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2호
- 제작년도
- 1994
“물체가 움직이는 효과가 특수효과예요. 그래서 조연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특수효과 이문걸) 1) 영화 특수효과(Special Effect)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그렇다, 마술사이기도 했던 감독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elies). 그는 원-쇼트 필름(one-shot film)에서 우연히 ‘스톱 모션(stop motion)’을 발견해 마치 마술에서처럼 영화에서도 특수한 효과인 스톱 액션(stop-action), 이중 노출(double exposure), 원근감 트릭(perspective trick)을 사용해 영화를 만들었다. <신데렐라 Cinderella>(1899)에서는 스톱 액션을 써서 호박이 화려한 마차로 변하고 재투성이 아가씨의 누더기가 파티 드레스로 변하도록, <인디언 고무 머리 Indian Rubber Head>(1902)에서는 부분 마스킹을 이용한 분할화면(spilt-screen)을 활용해 자기 머리가 우스꽝스럽게 폭발하도록 했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듯이 <달세계 여행 A Trip to the Moon>(1902)에서는 원근 전환(perspective shift)과 많은 트릭 효과를 사용해서, 총알 우주선이 저 멀리 우주의 달로 발사되고 달세계에서 지구의 우산이 버섯으로 깜짝 변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이렇게 시작된 특수효과는 오늘날의 관객들의 뇌리에는 컴퓨터 그래픽(Computer-generated imagery, CGI)을 사용하여 스펙터클한 화면 시각 효과(Visual effect)를 내는 할리우드식 공상과학 영화를 만드는 최첨단 기술로 떠오르기 마련이다. 1990년대 이후로 본격적으로 특수효과의 영역으로 진입한 컴퓨터 그래픽은 최근 한국영화에서도 <퇴마록>(박광춘, 1998)을 시작으로 <괴물>(봉준호, 2006), <신과 함께-죄와 벌>(김용화, 2017) 등의 판타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 2004), <웰컴 투 동막골>(박광현, 2009), <명량>(김한민, 2014)처럼 사극과 전쟁 영화, <화산고>(김태균, 2001), <악녀>(정병길, 2017) 같은 액션 영화는 물론 멜로드라마 <뷰티 인사이드>(백종열, 2015)에서도 수준급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시각효과는 대부분 광학효과를 만들어내는 후반작업을 의미하는 것으로 엄격히 말하면 특수효과의 일부분이다. 자연현상인 눈, 비, 안개, 지진부터 건물 파괴, 총격이나 폭발의 장면 등을 기계적 또는 화학적 방법으로 재현하는 것, 고속/저속촬영은 물론 애니메이션이나 미니어처 같은 촬영 방법을 함께 동원해 실감나는 장면을 연출하는 그 모두를 일컫는 것이 바로 특수효과이다. 그래서 특수효과를 담당하는 인력들은 영화 연출에 전반에 대한 미학적 기술적 인식은 물론이고 물리 법칙이나 화학 배합에 대한 지식을 장착해야 한다. (사진1) <5인의 해병>(김기덕, 1961)에서처럼 1960년대 전쟁영화에서는 특수효과랄 것도 없이, 실탄을 장착한 총기를 사용해서 실제 전투 장면을 연출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의 궁금증, 그렇다면 한국영화에서 이러한 특수효과는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상상과 공상의 장면을 구성하고 코믹한 효과를 주기위해 특수효과가 시작된 서구의 영화 제작과는 달리, 한국영화에서의 특수효과는 영화계가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는 1950년대 후반, 일제 강점기나 한국전쟁 등 민족의 수난을 소재와 주제로 한 영화들에서 시작되었다. <5인의 해병>을 연출한 김기덕도 회고한 바 있듯이, 연기자 주변의 땅바닥에 총이 맞아 튀는 효과를 내기 위해 군이나 경찰의 지원과 엄격한 통제 하에 명사수를 데려다 실제로 실탄 사격을 해댔다. 2) 이처럼 전쟁과 첩보, 군사, 액션영화에서 적과의 총격이나 전투 장면에 으레 등장하기 마련인 총격과 폭파 효과를 내던 것이 바로 한국 특수효과의 시초였다. 실제 총에 실탄을 장전해 연기자들이 목숨을 걸고(?) 영화를 찍던 1960년대 초, 중요하지만 또 위험한 소품인 총기나 무기류를 챙겨 관리하는 것이 바로 제작부 소품 담당의 주요 임무였다. 아직은 영화 엔딩 크레딧에 ‘특수효과’라는 명칭으로 오르지도 못한 채, 총기류와 폭약류를 전문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이가 바로 이문걸이다. 1996년 <크레이지 댄스)<박한순>을 마지막으로 약 7백여 편의 극영화, <배달의 기수>등 군 홍보영화와 <전우> 같은 4백여 편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특수효과를 담당했다. ‘보이는 모든 장면을 실감나게 만드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은 이문걸은 특수효과의 불모지에서 수많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이 분야를 개척한, 명실상부 1980년대까지 한국영화계에 독보적이고도 유일한 특수효과 ‘맨’이었다. 그러므로 한국 특수효과의 역사는 이문걸의 작품연보와 일치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사진2) 군홍보영화 <잃어버린 세월>(설태호, 1990) 촬영현장에서 왼쪽부터 특수효과 감독 이문걸, 감독 설태호, 촬영감독 팽정문 이문걸은 1935년 일본 나가노켄에서 태어나 해방 직후 한국으로 왔다. 1956년에 군에 입대하게 되는데 꼼꼼하고 부지런한 성격 덕분에 상병 계급이던 당시, 오히려 하사를 병기계 보로 두고 병기계 담당을 맡았다. 1960년 한흥영화사의 제작부에 들어가게 된 것은 영화계에서 일하던 동생 이예남의 권유 때문이었다. 병기계 담당을 하던 군에서의 경력이 인연이 되어 그는 자연스럽게 제작부에서 총기를 관리했다. 그가 제작부로 입사한 한흥영화사는 최관두가 이끌고 있었고 당시 제작부장은 김홍빈이었다. 1959년 창립한 한흥영화사는 정창화의 멜로드라마 <사랑이 가기 전에>(1959)로 영화제작을 시작했지만 주로 활극, 스릴러를 기획, 제작하면서 가히 ‘액션 스펙터클의 총본산’으로 불렸다. 김홍빈의 제작부에서 활동한 이문걸은 <지평선>(1961)의 정창화, <싸우는 사자들>(1962)의 김묵,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의 임권택, <창살 없는 감옥>(1963)의 강범구의 작품을 함께 했다. (사진3) <지평선>(정창화, 1961) 포스터. 이 영화에서 이문걸은 제작부에서 총기 담당을 맡으며 특수효과에 입문했다. (사진4) <싸우는 사자들>(김묵, 1962) 포스터. 이 영화에서 이문걸은 ‘소품’ 담당으로 처음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지평선>에서도 활약을 했지만 이문걸이 처음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것은 한흥영화사의 10회 기념작 <싸우는 사자들>의 ‘소품’ 담당이었다. 휴전회담이 열리고 있는 한국전쟁 당시 철원지구에 잠입한 유격대의 활약상을 그린 이 작품은 여성 유격대원들의 전투장면과 포로수용소의 대폭파 장면이 압권이었다. ‘7백 여 명의 「엑스트라」 및 약 6백 자루의 권총, 「엠원」 소총, 「칼빙」소총, 자동소총, 다발총 등의 소화기를 동원하였고 TNT 폭탄 2백 「파운드」씩 두 번’을 사용해, 촬영 당시 ‘파편으로 경상을 입은 「엑스트라」가 21명’이나 될 정도로, 당시 한국영화에서는 처음 있는 특수효과를 실험해 전쟁 스펙터클을 구현해 낸 액션 영화였다. 3) (사진5) <두만강아 잘 있거라>(임권택, 1962) 중 독립군과 일본군이 펼치는 설원의 최후 전투 장면 일본군 시설을 파괴하는 학생독립단의 무력 항쟁을 그린 임권택의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특수효과 ‘맨’ 이문걸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첫 촬영은 독립투사가 일본군 중대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었다. 대관령에서 촬영한 이 장면을 위해 이문걸은 연기자들의 안전을 확보하고 실탄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총격 효과를 내는 특수효과를 실험한다. 마분지를 연필 굵기로 3cm씩 말아서 그 속에 특수 약품을 넣어 가짜 실탄을 만들었다. 그렇게 백여 개를 만들어 하나씩 특수전선을 연결한 후 땅속에 일정한 간격으로 묻어 선에 전기가 흐르도록 합선·폭발하여 흙이 튀면서 실탄이 맞는 특수 효과를 만들어 냈다. 4) 또 이 영화에서 놓칠 수 없는 장면은 만주로 가려는 독립군들의 마지막 격전, 두만강 도하를 목전에 둔 겨울 계곡에서 독립군과 일본군이 벌이는 전투이다. 영화 내내 어두웠던 흑백 시네마스코프의 화면은 눈 쌓인 설원을 활강하는 스키 부대의 활약이 돋보일 뿐만 아니라 엄청난 살상이 벌어지는 총격전은 비장할 만큼 눈부시기도 하다. (사진6) <증언>(임권택, 1973)의 탄착효과가 돋보이는 전투장면 (사진7) <증언>(임권택, 1973)의 한강 다리 미니어처 폭파 장면, 이문걸은 특히 <빨간 마후라>(1964)와 <대괴수 용가리>(1967)의 경험 이후에 다리 폭파를 연출하는 데 있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임권택과 이문걸이 함께 만든 이러한 액션 미학은 <증언>(1973),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 <임진란과 계월향>(1977), <아벤고공수단>(1982), <개벽>(1991), <장군의 아들3>(1992), <태백산맥>(1994)으로 이어진다. 점차 영화계 내서도 총격 효과를 내는 것, 화약을 다루는 것이 전문적인 영역으로 인식되면서, 이문걸은 자연스럽게 ‘특수효과를 개척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한흥영화사에서 탄탄하게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이문걸은 1963년 영화사가 폐업하자 <소만국경>(강범구, 1964)에서부터는 본격적으로 ‘특수효과’로 크레딧을 올렸고, 조수 5명을 데리고 독립했다. (사진8) <소만국경>(강범구, 1964) 총격 장면의 화약 효과 ‘제작부’나 소품‘으로 이름을 올리던 그가 특수효과로 독립하면서 시작한 것은 ‘가짜 실탄’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 ‘가짜 실탄’은 하나하나 말아서 만들어야했던 불편한 ‘마분지 실탄’이나 다소 위험했던 공업용 뇌관을 대신할 수 있는, 보다 간편하고 좀 더 안전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실탄과 선을 직접 맨손으로 합선시켜야만 폭발시킬 수 있던 방법도 개선해서 버튼 하나를 눌러 수백 발의 실탄을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자동 폭발시킬 수 있는 전자식 ‘컨트롤 박스(control box)’도 그의 특수효과 팀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사진9) <빨간 마후라>(신상옥, 1964) 미니어처로 제작한 비행기와 한강 다리 장면 미니어처(miniature)를 제작해 물리적, 화학적 효과를 가미하는 촬영 방법은 데이비드 W.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1916),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1927)에서도 사용했던 영화사 초창기부터 발달해온 오래되었지만 대표적인 특수효과 기법이다. <빨간 마후라>(신상옥, 1964)에서 이문걸은 동생 이예남과 함께 미니어처 작업을 처음 시도했다. 당시 주먹구구식의 미니어처를 만들어 야외에서 촬영해 폭파 장면을 찍었다. 이런 장면의 연출은 감독과 긴밀하게 소통해야하는 것은 물론, 폭파되어 전소될 건물을 짓기 위해 미술 담당 스태프에게 톱밥을 섞은 연한 석고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을 하고 여러 번 실험해 촬영 스태프와 합을 맞추는 과정을 거쳐야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때부터 그는 영화에서 여러 번 한강 다리를 폭파시키는 경험을 했는데, 다리 폭파(?)의 전문가가 되었다. (사진 10)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중 칠흑 같은 우주에서 별 사이를 비행하는 우주선 장면 (사진 11)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중 스크린 프로세스를 이용해 용가리가 서울 시내의 건물을 파괴하는 장면 (사진 12)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중 용가리와 대치하는 군의 포격 장면 (사진 13)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중 용가리가 한강 다리를 파괴하는 미니어처 장면 이문걸이 본격적으로 미니어처와 결합한 특수효과를 몸에 익힌 것은 김기덕의 한국형 공상과학 영화이자 괴수물 <대괴수 용가리>(1967)에서였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철사에 모형 비행기를 매달아서 자연스럽게 움직이도록 하는 공중전을 연출했고, 떨어지는 유성은 물론 반짝이는 별 사이를 비행하는 우주선을 영상화했다. 또 특수전선을 늘어놓고 순간적으로 전류를 흐르게 하여 번개가 치게 하고 미니어처로 만든 한강 다리가 폭파되는 장면을 거뜬히 해냈다. 이 영화에서 이문걸은 괴수물에 능숙한 일본의 특수효과 전문인력들에게 연화(煙花, 불꽃놀이 폭죽으로 사용되는 화약)로 영화 촬영용 폭약을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미니어처이다 보니 축소해 만든 건물이나 다리를 폭파하면 폭파 시간이 너무 짧은 것은 물론 눈으로 보기에도 작은 폭발로 보인다. 이를 스크린 상에서 용가리가 야기한 거대하고 웅장한 재난의 현장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특수카메라를 이용한 고속 촬영은 물론 스크린 프로세스를 이해한 특수효과 팀의 폭파 기술이 유기적으로 접목되어야 한다는 방법론을 체화했다. 그가 이때 연마한 미니어처 폭파 기술은 이후 <증언>에서의 한강 다리 폭파 장면은 물론, 1980년대를 풍미했던 <조선왕조 오백년>같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임진왜란의 해전을 재현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사진14) <갯마을>(김수용, 1965)에서 이문걸이 만들어 낸 새벽의 안개 장면 하지만 총기나 폭약으로 특수한 효과를 만들어내는 기술자로만 이문걸을 설명해서는 안 된다. ‘눈으로 보이는 모든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특수효과 담당자가 맡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프레임 속에서 바람이 불고, 눈비가 오고, 지진이 나게 하고, 물 위에 살얼음이 뜨게 만들었다. 연기자의 몸에서 피가 날 수 있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훨훨 공중을 날 수 있게 만들어야 했다. 우선 김수용의 <갯마을>(1965)에서의 안개 낀 바닷가 소나무밭 장면을 보자. 시동생 성칠(이낙훈)과 시어머니(황정순)은 마을 사람들이 잠든 안개 낀 새벽을 틈 타 주인공 혜순(고은아)이 상수(신영균)이 마을을 떠나보낸다. 부산 기장에서 촬영한 이 장면에서 감독은 ‘바다 전체에 안개(스모그)를 깔아 달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주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혹여 안개가 낀 바다를 연출하기 위해 바다 전체에 연기를 까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바람이 불 수 있는 야외공간을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당시 스모그를 만들어내는 담당 스태프를 ‘쪼다통’이라 불렀다. 피우라는 시점에 해당 공간에 스모그를 채운다고 해도 바람이 불어 버리면 담당 스태프는 변명의 여지없이 ‘쪼다’ 소리를 듣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제안으로 이 장면은 바람이 거의 없는 기압이 낮은 새벽에 배를 타고 바다 위에서 숨을 참아가며 연막통을 터뜨려 만들어낸 것이었다. (사진15) <결사대작전>(고영남, 1969)에서 인천상륙작전을 경험한 이문걸을 이후 <오, 인천!>(1981)의 특수효과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다. (사진16)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 1974) 포스터 (사진17) <의사 안중근>(주동진, 1972) 포스터 흑백 시네마스코프가 표준이던 시기 특수효과를 시작했던 이문걸은 영화를 촬영하기 이전에 연기자들과 동선을 맞춰보고 촬영지에 가서는 수차례 시험 폭파를 했다. 연기자의 안전을 위한 이유가 첫 번째였기는 하지만 필름 값이 너무 비쌌기 때문에 제한된 예산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완벽한 폭파 시험뿐이었다. 1960년대 후반 컬러 시네마스코프가 점차 표준이 되어 가자 감독들은 특수효과에서 더 많은 폭파 불꽃을 시각화하기를 원했고, 총탄을 맞자마자 피가 나는 자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싶어 했다. <의사 안중근>(주동진, 1972) 같은 영화에서 안중근(김진규) 의사가 이등박문(박노식)에게 총격을 가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서 이문걸은 피가 범벅된 화약과 함께 솜을 긴 대롱에 넣고, 에어스프레이(Air-spray)로 쏘아주는 방식을 사용했다. 전쟁 영화에서 총탄을 맞아 가슴에서, 머리에서, 철모에서 피가 흐르는 장면들은 분장과 이런 특수효과의 트릭들을 활용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1970년대는 대만과 홍콩영화와의 합작이 많아지고, ‘으악새 영화 혹은 참바라 영화’로 불리는 액션영화가 국내에서 많이 제작되던 시기, <돌아온 외다리>(이두용, 1974), <소림사의 결투>(채양명, 최현민, 1975), <국제경찰>(고영남, 1976) 같은 영화에서 이문걸은 배우들의 액션과 점프를 도와줄 수 있는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다양한 장비를 도입하는 노력을 하기도 했다. (사진18) <오, 인천! Oh, Inchon!>(테렌스 영, 1981) 포스터 이 영화 작업을 통해 이문걸은 할리우드식 영화제작 및 운영시스템과 선진 특수효과를 경험했다. (사진 19) <오, 인천! Oh, Inchon!>(테렌스 영, 1981) 폭격 장면 스틸 특수효과가 주요했던 전쟁영화 <오, 인천! Oh, Inchon!>(테렌스 영, 1981)은 이문걸의 작품연보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마찬가지로 이 영화의 크레딧에서 그가 특수효과를 담당했다는 흔적은 없다. 이 영화에 참여하게 되면서 이문걸은 <오, 인천!> 촬영에 참여해 할리우드식 영화의 제작 및 운영 시스템과 선진 특수효과를 경험하게 되는 값진 계기를 얻었다. 통일교 문선명의 제작으로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이 작품은 <디어 헌터 Dear Hunter>(마이클 치미노, 1978)에서 특수효과를 담당했던 프레드 크래머(Fred Cramer) 팀이 도맡아 작업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촬영을 위한 무기류의 국내 반입이 쉽지 않았을 뿐더러 할리우드에서 촬영용으로 사용하던 흑폭약이나 화학 약품들을 한국에서 구하는 일이 녹녹치 않았다. 또 특수효과가 대부분인 로케이션 촬영이 상당수이고 계획대로 촬영할 수 있기 위해서 국내 여건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자 이문걸의 특수효과 팀이 합류했다. 실제로 이 영화의 촬영용 폭약은 대부분 이문걸이 직접 공수해 가능한 것이었고, 이문걸 팀은 촬영 상황에 따른 장비 응용력은 할리우드 특수효과 팀에 비해 월등했기 때문에 이 팀에 대한 신뢰는 점점 깊어져갔다. 5)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인천 등대 유리창을 깨어야 했는데 건설부 친구들이 꼭대기에 올라가는 사다리를 제대로 만들지 않아서 산소통을 끌고 갈 수가 없었다. 그러자 도리가 없어서 이문걸 씨가 고무줄에 베아링을 연결지어 쏘아 깰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한국 측의 이문걸 씨나 박광남 씨도 상당한 실력자들이어서 미국 측도 만만히 볼 수가 없었다.” 6) 실사에 더 유능했던 할리우드 특수효과 팀과 미니어처를 제작해 한강 다리 폭파 장면을 촬영했으나 결국 감독 테렌스 영은 이문걸에게 맡겨 그 장면을 재촬영을 했을 정도로 그의 미니어처 폭파 기술을 인정했다. 또 할리우드 스태프들은 이문걸이 만든 콘트롤 박스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결국 이문걸 팀에게 컨트롤 박스를 얻어갔다. 총탄이 비 오듯 퍼붓고 여기저기서 폭탄이 터지는 아비규환의 전쟁터. 그리고 가슴에 총탄을 맞은 연기자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이 모든 장면들은 진짜‘처럼’ 보이는 비장한 아름다움을 가져야하고 감독이 ‘컷’을 외칠 때까지 연기자들과 스태프들은 머리털 하나 다쳐서는 안 된다. 이문걸이 일생을 바친 특수효과란 “같은 양의 특수약품이더라도 방향, 습도, 위치에 따라 위력이 다르고 화면도 달라” 7) 지기 때문에 철저한 계산은 물론 수많은 경험치가 필요한, 자신은 물론 스태프의 목숨을 담보로 한 매번 위험천만한 작업이었다. 총기 소지가 힘들 뿐 아니라 탄약과 화약을 민간인에게는 공식적으로 판매하지 않는 한국에서 이문걸은 종종 ‘불법으로’ 일했다. 그는 40여 년 동안 참고할 만한 그 어떤 선례도 없는 가운데 영화 장면을 위해서 총을 개조하고 뇌관을 만들었다. 이문걸은 서늘한 간담을 뜨거운 열정으로 녹이며 임하는 작업 과정 속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험과 현장 감각으로 한국영화의 명장면들을 만들어 낸 특수효과 ‘맨’이자 스크린의 마법사이다. * 이 글은 필자가 면담자로 참여한 구술, 「이문걸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2』,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이채, 2006를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이문걸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2』,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이채, 2006 참고. 2) 「김기덕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1』,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이채, 2005 참고. 3) ‘TNT 4백 「파운드」로 쾅!’, 조선일보, 1962년 8월 28일 4면. 4) 오홍근, ‘국내 유일, 그만둘 자유도 없어 영화 특수효과맨 이문걸 씨’, 중앙일보 1981년 2월 17일 6면. 5) 한재수, 오! 인천 그 실록 <2회>, 영화, 영화진흥공사, 1980년 1/2월호, 45~48쪽. 6) 한재수, 오! 인천 그 실록 <3회>, 영화, 영화진흥공사, 1980년 3/4월호, 43쪽. 7) 오홍근, 앞의 기사.
존 휘트니는 모션 그래픽의 아버지로 기술되는 경우가 많다. 휘트니는 1955년부터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인 UPA(United Productions of America)에서 일했다. 여기서 그래픽 디자이너인 솔 배스(Saul Bass)를 만났고, 둘이 함께 영화의 타이틀 시퀀스와 광고의 특수효과를 제작해서 유명세를 얻었다. 이때 제작했던 대표적인 타이틀 시퀀스가 히치콕의 < 현기증 >(1958)(사진1)이다. 이 시퀀스는 지금도 모션 그래픽 교재들에서 모범 사례로 인용될 정도로 유명하기 때문에, 휘트니를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로 오해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가 되기도 한다. 게다가 휘트니가 1960년에 설립했던 회사의 이름이 모션 그래픽이었기 때문에, 그를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로 설명하는 것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휘트니의 이름 앞에 굳이 무엇의 아버지라는 타이틀을 붙여야 한다면, 컴퓨터를 이용한 생성예술 혹은 오디오비주얼 퍼포먼스의 아버지라고 붙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이 글에서는 휘트니를 컴퓨터를 통해 소리와 빛을 연결하는 구조를 생성하고자 했던 작가로 설명하고자 한다. [사진1]<현기증(1958)>의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4CZfSc6nJ8U'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휘트니는 1980년에 「디지털 하모니: 음악과 시각예술의 상보성에 관하여 Digital Harmony: on the Complementarity of Music and Visual Art」를 펴낸 바 있다. 이 책의 제목과 부제는 휘트니의 관심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데, 자전적 배경, 음악과 영화에 대한 사유들, 비디오디스크와 컴퓨터라는 새로운 매체에 대한 이해, 작업 방식들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휘트니는 1917년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서 태어났는데, 자신이 살았던 동네는 예술로 먹고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곳이었다고 회고하였다. 휘트니는 퍼모나 칼리지에 입학했지만 학교에 실망하고, 21살이었던 1938년에 네 살 아래 동생인 제임스와 함께 새로운 인생을 찾겠다는 희망을 품고 유럽으로 떠났다(이 글에서 휘트니는 존 휘트니를 지시하고, 제임스 휘트니는 제임스로, 둘을 함께 언급할 때에는 휘트니 형제로 표기한다). 그 희망은 비록 1년간의 유럽 체류로 끝이 났지만, 휘트니 작업의 토대를 만들어주었다. 휘트니는 로테르담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그의 작업의 단초가 되고, 경력을 관통하는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를 보았다. 흰색으로 도장된 비행기 날개의 곡선, 철판의 모서리들, 철판을 연결하는 못의 기하학적 형상들과 떨림들 그리고 이 요소들이 비행에 따라 그려내는 빛과 그림자의 움직임이다. 휘트니는 이 부분들을 촬영해서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 생각은 단지 발상으로만 남았지만, 휘트니가 영화라는 매체에 설정한 질문과 과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휘트니에게 비행기의 날개와 그 부속들은 역동적인 구조와 부분들의 운동이라는 개념을 형상화한 대상이었다. 휘트니는 원래 음악을 하고 싶어 했는데, 음악에 비해서 세계는 너무나도 정적이라고 생각했다. 휘트니가 설정한 문제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그에게 세계는 베토벤의 음악과 비교했을 때 따분할 정도로 정적이다. 빛은 소리보다 빠른데도 불구하고, 소리를 재료로 하는 음악은 역동적이지만 빛을 재료로 하는 영화는 음악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무겁다. 그 이유는 영화가 카메라로 정적인 세계를 찍기 때문이고, 세계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카메라가 움직임이 큰 대상들을 클로즈업으로 찍거나 카메라를 빠르게 움직이고 편집의 호흡을 짧게 가져가서 역동적이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들이 음악보다 가벼울 수는 없다. 또한 사람들은 집요하게 카메라로 촬영된 이미지에서 무엇이 어디서 찍힌 것인가를 찾으려고 애쓰며, 그것들을 분별해낼 수 없다면 사진적 이미지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즉 휘트니에게 영화의 기본적 문제는 음악만큼 추상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휘트니가 영화에 설정한 과제와 목표는 ‘유동적인 건축 liquid architecture’이라는 핵심어로 요약할 수 있다. 유동적 건축은 변화와 구조를 동시에 강조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쾨테가 “음악은 유동적인 건축이고, 건축은 응고된 음악이다”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휘트니는 유럽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 유동적인 건축이라는 개념을 접했고, 유동적이라는 말을 시공간 상에서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고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휘트니는 20세기에 이르러 시각예술이 마침내 자신의 참된 구성요소들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표면, 색채, 형태, 선, 질감과 같은 요소들은 시각예술의 알파벳이었고, 이 요소들을 발견함으로써 시각예술은 음악의 유동적 구조를 획득할 수 있었다. 반면에 휘트니에게 영화는 늘 현실의 어떤 장소에 속박되어 있는 매체였기 때문에, 영화가 유동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현실에 속하지 않는 어딘가를 찾아내야만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카메라를 버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휘트니가 영화라는 매체에 요구했던 것은 음악에 준하는 역동성과 추상성을 갖추는 것이었고, 스스로에게 설정한 과제는 카메라로 매개되지 않으면서 빛을 구조화하여 음악에 상응하게 하는 것이었다. 빛과 소리의 구조적 상보성을 찾고자 하는 시도는 역사적으로 오래되었기 때문에, 휘트니의 생각이 새롭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카메라를 버려야 한다는 판단 역시 새로울 것은 없었다. 휘트니에 앞서 만 레이, 한스 리히터, 비킹 이겔링, 발터 루트만과 같은 작가들이 카메라 없이 빛을 매개하여 음악에 상응하는 구조를 만드는 방법을 탐구했었기 때문이다. 또한 카메라가 현실의 대상을 찍는다는 이유 때문에, 영화가 음악과 같이 유동적이 되기 위해서 카메라를 버려야 한다는 결론이 곧바로 내려질 수도 없다. 이를테면 이 연재에서도 다루어질 구조영화 작가들을 생각해보면, 굳이 음악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카메라를 버리지 않더라도 영화의 구조를 유동적이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휘트니에게 고유하고 특별한 점이 있다면, 그 계기는 쇤베르크의 음렬주의로부터 비롯된다. 휘트니의 유럽 체류는 1939년 파리에서 막을 내리는데, 이때 르네 라이보비츠(Rene Leibowitz)를 만나서 쇤베르크의 12음기법을 배웠다. 이 기법을 구성하는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한 음렬(tone row)은 반음계의 12음을 특정한 순서로 배열한 것이다. (2) 한 음렬 내에서 어떤 음도 반복되지 않는다. (3) 기본(Prime, P), 반행(Inversion, I), 역행(Retrograde, R), 역행-반행(Retrograde-Inversion, RI)을 각 음정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적용한다(P, I, R, RI를 각각 사분면에 표시한다고 할 때, 기본 P를 1사분면에 놓으면 기본과 좌우대칭을 이루는 역행은 2사분면에, 좌우/상하대칭을 이루는 역행-반행은 3사분면에, 상하대칭을 이루는 반행은 4사분면에 위치시킬 수 있다). (4) 음렬은 반음계에서 네 가지 변형 중 어떤 것으로부터도 시작할 수 있다. 이 원칙들을 적용해서 음렬을 구성하면 [그림1]과 같은 기본적인 구성이 가능하다. [그림1]12음기법을 이용한 음렬 구성의 예시 12음으로 이루어진 한 음렬에 대한 기본, 역행, 반행, 역행-반행을 행렬로 표시하면 [그림2]와 같다. 행에서 오른쪽으로 가는 화살표는 기본을 지시하고 행에서 왼쪽으로 가는 화살표는 기본에 대해 역행을 하고 같은 도수만큼 이동(transposition)한 것을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열에서 아래로 향하는 화살표는 기본에 대한 반행에 같은 도수만큼의 이동을 지시하고, 위로 향하는 화살표는 그 역행에 도수이동을 나타낸다. 이렇게 하면, 기본 12, 역행 12, 반행 12, 역행-반행 12 음렬로 총 48개의 음렬을 얻을 수 있다. 쇤베르크의 12음기법은 제2빈악파의 작곡가들인 베베른이나 베르크 등에게 계승되어 음렬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 [그림2]음렬의 행렬 쇤베르크의 12음기법의 핵심은 음악을 순수한 데이터와 문법으로 전환시켰다는 데 있다. 위에서 서술한 원칙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초기에 유한한 수의 원소를 갖는 집합과 이 원소들을 매핑하는 함수를 정의하고 나면, 나머지 절차들은 자동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즉 음악에서 유사 오토마타가 가능해진다(초기 상태와 상태 전이에 대한 정의는 있지만, 결과를 판단하고 종료하는 절차에 대한 규칙이 없다). 쇤베르크는 1926년에 12음기법을 처음 적용한 <오케스트라를 위한 변주곡>에 착수하고 나서, “소리의 생산과 소리들의 관계의 정확성을 보장하고, 소리들을 초보적이고 믿을 수 없으며 무심한 음악가들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모든 악기의 장점을 극대화”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쇤베르크의 목표는 음악가의 일시적인 감정이나 직관으로부터 음악을 해방시키고, 음악을 생성하는 문법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음악을 하나의 예술 장르가 아니라 하나의 형식언어로 전환하겠다는 의지이다. 음악이 형식언어가 될 수 있다면, 컴퓨터라는 추상기계에 의해 연산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쇤베르크가 휘트니에게 미친 영향은 역동적 구조라는 측면에서 음악과 영화에 접근했던 휘트니를 생성적 구조라는 방향으로 틀게 했다는 데 있다. 또한 데이터와 문법으로 소리를 생성할 수 있다면, 빛 역시 동일한 방법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발상을 가능하게 했다. 요약하면 휘트니가 유럽 체류 기간에 스스로에게 설정했던 과제는 카메라를 통하지 않고 빛을 매개하여 소리에 상응하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었고, 이 과제는 쇤베르크의 음렬주의를 통해서 빛과 소리가 생성되는 구조를 발견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물론 이 모든 생각들이 유럽에서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그 뿌리는 유럽 체류 기간에 내리고 있으며 도래할 매체인 컴퓨터를 향하고 있었다. 1939년 유럽에서 돌아온 휘트니 형제는 1936년부터 파라마운트에 고용되어 일하고 있었던 오스카 피싱거의 작품들을 보게 되었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휘트니 형제는 1940년부터 1942년까지 패서디나에 있던 그들의 스튜디오에서 8mm 작품들을 만들었다. 이때 완성한 작품들은 <원본 주제에 대한 24개의 변주곡>이라는 제목으로 묶여졌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쇤베르크의 이론을 적용한 작품들이었다(공교롭게도 쇤베르크는 1934년부터 남가좌주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은 아래에 삽입한 제임스의 <원에 대한 변주곡>(1942)이다.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TnU88XWYjEs'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1]제임스 휘트니의 <원에 대한 변주곡>(1942) 휘트니 형제는 ‘변주곡’ 시리즈를 만들면서 피싱거의 방식(카드보드지를 기하학적인 형태로 잘라내서 움직이는 방식)을 차용했지만, 피싱거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음악을 사용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껴 소리를 삽입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각적인 요소들이 자동적으로 소리를 생성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했고, [사진2]와 같은 장치를 고안했다. 사진에서 보이는 진자를 흔들면, 필름의 사운드트랙 부분에 사인파를 그려서 소리의 패턴이 새겨질 수 있도록 만든 장치였다. 이 장치를 이용해서 만든 작품이 <필름 습작 No. 1-5>(1943-44)[영상2]이다. 휘트니 형제는 사운드트랙 위에 그림을 그려서 소리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자신들이 고안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그러한 방식을 먼저 실험했던 작가 역시 오스카 피싱거였다. 오스카 피싱거는 [사진3]과 같이 그래픽 패턴을 그려내서 소리를 생성하는 실험을 1932년에 수행했던 바가 있고, 이 결과가 <장식 사운드 Ornament Sound>이다(이 작품은 비주얼 뮤직 센터(Center for Visual Music)에서 복원되었고 비메오(Vimeo)에서 유료로 스트리밍하고 있다 https://vimeo.com/ondemand/26951 ). [사진2]진자를 이용한 소리 생성 장치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kuZbgM8yxtY'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2]휘트니 형제의 <필름 습작 No.1> [사진3]오스카 피싱거의 <장식 사운드>의 그래픽 패턴들 제임스는 <필름 습작> 시리즈를 완성한 직후 뉴욕으로 가서 힐다 르베이(필자가 쓴 마리 멘켄의 < 노트북 > 리뷰에도 등장하는 구겐하임 미술관의 초대 디렉터, 이름이 다소 길어서 힐라 르베이, 바로네스 르베이 등으로도 불렸다)를 만나서 작품을 구매해줄 수 있는지와 새로운 작품을 위한 기금을 줄 수 있는지를 문의했다. 르베이는 <필름 습작> 시리즈뿐만 아니라 <원본 주제에 대한 24개의 변주곡> 역시 구매했고 1944년과 1945년 초에 상영하였다. 이 상영회에는 토니 스미스, 존 케이지, 테네시 윌리엄스, 마르셀 뒤샹 등이 참석했었다. 그런데 성격이 괴팍하기로 유명했던 르베이는 휘트니 형제의 작품을 보다가 영사실로 뛰어가서 작품 상영을 중단시켰다. 다행히 이 상영회에 잭슨 폴록 역시 참석해 있었고, 폴록이 개입해서 상영회가 마무리될 수 있었다. 이후에 이 작품들은 구겐하임에서 정기적으로 상영되었다. 또한 휘트니 형제는 1949년 브뤼셀 영화제에서 <필름 습작>으로 1등상을 수상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휘트니는 록히드사에서 초고속 미사일 사진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여기서 M5 대공포 디렉터(Antiaircraft Gun Director)라는 대공방어 미사일 유도 시스템을 접하게 되었다. 이 장비는 원래 영국에서 개발했던 것으로 록히드사가 개조해서 사용 중이었는데, 무게가 850파운드에 11,000개가 넘는 부품으로 구성된 아날로그 컴퓨터였다. 휘트니에게 M5는 미사일 유도 시스템이 아니라, 카메라 없이 빛을 매개하고 빛을 데이터와 문법으로 처리하고자 하는 그의 목표에 부합하는 장치였다. 전쟁이 끝나고 휘트니는 불용품으로 경매에 나온 M5를 구입하고, 추가로 중고 부품들을 모아서 M5를 그래픽 생성 장치로 개조하였다. 휘트니가 만든 장치는 요즘으로 치면 모션 콘트롤 카메라에 해당한다. 휘트니에게 유명세를 안겨 주였던 영화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들은 그가 개발한 장비로 만들어졌다. 휘트니는 영화 타이틀과 광고 특수효과 작업으로 얻은 수익금으로 1960년에 모션 그래픽이라는 회사를 설립해서 상업적인 작업들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듬해 그가 개발한 장치로 만든 첫 작품 <카탈로그>[영상3]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에는 휘트니가 고안한 슬릿-스캔(slit-scan) 방식이 적용되었는데, 이 방식은 요즘에도 미디어 아트 작품들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휘트니가 개발한 장치로 작업하는 방식은 <컴퓨터: 인간의 지배에 도전하다>[영상4]라는 다큐멘터리의 일부에서 볼 수가 있다.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TbV7loKp69s'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3]휘트니의 <카탈로그(1961)>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5eMSPtm6u5Y'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4]휘트니의 아날로그 컴퓨터 작업 방식 휘트니는 아날로그 컴퓨터로 한 작업들로 평가를 받아서 1966년에 IBM 아티스트 레지던스에 초청되었고 1969년까지 후원을 받았다. 여기서 GRAF(Graphic Additions to FORTRAN)의 개발자인 잭 시트론과 만나 협업할 수 있게 되었다. 시트론은 IBM 모델 360 컴퓨터와 2250 그래픽 디스플레이 콘솔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 그래픽 콘솔은 다소 복잡한 방식으로 작동되었는데, 4000 * 4000개의 점을 실시간으로 표시할 수 있었다. 휘트니는 GRAF를 배웠고, 이 언어를 사용하여 1966년에 < 순열 >[영상5]을 만들었다.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kdYxJ85RSds'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5]휘트니의 <순열>(1966) < 순열 >은 휘트니가 디지털 컴퓨터로 만든 첫 작품이었다. <순열>은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매 프레임이 총 281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왜 281개의 점이어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짐작건대 소수들 중에서 시스템이 처리하기 용이한 수를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순열>은 총 281개의 점의 초기 위칫값과 일련의 명령어를 이용하여, 프레임별로 점들의 위치를 변화시키면서 만들어졌다. 그 명령어들의 일부를 글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스크린의 중앙에서부터 시작하라. 계산한 거리만큼 오른쪽으로 이동해라. 계산한 각도만큼 원주를 따라 왼쪽으로 회전하라. 거기서부터 외곽 방향으로 새로운 반지름을 계산하고, 원주를 따라 새로운 각도만큼 회전하라. 그 위치에 하나의 점을 찍고, 나머지 280개의 점에 대해서도 동일한 절차를 반복하라. < 순열 >의 시각적 패턴은 복잡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단순한 알고리즘으로 짜여있다. 반지름과 각도를 매개변수로 하는 일대일 대응 함수들이 전부이다(휘트니는 「디지털 하모니」에서 반지름 변수를 RT로, 각도 변수를 DT로 표시하면서 이 두 변수가 달라짐에 따라 어떤 패턴이 생성되고, 이에 대응하는 음계는 무엇인지 상세하게 설명해놓았다. 다소 분량이 많은 관계로 이 글에 옮기기가 어려운데, 관심 있는 분들은 56-59페이지와 70-71페이지에 삽입된 그림만 참조해 봐도 좋을 것 같다). 휘트니가 <순열>에서 수행했던 작업 방식은 <스크리닝 룸>(하버드 대학의 인류학과 교수이자 대학 내 필름 연구 센터를 설립했던 로버트 가드너가 1972년부터 1981년까지 진행했던 프로그램으로, 휘트니가 첫 번째 출연자였고 이외에도 미국 영화사에서 중요한 작가들이 출연했었다. 이 중에서 20여 편은 DVD로 발매되어 판매 중이다)이라는 TV 프로그램[영상6]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BaW4DTKNflA'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6]<스크리닝 룸>에 출현한 휘트니의 인터뷰 휘트니가 < 순열 >에서 사용했던 작업 방식은 디지털 컴퓨터에서 포트란(FORTRAN)과 같은 형식언어를 사용했을 때 당연히 따를 수밖에 없는 절차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휘트니에게 빛을 데이터와 문법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쇤베르크의 12음기법에 대응하는 방법을 탐구하는 것을 의미했다. 휘트니의 작품들에서 원형의 패턴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가 특별히 반지름과 각도라는 두 변수를 통해서 생성되는 패턴들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이 두 변수를 사용했을 때 만들어지는 패턴들(대표적으로 장미꽃잎과 같은 패턴)들은 사전에 계획되었던 것이 아니라, 두 변수들의 비율을 변경해가면서 생성되었던 것이다. 휘트니는 반지름과 각도의 비율을 변경했을 때 특정한 패턴이 생성되었다가 점이 분산되어 임의로 흩어진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긴장과 이완의 반복으로 이해했다. 그가 유동적 건축이라는 개념을 이해했던 방식대로 <순열>을 만들었던 것이다. 쇤베르크의 이론에 받은 영향을 고려하면 휘트니가 말하는 하모니가 어색해 보이지만, 이때 하모니는 화성이 아니라 가로 대 세로, 반지름 대 각도 등의 비율에 따라 긴장이 생성되고 해체된다는 것을 뜻한다. 휘트니가 < 순열 >에서 디지털 컴퓨터를 처음 사용했다고 해서, 카메라와 필름이 완전히 사라졌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때 카메라와 필름은 촬영장치가 아니라 하드 디스크를 대신하는 저장장치였다. 휘트니는 아날로그 컴퓨터를 사용했던 <카탈로그>부터 컴퓨터를 시각적 패턴을 생성하는 데 사용했고, 녹화와 후반작업은 필름으로 했다. 컴퓨터로 시각적 패턴을 생성하고 난 다음에 한 프레임씩 흑백 필름으로 촬영하고, 색깔은 옵티컬 프린터를 이용해서 입혔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당시의 컴퓨터 시스템의 저장과 그래픽 능력이 빈약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휘트니가 비로써 카메라와 필름을 내던진 것은 <아라베스크>(1975)를 만들면서부터였다. <순열>에서 사용된 음악은 순다람 발라찬더(Sundaram Balachander)가 연주한 남인도 음악이었다. 휘트니 형제가 피싱거의 작품을 기성 음악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음악의 사용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선택 역시 당대 컴퓨터의 연산 능력으로 하나의 코드로 그림과 소리를 동시에 생성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만약 휘트니가 동시대와 같은 컴퓨터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면 그가 설정했던 과제들을 고려해볼 때, 실시간 오디오비주얼 퍼포먼스에 가까운 작업을 했을 것이라고 본다. < 순열 >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색채에 있다. 빛을 데이터와 문법으로 처리한다는 과제에 비추어본다면, 색채 역시 일련의 규칙들을 따랐어야 했다. 그러나 특정한 규칙을 발견할 수 없고 임의로 선택된 것처럼 보인다. [영상4]에서 카메라가 위에 고정되어 있고 회전하는 이미지 디스크 아래에 휘트니가 컬러 필터를 삽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색채만큼은 작가의 선택과 회전하는 디스크의 속도가 조합되어 반쯤은 의도적이고 반쯤은 우연히 결정되도록 남겨두었다. 색채에서 어떤 규칙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아라베스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왜 점들의 위치를 계산하는데 있어서는 엄밀한 규칙을 적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색채와 관련해서는 작가의 결정도 아니고 완전히 우연도 아닌 둘 사이의 애매한 중립을 선택했던 것일까? 앞서 설명했듯이 휘트니가 사용할 수 있었던 컴퓨터의 그래픽 시스템으로는 색채를 실시간으로 처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색채를 실시간으로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은 필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필름은 현상과 프린팅 과정에서 색을 균일하게 유지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따라서 당시의 휘트니에게 색채는 계산 불가능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 한계가 휘트니가 비디오라는 매체의 미래를 낙관했던 이유이다. 비디오에서는 실시간 피드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휘트니는 색채를 온전히 계산 가능한 영역으로 옮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휘트니는 색채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이 다소 복잡한 심경을 밝혔다. 화가에게 색채는 일반적으로 물감, 손, 눈이라는 세 요소간의 직접적인 일대일 상호작용으로서 직관적으로 경험된다. 이토록 친밀한 스스로 직접 하는 상호작용은 이성보다도 창의적인 마음을 요구하며, 컬러 필름으로 작업하는데 필요하다. 컬러 필름의 현상 과정을 화가처럼 통제하고자 했던 나의 노력들은 종종 좌절되고 말았다. 현상실과 프린팅 단계들에서 걸리는 시간은 순간적인 직관과 실제적인 색채 효과 사이를 단절시켰다. 휘트니는 색채에 관해서 만큼은 화가의 직관을 유지하고 싶어 했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휘트니에게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휘트니와 동시대에 컴퓨터를 이용한 작업을 했던 스탠 반더빅, 벤 라포스키, 메리 엘렌 뷰트에게도 규칙에 온전히 주도권을 넘기지 않고 마지막까지 창조의 신비성이라 불릴만한 영역을 고집하는 태도가 발견된다. 그래서 동시대에 독일에서 컴퓨터 예술을 개척했던 프리더 나케는 “미국/캐나다의 접근 방식은 이론이 없다. 그냥 즐기고 네 작업을 하고 창조적이 되며 뭔가 흥미로운 것을 하라는 식이다”라고 비판하였다. 캐롤린 케인(Caroly L. Kane)은 「색상 알고리즘: 코드 이후의 색채 합성, 컴퓨터 아트와 미학 Chromatic Algorithms: Synthetic Color, Computer Art and Aesthetics after Code」에서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독일 방식과 신비주의적이고 주관적인 미국 방식을 비교하였다. 이 책에서 케인은 미국 방식을 주체와 저자성(authority)이라는 낭만적인 관념을 유지하려는 태도로 해석하고 있다. 케인의 해석이 논리적으로 타당하지만 개인적으로 좀 더 흥미로운 해석은 자벳 패터슨(Zabet Patterson)의 「대포 제어기로부터 만다라까지: 존과 제임스 휘트니의 사이버네틱 영화 From the Gun Controller to the Mandala: The Cybernetic Cinema of John and James Whitney」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논문에서 패터슨은 휘트니가 개발한 M5 대공 방어 미사일 유도 장치가 영화 제작에 사용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패터슨은 영화라는 매체와 미사일 유도 장치가 인간의 시각과 신체를 구조화하는 방식의 차이를 강조하였다. 영화는 카메라 옵스큐라에 기반한 매체이다. 반면에 미사일 유도 장치는 목표물을 쫓는다는 점에서 전투기에 부착된 반구형 포탑과 같은 계열의 장치이다. 영화와 반구형 포탑 장치 모두 객관성과 투명성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카메라 옵스큐라에 기반한 영화는 성찰적이고, 관객이 자신의 신체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게 한다. 반면에 반구형 포탑 장치는 시야에 들어온 목표에 신체가 즉각적으로 개입하고 반응하도록 훈련하여 시스템 회로의 일부가 되게 만든다. 패터슨은 휘트니의 < 순열 >을 분석하면서, 관객이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흐르고 변화하는 패턴들을 기억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재의 순수한 지각한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고 보았다. <순열>은 사용자의 시선을 목표물에 고정시키고 신체가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반구형 포탑 계열의 장치로 만들어졌지만, 휘트니가 순수한 추상을 만들어냄으로써 관객이 사이버네틱 시스템의 일부로 종속되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이 타당하다면 휘트니가 색채에 대해서 주저했던 이유도 M5와 영화라는 이질적인 시각체계가 교차할 수 있는 비결정적인 영역을 남겨두려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 글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패터슨의 논의를 좀 더 전개시켜보면 요즘에 유행하는 VR영화가 논리적으로 가능한 개념인지와 이질적인 시각체계를 결합하기 위해서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를 따져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휘트니는 「디지털 하모니」에서 1960, 70년대에 뉴욕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두 가지 흐름-영화에서는 언더그라운드, 미술과 음악에서는 예술과 기술의 융합-에 불만을 표했다. 휘트니는 1960년대에 한때 뉴욕에서 20세기 초반 유럽 예술의 기준을 가장 젊은 예술인 영화에 이식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전위를 자처하는 영화작가들이 그 노력들을 한 번도 제대로 평가한 적이 없었다고 보았다. 그 노력들 대신에 들어선 작가들과 관객들은 스스로를 언더그라운드로 격하시키며, 성행위나 개척하는 것을 언더그라운드라고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휘트니는 1960년대 당시에 우연과 주역에 열광했던 지식인 부류의 태도에도 비판적이었다. 그는 우연과 주역에 대한 관심을 마치 우연이라는 신비에 의지하면 시나 음악이 저절로 완성될 것처럼 간주하는 태도라고 비난하였다. 휘트니는 1970년대 초반 예술과 기술의 융합이 유행했던 것도 우연에 대한 열광이 연장된 것이라고 보았다. 컴퓨터가 난수를 발생시키는 최상의 장치였기 때문에, 컴퓨터를 이용하면 우연이라는 원칙을 따르는 예술 창작이 가능하다는 순진한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휘트니는 뉴욕에서 활동하던 작가들이 당시 컴퓨터 기술이 가장 앞섰던 캘리포니아로 몰려왔지만 이내 곧 물러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당시의 컴퓨터 기술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밑바탕부터 스스로 만들어가거나 이미 완성된 기술을 활용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는데, 이 두 가지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휘트니는 그가 활발하게 작업했던 당대에 언더그라운드 영화와 예술과 기술의 융합 양쪽에서 모두 환대를 받았지만 동시에 배제되기도 했다. 그 상황은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다. 영화 쪽에서 휘트니는 컴퓨터 애니메이션 작가 정도로 치부되고, 미술 쪽에서 컴퓨터 예술을 논의할 때 막스 벤제의 정보미학과 프리더 나케와 같은 독일 작가들 위주로만 다루어왔다. 언더그라운드 영화와 미술, 음악에서 예술과 기술의 융합은 이질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휘트니는 양쪽 모두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공통의 암묵적인 가정을 갖는다고 보았다. 그 가정은 생성 문법에 의존하고 있다. 휘트니는 촘스키가 두 가지 적절한 질문을 던졌다고 보았다. 첫 번째는 새로운 문법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가의 여부이고, 두 번째는 음악과 예술이 당연히 언어인가의 여부이다. 휘트니는 이 두 질문에 응대함으로써 새로운 문법과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언더그라운드 영화와 예술과 기술의 융합 모두의 과제라고 보았다. 지난 20여 년 간 국내에서 전개되어왔던 디지털 영화와 미디어 아트에 관한 논의들을 돌아보면, 영화와 예술과 기술의 융합이 분리되어 별다른 교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해볼 수 있다. 40년여 전에 휘트니가 설정했던 과제들은 지금도 여전히 탐구해야 할 영역으로 남아있다. ※ 이 글에서 언급된 영화들과 휘트니 형제에 관한 사실과 일부 견해들은 다음의 책과 논문들을 참고하였다. Carolyn L. Kane, Chromatic Algorithms: Synthetic Color, Computer Art and Aesthetics after Code,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4. Paul J. Karlstrom(ed.), On the Edge of America: California Modernist Art, 1900-1950,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6. John Whitney, Digital Harmony: On the Complementarity of Music and Visual Art, Kingsport Press, 1980. Zabet Patterson, “From the Gun Controller to the Mandala: The Cybernetic Cinema of John and James Whitney,” Grey Room 36, Summer 2009, pp. 36-57.
전설적인 마에스트로 존 윌리엄스에게도 시련의 시기는 있었다. 1958년 < Daddy-O >로 데뷔한 이래 일흔을 맞이한 2002년도까지 그는 한해도 빠짐없이 꾸준히 최상의 작품을 써내려 왔던 근면 성실함의 대가였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기실 보이지 않는 공백기가 존재했다. 필모를 봐도 거의 눈치채지 못할 만큼의 틈이긴 하지만, 최전성기의 한가운데인 1985년 존 윌리엄스는 코너에 몰려 있었다. 문제의 발단은 그가 1979년 서거한 아서 피들러의 뒤를 이어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내정되면서부터. 작곡과 연주를 병행하던 그에게 불만이 있던 일부 단원들과의 충돌로 인해 그는 1984년 심각하게 사임을 고려했고, 그의 결정을 만류하기 위해 오케스트라에 한차례 격통이 불어 닥쳤다. 결국 매니지먼트의 간청과 단원들의 사과로 일단락되었지만(이후 1995년까지 훌륭하게 임기를 이어갔다)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진행하기로 했던 ‘피터 팬’의 뮤지컬 계획은 10곡이나 만든 상황에서 딜레이 되다 엎어지고 말았고(물론 그 음악들은 91년에 간신히 영화로 되살아난 < 후크 >의 모티브로 사용되며 빛을 볼 수 있었다), < 칼라 퍼플 >에선 제작자이기도 했던 퀸시 존스가 음악도 담당하는 바람에 스필버그와 두 번째로 호흡을 맞추지 못했다(첫 번째는 스필버그가 단편으로 참여한 < 환상특급 극장판 >). 결국 1985년의 윌리엄스는 모든 영화 스케줄이 빈 상태로 1974년 이후 오랜만에 TV로 귀환한 <어메이징 스토리>의 에피소드 2개만을 달랑 맡은 채 시간을 보내야 했다. 마에스트로 존 윌리암스 한편 영화 < 스페이스 캠프 >도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실제 앨라배마 헌츠빌에 소재한 청소년 대상의 우주훈련과정을 배경으로 삼은 이 작품은 < E.T. >와 < 그렘린 >, < 구니스 >같은 틴에이저 모험극을 표방했기에 촬영될 당시만 해도 안전한 기획으로 여겨졌다. 캐스팅에 있어서도 다분히 스필버그 영화들을 의식했는데, 타이틀 롤을 맡은 케이트 캡쇼는 <인디아나 존스>의 여주인공이자 후에 스필버그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고, 리 톰슨은 바로 전해 스필버그가 제작한 < 백 투 더 퓨처 >의 여주인공이자 < 죠스 3 >로 데뷔한 인연이 있었다. NASA에 기증될 정도로 완벽하게 재현한 스페이스 셔틀 조종석 세트에 2,000만 달러라는 적지 않은 예산으로 1986년 초에 개봉될 예정이었던 이 영화는, 그러나 챌린저호 폭발이라는 대참사와 마주하며 저주받은 운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다. 스페이스 셔틀이 주요하게 등장하고, 케이트 캡쇼가 맡은 배역이 여자 지도교사라는 점에서 실제 여선생이 탑승했다 희생된 것과 비교되자 결국 개봉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여름으로 개봉 시기를 옮긴 제작자들의 특단의 조치는 음악이었다. 비극적인 사건을 조금이나마 희석하기 위해 가장 희망적이고 장엄한 분위기를 선사할 이가 필요했다. 이런 스필버그 스타일에 최적화된 작곡가. 영화적 재미와 환상적인 몰입감을 고취할 수 있는 거장. 바로 존 윌리엄스였다. 배급사인 20세기폭스의 오랜 음악감독이자 친구이던 라이오넬 뉴먼을 통해 스케줄이 비어있던 윌리엄스를 설득, 결국 그의 짧지만 의도치 않던 공백을 메꿀 작품으로 <스페이스 캠프>가 선택되었다. 스페이스 캠프 사실 <스페이스 캠프>는 존 윌리엄스 필모에서 조금 도드라져 보인다. 1975년 < 죠스 >서부터 이 영화를 맡기 전인 1984년 <인디아나 존스>까지 그의 경력은 가히 무시무시했다. 데뷔 초 주로 드라마와 코미디, TV 쪽에서 활약하며 재즈 스타일의 소소하고 가벼운 음악을 들려주던 모습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그의 작풍은 확 달라져 있었다. 심플하지만 강력하고 드라마틱한 테마에, 유려하면서도 호쾌한 오케스트레이션이 결합돼 고전적인 매력을 심어주는 심포닉 사운드는 60년대 이후 재즈와 록에 밀려 실종되어가던 할리우드 전통의 스코어를 되살려주었다. 이후로도 마찬가지. 1987년부터 지금까지 그는 한 번도 휘청이지 않고 거장의 품격을 완성해왔다. 간혹 <하트비프>나 < 배반의 계절 >처럼 편차를 보이는 작품들도 존재하지만 이는 같은 해 작업했던 다른 결과물들의(< 레이더스 >와 < E.T. >같은) 반대급부적인 영향이 어느 정도 작용했을 터. 하지만 <스페이스 캠프>는 달랐다. 1985년과 1986년 그의 영화 스케줄은 완전히 비어있었고, 마음만 먹는다면 더 좋은 완성도의 작품들을 고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선택은 챌린저호 공중폭발로 좌초될 위기에 놓여있던 이 영화였고, 그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담아 열성을 다해 음악을 완성시켰다. 아쉽게도 그런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예상대로 참패했다. 제작비의 절반이 채 안 되는 9백만 달러만을 간신히 회수한 채 박스오피스에서 빠르게 종적을 감췄다. 이는 사운드트랙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는데 존 윌리엄스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LP와 카세트테이프로 한차례 발매된 이후 오랜 기간 재발매되지 않았다. 일본에서만 1,000장 한정으로 소량 발매된 CD가 희귀 아이템으로 올라 수집가들 사이에서 고가로 거래되었을 뿐. 결국 2010년, 오랜 기다림 끝에 복각판이 발매되었다. 재밌는 건 이 복각판이 발매되었을 때조차 불운이 발생했다는 것. 제조상의 실수로 12번 트랙에 튐 현상이 발생해 3,000장 전량을 다시 찍어 일일이 교환 조치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사고도 문제도 많은 영화였고, 존 윌리엄스 개인에게도 그 당시 썩 유쾌한 시기가 아니었을지 모르겠지만, 최전성기에 올라있던 만큼 음악적으론 그의 뛰어난 솜씨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사운드트랙이다. 영화는 조금은 유치하고 평범한 스필버그 아류의 틴에이저 판타지 모험담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를 만회하는 것도 역시 스필버그의 단짝인 존 윌리엄스의 거룩하고 장엄한 팡파르 덕분이다. < 스타워즈 > 시리즈를 끝낸 이후 3년 만에 다시 우주로 돌아온 그의 영웅적인 스페이스 찬가는 탄성을 지를 만큼 황홀하고 아름답다. 일견 우주 속 스페이스 셔틀에서 발생하는 후반부 에피소드는 < 그래비티 >의 원형을 담아낸 우주 재난물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래비티>의 음악을 담당한 스티븐 프라이스가 차갑고 단조로운 일렉트릭 사운드 외피 속에 여성 허밍과 현악을 감춰두어 미약하지만 생명력 짙은 휴머니즘을 들려주었다면, 이 지구상 최고의 마에스트로는 고전적인 심포닉 사운드가 갖는 낭만적인 환희와 영웅적인 용기를 브라스와 혼에 실어 강렬하게 대외적으로 표출하며 감성에 절절히 호소하고 있다. 이는 시대의 차이이자 챌린저호의 비극이 갖는 무게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호국적이고 영웅적인 테마를 배치한 노장의 배려일 것이다. 또한 이는 그가 70년대 초 ‘재난의 제왕’ 어윈 알렌과 작업한 일련의 재난물 < 포세이돈 어드벤쳐 >나 < 타워링 >, < 대지진 >의 음악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 글에 언급된 존 윌리암스의 OST 앨범들 컴필레이션 사운드트랙이 음반시장에서 득세하던 1980년대 영화답게 삽입곡이 많이 쓰이지 않았음에도 하나같이 주옥같다. 주로 영화의 초반부 선남선녀의 청춘들이 우주훈련이 펼쳐지는 캠프장에 입소하며 꿈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이야기할 때 집중적으로 흘러나오는데, 에릭 클랩튼의 블루지하면서도 소울풀한 박력이 넘치는 ‘Forever Man’으로 포문을 연다. 기숙사에서 흘러나오는 건 1985년 영미권을 뒤흔들었던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빅 히트곡 ‘Walk of Life’와 ‘So Far Away’. 그리고 나머지 세 곡은 맑은 미성이 돋보이는 조셉 윌리엄스의 노래들 ‘American Girl’과 ‘Don’t Look Back’, ‘Turn It Up’이 삽입됐다. 알다시피 조셉은 슈퍼밴드 토토의 세 번째 보컬이자 이 영화의 음악을 담당한 존 윌리엄스의 둘째 아들. <스페이스 캠프>는 아버지와 함께 한 두 번째 영화가 되었다. 이들 곡들과의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존 윌리엄스 스코어 중에서는 드물게 신디와 드럼 머신 사용한 팝적인 사운드의 짧은 ‘Training Montage’라는 큐가 작곡되었다. 그의 고전적인 심포닉 사운드에 익숙했던 이들이라면 이 색다른 시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중후반부로 가며 예의 그 익숙한 존 윌리엄스만의 포스가 드러나는데, 영화의 가벼움을 지그시 눌러주는 견실하고 탄탄한 무게추 역할을 훌륭히 해낸다. 아쉽게도 트랙리스트는 중구난방으로 배치돼 영화의 감흥을 따라가기 번거로운 편이다. 영화 순서대로 음악을 즐기기 위해선 1-5-2-4-3-6-9-12-10-11-7-13-14-8 순으로 감상해야 한다. 그래야 마지막 동명의 타이틀곡이자 엔딩 크레딧에 흐르는 ‘SpaceCamp’의 강렬하고 화려한 팡파르가 인상적으로 가슴 속에 새겨진다. 제작자의 바람과 달리 존 윌리엄스의 음악은 영화를 구원하지 못했다. 그는 영상과 내용을 압도하는 오버스코어링으로 작품과 비교되는 실제의 비극을 충실히 지워내고자 했지만 참사의 잔향은 생각보다 깊이 그리고 오래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 시도와 노력만으로도 존 윌리엄스에게 있어 값진 결과였다. 그가 아닌 어떤 누군가가 음악으로 꿈과 희망을 재건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스페이스 캠프>는 역설적으로 실패했지만 존 윌리엄스의 가치와 역량을 만천하에 알린 비장의 OST인 셈이었다. Track List 1. Main title 2. Training montage 3. The shuttle 4. The computer room 5. Friends forever 6. In orbit 7. White Sands 8. SpaceCamp 9. Viewing Daedalus 10. Max breaks loose 11. Andie is stranded 12. Max fins courage 13. Re-entry 14. Home ag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