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 감독
- 디 쿨룸비가쉴리
- 제작년도
- 2024
- 출연
- 마라브 니니드즈, 이마제 수히타시빌리, 카카 킨추라시빌리, 로자 칸체이슈빌리, 아나 니콜라바
조선극장 흥행광고 3호 중 일부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조선극장 은 단성사 와 더불어 식민지기의 대표적인 조선인 극장으로 손꼽혔던 곳이다. 그러나 ‘경성의 일류 극장’이라는 명성이 무색할 만큼 조선극장은 유독 ‘스캔들’의 진원지로 호명될 때가 많았다. 객석에서 발생한 삐라 살포 사건이나 극장 주위에 진을 친 폭력단들의 범죄행위도 여러 차례 신문 지상에 오르내렸지만, 무엇보다 빈번했던 것은 극장 경영권을 둘러싼 내홍 에 얽힌 이야기들이었다. 실제로 조선극장의 운영 기록(1922~1936)을 살펴보면, 일시 휴관을 선언하고 극장 문을 닫는 일이 적지 않았는데 주된 원인은 경영권 분쟁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으며 극장이 재개관할 때는 대개 새로운 경영주의 취임 소식을 동반하곤 했다. [1] 이는 단성사가 경영주 박승필 의 수완과 카리스마에 힘입어 안정적인 경영 체계를 구축해 나갔던 것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사실 조선극장의 경영권 분쟁은 탄생 시점부터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던 사태였다. 동양생명보험회사 경성지부장으로 근무하던 일본인 시택근차랑(矢澤近次郞)은 얼마간의 자금을 모아 사업에 뛰어들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이때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사업 파트너가 바로 황원균이었다. 두 사람은 극장업을 시작해보기로 의기투합한 후 본격적인 절차에 착수했다. 시택근차랑이 자금을 대고, 황원균이 흥행장 건축허가를 비롯한 실무를 담당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 실질적인 지배권은 시택근차랑에게 있었겠지만 문제는 서류상의 소유주가 황원균의 이름으로 명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당연히 시택근차랑은 명의변경을 요구했고, 황원균은 영업 개시 전에 명의변경을 하면 신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약속을 차일피일 미뤘다. 결국 두 사람의 갈등은 법정 공방으로 이어지기에 이른다. 이후 시택근차랑은 건물 소유권을 동경 건물회사에 판매한 후 조선극장에서 발을 뺐다. 다만 동경 건물회사는 조선극장의 흥행권, 즉 직접적인 운영에 관여하지는 않았고, 실질적인 운영 책임을 담당한 것은 ‘지배인’으로 취임한 조선인 흥행주들이었다. 점차 흥행권은 소유권과 별개의 권리처럼 유통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고 조선극장의 흥행권을 양도했던 사례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2] 1926년에는 변사 김조성 이 새로운 흥행주로 취임하게 되었으나 극장 자금을 유용했다는 혐의를 받아 관원들과 갈등을 빚은 끝에 3개월 만에 물러나게 되었고, 차영호, 현철, 김영식, 이필우 , 이태진 등이 공동 혹은 개인 명의로 경영권을 승계했으나 대개는 1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만큼 1920년대 조선극장의 경영은 불안정했던 것이다. 심지어 1928년 8월에는 연이은 휴관사태 속에 위기의식을 느낀 관원들이 공동명의로 흥행주 역할을 맡아 1년간 경영을 이어나가기도 했을 정도였다. 조선극장의 경영이 비교적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안봉호와 신용희 가 이태진으로부터 경영권을 인수한 1929년부터의 일이었는데, 안봉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경영권을 넘기고 손을 뗐기에 실질적으로 조선극장의 흥행권을 행사했던 인물은 지배인으로 취임한 신용희였다고 볼 수 있다. (좌) 조선극장의 모습 (사진: “ 조선극장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 조선극장 개관 관련 신문 광고 (사진: “ 개장피노 ”, 《동아일보》, 1922. 11. 7.) 한편 조선극장의 경영구조는 1931년부터 기존과 사뭇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1931년 7월에 창립한 조선흥행주식회사 는 흥행업에 포함된 제반 사업들을 모두 아우르는 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 즉, 제작, 배급, 상영의 수직적 통합 을 통해 최대한의 이익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선극장은 개인 경영 방식을 벗어나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직영관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사장은 평양에서 고무공장을 운영하던 사업가 정완규가 맡았으며, 안봉호로부터 경영권을 인수한 정현국은 전무취체역을 담당했다. 그리고 신용희는 조선극장 지배인과 조선흥행주식회사 상무취체역을 겸임하게 되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창립과 직영관 제안은 조선극장 입장에서도 충분히 매력을 느낄 만한 사안이었다. 발성영화로의 전환 과정에 직면한 식민지 조선의 극장들은 기로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무성영화보다 과중한 필름 대여료를 지불해야 했고, 장비 설비에도 목돈을 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전면적인 발성영화 전환을 천명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관객들의 취향이 무성영화를 ‘재래의 저급 취향’으로 낙인찍는 경향이 현저해지고 있던 상황에서 무조건 무성영화의 재탕 상영을 반복하기도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금 8만원을 들여 출범한 조선흥행주식회사는 든든한 뒷배 역할을 해 줄 수 있었으며, 실제로 조선극장은 라이벌 관계에 놓여 있던 단성사보다 적극적으로 발성영화 전환을 시도 하며 시장의 트렌드를 주도해 나갔다. 재계 공황의 영향으로 말 못 된 흥행계는 예년에 비하야 참경에 빠진 셈인데 더구나 영화계는 조금도 새로운 면목을 보여주지 않고 다만 재삼 상영한 영화를 최염가의 관람료로써 상설관의 수명을 연장시켜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형편이었으나 기신양행(紀新洋行) 겸 조선극장의 지배인 신용희(申鎔熙) 씨가 일본에 갔다 오고 일본 동화상사(東和商事) 사장이 구라파에서 돌아오는 길에 동화상사 조선지점장인 고윤묵(高潤黙) 씨와의 회견으로 기신양행 측에서는 순전한 『토-키-』 배급 , 동화상사 측에서는 구라파 특작 무성영화 로써 영화배급전이 개시될 모양인데 무성영화 측에서는 이미 명작을 계약하야 수입 중이라 하며 기신양행 측에서는 조선극장에 불일간 『토-키-』영사기계를 장치하여 일반의 목을 놀래일 예상 인데 실패한 기왕에 일본제의 『토-키-』영사기계와는 달라서 이번의 것은 순미국제를 사드려 임이 『파라마운트』 회사의 『모로코』를 위시하야 『명작 토-키-』를 계약하였으므로 조선극장에서는 가을에는 얼마동안 『토-키-』 전문으로 흥행- 『단성사』에서는 무성구라파영화로써 영화전이 개시될 모양이라 한다. 기신과 조극 측에서는 과연 완전한 토-키-를 보여줄 것이며 동화상사 측에서는 과연 구라파의 명작을 가지고 『토-키-』의 새 진영을 돌파할지 일반 영화『팬』의 흥미를 자아내고 있다 한다. - 기사, “금추 흥행계는 발성 무성 영화전 - 기신 측엔 토-키- 상사 측엔 무성”, 《조선일보》, 1931. 8. 25. - 한국영상자료원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1 』, 1,114쪽. 1931년 가을 흥행 시즌 당시 단성사와 조선극장이 보여준 노선은 명확하게 엇갈렸다. 단성사가 명작 무성영화 전문관을 표방하며 유럽산 특작 영화들을 전면에 배치하려 한 반면, 조선극장은 기신양행과 손을 잡고 “순전한 토키”들로 프로그램을 채우고자 한 것이다. 주목할 것은 조선극장이 기왕의 일본제 발성영사기보다 훨씬 우수한 미국제 장비(RCA)를 전격적으로 사들였다는 점이다. 구매 시기를 고려할 때, 조선극장이 이처럼 공격적인 설비 투자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자본력에 힘입은 바 컸다고 볼 수 있다. 조선극장과 달리 유럽산 특작 무성영화를 전면에 내세운 단성사의 모습 (자료 출처: 『大京城都市大觀』(朝鮮新聞社, 1937), 映畫常設館ノ部 / 사진: “ 단성사 ”, 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역사박물관) 단성사와 조선극장의 상반된 행보는 여러모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싸움의 승패는 곧 발성영화 전환 문제에 있어 향후의 행보를 결정지을 만한 바로미터가 될 것이라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승부는 발성영화 전환이라는 과제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임을 각인 시키는 결과로 낙착되었다. 이듬해인 1932년 4월에 단성사와 우미관은 발성영사기를 구매하고 토키의 상영 비중을 늘려나가며 뚜렷한 노선 변화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1932년 7월에 지난 1년간의 사업 융창을 자축하는 의미의 기념 상영회를 열었을 만큼 조선극장과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렇기에 1932년 10월에 조선극장 지배인 신용희가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은 것 은 굉장히 갑작스러운 조치처럼 여겨질 만한 일이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 측은 신용희가 배임 행위를 저질렀다고 지목하면서 지배인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종용했는데, 신용희가 격렬하게 반발함에 따라 조선극장은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이나 일시 휴관 사태에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보도된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인생안내』 계약이 발단 / 정(鄭), 신(申) 양파로 대립 / 지배인은 건물 소유자와 악수 / 알력의 전말 내용 조선극장은 소화 四년 九월에 건물 소유자인 부내 황금정(黃金町) 二정목 五十九번지 동경건물주식회사(東京建物株式會社)와 임차계약(賃借契約)을 안봉호(安奉鎬) 씨가 체결하고 보증금(保證金) 六천 五백원을 내게 되었는데 그 후 소화 五년 七월에 정현국(鄭鉉國) 씨가 一만원을 내고 영업권리권(營業權利權)을 양수(讓受)하여 주식회사로 조직 후 조선흥행주식회사(朝鮮興行株式會社)를 조직한 나머지 정완규(鄭完圭) 씨가 사장(社長) 으로 취임하고 신용희(申鎔熙) 씨는 지배인(支配人) 으로 취임하여 정씨는 금전에 관한 일절 책임을 지고 신씨는 영업에 책임을 맡아 이래 경영을 하여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날로 업적을 나타내어 작년에는 二, 三천원의 순이익까지 보게 되어 주주들 간에 상당한 배당까지 하게 되었다. 지난번에 인생안내(人生案內)라는 영화를 상영하려고 영화배급소와 계약 체결을 할 당시 조선극장 간부의 승낙 없이 자기 개인으로 약 四백원에 계약을 하여 가지고 극장 간부와는 五할 배당을 하자는 조건을 제출하였는바 이에 극장 간부 측에서는 동 극장에 지배인의 지위에 잇는 사람으로 당연히 극장을 대표하여 계약을 체결할 것인데 불구하고 개인의 계약이라는 것은 배신 행동이라 하야 지난달 중순경에 신씨에게 해임장을 발송 하게 되었다. 이에 분개한 신(申)씨는 극장 건물 계약관계자인 목미(木尾) 씨에게 그 사실을 말하게 되자 전기 목미 씨는 신씨를 지지(支持)하는 터이라 결국은 정씨 일파와 신씨 일파 사이에 분쟁을 일으키게 되어 페관의 운명에까지 이른 것 이라고 한다. 관객을 위하야 애석한 일 - 사장 정완규 씨 담(談) 금번 분규사건에 대하여 사장 정완규(鄭完圭)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선에서 몇 개 안 되는 흥행계에 극장 간부들의 분쟁으로 휴관까지 하게 된 것은 조선흥행계를 위하야 일반 사회 각 방면 인사에게 진실로 미안하기 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간부는 어떠한 일이 있든지 양보를 하고 원만 해결을 지으려 합니다. 극장세만 하야도 九월에 七백 五十원 하든 것을 十월에 八백원을 내라고 하야도 아모 이의도 업시 그대로 다 지불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회사 규정에 의하야 부정한 행동이 있는 지배인 하나를 처치하엿다고 극장 계약자가 흥행을 못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 횡포한 일 이 아닌가 합니다. 지난번에 처분한 신 지배인에 대하여도 처분을 관대하게 하기 위하야 九백원이라는 퇴직금까지 보내었습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목미(木尾) 씨가 극장을 사용치 못하게 한다는 것은 신씨와 어떠한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일반대중을 위하여 너무나 애석한 일입니다. 장래를 위하야 해결에 노력 - 지배인 신용희 씨 담(談) 일찍이 동 극장의 지배인으로 있던 신용희(申鎔熙) 씨는 말하되 금번에 소위 배임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지난번 인생안내(人生案內)를 계약하였을 당시에 四백원을 내 돈을 내어 계약을 하였다는 것이나 그것은 당시 간부들이 너무나 사진값이 비싸다고 계약하기를 주저하므로 만약 다른 극장에서 계약이나 하여 사진값이나 오르면 더욱 극장에 손해가 될 듯하기에 내가 먼저 계약을 한 것 입니다. 여하간 사실에 잘잘못은 어찌 되었든지 조선극장의 장래를 위하여 원만히 해결을 짓는 것이 좋을 듯하기에 해임장을 받고서도 정씨(鄭氏)를 방문하고 무조건으로 잘못하였다고 사과까지 하고 앞으로 사업을 계속하자고 하였으나 끝끝내 거절을 하므로 나는 부득이 극장 계약관계자 목미(木尾) 씨에게 그 사유를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목미(木尾) 씨의 방침은 사리를 모르는 회사 당국과는 계약은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며 회사라는 명칭을 떠나 개인으로 계약을 하고 싶다고 하는 중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목미(木尾) 씨는 나를 신임하느니만큼 내가 빠지어 다른 사람과는 계약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중인데 현 간부 측에서는 나를 배척하니 앞으로 어찌될지 조선흥행계의 장래를 위하여 적지 아니한 걱정입니다 운운. - 기사, “『토키』영화의 전당 조선극장의 분규 - 휴관한 지 일개월에 아모 해결 업서”, 《매일신보》, 1932. 11. 28. - 한국영상자료원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2 』, 1,382-1,383면. 사건의 발단은 한 편의 수입영화 계약을 둘러싼 이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소비에트 영화 <인생안내>(니콜라이 에크, 1931)의 흥행가치에 주목한 신용희는 간부들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개인 명의로 필름을 선구매했으며, 회사에는 추후에 수익금을 배분하리라고 통고했다. 그는 다른 극장과 경쟁이 붙어 필름 대여료가 폭등할까 우려했기에 불가피한 조치를 한 것이라 항변했지만,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이것이 엄연한 배임 행위라고 보았던 것이다. 다만 <인생안내>가 신용희의 기대처럼 수익 창출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회 부랑자 청소년들이 철도 노동자로 재탄생하여 사회주의 건설에 기여한다는 이야기를 담아낸 <인생안내>는 ‘노력영웅’의 숭고한 희생을 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을 뿐, 계급투쟁을 전면적으로 다룬 작품이라 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신용희는 <인생안내>가 무난하게 검열을 통과할 것이라 보았고, 상영을 앞두고 주요 일간지에 특별광고를 커다랗게 게재했을 만큼 자신감을 보였다. [3] 그러나 <인생안내>는 개봉 다음 날 “사정에 의하야 중지”하게 되었다는 공지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린다. [4] 필름 검열은 통과했지만, 조선극장에서 자체 제작한 선전문이 문제시되어 압수됨에 따라 상영 불허 처분이 사후적으로 내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5] (좌) 조극 흥행광고 3호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우) <인생안내> 포스터 및 스틸 (사진: “Putyovka v zhizn( 1 , 2 )”, IMDb) 그러나 상영이 중지되었다고 해도 <인생안내>는 신용희가 개인 명의로 구입한 필름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조선극장 측의 손해가 아주 컸다고는 보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흥행주식회사는 굳이 이 문제를 끄집어내어 신용희를 몰아내고자 했다. 아마도 이는 신용희의 개인 행동을 용인하게 된다면 장차 무척이나 불리한 선례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흥행주식회사는 극장업뿐 아니라 배급업에도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었기에, 신용희가 정상적인 배급 절차를 건너뛴 채 임의로 이익을 분배하게 되면 회사 측의 이익을 결정적으로 침해할 우려가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위험의 싹을 미연에 잘라 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조선흥행주식회사가 신용희를 쉽게 몰아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조선극장에 대해 완전한 장악력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조선극장의 흥행권에 대해서는 일정한 처분 권한이 있었을지 몰라도, 최종적인 결정권은 어디까지나 건물 소유주인 동경 건물회사 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해임장을 받은 신용희는 동경 건물회사 측 대리인을 맡았던 일본인 목미호지조(木尾虎之助)를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했고, 평소 신용희의 사업 수완을 신뢰했던 동경 건물회사는 즉각 극장 문을 닫으며 조선흥행주식회사를 압박했다. 동경 건물회사는 양자 간에 원만한 합의를 이루도록 종용했지만 신용희와 정완규의 협상은 끝내 결렬되었고, 조선극장은 조선흥행주식회사와 결별하는 길을 택한다. 조선흥행주식회사의 투자가 주로 발성영화 상영 환경을 마련하는 데 집중되었으므로, 새롭게 설비된 장비들의 소유권 또한 조선흥행주식회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2년 12월에 조선흥행주식회사는 단성사와 새로운 계약을 맺고 조선극장에 설비되어 있던 발성영사 상영 장비를 철거해 단성사로 옮겼다 . 단성사는 1932년 4월에 일제 발성영사기를 도입했지만, 음향이 희미하고 잡음이 많았기에 장비 개선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이었다. 계약 체결 직후 단성사는 최신의 미제 RCA 상영기를 장만했다는 점을 대대적으로 광고하며 모리스 슈발리에 주연의 발성영화 < 오늘 밤에는 사랑해 주세요(Love Me Tonight) >(로우벤 마물리안, 1932)를 상영하게 되었다. <오늘 밤에는 사랑해 주세요> 포스터 및 스틸 (사진: “Love Me Tonight( 좌 , 우 )”, IMDb) 창졸간에 장비를 잃은 상황에서 신용희는 새롭게 영사기를 장만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때 시간을 벌어 주었던 것이 바로 극장 대관업 이었다. 1932년 12월에는 새롭게 창단한 명일극장과 문외극단이 조선극장에서 연달아 연극을 올리게 되는데, 이는 극장을 마냥 닫아둘 수만은 없었던 흥행주의 입장과, 명망 있는 큰 무대에 서기 원했던 신생극단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신용희는 1929년에 지배인으로 취임한 직후부터 자체 레뷰단을 조직하여 공연을 올리고, 극단들에 무대를 대여해 주며 조선극장의 운영난을 타개해 나갔던 전력이 있었다. 영화 상영에 위기가 닥쳤을 때, 대관업을 적절히 병행하며 융통성을 발휘하는 데 능했던 그의 경영 노하우가 또 한 번 발휘된 순간이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와 신용희의 갈등은 연예사업 종사자 간에 일어난 단순한 알력관계를 넘어 여러 흥미로운 논점들을 수면 위로 밀어 올린 사건이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영화의 제작, 배급뿐만 아니라 상영까지 포괄 가능한 회사를 목표로 삼았으며, 이는 영화산업의 수직적 통합 을 염두에 둔 행보였다. 그러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던 신용희 해고사태가 함의하듯 경영권 (조선인) 과 소유권 (일본인) 이 분리된 식민지 극장의 특수성 은 이러한 통합을 불가능하게 한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신용희를 비롯한 조선인 극장의 경영자들이 발성영화 전환에 따른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서 대관업을 십분 활용 해 왔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즉, 1930년대 초반의 발성영화 전환기에 연극 흥행은 프로그램 운영의 윤활유 역할을 담당했으며, 극장업자들이 최소한의 자율성이나마 확보할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 주었던 것이다. *** [1] 이승희, 「조선극장의 스캔들과 극장의 정치경제학」, 『대동문화연구』 72,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0. [2] 1929년에는 안봉호가 이태진으로부터 6,500원에 경영권을 인수했으며, 1930년에는 정현국이 안봉호로부터 1만원에 경영권을 인수하였다. [3] 조선극장 특별광고, 《동아일보》, 1932. 9. 1., 2면. [4] 조선극장 광고, 《동아일보》, 1932. 9. 3., 6면. [5] 이 선전문은 전량 압수당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 전해지는 “조극 흥행광고 3호”가 <인생안내> 특별편으로 구성되었으며, 9월 1일자로 발간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것이 바로 문제가 된 선전문일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다.(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료로 보는 일제강점기 극장문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20, 196쪽.) “조극 흥행광고 3호”는 <인생안내>의 예술성과 제작진의 우수성을 상찬하는 내용으로 서두를 꾸몄는데, 불온성을 지적할 만한 내용이 크게 눈에 띄지는 않는다. 영화 줄거리에 대한 소개 역시 신문에 게재된 개요보다 약간 더 상세할 뿐 큰 차이가 없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인생안내>에 삽입된 노래들의 가사를 옮겨놓았던 부분이다. <인생안내>를 “젊은 노서아”의 太息이자 熱로 소개하면서 ‘권로가’, ‘유랑의 노래’, ‘철도사역’의 가사가 나열되고 있는데, “무로가 영원히 매장되도록” “진흙 속에 영원히 무너버리고저 한다”라는 선언이나, “ᄯᅡᆼ을 긁지만 말고 / 정말로 파 업흐라”라는 구호, “낡은 세계를 ᄲᅮ리채 / 단연히 잘나낼 것은 이 손이다” 등의 구절은 시각에 따라 직접적인 선동으로 해석될 만한 내용들이었다.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이미지 클릭 시 유튜브 영상으로 이동) 20년 역사의 예술영화 전용관 대전의 원도심이라고 불리는 대전 중앙로에 위치한 대전아트시네마는 예술영화 전용 상영관으로, 스스로를 ‘예술영화 지기’라고 칭하고 있는 강민구 대표가 2006년 4월에 개관하여 이후 계속 운영하고 있다. 대전아트시네마는 1990년대 말부터 전국적으로 본격화된 시네마테크 운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강민구 대표는 ‘전국시네마테크연합’이라는 모임에서 활동을 하면서, ‘시네마테크 운동’의 관점에서 대전에도 예술영화 상영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다른 극장을 대관하거나 문화회관 같은 공간을 대관하여 영화제를 열었으나, 안정된 상영 공간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본인이 살고 있던 지역에 예술영화관을 개관했다. 2002년 시네마테크 단체들이 연합해서 출범한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가 서울아트시네마를 개관하는 것을 본 것이 자극이 되었다. 또한 당시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진행한 예술영화관 운영 지원사업의 대상이 되어 영화관 개관에 큰 도움을 받았다. 강민구 대표는 처음 2006년에는 대전 선사유적지 근처에서 ‘시네마테크 대전’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일 년간 운영을 했는데, 그 장소가 요양병원으로 바뀌면서 2007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현재의 대전아트시네마 공간은 이전 ‘동보극장’이었다. 영화관 시설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다는 점이 이전의 이유가 되었다. 원래는 바로 인근에 7개 관을 운영하고 있던 대전아카데미극장을 임대하고 싶었으나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게 돼서 동보극장을 임대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전아카데미극장은 2016년 7월 31일 영업을 종료했다) 현재도 동보극장의 기물들을 상당 부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원도심에는 원래 대형 영화관뿐 아니라 소극장 등도 있었으나 멀티플렉스가 생기면서 2, 3년 사이에 급격하게 다 사라져 버렸다. 대전아트시네마 강민구 대표 현재 대전아트시네마는 옛 충청남도청사 방향으로 목척교를 지나기 전 대로변 건물 3층에 위치하고 있다. 기차역 대전역에서 내려서 도보로 5분 거리이며 인근에 대전의 명소로 불리는 ‘성심당’ 본관은 물론 ‘중앙시장’과 ‘스카이로드’가 있어서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서 오는 여행자들이 들러야 하는 지역으로 꼽히고 있다. 현재 대전아트시네마 위치는 기차역과 지하철역에서 도보로 접근이 가능하고, 자동차를 가지고 온다고 해도 중앙시장 공영주차장이나 인근 건물의 복합주차빌딩을 이용할 수 있어서 접근성이 높다. 대전아트시네마가 위치한 지역은 주민들에게 구 시가지의 중심이라는 의미를 가진 ‘원도심’이라고도 불린다. 이전까지는 지리적으로 대전의 중앙에 있었던 지역이었으나 현재는 유성이나 대전 서구 쪽으로 계속 범위가 넓어지면서 둔산이 중앙이 되었다. 2000년대 중후반 지하철 대전역이 생기면서 이 지역이 다시 활성화되고 있다. 특히 시내버스가 대전역 앞으로 오게 되면서 대전의 20~30대들의 원도심 유입이 많아졌다. 또한 대전아트시네마가 영화제나 기획전을 열면 대전 이외의 지역, 특히 서울과 경기 쪽 영화 마니아들이 기차를 타고 참석하는 경우도 많다. 대전아트시네마 로비 전경 138석의 상영관 건물 입구에서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올라와서 대전아트시네마로 들어오면 좌측에 ‘시네마테크관’이 있다. 시네마테크관은 28석인데 영화 상영이 가능한 강연 공간이다. 기획전이 열리기도 하지만 워크숍과 대관 등의 행사가 주로 진행된다. 우측에는 휴게 공간이자 로비가 있다. 이곳에서는 티켓 발권도 가능하고 음료도 주문이 가능하다. 로비에 영화 관련 서적과 DVD, 영화 포스터 등이 놓여 있고 영화 관람 전 티켓 발권을 하고 쉴 수 있는 카페처럼 꾸며져 있다. 로비에는 방대한 양의 영화 DVD가 있는데 대전아트시네마 회원으로 가입하면 무료로 빌려주고 있다. 회비는 월 만 원이며 영화를 볼 때마다 회원가입을 하면 삼천 원씩 할인해주고 있다. 시네마테크관 전경 로비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면 상영관이 있는데, 상영관은 1관이고 좌석은 총 138석이며 10분이 경과되면 입장을 할 수 없다. 면적은 전체적으로 보면 100평 정도 되고, 상영관이 50평, 휴게실이 30평, 시네마테크관이 20평 정도이며 옥상이 있다. 날씨가 좋을 때는 옥상에서 ‘옥상영화제’라는 이름으로 영화 상영과 음악 공연 등을 진행했다. 원래 좌석은 2층을 포함하여 193석이었는데 필름 영사기를 대체한 디지털 영사기의 공간을 2층에 마련하게 되어 2층에 관객을 출입시키지 않고 있다. 더 이상 쓰지 않는 필름 영사기의 부속들은 서울아트시네마에 기증했다. 그런데 현재는 10,000안시 빔 프로젝터로 상영을 하고 있다. 디지털 영사기가 있으나 보수비용이 너무 비싸서, 맥미니를 통해서 프로레스 파일로 받아 상영한다고 한다. 취재 시점 영화진흥위원회 지원사업에 선정되어서 상영시스템을 보수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상영관 1층 전경 대전 영화예술문화의 아지트 대전아트시네마는 예술영화 전용관답게 개관 이래 한결같이 예술영화와 독립영화를 대전 시민들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주기적으로 기획전과 영화제를 개최하고, 영화 비평 수업 및 제작 강좌 등을 열기도 하는 등 영화를 사랑하는 시민들에게 아지트 역할을 한다. 2019년부터 시작한 ‘대전철도영화제’는 지역민들로부터도 큰 호응을 받고 있다. ‘대전의 역사와 영화를 교차시킨다’라는 취지를 걸고 있는데 철도와 함께 성장한 도시라는 정체성을 지역 주민들에게 부각함과 동시에 만나기 힘들었던 고전 명작들과 한국 독립영화 신작들을 발굴하여 상영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영화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겨서 《씨네21》이 2020년 독립예술영화관에 대한 기획 기사를 연재했을 때, < 윤희에게 >(2019)를 연출한 임대형 감독과 < 스틸 플라워 >(2016), < 재꽃 >(2016) 등에 출연한 정하담 배우가 본인들에게 인상 깊었던 독립예술영화관으로 대전아트시네마를 지목하기도 했다. 임대형 감독은 대전아트시네마가 2011년에 에릭 로메르 감독의 추모전을 하고 있을 때 방문한 기억을 술회했으며, 정하담 배우는 2017년 <재꽃>을 개봉했을 당시 대전아트시네마 옥상에서 열리는 GV 행사에 참여 한 뒤, 그때의 분위기는 물론 당시 대전아트시네마에서 일하는 청년 스태프의 열정에 대해서도 감탄했다고 한다. 이렇듯 이십 년의 시간을 거쳐 온 대전아트시네마는 이제 많은 영화예술인들에게 추억의 공간이자, 성장의 터전이 되어주고 있다. 공간 및 운영개요 1) 위치 : 대전시 동구 중앙로 192, 3층 2) 설립일 : 2006년 4월 3) 대표자 : 강민구 4) 규모 : 면적 212.37㎡(상영관 약 50평, 휴게실 약 50평) 5) 극장 구성 (관수, 관별 좌석 수, 훨체어석): 대전아트시네마 1관 136석, 시네마테크관 28석 6) 운영시간 및 정기휴무 : SNS 및 공식카페에 상영시간표 공개, 연중무휴 7) 입장료 및 할인 정책 : 일반 8,000원, 청소년/노약자/장애인 7,000원, 회원 5,000원 8) 조직도 및 조직 구성 : 대표, 대전철도영화제 스태프 9) 구성원 : 강민구 대표, 신진희 스태프 10) 주요 장비(영사 장비, 음향) : 빔 프로젝터, 맥미니(ProRes 파일 상영) 취재 일자: 2024년 8월 29일 글/인터뷰 진행: 김문경 사진: 허 성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사진 클릭 시 유튜브 인터뷰 영상으로 이동) 2013년 강남권에 문을 연 첫 예술영화 전용관 2013년 1월 9일 개관한 아트나인은 서울 강남권 첫 예술영화 전용관이다. 2013년 당시 예술영화 수입/배급사였던 엣나인필름(1996년 설립)에 의해 설립되어 2023년 현재까지 같은 장소에 자리 잡고 있다. 배급사가 운영하다 보니 영화 상영작을 선정하고 배치하는 데 있어서 국내에 수입이 안 된 작품을 구해올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며 이는 아트나인이 기획전을 열거나 신인 감독을 발굴하여 상영을 할 때 경쟁력을 가지게 되었다. 영화관의 이름인 아트나인은 엣나인필름의 숫자 9와 같은 정체성을 표명하는 것으로 ‘10점 만점에 9점만 하자, 10을 향한 9의 열정, 완벽으로 가려는 노력’과 같은 뜻을 담고 있으며, 이에 따라 아트나인의 상영관 2개의 이름도 하나는 0관, 하나는 9관이며 상영관과 함께 극장 안에 있는 레스토랑 이름도 ‘잇나인(EAT 9)’이다. 아트나인 내부의 레스토랑 잇나인 예술영화 전용관이 집중되었던 강북이 아닌 강남에 처음으로 생기는 예술영화 전용관이라는 점과 멀티플렉스를 운영했던 경험이 있는 엣나인필름(대표 정상진)이 만들었다는 점, 복합문화공간을 표방한다는 점 등으로 인해 많은 기대를 받았다. 개관 기념으로 2013년 1월 9일부터 1월 16일까지 총 36편의 작품을 6개 섹션으로 구성하여 ‘엣나인 필름페스티벌(anff: AT NINE FILM FESTIVAL)’을 열었다. 개막작인 < 더 헌트 >(토마스 빈터버그, 2012) [1] 가 한국에서의 정식 개봉에 앞서 엣나인 필름페스티벌에서 먼저 관객들을 만나게 된 점과 아트나인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일본 핑크무비(엣나인필름이 수입 배급), 아트나인의 음향 시설을 체험할 수 있는 실황 공연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되는 점 등이 주목을 받았다. 개관 당시 음향에 있어서 국내 상영관 중 최고 시스템을 갖춰놨다고 자부하며 EV사의 P시리즈 파워앰프를 달았고 이후 꾸준히 공간에 맞게 사운드 시스템을 정비해 왔다. 예술영화관 중 최초로 4K 영사기를 도입하기도 했다. 이후 기술의 급변과 유지 보수 비용 문제 등으로 국내 상영관들 수준이 평준화되었지만, 아트나인의 이런 특색은 당시 독립예술영화인들에게 동기부여가 되었다. 현재는 테라스 상영관을 제외한 일반 상영관에는 2K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데 실내 상영관 층고가 낮아 4K를 구현하기 어려운 면도 있었고, 독립예술영화 중 4K 버전으로 들어오는 상영본이 거의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에서이다. 개관 당시 갖춘 실내 상영관 두 개와 오픈 테라스로 이어지는 야외 상영관 한 개, 레스토랑 한 개의 구조는 2023년 현재까지도 동일하다. 2020년 리모델링 공사로 6월 10일부터 6월 12일까지 3일간 임시 휴관을 한 외에는 개관 이후 한 번도 쉬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관객과 소통하는 “영화관주의” 극장 아트나인은 이와이 슌지, 기타노 다케시, 레오 카락스, 짐 자무쉬, 데이비드 린치 등등 작가주의 감독들의 기획전, 매년 3월에는 재팬무비페스티벌, 4월에는 장국영 기획전을 열거나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에 밤새 3편의 작품을 묶어서 상영하는 올나잇 상영 등의 기획을 통해 관객들의 호응을 받고 있다. 기획전 이외에도 영화를 기본으로 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도하고 확장하고 있다. 야외테라스에서 비정기적인 특별 상영을 개최하거나 미술 전시, 음악 공연, 토크 프로그램 등 다양한 문화활동이 이루어지는가 하면 매년 한두 차례씩 영화 관련 배급사들과 디자인회사들이 모여 영화 굿즈들을 판매하는 플리마켓으로 SNS 상에서 입소문을 타기도 했다. 관객과 소통하는 다양한 시도들 역시 지속해 오고 있는데, ‘정시에 영화 상영, 10분 뒤 입장 금지. 음료 이외의 음식물 반입 금지’라는 아트나인 관람문화를 관객들에게 정착시키고, 자주 오는 관객들을 위해 ‘아트나인 X 잇나인 포인트카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아트나이너’라는 이름으로 서포터즈를 모집하고 매년 마지막 날 밤이 되면 영화를 보러 오는 관객들에게 떡국을 나눠주는 행사와 매달 마지막 날 오전 9시에 그달 상영이 되었던 영화들의 포스터를 무료로 가져갈 수 있는 포스터 대방출 이벤트 등을 운영하는 것으로도 아트나인을 이용하는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영화인들에게 회자된 바 있다. 아트나인 9관 내부 전경 개관 5년째인 2017년 인터뷰 당시 아트나인 관객 점유율이 20%까지 올랐다고 정상진 대표가 답한 바 있으며, 총 2개 관의 200석이 안 되는 규모임에도 코로나19 팬데믹 직전까지 국내 예술영화 전용관 매출액 기준 상위권을 항상 유지했다. 2023년 현재 인스타그램의 팔로워 수가 CGV보다 약 2배 많은 4.8만 명이다. 아트나인이 표방하는 ‘영화관주의’는 더 많은 독립예술영화들을 소개하고, 영화를 만든 사람의 의도에 가장 가깝게 환경을 구축하고 관객에게 오롯이 영화를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에 부합하게 유지·발전되고 있는 중이다. 영화와 공간 경험을 통합한 복합문화공간 아트나인이 자리한 곳은 서울시 동작구 사당동의 지하철 이수역 7번 출구 앞 골든시네마타워 12층이다. 해당 건물 8층에는 메가박스 이수점이 있는데, 원래 메가박스 이수점은 독립영화배급사인 엣나인필름이 씨너스를 통해 위탁경영하던 씨너스 이수점이었다. 2011년 씨너스가 메가박스를 인수하면서 메가박스 이수점으로 바뀌었다. 그와 함께 메가박스는 이수점을 직영하게 되고 엣나인필름에서는 2013년 1월 메가박스 이수점이 자리한 골든시네마타워 건물의 12층에 예술영화관 아트나인을 개관한 것이다. 같은 건물에 있는 메가박스 이수와 아트나인은 별개 극장이지만 예매시스템을 같이 사용하고 있고, 메가박스 회원 포인트를 아트나인에서도 쓸 수 있게 제휴는 되어 있다. 이러한 전략적 제휴를 통해 메가박스 이수에 관객을 빼앗기기보다는 오히려 메가박스 이수에서 영화를 보려고 예매를 하는 관객들에게 홍보가 되는 이점도 누리고 있다. 처음 아트나인이 개관할 당시에는 위치가 강남의 역세권이고 입주해 있는 건물도 큰 편인 데다가 같은 건물 안에 멀티플렉스가 있어서 굉장히 불리한 조건이라고 보였는데도 불구하고 현재는 찾아가기 편한 역세권의 예술영화 전용관이자 강남의 유일한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시네필들에게 확실히 각인되었다. 야외상영이 이루어지는 오픈 테라스 공간 0관과 9관, 2개 관을 운영하고 있는 아트나인은 총 150석 규모이며 야외 상영관으로 쓰이는 탁 트인 오픈 테라스를 갖추고 있는데 오픈 테라스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는 뷰가 관객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기도 했다. 극장 안에 카페와 이탈리안 레스토랑인 잇나인이 있어서 시네필이 자주 찾는 강남의 복합문화공간으로 현재는 자리매김하고 있다. 위치의 편리성과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특징 이외에도 아트나인의 다양하고 예술적인 상영 프로그램 기획력과 더불어 극장의 상영 시스템 자체도 이러한 입지를 다지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아트나인은 개관 초기부터 음향 시스템에 신경을 썼으며 관객들이 화면을 좀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스크린을 수직이 아니라 약간 기울게 설치했고 0관 같은 경우는 영화가 끝나면 왼편의 암막 커튼이 열리며 영화관 안이 환하게 밝혀지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다시 영화적인 순간을 맞이할 수 있게 했다. 영화관들이 보통 지하에 있거나 지상에 있다 하더라도 창문이 열리는 영화관이 없는데, 아트나인은 유일하게 고층에 자리 잡고 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창밖을 보여줌으로써 12층이라는 고층에 있는 영화관으로서의 특성을 활용하고 있다. 암막 커튼이 열린 0관 내부에서 보이는 외부 풍경 공간 및 운영 개요 1. 위치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대로 89 (사당동, 골든시네마타워 12층) 2. 설립일 : 2013년 1월 9일 3. 대표자 : 정상진 4. 규모 : 476.48㎡ 5. 극장 구성 (관수, 관별 좌석수) : 2개관, 0관 92석 / 9관 58석상영관 외 잇나인, 테라스, 사무실 6. 운영시간 : 09:00 – 23:00 시네마테라스 등 이벤트 진행 시 연장운영 7. 조직 구성 : 엣나인필름 내 수입배급부서 / 극장사업부서 / 식당(잇나인)운영부서 (극장사업부가 아트나인 기획운영) 8. 구성원 : 8명 (유동적) 대표: 정상진, 이사: 주희, 극장사업부 팀장: 박혜진 필자 : 김문경 사진촬영 : 허성 취재 및 인터뷰 일자 : 2023년 4월 19일 *** [1] 2012년 칸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매즈 미켈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