을 짐처럼 메고 떠돌이로 살지만 그녀는 여전히 일을 하고 위스키를 마시고 담배를 태운다. 영화 < 소공녀 >의 영어 제목은 <Microhabitat>다. ‘미생물, 곤충 등의 서식에 적합한 곳’이라는 뜻이다. 눈앞의 현실을 긍정적인 환상으로 극복한 소설 <소공녀>의 사라와는 달리 영화 <소공녀>의 미소는 거대한 사회 속 개인으로서 하루를 버티어 기어코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다. 성인 동화의 외피를 입고 있는 <소공녀>가 놀라운 유머감각, 따뜻하게 인물을 감싸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저릿한 추위처럼 보는 이를 놀래게 하는 건 지금 이 사회의 개인들의 존재를 명징하게 비추고 있어서다. 무언가를 포기해야 무언가를 가질 수 있다는 첨언들과 왜 궤도에 오르지 않고 비틀거리냐며 부유하는 충고들은 각자의 삶을 택해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무례한 화살이 된다. 기원을 알 수 없는 이 사회적 합의에서 조금이라도 비켜선 이들이 마치 과녁처럼 누군가의 대상이 되는 사회, <소공녀>의 인물들은 그 과녁에 함께 서서 서로를 보듬는다. 집을 찾아 떠도는 사람, 미래를 위해 떠나는 사람, 과거를 품고 잠드는 사람, 빚더미에 앉아 눈물 흘리는 사람 등 주변 어디에나 있는 소시민들의 퍼즐을 맞춰 나가듯 영화 <소공녀>는 세심하게 삶의 조각들을 모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전사를 나열하지 않으면서도 캐릭터의 지난 순간들을 쌓아 올리는 스토리텔링의 마법을 보여준다. < 1999, 면회 > < 족구왕 > < 범죄의 여왕 >을 제작한 광화문시네마의 신작 < 소공녀 >는 무구한 가치와 무해한 꿈의 힘을 믿는 제작사의 인장이 또렷한 영화다. 또한 < 마담 뺑덕 > < 하이힐 > 등의 작품을 통해 개성과 연기력을 선보였던 배우 이솜 의 근사한 대표작인 동시에 안재홍 , 최덕문 , 김재화 , 강진아 , 이성욱 , 김국희 등 모든 배우들의 이름을 찾게 되는 훌륭한 앙상블의 영화이기도 하다. 마치 술 좋아하고 사람 잘 챙기던 친구가 우편으로 보내온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 영화인 < 소공녀 >는 시리도록 추운 겨울이 올 때마다 생각날 영화다. 담배 한 개비에, 술 한 잔에, 반가운 이의 안부에 눈 녹듯 얼었던 마음이 녹는 것처럼 앞으로의 겨울마다 이 영화의 순간들이 그런 위로가 되어줄 것 같다.
대학생 상원( 심희섭 )과 재수생 승준( 안재홍 )은 집안 사정 때문에 일찍 군대에 간 친구 민욱( 김창환 )을 면회하러 철원으로 향한다. 승준은 민욱의 여자 친구에게서 헤어지자는 통보를 담은 이별 편지를 받았고, 상원과 승준은 편지를 민욱에게 전해줘야 할지 아니면 다음 기회로 미뤄야 할지 갈등한다. 편지는 초반에 갈등을 제공하고 마지막에 작은 반전을 만들기는 한다. 하지만 영화 전체를 봤을 때 큰 역할을 할 것처럼 보이지만 기대만큼의 무게를 가지진 않는다. 영화는 남성 관객을 대상으로 한 군대 유머, 90년대 복고 정서 등을 풀어놓으며 유쾌한 코미디 영화의 분위기를 풍긴다. 복고 정서의 경우 관객의 시선을 끄는 주요한 요소기도 하다. 하지만 실제로 영화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정서는 상실이다. 창원의 눈 쌓인 추운 길을 맴도는 세 젊은이를 비추는 영화는 쓸쓸함으로 가득하다. IMF라는 단어는 초반에 한 번만 등장하지만 이후 인물들의 주변을 무겁게 맴돈다. 뭔가 잘되지 않을 것 같은 무거운 정서는 주인공들이 원하는 하룻밤의 사소한 일탈을 계속해서 방해한다. 영화에는 쓸쓸함을 이겨내는 에너지 넘치는 장면이 두 번 있다. 첫 번째는 세 남자 주인공이 눈싸움을 할 때다. 만약 사회에 있었다면 혹은 같이 고등학교에 다녔을 때 아마 그랬을 것처럼 추위도 잊어가며 열심히 눈을 던지고 논다. 두 번째는 다방 종업원인 미연( 김꽃비) 이 등장해서 세 남자 사이에 긴장감을 불어넣을 때다. 그리고 미연과 상원의 만남 또한 상원에게 잊히지 않을 상실로 이어진다. 미연은 손가락이 하나 없다. 세 명의 주인공도 영화가 끝날 무렵이면 상처를 입거나, 물건을 잃어버리고, 물건을 빼앗긴다. 직접 등장하지 않으며 편지 속의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민욱의 여자 친구 에스더 역시 마찬가지다. 전형적인 코미디 영화라면 이런 실패는 주인공들의 욕망을 좌절시켜서 상황을 더 코믹하게 만드는, 웃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1999 면회>에서는 이 실패가 IMF라는 실체로 존재한다. 젊은이들의 희극이 비극으로 바뀌는 결말은 당시에 20대를 맞은 젊은이들이 이후 겪게 될 88만원 세대로서의 힘든 삶을 암시하는 듯하다. 배우의 앙상블이 중요한 영화인데 주연 조연 모두 뛰어난 연기로 영화를 잘 살렸다. 코믹한 군인과 상처 입은 젊은이를 오가는 김창환 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김꽃비는 독립영화에 자주 출연한 친숙한 얼굴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이전에 보여준 적 없던 색다른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 < 변호인 >으로 익숙한 얼굴인 심희섭 이나, 이후 같은 광화문 시네마의 작품 < 족구왕 >에서 복학생 역으로 놀라운 연기를 선보인 안재홍 의 연기력을 이 영화에서 미리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