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후
- 감독
- 앤드류 헤이그
- 제작년도
- 2015
- 출연
- 샤롯 램플링, 톰 커트니
올해의 테마를 정리한다면 어린이, 노인, 여성, 퀴어가 되나보다. 일부러 테마를 정리해서 영화를 고른 건 아닌데, 뽑다 보니 그렇게 됐다. 클래식 할리우드에 대한 내 페티시를 자극해 은근슬쩍 리스트에 오른 < 헤일, 시저! >를 제외한다면 리스트에 선정된 모든 영화들이 여기 어딘가에 서 있다. 이중 몇몇은 두 개 이상의 테마를 공유한다. < 캐롤 >과 < 아가씨 >는 여성중심인 동시에 퀴어물이다. < 우리들 >의 주인공들은 여성인 동시에 어린이다. < 어둠의 여인 >의 주인공은 성인 여성과 어린 소녀이다. < 45년 후 >와 < 다가오는 것들 >은 모두 여성의 노년을 다룬다. 어린이를 청소년으로 넉넉잡아 본다면 < 비밀은 없다 >는 저 테마 중 세 개를 커버한다. 이 테마를 연장해서 다른 영화들도 몇 편 더 언급했으면 좋겠다. 여성 + 퀴어 테마의 영화로는 얼마 전에 개봉한 < 연애담 >과 개봉을 기다리는 < 꿈의 제인 >을 뽑았으면 좋겠고, 노인에 대한 영화로 빠진 작품으로는 <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가 빠지면 아쉽다. < 우리들 >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로는 엉겁결에 정지우 의 최고 걸작이 된 < 4등 >이 있다. 이들이 리스트에 오른 영화보다 덜 마음에 든다거나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이번 리스트를 만들 때는 그냥 저 영화들을 넣고 싶었고 여기에 완벽한 줄 세우기가 개입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나는 <연애담>을 < 아가씨 >보다 더 좋아한다고 할 수 있고 <아가씨>에 대한 내 입장은 거의 매일, 심지어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휙휙 바뀌는 편이다. 하지만 적어도 올해는 내가 <아가씨>에 대해 생각한 시간이 엄청나게 많았음은 부인할 수 없다. 올해는 한국영화를 조금 넉넉하게 뽑았다. 해외영화와 한국영화를 반반씩 뽑아도 되었을 것 같다. 이유가 무엇이건 2016년은 한국영화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분노하고 열광할 시간이 많았다. 이들 중 몇 편은 아쉽게도 그 가치에 맞는 관객들을 끌어들이지 못했다. 오늘 내가 고른 영화는 이경미 의 < 비밀은 없다 >이다. 흥행을 생각해보면 이 영화가 가장 아쉽다. 거의 수정처럼 투명하고 보편적인 < 우리들 >이나 감독과 원작자의 명성을 입고 해외에서 호평세례를 받고 있는 < 아가씨 >와는 달리, 이 영화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관객은 한국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어처구니없는 비열함에 대한 지식과 분노가 있고, 사투리와 억양을 구별하는 귀를 구별할 수 있는 한국어 사용자. 사전지식 없이 자막으로 보는 외국 관객들이 이 영화의 뉘앙스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반대로 본다면 21세기 초의 한국사회를 보여주기 위한 영화로 <비밀은 없다>만큼 좋은 작품은 없다. 다른 영화들이 이 나라의 표면만을 보여준다면 이 영화는 산 채로 해부해 보인다. 설정을 보자. 텔레비전 앵커 출신인 종찬은 고향인 경상북도 대산에서 국회의원 선거 중이다. 원래 여당 텃밭이지만 이전 여당 국회의원이었던 무소속 후보 때문에 경쟁이 만만치 않다. 그런데 선거 유세 첫날, 중학생인 딸 민진이 사라져버린다. 이 영화에 대한 사전정보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이런 정보를 준다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야기와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한국 영화계는 정치판을 무대로 한 스릴러 영화가 모자란 편이 아니다. 심지어 이런 내용을 전에 다른 영화에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 비밀은 없다 >의 도입부는 아주 좋지만 전형적인 한국 스릴러가 될 수 있는 재료를 다 갖추고 있다. 주인공을 종찬으로 만들면 영화는 당연히 그 길을 갈 것이다. 심지어 그는 그리스 비극에나 나올 법한 처절한 아이러니의 희생양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종찬을 주인공으로 만들지 않는다. 배우에서부터 스토리에 이르기까지 온갖 준비가 되어 있는데도 그렇게 안 한다. 제작자이고 공동 각본가인 박찬욱은 이 캐릭터의 분량이 줄어든 걸 아쉬워했는데, 내 생각엔 이 분량이 딱 맞다. 종찬이 근사한 상황에 빠진 훌륭한 캐릭터라는 사실은 여전하지만 < 비밀은 없다 >의 장점은 그의 분량과는 상관이 없다. 오히려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은 상식적으로 보았을 때 주인공이어야 마땅한 이 인물을 당연하다는 듯 조연으로 밀어버리는 무심함에 있다. 대신 영화는 주인공 자리를 종찬의 아내 연홍에게 준다. 이 사람이 주인공임을 선포하는 오프닝의 클로즈업을 제외하면 사실 초반에서 연홍은 그렇게 눈에 뜨이는 존재는 아니다. 남편의 대업을 위해 온몸을 바치는 예쁘장한 30대 여성. 하지만 딸이 사라지고 어쩔 수 없이 혼자 탐정 일을 시작하면서 이 정상적이고 평범한 가면에 균열이 생긴다. 그리고 영화가 결말을 향해 달려갈수록 이 균열은 점점 커지면서 연홍의 얼굴을 떠나 연홍이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였던 세계 전체로 퍼져간다. 연홍의 수사과정은 하드보일드 소설과 필름 누아르의 영역에 있다. 퍼즐 추리물과 하드보일드 물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을 설명하는 그럴싸한 이미지가 있다. 퍼즐 추리소설이 파편화된 정보들을 모아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해가는 과정을 그린다면 하드보일드 물은 어둡고 좁은 미로 속에서 망치로 벽을 깨부수며 목적지까지 길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랄까. 개인적으로는 로스 맥도널드의 60년대 이후 소설과 이 영화를 비교하고 싶다. 거대한 비리와 소소한 가족의 비밀이 얽혀 뜻밖의 미로를 완성하는 그 과정이 많이 닮았다. 단지 < 비밀은 없다 >에는 루 아처가 없다. 지도를 완성하는 역할은 실종된 딸의 어머니에게 넘어간다. 이제 이 모든 것은 개인적이다. 그리고 연홍이 미로를 찾아가는 과정은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우리’ 안에서 자신이 늘 타자였음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만약 공식대로 종찬이 주인공이었다면 그가 몰락하는 과정 속에서도 그를 만든 남성 중심적인 정치판의 세계는 그대로 유지되고 그의 몰락은 흔한 일화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이고 호남 출신이고 지금까지 위태롭게 ‘정치가의 아내’의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성인 여성에겐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정신적인 성숙 따위엔 단 한 번도 도달한 적 없는 이 미숙한 영혼은 중2병 아이들에 걸맞은 파괴력으로 그 주변의 세계를 박살 내버린다. 이런 한국 영화를 전에 몇 번이나 보았는가. 그렇다고 < 비밀은 없다 >가 남자들에게 희생된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냐면 사실은 정반대이다. 민진의 실종으로 시작되는 영화 속 드라마의 대부분은 여자들에 의해 저질러졌고 여자들 때문에 일어났다. 여자들이 가만히 있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다. 물론 가장 먼저 잘못한 것이 누구냐를 따진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이 영화는 거기에 그렇게 신경 쓰는 편이 아니다. 그리고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페미니스트의 모범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아니며 자신을 그렇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이 영화에 나오는 여자들의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이유가 무엇이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 더 덧붙인다면 주변 여자들과의 관계가 극단적으로 격렬하다는 것도.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남자들의 존재감은 이상할 정도로 흐릿하다. 심지어 거의 궁중 사극처럼 남자 한 명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설정일 수밖에 없는데도 그렇다.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민진의 마지막 대사는 그 남자의 마지막 존재감마저도 날려버린다. 이 모든 것은 여자들의 사정이다. < 비밀은 없다 >의 파괴력도 여기에 있다. 앞에서 종찬이 주인공이었고 그의 몰락이 이야기의 중심이었다면 세계는 바뀌는 게 없다고 말했다. 그건 그의 몰락이 그 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큰 의미가 없고 그의 자리는 언제나 비슷비슷한 남자들이 채울 것이기 때문이다. 균형의 측면에서 보면 달라지는 게 없다. 하지만 <비밀은 없다>의 세계를 뒤흔드는 것은 모두 (정신적으로 조금씩 미숙한) 여자들이고 청소년들이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정치하는 중장년 남자들의 세계관과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다. 이들은 여자와 아이들의 자리에 안주하지도 않는다. 따귀를 한 대 맞으면 세 대 받아치고 친구에게 해를 끼치면 차로 세 번 밀어버린다. 그렇다. 이 영화의 청소년 주인공 중 한 명은 심지어 운전을 한다. 지금까지 사회가 허용하지 않은 힘을 가지고 그 사회에 어떤 미련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무심하게 세계를 때려 부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정도면 거의 묵시록적인 영화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기존 사회에 대해 어떤 기대도 아쉬움도 없는 관객들에게 이 영화의 묵시론적 비전은 즐겁기 그지없다.
1. 올해 내가 꼽은 열한 편의 리스트를 살펴보니 한국영화가 1편, 아시아 영화 3편, 남미영화 1편, 유럽영화가 6편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유럽영화가 많은 반면 북미 영화는 단 한편도 포함되지 않았다. 유럽영화 중에서는 < 아페림! Aferim! > < 척 노리스 vs 공산주의 Chuck Norris vs Communism > 등 루마니아 영화가 2편이나 포함되었다. 지극히 사사로운 방식으로 리스트에 올린 3편의 아시아 거장들의 영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영화의 관계를 해석하고 풀어가는데 유독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깊은 공감을 느낀 작품들이다. 개인적으로 그다지 좋아하거나 친숙하다고 말할 수 없는 무협영화에서조차 그러한 감정을 느꼈으니 거기에는 아마도 단순히 개별 감독과 작품과의 교감을 넘어선 ‘아시아’라는 사회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공유하는 감정과 경험치들이 어떤 식으로든 녹아있기 때문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 택시 >는 20년간 일체의 영화촬영과 인터뷰, 해외출국을 금지당한, 말하자면 예술인으로서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도 절대 굴하지 않는 거장의 영화적 열정과 혼이 경외감마저 불러일으키는 영화이다. 어지간한 이들이라면 무릎을 꺾을 만한 상황에서도 파나히 감독은 쉽사리 성마른 분노와 좌절을 표출하지 않는다. 그라고 왜 분노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는 내면의 분노를 자신의 나라, 사람들을 향한 깊이를 측량하기 어려운 애정과 에너지로 승화시킨다. 사랑하는 자의 분노란 이런 것이라는 것. <택시>를 보면서 이란 당국이 제아무리 거장의 입에 재갈을 채우고 예술혼을 꺾으려 해도 그들은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한 경외감은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자객 섭은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무협영화에서 기대할 수 있는 장르적 쾌감을 모조리 제거해버린 이 정적이고 불친절한 무협영화에서 관객이 따라가야 하는 것은 활극의 동적인 쾌감이 아니라 주인공 섭은낭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내적 고뇌이다. 4:3 화면은 일찌감치 스펙터클에 대한 기대감을 접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조금씩 몸속에 쌓여가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만나게 된다. 단단하기 짝이 없는 거장의 영화적 고집에 나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젖어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앙: 단팥 인생 이야기>는 매우 부드럽고 달콤하며 쉬운 영화이다. 누군가는 이 영화가 리스트에 올랐다는 사실에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의 전작들에서부터 영화를 통해 외로움을 극복하고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감독의 필사적인 몸부림에 깊이 전이되어 왔던 관객으로서, 한층 경쾌해진 그녀의 이번 고백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파트리시오 구즈만 감독의 < 자개단추 Pearl Button >는 2010년 작품 < 빛을 향한 노스탤지어 Nostalgia for the Light >의 연장선에 놓여 있는 작품이다. <빛을 향한 노스탤지어>의 전반부를 보면서 구즈만 감독도 늙었구나, 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젊은 시절 쇠꼬챙이처럼 꼿꼿한 자세로 불의에 맞서고 유리조각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인간과 사회를 관찰하던 감독들이 나이가 들어 둥글둥글하고 원만해진 태도로 세상과의 화해를 설파할 때, 세상은 이런 영화들에 대해 종종 ‘노인의 지혜’ ‘현자의 깨달음’이라는 두루뭉술한 헌사를 바치곤 했다. <빛을 향한 노스탤지어>의 초반부에 카메라가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서 우주를 바라보고 천체를 관측할 때, 이 감독도 우주의 법칙 운운하며 역사와 인생의 포용을 이야기하려는구나, 라고 속단했다. 그러나 완전히 틀렸다. 그의 시선이 우주와 자연을 경유해 인간의 땅으로 돌아왔을 때, 극대에서 극소로, 우주의 역사와 땅의 역사를 연결하며 결국은 훨씬 깊고 넓어진 시야로 아물지 않은 인간과 역사의 고통에 대해 고민하는 자리로 돌아왔을 때,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영화의 힘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빛을 향한 노스탤지어>에서 우주를 향하던 시선은 <자개단추>에서는 생명의 기원인 물, 바다로 향한다. 칠레의 땅과 바다, 원시 부족의 삶과 물방울 속에 새겨진 역사의 흔적을 밟으며 우리는 다시 유구한 역사를 거쳐 현재로 돌아온다. 개인적으로 <빛을 향한 노스탤지어>에 비해 <자개단추>의 성취에 대해서는 약간의 아쉬움이 있지만, 멈추지 않는 거장의 거대한 조망의 노력과 시야의 확보, 영화적 성취에 경의를 표한다. 이번 리스트에 올린 유럽의 영화들은 상대적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는 가운데 지적인 발견의 즐거움까지 주는 영화들이다. 45년이라는 세월 동안 쌓아온 노부부의 신뢰와 애정이 우연한 계기에 의해 순식간에 무너져가는 과정을 잔인하도록 섬세하고 냉랭하게 보여주는 심리극 < 45년 후 45 Years >를 제외하면 < 코베인: 몽타주 오브 헥 Cobain: Montage of Heck > < 척 노리스 vs 공산주의 > < 수메 - 혁명의 사운드 Sume - The Sound of a Revolution > < 아페림! >은 매끄러운 영화적 만듦새 속에서 어떤 형태로든 미지의 영역에 접근해 다양한 층위에 대한 발견의 즐거움을 주는 영화들이었다. <수메, 혁명의 사운드>는 그린란드에 대해서라면 기껏해야 < 북극의 나누크 >가 알려준 것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나의 일천함을 비웃으며, 그린란드 최초의 록밴드를 통해 그들의 역사와 현재, 음악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알려주었고, <척 노리스 vs 공산주의>와 <아페림!> < 의미의 창조 The Creation of Meaning > 역시 유사한 체험을 주었다. 상대적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영화들이기도 해서 기회가 된다면 일견을 추천하고 싶은 작품들이다. 이 글에서는 2015년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각본상) 수상작인 라드 주드 감독의 <아페림!>에 대해 소개하도록 하겠다. 2. < 아페림! >은 루마니아 지방 귀족의 아내와 정사를 벌이고 도망간 집시 노예를 잡아오라는 영주의 명령을 받고 노예를 찾아 나선 순사 코스탄틴과 그의 아들 이오니타의 여정을 다룬 로드무비이자 루마니아 판 수정주의 웨스턴이다. 영화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는 집시 노예제도는 14세기에 시작되어 19세기 중엽 폐지된 제도라 하는데, 공산당 집권 시기에 이 제도에 관한 기록은 루마니아의 공식 역사에서 삭제된다. 수백 년 지속된 인종차별제도의 유산이 현재에도 루마니아 사회에 뿌리 깊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중요한 사건이 공식 역사에서 사라짐으로써 현대 루마니아인들은 대안적인 역사 연구나 아카이브 등의 제한된 정보를 통해서만 근근이 사라진 과거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감독은 시끌벅적한 하이브리드 장르의 외피를 빌어 사라진 과거의 이미지를 희미하게나마 복원하고자 한다. 엔딩 자막에 나와 있듯이 이 영화의 몇몇 내레이션과 대사는 역사적 기록에 기반하고 있다. 사라진 역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감독 자신이 19세기와 친숙해질 필요가 있었는데, 이를 위해 감독은 영화 내내 수없이 인용되는 민간전승 문화와 루마니아, 외국 작가들의 문학을 선택한다. 언어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의 멘탈리티의 관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는 최대한 그 시대의 언어에 가깝게 다가가 익숙해지고자 했고 그 결과를 영화 속에 녹여낸다. 그러나 감독은 과거를 재현하는 어떠한 시도도 궁극적으로 자신의 주관적인 관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영화를 35mm 흑백 와이드로 촬영한 이유에 대해 그는 “이 영화가 역사에 대한 주관적이고 인공적인 재연물(re-enactment)”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보여주지만 그가 재연(re-enactment)한 역사 역시 그의 역사적 관점일 뿐이라는 것이다. 순사 코스탄틴은 감독의 비전을 대행하는 페르소나이자 관찰자이다. 1835년 루마니아 남부 지역 왈라키아를 출발해서 중부 유럽 카르파티아 산맥 등 루마니아의 수려한 자연을 통과하면서 코스탄틴 부자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인종차별주의, 노예제, 계급차별, 여성의 열악한 지위 등 당대 루마니아의 여러 문제들과 조우한다. 코스탄틴은 구시대와 근대 사회의 문지방에 위치한 인물이다. 한편으로 그는 스스로 구시대의 편견을 여과 없이 드러내면서 자신 역시 한 발을 구시대에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뱉어내는 말들은 그 시대 사람들이 사용하는 공격적인 슬랭들이다. 이러한 언어를 통해 그는 자신의 인종차별주의적 편견을 드러낸다. 한편 그는 지구가 둥글다고 믿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낡은 지식을 비웃고, ‘법의 준수’를 강조하며 잡혀 온 노예에 대해 잘못한 만큼만 처벌해달라고 영주에게 부탁할 만큼 근대적인 사고를 하는 인물이다. 패트릭 갬블러는 이러한 코스탄틴 캐릭터에 대해 “니콜라이 차우세스쿠와 돈키호테 사이”의 인물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이렇듯 코스탄틴 부자와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영화는 루마니아에 만연한 인종차별주의의 기원을 희극적이면서도 날카롭게 탐구해 나간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모든 민족, 인종을 하나씩 열거하면서 그들에 대한 편견을 쉼 없이 나열하는 신부의 모습일 것이다. 각 민족에 대한 그의 장광설은 집시에서 유대인까지 모든 민족과 종교를 총망라하는 백과사전적 편견의 보고라 할 만하다. 모든 인종이 다 모인 유럽의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상영했을 때의 분위기가 어땠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 결과적으로 코스탄틴 부자의 여행은 구시대의 가치에 대한 회의와 코스탄틴의 정체성의 위기를 야기한다. 코스탄틴은 몸의 절반을 구시대에 담가온 인물이지만 나름대로 자신의 삶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다. 죄 없는 노예를 풀어주자는 아들의 부탁에 영주에게 죽음 아닌 다른 적절한 처벌을 부탁하겠다고 약속하지만, 그 약속이 무색하게도 귀족의 복수는 경악스러울 만큼 살벌하고 잔혹하기 짝이 없다. 그의 폭정은 노예뿐 아니라 마을의 주민들, 심지어 자신의 아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잔인한 처벌 후에 영주의 성을 나서는 코스탄틴의 풀 죽은 모습은 어딘가 측은하다. 변명이라도 하듯이 그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힘내. 신은 벌레 하나도 돌보시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아. 우리는 원하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대로 사는 거야.” 그것은 변명 같기도 하고 체념 같기도 하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선인장이 흔들리는 루마니아의 광활하고 텅 빈 평원으로 들어왔던 처음 모습처럼, 이제 두 사람은 임무를 마치고 공동체를 떠나는 황야의 사나이처럼 석양을 향해 사라져 간다. 영웅의 소명을 마치고 퇴장하는 웨스턴의 주인공들처럼 그들 역시 무대를 떠나지만 무대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영화의 제목인 ‘아페림’은 ‘브라보’라는 뜻의 루마니아어이다. 코스탄틴이 노예를 잡아왔을 때 영주는 ‘아페림!’이라고 외친다. 코스탄틴 부자의 여행은 구체제의 질서가 얼마나 완고하게 지속되는지, 진보와 변화는 얼마나 느리게 진행되는지 보여주었다. ‘아페림’이라는 감탄사는 과거를 향한 아이러니한 수사일 뿐 아니라 그 과거의 영향 아래 있는 현재 루마니아 사회에 대한 역설적 논평이기도 할 것이다. 희극과 비극을 오가는 이 영화가 미래를 향해 어느 정도 문을 열어놓았는지, 코스탄틴 부자는 어디를 향해 떠나갔는지는 관객이 직접 판단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