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니 씽 해펀드 온 더 웨이 투 더 포럼
- 감독
- 리처드 레스터
- 제작년도
- 1966
- 출연
- 버스터 키튼, 필 실버스, 마이클 크로포드, 제로 모스텔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지난 12월 24일에 공개된 ‘ 미국 NA II 소장 노획영상 컬렉션 ’ 준비 과정 중의 이모저모를 소개할까 한다. 이 컬렉션은 지난 2022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에 의뢰하여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문서고 2관(National Archives II, 이하 NA II)에서 수집과 동시에 연구까지 진행했던 1930~40년대 미군 노획필름 37편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미국 육군 G-2 정보참모부가 적국 정보 수집의 일환으로 제2차 세계대전 말과 6.25 전쟁 당시에 노획한 영상들이다. NA II에서는 ‘해외 노획 기록물’을 묶은 기록군 242(RG 242)에 ‘정보참모부 영화필름’ 시리즈(242-MID)와 ‘정보참모부 일본 관련 영화필름’ 시리즈(242-MID-J)로 분류, 관리되고 있다. 이 필름들은 대부분 선전선동을 위해 제작됐던 것으로서, 일본, 이탈리아, 소련, 북한이 어떤 논리와 방법으로 자신들의 체제를 정당화하고 비인도적인 침략 또는 경쟁국에 대한 흑색선전을 포장했는지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아무리 ‘격동의 현대사’라는 점잖은 표현을 쓰더라도 이 시대가 폭력과 착취의 시대였고 ‘줄을 잘못 서면’ 생존이 위협을 받을 수도 있었던 야만의 시대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런 혼란 속에서 파시스트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체제의 역량을 기울여 선전영상을 만들고 자신들의 세계관을 학습시키고자 했다. 그것이 허구든 실존하는 것이든, 진실이든 거짓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대중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불안정한 시대의 힘 없는 개인에게, ‘믿음’은 합리성보다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래서 노획영상은 태생이 복잡하다. < 황도일본 >(아오키 타이스케, 1940)은 명분 없는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천년 전의 신화집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대전제로 하여 허구 위에 허구를 중첩한다. ‘신의 자손이 신의 명령을 이행한다’라는 신화적 명제를 사실로 포장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창조해낸 개념들의 쓰나미로 보는 이를 압도하고자 했다. 파시즘 우방국 이탈리아는 자신들만의 세계관으로 일제의 침략, 아니 ‘문명의 회복을 위한 전진’에 찬사를 보냈다. 소련은 이러한 ‘제국주의, 파시즘으로부터 인민을 해방시킨 구원자 스탈린’의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러시아 공산당 중심의 새로운 착취구조를 유토피아적 현실로 포장했다. 북한은 스탈린의 권위를 김일성 권력의 정당성의 근거로 덧씌웠고, 소련의 ‘만들어진 유토피아’가 담긴 영상을 수입하여 한국어 웅변을 곁들여 북한 각 지역에 ‘영사 폭격’했다. ‘통일’, ‘해방’, ‘자유민주주의’, ‘평화애호’ 등의 인도적 개념어들은 ‘선의의 친구’ 이미지를 만드는 도구로 의도적으로 수없이 사용됐고,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인플레이션의 늪에 빠졌다. 이와 같이 선전영상들이 대중 대상의 최면효과를 위해 사용한 전략, 그리고 제작 주체가 의도하지 않았던 맥락까지 포함하여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모든 기록영상이 그렇듯이 당장은 쓸모없어 보이는 정보까지도 샅샅이 훑고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한 작업의 결과를 컬렉션 페이지의 자료집 에 수록했다. 기록영상 컬렉션에서 TMI는 ‘Too Much Information’이 아니라 덕목이다. 특히 이번 컬렉션은 잡다하게 아는 것은 많지만 제대로 아는 것은 많지 않은 AI 들과 함께 준비했다. 이들은 STT(sound to text - 채록), OCR(광학문자인식), 이미지 분류(유사이미지 검색), 번역, 레퍼런스 찾기, 자유로운 대화상대 역할로 투입됐다. 필자는 미국 드라마 <하우스>에서 하우스가 화이트보드 앞에 부하 의사들을 앉혀 놓고 희귀병 추리의 단서를 모으듯, 수개월 동안 허당 AI들로부터 힌트를 뽑아내고 경쟁시켰다. *주1 기만의 전문가들이 만든 영상을 착각의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분석한 셈이다. 이렇게 채굴한 TMI 몇 가지를 부록으로 덧붙인다. 부록 1. <동양의 전투>( Battaglia D'Oriente ): 사상이 맞춤법을 지배한다. 이 영상 은 중일전쟁기 중 1938년 10월에 있었던 일본의 중국 광저우 진격 과정을 이탈리아 영화사(ISTITUTO NAZIONALE L.U.C.E)가 이탈리아어 해설을 곁들여 제작한 것이다. NA II 카탈로그에는 ‘1939년에 송출됐다(...was broadcast)’라고 적혀 있다. 이때는 추축국들이 삼국동맹을 체결한 1940년 9월 이전 시점이다. 하지만 1937년에 이미 이탈리아는 독일-일본의 대 소련 방어를 위한 ‘방공협정’에 참가한 상태였다. 그러니,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을 옹호하여 간접적으로 자국민들에게 파시즘의 정당성을 설파할 목적으로 이런 영상을 제작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무솔리니의 관영선전영화제작소였던 ‘L.U.C.E(루체)’가 영상에 ‘L.V.C.E.’로 표기되고 있는 것은 많이 이상하다. (좌) 도입부 #1 / (우) 도입부 #2 이에 대해 AI 하나가 오랜만에 실속 있는 의견을 주었다. 이탈리아 통일 이전부터 ‘로마’는 국민적 숭배의 대상이었다. 이탈리아 통일운동을 뜻하는 ‘리소르지멘토’는 ‘부흥, 부활’이라는 뜻이고, 그 지향점은 ‘위대한 로마’였다. 무솔리니는 로마의 이미지에 더욱 천착하여, ‘이전 시기의 부패한 로마’를 청산하고 고대 로마의 덕목과 정신을 이어받은 파시스트의 국가를 건설하는 ‘문명화 사명’론을 내세웠다. 그래서 이탈리아 파시즘은 철저하게 고대 로마의 신화적 상징을 사용하여 대중적 이미지를 조각했는데, *주2 이 영상 도입부의 독수리상, 고대 로마 묘비에 각인됐을 것만 같은 고전적 글씨체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 집착의 끝은 U 대신에 V를 사용한 것이다. 에트루리아 알파벳에서 유래한 고대 라틴어는 중세에 이르러 V가 U, V, W로 분화하기 전까지는 V만 존재했다. *주3 그래서 고대의 진정한 로마를 계승한 이탈리아 파시즘의 선봉, 국립영화제작소는 L.U.C.E.가 아니라 고귀한 L.V.C.E.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현대 세계의 문명과 질서를 대표하는 일본’에게 ‘기아와 혼란의 시대가 끝났다는 확신으로’ 중국인들이 환대하고 있다는 내레이션 내용은 도입부의 독수리상에 이어지는 도리이(とりい, 일본 신사 등의 관문)와 총칼의 도상으로 이미 예고됐다. 이탈리아인들은 파시즘의 사명을 잇는 일제의 ‘정의로운 전쟁’을 지지하고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그런데, 내레이션 초반에 일본군 지휘관으로 언급되는 ‘왕의 동생 [치치부]’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발음은 [치치부]로 들리고, 다수의 AI가 동일하게 ‘principe(왕족) CCV’라고 채록했다. AI는 위와 같이 대답하면서 1번일 확률이 가장 높다고 했다. *주4 조사해 본 결과, 모두 틀렸지만, 이를 단서로 [치치부]가 쇼와 일왕의 동생 치치부노미야 야스히토임이 밝혀졌다. 그는 당시 현장 지휘관이 아니라 대본영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를 굳이 언급한 것은, 그가 난징대학살과 관련한 군 기강 문제를 지적했다든지, *주5 훗날 삼국동맹을 지지했던 점 *주6 등을 미뤄볼 때, 이탈리아 파시즘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부록 2. <니혼뉴스 제7호>(日本ニュース 第7号): 초조함을 숨길 수 없었던 승전보 속 위치는? 기록영상에서 ‘지명’은 늘 골칫거리다. 근현대 지도에 적힌 지명은 지도마다 제각각이고, 서양에서 통용되던 지명, 타국에서 발음 들리는 대로 표기한 지명, 자국민들이 부르던 지명, 옛날 지명과 이명, (특히 공산주의 국가에서) 정치적 선전과 기념의 목적으로 툭하면 바꾸는 지명까지 모든 것이 뒤엉켜 있는 경우가 많다. < 니혼뉴스 제7호 >(1940)에서 지명 정보는 특히 중요하다. 이 영상은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본의 관심이 온통 중국 국민당 정부의 보급선을 끊는 데에 집중됐던 1940년 여름의 뉴스릴이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중국 북부, 동부의 주요 도시와 기간시설들을 확보했던 개전 초기에는 전황을 낙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제스와 국민당이 내륙으로 이동하여 충칭정부를 세운 후부터 이 전쟁은 보급선을 확보하여 더 오래 버티는 쪽이 승리하는 구도로 전환됐다. 특히 일본군은 비현실적으로 전선이 길게 늘어선 데다가 철도, 도로망이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은 내륙 지방까지의 보급에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난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후 1944년에 감행했던 대륙타통작전(1호 작전) 또한 이런 어려움 속에서 중국 내륙 및 남부까지의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둔 무리수였다. 반면, 중국은 동남부 해상으로부터의 보급로, 버마와 베트남으로부터의 육상 및 공중 보급로를 계속 뚫어내면서 장기 태세에 돌입했으니, 시간은 중국 편이었던 것이다. 그런 배경에서 이 뉴스릴은 줄곧 이러한 장제스 지원 루트, 즉 원장(援蔣)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일본군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첫 번째 소식은 진해(鎮海)를 공격하여 해상 보급로를 차단했다는 내용을, ‘문제의 원장루트, 인도차이나 국경을 공격하다’라는 제목의 두 번째 소식은 베트남에서 출발하는 두 갈래의 원장루트에 관한 내용을, 마지막 소식은 어려움에 처한 일본이 이후 본격적으로 군국주의 체제로 돌입하고 군사적으로 폭주하는 도화선이 된 고노에 내각 출범 소식을 담고 있다. 그런데, 첫 번째 소식의 ‘진해’라는 곳은 어디였을까? 그 단서는 내레이션 중 [셋칸 루트]라고 발음되는 것의 정체를 찾는 데서 출발했다. 가동할 수 있는 모든 AI들은 이를 ‘석관 루트(石管ルート)’라고 채록했다. 그러나, 그런 보급로는 어떤 기록에서도 언급되지 않았고, AI는 그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았다. 권위 있는 기관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AI의 억지 변명이 분명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실마리는 현재 니혼뉴스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는 ‘NHK 전쟁증언아카이브’ 중 <니혼뉴스 51호>의 스크립트 정보 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서 ‘셋칸 루트’는 ‘敵浙 루트’였다. AI는 ‘敵浙’을 ‘절강’으로 번역했고, 지도 검색 결과도 절강성 인근으로 나왔지만, 우리가 아는 절강성(浙江省)의 한자는 다르다. 그래도 이 과정에서 저장성과 장시성 지역을 잇는 철도인 저간선(浙赣铁路)이 이 시기에 이미 있었다는 것과, 저장성과 장시성의 약칭으로 쓰이는 글자가 저(浙), 간(贛)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지도에서 현재의 저간선 경로로부터 해안 쪽으로 탐색해 나가다가 ‘진해(鎮海)’의 현재 표기일 가능성이 높은 ‘전하이 구(镇海区)’를 발견했다. 이렇게 돌고 돌아, 저간 루트로 이어지는 저장성-푸젠성 해안의 보급 거점 위치가 확인됐다. 그런데, 앞선 전쟁증언아카이브의 <니혼뉴스 제7호> 스크립트에는 왜 이 정보가 없었을까? 해당 아카이브를 포함해 이 영상에 대해 현재 알려져 있는 모든 정보 에서 첫 번째 소식은 충칭으로 진격하던 일본군의 ‘사스(沙市) 공략 입성’ 내용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 소식은 < 니혼뉴스 제3호 >의 세 번째 소식을 다시 한번 수록한 것이다. 3호 영상으로 공개했던 내용을 그대로 7호에 다시 수록했던 이유는 무엇인지 현재로서 알 길은 없다. 어쨌든 7호 영상으로 공개된 모든 판본 중에서 NA II 판본만이 유일하게 ‘진해 공격’ 소식을 담고 있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사스 입성’ 소식으로 교체됐다는 것은 분명하다. 부록 3. 일본인 여행 기록, 언제 촬영했을까? 왜 다른 선전영상들과 함께 노획됐는지 알 수 없는 영상이 있다. 이 영상 은 한 일본인 가족이 도쿄, 카마쿠라, 에노시마까지 여행한 하루 일정의 기록이 담겼고 음향은 없다. 유용한 정보가 아니라고 생각되더라도 미리 판단할 수는 없다. 이 가족이 여행한 시점이 언제인지 밝히고자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NA II 카탈로그에는 ‘1937 ?’이라고 기재되어 있고, 근거는 밝히지 않고 있다. 화면의 내용을 근거로 좁혀 갈 수밖에 없다. 우선, 부채질을 하고 있으니 여름 즈음이다. 여행 전에 베티 미용실(ベティ美容室)에서 머리를 하는데, 간판 정보로 보아 매월 정기휴일인 17일, 27일은 아니다. 영업시간 정보를 보니 아침 8시 이후이다. 이어 도쿄 메이지신궁 외원의 성덕기념회화관(聖徳記念絵画館)을 방문하는데, 관동 대지진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면 1937년부터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사이 기간인 듯하다. 센소지(淺草寺) 본당 계단을 내려와 바나나 파는 곳을 지나친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바나나의 일본 수입이 중지됐다는 일본어 위키의 정보를 신뢰한다면 1939년 9월 이전이지만, 참고로만 받아들이기로 한다. 아사쿠사 마츠야 백화점(1931년 건립) 옥상에 있는 유원지를 가로지르는 케이블카가 보이고, 그 앞 스미다(隅田)강에 수상버스가 지나간다. AI는 이런 것들이 1930~1940년대 유행했다고 하면서도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좀 더 결정적인 근거는 우에노 동물원 장면이었는데, 수컷임이 분명한 기린 한 마리가 서성이고 있다. 우에노 동물원이 1982년에 발간한 『 우에노 동물원 100년사 』에는 암수 두 마리의 기린을 1933년 8월 21일부터 사육하기 시작했고, 1937년 7월 11일에 첫 새끼가 태어났다고 적혀 있다. 만일, 이 장면에서 수컷만 있는 이유가 암컷의 출산 때문이라면, 이 영상이 대략 1937년 여름의 것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이 책에 따르면 기린들의 이름이 ‘기린’과 ‘지라프’였는데, 이 책의 사진에는 ‘지라프’라고 적힌 팻말만 보이지만 ‘라벨에 기린과 지라프가 함께 적혀 있다’라는 설명이 달렸다. 영상 속에는 ‘기린’이라고 적힌 팻말이 걸려 있는 것을 보니 수컷의 이름이었던 것 같다. (좌) 영상 속 장면 / (우) 책 속 사진 결국 이런저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영상의 촬영 시점은 1937년 이후부터 1940년대 초 사이의 여름 정도의 범위로 좁히는 것이 최선이었다. 내심, 귀여운 기린 새끼가 태어난 날이었길 바라지만 말이다. 이미 글이 길어졌으므로 다른 TMI들이 궁금하다면 컬렉션 페이지 에서 자료집을 다운로드 받아 훑어보기 바란다. 사실상 국가가 정한 ‘전연령 관람 불가 등급’이라고 할 수 있는 공산권 국가 제작 영상(‘특수자료’)들에 대해서는 정보만 안내하고 VOD로 공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산주의자의 영상에도 TMI는 있게 마련이고, 이런 정보들을 최대한 안내하고자 노력했다. 못 미덥지만 함께 수고했던 AI들에게도 감사를 전하고 싶다. *주7 *** 주1. 물론 필자가 하우스 같은 천재는 아니기에 다소 고통스런 공부가 수반되어야 했지만 말이다. 주2. 최병진, 짐바르도 마르타, 「이탈리아 파시즘 시기 선전물의 쟁점과 어법: 무솔리니의 도상을 중심으로」. 『유럽문화예술학논집』 11호(2), 21~39쪽. 문준영, 「파시즘의 로마 이미지와 로마관, 로마성(Romanità)―그 기원과 변천」. 『역사비평』 139호, 366~400쪽. Coluzzi, Paolo, “The significance of typography in the linguistic landscape during the Fascist period in Italy (1922–1943)”, Forum for Linguistic Studies 5(3):1885, 2023. 주3. “ Latin alphabet ”,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주 4. prompt engineering 효율 측면에서 ‘천황’이라고 언급했다. 명칭은 명칭일 뿐이다. 주5. “ 【独自】秩父宮、軍紀の乱れ懸念…日中戦争初期の書簡見つかる ”, 《요미우리신문》, 2020. 11. 15. 주6. “ 秩父宮雍仁親王 ”, 일본어 위키피디아 주7. 글에는 어쩌다 보니 claude의 프롬프트 화면만 나왔지만, 다양한 AI들과 그 기술이 적용된 툴들이 함께 했다.
약간은 더위의 기미가 남아 있던 10월 중순의 서울,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12시간 지나 도착한 파리는 단번에 가을의 핵심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스며드는 서늘한 기운과 흩날리는 나무이파리에 먼 곳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파리의 도심으로 향한다. 한 여름 더위 속 씨름하며 준비했던 한국영화특별전의 경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파리의 중심부 포럼 데 알Forum des Halles에서는 매일 한국 영화가 상영 중이다. ‘한-불 상호 교류의 해 130주년’을 맞아 영화부문에서 첫 번째로 진행되는 행사가 바로 ‘매혹의 서울’. 포럼 데 알의 지하에 위치한 예술영화전용극장 ‘포럼 데 지마주Forum des Images’에서 9월 15일부터 11월 1일까지 한달 반에 걸쳐 76편의 한국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한국 영화 포스터, 영화를 보기 위해 줄지은 사람들, 파리에 머무는 동안 자주 마주하게 된 이 풍경은 익숙하면서도 문득문득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의 20대에는 프랑스 영화가 있었다. < 줄 앤 짐 >을 보면서 자유를 꿈꿨고, 감기는 눈을 비비면서라도 < 네 멋대로 해라 >를 끝까지 보아냈다. 그렇게 그 영화들은 내 청춘의 자산이 되었고, 영화를 공부하는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나 이제 반대로 한국영화를 관람하는 파리 관객들의 진지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포럼 데 지마주 관객 세계화 혹은 전지구화라는 말은 거듭되어 이제 진부해지고, 파리의 중년 여성들도 ‘샤이니’를 아는 현재, 파리 관객들이 한국영화를 수용하는 방식도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우리 관객들이 웃었던 즈음에서 웃었고, 비슷하게 숨을 죽였고, 우리나라 영화제에서도 들었음직한 질문을 꺼내놓았다. 역시나 우리나라의 흥행작이었던 < 괴물 > < 국제시장 >에 많은 관객이 몰렸고, < 휴일 > < 청춘쌍곡선 >과 같은 고전영화에는 희끗희끗한 머리의 관객들이 눈에 들어왔다. < 무산일기 > 같은 최근 영화에는 젊은 관객층의 비율이 한결 높아 보였다. 다수의 영화에서 “일상적 폭력의 수위가 높다”, “먹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며 최근 한국영화의 표현적 특징을 짚어내기도 했다. 게스트로 초청된 배우 예지원 씨는 < 귀여워 > < 생활의 발견 > 상영에 참여해 관객들과 성심 성의껏 대화를 풀어나갔고, 샹송과 아리랑, 전통무용을 선보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유머코드로 활용되는 그녀의 샹송은 프랑스관객에게는 자국문화에 대한 관심이었고, 한국의 대표 배우이자 예술인으로서 관객들과 정중한 시간을 만들었다. 상영이 끝나고 몇몇 프랑스 관객은 한국어로 질문을 하며 한국대중문화에 대한 오랜 공력을 드러내기도 했다. 예지원 하지만 여전히 한국이라는 비서구를 경이롭고 낯선 타자의 위치에 놓으려는 그림자도 엿보였다. 영화제 기간 동안 많은 관심을 받았던 영화는 < 마돈나 > < 영도다리 >였다. 여성 육체에 대한 폭력을 통해 한국을 과잉된 폭력으로 물들어 있는 현실로 재현하는 이 영화들이 우리에게 관습의 정서적 한계를 묻는 독립영화적 감수성으로 다가온다면, 프랑스 관객과 평단은 이를 한국영화를 이해하는 진입의 문으로 여기는 듯했다. 과거 < 씨받이 >가 그랬던 것처럼, 여성에 대해 암묵적으로 용인된 성폭력이 비서구의 정체성을 이루고, 그 표현적 수위에서 한국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경계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해이든, 오해이든 한 지역에 대한 깊은 관심은 인상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서울이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80편에 가까운 영화를 모아 상영하고 묻고 토론했다. 이 도시특별전은 포럼 데 지마주의 전통과도 관계가 깊은 것이었는데, 포럼 데 지마주가 위치한 포럼 데 알은 파리 1구로 오랜 중심지이자 흥망성쇠를 거쳐온 곳이었다. 서울로 치면 종로쯤 되는 이 지역은 활발한 시장이다가 한 때는 아무 것도 없는 공터이다가 현재는 거대한 규모의 리모델링중이었다. 포럼 데 지마주는 포럼 데 알에 대한 영상자료를 모으며 아카이브로 성장했고, 점점 범위를 넓혀 파리에 대한 자료는 어떤 차별 없이 모으고, 외국인 저널리스트가 관광객의 눈으로 기록한 영상까지 회수하면서 차근차근 자료를 축적해왔다. 그리고 이제 그 눈을 다른 도시로 돌리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역사에 대한 충실한 관심에서 비롯되는 타자에 대한 관심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여행지에서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는 것, 낯선 곳에서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는 이중의 여행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멀리 날아간 파리에서 우리 영화를 보는 것, 그리고 우리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어딘가 도돌이표 같은 여정이었다. 낯선 곳에서 익숙한 세계를 보는 혹은 친숙한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는 시선의 여행을 끝마친 기분이다.
영화에 관해 글을 쓸 땐, 사적인 이야기로 지면을 채우는 것을 많이 주저하는 편이다. 영화 글을 읽는 사람들의 동기는 대체로 글쓴이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그 글이 다루는 영화에 대한 관심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번만큼은 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이 쓰이게 된 배경을 잠깐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작년 연말까지만 해도 난 한국에서 이런저런 글을 쓰고, 작은 규모의 영화 잡지를 만들며 백수와 직업인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대학원 진학을 몇 달 앞두고 마침 뉴욕에 계신 먼 친척분의 집이 비게 되었고, 뉴욕행 비행기의 항공권보다 서울의 여섯 달 치 월세가 더 비싸단 이유만으로 예정보다 조금 빨리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딱히 이곳에 친구가 있던 것도 아니어서, 한국에 수입되지 않은 영화들의 DVD나 블루레이를 구해 보거나, 링컨센터 필름 소사이어티(Film Society of Lincoln Center), 필름 포럼(Film Forum), IFC 센터(IFC Center) 등을 다니며 소일하던 중 한국영상자료원으로부터 ‘뉴욕에서 할 수 있는 시네필 적인 경험’에 대해 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게 되었고, 이곳에서 새롭게 경험한 것들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무심코 청탁을 수락하게 되었다. 처음엔 집필 과정이 순탄할 것만 같았다. 장 뤽 고다르가 < 언어와의 작별 >(2014)에서 3D 기술을 활용해 단순한 오버랩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이미지의 중첩을 선보임으로써 영화 몽타주의 영역을 확장하였지만, 한국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나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은 몇몇 운 좋은 관객들만이 그 순간을 목격할 수밖에 없던 것과는 달리, 뉴욕의 시네필들은 맨해튼의 IFC 센터에서 비교적 오렛동안 매일같이 영화사의 새로운 도약을 지켜볼 수 있었다는 아쉬운 이야기부터, GV가 예정되어 있지 않더라도 회고전 내내 자신의 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극장을 찾아 모든 관객의 질문에 성심껏 답하며 크리스 마르케, 알랭 레네, 프랑수아 트뤼포 등과의 일화를 들려준 아녜스 바르다의 이야기라든지, 크라이테리언의 노력 끝에 4K 복원된 사티야지트 레이의 < 길의 노래 >(1955)를 다른 도시의 시네필들보다 먼저 만나볼 수 있었던 것 등등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글을 시작하고 나니 ‘과연 내가 뉴욕에서 경험한 것들이 한국에 있었을 때에 비해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이곳에서 그저 영화를 보았을 뿐이고, 좋은 영화를 만나고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경험은 부산에서 십대를 보내고, 서울에서 이십대를 보내는 동안에도 내가 늘 해오던 것이기 때문이다. 동료들이 뉴욕의 시네마테크들에서 내가 만났던 영화들과 영화인들에 대해 부러움을 표할 때, 나는 한국영상자료원이나 서울아트시네마, 영화의 전당에 앉아 있는 그들을 부러워했다. 밝은 햇빛 혹은 현란한 네온사인이 내미는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깜깜한 어둠 속에 틀어박혀 영화를 보는 것을 선호하는, 어느 프랑스인의 묘사에 의하면 ‘시네마테크의 들쥐들’ 같은 시네필들이 하는 경험이란 결국 어떤 도시에 체류 중인가의 문제가 아닌 어떤 극장을 찾았는가의 문제에 의해 좌우되며, 그것들 사이에 우열 관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 맨해튼 >(1979)을 극장에서 본다면, 그곳이 맨해튼의 필름 포럼이 아니라 상암동의 한국영상자료원이라고 할지라도 당신은 한 시간 반 남짓 우디 앨런의 시선으로 바라본 1970년대의 맨해튼에 있는 것이다. 극장 문이 닫히고 나서 영사기가 돌아가기 시작하기 전까지의 짧은 어둠 속에서 관객들은 이전까지 자신이 속해 있던 세상과 격리되어 곧 상영될 영화의 감독이 설계한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영화에 의해 재구성되고 재창조된 공간은 그곳이 세트였든 아니면 실제 장소였든 간에, 분명 존재하기에 필름에 착상되어 이미지로 재연되었지만, 막상 그것이 촬영된 실제 장소와는 다른 성질을 띠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찰나의 암전 후 영화가 상영되는 세상의 모든 영화관은 엄밀히 말해 일종의 무국적 지대이며, 그 속의 시네필들은 이를테면 국적은 물론 시간과 공간의 경계마저 초월한 그 영역을 유랑하는 초국적의 시민들인 셈이다. 그들이 이미 극장에 들어선 순간 그들에게 자신이 위치한 물리적인 좌표는 무의미할 뿐이다, 유일하게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영화를 보고 있다는 것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네필이 도시 간을 이동하며 여행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서로 다른 장면에서 울고 웃는 타 문화권의 관객들 속에 둘러싸여 있는 체험은 때때로 그들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되기도 하며, 다른 도시를 방문해 그간 영화 속에서 보았던 모습과 실제 장소를 비교해보는 것은 그 영화가 그 도시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것을 영화적 공간으로 구성한 방식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더불어 여행자로서 시네필은 유명한 관광 명소뿐만이 아니라, 일반 관광객들이라면 무심결에 지나칠 법한 곳들에서도 그 장소에 덧입혀진 서사에 기대 감흥을 느낄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킹콩의 사랑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더라도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의 풍경에서 감흥을 느끼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 이터널 선샤인 >(2004)을 보지 않은 채로 몬타우크에서 감흥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물리 법칙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앞서 나열한 것들과 같은 시네필적 경험을 모든 장소에서, 모든 영화와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필연적으로 각자 다른 영화를 만나며, 내가 만나지 못한 영화를 만날 누군가를 끊임없이 부러워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영화의 곁을 지킨다면, 그래도 영화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형태인지 점차 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앞선 시네필들이 단지 영화를 만들고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서로 다른 경험을 한 시네필들이 서로에게 ‘저는 이 영화를 이렇게 보았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부치듯이 쓴 조각들이 모여 감히 혼자서는 완성하지 못할 영화의 지도가 그려지기 시작하고, 그 지도를 보며 후대의 시네필들이 다음엔 어떤 영화를 찾아갈 것인지를 결정하며 새로 써나간 편지들이 모여 이뤄진 것이 어쩌면 시네필의 역사이자, 영화 비평의 역사이며, 영화사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직은 조금 서투르고 정리가 안 되긴 했지만, 그리고 엉뚱하긴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 그 무엇보다 내가 뉴욕에서 겪은 시네필적인 경험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