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7
- 감독
- 세스 라니
- 제작년도
- 2020
- 출연
- 코디 스밋-맥피, 라이언 콴튼, 다미안 월셔-하울링, 리안나 월스먼, 에런 글레낸, 데보라 메일맨
순전히 당나귀 때문이다. 내가 다른 선택지들을 제치고 < 이니셰린의 밴시 >(마틴 맥도나, 2022)를 보게 된 이유 말이다. 물론 당나귀 때문이라면 < EO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2022)를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EO>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만 동물을 재현해온 관행을 넘어서 당나귀가 인간의 자리에 놓인 실사 영화라는 점에서 궁극의 동물 영화였다. <이니셰린의 밴시>와 비교해도 <EO> 쪽이 옳고 급진적인 태도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당나귀 영화에서 보고 싶었던 건 액션 배우나 로드무비 주인공이 당나귀로 대체된 모습은 아니었다. 고된 여정에 오른 캐릭터를 공동으로 연기한 당나귀 배우들을 보면서 이들에게 평범한 가축으로 남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 심경이 되었다. 동물의 욕망을 내가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동물을 어떤 방식으로 묘사하든 그것이 명백히 인간의 욕망에 의한 산물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도 당근 메달을 우걱우걱 먹는 모습만은 귀여웠다. 관계에 관한 몇 가지 가정 <이니셰린의 밴시>의 주인공인 두 친구 패드릭(콜린 패럴)과 콤(브렌던 글리슨)은 각각 당나귀와 개를 반려동물로 기른다. 반려동물이 영화의 중심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중요한 방점을 찍는 것은 분명하다. 영화는 패드릭과 콤이 친밀했던 시간을 굳이 재연하지 않는다. 도리어 내내 반목하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관객은 늘 있는 일과처럼 친구의 집을 향해 걸어가는 패드릭의 걸음걸이와 눈썹 양 끝을 최대한 아래로 비스듬히 기울인 패드릭의 순진무구한 표정에서 그의 진실함을 의심하지 않는다. 패드릭과 콤은 늘 붙어 다니며 교류하는 일상을 나눠왔으나 그렇게 이어오던 시간의 관성이 갑자기 중단된다. 펍의 주인은 홀로 나타난 패드릭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인물과 주변인들의 반응을 통해 일상적 관계를 깨뜨리는 사건이 일어났음을 짐작하게 된다. 반면 콤의 태도를 보면 두 사람이 절친했다고는 믿기지 않는다. 나아가 친구라고 하기에는 둘은 대조적이며, 무엇보다 콤이 패드릭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인다. (실제 두 배우의 나이 차이는 21살이다) 물론 나이를 뛰어넘어 교류하고 친구로 지내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다. 두 친구는 지금 서로 다른 시간 속에 놓여 있다고 말이다. 패드릭은 나이가 들지 않은 채 특정 시간에 멈춰있고, 콤은 시간의 순리대로 나이가 들어버렸다. 콤은 패드릭이 실제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연기를 하면서 맞춰오고 있었지만, 이제는 한계에 다다라 그와의 교류를 끊기로 작정한다. 패드릭과 콤은 각각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 축을 담당한다. 친구와 우정을 나누던 시간 속에서 여전히 헤매는 패드릭은 과거의 인간이고, 패드릭과의 교류를 중단하고 새로운 관계로 뻗어나가는 콤은 미래의 인간이다. 두 사람의 부딪힘은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맞붙은 채 벌이는 치열한 다툼과도 같다. 미래에서 온 콤은 말한다. 결국 역사에 기록되고 시간을 뛰어넘는 것은 모종의 위대함이라고. 모차르트를 비롯해 위대한 작곡가의 음악은 현재에도 후대에도 기억된다. 반면 두 친구가 서로를 배려하면서 나눈 다정한 시간은 후대에 기억되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미래의 시선에서 그것은 다 사라져 없어질 것에 불과하다. 반면 과거의 인간 패드릭은 인간적인 선의를 지키며 가족과 이웃에게 다정함을 베푼다. 경찰관인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는 소년 도미닉(베리 키오건)을 돕고, 동생 시오반(케리 콘돈)과 당나귀 제니를 아낀다. 그가 발휘한 다정함은 다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다. 두 친구의 이야기는 미셸 공드리가 < 이터널 선샤인 >(2004)에서 전개한 이야기와 유사한 지점이 있다. <이터널 선샤인>은 특정 기억을 도려내는 것이 가능해진 상황을 그린다. 사랑에 실패한 인물은 연인과의 기억을 통째로 삭제하길 원하지만, 기억을 지우는 여정은 곧 기억을 소생하는 여정이 되어 과거의 시간을 긍정하게 만든다. 기억을 삭제하는 기술을 통해 <이니셰린의 밴시>를 관통하면, 콤만 기억을 삭제한 상황이라 말할 수 있다. <이터널 선샤인>의 인물은 실패의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과거를 반복하기를 선택하지만,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콤은 두 사람의 우정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는 관계를 끝내려 한다. 이를 알지 못하는 패드릭은 교류의 중단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반대로 패드릭이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이라는 가정도 어느 정도 말이 된다. 플로리안 젤러의 < 더 파더 >(2021)에서 치매 환자인 안소니(안소니 홉킨스)의 시점을 체감하게 만든 것과 유사하게 <이니셰린의 밴시>는 거의 패드릭의 시점으로 영화를 보게 된다. 패드릭은 기억 상실증에 걸려 콤과 절연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 채 계속 콤에게 다가간다. 이를 받아주던 콤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이제까지 해오던 연극을 끝내면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영화를 두고 이런저런 해석을 덧붙여보게 되는 건 콤의 갑작스런 절연은 패드릭에게도 관객에게도 납득하기 힘든 사건이기 때문이다. 전쟁과 이야기 전쟁은 단지 바다 건너편에서 희미하게 비쳐오는 사건이 아니다. 패드릭과 콤의 절연 역시 전쟁이다. 각각이 기르는 반려동물은 전쟁의 정찰병이다. 콤의 갑작스러운 절교 선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패드릭에게 콤은 만약 자신에게 말을 건다면 그 때마다 자기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를 망설임 없이 실행한다. 패드릭이 규칙을 어기고 술에 취해 말을 걸어온 다음 날 콤은 집에서 손가락 하나를 잘라 패드릭의 나무문을 향해 던지고는 말없이 떠난다. 잘린 손가락이 문에 부딪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질 때, 잘린 손가락은 광적인 자해만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갈기는 총알처럼 여겨진다. 그 이후에도 패드릭은 무심결에 콤에게 말을 걸고 손가락은 가차 없이 잘리며 콤은 더 이상 바이올린 연주를 할 수 없게 된다. 두 친구의 절교가 초래한 가장 잔혹한 결과는 잘린 손가락을 입에 문 채 당나귀 제니가 죽음을 맞은 사건이다. 영화에서 사람이나 동물의 죽음이 묘사될 때 이것이 주인공의 변화를 위한 도구이거나 하나의 상징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당나귀의 죽음이 패드릭을 각성하게 함에도 그것이 도구이거나 상징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패드릭의 복수 방식에 있다. 패드릭은 더는 콤의 총알(손가락)을 외면하지 않고 콤을 공격하기로 결심한다. 패드릭은 복수를 위해 콤의 반려견을 해치는 식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법칙을 쓰지 않는다. 패드릭은 콤의 반려견이 주인을 구하려다 화마에 휩쓸리지 않도록 따로 보호해준다. 반려동물을 상실하는 슬픔을 똑같이 되돌려주지 않는 것은 거꾸로 반려동물에 대한 패드릭의 사랑을 드러낸다. 패드릭의 복수에는 그가 품어온 다정함이 최소한의 경계선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위대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감정이다. 콤 역시 패드릭의 당나귀가 죽게 된 상황에 충격을 받으며 복수를 담담히 받아들인다. 두 친구가 사는 마을은 커다란 바다와 맞닿아 있고, 바다 건너 본토에는 장기전이 벌어지는 중이다. 역사에 기록되는 것은 음악만이 아니라 전쟁도 있다. 전쟁은 역사에 기록되지만, 전쟁 이후 평화라면 모를까 지속하는 평화는 보통 역사로 기록되거나 회자되지 않는다. 이를 인간관계에 적용하면 인간의 기억에 깊이 각인되는 것은 좋았던 순간보다는 누군가와 갈등하거나 괴로운 순간인 경우가 많다. 콤이 패드릭과 절연한 이유는 패드릭과의 지속하는 일상을 보존하기 위해서 일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뚝 하고 두뇌 회로 하나가 잘린 것처럼 관계를 끊어내지 않는 한 일상은 여간해서는 각인되지 않는다. 전쟁은 역사에 기록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화의 중요한 소재가 되어 이야기의 세계에도 영향을 준다. 실제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만이 아니라 영화의 소재가 평화보다는 충돌과 갈등이 많은 것도 전쟁의 역사가 이야기의 세계에 미친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두 친구의 이야기는 영화화될만한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생각으로 이끈다. <이니셰린의 밴시>의 세계는 켈리 레이카트의 < 퍼스트 카우 >(2019)가 서부극의 세계 속에서 나란히 죽음을 맞은 두 친구의 우정을 그려낸 것과 통한다. <퍼스트 카우>에서 주인공의 우정은 활극으로 기억된 세계 안에 새로운 리듬을 새긴다. <퍼스트 카우>가 보여준 것이 정공법이라면, <이니셰린의 밴시>는 반어법을 쓴다. 영화에서 타인이 타인에게 혹은 타자에게 발휘한 선의가 무가치하다고 말할수록 어쩐지 선의와 일상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리하여 바다를 마주한 채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기묘한 결합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5월 31일 월요일 500미터쯤 걷고 카프성모병원에서 처음으로 멈추었다. 거기서부터 서쪽으로 꺾어 걸어갈 생각이었다. 카카오맵으로 아람누리도서관 방향을 헤아렸다. 이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알겠다. 오전에 영상자료원 담당자에게 메일이 왔다. 바쁘신 와중에 혹여 (이미 한 번 미룬) 마감일을 잊으셨을까 하여 리마인드 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럴 수 없다, 지금은 안 된다, 이 시점에 한국 영화계가 이런 글을 읽어서는 안 되며 우리는 이 마감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노트북과 기계식 키보드, 그 외에 필요한 책들을 백팩에 챙겼다. 슬리퍼는 새것이고 푹신해서 충분히 믿을 만했다. 걸어서 가면 어리석은 초고를 돌이킬 수 있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거라는 확신을 품고, 나는 아람누리도서관으로 향하는 최단 거리의 도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전히 혼자이기를 원했다.* 어제까지 내가 쓴 초고는 왜 우리의 비디오 에세이가 박무석이 곽철용 앞에서 ‘불나비’를 부르는 < 타짜 >의 장면에서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었다. 금정연(V.O.) : 저는 늘 최동훈을 한국의 셰익스피어라고 생각해왔어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 배역 대신 배우의 이름을 말하는 게 훨씬 자연스러운 다른 많은 영화들과 달리 고니나 아귀 같은 이름은 제게 이아고나 오셀로처럼 대체할 수 없는 고유명으로 느껴집니다. 둘. 영국인들이 셰익스피어를 즐겨 인용하듯 한국인들은 <타짜>를 인용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하지만 그와 별개로 나는 <타짜>가 21세기 한국 영화 산업에 대한 은유, 나아가 일종의 선언이라고 생각한다. 흥행=도박이라는 오래된 비유. 두 개의 충무로가 있다. 올드 충무로와 새로운 충무로. 올드 충무로는 충무로에 있다. 새로운 충무로는 강남에 있다. 그런데 왜 충무로지… 최동훈의 영화에서 올드 충무로를 대표하는 건 곽철용이다. 그는 올드 충무로의 큰손으로 박무석 같은 감독들을 고용해서 영화를 찍어내는 제작자다. 새로운 충무로를 대표하는 건 물론 고니다. 그는 신진 제작자 정마담, 동료 감독 겸 시나리오 작가 고광렬과 손잡고 올드 충무로의 아성에 도전한다. 아귀나 짝귀 같은 타짜들이 올드 충무로를 대표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들은 올드 충무로의 대표적인 감독들이다. 다만 지나치게 성공한(성공했던) 아웃라이어일 뿐, 제작자 중심의 시스템 속의 플레이어들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고니를 가르친 평경장 역시 타짜지만, 다른 타짜들과 달리 시스템에 한 발만 걸친 일종의 독립영화감독이라고 할까, 상대적으로 인지도는 떨어지는 편이다. 결국 <타짜>의 심층 서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고니가 박무석이 만드는 독립영화에 우연히 제작부로 참여하며 영화라는 도박판에 발을 들이고, 독립영화계의 거장인 평경장 밑에서 본격적인 연출을 배우며, 신진 제작자 정마담과 의기투합해 메이저 영화판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오지만, 정마담 또한 기존의 제작자들과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절-홀로서기 하는 이야기, 다시 말해 충무로가 제작자 주도의 영화판에서 감독 주도의 영화판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 혹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선언하는’ 영화다… 금정연: 박무석이 노래하는 장면의 메시지는 분명해요. 그는 자기 자신이나 관객이 아닌 사장의 눈치를 봐야 하는 월급 감독입니다. 따라서 박무석은 곽철용에게 망한 흥행은 뒤로 하고, 두 번째 기회를 허락해주기를 구걸하고 있는 거죠. 노래를 통해서.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닌 것이, 그가 부르는 노래 가사를 들어보세요. "얼마나 사무치는 그리움이냐~ 밤마다 불을 찾아 헤매는 사연~" 이는 그가 마음 속에 아직 도박/영화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무엇보다 그가 노래를 부르는 게 정확히 영화의 중간, 정확히 중간점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영화의 구조에서 주인공의 결심이나 변화, 커다란 고난이나 가짜 희망 같은 중요한 사건에 할애되어야 할 중간점을 박무석에게 주고 노래를 부르게 한다? 이는 박무석 또한 고니와 같은 꿈을 꾸던 감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며, 박무석이 고니와 손잡고 곽철용의 뒤통수를 칠 거라는 복선이잖아요. 더불어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안 좋으셔도 어쩔 순 없지만, 최동훈이 선배 감독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윙크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그리고 이제 최동훈은 감독인 동시에 스스로 거대한 기업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런 최동훈의 윙크를 전유하고 싶은 겁니다. 정지돈: …… 금정연: 지돈 씨, 평경장의 죽음을 생각하세요! 정마담의 제작부장인 빨치산에게 하필 ‘오른팔’을 잘려 ‘기차’에서 떨어져서 죽음에 이르렀다는 게 과연 우연일까요? 정지돈: (대체 무슨 말인지?????) 머릿속으로 정지돈과 대화를 나누며 나는 계속 걸었다. 숏/리버스 숏. 그런데 그걸 대화라고 할 수 있나. 아까부터 정지돈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모르겠다. 이참에 나는 그를 JD로 부르기로 한다. 불만 있으면 말을 하겠지… 문득 장 루이 뢰트라가 [영화의 환상성]에서 소개한 일화가 떠오른다. 앙토냉 아르토의 장례식에서 알랭 게르브랑은 퍽 기이한 일을 겪는다, 아르토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가 게르브랑의 앞을 막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영구차의 운전사가 고개를 돌려 게르브랑을 바라보았고, 그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는데, 그때 운전사의 얼굴이 다름 아닌 죽은 아르토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걸 마주침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의 대화도 대화가 아닐 리 없다. 그리고 나는 대화를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적어도 우리가 도서관에 도착할 때까지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백일 정도 지났을까, 아직 아기 티를 벗지 못한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풀숲에 앉아 울고 있었다. 뭐라도 주고 싶었지만 가진 게 없었다. 르네 도말은 아내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주려고 하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걸 알게 된다고 썼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손에 무언가 넣으려고 한다, 손에 무언가 넣으려고 하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무언가가 되려고 욕망한다, 무언가가 되려고 욕망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살게 된다. 오늘은 5월의 마지막 날이고, 생일을 맞은 영화인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콜린 파렐, 그리고 JD. 나는 여전히 피곤한 얼굴의 JD를 위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다. 생일 축하해요, JD. 6월 1일 화요일 영화 보기를 미루는 건 영화 만들기를 미루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책 읽기를 미루는 건 책 쓰기를 미루는 것이다. 예전에는 읽기=쓰기가 싫어질 때면 영화를 봤다. 그때 내가 보던 것은 농담으로라도 훌륭하다거나 예술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영화들이었다. < 나이스 가이즈 > < 털기 아니면 죽기: 제한시간 30분 > < 위험한 패밀리 > < 홀패스 > < 쥬랜더 리턴즈 > < 베일리 어게인 > <비트윈 투 펀스: 투어 스페셜> <미스터 롱> < 22 점프스트리트 > <기동순찰대> < 젠틀맨 > 등등… 도대체 왜 그런 영화를 보면서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는 거죠? 모르겠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좋다고 말하는 영화는 안 보고 쓸데없는 영화만 보는 마음에는 약간 판도라의 상자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1)호기심에 이끌려 영화라는 상자를 엶 2)형편없는 영화들의 면면에 화들짝 놀라 상자를 닫음 3)상자 속 깊은 곳에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좋은 영화들이 남아 있음 4)세상엔 내가 아직 보지 못한 좋은 영화들이 무척 많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거친 현실을 묵묵히 살아갈 용기를 얻음… 영화를 만들기로 한 다음부터 모든 종류의 영화를 보기가 싫어졌다. 아니, 싫어졌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 선박왕과 그 아내의 관계, 다시 말해 아내를 사랑하는 유부남이지만 아내를 최대한 안 보려는 관계 같다고 할까. 그때 JD가 오만상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그는 소리 없이 입모양만으로 무언가를 말했는데, 아마 ‘꼰대’라고 하는 것 같았다. 확신할 순 없다. 코로나 이후로 많은 것들이 종종 흐릿하게 보인다. 심지어 내 머릿속에 있는 것들도… 나는 예전에도 볼라뇨의 저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유부남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유부남이라는 것. 유부남이 하는 유부남 농담만큼 소름 끼치는 것도 없다. 군필자가 하는 군대 이야기를 제외하면… 어젯밤에는 아내와 함께 영화 VOD 몇 편을 구매했다. 이사하며 IPTV를 바꾸고 사은품으로 받은 5만원 쿠폰의 사용기한이 어제까지였던 것이다. 우리는 일종의 의무감을 가지고 영화를 지독히도 증오하는 사람이 만든 게 분명한 IPTV의 영화 메뉴를 탐색한 끝에 7편의 영화를 선정했다. < 포드 V 페라리 > < 더 파더 > < 스파이의 아내 > < 노매드 랜드 > < 테넷 > < 소울 > < 자산어보 >. 대여 아닌 영구소장으로. 남은 500원은 가볍게 포기하기로 했다. 나도 아내도 딱히 그 영화들을 보고 또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영구소장의 매력은 지금 당장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러니까 일석이조인 셈이다. 쿠폰도 쓰고 영화도 안 보고, 원한다면 영원히 보지 않을 수도 있고… 최근 내가 가장 사고 싶은 책은 크리스티안 키슬리와 제이슨 미텔과 캐더린 그랜트가 함께 쓴 [비디오 에세이 만들기The Videographic Essay]다. 출판사는 이모션북스. [The Films of Bong Joon Ho](Rutgers University Press, 2020)를 쓴 Nam Lee의 트위터에서 표지 사진과 함께 올라온 출간 소식을 본 게 5월 26일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아직까지 어느 서점에도 DB가 등록되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인터넷 서점에서 제목을 검색했다. 그러면서 당장 책을 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간절함도 더해졌다. 이걸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1985년 제니 홀저는 뉴욕 타임스퀘어의 전광판에 이렇게 썼다.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줘(Protect me from what I want). 그럼 나는 내가 읽고 싶은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책을 사려는 걸까(Protect me from what I want to read by buying them)? 그와 함께 기껏 책을 만들어놓고 팔지는 않는 출판사에 대한 의구심도 생겼다. 어쩌면 이건 일종의 복수 같은 게 아닐까? 영화도 출판도 모르는 세상에 대한? 밑도 끝도 없지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이모션북스의 대표는 임재철이다. 이사 온 집은 1층, 우리집 베란다 앞 작은 풀밭에 자리를 잡고 아직 눈곱도 제대로 떨어지지 않은 새끼 세 마리를 키우는 고양이 가족에게 사료와 물을 챙겨주고 집을 나왔다. 작업실에 도착하니 택배 상자가 쌓여 있었다. 일을 할 수 없는 주말에 인터넷 서점을 신경질적으로 뒤지며 헌책 새책 가리지 않고 산 책들이었다. [르 코르뷔지에 - 자연, 기하학 그리고 인간] [보이는 기호학 제3판] [영화음악의 실제] [그림편지] [나의 할아버지 피카소] [알기 쉬운 현대미술의 개념풀이] [얼트 문화와 록음악 1] [파운드 푸티지] [소외과 가속] [밀수 이야기] [젊음의 코드, 록] [영화 같은 시간] [매체로서의 영화] [영상 미디어와 보도] [하이퍼건축] [영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소프트웨어가 명령한다] [영화 음악의 이해] [예술가로 살아남기] [나의 사랑 씨네마] [할리우드의 영화산업] [데뷔의 순간]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죄수 운동법] 등등. 모두 읽지 않아도 되는 책들이다. 책의 단점은 VOD와 달리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몇 주 전에는 읽지도 않을 책을 쌓아두기만 하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서관에서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라는 책을 대출했는데, 아무것도 바뀌진 않고 연체만 되었다. 정작 책은 읽지도 못했어. 6월 2일 수요일 2016년 가을 나는 지금은 사라진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열린 임재철의 6강짜리 강의 ‘스탠리 카벨의 세계’를 들었다. 어느 날의 강의에서 임재철은 이렇게 말했다. 도서관이 없다고 상상해야 한다. 자기 집 책장에 있는 책들을 가지고 해결해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일을 할 필요가 있다. 고민하고 준비하고 모으고 계속해서 부족한 부분을 찾으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끝이 없다. 목숨을 건 도약이 필요하다(비평가들이 이 말을 할 때마다 500원씩 받았다면 나는…). 그는 또 예전에는 외국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책이나 잡지에 소개된 짧은 글만 보고 영화를 상상해야 했는데 나중에 영화를 보면 십중팔구는 자기가 상상했던 영화가 훨씬 더 재밌었다는 말도 했다.* 그날 임재철과 함께 택시를 타고 돌아오며 나는 충무로 아저씨들과 함께 시나리오를 썼는데 끔찍한 경험이었다고, 내가 요즘 하고 싶은 일은 비디오 에세이를 만드는 건데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유튜브는 곧 시작할 거라는 등의 말을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택시가 밤의 도시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불빛들. 그림자들. 사라지는 시간들. 차창에 비친 임재철의 얼굴이 유령처럼 창백하게 보였다. 그는 내게 언제 유튜브를 시작할 거냐고 물었고, 나는 2023년이라고 대답했다. 그때는 그게 좋은 대답처럼 느껴졌는데. 모르겠다. 그날 이후 나는 많은 것을 잊고 복사꽃을 좋아했던 것만 기억하기로 했다. 오늘도 [비디오 에세이 만들기]는 등록되지 않았고, 나는 머릿속에서 나의 [비디오 에세이 만들기]를 빠르게 훑어본다. 그리고 JD에게 말한다. 금정연: 그러니까 일종의 '제텔카스텐' 같은 거예요. 인덱스카드와 펜, 그리고 상자만 있으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거죠. 자, 인덱스카드의 한쪽 면에 영화 정보를 적어요. 제목, 감독, 배우, 몇 분 몇 초에 나오는 씬이다 같은 걸. 그리고 뒷면에는 해당 씬에 대한 짤막한 메모를 남기는 거죠. 그런 다음 이걸 레퍼런스 박스에 넣어두는 거예요. 그리고 얼마가 지난 다음, 상자를 열어 짤막한 메모를 들여다보면서 생각을 정리해요. 그리고 새로운 상자를 열고 빈 인덱스카드에 방금 레퍼런스 박스의 메모를 보며 떠오른 아이디어, 이런저런 생각들을 적어서 넣는 거죠. 여기서 중요한 건 하나의 카드에 하나의 생각만 적는 거예요. 물론 각각의 카드의 한 면엔 레퍼런스가 되는 영화의 씬 정보를 적고요. 그리고 거기에 적절한 흐름대로 번호를 매겨서 새로운 상자(영화 메이킹 박스라고 할게요)에 보관해요. 추가할 카드가 생기면 역시 적절한 위치에, 이를테면 97과 98사이에 넣어야겠다면 97-A라는 식으로 번호를 매겨서, 끼워넣고요. 시간을 들여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날 상자가 꽉 차게 되고, 그안에서 자기들끼리 상호작용하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거죠. 그러다 적당한 시간이 지난 어느날 상자를 열고 인덱스카드를 꺼내서 차례대로 늘어놓으면 짜잔, 한 편의 비디오 에세이가 완성되었습니다! JD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쯧쯧, 혀를 차는 것도 같았다. 나는 조금 억울한 기분이 되었다. [제텔카스텐 – 글 쓰는 인간을 위한 두 번째 뇌]는 [죄수운동법]과 함께 다름 아닌 JD가 내게 권해준 책이었기 때문이다. 정연 씨, 새로운 육체에 새로운 정신이 필요하지 않으세요? 책을 추천하며 정지돈이 말했다. 그 책들의 제목을 들으니 문득 조정래가 떠오르네요. 그러자 정지돈이 반문했다. 조정래…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무언가를 말한다는 투였다. 예전에 등단 40주년을 맞아 [황홀한 글감옥]이라는 제목의 자전적 에세이를 냈거든요. 저도 모르게 황홀한 글감옥에서 죄수운동법으로 운동을 하면서 제텔카스텐으로 글을 쓰는 이미지가 떠올라 버렸네요. 네… 정지돈이 한숨을 내쉬듯 대답하더니 덧붙엿다. 조정래랑 정연 씨랑 두 분이 비슷한 연배신 거죠? 6월 3일 목요일 나는 날씨에 따라 사는 것 같다. 업과 다운을 반복하면서. 맑은 날에는 그늘 찾고 흐린 날이면 짜증난다. 비가 내리는 동안에는 거의 죽어 있다.* 우리는 메세나폴리스에서 만났다. 정지돈과 나 그리고 ㅍ출판사의 편집자 s. 만남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 않다. 나는 비가 와서 반쯤 죽어 있었고, 정지돈은 마감에 치여 반쯤 죽어 있었다는 것 말고는. s와 헤어지고 정지돈과 둘이 남아 밥을 먹으러 갔다. 우리는 닭콩국수를 먹으며 글쓰기와 인간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글을 쓰는 일은 쓰는 사람을 강퍅하게 만들고 주변을 짜증나게 만든다, 물론 우리가 글을 안 쓴다고 더 좋은 사람이 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당장의 작은 마감들이나 이런저런 쪽글들을 줄일 필요는 있다, 그렇게 남는 시간과 체력을 큰 기획이나 한 권의 책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쪽글을 안 쓰고 큰 기획이나 한 권의 책에 집중하려면 먼저 큰 기획이나 한 권의 책이 상업적으로 터져줘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쪽글을 안 쓰고 큰 기획이나 한 권의 책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예전에는 글을 쓸 때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건너뛰거나 비약하거나 반복하거나 스스로의 말을 취소하고 모순된 말을 하는 게 두렵지 않았는데 요즘에는 자꾸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움츠러들게 돼요.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정연 씨, 정연 씨가 올해 몇 살이에요? -서른아홉이요, 만으로… -하, 우리 아빠보다 나이 많아! 나는 깜짝 놀라 정지돈을 쳐다봤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먼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약이라는 감각은 인식의 너비와 관련되어 있어요. 반복이나 모순도 마찬가지죠. 만약 지적인 거인이 있다면 우리의 어떤 말도 비약이라거나 모순이라고는 느끼지 않을 겁니다. -문제는 제가 지적인 거인이 아니라는 사실 아닐까요. 뱁새가 황새 쫓아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 모르세요? 정지돈이 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도 뭐라도 찢었네요… 그날 저녁 작업실로 돌아온 나는 < 고양이를 부탁해 >를 봤다. 얼마 전에 올해로 개봉 20주년을 맞았다는 소식을 SNS를 통해 들었다. 시간 참 빠르다는 생각을 하면서 볼 수 있는 곳을 검색했는데 온라인에는 서비스하는 곳이 없었다. 어째서?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작업실을 뒤지다 먼지 쌓인 디비디를 발굴한 것이다. 오프닝. 인천의 만석 부두에서 교복을 입고 깔깔 웃으며 함께 사진을 찍는 다섯 명의 친구들. 이제는 일종의 유사 아날로그적인 감성마저 느끼게 하는 지글지글한 저화질의 디비디를 통해 그 장면들을 보는 순간 과거의 기억들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20년 전에 내가 이 영화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더라? 모르긴 해도 엄청나게 공감하거나 몰입하면서 봤던 것 같지는 않다. 내 이야기라기보다는 여자친구들의 이야기, 서울 아닌 인천의 이야기라고 생각했겠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순전히 내가 있는 우물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도 재미있게 봤고, 디비디로도 몇 번 더 봤을 것이며, 특히 모임 별이 작업한 사운드트랙 씨디는 닳도록 들었다. 하지만 중반을 향해가면서 영화는 내게 점점 낯설어졌고, 후반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영화처럼 느껴졌다. 예전에는 그냥 흔들리는 청춘?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 친구들의 이야기? 라고만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계급과 주거에 관한 이야기였고, 그것도 노골적인 계급과 주거에 관한 이야기였어. 특히 지영의 집이 무너지고 경찰의 강압적인 태도에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선택하며 감옥에 들어가는 부분은 지금-여기의 상황에서도 곱씹어 볼 부분이 많을 것 같았다. 내가 곱씹어 보기에는 너무 큰 조각처럼 느껴지기는 하지만… 집 앞 고양이 가족들에게 써보고 싶었지만 한 번도 쓰지 못했던 고양이 번역기 어플로 조부모의 장례식장에서 상복을 입은 지영의 품에 안겨 야옹야옹 우는 고양이의 말을 번역해보았다. 고양이: 기분이 좋지 않아요. 고양이: 엄마 아빠는 어디 있어요? 밤. 아내와 와인 마시며 TV 보다가 예전에 사놓았지만 당연히 읽지 않은 [씨네21]을 충동적으로 펼쳐들었다. ‘영화를 향한 질문들’이라는 기획으로 유운성과 김소영과 정성일의 글들이 두 호에 걸쳐 실려 있었다. 그중 김소영의 '영화의 피는 응고하지 않아 - <기생충>을 중심으로 쓴 영화의 (신)물질론'을 읽다가 번쩍!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액체 근대 사회에서는 “사회 같은 것은 없다”라는 마거릿 대처의 악명 높은 구호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된다. 기정의 발언, “그 누구도 돌보지 마”가 번개 천둥을 불러왔다면”이라는 구절을 읽는데, 머릿속에 순간 번개 천둥이 쳤다. 움찔하며 놀라는 JD를 뒤로하고, 나는 급히 노트북을 열어 정지돈에게 메일을 쓰기 시작한다. 금정연(V.O.): 저 역시 가끔은 깜짝 놀랄 만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연결되는 걸 느낍니다. 그것들은 순간이지만 놀라운 형태의 연결성을 보여줍니다. 아니면 단지 제가 취했거나요. 그러나 의식은 그 자체로 소통할 수 없습니다. 연결은 내용에서 일어나지 않으며 내용을 설명하는 것은 핵심을 빼놓는 행위입니다. 텍스트가 매순간 스스로 재현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오늘 지돈 씨를 만나고 돌아온 후 제 머릿속에서는 21세기 첫 20년의 한국 영화사가 새롭게 쓰여졌습니다. 결론부터 말할게요. 지돈 씨, 박무석과 '불나비'는 잊으세요. 우리의 비디오 에세이는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시작해 <기생충>에서 끝날 것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지만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그렇다면, 나중의 나중은 어떨까요? 이것은 계급과 거주과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인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집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길고양이를 자기보다 조금 형편이 나은 친구에게 '부탁'하는 것과 모략으로 다른 사람들을 자리를 차지한 후 "그 누구도 돌보지 마"라고 말하는 것 사이의 거리에 대한 이야기, 김소영이 말하는 <기생충>의 큰 비=도시의 유동성=액체근대와 고양이의 액체성=청춘의 유동성의 이미지를 대비시키는 이야기, 동시에 그것은 어느 소설가가 일간지의 지면을 통해 “나는 속으로 ‘공각기동대’ 실사 영화를 다시 찍는다면 세트를 만들 필요 없이 그냥 여기서 촬영하면 될 거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사이버펑크 전사가 아니므로 그 단지에 살면 틀림없이 불행해질 거라고 느꼈다”*라는 문장을 아무런 수치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쓸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것이 크리스티앙 메츠가 말한 시네마의 실행, 적어도 실행의 한 시도가 될 수 있다고 느낍니다. 여기, 두 영화에서 생각나는 장면을 급히 쓴 인덱스카드를 스캔한 이미지 파일을 동봉합니다. 지돈 씨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두서없는 메일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무척 살고 싶습니다. 당신의 K정연 나는 발송 버튼을 누르고, 그리고 기다린다. 정지돈의 답장을 [비디오 에세이 만들기]가 출간되기를 충동구매한 존 그레이의 [고양이 철학]이 배송되기를 밝은 미래를 아마겟돈을 핵폭탄을 나는 늘 기다린다 come, come, come, nuclear bomb…* *참고자료 [얼음 속을 걷다](베르너 헤어초크, 안상원 옮김, 밤의책, 2021) (*첫 문단 전체는 위 책의 서문과 1974년 11월 23일 일기의 일부를 변형한 것이다) [영화의 환상성](장 루이 뢰트라, 김경온 긴김, 동문선, 2002) (*알랭 게르브랑의 일화를 19쪽에서 인용했다) [마운트 아날로그](르네 도말, 오종은 긴김, 이모션북스, 2014) [참을 수 없는 가우초](로베르토 볼라뇨, 이경민 옮김, 열린책들, 2013) [담배와 영화](금정연, 시간의흐름, 2020) (*임재철에 관한 일화를 149쪽에서 인용했다) [제텔카스텐-글 쓰는 인간을 위한 두 번째 뇌](숀케 아렌스, 김수진 긴김, 인간희극, 2021) [I Seem to Live: the New York Diaries, 1950-1969: Volume 1](Jonas Mekas, Spector Books, 2020) (*1950년 1월 1일 일기의 일부를 변형했다) '영화의 피는 응고하지 않아' (김소영, [씨네21] 1301호) [모든 것은 영원했다](정지돈, 문학과지성사, 2020) (*159쪽에서 연결과 재현에 관한 부분을 인용하며 인용자가 일부 변형했다) ‘지금 무엇이 끝나고 있는 걸까’ (장강명, https://news.joins.com/article/24077719) Morrissey, 'Everyday Is Like Sunday'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언제부턴가 재즈를 자주 듣는다. (나 알고 보면 재즈 듣는 남자!) 요즘 나의 ‘최애’ 재즈 뮤지션은 에디 히긴스(Eddie Higgin)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에디 히긴스의 재즈를 듣고 있으면 건반의 한 음 한 음이 탄산음료 방울 터지듯 내 심장에 와 톡톡거리는 것이 영혼의 마사지를 받는 느낌이다. 모든 앨범이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에디 히긴스 트리오의 <A Fine Romance>를 좋아한다. 첫 곡 ‘I Concentrate On You’를 비롯해, ‘Girl Talk’, ‘September In The Rain’, ‘I Fall In Love Too Easily’ 등 제목부터 사랑으로 충만한 음악을 듣고 있으면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의 심정으로 사랑 안 하는, 아니 못하는 나 스스로가 불쌍해 잠시 숙연해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내가 재즈를 좋아하는 건 일종의 자기 반영 때문인 것 같다. < 블루노트 레코드 Blue Note Records: Beyond the Notes >(소피 허버, 2018) 시사 메일을 받고는 바로 신청했다. 재즈 레이블의 고유 명사 격인 ‘블루 노트 레코드’를 다룬 다큐멘터리라고 하니 참석하고 싶었다. 기대한 것만큼 좋았다.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미국으로 넘어온 두 청년이 어떻게 ‘블루노트 레코드’를 설립했는지, 존 콜트레인, 마일스 데이비스, 허비 행콕, 노라 존스 등 레이블을 거쳐 간 스타의 면면을 두루 살피고, 블루노트의 현재를 대표하는 뮤지션들이 녹음하는 현장까지 포착하는 등 시대와 공간을 유영하며 즉흥 연주처럼 주고받는 편집이 인상적이었다. 그날 시사는 좀 특별한 풍경이었다. 영화 상영 전 이뤄진 수입사 대표의 인사말 때문이었다. 보통 기자 시사는 별도의 식 없이 치러지기 마련인데 <블루노트 레코드>는 달랐다. (주)마노엔터테인먼트의 대표는 바로 영화 상영으로 들어가는 건 정이 없어 보인다며 해당 영화에 관해 몇 분 동안 이야기를 풀었다. 벌써 한 달 전이라 그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한 문장 만은 머릿속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소수가 즐기는 문화가 오래 살아남는다.” 블루노트 레코드의 시작은 80년 전이다. 재즈 애호가였던 알프레드 라이언과 프랜시스 울프는 1939년 뉴욕에서 작은 음반사 블루노트 레코드를 설립했다. 이들은 영입한 뮤지션의 창작의 자유를 일체 보장하며 완성도 높은 ‘블루노트 사운드’를 확립했고 사진작가 프랜시스 울프가 녹음 현장에서 찍은 뮤지션의 사진에 디자이너 리드 마일스가 단순하고 명료한 타이포그래피로 커버를 만들어 ‘블루노트 스타일’을 완성했다. 그래서 블루노트 레코드는 재즈 레이블의 이름이면서 ‘블루노트스러움’으로 표현되는 수준 높은 재즈를 대변하는 일종의 상징이 되었다. 재즈도 황금기가 있었다. 블루노트 레코드 발매의 존 콜트레인의 <The Ultimate Blue Train>(1957), 아트 블레이키 앤 재즈 메신저스의 <Moanin’>, 캐논볼 애덜리의 <Somethin’ Else>(이상 1958)는 재즈의 명반으로 통한다.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와 셀로니오스 몽크 등이 주도한 비밥 역시 1940~1950년대를 재즈의 시대로 이끌었다. 힙합이 대세인 지금은 재즈 하면 마니아가 즐기는 소수의 문화로 인식되고 있지만, R&B, 힙합 등의 장르에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폭넓은 스펙트럼의 음악으로 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결국, 살아남는 건 수치가 아니라 스타일이다. 개성이다. 이게 꼭 재즈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어서 <블루노트 레코드>의 수입사도, 두세 편의 블록버스터가 박스오피스를 나눠 먹기 하는 여름 시장의 각축장 속에서도 < 밤의 문이 열린다 >( 유은정 , 2018), < 이타미 준의 바다 >( 정다운 , 2019), < 우리집 >( 윤가은 , 2019) < 벌새 >( 김보라 , 2018), < 누구나 아는 비밀 >(아스가르 파르하디, 2018), < 돈 워리 >(구스 반 산트, 2018) < 지구 최후의 밤 >(간 비, 2018), < 나는 예수님이 싫다 >(오쿠야마 히로시, 2018) 등 ‘개성 있는 스타일’의 작은 영화를 제작하고 소개하는 회사들도 모두 ‘블루노트 레코드’다. 관객 수는 큰 영화와 비교가 안 될 정도이기는 해도 이들 작품이 남긴 감흥은 천만 수치 이상이라고 확신한다. 뮤지션 알리 샤히드 무하마드는 블루노트 레코드에 관해 이렇게 코멘트하였다. “블루노트는 ‘정보의 바다’였어요. 우리가 발견한 것은 재즈 음악 속에 숨겨진 여백, 모든 연주자를 위한 솔로 부분이었죠. 아티스트만의 모멘트가 있었고 그것이 재즈를 발견하는 아름다움이에요.” <블루노트 레코드> 영화를 보고 집에 와 에디 히긴스 음악을 들으니 ‘내 사랑 어디에 있나요?’ 자기 반영의 동질감이 또 다르게 다가온다. 내가 스타일 있는 작은 영화를 참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 그 영화들과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다는 바램. 재즈는 음악이면서 스타일이고,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