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인의 협객
- 감독
- 정창화
- 제작년도
- 1970
- 출연
- 능운, 하범, 남석훈, 윤일봉, 홍성중, 진봉진, 적낙, 장경파, 숙용, 진찬강, 이려려, 소화, 당천희, 유룡, 손람, 방면, 첨성, 고명, 홍금보, 침로, 임정영
좋아하는 영화감독의 명단이 궁금합니다. 이건 영화감독을 만났을 때 꺼내 들기 가장 어려운 질문 중의 하나이다. 이 질문 속에는 취향의 지평을 지나쳐가는 질문 안의 질문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보, 지식, 체험, 감흥, (미적인, 혹은 정치적인, 때로 은밀하게 사적인) 판단, 무엇보다도 수용의 태도. 영화비평가들은 이런 질문을 받아들면 대부분 약간 젠체하면서 새침하고 교활하게 균형을 맞춰가면서 개인적인 척하는 공식적인 대답을 한다. 그런데 감독들은 이 질문 앞에서 이제까지의 자신의 작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그들의 영화를 잘 알고 있는 이들에게 종종 모순을 일으키거나 혹은 일시적인 행동처럼 보이거나 아니면 때로 심술궂어 보이는 것만 같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명단을 꺼내 들면서 개인적인 대답을 한다. 잉그마르 베르이만은 <007 포 유어 아이즈 온리>가 흥미롭다고 대답했다. 홍상수 는 <젊은 날의 링컨>, <이른 여름>, <저항>, <라딸랑뜨>, (등등과 함께) 열 편중의 하나로 뤼미에르 형제의 <항구를 떠나는 배>를 “떠올리는 순간이 좋다”고 대답했다. 봉준호 는 어떤 경우에도 <큐어>과 <조디악>을 빼놓는 법이 없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1931년 판 오리지널 <프랑켄슈타인>을 포함시켰다. 가이 매딘은 (고레-에다의) <애프터 라이프>를 포함시켰다. 몬테 헬만은 열 편 중의 하나로 장 이모우의 <연인>을 뽑아 들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코스타-가브라스의 <Z>를 넣었다. 이런 명단은 끝이 없다. 물론 여기서 명단의 우열은 아무 의미가 없다. 임권택 감독님에게 망설이던 끝에 같은 질문을 했다. “나는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법이 없어요. 내 영화도 만들고 나면 다시 보지 않아요. 그런데 단 한 편, 펠리니의 <길>은 두 번을 보았어요. 그게 그렇게 쓸쓸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마음에 남는 거요” 그러면 어떤 영화감독들을 좋아하십니까? “그때는 영화를 볼 데가 극장밖에 없었으니까, 텔레비전이 나왔을 때는 내가 영화 찍으러 다니느라고 정신이 없을 때였으니까, 존 포드, 빌리 와일더, 윌리엄 와일러, 그렇게 세 명이지, 제일 싫어했던 이름은 힛치콕이지, 그 칼부림 하는 영화를 한 번 보고는 다시는 볼 생각을 안 했으니까” 임권택 감독님은 <사이코>를 말하면서 (비유법이 아니라 정말로) 몸서리를 쳤다. 우선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임권택 세대는 <카비리아의 밤>이 마지막 펠리니 영화였다. 임권택은 <달콤한 생활>부터 펠리니 영화를 보지 못했다. 만일 1963년에 임권택이 <8 1/2>을 보았다면 그 ‘이후’의 영화에서 어떤 영향을 볼 수 있었을까, 라고 상상해보고 싶어진다. (임권택 감독님은 아직도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 이 상상은 단순하게 귀결되지 않을 것이다. 영향이라는 불안.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응답이다. 하지만 동시에 거기에는 투쟁의 긍정과 긍정의 투쟁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공식적인 영화사가 개인적인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사이에는 그 무대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거부와 저항이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 하나의 설명을 덧붙이고 싶다. 충무로의 첫 번째 세대들, 유현목 , 김기영 , 신상옥 , 김수용 은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에 완전히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임권택은 < 자전거 도둑 >이나 < 무방비도시 >에 거의 영향 받지 않았다. 내가 이 영화 제목들을 꺼내 들었을 때 들을 수 있었던 유일한 대답은 무미건조하게 “좋은 영화들이지요”라고 말한 게 전부이다. 임권택을 리얼리즘 영화의 카테고리에 넣고 싶어 하는 비평들은 이 취향의 명단 앞에서 머뭇거릴 것이다. . <아일랜드의 연풍>(존 포드, 1952) 이 명단을 염두에 두고 읽어나가기 바란다. 임권택의 영화를 차례로 보다가 세 편의 영화 앞에서 잠시 멈추게 될 것이다. 하나는 < 남자는 안팔려 >이고 다른 하나는 <바람같은 사나이>이고, 마지막 하나는 < 30년만의 대결 >이다. 아쉽지만 <남자는 안팔려>는 프린트가 유실되어 우리가 볼 수 없다. 나는 이미 < 바람 같은 사나이 >가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를 각색한) 존 스타제스의 <황야의 7형제>를 각색한 영화라는 것을 이미 설명했다. 임권택은 수없이 많은 원작소설을 각색했고, 텔레비전 드라마를 각색했고, 라디오 드라마를 각색했다. 그리고 세 편의 할리우드 영화를 각색했다. <남자는 안팔려>는 빌리 와일더의 <뜨거운 것이 좋아>를 변주한 리메이크 영화이다. 그리고 <30년만의 대결>은 존 포드의 < 아일랜드의 연풍 >(지금은 <말 없는 사나이>라는 원제(The Quite Man)로 잘 알려졌지만 여기서는 국내 개봉제목으로 쓰겠다)의 리메이크이다. 먼저 첫인상을 고백해야겠다. <30년만의 대결>을 처음 보기 전까지 누구도 내게 이 영화가 <아일랜드의 연풍>의 리메이크라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는 무방비 상태였다. 어느 장면부터 처음 보는 이 영화를 어디선가 이미 보았다는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최무룡과 박노식이 김지미를 사이에 두고 동네에서 주먹싸움을 시작할 때 누구라도 <아일랜드의 연풍>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임권택 감독님에게 혹시 이 영화가 존 포드의 <아일랜드의 연풍>을 다시 한 번, 이라고 말을 꺼내자마자 그거를 리메이크 한 거요, 라고 바로 말을 이어받으면서 그 영화를 정말 재미있게 보았거든, 이라고 덧붙였다. “내가 <제17 포로수용소>와 그 영화 두 편이 제일 재미있게 본 영화요” 1955년 11월 15일에 단성사에서 개봉한 이 영화를 임권택은 (아마도) 연출부를 하면서 보았(을 것이)다. 그런 다음 <30년만의 대결>을 제작할 때 누구도 <아일랜드의 연풍>을 다시 꺼내 들어 참고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아직 비디오가 발명되지 않았으며, 한국에는 시네마테크가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기억에 의존해서 작업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난처하게도 자막에 각본 송장배, 각색 박남주라고 되어있다. 누군가 기억을 더듬으며 영화를 제작하기 위한 현장용 각본을 썼겠지만, 각색은 이 과정에서 무슨 역할을 한 것일까. 왜 어디에도 원작을 밝히지 않은 것일까. 그때 한국은 국제 저작권협회에 가입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원하면 비틀즈의 곡도 사운드트랙으로 사용하였으며, 충무로 녹음실에서는 음반 라이브러리에 보관된 음반을 자유롭게 꺼내 들어 자신의 영화에 사용하곤 했다. 하지만 저작권 여부의 진실은 이 글의 목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말의 흥미로운 방점. 17년 전에 본 영화의 기억, 그리고 감흥. 무엇이 남고 무엇이 지워졌을까. 그런 다음 기억의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었던 <아일랜드의 연풍>은 어떤 영화였을까. 나는 여기서 존 포드의 <아일랜드의 연풍>에 대해서 쓰지는 않을 생각이다. ( 이 영화에 대해서는 이미 허문영이 ‘존 포드 이야기’ 연재에서 좋은 글을 썼다 .) 대신 임권택은 존 포드 영화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라는 오랜 질문에 질문해볼 생각이다. 나는 대답의 자리에 질문을 잘못 쓴 것이 아니라 두 번 질문이라고 썼다. 여기서 첫 번째 질문이 임권택의 ‘자리에서’ 해보는 것이라면 두 번째 질문은 임권택의 ‘자리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이다. 우선 1971년이라는 상황을 설명해야 할 것 같다. 그 해에 임권택은 일곱 편의 영화를 찍었다. < 요검 >, <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 <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라 >, < 둘째어머니 >, < 명동 삼국지 >, < 원한의 두 꼽추 >, 그리고 <30년만의 대결>. 이 영화들을 다른 방식으로 소개할 수도 있다. 무국적 무협영화 두 편, ‘다찌마와리’ 액션영화 네 편, 멜로드라마 한 편, 그리고 로맨틱 코미디 한 편. 그저 뒤죽박죽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명단. 여기서는 어떤 일관성도 발견할 수 없다. 그 말은 한 감독으로서 말 그대로 주문을 받아서 찍어내듯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임권택의 고통스러운 시간. 그는 한 편의 영화를 만들고 다음 영화를 준비할 틈도 없이 그렇게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쩌면 자신이 가장 재미있게 보았다고 기억하는 영화를 떠올리면서 존경하는 존 포드의 영화를 만들었던 시간, 1971년이라는 참혹했던 그 해에 <30년만의 대결>을 만들었던 자리는 임권택의 잠시나마 즐거웠던 시간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라고 가정해본다. 그리고 그것이 이 시기의 이상할 정도로 비참하고, 우울하고, 참담하고, 어둡고, 대부분 비극으로 끝나버린 영화들 속에서 드물게도 명랑하고 쾌활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계기였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사실을 환기시키겠다. 임권택의 영화에서 이따금 유머를 간직한 장면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시종일관 로맨틱하고, 밝고, 명랑한 영화를 찾는 것은 거의 드문 일이다. 대규와 판수 옥희 먼저 <아일랜드의 연풍>과 <30년만의 대결>의 서사에서 인물들의 배치에 관한 차이를 설명하겠다. <아일랜드의 연풍>은 션 쏘튼이 기차를 타고 미국을 떠나 고향인 아일랜드의 (가상의 마을) 이니스프리에 정착하기 위해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중에 밝혀지기는 하지만 션 쏘튼은 권투시합에서 그만 상대방이 죽는 결과에 다시는 주먹을 사용하지 않기로 맹세한다. 운명처럼 션 쏘튼 이웃에 사는 메리(모린 오하라)에게 반하고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 그러나 메리의 오빠 레드 윌(빅터 맥라글렌)은 지참금을 내놓지 않는다. 션 쏘튼은 그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아일랜드 여자인 메리에게는 모든 것이 달린 자존심의 문제이다. 션 쏘튼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오빠 레드 윌에게 대결을 신청하고 온 마을로 이어지는 주먹 싸움의 장관이 펼쳐진다, 라고 썼지만 사실 5분 동안 이어지는 이 클라이맥스에서 정작 션 쏘튼과 오빠 레드 윌의 싸움 쇼트는 얼마 되지 않는다. 존 포드는 이 시퀀스를 구경꾼들과 이웃 사람들, 동네 주민들이 집단으로 모였다가 흩어지는 동선으로 연결하면서 역동적으로 만든다. 물론 디테일의 아름다움은 다른 데 있고, 존 포드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션 쏘튼과 메리 사이의 보기 드물게 성숙한 사랑의 감정선이다. 게다가 거의 천국처럼 색채 설계된 이니스프리의 테크니컬러는 <아일랜드의 연풍>을 존 포드의 가장 아름다운 영화중의 하나로 끌어올린다. <30년만의 대결>은 대규(최무룡)과 판수(박노식)이 박포장기를 두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표현을 빌리면) “죽마고우”지만 30년 전에 한 여자(김지미)를 동시에 사랑했고,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고향을 떠나갔다. 그런 옥희가 남편을 여의고 딸 지향과 함께 고향에 돌아온다. 대규는 상처를 하고 아들 웅(김희라)와 함께 목장을 하고 지내고, 판 수는 아내와 아들 민(윤양하)과 함께 양계장을 하며 지낸다. 이 마을의 두 명의 부자. 옥희가 돌아오자 두 사람은 다시 대결을 시작한다. 문제는 고향에서 농지 제방이 무너지면서 시작한다. 비만 오면 매번 물난리를 겪는 고향에 옥희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저수지를 만들 결심을 하지만 그건 큰돈이 드는 개간사업이다. 여차저차 한 우여곡절 끝에 옥희는 한 달 후까지 돈을 갚지 못하면 판수와 결혼하겠다는 약속어음을 쓰고 돈을 빌린다. 하지만 판수는 속임수를 쓰고 옥희는 결혼을 해야 하는 처지에 빠지자 마음에 끌리는 대규와 도망칠 생각을 한다. 떠나는 그들 앞에 판수의 아들이 나타나 그래도 이건 아버지에게 이야기는 해야 하지 않냐고 가로막는다. 대규는 교회에서 결혼식을 기다리는 판수 앞에 나타나 옥희를 앞에 두고 주먹 대결을 벌인다. 밤이 올 때까지 다투던 두 사람은 대폿집에서 막걸리를 앞에 두고 마지막 주먹을 주고받는다. 그런 다음 판수는 대규를 업고 옥희의 별장에 가서 내려놓은 다음 “나란 놈은 말야, 이제 마누라의 자장가가 그리워졌다구”라고 껄껄 웃으며 그들 곁을 떠난다. “나란 놈은 말야, 이제 마누라의 자장가가 그리워졌다구” <아일랜드의 연풍>은 션 쏘튼을 주인공으로 하여 메리와의 로맨스를 통해서 고향이라는 상상적 공동체를 배워나가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물론 여기서 공동체는 다소 복잡한 이데올로기적 봉쇄 속에 1952년 매카시 냉전 체제하의 미국에 대한 ‘어떤’ 진실을 불편하게 포함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존 웨인이라는 스타 기호는 하나의 부조리기 되어간다. (잘 알려진 대로 보수주의자이지만 극우파를 혐오했던) 존 포드는 그걸 충분히 의식하고 있으며, 또한 그걸 어떻게 다뤄야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나는 1955년 정창화의 연출부를 하던 임권택이 미국의 정치적 상황과 할리우드의 복잡한 네트워크와 그 안에 놓여진 해석들 사이의 상호경쟁적인 모순들을 들여다보면서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라고 <아일랜드의 연풍>을 이해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렵다. 그때는 한국전쟁이 휴전한 지 채 삼년이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조셉 매카시의 ‘빨갱이 사냥’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한국사회에서 금지된 정치적 용어였다. 임권택이 <아일랜드의 연풍>의 이야기에 이끌린 행복은 특권화된 장소로서의 고향일 것이다. 아마, 아마 그럴 것이다. 그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고향 이야기를 반복해서 했다. 그때 그의 집은 지금 살고 있는 세계 바깥에 놓여있었다. 갈 수 없는 집. 그 집이 놓여있는 고향이라는 장소. 그때 임권택이 가정하는 그 고향은 아직 한국전쟁이 도착하지 않은 곳이다. 거기서 임권택이 유지하려는 역사적 거리는 아직 미학적으로 형식화되지 않았고 여전히 이데올로기적으로 긴장을 잃지 않은 상태로 불안하게 머물러 있었다. 션 쏘튼은 자기가 돌아가고 싶을 때 고향에 돌아왔고 그런 다음 거기서 사랑이라는 시련을 견디면서 받아들여진다. 임권택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존 포드는 션 쏘튼과 함께 미국을 등지고 고향에 돌아가지만 임권택은 옥희라는 여자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 시작한다. 우리는 옥희가 왜 대규와 판수 두 남자를 외면하고 다른 남자를 선택한 다음 고향을 떠나갔는지 끝까지 알지 못한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어디에서도 옥희가 자신과 사별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볼 수 없다. 심지어 옥희의 딸조차 아버지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옥희는 고향에 돌아와서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을 단 한 순간도 더듬지 않는다. 차라리 잠시 고향에 여행 온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아니, 그렇다 할지라도 옥희는 고향의 목가적 풍경을 조금도 즐기지 않는다. 옥희를 동네 사람들은 설씨네 과수원집 딸이라고 부른다. 옥희는 단 한 번도 과수원을 방문하지 않는다. 정말 고향에 과수원이 있기는 한 것일까. <30년만의 대결>을 보면서 내가 가장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대규와 달아나기로 결심한 장면을 제외하면) 옥희가 외부에 전혀 외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선의를 가장하여 다시 떠날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저수지라는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공사. 저수지는 혹시 매거핀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이 영화는 이상할정도로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여기서 약간 용기를 내서 인용하고 싶다. “이 방법을 적용하기 위해 첫 걸음을 내디디면 꿈 전체가 아니라 꿈 내용의 일부에만 주의를 기울여도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환자에게 꿈과 관련하여 무슨 생각이 떠오르느냐고 물어보면 대개 정신적으로 아무 것도 포착하지 못한다. 그러나 꿈을 여러 부분으로 분할시켜 제시하면 환자는 각 꿈-부분의 배후 사고라고 부를 수 있는 일련의 생각들을 떠올린다. (중략) 내 방법은 전체적 해석이 아니라 부분적 해석이다.” (프로이트, <꿈의 해석>, 김인순 옮김) 물론 임권택을 환자라고 가정하는 것이 아니다. 사태를 추상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나는 판수의 마지막 대사에서 어떤 입구를 찾은 것만 같았다. “...(중략) 자장가가 그리워졌다구” 자장가. 잠들기 위해서 부르는 노래. 요점은 <30년만의 대결>을 일종의 백일몽처럼 가정한 다음 그 안으로 들어갈 때 전체와 만나는 대신 부분적으로 분할시켜 이 이상할 정도로 즐거운 영화 내부에서 난처하게 모순을 불러일으키는 대목들만을 향해서 질문한다면 우리는 질문 안의 질문과 대면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무대를 먼저 돌아보자. 이 마을에는 두 명의 부자가 있다. 한 명은 판수이고, 다른 한 명은 대규이다. 한 명은 양계장을 하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목장을 하고 있다. 영화는 판수의 집과 대규의 집, 양계장과 목장을 오간다. 이 마을 사람들의 가장 큰 걱정은 우기가 다가오고 장마가 지면 제방이 무너져 농사를 망치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에는 단 한 장면도 논밭을 보여준 적이 없다. 더 이상한 것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것처럼 마을 사람들 중에서 양계장이나 목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볼 수 없다. 양계장이나 목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과 한 눈에 구별되는 복장을 하고 있다. 그래서 분주하게 양계장과 목장을 오가는 마을 사람들은 마치 서로 다른 고장에 사는 것처럼 겹치지 않는다. 양계장과 목장, 그리고 농사. 물론 그들은 하나의 공간에서 공존할 수 있다. 하지만 공존의 양식을 우리는 끝내 보지 못한다. <아일랜드의 연풍>에서의 이니스프리가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이 매일 매일의 일상의 축제처럼 함께 어우러지는 천국이라면 <30년만의 대결>의 고향은 (끝내 지명이 나오지 않는다) 둘로 분리된 생산양식이 공존하는 가운데 현재의 토대가 보이지 않는 (니코 풀란챠스의 표현을 빌려) 비-장소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일종의 신기루. 임권택의 고향에는 무언가 어긋난 질서가 있다. 옥희는 왜 돌아왔는가. 혹시 이 어긋난 질서를 교정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얼핏 보기에는 매거핀처럼 보이는 저수지가 사실은 가장 강력한 교정수단인 것은 아닐까. 이때 이 고향이 하나로 수렴되지 않고 양쪽으로 찢어져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판수와 대규, 양계장과 목장을 단순히 두 개의 힘이 대립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가 과거에로 되돌아가고 있다면 다른 하나는 미래를 약속하는 것처럼 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기기 때문이다. 판수는 영화 내내 한복을 입고 동네를 돌아다니고 (서울에서 온) 옥희를 만난다. 그의 집은 전통적인 한옥의 구조를 갖추었고 방안에는 오래된 자개장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그의 아내도 부부싸움을 하고 집을 나갈 때까지 내내 한복을 입고 있으며, 아들 민은 가까스로 농촌을 벗어난 것 같은 면바지와 셔츠를 입고 다닌다. (지금의 우리들이 볼 때에는 다소 기괴하게도 민의 의상은 그때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새마을 지도자처럼 보인다) 반면 대규는 마치 도시생활을 하다 돌아온 것처럼 청바지를 입고 때로는 선글라스도 쓰고 다닌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아무도 청바지를 입은 사람을 볼 수 없다. 청바지와 선글라스는 부의 상징이 아니다. 대규는 양옥의 양식으로 지어진 집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아들 웅은 가죽 바지와 재킷을 입고 오토바이를 몰고 다닌다. 오토바이는 이상할 정도로 이 농촌의 풍경과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시끄러운 오토바이 모터 소리는 등장할 때마다 목가적인 풍경의 고요함을 깨트리곤 한다. 대규가 옥희와 함께 고향에서 달아나기 위해 머플러를 하고 댄디한 감각의 재킷을 입고 나타난 모습은 판수에게서 상상하기 힘든 의상이다. 그 둘은 어느 쪽도 고향에 긍정적인 가치를 제시하지 못한다. 판수는 과도할 정도로 고리타분하고 회고적인 과거로 돌아서고 대규는 무언가 어색하고 종종 불협화음을 불러일으키는 미래가 지나치게 서둘러 도착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그 둘 사이에는 이상한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구두쇠라는 사실이다. 그건 단순히 자신의 재산에 대해서 과도하리만큼 집착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 둘은 ‘충분히’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여전히’ 빈곤하다고 여긴다. 충분히 부자인데도 여전히 빈곤한 것은 자신의 재산에 채워야 할 공백을 셈에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공백은 재산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구두쇠는 그 불가능성을 재산의 물신성으로 환원하기 시작한다. 억압과 부인 사이의 도착적 관계. 신경증적 불안과 현실적 불안이 페티시즘을 매개로 결합한다. 이때 옥희는 그 간극 사이에 끼어들어서 그 물신성을 무효로 만든다. 여기까지는 단순하다. 하지만, 하지만 당신은 이걸 도식적으로 읽으면 안 된다. 물론 이 설정이 지나치게 단순하게 보일 수 있지만 이 장면의 재료들이 반대로 우리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어렵지 않게 대립의 상황에로 데려갈 때 이 백일몽이 의도하는 바를 명백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옛 것과 새 것. 지나가고 있는 시간과 다가오는 시간. 그 간극을 연결 짓기 위해 옥희가 나타났다. 만일 옥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고향의 간극은 그냥 찢어져나갔을 지도 모른다. 여기서 이 두 개의 힘이 서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임권택인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대규와 판수가 장기를 두고 있고 마을 사람들이 그 주변에 몰려들었다. 판수는 자기가 이겼다고 장 받아라, 라고 외치지만 대규는 멍이야, 라고 하면서 비기는 장기를 만든다. 비김수를 쓰면 한 쪽이 판을 엎거나 포기를 하(거나 양보를 하)기 전에는 밤을 새워도 끝나지 않는 법이다. 장기판을 덮고 판수는 대규에게 그러면 팔씨름으로 승부를 내자고 한다. 이것도 요지부동 박빙의 승부로 이어진다. 이 균형을 깨는 건 누군가 달려와 서울 간 설씨 과수원네 딸이 돌아왔어요, 라는 외침이다. <30년만의 대결>은 정확하게 거기서 시작한다. 끝날 것 같지 않은 두 개의 힘의 긴장관계. 그 사이에 갑자기 끼어들어온 옥희. 나는 이걸 다소 아이러니하게 정식화시키고 싶다. 옥희는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안에 있었는데 바깥에서 나타난 것이다. 임권택은 여기에 완전히 매혹되었음에 틀림없다. 여기서 옥희는 아무 것도 상징하지 않는다. 그렇게 다가가면 <30년만의 대결>이 담고 있는 즐거운 기분을 끝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눈 감은 척 지나간 가장 이상한 설정을 건드릴 것이다. 질문 안의 질문. 대규와 판수를 비교하면서 한 쪽은 전통, 다른 한 쪽은 근대, 라는 식으로 도식을 세웠다. 그런데 우리의 가설을 전복시키기라도 하듯 서울에서 내려 온 옥희는 막 도착하자마자 방문한 대규와 판수를 한복을 입고 맞이한다. 마치 옥희가 고향에서 그들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다음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녀에게서 서울의 어떤 흔적도 볼 수 없다. 옥희는 줄곧 한복을 입고 생활한다. 심지어 자신의 생일잔치를 하는 자리에서도 촛불을 켠 케이크를 가져다놓고 서양의 생일 축하곡을 부르면서 한복을 입고 앉아있는 어색한 장면을 연출한다. (하지만 이 의상의 일관성이 계산된 연출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옥희는 저수지 공사를 위해서 과수원을 내놓고, 그런데 그걸 사려던 부동산 사업가가 내놓은 약속어음이 부도났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갑자기 도회적인 복장을 하고 문 앞에 나타난다. 그런 다음 옥희는 다시 한복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므로 이 장면을 예외로 하고...) 옥희가 한복을 벗어던지는 건 대규와 함께 고향을 떠나는 장면이 전부이다. 이건 무얼 말하는 것일까. 이 영화가 1971년의 영화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고 싶다. 나는 여기서 에드아루트 푹스를 떠올리고 있는 중이다. 풍속으로서의 역사. 사생활로서의 유물론. 일상생활의 사소한 디테일들 사이의 변증법. 옥희는 서울에서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그때 서울에서 가시적인 풍경 앞에 형상화된 여성성은 두 종류의 여자로 나뉘었다. 사회생활을 하는 여자들. 가정생활을 하는 여자들. 물론 실제의 한국 사회는 그때 청계천과 구로공단에서 ‘공순이’들을 착취하기 시작했고, 유한 부르주아 계급의 상징이었던 ‘여대생’의 이미지를 생산하고 있었고, 정반대의 자리에서 밤의 길거리에서 타락한 요부의 에로틱한 이미지를 도시화로 옮겨놓은 성매매 산업이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풍경 저 너머에 매우 제한적이거나 그림자 아래 숨겨져 있었다. 나는 지금 1971년의 풍경을 말하는 중이다. 이때 사회생활을 하는 여자들은 (경험해보지도 않은) 1950년대 미국 산업사회의 ‘오피스 레이디’의 복장을 마치 자신들의 교복처럼 입었다. 근대의 레디메이드. 혹은 근대화 식민지로서의 지체된 데자뷔.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한국 사회에서는 OL(Office Lady)이라고 불렀다. 반대로 직장생활을 하지 않는 여성들은 자신이 직장에서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대신 설명하기라도 하듯 하나의 표시로서 전통적인 한복을 입었다. 나는 근대의 물결, 산업의 세계, 자본의 현장에 있지 않답니다, 라는 걸 의미하는 사회적인 모드의 양식. 복식의 수사학은 (바르뜨가 잘 설명한 것처럼) 은유가 빈곤한 개인적인 시학이자 (부르디외가 설명한 것처럼) 구별의 사회학이기도 하다. 1971년의 여성들은 아직 미혼이었을 때는 한복을 명절에만 입다가 결혼을 하면 마치 그것이 하나의 의무적인 의상인 것처럼 일상에서 입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도시에서 생활하는 여성이 한복을 입은 것은 이중적인 기호가 되었다. 하나는 나는 직장을 다니지 않습니다, 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남편이 있습니다, 라는 이중의 기호. 그때 한복에는 유교적인 가치의 맥락 속에서 전통적인 의미가 더해졌다. 나는 집에서 가정을 지키는 정숙한 아내입니다, 라는 하나의 모델에 자기를 기입하기. 옥희가 고향에 돌아와 대규와 판수 앞에서 전시하는 복장은 정확하게 그 문장이다. 나는 이 문장에 하나의 의미를 더하고 싶다. 옥희의 한복에서 결핍된 것은 무엇인가. 그건 물론 남편의 자리이다. (...그러므로) 옥희가 고향에 돌아와 전시하는 복장은 나는 정숙한 아내가 되고 싶습니다, 라고도 읽힐 수 있다. 누구에게? 대규와 판수에게. 돌아온 옥희에게 대규와 판수는 단 한 마디도 옥희의 전 남편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는다. 옥희는 단 한 마디도 전 남편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마치 그것이 금지의 단어이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에는 어떤 애도도 없다. 서울을 괄호 친 채 추억과 향수만이 이들을 감싼다. 잃어버린 시간, 되찾은 시간. 대규와 웅 부자 판수와 민 부자 옥희와 지향 모녀 세 번째 이상한 설정. 대규와 판수, 그리고 옥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각자 한 명의 자식이 있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를 물려받았다기보다는 마치 삶 자체를 ‘카피’한 것처럼 보인다. 아들은 아버지와 대결할 의사가 조금도 없다. 그건 대규의 아들 웅이나 판수의 아들 민 두 사람 모두 동일하다. (아버지가 바람이 나자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난 다음 민이 잠시 판수에게 저항하지만 그건 잠깐 동안 불평을 늘어놓는 수준에 불과하다) 그들은 마치 얌전하게 지내기만 하면 아버지가 재산을 물려주기로 약속한 것처럼 순종적일 뿐만 아니라 종종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설명적으로 반복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무엇보다 서사의 전반부에서 우스꽝스러운 부조리를 연출하는 것은 민과 웅이 옥희 딸 지향을 보자마자 경쟁적으로 구애를 할 때이다. 그들은 아버지 세대의 실패에서 어떤 교훈도 얻지 못한 것처럼 다시 한번 반복한다. 이때 민과 웅은 그들의 아버지들이 겪지 못한 똑같은 딜레마에 동시에 빠진다. 그들은 한 눈에 자신의 아버지 대규와 판수가 옥희와 재혼을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다. 그렇게 되면 새 어머니 옥희를 모시는 순간 지향을 상대방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들을 못 견디게 만든다. 아버지의 이득은 자신의 상실로 이어지기 때문에 차라리 아버지의 상실을 기대하면서 상대방의 아버지의 이득을 기대하게 된다. 말하자면 두 명의 아들은 두 명의 아버지의 이해관계와 동일한 상호 모순의 계산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아일랜드의 연풍>에는 없는 구도이다. 물론 이 문제는 심각하게 진행된다기보다 서사 전체에서 가벼운 기분전환에 가깝다. 갈등은 간단하게 해결된다. 지향은 그녀의 어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뉴욕에 있는 애인이 갈등의 과정에서 적당한 순간에 나타나 민과 웅의 구애를 무효로 만든다. 지향은 약간의 미련도 없이 그들을 뒤로 하고 떠난다. 그런 다음 지향은 애인과 함께 영화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그런데 잠시만 멈춰보자. 지향은 분명히 자신의 어머니가 저수지 공사를 위해 과수원을 내놓았고 그 과정에서 부도가 난 (거짓) 약속어음 때문에 곤궁에 처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녀는 어머니 곁을 미련 없이 떠난다. 단순한 갈등 속에 포함된 이해하기 힘든 서사 내부의 인과관계 사이의 불연속성들. 하지만 갈등이 단순하다고 해서 그것이 포함하는 의미마저 단순한 것은 아니다. 나는 먼저 갈등을 건드리고 난 다음 지향의 이상한 선택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등장할 때 갈등은 이미 예고된 것이다. 이때 갈등은 양쪽 방향으로 향한다. 하나는 아들의 자리에 무언가를 물려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버지의 자리에서 하나의 시간이 끝나고 하나의 사건이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30년만의 대결>에서는 기이하게도 어떤 아들도 아버지와 대결하지 않는다. 또한 어떤 아버지도 아들을 위한 자리를 남겨놓지 않는다. 이건 무얼 말하는 것일까. <30년만의 대결>에는 시간이 없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임권택은 시간의 진공상태에 들어온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 임권택에게 가장 즐거운 것은 고향에 돌아왔지만 거기서 어떤 시간도 경험하지 않는 것이다. 백일몽적인 환상. 시간 없는 장소. 과거에 머물러 있는 판수와 그를 둘러싼 미장센들. 아직 고향에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삶을 살고 있는 것만 같은 대규. 대규와 판수의 공존. 그 둘 사이의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균형의 긴장상태. 임권택이 여기서 즐기는 것은 고향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고립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30년만의 대결> 속에서의 고향은 고색창연하면서도 (마을사람들의 초가지붕으로 둘러싸인 동네) 이상하게 모던하고 (젖소들이 유유히 노니는 유럽풍의 목장), 종종 퇴행적이면서도 (단 한 대의 버스도 다니지 않는 외진 동네) 때로 급진적이다. (웅은 1960년대 도쿄의 시부야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모터사이클족(族)들과 어울린다) 이때 지향이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나는 이미 웅과 민이 그들의 아버지 대규와 판수의 카피라는 것을 설명했다. 웅과 민은 왜 동시에 지향에게 매혹된 것일까. 고향의 수상한 점. 지향(과 옥희 집에서 일하는 젊은 가정부)를 제외하고 이곳에서는 단 한 명도 젊은 여자를 볼 수 없다. 좀 우스꽝스러운 추론. 그러니 웅과 민이 어떤 여자와도 데이트를 하지 못하면서 지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웅과 민은 어느 쪽도 자신의 고향 애인을 외면하고 지향에게 이끌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외면하는 것은 아내와 이혼하기 위해 애쓰는 판수이다. (물론 대규는 이미 상처(喪妻)했기 때문에 구태여 그런 수고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하지만 나는 매혹의 요점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향은 여기서 조금도 매력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눈에 웅과 민을 사로잡은 힘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건 지향 자신도 자기가 그걸 갖고 있다고 알지 못하는 그 어떤 힘, 그런데 웅과 민에게만 의미가 있는 그 어떤 것이라고 가정해볼 수 없을까. 혹시 웅과 민이 지향에게 끌리는 것은 그녀가 서울에서 왔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한 번 더 환기하는 1971년의 상황, 서울과 ‘시골’의 격차는 단지 지리적인 것 이상으로 근대의 지체된 시간적 간극의 물화이기도 했다. 나는 구태여 시골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곳은 지방 도시가 아니다. 하루 종일 기다려도 버스 한 대 볼 수 없는 마을. 대규는 옥희와 이 마을에서 도망치려할 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버스를 이용하는 대신 언덕을 걸어서 읍내까지 갈 생각이었다. 360도로 카메라가 둘러보아도(round_panning) 그저 산과 논밭과 언덕과 가로수가 소실점으로 수렴되는 길만이 보이는 동네. 여기에 갑자기 ‘출현한’ 지향은 웅과 민에게 단지 서울에서 온 것이 아니라 서울이라는 기호 그 자체일 것이다. 그저 풍문으로 전하는 서울. 그때 웅과 민은 지향에게 서울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다가간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지향은 세 개의 가능성을 품고있는 매혹의 근거였던 것은 아닐까. 어떤 세 개의 가능성? 아버지를 떠날 수 있는 가능성. 집을 떠날 수 있는 가능성. 고향을 떠날 수 있는 가능성. <30년만의 대결>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이 모든 설정의 이면에는 고향을 떠날 수 있는 계기로 가득 넘쳐난다. <젊은 날의 링컨>(존 포드, 1939) 당황스러운 말이긴 하지만 <30년만의 대결>은 (미학적인 성취는 일단 제쳐둔 상태에서) <아일랜드의 연풍>에 가까이 가져다놓으면 놓을수록 마치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는 서사의 결들이 점점 더 완강해진다. 그래서 그 둘 사이에서 유사점이라곤 클라이맥스의 순간에 두 사내가 주먹으로 싸우면서 서로의 우정을 나누는 것이 전부가 아닐까, 라는 의문에 빠지게 된다. 나는 맨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고 싶다. 임권택은 존 포드에게서 무엇을 본 것일까. 임권택은 <아일랜드의 연풍>에서 무엇을 즐긴 것일까. 존 포드에 대한 많은 글들은 풍경에 대해서 언급한다. 나는 좀 생각이 다르다. 존 포드는 풍경이 아니라 장소의 영화를 찍고 있다. 그리고 그 장소를 성립시키기 위해 애를 쓰기 시작한다. 하나의 장소라는 문제. 그때 그 장소는 종종 무심하고 도무지 어찌해볼 수 없는 것처럼 거기 있지만 하여튼 거기서 등장인물들은 살아야하고, 견뎌야하고. 배워야하고, 기쁨을 찾아야 한다. 거기서 그들은 매번 결단을 내려야한다. 이 장소에 머물 것인가, 떠날 것인가. 거기서 영화가 시작하고 거기서 영화가 끝난다. 존 포드는 영화에서 드라마가 행위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심리적인 장면을 연출한 적이 없다. 존 포드는 행위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표현하긴 했지만 여기서 애쓰는 과정이 너무 자연스럽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 자체가 너무 훌륭하기 때문에 종종 기적처럼 보인다. 하나의 과정. 존 포드의 방법론은 거기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론이 무엇보다 아름답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 날의 링컨>은 성장의 장소를 찍고 있는 중이다. 정확하게 똑같은 의미에서 <아일랜드의 연풍>은 휴식의 장소로서의 이니스프리를 성립시키기 위해 애쓰는 영화이다. 여기서 임권택이 즐긴 것은 휴식이고, 그가 배운 것은 그것을 성립시켜나가는 과정일 것이다. 1971년의 임권택은 지친 몸을 이끌고 이 휴식의 장소에 와서 허송세월을 보내버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막 영화에 도착했던 자신의 젊은 날의 순간에 잠시 머문다. <아일랜드의 연풍>을 보면서 잠시나마 누렸던 꿈결 같은 귀향의 시간. 아마도 그때 전라남도 장성은 아일랜드의 이니스프리만큼이나 먼 곳이었을 것이다. 갈 수 없는 곳.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장성과 한국전쟁 이후의 장성은 얼마나 다른 곳이었을까. 소설 <태백산맥>에서 빨치산들 토벌의 무대에 되었던 곳 중의 하나. 그 피비린내 나는 역사. 물론 비평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30년만의 대결>을 말하면서 이 영화의 씬들 사이에 묻어나는 정감을 완전히 치워버리면 우리는 해야 할 말이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영화는 개념적인 영화가 아니다. 임권택은 열렬한 시네필이 아니다. 아직은 <30년만의 대결>이 성숙하지 않은 임권택을 보여주고 있지만 여기서 옥희가 돌아온 고향이 임권택이 그 자신의 고향에 이끌리기 시작하는 증후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나는 임권택의 영화(들)에서 은밀한 고향의 선을 탐색해왔다. 그는 아주 느리게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30년만의 대결>은 < 바람 같은 사나이 >와 < 아내들의 행진 > 사이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선을 이어주는 영화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단순하게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다른 한 편으로 물 쓰듯이 낭비해버렸지만 마음 한 구석에 존 포드라는 위대한 이름을 가슴에 품었던 젊은 날의 청춘에 대한 호소를 담은 그 자신만의 내밀한 예술의 세계가 있다. 영화라는 특수한 세계.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삶. 먹고 산다는 근거. 이 세계는 돈 밖에 모르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여튼 여기는 예술의 세계이다. 현실적인 세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품어야하는 이 세계의 진정성에 대한 의지. 정창화의 연출부를 하면서 품어보았을 어떤 꿈. 틀림없이 수백 번도, 수천 번도 더 가져보았을 꿈. 임권택은 몇 차례이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미국영화를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런 영화를 만들어야지, 이런 생각을 해보았죠, 그리고 그걸 버리면서 내 영화를 찾아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비로소 한 거지요” 아마 그것이 또 다른 하나의 선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하나의 선이 더 있을 것이다. 그건 자기 삶의 궁핍함에 대항하는 백일몽과도 같은 환상의 세계였을 것이다. 자신을 지키려는 노력. 몰래 숨어서라도 기쁨을 하여튼 유지하려는 안간힘. 프로이트의 가설. 그런데 마치 임권택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적 조건을 더 나쁜 방식으로 재생산하는 것만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만들었다. 1971년의 영화들의 목록. 임권택은 고통과 비애로 가득 찬 세계를 그 자리에로 되돌아오듯이 반복해서 다루었다. 그의 주인공들은 비참했고(< 황야의 독수리 >), 더럽혀졌고(<둘째 어머니>), 종종 신체절단의 시련을 이겨내야 했으며(< 애꾸눈 박 >,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원한의 두 꼽추>), 그런 다음 쫓겨나듯이 자기의 세계에서 퇴장해야만 했다.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라>) 오랫동안 그의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실존적인 현실때문이 아니라 타락한 로맨스가 요구하는 규칙에 따라 그렇게 행동했다. <30년만의 대결>은 마치 거기에 반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상승하는 로맨틱한 감정에 모든 힘을 집중시킨다. 세 개의 선. 고향의 선. 예술의 선. 로맨스의 선. <30년만의 대결>이 내게 흥미로운 것은 이 세 개의 선이 완전히 서로 뒤엉켜버렸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의 연풍>의 이니스프리 처음의 처음 질문으로 되돌아가보자. 존 포드의 이니스프리와 임권택의 고향 사이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이니스프리는 에덴동산이지만 임권택의 고향은 애당초 가져본 적이 없는 에덴이라는 것이다. <30년만의 대결>에서 옥희는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교회를 찾아가 목사를 자신의 멘토처럼 여기면서 모든 것을 의논하지만 정작 목사는 여기서 가장 무능하고 어떤 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심지어 팔려가듯이 옥희가 판수와 결혼을 해야 할 때조차 속수무책으로 주례를 진행해야하는 입장에 놓이는데도 그걸 그저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이때 이 영화는 세상에 어떤 믿음도, 기대도, 신념도, 희망도 없음을 부지불식간에 내비친다. 다소 괴이하게도 임권택의 고향은 한 치의 용서도 없이 자본주의적인 거래의 양식 아래 규칙이 집행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협상도 없다. 계약을 맺으면 그것은 지켜져야 한다. 그것이 고향의 법칙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그 안에서 로맨스가 버틴다. <아일랜드의 연풍>에서 지참금을 줄 수 없다고 버티는 약혼녀 메리의 오빠 레드 윌과 주먹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30년만의 대결>은 아주 멀리 떨어져있다. 결혼식을 피해 도망치던 옥희와 대규 앞에 판수의 아들 민이 나타나서 가로 막았을 때 대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을 교회로 되돌아간다. 그런 다음 판수에게 목장 문서를 내민다. 그러자 판수는 그 문서를 불태워버린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판수는 여기서 자신에게 돈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이 제스처는 정반대이다. 판수는 그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물론 ‘구두쇠’ 판수는 그 돈이 탐날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 돈을 받으면 판수는 대규와 싸움을 할 수 있는 명분을 잃게 될 것이다. 정확하게 그 돈은 거래이다. 그 돈을 거절함으로써 판수는 대규와 싸울 수 있는 권리를 사는 것이다. 이 로맨스는 거래로 시작해서 거래로 끝난다. 그러므로 대규는 이 권리를 산 판수에게 승리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생긴다. 우리는 이미 판수의 진정한 목표가 무엇인지 보았다. 집에서 ‘결혼 행진곡’을 틀어놓고 웨딩 마치 연습을 하는 판수를 보고 민이 녹음기를 집어던지면서 아버지는 집을 나간 어머니는 생각도 하지 않느냐, 라고 소리치고 나갈 때 혼자 남은 판수는 중얼거린다. “질 수가 없어, 질 수가 없어” 판수는 30년 동안 사랑한 옥희를 잊을 수가 없어, 포기할 수가 없어, 놓칠 수가 없어, 라고 말하지 않았다. 판수의 목표는 옥희와 결혼하는 것아 아니라 대규가 옥희와 결혼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규가 제공해야 할 대가는 옥희를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판수와의 이 싸움에서 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대규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규는 하루 종일 주먹 싸움 끝에 늦은 저녁 대폿집에서 막걸리 잔을 앞에 두고 판수의 주먹에 결국 나가떨어진다. 정말 대규는 쓰러진 것일까. 판수가 대규를 등에 업고 옥희에게 데려다 준 다음 호기롭게 떠나자 이게 그저 ‘한바탕 쇼’라는 듯이 슬쩍 눈을 뜨고 조용히 지켜보자는 신호를 장난스럽게 보낸다.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이것은 낮의 풍경이 아니라 어두컴컴하고 우울한 밤의 정경이다. 로맨스는 여기서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존 포드를 존경하던 그 예술의 세계도 거의 희미해져서 잘 분별되지 않는다. 그리고 남은 것은 이제 판수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대규와 옥희가 고향을 떠나가는 일만 남았다. 이 마지막 장면은 둘 중 양자선택 속에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지 거의 알기 힘들다. <30년만의 대결>은 결국 판수를 아내에게 되돌려 보내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제 발로 돌아온 옥희가 어쩔 수없이 제 발로 다시 고향을 떠나야 하는 이야기인가. 이 명랑한 영화의 이면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계획과 목적을 향해서 부산하게 계산한 다음 비밀스러이 상대방을 이용하고 전유하려는 싸움이 펼쳐진다. 그걸 로맨스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임권택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의 영화에서 로맨스는 항상 근대에 밀려나가면서 애처롭게 뒤돌아보는 것이다. 임권택은 그걸 어디선가 보기는 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더 이상 경험해볼 수 없는 것처럼 다룬다. 그러므로 나는 약간 대담하게 <30년만의 대결>을 정의 내려 보고 싶다. 이 영화는 조건의 영화이다. 어떤 조건? 자기 자신도 잘 알지 못했던 도약의 자리에로 가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는 영화. 그는 계속해서 질질 끌려가고 있는 것만 같은 이 과정을 어디서 끊을 수 있는 지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 < 잡초 >를 자기가 제작하고 연출하기 전의 일이다. 여기서는 그걸 영화 안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다. 미세한 변화들. 하지만 되풀이되는 실패들. 그러면서 어딘가에 기대서라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싶어 하는 장면들. 효과들은 잘 발휘되지 않고 있으며 무언가 의심만이 둘러싸고 어수선하게 활동하는 중이다. 하지만 나는 분명한 변화를 감지하였다. 무엇보다도 이제까지 자기 영화로부터 낯설어지기 시작하는 임권택.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풍경의 쇼트들, 그 낯섦. 그보다 더 분명한 변화의 조짐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계속)
몹시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나는 < 신궁 >을 보러 간 날을 기억한다. 날짜는 떠오르지 않지만 그날의 날씨는 어제처럼 생생하다. 바람이 몹시 차갑고 메마른 하늘. 알 수 없게 스산한 공기. 애매하게 늦은 겨울 저녁. 그해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는 서울 종로구 중앙정보부 안가(安家)에서 경호실장 차지철을 대동하고 술을 마시다가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다. 갑자기 모든 학교는 휴교를 했고 처음에는 모두들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우리들은 다방에서 만나 한가하게 음악도 듣고 줄곧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죽이다가 헤어졌다. 통행금지가 있었고 이듬해 정치의 봄이 올 때까지 서울은 조용했다. 갑자기 서둘러 시작된 겨울방학을 보내던 어느 날 신문에 실린 광고를 보고 미아 삼거리에 있던 대지극장에 가서 <신궁>을 보았다. 나는 그해 봄에 ‘林權澤’을 발견했다. < 족보 >를 본 다음부터 이 이름의 ‘監督’ 영화를 모두 보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내 결심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때는 아직 비디오나 DVD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셈에 포함시켜 주시기 바란다. 영상자료원은 영화진흥공사 산하 기구였으며 단지 필름을 ‘보관’만 했고 (지금과 달리) 어떤 영화도 상영하지 않았다. 텔레비전 명화극장에서는 할리우드 영화만을 방영했다. <신궁>은 내가 <족보> 다음에 본 임권택 의 ‘두 번째’ 영화였다. 그래서 <신궁>이 개봉했다는 소식에 조금 흥분했다. 구태여 조금, 이라는 표현을 쓴 까닭은 당시 대지극장이 재개봉관이었고 그 말은 제작사가 개봉을 포기한 영화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는 많은 한국영화들을 제작사가 거의 버리다시피 개봉시켰다. 그들은 외화수입 쿼터만이 관심이었고 한국영화는 그저 미끼에 불과했다. 그때 나는 마치 빈칸을 채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국영화들을 닥치는 대로 보고 있었다. 이 영화들을 달리 볼 방법이 없었던 나는 그 무렵 서울 시내의 거의 모든 재개봉관을 돌아다니면서 찾아보고 있었다. 대지극장에서 <신궁>을 보았을 때 객석은 거의 텅 비어있었다. 극장 안은 추웠고 헐벗은 누에처럼 웅크리고 코트를 내내 양손으로 저미며 영화를 보았다. 첫인상. < 신궁 >을 보면서 몹시 당황하였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는 < 족보 >에서 나를 매혹시켰던 그 무언가가 없었다. 차라리 사라져버렸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게 무언지는 그때 잘 설명하기 어려웠다. 어느 쪽이 이 사람의 영화였던 것일까. 내가 당황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신궁>을 보았을 때 즉시 내가 이미 이런 영화를 어디선가 보았음을 깨달았다. <신궁>은 어딘가 김기영의 <이어도>를 닮아있었고 동시에 유현목의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와 겹치고 있었고 하길종의 < 별들의 고향(속) >과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서툴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때 내가 즉각적으로 반응한 그것임, 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궁>에서 고유한 그 무언가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두 가지 배움의 간극. 그것임과 그 무언가. <신궁>은 내게 어떤 대결의 예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제는 용기를 내서 좀 더 솔직하게 그때의 심정을 말하고 싶다. 이 영화에는 여러 힘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힘들이 서로를 통제하지 못한 채 뒤죽박죽으로 서로 뒤섞여 있었다. 그 힘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기보다는 전술적으로 여겨졌고, 그 안에서 자기의 가치를 부여받고 창조에 봉사하는 대신 서로의 존재방식을 증명하기 위해서 웅성거리는 것만 같았다. <족보>는 무엇보다 우아했고 기품이 있었다. 그건 단지 영화의 내용이나 인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이 그러했다. <신궁>은 폭력적이고 독립적인 쇼트들이 침범하듯이 등장하였다. 마치 다른 임권택 이 있는 것처럼 <신궁>은 다른 설명을 요구하였다. 좀 더 단순하게 말하겠다. <족보>는 하나의 결론처럼 보였다. <신궁>은 지금 막 무언가를 시작하는 시도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둘이 동시에 내 앞에 나타났다. 그 둘이 임권택의 영화를 이루는 원심력이자 구심력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잡아당기는 힘과 벗어나려는 힘. 수렴하는 힘과 분산하는 힘. 거의 서로 닿을 듯이 서로 가까이 있는 두 영화. 나는 먼저 둘 사이를 마주 보게 할 필요를 느꼈다. 단지 하나가 다른 하나의 주석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를 궁지로 몰아넣는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왜 하나 옆에 다른 하나가 있을 필요가 생긴 것일까. 그런데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심리적인 소설을 쓰는 것은 비평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두 편의 영화를 구성하는 변수 사이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면 어떤 출현을 설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정일성 촬영감독 그 둘 사이의 사건은 정일성 이다. 1929년 도쿄에서 태어난 다음 한국전쟁 시기에 미국 공보관에서 일을 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은 사람. 김학성 밑에서 촬영부 생활을 했고 1957년 조긍하 의 < 가거라 슬픔이여 >가 촬영감독 ‘입봉’작이다. 이력 중에 가장 특별한 것은 1963년 아시아 영화재단의 후원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는 대목이다. 정일성 촬영감독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구로사와 아키라가 < 붉은 수염 >을 찍을 때 내가 B 카메라를 잡았”다. 1965년 4월 3일에 도쿄에서 개봉한 흑백 시네마스코프 영화. 미후네 도시로가 붉은 수염이 난 지방 의사로 나와 도시에서 온 젊은 의사에게 진정한 의술이란 단지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돌보는 것이란 배움을 전수한다. 상영시간 3시간 5분. 누군가는 구로사와가 도스토옙스키와 셰익스피어에게서 배운 예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 진정한 걸작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1960년대 전공투 세대에게 태평양 전쟁세대가 베푸는 역겨운 계몽교훈극이라고 불렀다. <붉은 수염>의 촬영감독은 나카이 아사카즈다. 이미 구로사와와 < 들개 >로 시작해서 < 7인의 사무라이 > < 거미의 성 > < 천국과 지옥 >을 찍었고 이후에도 < 데르수 우잘라 >와 < 란 >을 찍었다. 하지만 정일성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촬영감독은 미야가와 카즈오라고 대답했다. 구로사와의 <라쇼몽>을 찍은 사람. 미조구치 겐지의 수많은 영화들, 그중에서도 로 유명한 촬영감독. 그리고 종종 (잉마르 베리만과 함께 작업한) 스벤 니크비스트를 말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돌아온 다음 정일성 이 갑자기 놀라운 촬영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산업 안으로 돌아왔고 촬영은 감독의 결정 아래 놓여있다. 정일성은 유감스럽게도 충무로에서 미조구치 겐지 혹은 구로사와 아키라를 만나지 못했다. 그 대신 1971년 김기영 을 만났다. < 화녀 >를 찍은 다음 이어서 < 충녀 >를 찍었다. 이때부터 정일성은 양식적인 그만의 스타일을 화면 안에 담기 시작했다. 그 화면의 주인을 찾는 것은 난처한 일이다. 우선 그 당시의 현장이 지금과 매우 달랐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장에서 모니터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1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때 현장에서 연출은 그저 배우를 바라보며 카메라에 담겨질 구도를 ‘미루어 짐작하면서’ “레디 액션”을 불렀고 그런 다음 ‘감으로’ 오케이와 엔지를 구별해냈다. 이건 전 세계 영화 현장에서 벌어진 상황이다. 물론 지금보다 훨씬 더 그때의 현장은 위계질서가 엄격했으며 감독은 모든 문제를 결정했다. 하지만 촬영의 ‘순간’을 보는 사람은 현장에서 유일하게 촬영감독뿐이었다. 게다가 이 ‘순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촬영이 끝난 다음 필름을 현상소에 보내서 프린트를 만들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편집실에서 하는 탄식은 의미 없는 후회이다. 나는 1978년 처음으로 영화 촬영현장을 견학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 현장은 하길종 의 마지막 영화 < 병태와 영자 >(1979)였다. 촬영은 장석준 이었고 제작은 그 당시 가장 안정적으로 영화를 만들었던 화천공사였다. 연출부와 촬영부는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고 감독은 촬영감독의 허락 없이 카메라의 구도를 들여다볼 수 없었다. 촬영감독은 이따금 마치 자신의 관대함을 보이려는 듯 감독이 구도를 확인하는 것을 허락하곤 했지만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았다. 필름은 최소의 재촬영을 허락했으며 여분의 촬영은 상상할 수 없었다. <화녀>의 현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김기영은 정일성이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이어서 이듬해 <충녀>(1972), 비구니들에 관한 이야기 < 파계 >(1974), < 만추 >를 다시 찍은 < 육체의 약속 >(1975)을 이어서 함께 찍었다. 거의 동시에 유현목 과 < 불꽃 >(1975)과 < 문 >(1977)을 찍었다. 아마도 이 시기에 결정적인 명성을 안겨준 영화는 하길종 과 찍은 < 바보들의 행진 >(1975)일 것이다. 그리고 김수용 과 < 가위 바위 보 >와 < 화려한 외출 >을 찍었다. 김기영, 유현목, 하길종, 김수용. 그들은 단지 이름이 아니다. 한국영화라는 발명.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시대에 각자의 자리에서 한국영화가 아름답게 작동하는 방식을 창조해냈다. 물론 정일성의 목록이 항상 주목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 그것은 촬영이라는 자리의 운명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은 언제나 선택하는 대신 선택 당했다. 그는 같은 시기에 < 고교얄개 >(1976), < 고교 꺼꾸리군 장다리군 >(1977), 그리고 < 여고얄개 >(1977)을 찍었다. 임권택 은 1970년대에 들어선 다음 거의 매번 다른 배우들과 작업했지만 촬영감독은 고작 서너 명의 이름들을 돌아가면서 반복해서 작업하기 시작했다. 서정민 , 이석기 , 구중모 가 그 이름이다. < 신궁 >은 임권택이 정일성과 함께 작업한 첫 번째 영화이다. 그때 두 사람은 모두 한 해에 몇 편의 영화를 찍었기 때문에 일정을 조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맨 처음 본 임 감독의 영화는 < 왕십리 >였어요. 그 이전 영화는 별로 본 기억이 없어요. <왕십리>는 정돈이 대단히 잘 된 영화였어요. 그 영화는 시나리오가 아니라 감독의 힘으로 정돈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그러던 차에 나는 < 과부 >( 조문진 , 1978)로 대종상에서 촬영상을 받고 임 감독은 < 족보 >로 감독상을 받아 함께 해외연수를 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거기서 함께 많은 이야기를 했지요. 그때 임 감독은 듣고 또 들었어요. 그게 임 감독의 매력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것. 마침 나는 샤머니즘에 관한 영화를 몇 편 작업하면서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어요. < 이어도 >나 < 을화 > 같은 작품들을 찍었어요. 그때 < 신궁 >을 만나게 된 거지요” (「한국영화연구 1: 임권택」) 렌즈의 문제 분명한 사실은 첫 번째 작업은 ‘기술적’으로 완전히 망쳤다는 것이다. < 신궁 >은 영화의 상당 부분에 해당하는 화면의 초점이 맞지 않는다. “그게 말이에요, 촬영을 떠났는데 미처 카메라를 테스트하지를 않은 거예요. 찍는 동안에는 몰랐죠, 그게 섬에 가서 촬영을 했으니까, 그런데 나중에 현상을 해보니 그냥 화면이 그렇게 된 거지요. 초점이 다 나간 거지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렌즈에 또 다른 문제가 생겨서 일부 화면들은 잘못된 아이리스 같은 효과가 생긴 장면들도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아마 현상소에서 두 사람 모두 망연자실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기술적 결함이라는 외피를 잠시만, 하여튼 잠시만, 옆으로 치워놓고 질문을 진행시킬 생각이다. 촬영이라는 문제. 정일성 의 촬영 스타일이 무엇인지를 한마디로 정의내리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와 함께 작업한 연출자들은 각자의 공간을 만들어냈고 각자의 구도를 찾아냈으며 각자의 리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예외 없이 정일성과 작업하기 전에 이미 자기의 세계를 갖고 있었다. 그 세계 안에 들어가서 정일성은 무언가를 했다. 영화에서 촬영이 하는 무언가. 그때 임권택 은 그들의 영화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나는 약간 사태를 단순화시켜서 설명하고 싶다. 정일성의 촬영이 아름다운 순간은 대부분 롱쇼트를 찍을 때였다. 그 순간 이상할 정도로 그의 구도 안에서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건 단지 멀리서 찍었다는 뜻이 아니다. 정일성은 롱쇼크를 찍기 위해서 대상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어야 할 지, 얼마나 높이 있어야 할 지, 그때 렌즈가 어떤 깊이를 가져야 할 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 어떤 빛이 화면 안에 스며들어야하는지를 예민하게 느껴보았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정일성은 충무로에서 대부분의 촬영감독들이 와이드 렌즈 촬영을 잘 해낼 때 정반대로 망원렌즈로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장면을 보여주곤 했다. 그는 여름보다 겨울을 선호했고 눈이 내릴 때보다 눈이 녹을 때가 촬영을 해야 할 ‘진정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엔 아픔이 있잖아요” 몇 번이고 그 말을 썼다. 심지어 촬영현장에서 만족스러운 장면을 얻어냈을 때에도 그렇게 말을 했다. 이미지 안의 아픔. 그런데 그건 어떤 아픔일까. 아니, 이미지가 아프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그때 나는 다시 한 번 물어보았다. 당신께서 생각하는 촬영은 무엇인가요? “난 말이에요, 칼라로 찍었지만 그게 흑백처럼 보이는 장면을 해내고 싶어요. 영화는 암부(暗部)가 살아나야하는 거야. 그러면 우리가 영화를 보다가 아, 세상이 사라져가는 거였구나, 라는 걸 거기서 보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자신의 존재가 슬퍼지는 거죠. 왜냐, 세상 앞에서 자기가 보잘 것 없으니까” 정일성은 사라져가는 것들을 담는 것이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시대에서, 충무로에서, 그걸 그려내려는 감독을 만나야만 했다. 이번에는 반대로 구부릴 차례이다. 좀 이상하게 말하자면 임권택 은 < 신궁 >에서 이전에는 해본 적이 없는 방식의 장면들을 만난다. 그건 이전까지의 그의 영화에서 나타난 주제나 소재, 이야기, 등장인물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물론 <신궁>에서 다룬 무속신앙은 임권택에게 새로운 주제이다. 그는 그 이전까지 이런 주제 안의 인물을 다룬 적이 없다. 갑자기 이 문제에 매달리기 시작했고 그런 다음 < 불의 딸 >을 경유해서 < 축제 >까지 이 관심을 이어갔다. 임권택은 무속신앙이 사실상 한국의 모든 종교의 뿌리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고 생각한다. “그렇잖아요, 부처님에게 극락왕생시켜달라고 비는 건 불교의 교리에 어긋나는 소원이지요, 욕심을 버리라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인데 공양을 해가면서까지 제 남편 제 자식 잘 되게 해달라고 빌고 하는 건 사실상 절에 가서 굿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거예요. 그건 기독교도 마찬가지예요. 교회에 가서 자기는 천당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그건 내세를 믿는 무속 신앙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거죠”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임권택이 <신궁>을 만들었을 때 그는 이미 우리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으로 밀고 나아가고 있었던 셈이다. 당신에게 <신궁> 주변을 환기시키고 싶다. 그 전해에 임권택은 < 족보 >를 찍었다. 그리고 <신궁>을 만들었던 1979년 그는 < 깃발 없는 기수 >를 찍었다. 그 이듬해 < 짝코 >를 찍었고, 그리고 1981년 < 만다라 >를 찍었다. 하지만 이건 촬영과 상관없는 이야기다. 임권택은 이미 1973년(< 잡초 >), 혹은 1976년(< 왕십리 >)부터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고 질문을 생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궁>은 심지어 그 변화의 과정에서조차 그 이전 영화들과 단지 다르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고 무언가 대립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정식화도 허락하지 않는 대립. 여기서 형식의 변화라기보다는 외양의 차이라고 하고 싶은 어떤 단락이 나타났다. 나는 처음 보았을 때 이것이 왠지 폭력적이라는 인상을 받았을 만큼 강제적인 균열로 보였다. 어쩌면 <족보>의 감흥이 너무 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간략한 줄거리. 1977년 7월 한국문학에 발표한 천승세 작가의 원작을 각색한 < 신궁 >은 섬에서 세습무로 유명한 당골네 왕년이의 이야기다. 그녀는 주로 뱃사공들을 위해 고기잡이가 풍년이 되게 해달라는 굿판에서 용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하지만 그녀의 굿판 장구잽이 (이자 남편인) 옥수는 배를 타고 싶어 한다. 우여곡절 끝에 배를 사서 선장이 되지만 이 섬의 부자 최판수의 흉계에 빠진 채 빚에 몰려 배를 팔고 그 배에 선원으로 올라탔다가 그만 태풍에 배 밑창에서 죽는다. 실의에 찬 왕년이는 아들 용수와 자기 굿판을 물려줄 쪼깐년을 데리고 지내면서 더 이상 굿판에 벌이지 않는다. 집을 나간 용수가 일 년 만에 돌아오고 고기잡이는 흉년이 들어 모두들 왕년이가 굿판을 벌여주기를 조르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다. 그런 어느 날 쪼간년이 돈에 눈이 멀어 최판수와 자기 몰래 통정을 나눈다는 사실을 알고 굿판을 잡겠다고 자청한다. 왕년이는 굿판을 벌이기 전에 최판수의 운수대통을 위해 조상 대대로 내려온 신궁으로 운세를 내려주겠노라며 굿판 복판에 앉힌다. 그런 다음 바가지를 씌운 최판수의 이마에 활을 쏘아 내리꽂는다. 그녀의 복수. 왕년이의 거절 임권택 은 이야기의 전체 구조를 구성하면서 다시 한 번 복습하듯이 자신의 방법론을 적용시킨다. 첫 장면. 왕년이의 집에 섬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굿판을 벌여달라고 간청하지만 왕년이는 다 물리친다. 왕년이의 아들이 돌아오고 그런 아들을 바라보면서 왕년이는 남편 옥수를 떠올린다. (flash_back) 임권택은 언제나처럼 이야기 안에 시간의 주름을 만들고 마치 그 시간의 주인이 발을 헛디디기라도 한 것처럼 거기에 걸려 넘어지듯 그 안에 빠져들어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 신궁 > 가까이 있는 < 짝코 >는 이 구조를 쫓는 송기열과 쫓기는 ‘짝코’ 백공산 두 사람의 복수의 주름으로 만든 다음 번갈아 오간다. < 길소뜸 >은 화영과 동진을 번갈아 오가면서 방식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둘로 나눈다. 이번에는 왕년이의 차례이다. 무속신앙을 다룬다고 해서 임권택은 이야기의 구조를 뒤틀거나 인물의 줄거리에 특별한 형식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해왔던 방식에 따라서 전기적 구성을 해나간다. 여기서 내용이 형식을 결정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혹은 인물이 형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 신궁 >은 영화의 경제학에 따라 둘로 나누어서 촬영되었다. 풍경이 나오는 외부는 모두 섬에서 로케 촬영을 했고 왕년이의 집으로 들어서면 세트에서 촬영했다. 하지만 일부 낮에 문을 열어놓고 바깥 풍경이 걸리는 왕년이 집의 일부는 섬에서 촬영했다. 이전까지 임권택 은 인물이 방 안에 들어가면 함께 들어갔다. 그런 다음 그 안에서 인물들 사이의 시선을 설계하고 장면을 분할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시네마스코프로 촬영을 시작한 임권택은 방 안에 들어가면 인물들의 동선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바닥에 앉는) 좌식 생활을 하는 한국은 일단 한 번 앉으면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가능하면 방 안에 들어가는 것을 피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방 안에 들어가게 되면 카메라를 중심으로 타원형 구조로 앉힌 다음 옆으로 펼쳐놓았다. 먼저 위치를 확인시키고 나면(master_shot) 재빨리 대화의 내부로 들어가 인물들 사이를 오가기 시작했다. 약간 도식적으로 설명하면 (정확하게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구로사와 아키라의 시네마스코프 영화에서 보여주는 배치를 한 다음 나루세 미키오의 방식으로 분할해 들어갔다. 하지만 임권택은 1970년대 어딘가에서부터 이런 분할 방식을 버리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그때부터 임권택의 장면들은 눈에 보이게 시간적으로 분할 없이 지속되기(long_take)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따금 문득 멈춰 서서 바라보듯이 보여준 영화는 < 아내들의 행진 >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형태의 좌식 배치에 관한 여러 가지 변형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 구도가 여러 명을 앉혀놓았을 때는 인물들의 집합 효과가 있지만 단지 두세 명의 인물이 있을 때는 시네마스코프의 경우 일부 공간이 지속적으로 비어있거나 빈 공간이 주는 효과가 엄습해올 때 그로부터 방어하기 위하여 불필요하게 인물에게 다가가야 할 필요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해결 방법이 아니다. 영화에서 카메라가 (이른바 문법에서 말하는 일정 거리 안으로까지) 인물에게 다가가면 수많은 문제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오즈만이 다가가 본 거리. 임권택은 < 족보 >에서 그 문제를 피하기 위해 방 안에서 가끔 카메라의 위치를 사각형의 사각에 가져다 놓았다. 문제는 그때 그 자리가 영화적으로는 성립된다 할지라도 한국 가옥구조에서 건축적인 선을 기형적으로 왜곡시키거나 종종 파괴적으로 침범한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아마 그걸 나보다 임권택이 훨씬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frame_in_frame_ 문 안의 혹은 문 밖의 풍경 < 신궁 >은 이 문제를 이상한 방식으로 해결하였다. 종종 여기서는 카메라가 왕년이의 방 안에 들어가기를 망설인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그저 바깥에 머물면서 방 안을 들여다본다. 이때 핵심은 문이 화면 안에 또 하나의 화면을 만들어낸다는(frame_in_frame)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로로 펼쳐져 있는 시네마스코프 화면에서 가로로 긴 문이 마치 불필요한 면을 잘라내는 것만 같은 효과를 만들어내면서 자유자재로 영화의 화면 구도를 다시 분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방법은 두 개의 전통이 있다. 하나는 이미 비스콘티가 < 센소 > 혹은 < 레오파드 >에서 귀족들의 집에 들어간 다음 늘어서 있는 방과 방 사이의 문, 혹은 창문을 사용하면서 다시 화면을 분할한 경우이다. 물론 그는 이 방법을 장 르누아르에게서 배워왔고, 장 르누아르는 연극에서 가져왔다. 다른 하나는 이미 1930년대 일본영화에서 시작된 전통이다. 미조구치 겐지는 전통적인 일본 가옥에 들어서서 여러 개의 미닫이문을 겹쳐놓듯이(layers_in_depth) 여닫으면서 인물들의 여러 개의 동선을 전경과 후경에 놓은 다음 가깝고 동시에 멀리(deep_focus) 움직일 때 이 구도를 사용하였다 무엇보다도 < 기온의 자매 >에서의 실내장면들, 혹은 오즈 야스지로가 적산가옥의 마루에 인물들을 앉힌 다음 미닫이문을 애매하게 열고, 혹은 애매하게 닫고, 말하자면 바로 이 애매함의 정취의 자리인 방 안쪽에서 인물들을 찍을 때 사용하였다. 종종 오즈는 그렇게 스탠다드 화면에서 세로가 더 긴 것만 같은 효과의 화면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물론 이 두 가지 전통을 하나의 영화에서 현대적으로 다시 해석하기 시작한 것은 허우 샤오시엔이다. 이를테면 < 동년왕사 >. 하지만 여기에는 절대적인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방 안의 방, 문 안의 문이라는 유럽 건축양식, 혹은 일본 가옥 구조라는 전제이다. 대만의 허우 샤오시엔에게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어린 시절 아하가 할머니와 부모님과 형제자매들과 살았던 집은 일본 식민지 강점하에 세워진 일본식 가옥구조였기 때문이다. 집이라는 것은 건축의 문제이자 동시에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 적산가옥은 재빨리 사라졌으며 여기서 사용되는 집은 전통적인 초가집이다. 그러므로 방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외부 공간이 된다. 이 가옥에 문을 사용하여 공간을 다시 분할하면 첫째, 반드시 방문을 열어놓아야 한다는 문제와 만나게 된다. 이 구도는 겨울에 찍을 수 없다. 계절이라는 절대성. 기후의 요구. 혹은 강제로 문을 열어놓고 내버려두어야 한다. 문을 열고 닫는 것은 단지 동선의 문제가 아니라 이야기의 일부이며 인물의 심리 상태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두 번째, 방문을 열어놓고 외부에서 찍으면 방문 옆의 벽이 문제가 된다. 오즈나 미조구치, 혹은 허우 샤오시엔은 이 문이 문 안의 문이거나 방 안의 방이기 때문에 문을 겹쳐놓거나 미닫이문의 종이 질감이나 문양을 사용하였다. 정일성 은 이 벽을 단지 어둡다기보다는 마치 지워버린 것처럼 ‘블랙에 가까운’ 어둠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정일성의 구도는 종종 기하학적인 양식처럼 보였다. 이 구도는 항상 성공적이지 않았다. 때로는 마치 화면에 구멍이 뚫린 것만 같았다. 아마 임권택 은 이 구도가 다소 불편하게 여겨졌던 것 같다. 그래서 세트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 방에 두 개의 문을 만든 다음 어떤 장면에서는 앞쪽의 문을 열어놓고 그 바깥에서 찍었지만 어떤 장면에서는 인물 뒤편의 문을 열어놓고 방 안에 들어와서 찍어나갔다. 그렇게 되면 다른 문제와 만난다. 세트에서 찍은 장면과 로케에서 찍은 장면을 하나의 씬 안에서 붙여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전혀 다른 날, 전혀 다른 장소, 전혀 다른 시간에 찍은 쇼트를 하나의 씬 안에서 연결시키는 것은 단지 기술적인 문제만을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임권택은 그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어나간다. <이어도> 정일성 은 이미 이 구도를 다른 영화에서 해보았다. 김기영 과 전해에 찍은 < 이어도 >는 같은 방법을 거의 극단적인 구도까지 밀고 나아갔다. 그래서 마치 이 영화는 단지 공간이 가져다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용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화면의 비례에 대한 어떤 실험을 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준다. 어쩌면 < 신궁 >에서는 한발 물러난 것인지도 모른다. 이 구도가 김기영의 요구인지 정일성의 제안인지에 대해서는 내가 알지 못한다. 김기영은 이미 < 고려장 >에서도 (정확하게 동일하진 않지만) 같은 방법을 사용하였다. 김기영은 자신이 연극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영화를 연출하면서 숨기지 않았으며 때로는 거기서 가져온 방법(들)을 폭력적으로 밀고 나아갔다. 하지만 정일성과 작업한 첫 번째 영화 < 화녀 >는 그렇게 찍지 않았다. 내게 나쁜 인상을 준 것은 <신궁>을 보기 얼마 전에 <이어도>를 보았고 서로 다른 감독의 이름 아래 동일한 방법을 만났을 때 교집합의 매너리즘이라고 부르고 싶은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건 좋은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이름의 영토에서 만난 동일한 구도. 게다가 <이어도>와 <신궁>은 둘 다 섬에서 촬영되었고 동일한 기후 환경 아래 거의 유사한 신비주의가 영화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도>로 미루어 보건대 <신궁>에서의 구도는 정일성의 제안이 분명하다. 그리고 임권택 은 이 구도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 구도는 이후에도, 이를테면 < 만다라 > 혹은 < 길소뜸 >에서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다음 이 구도는 (거의) 사라졌다. 이 구도가 임권택 으로 하여금 훨씬 수월하게 멈추지 않고, 분할하지 않고, 대화의 선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인물을 바라볼 수 있게(long_take) 도와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구도는 임권택의 화면을 멈춰 세우곤 한다. (fixed_camera) 물론 여기엔 어떤 주장이 있다. 주장? 그렇다. 하나의 교육. 하나의 개념. 나는 거기서 임권택의 새로운 긴장을 본다. 그렇게 임권택은 < 신궁 >에서 가끔씩 마치 호흡을 멈추는 것만 같은 화면을 보여주곤 한다. 거기서 종종 리듬은 죽은 듯이 숨을 죽인다. 나는 두 번 반복해서 죽은 듯이, 라고 썼다. 임권택의 우아한 선은 오히려 왕년이가 굿판을 앞두고 부정 탄다면서 남편 옥수가 집요하게 접근하며 옷을 벗기려는 몸짓을 거부하는 모습을 따라가면서, 부주의하면 놓칠 만큼 느리게, 하지만 거의 몸짓과 하나가 된 것처럼 슬그머니 이동하는 장면에 있다. 정지와 이동. <신궁>은 이 두 개의 운동이 시종일관 긴장을 만들어낸다. 바다로 나갔다가 들어오는 카메라 하지만 실내에서의 기하학적인 구도보다 좀 더 이상한 순간은 야외에서 장면이 진행될 때 갑자기 선 바깥으로 나가는 쇼트들의 존재이다. 왕년이가 굿판을 벌일 때 종종 이런 쇼트들이 등장한다. 바닷가를 바라보면서, 혹은 등지고 왕년이는 제사 단을 차린 다음 신령님께 굿을 올린다. 이때 임권택 은 왕년이와 굿판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 사람들 사이를 오가면서 쇼트를 진행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 바다 저 멀리서 굿판을 바라본다. 바다 위에는 아무도 없으며 또한 그 굿판 주변으로 배가 지나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정일성 은 배 위에 카메라를 싣고 멀리서 굿판을 벌이는 주변을 스쳐 지나가면서 찍는다. 우선 이 장면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부터 지적하고 싶다. 누군가는 반문할지 모른다. 그건 일종의 상황 설정을 설명하는 쇼트(master_shot)가 아닌가요. 첫째, 그러기에는 굿판으로부터 너무 멀리서 찍었다. 둘째, < 신궁 >에서 이 쇼트는 시퀀스가 시작할 때가 아니라 진행되는 중에 갑자기 나타난다. 상황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설정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이 쇼트는 고전문법의 경제학의 관점에서 잉여의 자리이다. 이야기 바깥으로 나가버린 쇼트의 존재에 대해서 이미 스티븐 히스와 닉 브라운은 긴 논의를 제시했다. 스티븐 히스는 오시마 나기사의 < 교사형 >에서 고양이의 쇼트를 예로 들었으며(‘Narrative Space’) 닉 브라운은 < 역마차 >의 식탁 테이블을 문제 삼았다. (‘The Spectator-in-the-Text: The Rhetoric of < Stagecoach >’) 좀 더 긴 논쟁도 있다. 오즈의 < 만춘 >에서 교토에 아버지와 노리코가 여행을 가서 잠든 그 날 밤 료칸 방 안의 화병이 문제가 되었다. <신궁>은 같은 맥락에서 좀 다른 문제와 만난다. 여기서 정일성이 달리는 배 위에서 굿판을 멀리서 바라볼 때 이 시선은 누구의 시선도 아니다. 바다에는 어떤 배도 떠 있지 않았고, 또한 사실주의의 관점을 택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신비한 제3의 시선이 존재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게다가 이 장소는 바다 위이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우연히 이 광경을 이 위치에서 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멈춰 서서 바라보는 대신 배가 달리면서 찍었기 때문에 카메라의 운동감이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배와 카메라가 혼연일체가 되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혹은 이 쇼트가 어떤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아니면 이제까지 일관된 어떤 미학적 원칙에 따라 사용된 것도 아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그냥 간단하게 이 쇼트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인상적으로만 말한다면 진행되던 쇼트의 선 바깥으로 나가버렸다기보다는 차라리 갑작스러운 쇼트가 진행되던 리듬을 찢으면서 침범했다는 느낌을 준다. 여기까지 설명을 들으면 누군가는 로셀리니가 < 전화의 저편 >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빨치산들이 죽어가는 장면을 바라보는 무심하리만큼 객관적인 쇼트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궁>에서의 이 쇼트는 보는 자리를 관객에게 돌려줄 생각이 없다. 오히려 그렇게 질문한다면 차라리 이 쇼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매하게 영화 안의 어딘가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무언가 빠져나온 것 같지만 어디선가 멈춰버린 쇼트가 씬 안에서 존재한다는 뜻. 나는 이 애매함을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를 느낀다. 임권택 은 왜 이런 쇼트를 허용한 것일까. 그 쇼트의 효과는 무엇인가. 여기서 쇼트 사이의 새로운 방향이 생겨난 것이다. 방향? 이 말을 조심스럽게 쓰고 싶다. 쇼트(shot)들이 일종의 면(plan)이라면 영화는 그 면을 연속적으로 세워놓으며 서로 반사하고 연결시키는 것이다. 고전주의의 방법은 이 면들을 어떤 간격으로 세워놓느냐의 문제이다. 여기서는 면 자체에 관한 장황한 이론은 잠시 건너뛸 생각이다. 이때 임권택은 갑자기 일렬로 세워진 면들 사이에서 하나의 면을 더한 다음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가로로 세워진 일련의 면들의 집합을 바라보면서 하나의 면을 갑자기 세로로 놓은 것이다. 세로의 인서트. 그러나 이 쇼트가 시점 쇼트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왜상효과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의 시퀀스 안에서 이야기를 따라 왕년이와 함께 여기에 온 우리가 갑자기 이야기 곁으로 비스듬히 나와 왕년이를 바라보게 된다. 이걸 주관적 씬과 객관적 씬의 분리라고 구분하는 것은 지나치게 도식적인 설명이다. 핵심은 이 인서트를 사이에 둔 두 개의 씬이 그렇게 단순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선 이 인서트 자체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물론 이 갑작스러운 쇼트가 주는 운동감까지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쇼트는 고립되어 있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 쇼트는 앞과 뒤의 어디에도 달라붙지(raccord) 않는다. 노엘 버치는 그걸 정확하게 설명했다. 쇼트가 달라붙지 않을 때, 버치의 표현을 빌리면 ‘잘못 달라붙었을 때(faux_raccord)’, 우리는 영화에서 시각기호를 가독기호(lecto_signe)로 읽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쇼트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나요, 라고 질문하면 당신은 끝내 대답을 듣지 못할 것이다. 올바른 질문은 거기서 왜 읽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인가요, 라고 해야 한다. 나는 소설을 쓰는 위험을 피하고 싶다. 임권택 과 정일성 이 여기서 어떤 의견을 교환했는지 알지 못한다. “< 신궁 >을 만들었을 때는 서로의 스타일이 있었어요. 내가 앵글을 잡을 때 그 장면에 대해 반드시 임 감독과 나는 토론을 했어요. 그때 임 감독이 그러더군요. 토론을 하면서 영화를 만들어보기는 처음이라고” (「한국영화연구 1: 임권택」) 이 쇼트를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한쪽이 제안했고 다른 한쪽이 그걸 받아들였다. 우선 영화의 경제학에 따른 복기. 굿판이 열리는 장면을 바다 위에서 달려가는 배에 카메라를 세워놓고 찍는 것은 그 순간 갑자기 어떤 영감을 받아서 촬영의 위치를 옮겨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배를 준비하는 것은 제작비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결정이다. 말하자면 이 쇼트는 콘티에 처음부터 포함되어 있는 장면이라는 뜻이다. 한 가지 더. 촬영팀이 모두 배로 옮겨 이 쇼트 단 하나를 찍기 위해 시간을 보낼 때 다른 모든 팀은 그저 구경을 하고 있는 것 이외에 달리 할 일이 없다. 섬에 가서 촬영을 하는 것은 날짜와의 싸움이다. 그 상황에서 임권택은 이 한 장면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이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신호이다. 어떤 신호? 임권택 은 질서정연한 시스템을 갑자기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이 쇼트는 그 위기를 알리는 신호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고 싶다. 왜 임권택은 위기를 필요로 하는가. 용기를 내서 단호하게 말하고 싶다. 그는 질서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한다. 어떤 질서? 가로의 질서. 일단 이 질서 안으로 들어오면 안정적인 공간이 영화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긴밀한 문법의 네트워크. 그 안정 바깥으로 무리하게 나갈 때 영화가 부서지기 시작한다. 물론 누구나 처음에는 들어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지 않으면 영화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공간이 안정되고 나면 이 시스템이 거의 물샐틈없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거의 고유명사화 된 ‘오즈적인 것(小津的’なもの)’에 관한 설명을 시작하면서 영화에서 180도란 얼마나 불편한 것인가, 라고 탄식하듯이 말한다. 영화는 일단 그 안으로 들어오는데서 시작한다. 임권택은 그 안에서 시작한 감독이다. 그는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찍었다. 좀 더 중요한 지적이 남아있다. 충무로에서 이 법칙을 벗어나면 스텝들은 촬영에 협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멀리 돌아서 설명할 필요도 없이 < 장희빈 >을 찍으면서 시간에 쫓긴 정창화 가 상상선을 벗어나자 조감독 임권택은 그러면 안 된다, 고 조언을 했다가 현장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로의 쇼트는 탈출의 신호이기도 하다. 물론 임권택은 지속적으로 탈출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 자신은 첫 번째 신호가 < 잡초 >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탈출이 일시에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을 잡아당기는 반복적인 힘을 지속적으로 마주해야만 했다. <잡초> ‘이후’의 영화들에서 나는 수 없는 탈출의 신호들의 예를 설명할 수 있다. 아니, 차라리 목록을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의 반동적인 힘들의 예를 설명할 수 있다. <잡초> ‘이후’의 영화들에서 내가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것은 기괴할 정도로 불균질한 순간들이다. 그 순간들은 임권택이 그 공간의 성질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질문을 한 쇼트들일 것이다. 그는 성질을 바꾸고 싶어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스스로 항상 외면하려고 애쓴) ‘나쁜 버릇’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 신궁 >이 임권택의 일흔 한 번째 영화라는 것을 생각해주기 바란다. 하지만 여기서 영화 전체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 시퀀스 전체를 와해시키는 지경으로까지 밀고 나아가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쇼트의 자리는 약간 애매해 보인다. 이야기는 유지되면서 성질이 다른 쇼트가 그 안으로 뛰어들 때 이 세로의 쇼트는 정확하게 이야기 안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를 바라보는 쇼트. 하지만 임권택은 이 쇼트의 권리를 보는 쪽에게 넘길 생각이 없다. 이때 나는 약간 까다로운 가정을 해보고 싶다. 이 쇼트는 현장에서 촬영의 관점에서 관념적인 설명에 기댄 장면이다.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 쇼트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연출의 관점에서 이 쇼트는 편집의 맥락에서라면 미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나는 지금 둘 중 이 쇼트가 누구의 권리냐는 판단을 내리기 위해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쇼트가 두 사람의 합의 아래 이루어졌다고 정말 믿는다. 그래서 여기서 바쟁이 했던 영화라는 과정에 관한 비평의 방법론에 따라 이렇게 추론하고 싶다. 임권택 은 현장에서 관념적인 관점의 ‘잉여의’ 촬영을 받아들였고 정일성 은 이 장면이 편집실에 가서 미학적인 관점의 ‘올바른’ 자리를 찾아가는 쇼트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촬영과 편집 사이에 놓인 사전적인 작업과 사후적인 작업 사이에 놓인 간극을 염두에 두어주기 바란다. 나는 이 장면이 몹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일성 은 자기의 장면이 어떤 쇼트가 될 지를 가정하면서 촬영을 했을 것이다. 임권택 은 그 잉여의 촬영을 허락하면서 끊임없이 그의 두뇌 속에서 영화를 다시 편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임권택의 영화가 불균질을 받아들이면서 안정적인 공간 안에서 정신적인 그것,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그것을 찾아가고 있다는 신호가 되었다. < 신궁 >은 괴이한 신비주의와 따분한 진부함이 교차하면서도 어느 순간 임권택의 어떤 도약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마 내가 그해 겨울 이 영화를 보고 당황한 것은 그 해 봄에 < 족보 >를 보고 느꼈던 아름다움이 일시에 무너진 것은 아니지만 거의 폭력적으로 느슨해져가면서 그 사이에서 돌발적으로 출현하고 있는 그 정신적인 그것, 앞에서의 당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신궁>이 아니었다면 < 만다라 >는 없었을 것이다. 두 승려가 불가의 가르침에 관한 화두를 끊임없이 토론하며 걸어가고 또 걸어가는 그 정신적인 만행길. 정신적인 그것임. “내가 유현목 감독의 < 사람의 아들 >을 찍을 때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병원에 입원했어요. 그때 마침 임감독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늘 병원에 와서 위로를 하며 이번에 퇴원을 하면 자신과 함께 새 영화를 하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수술 결과는 끝나봐야 할 수 있는 것이었고 집에서는 장례식 준비까지 모두 마친 상태였습니다” (「한국영화연구 1: 임권택」) 그때 병원에 찾아와서 말한 새 영화가 < 만다라 >이다. 임권택 은 <만다라>를 정일성 만이 찍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신궁 >은 <만다라>로 가는 과정의 영화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조만간에 반복하면서 다시 한 번 시작할 생각이다. (계속) 1979년 93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태창흥업 각색 김지헌 촬영 정일성 조명 손달호 편집 김희수 음악 김동진 윤정희 김희라
“나는 그렇게 일찍 ‘입봉’할 생각이 없었어요. 이게 내가 먹고사는 유일한 방법인데 조감독을 하면 그냥 그럭저럭 지낼 수가 있잖아요. 그때만 해도 내가 충무로에서는 꽤 똘똘한 조감독이어서 사람들이 권택이, 권택이 그러면서 나를 찾았으니까요. 그런데 감독 한번 해서 망하면 그걸 누가 다시 연출부로 데려다 쓰냐구요. 그때도 영화 한 편 찍고 사라진 사람들을 많이 봤으니까요. 나는 정창화 감독만 모시고 했잖아요. 여기저기 다니는 게 나한테 맞지도 않고. 그런데 < 장희빈 >을 찍을 때였어요. 그걸 창경궁에서 찍고 있는데 일정이 촉박해서 심지어 연출부들이 그때 막 궁궐 안에서 잠을 자면서까지 영화를 찍었어요. 장면을 찍는데 참, 이건 내가 잘못한 건데, 거기서 나와야 할 일정이 다 되어서 이제 떠나야 할 판국인데, 창경궁 바깥으로 일단 나가면 세트를 세울 수도 없고 도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날 분량을 다 못 찍고 해가 저물어가기 시작하니까 갑자기 정창화 감독이 막 찍기 시작하는 거야. 동선도 안 맞고, 시선도 틀리고, 그래서 내가 이건 잘못된 겁니다, 라고 말을 했는데, 거기 배우들도 있고, 스태프들도 있고, 사실 정창화 감독도 다 알면서도 그러는 건데, 그래서 속에 불이 나고 있는데, 거기다가 다 알고 있을 법한 조감독이란 놈이 그러니까 다 있는 앞에서 나한테 갑자기 화를 내는 거예요. 그때는 내가 맞는 데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면 그만두겠다, 이러고 나온 거지, 그런데 내가 다른 감독 밑에서 해본 적도 없고 머리가 컸다고 생각하니까 다른 감독들도 나를 안 부르는 거야, 그때 조감독 하던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제작자가 그러지 말고 그냥 ‘입봉’을 해라, 해서 감독이 된 거예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장희빈>(정창화), <요화 장희빈>(임권택) 정창화 의 < 장희빈 >은 1961년에 제작되었고 김지미가 사극 드라마 사상 첫 번째 장희빈으로 등극한 영화이다. 숙종으로는 김진규가 출연하였다. 이듬해 임권택 은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로 ‘입봉’하였다. 그런 다음 스무 편의 영화를 더 찍었다. 1968년 임권택은 자신의 첫 번째 칼라영화 < 요화 장희빈 >을 찍었다. 물론 그해에 이 영화만 찍은 것은 아니다. ‘입체영화’ < 몽녀 >를 찍었고, (< 7인의 사무라이 >를 리메이크한) < 황야의 7인 >를 리메이크한 < 바람 같은 사나이 >를 찍었고, 첫 번째 다찌마와리 액션활극 < 돌아온 왼손잡이 >를 찍었다. 하지만 자신의 ‘오야지’(그때는 자신이 모시던 감독을 그렇게 불렀다)가 찍었던 영화, 그 현장에서 떠나야했던 영화, 그 영화와 같은 주인공의 이야기를 자신이 찍게 되었을 때 임권택은 틀림없이 약간 민망하지만 어떤 승리감을 느꼈을 것이며 또한 대결‘하는’ 의식을 가졌을 것이다. ‘오야지’라는 말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고 싶다. ‘親父’라는 말. 자기 아버지라는 뜻. 영화 현장에서 연출부들은 자기가 모시는 감독을 다른 자리에서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 하여 ‘오야지’라고 불렀다. 아버지와 대결하는 장면. 약간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임권택은 <요화 장희빈>을 ‘연출하면서’ 정창화의 그림자를 벗어났다. 그런 다음 의도치 않게 한국영화 산업 안에서 스스로 망가지면서 자기 영화를 찾아가는 과정에 나서게 되었다. 헐벗은 연출. 가진 것 없이 버려지게 된 다음 다시 시작하는 계기. 그런 의미에서 <요화 장희빈>, 혹은 이 스물 한 번째 영화는 임권택에게 하나의 사건이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 영화는 임권택의 내부에서 미처 종결되지 않았던 하나의 중단이 마침내 자기 손에 의해서 완성된 다음 끝난 것이다. 물론 과도하게 <요화 장희빈>에 대해서 (프로이드를 경유한) 아버지와의 대결이라는 드라마를 끌어들이는 것은 사태를 우스꽝스럽게 만들 것이다. 두 번째. 한국영화에서 첫 번째 칼라영화는 1949년에 만든 홍성기의 16mm 필름인 <여성일기>였지만 긴 시간 동안 한국영화에서 칼라영화의 시대는 미루어졌다. 그 시대를 시작한 것은 1961년에 거의 동시에 만들어진 두 편의 영화, 홍성기 의 < 춘향전 >과 신상옥 의 < 성춘향 >이었다. 임권택 이 ‘입봉’하기 전에 이미 시작된 칼라영화의 시대. 그러나 임권택은 자신의 칼라영화를 한참 뒤로 미루었다. 물론 그건 그의 예술적 결정이라기보다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필름 값은 영화 제작비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비쌌(을뿐만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 비용이 부담스러울 만큼 제작 조건이 열악한 제작비로 영화를 만들고 있었)고 임권택은 기다려야 했다. < 요화 장희빈 >은 임권택의 첫 번째 칼라영화이다. 한 가지 더. 신기하게도 1968년에 찍은 임권택의 영화는 ‘갑자기’ 모두 칼라영화이다. 그런 다음 두 번 다시 흑백영화를 찍지 않았다. 같은 말이지만 되돌아가지 않았다. 혹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를테면 홍상수 는 가끔 흑백으로 영화를 찍었다. . 혹은 칼라로 작업한 다음 마지막에 흑백으로 전환한 < 북촌방향 >. (그래서 이 영화의 예고편은 칼라이다) 봉준호 는 칼라로 개봉한 다음 감독판이라는 이름으로 (직접 색 보정 작업에 참여해서) 흑백으로 전환한 다음 < 마더 >를 (다소 제한적인 방식으로) 다시 상영하였다. 일부 극장에서 102번째 영화 < 화장 >을 흑백으로 변환하여 상영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보지 못했다. 임권택 자신은 이 영화의 최종판은 칼라이며 흑백 버전의 <화장>에 대해서 “상업적인 이유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럴 수도 있는” 판본이라고 불렀다. 이 말의 무심함. <요화 장희빈> 한복의 색채 <요리사, 도둑,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에서 공간에 물드는 의상 그걸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 요화 장희빈 >은 누구라도 보자마자 그 색채감각이 아름답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이때 임권택 은 여기서 세트 미술의 도움 없이 오로지 한복의 색채만을 활용하여 영화 전체를 마치 붓으로 채색하는 것처럼 그려낸다. 이 말을 단지 비유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의상이 회화와 다른 점은 그것을 입은 사람들이 자신의 동선을 따라 화면 안을 자유로이 이동하면서 색채의 선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때 의상은 미장센의 일부이면서 종종 그로부터 독립된 어떤 존재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어떤 존재감? 그렇다. 이를테면 롤랑 바르트가 섬세하게 파리를 거니는 마담 혹은 마드모아젤을 바라보면서 의상이라는 모드에 대한 기나긴 기호학적 분석을 그려낸 예. 혹은 삐에르 부르디외가 냉정하게 펼쳐 보인 계급적 취향의 차이라는 서로 나누어진 세계. 물론 맨 위에는 프로이드가 있다. 꿈속에서 나타난 의상보다 더 분명한 흔적이 달리 무엇이겠는가. 형상화라는 과정. 영화가 꿈은 아니지만 욕망이 진행되는 과정, 좀 더 프로이드적인 언어로 투사되는 과정에 이르면 둘 사이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이때 의상은 2차 가공 과정의 어떤 역할을 할(수 있을) 것이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감독들은 의상의 비밀을 처음 건드린 세대이다. 나는 지금 피터 그리너웨이의 바로크적인 의상(-미장센)을 떠올리고 있다.< 요리사, 도둑,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 >에서 요리사의 아내가 화장실에서 복도를 지나 자기 방을 지나친 다음 실외에 이르기까지 수평으로 이동하면서 동일한 디자인의 옷이 마치 공간의 색에 물들기라도 하듯 형형색색으로 바뀌는 장면을 떠올리고 있다. 홍상수 는 등장인물의 옷을 그 역할을 하는 배우의 집에 가서 고른 다음 그 배우의 일상생활을 영화 안으로 끌어들여서 등장인물과 배우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옷에 묻어있는 삶이라는 흔적. 취향이 보여주는 내면. 거기서 시작하는 영화. 박찬욱 은 의상을 등장인물 내면의 기하학적 조형이라고 생각한다. < 친절한 금자씨 >의 땡땡이 무늬가 있는 원피스. 마치 총에 맞아 뚫린 것 같은 구멍들. 임권택은 의상의 체계 안에 들어서는 순간 하나의 세계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위계질서가 있고 차려야 할 격식이 있으며 종종 의상이 인물을 규정한다. 그것은 신분의 기호이며 금지와 배제로 이루어진 기호들의 집합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명령의 신호이기도 하다. 종종 임권택은 그런 다음 서로 다른 의상의 세계 사이의 충돌이 빚어내는 긴장을 즐긴다. 그저 떠오르는 대로의 예. 일제강점하 가문의 성씨를 지키던 설씨 노인이 자살을 하자 그 장례식에 찾아간 일본인 다니는 예의를 표하기 위해 검은색 양복을 입고 찾아간다. 하지만 마당에 있는 모든 한국인은 흰색의 한복을 입고 있다. 흰색의 무리 속의 단 한 점의 검은 색. (< 족보 >) 승복을 입은 두 승려가 찾아가는 사창가 여인들의 과장된 노출의 의상들. (< 만다라 >) 씨받이로 들어간 소녀는 끝내 양반들의 의상을 입어보지 못한 채 아이를 임신한 다음 비밀리에 출산하고 쫓겨난다. (< 씨받이 >) <요화 장희빈>은 17세기 조선 시대 숙종이 왕위에 오른 다음 27년에 걸쳐 궁궐 안에서 넘쳐나는 여인들의 정념의 세계로 안내하는 길잡이로 의상을 활용하고 있다. 종종 그녀들이 입은 옷은 마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창문이 된 것처럼 투명해지기조차 한다. 임권택은 그녀들이 입은 옷을 때로 그녀들의 정념에 대한 환유처럼 입히기도 하고 혹은 그녀들의 태도에 대한 은유로 보이기도 한다. 교차하는 정념의 수사들. 그런 의미에서 <요화 장희빈>에서 그녀들이 입은 옷은 신분의 체계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질투와 분노, 사랑과 박해, 의심과 욕심 사이에서 생겨나는 욕망과 불안을 오가면서 몸과 마음을 봉합해내는 정념의 순환 회로이기도 한다. <요화 장희빈>과 <현기증>의 녹색 여기서 장희빈은 서로 다른 수많은 여인들, 그녀를 내친 인경왕후와 그녀를 다시 받아들인 인경왕후, 인현왕후와 (연잉군을 나은) 숙빈 최씨, 그녀들을 둘러싼 왕가의 친인척 여인들, 그녀들을 받드는 서로 다른 계층의 여인들, 그 주변의 수많은 궁녀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녹색의 한복을 입고 자기의 자리를 점유한다. 나는 여기서 과도하게 색채의 심리학에 의지할 생각은 없다. 대신 영화사에서 유명한 녹색을 환기시키고 싶다. 히치콕의 < 현기증 >에서 스카티 눈앞에 주디가 종탑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마들랜과 똑같은 머리 모양과 옷을 입고 마치 환생한 것처럼 나타났을 때 방을 가득 채운 녹색. 아니 차라리 넘쳐나는 것만 같은 녹색. 이 불안한 색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옮겨가면서 죽은 자가 다시 되돌아오는 것만 같은 환상을 만들어낼 때 히치콕은 영화에서 녹색이 갖는 새로운 의미를 거의 창조해내다시피 하고 있다. 물론 임권택 이 히치콕의 영향 아래 놓여있거나 혹은 <현기증>으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아마도) 아니다. 하지만 < 요화 장희빈 >을 보고 있으면 그저 귀여웠던 한 소녀가 어느 자리에서부터 사악하고 요염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할 때 마치 그것이 그녀가 입은 기분 나쁜 초록색의 한복에서 나오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줄 때가 있다. 복장도착과도 같은 변신. 초록색 자체가 나쁜 기운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잘 알다시피 녹색은 평화의 상징이며 또한 생명을 지키고 환경운동을 하는 단체들의 ‘그린’이기도 하다) 한국영화에서 미신을 부추기고 불길한 신령들을 불러내는 무당들에게 자주 초록색 한복을 입히는 것은 이 색채에 대해서 한국 문화 안의 고유한 코드가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나는 의도적으로 마치 떠오르는 듯이 장희빈의 녹색 한복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다. 임권택은 장희빈과 다른 등장인물들의 한복의 색채를 체계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그건 이후에도 그렇다. 임권택은 먼저 도식을 세우지만 영화 안에서 어떤 도식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종종 부분적으로 자신의 도식을 위반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것은 단순하게 오래된 예술가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만은 아니다. 임권택은 마치 그 도식이 등장인물의 생명을 위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갑자기 어느 순간 예외를 마련하거나 때로는 돌발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일시적으로 도식을 부수기도 한다. 그래서 가까스로 도식을 찾아냈을 때 혹시 이것이 그 안에서 예외의 규칙이 아닌지 의심하도록 유도한다. 임권택의 예술에 관한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경험이다. 하지만 오해하면 안 된다. 그 자신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에게 되돌아가서 그 안에서의 원리를 추론하는 이 경험의 표지들 사이에 생명이 감도는 순간을 임권택은 도식 안의 예외라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거기서 장희빈이 그 요염하고도 불길한 초록색 한복을 선택했을 때 그녀의 삶 안에서 그 순간들이 이루는 예외의 도식을 세울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예외의 도식? 유혹의 전술이 전개되는 순간이라는 도식. 누구를 대상으로? 숙종을 대상으로. 무엇을 목표로? 오직 상감마마와의 침실에서의 여흥의 시간을 위하여. 그래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원자 아기씨. 좀 더 간단하게 임신. 그 임신이 안겨주게 될 자리. 우리는 조선시대가 유교의 이데올로기 위에 세워져 있으며 가문을 잇는 선이 끊어지는 것은 제사에서 죽은 조상과 대면할 때 예외 없는 불효의 세계였다는 것을 한 번 더 환기해야 한다. 이 연쇄적인 계산의 논리적인 도식. 라디오 드라마 <장희빈> 녹음현장 (출처: 블로그 춘하추동방송) 하지만 < 요화 장희빈 >은 시각적인 드라마라기보다는 청각적인 해설의 영화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아마 그건 <요화 장희빈>이 고스란히 정창화 의 < 장희빈 >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두 편의 장희빈 영화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숙종의 재위 기간을 영화로 각색한 것이 아니라 1961년 1월 23일에 첫 방송을 시작해서 3월 4일에 36회로 종방(終放)한 라디오 드라마 <장희빈>을 영화로 옮긴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1960년대가 라디오의 시대였다는 것을 떠올려야 한다. 좀 더 실감나는 설명. 1970년대 거의 마지막까지 시내버스를 타면 기사들은 라디오 방송을 틀어놓고 예외 없이 라디오 드라마를 들었다. 그때 승객들은 놓칠세라 귀를 기울였고 마치 요즘 텔레비전 방송 드라마의 우여곡절에 전 국민이 매달리듯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장희빈>의 대본을 쓴 이서구 작가는 일제 강점하인 1920년 동아일보 창사와 함께 입사하여 사회부 기자로 경력을 시작했고 그런 다음 연극 모임인 ‘토요회’를 거쳐 라디오 방송에 입문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이서구 작가는 1957년부터 라디오 드라마에 전념했고 <장희빈>이 방송되는 시간에는 “장안의 길거리가 텅 비었고 특히 목욕탕 여탕은 말할 것도 없이 마찬가지로 텅텅 비었다”고 할 정도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때 성우들은 지금의 탤런트들에 비교할만한 인기를 모았다. <장희빈>은 미처 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영화사가 판권을 샀고 정창화가 그 대본을 바탕으로 영화를 찍었다. 또 다른 이서구 작가의 사극 라디오 드라마 <강화도령>은 1963년에 동명의 제목으로 신상옥 이 영화로 찍었다. <장희빈>은 단지 드라마만 성공한 것이 아니라 주제가도 1960년대 가요의 고전으로 남았다. 이서구 작가가 작사를 하고 전오승이 작곡한 <장희빈>은 그 당시 ‘꾀꼬리의 여왕’이라고 불리던 황금심이 불러서 “이 노래를 듣기 위하여 드라마 시간을 기다리는 애청자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잠시 멈춘 다음 당신께서 YOU를 검색하셔서 음미하듯이 이 노래를 들으면서 가사를 먼저 읽어주시기 바란다. <요화 장희빈>에는 이 노래가 거의 갑자기 기습하듯이 몇 차례이고 반복해서 흐른다. 조선 시대 사극에 덮어씌운 그 시절 엔카(演歌) 풍의 대중가요. “구중궁궐 긴 마루에 하염없이 눈물짓는 장희빈아, 님도 잃은 그 날 밤이 치마 그리워 치마폭에 목메는가, 대전마마 뫼시던 날에 칠보단장 화사하던 장희빈아, 칠보단장 푸른 한에 흐느껴서 화관마저 떨리는가” 아마 임권택 도 이 방송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 라디오 드라마가 영화화된 영화의 조감독을 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그러나 이 라디오 드라마가 방송되던 1961년의 언저리가 아니라 그로부터 7년 후인 1968년에 다시 만들면서 왜 라디오 드라마를 참조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이런 설명이 가능하긴 하다. 1960년대 후반부터 칼라영화가 적극적으로 도입되는 과정에서 성공한 흑백영화를 다시 칼라영화로 만드는 것이 하나의 상업적 모델이 되었다. 그때 대중들은 리메이크를 새로운 영화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과거에 성공한 영화의 반복을 자신의 선택에 대한 만족의 보증이라고 여겼다. 물론 박스오피스에서 성공한 영화가 자신을 만족시킬 것이라는 바보 같은 공식은 지금도 작동되고 있는 대중적 신화이기는 하다. 이 모델은 거의 무차별적으로 대입되었다. 심지어 김기영 조차 흑백영화 < 하녀 >를 칼라영화 < 화녀 >로 다시 찍었다. 임권택은 단지 장희빈을 소재로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 요화 장희빈 >이 라디오 드라마이기라도 한 것처럼 진행시켜 나간다. 여기서 영화를 이끌고 가는 것은 장희빈이나 숙종이 아니라 영화 바깥의 목소리(voice_over_narration)이다. 물론 그때 한국영화에서 보이스 오버의 방식이 드문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러기는커녕 종종 나태하다고 느낄 정도로 자주 사용되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방법이 다르다. 좀 더 용기를 내서 말한다면 후일 임권택이 영화의 시청각 기호 위에 문자를 더하면서 자막을 입히는 방법으로 발전하게 되는 초기 이전(primitive)의 모델을 떠오르게 만든다. 여기서 그 목소리는 마치 변사처럼 영화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감정까지도 설명하기 시작한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그 목소리는 (다소 따분한 표현이긴 하지만) 이야기 구석구석을 내려다보는 대타자의 음성이다. 말하자면 극영화에서 집행되는 다큐멘터리에서의 (빌 니콜스의 구분에 따르면) 신의 목소리로서의 방법. 하지만 내 귀를 붙잡은 순간은 그 목소리가 종종 영화의 감정을 연기하기 시작할 때이다. 그 목소리는 영화를 설명하다 말고 인현왕후가 장희빈의 음모에 떨어질 때 영화를 보는 나를 앞질러, 혹은 대신하여, 탄식하기도 하고 숙종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분노를 하며 줄거리의 윤곽을 설명해야 할 순간에 스스로 감정을 대리하는 영화 안의 또 다른 영화적 존재가 된다. 이때 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목소리가 단지 주인의 역할을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영화 자신이 몸이 되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영화 안의 몸들을 대신하는 영화라는 몸. 영화의 기호들에 부여하는 뼈와 살, 무엇보다도 감흥을 불러내는 자율적인 장치. 그 안에서 영화가 스스로 느껴보기 시작한다. <요화 장희빈>의 신기한 변화는 거기서 시작한다. 왜냐하면 마치 그 목소리에 반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영화의 시청각 기호들이 불응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나는 신중하게 불응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누군가는 눈치챘겠지만 나는 이 개념적 표현을 노엘 버치에게서 빌려왔다. 버치는 영화에서 어느 순간 왜 단순한 화면에서 등장인물에게 쇼트의 방법론이 매개변수가 되기를 거절하고 자신의 리듬을 가지려 할 때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읽어내기’가 거의 불가능해지는가, 라고 질문하고 있다. 버치는 그 대답을 오즈에게서 가져온다. 영화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바라보는 것과 달리 그사이에 영화를 바라보는 것과 영화가 바라보는 것 사이의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임권택은 영화를 바라보는 과정을 관성에 내맡긴 채 영화가 바라보는 과정에 감흥을 부여하려고 한다. 이 말의 망설임. 아마 그래서 일 것이다. < 요화 장희빈 >은 제목과 달리 장희빈을 중심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래서 이 영화가 몹시 산만하게 느껴진다. 사료에도 장희빈의 출생 신분이 불명료하지만(그녀가 노비 출신인지, 아니면 몰락한 양반집 규수인지, 혹은 다른 자료에 따르면 중상인의 자제라고도 되어있든가 하지만) <요화 장희빈>은 조선왕조실록을 옮긴 영화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장희빈이 궁궐에 들어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장희빈의 모친 폐비 윤씨의 집으로 이야기가 찾아갈 때 그녀가 자란 환경을 어렴풋하게 가늠해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근대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조선 시대라는 생활조건의 외양 안에 감추어진 삶의 과정을 가늠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역사의 근거를 뒤로하고 드라마의 관점에서만 접근해도 장희빈의 배경을 지운 것은 그녀가 궁궐 안에서 경쟁자들을 상대로 목숨을 건 도약을 시도하는 그녀의 욕망의 힘을 끌어낸 증후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임권택 은 마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독점적인 왕후의 자리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장희빈의 유일한 임무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 과정에 어떤 의심도 품지 않는다. 이 사태를 단순하게 공격하기 어려운 것은 종종 임권택이 장희빈을 주인공이 아니라는 듯이 제쳐놓고 진행하기 때문이다. 그건 처음부터 그렇다. 이야기는 숙종이 아직 세자였던 시절에서 시작하면서 마치 그를 따라 진행할 것처럼 이어진다. 장희빈은 이야기에 삽입되는 방식으로 갑자기 등장하고 난 다음 이야기의 중심으로 옮겨간다. 하지만 그녀가 항상 이야기의 중심을 점거하는 것도 아니다. 장희빈은 궁궐 바깥으로 두 번 쫓겨나는데 심지어 그녀가 첫 번째 쫓겨났을 때는 마치 영화가 잠시 동안 그녀를 잊은 것처럼 진행되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장희빈이 다시 궁궐에 돌아왔을 때 그녀를 따라가는 것도 아니다. 어진 인현왕후는 숙종이 장희빈을 잊지 못하자 주변의 우려를 모두 물리치고 그녀를 다시 궁궐로 불러들인다. 이때 임권택은 다시 장희빈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장희빈을 다시 불러들인 사실을 숨기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부디 받아들여 달라고 간청한다. 영문을 모르는 숙종은 그러겠노라고 대답한다. 물론 우리들은 인현왕후가 몹시 위험하게도 장희빈을 다시 궁궐 안으로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눈치챈다. 여기서 임권택은 마치 장희빈이 처음 등장하는 것처럼 진행한다. 인현왕후는 숙종을 모시고 내실로 인도하고 거기서 장희빈과 다시 해후하는 자리를 만든다. 인현왕후는 영화가 거의 절반에 이르렀을 때 처음 등장했고 그녀가 한 첫 번째 역할은 숙종과 장희빈을 다시 만나게 하는 시나리오 안의 기능에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숙종과 장희빈이 다시 해후하는 자리를 만들고 인현왕후가 다시 바깥으로 나갈 때 카메라는 그녀와 함께 문 바깥으로 나간다. 두 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점. 첫째, 그렇게 되면 다시 방 안으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둘째, 순간적으로 여기서 임권택은 주인공을 바꿔치고 있는 것이다. 임권택은 이 영화가 <요화 장희빈>이 아니라 <인현왕후>이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동선을 인현왕후를 중심으로 짠 다음 거기에 감정선을 더한다. 그런 다음 숙종과 장희빈이 포옹을 할 때 인현왕후는 여기까지 행한 그녀의 선의와 상관없이 창문 바깥에서 그걸 흘낏 바라본 다음 차마 더 이상 마주 보지 못한 채 외면을 하면서 그 소리를 들으며 벽에 기대어 슬픔에 가득 차 고통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핵심은 이 장면의 심리적인 설명이 아니다. 이 장면이 어떤 전환점으로 작용하면서 이제부터 영화는 인현왕후가 이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진정한 주인공이라는 것은 없다. 그러기는커녕 그 자리를 둘러싸고 새로운 등장인물들이 번갈아 분주하게 나타나고 퇴장한 다음 다시 나타나고 또 사라진다. 혹은 새로 나타났을 때는 중심으로부터 주변에 옮겨간 다음 제 할 일을 한다. 그 과정에서 누구라도 당황하게 될 만한 순간과 마주치게 된다. 숙종에게는 장희빈과의 사이에서 낳은 경종 이외에 숙빈 최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연잉군이라는 아들이 있다. < 요화 장희빈 >은 숙빈 최씨의 잉태의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영화에서 임권택 이 숙빈 최씨를 인물들 사이의 원근법을 통해서 주변으로부터 중심으로 이동시키는 과정은 단순하게 수평으로 옮겨가는 대신 마치 층위를 오르내리며 상승과 하강을 거듭하면서 틈새 사이를 돌아다닌다. 이때 숙빈 최씨의 행위소를 작동시키는 원리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숙빈 최씨의 행위는 항상 수동적 상황 안에서 능동적으로만 활동하기 때문이다. 의미심장하게도 숙빈 최씨에 관해서만 화면 바깥의 그 목소리를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장희빈이 숙빈 최씨를 야단치는 장면 앙갚음을 하듯 숙빈 최씨가 장희빈 뺨을 때리는 장면 여기에 좀 더 디테일하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 좀 전에 말한 누구라도 당황할만한 장면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숙빈 최씨는 처음부터 눈에 들어오지만 단지 눈에 띄는 무수리 중의 한 명, 아니 오히려 무수리 전부를 대신하는 환유적 기능처럼 보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별달리 주목하지 않을 것이다. 임권택 은 무수리들을 집합으로 만든 다음 이동시키거나 아니면 배경에 보이는 미장센의 일부로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 중의 누군가가 반복적으로 등장인물 곁에 다가온 다음 다시 멀어지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보였고 숙빈 최씨는 처음에는 정확히 그 자리에 있었다. 말하자면 시나리오 작법에서 말하는 중심을 이루는 혹성들을 배치한 다음 그 주변을 떠돌거나 오가는 위성들의 운동감. 첫 번째 등장하는 장면은 아니지만 장희빈이 숙종과 합궁을 한 다음 지위가 올라가자 궁궐에서 과장되게 자신을 과시하면서 걸어갈 때 숙빈 최씨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간다. 장희빈은 그녀의 버릇을 고쳐놓겠다면서 지나친 숙빈 최씨를 다시 불러 세워놓고 야단을 친다. 이 장면은 방점이 숙빈 최씨에 있지 않고 장희빈에 있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의 힘을 통제하는 데 실패하는 사례의 장면처럼 보인다. 이 신을 주변으로 그녀는 심지어 숙종 앞에서마저 안하무인격인 무례한 태도를 내보이고 함부로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숙빈 최씨는 여기서 희생의 사례처럼 지나쳐간다. 하지만 장희빈이 그 방자함으로 인경왕후에게 쫓겨날 때 숙빈 최씨는 궁궐 대문 앞까지 따라와 마치 앙갚음이라도 하듯이 몇 차례이고 모질게 장희빈의 뺨을 때린다. 단지 여기서는 부채를 갚는다거나 균형을 맞춘다는 구성상의 계산 이상으로 누구라도 약간 멈칫할 만큼 폭력적이기 때문에 걷잡을 수 없게 과잉 하는 힘 앞에서 어리둥절해진다. 게다가 이 순간에 황금심의 주제가까지 흘러나오기 때문에 이 영화가 장희빈을 대하는 갑작스러운 동정심에 대해서조차 무언가 잘 조절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숙종과 인현황후의 생일상을 마련한 숙빈 최씨 임권택 의 계산은 거기에 있지 않다. 장희빈이 다시 궁궐로 돌아왔을 때 숙빈 최씨는 마치 그녀의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일시적으로 사라진다. 그녀가 다시 되돌아오는 순간은 숙종이 장희빈의 계략에 넘어가 인현왕후를 사가로 내친 다음 신하들의 이에 관한 간절한 읍소를 물리치고 다시 더 세월이 지나 백성들의 뜻을 알고자 미복을 하고 잠행을 나갔다가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들은 다음에야 후회를 시작하는 대목이다. 종종 숙종은 야심한 밤에 궁궐 안을 산책하는데 대비마마 거처에서 우연히 만난 장희빈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도 한밤중 창경궁의 연못 앞에서이다. 그러므로 숙종의 한밤중 산책은 이상하지 않다. 그날 밤도 숙종은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궁궐을 떠도는데 우연히 숙빈 최씨의 방 앞에서 멈춘다. 숙빈 최씨가 한밤중에 조촐한 생일상을 마련하고 절을 올리고 있어 연유를 묻자 오늘이 인현왕후의 생일이라 궁 안에 계시지는 않지만 모시는 마음으로 인사를 드리고 있다고 아뢴다. 숙종은 참으로 갸륵한 마음씨로구나, 라며 어디 네 이야기를 들어보자, 라고 한 다음 방 안으로 들어선다. 이 방에 들어서기 전에 숙빈 최씨는 이미 앞질러 상감마마를 뫼실 곳이 아니오니 자신이 마당에 나가 인사를 드리겠다고 몇 번이고 말하지만 숙종은 매번 그 청을 거절한 다음 방 안으로 들어선다. 이중의 거절. 주고받는 거절. 두 거절 사이에 놓인 불균형한 힘의 관계. 이 신에 이를 때까지 숙종은 숙빈 최씨에게 눈길 한 번 준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야기가 여기서 이렇게 발전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렵다. 아니, 차라리 방안에 들어설 때 이상하게도 여기서는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신은 영화의 경제학에서 완전히 낭비된다. 임권택은 영화에서 중복을 허용하지 않는 영화감독이다. 나는 이미 이 신이 누구라도 당황할만한 순간, 이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둘 사이의 음란한 충돌이 있다. 하나는 영화 바깥에서 온 것이다. 봉건 군주제에서 왕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이 말의 방점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에 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는 말의 안에는 해서는 안 된다, 의 경계가 법이 아니라 도덕에 놓여있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영화 안에서 온 것이다. 숙종은 이미 인경왕후라는 공식적인 왕비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장희빈을 또 다른 애정의 대상으로 삼았다. 우리는 이런 사랑의 공식이 통속적인 궁중 연애풍 이야기에서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놀랍지는 않다. 문제는 그것이 놓여있는 자리에 있다. 지금 숙종은 애정의 대상이었던 장희빈과의 관계가 역전되어 자기 자신이 애정의 대상이 된 다음 그녀의 요구에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통을 받는 중이다. 우리는 계산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숙종의 고통은 착한 인현왕후를 내쫓았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의 자리에 있던 숙종은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는 그 자리로 인하여 하지 말았어야 할 것을 한 다음 그것으로 인하여 고통받는 자신을 발견한다. 임권택은 고통받는 숙종을 등 떠밀어 숙빈 최씨의 방 앞까지 보낸다. 방에 들어선 숙종은 문득 생각난 듯 숙빈 최씨를 바라본다. 숙빈 최씨는 그 눈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즉각적으로 알아본다. 물론 우리들도 거의 관습적으로 이루어진 쇼트의 위치와 배우의 연기, 그리고 프레임의 크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다. 나는 일부러 둘 사이의 간격을 벌려 놓았다. ‘알아본다’, 와 ‘모를 수가 없다’, 의 차이. 이때 도덕적 주체였던 숙종은 갑자기 욕망의 주체에로 옮겨간다. 이 둘 사이의 간극을 아무런 경고도 없이 넘어갈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이 떠오른다. 물론 한 명은 궁궐 바깥에서 장희빈으로부터 핍박을 넘어서서 생명의 위협까지 받고 있는 인현왕후이다. 숙종은 지금 둘 사이에서 고통받으면서 이제 이 관계를 셋으로 다시 하나를 추가하는 중이다. 인현왕후는 정말 견딜 수 있을까? 다시 하나가 더해지면 그녀는 돌아올 수 있을까? 둘 더하기 하나. 이때 무언가 인현왕후의 자리가 단지 좁아진다기보다는 지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는 중요한 논점이 숨어있다. 인현왕후는 단 한 번도 숙종에게 욕망의 대상이었던 적이 없다. 나는 역사적인 사료를 뒤로하고 오로지 드라마의 관점에서만 이야기하는 중이다. 다른 한 사람은 장희빈이다. 숙빈 최씨와의 새로운 관계는 정확하게 장희빈과의 관계의 반복이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장희빈이 궁궐 바깥으로 쫓겨나갈 때 숙빈 최씨가 쫓아 나와 그녀의 뺨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몇 번이고 때리는 장면을 보았다. 숙빈 최씨가 다시 추가로 셈에 더해질 때 문득 장희빈이 둘이 되는 상황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물론 숙종은 그걸 계산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왕의 자리는 그 계산 바깥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숙종이 숙빈 최씨와 새로운 관계를 만들 때 상황이 해결되기는커녕 완전히 새로운 상황으로 돌입하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미 장희빈이 숙종의 총애를 받은 다음 그녀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내내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임권택 은 그런 선택을 보여주어야만 했던 것일까. 상투적인 대답. 숙빈 최씨는 임신을 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장희빈은 그녀를 문초하던 중 갑자기 방문한 숙종의 면전 앞에서 그 장면을 보여주게 되고 결국 인현왕후를 다시 궁궐로 부르고 장희빈을 궐 바깥으로 쫓아내는 계기를 만들어주기 위해서이다. 즉각적인 반문. 숙종의 결정이 ‘못된’ 장희빈을 목격하고 ‘착한’ 인현왕후가 음모에 빠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그 어떤 순간도 이 장면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단지 숙종이 본 것은 자신이 새롭게 총애한 숙빈 최씨의 웃저고리가 벗겨진 채 매질을 당하고 있는 광경뿐이다. 그건 인현왕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장면이다. 임권택의 계산. 여기서 숙종은 비로소 욕망의 주체로서의 자신과 도덕의 주체로서의 자신을 일치시킨다. 그것이 마치 빼앗긴 권력을 되찾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그 자리에서 왕으로서의 명령을 내리고 모든 사태를 원상복귀 시키려 든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숙종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여기서 임권택은 단지 숙종을 도덕적 주체로 되돌려 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덕? 어떤 도덕?) 욕망의 주체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이 장면 전체를 음란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음란하게? 그렇다. 장희빈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벌어지는 분노와 질투의 감정은 오로지 그 두 사람이 숙종의 애정을, 좀 더 단도직입적으로 숙종의 성기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몸을 사이에 둔 이 무서운 경쟁. 이때 숙종은 여기서 도덕적 주체가 되기 위해 타자의 편에 서서(타자? 도대체 누구?) 타자의 주체가 되기를 바라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나는 여기서 짓궂은 가정을 하고 싶어진다. 만일 장희빈이 인현왕후만 돌아오지 않으면 괜찮다는 정치적 계산을 한 다음 숙종에게 자신과 숙빈 최씨가 숙종의 몸을 공유하기를 허락한 다음 그저 둘 사이에서만 오가기를 제안한다면 숙종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때 인현왕후의 자리는 어디인가? 물론 다행히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때 임권택의 계산은 왕의 사랑이란 얼마나 역겨운 것인지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숙종은 욕망의 주체로서 자기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도덕적 주체로서의 자리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 다음 다소 음산한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되찾은 정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임권택 이 주인공 없는 이야기, 아니 차라리 중심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 요화 장희빈 >은 분명히 정의가 회복되고 모든 일은 사필귀정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대중들의 요구일 것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이 정의의 몫을 숙종에게 안겨줄 생각이 없다. 거의 이야기의 오점처럼 작동하는 숙빈 최씨의 임신. 임권택은 역사의 사료를 끌어들이는 척하면서 숙종이 권력을 통하여 자신의 주체를 되찾는 과정을 마치 오작동처럼 취급하고 있다. <요화 장희빈>은 매우 기이한 방식으로 권력의 사필귀정에 대한 부정이 있다. 임권택은 마치 모든 것이 제대로 제 자리를 찾아간 것처럼 만들면서 이야기의 주체를 텅 빈 상태로 내버려 둔다. 아니, 정확하게 그 자리에는 몸이 없는 목소리가 있다. 하지만 그 목소리를 몸이 없기 때문에 영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그저 바깥에서 떠돌 뿐이다. 대타자라는 그 무기력한 시선. 임권택에게 그 자리는 언제나 수수방관할 따름이다. 어쩌면 그 목소리의 주인보다 더 이 영화에서 공정하고 정의로운 이는 달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그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 말의 반복. 없는 것과 마찬가지. 역사에서 알고 있는 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그것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임권택에게 역사의 주인이란 없다. 아마도 그것이 <요화 장희빈>을 라디오 드라마처럼 진행시킨 진정한 이유일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 앞에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이 영화에는 영화가 없다. 하지만... (계속) 1968년 90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한국영화주식회사 각본 장천호 촬영 안윤혁 조명 정덕규 편집 김희수 음악 김용환 남정임 신성일 태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