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후 : 전설의 부활
- 감독
- 주드 테일러
- 제작년도
- 1993
- 출연
- 크리스 포터, 어니스트 아부바, 데이비드 캐러딘
“코넬의 영화는 홈 무비의 본질이다. 그의 영화는 우리 삶 매일의 어디에나 있는 가까운 것들을 다룬다. 큰 것이 아닌 작은 것들 말이다. 전쟁도 아니고, 격정적인 감정도 아니고, 극적인 상황이나 충돌도 아니다. 그의 이미지는 훨씬 단순하다...조셉 코넬의 박스들, 콜라주, 그리고 홈 무비는 우리 시대의 보이지 않는 성당이다. 즉, 오늘날 여전히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최고의 것들이 그러한 것처럼,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당신이 그것을 쳐다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 조나스 메카스, 「조셉 코넬의 보이지 않는 성당The Invisible Cathedrals of Joseph Cornell」 (『빌리지 보이스The Village Voice』) 고물상이나 중고물품 판매점에서 발견한, 한때는 아름답고 귀중했던 이미지와 사물을 수집하고 박스 안에 넣어 만든 아상블라주 작업이 조셉 코넬을 대표한다면, 그가 만든 (28편에 이르는) 일련의 영화 작업은 그다지 가치 있게 평가되지 못했다. 물론 코넬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고 말이다. 그나마 최초의 영화 < 로즈 호바트 >(1936) 등 193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영화 제작 활동 전기의 작업들이 파운드 푸티지와 원본의 변형이라는 기법의 예시로서 잘 알려진 반면, 1950년대 후반의 시적인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대부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는 코넬이 래리 조던, 루디 부르크하트나 스탠 브래키지와 같은 이들과 함께 협업하여 뉴욕의 이곳저곳을 직접 촬영하고 편집한 것으로 길이가 그리 길지 않은 것들인데, < 요정의 빛 >(1957)은 그 중 하나이며 스위스 태생의 영화감독 루디 부르크하트와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졌다. 이 후기의 영화는 대부분 명확한 서사나 중심된 사건이 없으며, 단지 도시의 아주 미시적인 단면들을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별다른 특징이 없는 일상적이고 지극히 평범한 장소는 그의 영화를 통해 의문과 상상력으로 가득 찬 곳으로 비틀린다. 1903년에 태어나 1972년에 죽기까지, 코넬은 생애 거의 전부를 뉴욕 플러싱(Flushing)에 위치한 그의 집에서 어머니, 그리고 뇌성마비를 앓아 몸이 불편한 남동생 로버트와 함께 살았다. 플러싱은 맨해튼의 삶과는 그다지 관련 없었으며, 그보다는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이 사는 퀸즈에 더 가까운 곳이었다. 그는 산책자처럼 도시를 걸어 다녔고 버려진 필름을 주웠다. 그리고 자판기 식당, 도서관, 서점, 공원, 중고품 판매점에 규칙적으로 드나들었다. 그에게 도시라는 공간은 일상적인 곳이자 매우 중요한 곳이었고, 언제나 도시의 세세한 것들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50년대 영화는 대부분 이와 같은 생활 반경에 있는 뉴욕의 곳곳, 이를테면 3번가의 고가철도(< Gnir Rednow >, 1955-1960), 플러싱 공동묘지(< Angel >, 1955), 유니온스퀘어 공원(< The Aviary >, 1954-55), 리틀 이털리의 골목(< A Legend for Fountains >, 1957-65) 등을 담고 있다. <요정의 빛> 스틸컷 < 요정의 빛 >은 맨해튼 한복판에 위치한 브라이언트 공원과 그 안에 있는 뉴욕 공립도서관이 배경이다. 약 7분 정도 길이의 이 영화는 흰색의 드레스를 입은 한 소녀가 부서진 양산을 들고 공원으로 달려가면서 시작한다. 그는 화가인 친구 이본 토마스의 딸 그웬 토마스로, 당시 12세의 발레를 배우는 학생이었다. 화면 속의 그웬은 분수 주변에 모인 새들을 춤추듯 좇거나 날아다니는 것을 바라본다. 이후 카메라는 계속해서 공원의 여기저기에 앉아있거나 날아다니는 새들을 천천히 이동하며 보여준다. 녹색이 우거진 공원의 나무 사이로 새들은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고, 한낮의 밝은 빛이 그 광경을 담은 화면을 무척이나 아름답게 만든다. 이윽고 카메라는 공원 밖의 길거리를 비추며 지나가는 차들과 사람, 공원에 한가로이 앉아 있는 인물들을 차례로 담는다. 개를 산책시키는 할머니, 신문을 읽는 할아버지, 분수대에 앉아 있는 젊은 남성들. 쓰레기를 수거하는 청소부 등 무척이나 소박한 일상적 풍경들이 시선을 옮기며 이어진다. 별다른 서사도, 눈에 띌만한 시각적인 실험도 이 영화에서는 감지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무척 아름답고 정적인 < 요정의 빛 >을 몇 번이고 돌려보다 보면, 어느 순간 매우 기묘한 기분이 든다. 화면에 담긴 사물과 장소의 풍경은 매우 구체적인 것임에도 아주 멀리 아득하게 잡히지 않는 간격을 두고 놓여 있는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위해 앞서 말한 등장인물, 그웬 토마스에서 시작해보자. 그의 존재가 특징적인 이유는 영상 전체를 통틀어 새를 제외하고는 누군가와 함께 화면에 잡힌 숏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여타의 사물과 등장인물이 일상적인 실제 세계에 속한 반면 그웬은 저 홀로 영화를 위해 연출된 요소, 즉 제목에서 추측컨대 ‘요정’이라는 허구적 인물로 등장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영화는 두 종류의 세계를 하나의 공간 안에 공존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달리 말하면 브라이언트 공원은 그웬 토마스가 연기하는 요정이 사는 가상의 공간임과 동시에 무척이나 일상적인 삶이 지속되는 현실의 세계로, 이 두 세계가 한데 포개지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차이가 없는 두 세계는 그웬이 등장하는 숏과 그렇지 않은 숏의 교차를 통해 구분된다. 그리고 그웬은 요정을 표상하는 것을 넘어 기묘한 거리감을 생성하는 기능적인 것으로 역할 한다. <요정의 빛> 스틸컷 화면에서 그웬이 사라졌을 때, 그 화면은 그웬을 외화면에 방기하기보다는 시선의 주체 그 자체로 전환시킨다. 이를 암시하는 부분은 영상의 후반에 등장한다. 카메라는 화면의 왼쪽 밖을 응시하고 있는 그웬의 얼굴을 몇 초 정도 클로즈업하여 보여주고, 그다음 장면으로 공원을 서성이는 하늘색 치마를 입은 또 다른 소녀를 보여준다. 그 소녀는 화면의 왼쪽에서 등장해 두리번거리다가 오른쪽으로 나가고, 곧이어 오른쪽을 응시하는 그웬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화면은 그저 새들이 걸어 다니는 공원에서 무언가를 이리저리 쳐다보는 소녀의 모습을 찍는 것이다. 즉 요정으로 분한 그웬을 매개변수로 두고, 카메라의 시선과 숏의 배치를 활용함으로써 일상적인 도시 공간은 친밀하고 익숙하면서도 매우 낯선 기묘한 감각을 생성하는 상태에 놓인다. 아담 시트니는 「조셉 코넬의 영화적 시선 The Cinematic Gaze of Joseph Cornell」이라는 1980년의 글에서, < 요정의 빛 >의 아름다운 어린 소녀를 통해 코넬이 보여준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의 상호작용”은 매우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의 영화들을 연결시키는 하나의 실과 같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실제로 화면에 육화되어 등장하는 요정의 형상에 관객의 이목이 집중되지만, 카메라로 공원의 풍경을 비추면서 그의 존재는 그 장소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것으로 나아가게 되며, 우리의 시선을 인도한 이후 사라진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는 그러한 그의 ‘사라짐’을 암시하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청소부가 지나쳐가는 쓰레기통에 꽂혀 있는 부서진 양산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누구인지, 어디로 갔는지, 실제인지 허구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질문은, 그가 매개한 세계가 우리에게 어떻게 남겨졌느냐일 것이다. 이 장면 이후 카메라는 물방울이 떨어져 일렁이는 분수의 물웅덩이를 클로즈업하여 보여주고 끝이 난다. 시트니는 이러한 코넬의 영화가 “그가 경험한 장소의 영혼에 대해 기도하는 행위”라고 표현한다. 모든 영화에서 양산을 든 요정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코넬의 영화는 영적인 존재가 사라진 그곳에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세계의 이미지를 태연히 위치시킨다. <천사>(1957) 스틸컷 같은 해 11월, 마찬가지로 부르크하트와 함께 만든 3분여 길이의 <천사Angel>는 < 요정의 빛 >과 공유하는 요소가 많다. 17개의 짧은 숏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의 주인공은 분수를 내려다보며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천사 조각상이다. 다소 낮은 위치에서 올려다보며 하늘을 배경으로 정면에서 조각상을 찍은 숏에서 시작하여, 바로 그다음 숏은 비스듬한 측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후 분수대와 그 주변 풍경을 클로즈업하여 찍은 숏들과 조각상을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는 숏들이 교차되다가, 마지막에는 조각상의 뒷모습을 올려다보며 하늘을 비중 있게 담는 것으로 끝이 난다. 천사는 바라봄의 대상이 되었다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로 바뀌고, 클로즈업 되어 파편화된 분수대의 풍경은 그 시선과 숏의 교차 속에서 매개되는 실제라는 점에서 <요정의 빛>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요정의 빛>에 비하자면 시선과 숏의 교차가 만들어내는 장소에 대한 감각적 경험의 효과가 떨어진다는 것은 한편으로 흥미로운 지점이다. < 요정의 빛 >은 코넬의 여느 영화와 마찬가지로 소리가 없다. “이상적인 세계의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키는 무성영화의 중요한 잠재적 가능성”이 유성영화에는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였던 그는 언제나 종교적 신념에 따라 물리적이고 시간적인 세계를 초월해야 하는 필요에 대해 역설했다. 코넬의 영화를 당대의 오디오비주얼 미디어 문화와 병치시키면서 그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 마이클 피고트(Michael Pigott)의 최근 연구서 『Joseph Cornell Versus Cinema』(Bloomsbury, 2013)의 핵심적인 주장은, 코넬의 영화는 보고/보여주는 대상(특히 몸)을 통해 우리를 일상적인 세계와 꿈의 세계에 동시에 위치시키며, 이로써 우리가 우리의 실제 세계를 바라보고 지각하고 사용하는 방식을 변형시키게 되는 잠재적 효과를 지닌다는 것이다. 특히 1950년대 중반 이후의 후기 작업은 도시 공간, 그리고 이와 관계된 몸에 대한 대안적 인식의 방식을 제공함으로써 당대를 지배하는 일반적(경제적) 세계의 시간을 교란시킨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즉 피고트는 도시 공간 안에서 실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상적인 시간을 제안하는 것으로서 코넬의 영화를 이해한다. 오래되고 낡은, 일상적인 세계의 사물을 수집해 박스 조각을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카메라에 일상적인 세계의 지속들을 담았다. 이는 실제 세계의 푸티지를 콜라주하여 또 다른 실재성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전반적인 그의 예술적 실천과 연결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스 조각을 비롯한 여타의 입체 작업들과는 달리 그의 영화는 콜라주로 창조된 실재적 세계의 감각적 주체로서 관객을 더욱 명확하고 강렬하게 요청한다. 결국 이러한 논의에 따라 코넬의 영화를 이해했을 때 도출할 수 있는 중요한 질문은, 과연 영화가 실제 세계를 어떻게 지각하게끔 만드느냐, 혹은 변형시키느냐일 것이다.
‘도시 전설(Urban Legend)’이란 게 있다. 근거는 없지만 사실처럼 떠도는 이야기들. 얼마 전 인터넷에선 모 우유 회사의 어느 감수자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그의 이름이 찍힌 우유가 다른 감수자들의 우유 맛보다 조금 진하다는 것. 이에 한 매체가 취재한 기사에 따르면 전혀 근거 없는 낭설로 밝혀졌지만,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언제든지 주변을 떠돈다. 그게 조금 무서운 이야기라면 더더욱 흥미를 자아내고 인기를 얻는다. 한국 폐가로서는 이례적으로 CNN 뉴스까지 탔던 곤지암 정신병원을 비롯해, 자유로를 달리다 보면 만날 수 있다는 소복 입은 여자 괴담이라든지, 엘리베이터 한층 밑에서 내려 칼을 들고 계단을 뛰어오르는 아저씨에 대한 괴소문 등과 같은. 진위나 타당성 따윈 상관없이 오로지 관심과 재미로만 소비되는 이 구전 신화는 대중의 호기심과 확증적 편향에 따른 결과물로 알게 모르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 캔디맨 > 역시 이런 야담과 실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그리고 이를 굉장히 잘 활용한 호러영화다. 유명한 호러작가이자 영화감독이기도 한 클라이브 바커의 단편 「The Forbidden」을 원작으로 삼은 이 영화는 도시 전설을 다룬 영화답게 입소문을 타며 흥행에도 제법 성공했다. 캔디맨 도시 전설을 연구하는 헬렌. 그녀가 관심을 가진 건 거울 앞에서 ‘캔디맨’을 소리 내 다섯 번 부르면 등 뒤에서 갈고리를 찬 흑인이 나타나 배를 갈라 죽인다는 소문이었다. 실제 사건이 일어났다는 장소를 찾아 탐문하던 그녀는 이 이야기가 1890년 남북전쟁 후 부를 축적한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난 남자의 죽음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알게 된다. 노예 출신이었지만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상류사회에서 성장한 다니엘은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 많은 사람들이 따랐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부유층의 초상화를 그리며 명성을 얻었다. 그러던 중 어느 부유한 지주의 부탁을 받아 딸의 초상화를 그리다 그녀와 금지된 사랑에 빠져 임신시키고 만다. 이에 격분한 지주는 그의 죽음을 사주했고, 다니엘은 곧 붙잡혀 오른손을 잘리고 온몸에 꿀이 발린 채 벌에 쏘여 죽게 된다. 그 시체는 불태워져 카브리나 그린 지역에 뿌려졌는데, 지금까지도 그 원한을 잊지 못한 그가 나타나 보복을 하고 있다는 것. 헬렌 역시 그런 캔디맨과 조우하게 되는데, 그와 동시에 그녀 주변에선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현대인의 소외와 도시의 공허함, 사랑과 운명을 잿빛 톤으로 담아낸 버나드 로즈의 연출은 현대음악의 거장인 필립 글래스의 스코어와 만나며 더욱 명징하고 강렬하게 꾸며졌다. 스티브 라이히와 라 몬트 영, 테리 라일리 등과 함께 미니멀리즘의 선두주자로 손꼽히는 필립 글래스는 1937년 미국 볼티모어에서 태어난 현대음악가로, 시카고 대학에서 수학과 철학을 전공하였으나 무조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며 뉴욕의 줄리어드 음대에서 본격적으로 작곡을 공부했다. 그러나 조각나고 무질서한 우연의 음악과 복잡한 불협화음의 모더니즘에 싫증을 느낀 그는 유럽에서 ‘음악가의 음악가’라 불리는 나디아 불랑제에게서 화성학과 대위법을 배우고, 인도의 시타르 연주자인 라비 샹카르와 타악기 연주자 알라 라카 등을 만나면서 자신의 방향성에 대해 깨우치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멜로디와 화음, 리듬에 있어서 놀랄 만치 진보적이라 말할 수 있는 단순함(minimal)이었다. 그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1960년대 말부터. 20세기 중엽 고전음악의 화성과 음조의 특징적인 복잡성을 배제하고, 하나의 코드, 짧은 모티프 등 최소한의 소재에 집착하며 단조롭게 반복되지만 조금씩 변주되는 형태의 협주곡들을 선보이며 주목받았다. 작고 단순한 리듬과 멜로디가 끊임없이 반복되며 변화를 수없이 거듭해 급기야 트랜스 상태까지 이끌어내는 이 일련의 종교적이고 초월적인 느낌의 조화로운 소리들은 전후 예술사조 전반에 불었던 ‘예술적인 기교나 각색을 최소화하고 사물의 근본, 즉 본질만을 표현했을 때 현실과 작품과의 괴리가 최소화되어 진정한 리얼리티가 달성된다는 믿음’과 맞아떨어지며 각광받기 시작한다. 글래스는 이에 멈추지 않고 행위예술과 발레, 오페라 그리고 영화와 영상음악 등 다양한 영역에 손대며 최근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필립 글래스 필립 글라스는 이 영화를 위해 파이프 오르간과 합창단을 대동한 고딕 스코어를 완성해냈다. 그러나 호러영화에서 자주 들리는 음향과도 같은 전위적인 사운드나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던지는 스케일의 압박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단출하지만 아름다운 피아노와 영혼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코러스의 위력이 만만치 않다. 우중충하고 몰개성적인 도시의 획일적인 풍광에 그의 장중하고 거룩한 선율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린다. 미니멀리즘의 반복되는 단순한 멜로디 라인은 도심의 비슷한 외형에서 오는 고독과 공허, 소외감에 밀접하게 맞닿아있고, 그 속에서 조금씩 섬세하게 변주되는 과정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각기 다른 사람들의 모습들을 상징한다. 점층적이고 고조되는 리듬의 진행은 드라마를 야기하고 서사를 부여하며 새로운 도시의 신화를 창조해간다. 글래스는 이미 이전의 고드프리 레지오 감독의 < 코야니스카시 >와 < 포와카시 >를 통해 현대인의 다양한 초상과 사회에 대해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경이와 감동을 표현한 바 있기에, 이 기시감을 통해 전혀 다른 전율과 감정을 전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또 현재의 헬렌은 거울을 통해 과거의 다니엘과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되는데, 그들의 대칭적인 위치와 배경(백인과 흑인, 여성과 남성, 글을 쓰는 대학원생과 그림 그리는 화가, 배우자의 불륜과 강제로 헤어진 안타까운 사랑)에 대한 균형감을 잡는데 글래스의 반복과 변형은 커다란 중추로 작용한다. 일반적인 영화음악처럼 미키마우징이나 언더스코어 역할에 그치지 않고, 미니멀리즘이란 형식 자체가 영화의 주제에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완성본을 처음 본 필립 글래스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애초 버나드 로즈가 음악을 부탁하며 건넸던 창조적인 함의의 스크립트와 달리, 예산의 한계로 인해 엉성하게 만들어진 뻔하디뻔한 할리우드 호러/슬래셔 영화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편에 실망했음에도 스튜디오에서 기획한 속편을 위해 그는 4개의 큐들을 새로 작업했고, 원 스코어를 편곡해 전편과 이어지면서도 독자적인 매력을 갖춘 사운드를 완성해냈다. 그의 스코어는 속편에서도 여전히 고딕적이고 장엄하며, 아름다우면서도 소름 끼치는 선율을 들려주었다. 1편의 ‘헬렌의 테마’에서 피아노와 합창을 통해 숭고하면서 비장한 슬픔이 묻어났다면, 2편의 ‘애니의 테마’에선 피아노와 솔로 소프라노로 처연한 아름다움과 운명론적인 굴레를 보여주었다. 글래스의 스코어는 단순히 싸구려 호러로 전락할 수 있는 영상에 진중한 주제의식과 무게감을 부여했고, 굴곡진 역사의 아픔 속에서 산화되었다가 20세기말 핏속에서 부활한 캔디맨에게 어울리는 오라토리오를 선사했다. 그의 <캔디맨> 스코어는 < 싸이코 >의 ‘The Murder’나 < 오멘 >의 ‘Ave Satani’, < 엑소시스트 >의 ‘Tubular Bells’이 가진 전위와 공포감과 또 다른 무시무시한 마력을 전달한 스코어로 기억될 것이다. 이후 글래스는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의뢰를 받아 토드 브라우닝의 1931년 걸작 공포영화 <드라큘라>의 새로운 스코어를 작곡하며 자신의 호러적인(?) 역량을 다시 한 번 과시했고, 영화음악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화와 요청에 못 이겨 2001년 그간 미발매 상태였던 <캔디맨> 1, 2편의 음악을 함께 담은 사운드트랙을 발매했다. 사실 필립 글래스의 우려와 달리 <캔디맨>은 평범한 할리우드 슬래셔 호러로 전락하지 않았다. 비디오용으로 출시된 3편의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버나드 로즈의 뒤를 이어 속편을 완성한 빌 콘돈의 2편 역시 캔디맨의 근원에 대해 장르적으로 접근하는 독특한 질감과 분위기를 가진 호러가 되었다. 원작이 가진 캐릭터의 힘이나 감독들의 연출력보다는 필립 글래스가 걸어놓은 압도적인 주술의, 완벽한 저주와도 같은 음악 덕분이 아닌가 감히 생각해본다. 미묘하게 변해가는 단순한 선율을 통해 세상의 이치와 가정을 표현하고자 하는 그의 부단한 노력은 캔디맨처럼 영생을 얻었다. 그 사랑과 고통의 찬가는 달콤하고 짜릿하다. (사운드트랙은 영상자료원 영상도서관(F-0751)에서도 접할 수 있다.) ‘The Murder’ by Bernard Herrmann Track List 1. Music Box CANDYMAN SUITE 2. Cabrini Green 3. Helen's Theme 4. Face to Razor 5. Floating Candyman 6. Return to Cabrini 7. It Was Always You, Helen FROM CANDYMAN II 8. Daniel's Flashback 9. The Slave Quarters 10. Annie's Theme 11. All Falls Apart 12. The Demise of Candyman 13. Reverend's Wal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