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바이 키스
- 제작년도
- 2000
- 출연
- Emilia
‘2주의 시네마테크’의 목표는 시네마테크 KOFA 상영작 중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조금 더 자세하게 소개하여 관객 여러분의 관심을 촉구하는 데에 있다. 한마디로 영업이다. 하지만 새삼 스탠리 큐브릭을 영업하기란 멋쩍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다못해 스티븐 스필버그만 돼도 상대적으로 인기가 덜한 작품, 실패작, 괴작 취급당하는 작품을 거론할 수 있을 텐데, 상대는 데뷔작 < 공포와 욕망 > 외에는 실패작이 없다는 큐브릭이다. 비평적 찬사도 끝이 없고, 특정 시대의 양식에 구애받지 않는 외형을 지닌 영화를 만든 덕분에 ‘흑백 영화’, ‘고전 영화’ 경험이 많지 않은 관객에게도 낯섦 없이 다가설 수 있어 세대를 막론하고 널리 사랑받는 감독 아니던가. 새삼 <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나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 < 시계태엽 오렌지 >나 < 샤이닝 >이 어떤 영화인지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즉, 여기서는 다만 이번에 상영하는 작품 중 그나마 덜 알려진 초기작 두 편, < 킬러스 키스 >와 < 킬링 >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두 편의 범죄 영화는 큐브릭의 대표작으로는 거론되지 않지만, 아직 ‘손보다 생각이 앞서는’ 젊은 야심가의 풋풋함이 당대의 필름 누아르 유행과 뒤엉켜 주도권을 다투는 광경에서 이후 작품들에서는 찾기 어려운 인간미를 맛볼 수 있다. 혹 큐브릭의 대표작들에서 느껴지는 외계인이 인간을 실험대 위에 올려놓고 쿡쿡 찔러보는 듯한 냉정함이 거북스러운 분들께서는 이 두 편에서 온기를 찾으실 수 있을지도 모른다. < 킬러스 키스 Killer’s Kiss >(1955) 참신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야말로 극영화의 최우선 목표라고 생각한다면 < 킬러스 키스 >는 건너뛰고 바로 < 킬링 >으로 넘어가도 좋다. 한물간 권투선수와 댄스홀의 댄스 파트너가 질투심 많은 댄스홀 사장을 뒤로하고 도시를 떠나고자 한다는 이야기에는 독창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 했다기보다는 영화 언어를 다루는 솜씨를 갈고닦기 위한 최소한의 줄거리를 이용했을 뿐이라는 인상이 들 정도다. 대신 큐브릭은 여기서 필름 누아르의 관습을 차용해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과 플래시백을 한껏 뒤섞으며 저예산 영화의 빈곤함을 돌파하려 몸부림치는 한편, 직접 촬영을 맡아 눈이 멀 정도로 밝은 광원과 먹물을 끼얹은 듯한 그림자를 대조시켜 가장 지저분한 골목마저 아름답게 포착한다. 거친 편집과 무딘 연기, 티 나는 후시 녹음 같은 미숙함도 단점으로만 남는 대신, 다듬어지지 않은 현장의 생생함과 충돌하면서 이후의 큐브릭 영화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통제되지 않은 에너지를 뿜어낸다. 특히 골목과 지붕을 누비는 기나긴 추격전 끝에 마네킹 창고에서 벌어지는 혈투에는 이전까지 보여주었던 도시 문명의 껍질을 벗고 야만의 상태로 돌아간 두 인간의 육체와 육체가 맞부딪치며 헐떡이는 날것의 감각이 있다. < 킬링 The Killing >(1956) < 킬링 >은 < 오션스 일레븐 > < 도둑들 >처럼 여러 도둑들이 합심하여 무언가를 터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강탈 영화계의 걸작이다. 또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팬이라면 < 저수지의 개들 >의 비선형적 시간 구조를 기억하실 터인데, 바로 그 원형이 <킬링>에 있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맡은 해설자는 건조한 목소리로 이곳저곳을 오가고 시간까지 거꾸로 돌리면서(“같은 날 한 시간 전, 도시의 다른 곳에서는…”) 퍼즐을 맞추듯 경마장 털이를 향해 장면을 하나씩 쌓아나간다. 늘 그렇듯 계획이 흔들리는 결말부에서 절로 터져 나오는 탄식마저도 가련한 범죄자들을 향한 이입에서 우러나오는 안타까움이기 이전에, 영화 자체의 능수능란한 리듬을 향한 경탄처럼 느껴질 정도다. 정녕 이것이 불과 1년 전 < 킬러스 키스 >를 만든 이의 솜씨란 말인가? 동시에 이 시절의 큐브릭은 아직 독재자보다는 팀 플레이어였는지, 필름 누아르 계를 주름잡은 베테랑 배우들의 개성을 즐길 만한 여유도 넉넉하다. 영화 자체가 꼼꼼한 리더의 계획 속에 팀원들이 각자의 기량을 뽐내며 관객의 시선을 앗아가는 일급 강탈 영화인 셈이다. 상영 시간도 부담 없는 84분. 걸작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오락물을 찾는다면 바로 이 영화다.
사전정보 없이 읽고 있는 시나리오가 언제 쓰였는지 알아내려면 무엇을 체크해야 할까? 여러 가지가 있는데, 내 경우는 욕설을 먼저 보는 편이다. 많이들 무시하는데 욕은 수명이 굉장히 짧다. 그 때문에 요새 욕설을 7, 80년대 배경의 영화에서 쓰면 정말 이상해져 버리는데, 사람들이 그걸 모르는 것 같다. 하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영화 속에 나오는 욕설들은 어느 정도 검열된 버전이었으니 아주 좋은 지표는 아니다. 다른 지표로는 에티켓을 들 수 있다. 특히 서비스업 종사자에게 대한 기초적인 예의. 60년대 영화를 보면 ‘멋진 남자주인공’들이 이런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다짜고짜 반말을 해서 (“야, 거기 보이!” “이리 와, 기사!”) 요새 관객들에게 재수 없게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당시엔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당연하다고 해서 그 때 옳은 일이었던 건 아니다. 당연하다며 옳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뿐. < 공포의 여덟 시간 >에서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던 것도 택시에 올라탄 악당들이 택시 운전사에게 던지는 반말이었다. (“이봐, 좀 더 빨리 달릴 순 없나?” “라듸오나 틀어.”)이 장면은 이들이 무례한 악당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대놓고 악당처럼 굴고 있는 건 아니고 택시 운전사도 별 반응이 없으니 손님이라고 반말을 찍찍해도 그게 큰 문제가 안 되었던 시절의 작품이다. 다른 단서들도 있다. 이 영화의 경찰들은 종로 보석상을 턴 강도들이 이미 시내를 벗어났고 부평, 인천 방면이 가장 위험하다고 말한다. 지리상 당연히 언급되어야 할 부천이 쏙 빠져 있는데, 그건 이 영화가 부천이라는 도시가 존재하기 전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강도들이 턴 보석류가 시가 이억 환 상당이라니 화폐개혁 이전이기도 하다. 답을 말하면 김묵 이 감독하고 김효천 이 각본을 쓰고 유한철 과 곽일로 가 윤색한 < 공포의 여덟 시간 >는 1962년 작품이다. 화폐개혁 힌트 때문에 몇 년 앞으로 잡은 독자들도 있을 텐데, 그렇다고 크게 틀렸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 공포의 여덟 시간 >(1962), < 키 라르고 >(1948) 영화의 내용은 낡은 호텔에서 예비역 소령과 마피아 일당이 대치했던 < 키 라르고 Key Largo >(존 휴스턴, 1948)와 설정이 비슷하다. 한 무리의 강도가 경찰에 쫓기다 산장호텔에 몸을 숨긴다. 그냥 조용히 숨었으면 별일이 없었을 텐데, 뒤늦게 온 두 명이 산장까지 올 때 차를 세워두고 ‘LOVE에 취해있는’ 두 커플을 권총으로 위협해 인질로 삼아 끌고 오는 바람에 그들의 정체가 산장 내에서 탄로가 나고 만다. ‘LOVE에 취해 있는’. 다시 한 번 읊게 된다. 60년대 대한민국 청춘에게 사랑이란 대문자 영어로 쓸 수밖에 없는 외제 사치품이었던가. 자, 이제 강도들은 산장호텔의 주인 가족과 손님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 < 키 라르고 >에서처럼 허리케인이 불어닥친 것도 아닌데 쓸데없는 짐을 만든 것이다. 여기서부터 작가들을 믿을 수가 없게 된다. 이들이 반드시 인질들을 접선장소까지 끌고 가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경찰은 아직 그들의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 그냥 택시를 잡아도 된다. 택시를 잡기 어렵다면 전화로 연락을 해도 되고. 하여간 수많은 자잘한 해결방법이 있는데, 이들은 굳이 데려온 인질로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호텔 사람 전체를 상대로 하는 바보짓을 한다. 일은 점점 커진다. 손님 중 한 명은 알고 보니 밀수업자다. 나중에 손님이 또 두 명 오는데 그 손님은 밀수업자와 약속이 있다. 회사원이라면서 죽어도 신분증을 내놓지 않으려는 손님이 하나 더 있는데 (당시는 주민등록증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던 때였다는 걸 잊지 말자) 그는 나중에 밀수업자를 미행하던 형사임이 밝혀진다. 여기에 임시 검문을 나온 또 다른 형사가 들어왔다가 잡힌다. 그러는 동안 강도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고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형사는 손님들에게 힘을 모아 강도와 맞서자고 선동한다. 하지만 밀수업자인 손님들은 또 자기만의 생각이 있다. 물론 이런 상황 속에서 악당들이 호텔 안 여자들을 가만둘 리가 없다. 그리고 강도 중 한 명인 백곰이 인질로 끌려 온 숙희에게 추근거릴 때 지문은 이 장면을 이렇게 찍는다. “KISS 하려 한다.” 하긴 사랑도 LOVE였으니 키스도 마찬가지로 수입품이었겠지. 강도( 황해 , 박노식 , 구봉서 ) 이 정도면 심심하지는 않겠다. 그리고 강도를 연기한 황해 , 박노식 , 구봉서 의 연기가 궁금하다. 암만 봐도 이 영화는 무게 중심이 강도 쪽에 쏠려 있는 작품이며 가장 좋았을 부분도 강도들의 내분을 그릴 때이다. 하지만 이 부지런함이 영화적 재미로 이어졌을지는 알 수 없다. < 키 라르고 >에서는 험프리 보가트와 에드워드 G. 로빈슨의 대결로 드라마가 압축되었다. 하지만 < 공포의 여덟 시간 >에서 등장인물들은 브라운 운동을 하는 공기 입자처럼 사방으로 마구 튄다. 착한 편에 험프리 보가트가 맡았을 법한 카리스마 있는 캐릭터가 없는 건 실수다. 밀수업자를 쫓던 형사 종국은 기능적인 역할 이외 어떤 개성도 없고 액션도 기계적인 반응에 불과하다. 하긴 당시엔 착한 편인 주인공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남자답고’ 정의의 편, 그러니까 사법부의 편이고 싸움을 잘하면 주인공 자격으로 충분했다. 결국 산장호텔의 전화선이 끊겨있다는 사실을 안 경찰들이 들이닥치고 강도들은 한 명씩 끔찍하게 죽는다. 이 살상의 대부분은 거의 사람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은 종국에게 책임이 있다. 나중에 그는 “희생자 없이 해결을 못 한 나 자신을 괴롭게 생각합니다”라고 하지만 난 안 믿는다. 더 믿을 수 없는 것은 보석을 짊어지고 산장호텔로 들어와 난리를 친 악당들의 동기이다. 언제나 최악의 길만 일부러 가는 것 같은 자칭 강도들의 행동을 보면, 그들이 요란한 자폭을 계획한 자살 클럽의 멤버라는 게 거의 확실해지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