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 Office
- 감독
- Sarah Erulkar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때로는 기록영상의 맥락을 탐구하는 과정이 어떤 종류의 영화를 떠올리게 할 때가 있다. 주인공은 작은 물건이나 단서 하나에 호기심을 느껴 관련자들을 찾아다니며 탐문을 시작한다. 이렇게 영화가 시작하고 2시간 가량이 흐를 때까지는 건조하고 반복적인 장면들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우연한 계기로 지금까지의 모든 사소한 정보들 뒤에 있던 거대한 맥락이 폭발하듯이 드러난다. 엔드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에도 관객의 머릿속은 분주하다. 지금까지의 플롯들이 복기되고 재정의된 이후에야 비로소 영화는 결말을 맞이한다. 순차적으로는 설명되지 않고 작은 부분정보들이 서로를 설명하고 보완하여 전체의 윤곽을 이루는 구조의 이야기는 기록영상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이번에 소개할 이야기는 비슷한 주제를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세 개의 미군 기록영상에서 시작한다. #1. 불친절한 세 개의 영상 < 미국 NA II 기록영상컬렉션 (2) >에서 ‘제이드 민사처병원’ 필터를 체크하고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세 개의 영상이 뜬다. (편의상 앞으로 각 영상을 알파벳 부호로 지칭하겠다) ● <A> , DEDICATION OF X CORPS CIVILIAN HOSPITAL, KOREA; [ETC.] ● <B> , BUILDING OF NEW KOREAN HOSPITAL, HYUN-NI, KOREA; [ETC.] ● <C> , ARMED FORCES ASSISTANCE KOREA, IP SONG NI, SOUTH KOREA 여기에는 건설이라고 하기 민망한, 작은 1층 벽돌 건물의 건설에 관한 미군의 원조 관련 장면이 포함돼 있다. 병원(Hospital)이라기보다는 의원이나 진료소(dispensary)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할 듯하다. 영상의 제목, 그리고 해당 장면의 슬레이트 정보와 화면 속 표지판 등 문자 정보를 간추리면 1차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A> , 세 곳의 서로 다른 원조 현장이 촬영됐는데, 그 마지막 순서가 제이드 민사처병원(Jade Civilian Hospital)의 민간 이양식 광경이다. “미 제10군단과 UNCACK(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의 협조로 제4통신대대가 건립했다”라는 내용의 1953년 6월 3일자 준공표지판이 찍혔다. <B> , 1954년 3월 18일에(제목에 따르면) ‘현리에서 새 병원을 건설’하는 현장에서 제4통신대대장 모리스 중령이 한국인 병원장 ‘Dr. Kim’을 인터뷰하는 모습이 담겼다. 이 영상만으로는 어느 병원인지 알 수 없다. <C> , ‘입송리’의 AFAK(미군대한원조) 프로젝트 후원 현장 세 곳 [1] 을 담았다. 그중 세 번째 시퀀스가 시멘트를 발라 벽돌을 쌓고 있는 제이드 병원 건설 현장의 모습이다.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는 곳을 찍은 두 번째 시퀀스에는 <영상 B> 에서 제이드 병원 시퀀스에 등장했던 모리스 중령이 나온다. 세 영상의 화면과 파편 정보는 서로 같은 듯 달라서 뭔가 개운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촬영 소대는 카메라의 시선을 좁혀 ‘원조라는 행위와 원조의 유형’만을 담았고, 자신들이 공유하고 있는 맥락 속에서 당연한 정보들은 슬레이트에 기록하지 않았다. 이로써 누락된 전체적인 맥락은 이제 단서 수집과 추리의 몫이다. 일단, 순수하게 영상들의 쇼트를 비교하는 것만으로 이 세 영상이 같은 장소의 같은 병원 건물에 관한 것이라는 점은 알 수 있다. <A>와 <C>에서 보이는 ‘준공표지판’과 ‘병원팻말’은 같은 것이다. 그리고 <A>와 <B>에 나오는 건물 모습은 서로 다르지만, 이 모두가 담긴 <C>를 통해 <A>가 병원의 앞을, <B>가 병원의 뒤뜰을 촬영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안내팻말 (왼쪽: <A>, 오른쪽: <C>) 준공표지판 (왼쪽: <A>, 오른쪽: <C>) 천막의 위치에 의해 공사 장소가 병원의 뒤쪽임을 알 수 있음 (모두 <C>) 그러니까 1953년 6월 3일, 미 제10군단 민사처는 UNCACK(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과 협조하여 예하 제4통신대대를 통해 이 병원, ‘Jade Civilian Hospital’ 건물을 짓고 민간에 이양했다(<A>). 이듬해 3월, AFAK 프로젝트의 형태로 병원 뒤뜰에 공사 원조가 있었고(<C>), 그 공사 현장을 배경으로 제4통신대대장이 직접 병원장을 인터뷰하는 장면을 촬영했다(<B>). 마지막으로, 10군단 민사처가 관리 주체임을 명확히 밝힌 안내표지판(<A>, <C>)에 의해, 이 병원은 ‘민사처병원’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2. 정리됐다는 착각 이제 이 병원이 어디에 있었는지 추리하는 단계로 접어든다. <C>는 제목에서 ‘IPSONG-NI(입석리)’를 언급하고 있지만 이는 입석리국민학교 건설 현장에 대한 첫 시퀀스에만 해당하는 무성의한 작명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B>의 제목은 ‘HYUN-NI(현리)의 병원’이라고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라면 전쟁 중후반기 미 제10군단의 영향력 아래 있던 지역인 만큼 신빙성이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문건도 발견했다. OEC(유엔군사령부 경제조정관실)의 강원도 의료 시설 현황 보고서(이하 「OEC 보고서」라 칭하겠다)에는 ‘인제-제이드 병원(장로교 선교회)’이라는 항목 아래 제이드 병원이 ‘Sang Nam, Maechon, Naepyong and Kirin’에 있었다고 적혀 있다. 이로써 기린면에 있었다 는 증거를 잡았다. 이 이름이 붙은 병원이 여러 군데 있었던 이유는 ‘제이드’의 의미를 파악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제이드 병원을 이양받은 민간 조직이 장로교 선교회였다는 정보도 덤으로 확인된다. 하나 더, <B>의 인터뷰 장면에 등장했던 ‘Dr. Kim’이 누구인지도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미 육군 통신대 아카이브의 푸티지를 활용하여 제작됐던 미국 TV 시리즈 The Big Picture 의 한 에피소드, 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미군대한원조)에 이 푸티지가 실린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 [2] 여기서 장면에 덧씌워진 내레이션에 그의 본명이 나오는데, 미국인의 발음으로 ‘김방모’, ‘김봉모’와 유사하게 들릴 뿐 특정할 수 없다. 그러나 「OEC 보고서」에는 그의 이름이 ‘Dr. Kim Bong Mu, director, grad. from Nippon University, Japan(일본대를 졸업한 병원장 김봉무 박사)’라고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이제 확인해야 할 부분은 얼추 정리된 것 같다. (이렇게 끝나는 줄로만 알았다.) #3. 기록문서의 발견, 그리고 힘겨운 재구성 시간이 엄청나게 오래 걸리는 일이지만, 이런 컬렉션에서 최대한 정확한 맥락을 캐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National Archives의 원조사업 관련 문건에서 영상 속의 원조사업 관련 정보를 찾는 것이다. 특히 AFAK 프로젝트는 열람이 가능한 문서만 해도 3개 문서군에 흩어져 있는 수백 건 이상의, 어림잡아 50만 쪽이 넘는 엄청난 분량이다. OCR이 되어 있지 않은 문서 파일을 일일이 눈으로 확인하는 일은 매우 고된 일이었고, 시간이 무한정 주어지지도 않았으므로 최대한 찾을 수밖에 없었다. [3] 그래도 AFAK 프로젝트 보고서는 UNCACK 관련 문서에 비해 정보가 구체적이다. 그리고 식별된 장소나 건물명으로 찾는 것보다 그나마 조금 나은 경우는 영상에 AFAK 프로젝트 안내지, 그중에서도 프로젝트 번호가 찍힌 경우다. 다행히 <C>에는 프로젝트 번호 ‘9219’가 영상에 찍혔고, 이로부터 시작하여 제이드 민사처병원과 관련한 3건의 AFAK 프로젝트 보고 문건을 찾았다. 그리고 대혼란에 빠졌다. 모두 동일하게 장소가 ‘Chaun-ni’라고 적힌 것이다. AFAK 안내지(<C>)에 프로젝트 번호가 희미하게 적혀 있다. AFAK #9219 보고문서, National Archives RG 338, Entry A-1 255, Box 2197, p.126. AFAK #9221 보고문서, National Archives RG 338, Entry A-1 255, Box 2197, p.123. AFAK #9239 보고문서, National Archives RG 338, Entry A-1 255, Box 2197, p.118. (*이상, 각 보고문서의 첫 쪽 일부 모습임) 아무리 전에 그럴 듯한 결론이 나 있더라도, 이 증거는 반박할 수 없다. 돌이켜 보면 슬레이트 어디에도 장소 명이 구체적으로 적힌 곳은 없다. 오히려 National Archives의 관리용 제목이나 「OEC 보고서」에 ‘Inje-Jade’라는 표현이 나오는 이유에 대해 다른 추정을 해야 할 상황이다. AFAK 문서의 내용은 구체적이고 정확했다. “민간 이양식 때 병실 사진을 찍었으나 보고 시점(8월 13일, 14일)에 사용할 수 없어 추후 제출하겠다”라는 문구가 있어 <A>의 내용을 지칭하고 있다. <B>, <C>의 병원 뒷편에서 하던 공사는 증축 또는 구획변경을 통해 수술실과 의료용품 공간을 추가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료용품 공간에는 침구 보관 및 회의실 공간도 마련할 예정이었다. 이 병원에는 같은 시기에 다른 소규모 AFAK 프로젝트 두 건이 동시 진행 중이었다. 대략 1954년 2월 중순에 프로젝트 기획안을 제출, 승인받았으며 3월에 착공하여 7월에 완공됐다. 미 제45공병단이 일부 자재를 공급한 시기는 4월. <B>, <C>는 아직 자재도 오지 않은 공사 초기의 장면이다. 보고서의 제출자가 ‘제57통신지원중대’인 이유는4월 29일자로 제4통신대대로부터 이 후원 프로젝트를 이관받았기 때문이고, 이때 재고대장 등이 빠진 불완전한 상태로 서류가 넘어왔다는 메모도 있다. 이제 다시 따져봐야 한다. ‘Chaun-ni’는 어디일까? 강원도 지역에서 미군, 미국인이 이렇게 표기할 만한 곳은 두 군데로 추려졌다. ● 홍천군 내면 자운리 ● 홍천군 두촌면 자은리 홍천 일대의 기록에 언급되는 군 조직은 보통 미 제9군단이므로 10군단이 설립한 병원의 장소라고 생각하기가 더 어렵다. 그러다가 혹시라도 ‘인제군’과의 접점은 없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에 명분을 주는 사실을 발견했다. 내면은 원래 인제군에 속해 있다가 1954년 10월에 제정된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 [4] 의 부칙에 따라 홍천군으로 편입됐다. 본래 인제군은 강원도에서 가장 넓은 영역을 포괄하는 행정구역이었으므로 미군의 입장에서 그 인근은 대략 ‘인제’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고, 영상과 문서가 생산된 시점은 개편 전이었으므로 실제로도 그렇게 부르는 것이 맞았다. 내면 자운리가 10군단 관련 지역, 그리고 「OEC 보고서」에서 언급한 제이드 병원들의 분포 지역과 다소 떨어져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말이다. 원래 인제군이 아니었던 두촌면 자은리보다는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4. 마지막 반전, 드와이트 멀스배리 선교사의 흔적에 닿다 그런데 ‘제이드’는 무슨 의미로 쓰인 이름이었을까? 혹시 병원을 이양받아 운영했던 장로교 선교회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해서 관련 정보를 찾다가 드디어 ‘드와이트 멀스배리(Dwight R. Malsbary)’, 한국 활동명 ‘마두원’인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가 관심 범위에 들어왔다. 그는 1929년 숭실전문학교에 초청된 것을 계기로 한국 최초의 음악선교사로서 한국에 서양 음악을 보급하고 저명한 제자를 배출하는 등의 족적을 남겼고, 1940년에는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했던 인물이다. 해방 후에 다시 한국에 와서 교회, 신학교, 병원 등의 설립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이 정도의 삶을 살았지만 다른 내한 선교사들에 비해 그에 관한 기록은 매우 드물다. 같은 교단 내 교파 갈등으로 인해 주류 학계에서 소외된 것이 원인이라고들 한다. 이것이 그가 강원도 사역에 전념했던 이유로 거론되기도 한다. 그의 선교활동 자체에 대해 참고할 수 있는 논문은 거의 없고, 그의 삶을 다룬 서적은 있으나 고증에 충실한 연구서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의미에 방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참고할 수 있는 정보는 2025년 3월에 그를 주제로 열렸던 세미나 [5] 중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이종전 교수(전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두 분이 앞의 책과 다른 여러 문헌을 종합하고 견해를 더해 발표한 것을 촬영한 영상, 그리고 홍천 출신의 강정식 시인이 《홍천신문》에 기고한 여러 글이 사실상 전부이다. 이 소스들은 앞에 언급한 서적 등 참고 문헌에 오류가 있을 수 있거나, 기억에 의존한 구술에 의한 것이므로 약간의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다만, 멀스배리 선교사가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을 중심으로 사역활동을 했으며, ‘미군의 요청으로 제이드 병원 을 운영했다 [6] ’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가 일관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서로 내용과 견해의 차이는 다소 있지만 종합하면 이렇다. 6.25 전쟁 이후 멀스배리 선교사는 홍천군 두촌면을 거점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여 무려 26개에 달하는 교회를 세웠는데, 이 교회들은 44번 국도를 따라 속초까지 [7] 주변의 산골짜기에 분포돼 있었다. 그 이유는 당시 이 지역의 인구 대부분이 군사적 요충지를 따라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다. 44번 국도와 미 제10군단 및 멀스배리 선교사의 상관관계 (* 내면 자운리는 우하단에 떨어져 있음) 이런 맥락에서 ‘미 제10군단의 요청으로 군단이 운영하던 제이드 병원을 맡아 관리하게 됐다’라는 주장 [8] 도 개연성이 있다. 그와 관련됐던 병원의 위치에 대해서는 홍천군 홍천읍(지금의 홍천군청 서쪽 ‘명동보육원’ 터), 홍천군 두촌면 자은리, 속초의 세 군데가 언급되고 있으며, 두촌면 자은리의 제이드 병원을 제외한 나머지는 의사 부족 등의 문제로 먼저 문을 닫았다는 것에 대해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9] 실제로 미 제10군단 본부였던 인제군 관대리, 멀스배리가 관여했다고 알려진 병원들의 위치, 「OEC 보고서」가 언급하는 제이드 병원의 소재지 등을 보면 실제로 44번 국도에 인접하거나 부근에 있는 반면에, 인제군 내면 자운리는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다. 이 정도라면 ‘Chaun-ni’는 ‘두촌면의 자은리’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이게 뭐라고, 반전에 반전이 거듭된 ‘위치 논란’이 드디어 마무리됐다. 더 확실한 자료가 발견되면 좋겠지만, 현재까지의 자료전쟁의 승자는 처음에는 예상하지도 못했던 두촌면 자은리다. #5. 가장 나중에 밝혀진 ‘Jade’의 의미 그래도 마지막으로 어떻게든 확인하고 싶었던 ‘Jade’라는 명칭의 의미. 혹시라도 이에 따라 또 무슨 반전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계속 나를 괴롭혔다. 이것이 미군의 호출부호를 딴 것이라는 말이 있어서다. [10] 최소한 지금까지 경험한 전문(telegram)에서 그런 종류의 부호를 본 적은 없다. 부대라는 것은 이미 부대명 약어로 충분히 구분되고, 대외비를 송수신한다고 해도 어차피 전문에 적힌 APO(Army Post Office)만으로 각 시기의 부대 정보가 대략 노출된다. 그보다 1950년대라면 필요한 경우에 어떤 기계나 알고리듬 [11] 에 의해 전문 전체를 암호화하여 송신하던 시대 아니었나? 이를테면 그 유명한 독일의 에니그마(Enigma)라든지, 태평양전쟁기에 미군이 일본의 암호체계(또는 기계)에 붙인 코드네임인 퍼플, 레드, 제이드 같은 것들 말이다. (이때의 ‘제이드’는 지금의 맥락과 무관하므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애초에 호출부호라는 것은 항공 관제탑이나 선박 구분에 쓰이는 것 아닌가. 영상 <A>, <B>, <C>를 처음 본 순간부터 기약 없이 밤낮으로 찾아 헤매던 이 물음은 어느 순간에 허무하게 풀렸다. 답은 제이드 병원 원조 건설사업을 진행했던 제4통신대대의 부대사(史)문서 중에서 발견됐다. 이 컬렉션의 거의 모든 영상이 통신대 소속의 사진 및 영화 촬영 소대에 의해 촬영됐다고 해도, 통신대의 본 임무는 통신선로를 설치하여 통신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제4통신대대는 미 제10군단 본부가 전선을 따라 이동할 때마다 해당 지역, 이를테면 함흥-원산, 인천-김포 등의 영역 내에서 본부와 각 부대를 이어 구축했던 통신망의 다이어그램을 문서에 남겨 놓았다. 통신망 다이어그램은 각 노드, 즉 망이 모이고 분산되는 허브 역할을 하는 곳 또는 그곳의 통신장비에 대해 코드네임을 붙여 놓고 노드 사이를 선으로 연결해 놓은 그림이다. 본부가 어디로 옮겨 가든 제4통신대대의 통신망에서 늘 통신선이 집중되는 주 노드에는 ‘JADE’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그래서 추정컨대, ‘JADE’는 미 제10군단 본부에 설치되는 통신시설 또는 그 위치를 나타내는 식별부호일 것이다. 즉, ‘JADE’는 다른 노드에서 본부에 연락을 취할 때 호출명으로 사용됐을 수 있다. 다시 말해 통신 호출명 ‘제이드’는 그 자체로 군단을 대표하여 지칭하는 이름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제이드 병원’의 정체는 10군단 민사처가 설립, 운영하던 모든 병원이었다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통신 노드와의 관련성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증거로 영상 속의 AFAK 안내지를 다시 떠올려보면, 프로젝트 번호 아래 후원 부대가 좀 더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R&M OPN Co. 4th SIG BN CORPS” - 즉, 군단직속 제4통신대대 무선 및 교신(Radio & Message) 작전 중대. 에필로그. 짧은 기록영상 세 개에 이렇게 골몰할 일인가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하지만, 그 결과로 마치 필름 현상 과정을 거쳐 잠상(latent image)이 드러나듯이 보다 다층적이고 구체적인 정황을 읽을 수 있게 됐다. 1950년대 강원도에서는 두 가지 플롯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한 줄기는 이름도 몰랐던 먼 나라에 와서 사상 처음 경험하는 형태의 전쟁 한복판에 있던 미군, 그리고 그들이 전시 후방 안정화 및 전후 주둔지 스킨십 강화를 위해 여러 가지로 골몰했던 민사 활동들에 관한 것이다. 다른 한쪽에는 스스로를 ‘평양 마씨’라고 일컬을 정도로 사랑한 나라 한국에서 1929년부터 종교적 신념에 따라 선교를 계속하던 미국인 선교사의 사연이 있다. 미군과 선교사는 44번 국도를 따라 홍천에서 인제를 거쳐 속초까지 전쟁이든 선교든 각자의 일을 했다. 미 10군단은 서서히 본토로 귀환했고, 선교사는 외로운 사역을 계속하다가 1977년에 두촌면에서 홍천읍으로 가던 중 추돌사고로 사망했다. [12] 2025년, 한국의 한 아키비스트는 제이드 병원 영상을 보고 1950년대의 44번 국도 여기저기를 헤매며 오랫동안 가려졌던 사연에 접근한다. 흔한 영화 줄거리처럼 느껴지지 않은가? 이를 영화화한다면 제목은 <44번 국도에서 만나요> 정도가 좋을 것 같다. 흥행은 어렵겠지만. * <A>, <B>, <C>의 VOD와 각 장면에 대한 설명은 < 미국 NA II 기록영상컬렉션 (2) >에 있습니다. <참고문헌> 1. 이승구, 「말스베리 선교사와 김홍전 박사」, 초기 내한 선교사들에 대한 세미나7(2025. 3. 21, 한국개혁주의 연구소 주최, (주)유나이티드문화재단 후원) / Youtube 영상 2. 이종전, 「마두원의 해방 이후 사역에 관한 고찰」, 같은 세미나 / Youtube 영상 3. 강정식 시인, ⟪홍천신문⟫의 여러 기고글 4. “20. Kangwon-Do”, Unclassified Subject Files, ca. 1955 - 11/03/1961, RG 469, Entry P 321, Box 34, National Archives. p. 70. / 원문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사료철 코드: AUS014_81_00C0311) 5. “AFAK [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Project Completion Reports, FY 55: July 1954”, Project Files, 1954 - 1963, RG 338, Entry A-1 255, Box 2197, National Archives. p. 118, 123, 126. / 원문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사료철 코드: 사료계열AUS004_103) 6. “SGBN-4, History-4th Signal Battalion Corps, Nov. 1950”, Command Reports, 1949 - 1954, RG 407, Entry NM3 429, Box 4745, National Archives. p.13. / 원문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사료철 코드: 사료계열AUS037_01_10C1079) 7. “SGBN-4, History-4th Signal Battalion Corps, Aug. -Sep. 1950”, Command Reports, 1949 - 1954, RG 407, Entry NM3 429, Box 4745, National Archives. p.27. / 원문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사료철 코드: 사료계열AUS037_01_10C1077) *** [1] 두 번째 장소는 최소한의 정보도 식별되지 않는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중 어느 곳의 한 장면일 수도 있다. [2] 정영신(2021), 「미군의 대한원조 영상 속에서 재건되는 전후 주체: The Big Picture 시리즈의 ‘미군대한원조’와 ‘한국과 당신’을 중심으로」, 『역사연구』, 41, pp. 117-159. [3] 타이핑된 문서가 고품질의 OCR을 거치지 않은 상태라면 AI도 그리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자동 OCR 프로세싱의 결과를 토대로 AI가 신뢰할 만한 결과를 내놓기는 어렵다. 또한 PDF는 의외로 구조적인 포맷이 아니므로 현재 AX(AI 전환) 분야의 큰 화두 중 하나는 AI를 위한 기존 문서의 전처리 및 구조화 기술 수준을 높이는 문제이다. [4] 6.25 전쟁의 결과 경기도와 강원도의 38선 이북 일부 지역이 우리의 영토가 됐는데, 이를 ‘수복지구’라고 한다.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는 전후 수복지구를 감안한 행정구역의 조정 사항이 포함됐다. [5] <초기 내한 선교사들에 대한 세미나7>(2025. 3. 21), 한국개혁주의 연구소 주최, (주)유나이티드문화재단 후원 [6] 선교회가 병원을 운영하는 것은 일제강점기부터 계속된 미국 내한 선교사들의 ‘트라이앵글 선교’, 즉 선교지역에 기지를 세운 후 이를 거점으로 교회-학교-병원을 함께 키워 연계하는 선교 방법론에 따른 것이다. 멀스배리 선교사도 해방 후에 부산, 강원 등지에서 끊임없이 교회, 학교, 병원을 건립하는 등 철저히 한국 내 전통적인 선교전략에 입각하여 활동을 전개했다. [7] 이종전, 앞의 세미나; (글쓴이 추가) 발표 자료에 해당 교회들의 분포가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44번 국도는 6.25 전쟁 후반기 미군의 거점들을 포함하고 있고 지리적으로도 중요한 보급로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이를 따라 군집한 촌락이 주 선교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맞다. [8] 멀스배리 선교사는 이전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북한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했던 이력도 있고, 그의 강원도 선교 범위가 홍천과 인제 일대의 미 제10군단 작전 지역을 따라 형성됐으므로 지역 거주민들을 대변하여 미군의 각종 원조사업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다. - 이종전 교수(앞의 세미나)의 견해를 중심으로 정리함. [9] 면허 의료진의 부족 및 민간 이양 후의 재정문제로 병원이 사실상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폐쇄됐다는 등의 상황은 「OEC 보고서」에서도 동일하게 언급됐다. 다만, 여기서 언급된 ‘제이드 병원’의 소재지 중에는 위 세미나 및 회고글에서 말하는 병원 중 홍천면 병원이 없고 대신 내평, 상남 등 다른 곳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두촌면 자은리 병원, 범위를 넓히면 속초 병원까지만 제이드 병원이고 다른 곳은 제이드 병원과 무관한 선교사 병원이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10] 이승구, 앞의 세미나; 발표에 참고했던 서적 중 김광섭, 전민수 공저, 『마두원 선교사: 한국음악의 아버지, 강원도 선교의 아버지』(영창서원, 2019)가 출처인 듯하다. [11] 이 의미로 흔히 쓰이는 알고리즘(algorism)은 수학의 계산법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문제 해결의 흐름 및 절차를 뜻하는 경우에는 비록 알고리즘이 통용된다고 할지라도 원칙적으로 알고리듬(algorithm)이 맞는 표현이다. [12] 이승구, 앞의 세미나에서 앞의 책 인용.
1980년에 출판된 미국 인명사전 「마르퀴스 후스 후 인 아메리카 Marquis Who’s Who in America」에는 렌 라이(1901-1980)가 ‘모션 컴포저(Motion Composer)’로 등재되어 있다. 직역하면 ‘동작(움직임) 작곡가’가 될 이 합성어는 드로잉, 회화, 직물염색(납염, Batik), 사진, 영화, 키네틱 조각, 시와 산문 등의 매체로 작업해왔던 라이가 본인의 작업을 ‘움직임의 형상(figure of motion)’으로 압축해서 표현했던 것을 고려하면, 그를 대표하는 단어의 조합으로서 매우 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모션 컴포저’가 다양한 매체를 가로지르며 운동의 리듬을 탐구했던 라이를 대변한다면, 1958년에 첫 상영되었던 <프리 래디컬스 Free Radicals>는 그의 작업 이력 전체를 함축하고 대표하는 작품이다. <프리 래디컬스>를 라이의 대표작으로 꼽는 이유는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열할 수 있다. 프리 래디컬스는 화학용어로서 유리기라고 번역되는데, 홀전자(unpaired electron)를 갖는 원자나 분자를 의미한다. 보통의 원자나 분자에서 전자는 회전 방향이 반대인 두 개의 전자가 쌍을 이루어 안정된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나 빛이나 열과 같은 에너지가 가해져서 전자의 결합이 끊어지면 홀전자가 되고, 이는 다른 원소들과의 반응을 촉진하는 불안정한 상태를 야기한다. 라이는 전 작업을 걸쳐서 신체와 물질을 탐구했었고, 자신의 창작이론을 진화론, 신경과학, 양자역학, 유전학에서의 발견들을 통해 확인하고 설명하는 것을 좋아했다. 라이는 신체와 물질 각각 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교환 역시 에너지로 생각했고 안무를 에너지에 헌정된 예술로 간주했다. 그가 자주 썼던 용어로 표현하면, 인간의 ‘오래된 뇌(old brain, 이성이나 문자를 거치지 않고 직관적인 앎을 가능하게 하는 몸의 깊숙한 곳)’와 유전자(태고부터 내려오는 인간의 활동들이 각인된 저장소)는 사물의 운동(에너지)와 공감각적으로 공감(empathy)한다. 라이의 필모그래피에서 색채, 댄스, 리듬 등의 단어가 눈에 띄는 것은 운동에 대한 그의 관심을 반영한다. 그러나 <프리 래디컬스>에서는 제목이 뜻하듯, 하나의 형상이 전개되고 다른 형상으로 변주되는 과정이 화학적인 촉발과 반응처럼 구성되었고, 아프리카 바기르미족(Bagirmi)의 드럼 음악(인간의 원초적 에너지)에 맞춰 안무 되었다는 점에서 라이의 관심사가 응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리 래디컬스> 별표 시퀀스의 일부 출처: http://thethird-eye.co.uk/free-radicals-by-len-lye <프리 래디컬스>를 라이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영화제작을 위한 재정적 후원을 받는 것을 포기하고 영화가 예술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다소 결연한 의지로 만들었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라이의 영화들은 제작비의 출처에 따라 여섯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런던 필름 소사이어티(the London Film Society, 1925년에 설립되어 1939년까지 지속되었던 영국 최초의 영화 협회이다. 알프레드 히치콕, 캐럴 리드와 같은 감독들도 회원이었다)로부터 제작비 일부를 충당했던 1929-34년, (2) 영국 중앙우체국(GPO, the General Post Office)의 영화과 등에서 제작비 지원을 받았던 1935-40년, (3) 영국 정보부(MOI, the Ministry of Information)의 사실주의자 영화과(Realist Film Unit)에 소속되어 나치에 대항하는 선전영화를 만들었던 1941-43년(공교롭게도 MOI는 라이의 영화를 보고 선전영화는 더 직설적이고 덜 영화적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4) 1944년에 뉴욕으로 옮겨서 <마치 오브 타임 the March of Time> (타임 사에서 제작했던 단편 뉴스릴 영화 시리즈로 극장에서 본영화 전에 상영되었다) 시리즈의 연출가로 뉴스릴 영화를 만들었던 1944-51년, (5) 제작비 대부분을 스스로 충당했던 1952-59년, (6) 키네틱 조각을 만들다가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그의 고국 뉴질랜드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았던 1979-80년이다. (지면의 한계로 작품의 상세한 목록을 생략한다. http://sensesofcinema.com/2002/feature-articles/lye-2/#filmo을 참고하기 바란다.) 1945년 경 <마치 오브 타임>의 사무실에 있는 렌 라이 사진의 왼쪽은 라이가 디자인한 시리즈의 로고 출처: http://www.art-newzealand.com/Issue101/lye.htm <마치 오브 타임> 시리즈의 일부를 연출했던 시기까지 라이는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안정되게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특히 존 그리어슨이 이끌던 GPO의 영화과로부터 지원을 받게 되면서, 일 년에 두 편 정도로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이 시기 작품들의 장르를 엄밀히 따지자면 광고에 해당한다. 작품 제작을 지원했던 단체 혹은 회사들(예를 들면, 임페리얼 Imperial 항공사)이 원하는 메시지를 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어슨은 작품 제작에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데 있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만을 달았을 뿐, 라이가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었다. 만약 라이의 대표작을 색채의 관점에서 꼽아야 한다면, 단연코 <컬러 박스 Colour Box>(1935)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거의’ 처음으로 필름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거의’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기록상으로 이탈리아 미래파 작가인 아르날도 지나(Arnaldo Ginna)와 브루노 코라(Bruno Corra)가 1908년 필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착상을 했고, 1910년에 네 편의 추상영화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1910년대에 한스 스톨텐베르그(Hans Stoltenberg)나 앙리 스토크(Henri Storck)도 유사한 방식으로 작업했다는 기록이 있다. 라이는 필름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작업 방식을 ‘다이렉트(direct) 필름’이라고 불렀다. 이를 지칭하는 유사한 용어로는 ‘카메라 없는 영화(Cameraless film)’나 ‘필름 위에 그린 애니메이션(Drawn-on-film animation)’이 있고, 좀 더 폭넓게는 ‘핸드메이드 필름(Handmade film)’도 해당된다. <컬러 박스>는 영국 전역에서 수백만 명에게 보였기 때문에, 대중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첫 다이렉트 필름이라고 할 수 있다. (<컬러 박스>는 1935년 브뤼셀 국제영화제의 판타지 영화 부문에서 명예상(Medal of Honor)을 받았고, 이듬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이때 영화를 본 나치 관객들은 오스카 피싱거의 추상영화에 비해 형편없는 작품이라고 혹평했다. 형태가 지나치게 자유분방하고 작품에 사용된 재즈 음악이 흑인적(negroid)이라는 이유에서였다.) 1935년에 영국에서 이 작품을 본 노만 맥라렌(1936년부터 1939년까지 GPO에서 일했다)은 “여기 손으로 그린(handpainted) 영화의 개척자가 있다...그것은 마치 내게 꿈이 실현되는 것과 같았다...렌 라이는 그 방식을 능숙하고 훌륭하게 보여주었다”라고 말했었다. 라이는 이 시기에 듀페이컬러(Dufaycolor), 가스파르컬러(Gasparcolor), 테크니컬러(Technicolor)와 같은 컬러 필름들을 실험하는 데 집중했었다. <컬러 박스>의 스틸 이미지 출처: https://filmcolors.org/2014/04/18/dufaycolor-films-by-len-lye 1951년에 라이가 <마치 오브 타임>을 그만두고, 1952년에 자신과 부인 앤(Ann)만 속했던 영화사의 이름을 다이렉트 필름으로 정했던 것은 카메라로 찍는 영화를 그만두고, 다시 손으로 그리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았다. 어쩌면 라이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안정되게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환경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그의 영화사 이름에 담았을지도 모른다. 라이는 한스 리히터의 초청을 받아서 뉴욕시립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뒤이어 콜롬비아대학, 뉴욕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그러나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라이는 다이렉트 필름을 설립하고 나서 첫 영화로 <컬러 크라이 Color Cry>(1952)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라이의 영화 작품 포맷은 16mm로 바뀌었다.) 이 영화는 라이가 틈틈이 해왔던 포토그램(photogram, 필름 위에 사물 등을 올려놓고 빛에 잠깐 노출시켜서 상을 맺게 하는 방법) 작품들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라이는 모슬린 천에 새겨진 점(dot) 패턴을 마음에 들어 했고, 포토그램 방식으로 필름 위에 점 패턴을 복사했다. 이때 라이가 품고 있던 생각은 “춤추는 원자”였다. 원자에 대한 관심은 그가 <마치 오브 타임>을 연출할 당시에 시리즈 중의 하나였던, 아인슈타인과의 인터뷰를 담은 영화를 보고 난 이후부터 커져 왔다. 라이는 다이렉트 필름의 두 번째 작품으로 <리듬 Rhythm>(1957)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크라이슬러 자동차 공장을 찍은 푸티지들을 점프 컷으로 구성해 만든 1분 길이의 파운드푸티지 작품이다. 이 작품의 도입부와 후반부에도 점과 선의 패턴이 나온다. <리듬>은 1957년 뉴욕 아트 디렉터스 페스티벌(New York Arts Directors Festival)의 텔레비전 광고 부문에서 수상했지만, 크라이슬러사가 영화에 사용된 음악을 싫어했고 광고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상이 취소되었다. 1957년에 라이가 <프리 래디컬스>를 만들 전의 상황이 이러했다. 그런데 1958년 브뤼셀 엑스포와 함께 열릴 예정이었던 실험영화제 EXPRMNTL로부터 작품을 보내달라는 초청을 1957년에 받았다. (EXPRMNTL은 일명 크노케-르-주트 실험영화제이다. 이 영화제는 1958년부터 74년까지 총 다섯 번 개최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하던 실험영화작가들이 상호 교류를 시작하면서 서로를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영화제가 우리에게 좀 남다를 수 있는 이유는 동시대적인 의미에서 실험영화를 사용한-필자가 현재까지 확인했던바 내에서-첫 공식기록으로, 1957년 6월 23일 자 「국제실험영화제」라는 동아일보 기사가 해당 영화제의 작품 공모를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필자가 본 연재에서 맡은 유현목의 <손>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룰 수도 있을 것 같다.) 라이는 초청을 받고 약 8개월간 <프리 래디컬스>에 집중했었다. 이 작품은 라이가 품어왔던 ‘춤추는 원자’의 실현이자, 블랙 리더(leader)로만 만든 첫 영화이다. 라이는 16mm 블랙 리더의 이멀전(emulsion)을 일상의 다양한 도구들을 사용해서 긁어내어 형상을 새겨 넣었다. 필름 이멀전을 벗겨내어 만드는 영화를 ‘스크래치(scratch) 필름’이라고 한다. <프리 래디컬스>는 스크래치 필름이기 때문에, 곧잘 맥라렌의 <블링키티 블랭크 Blinkity Blank>(1955)와 비교되기도 하고 이 작품에 라이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맥라렌의 작품은 검은 배경에 색채가 강조되는 작품이고, 라이의 <프리 래디컬스>는 흑백으로 필름의 투명한 부분을 통과하는 빛이 스크린에 투사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게다가 스크래치는 라이가 이전에도 사용했던 방식으로, 영향 관계라기보다는 작업 태도를 공유하는 작가들에서 발견될 수 있는 유사성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라이는 <프리 래디컬스>로 EXPRMNTL의 2등 상을 받았다. 대상은 폴란드의 발레리안 보르보츠크(Walerian Borowczyk)와 얀 레니차(Jan Lenica)의 <돔 Dom>(1958)에 돌아갔다. 심사위원은 만 레이, 존 그리어슨, 노만 맥라렌, 알렉산더 알렉세예프, 에드가 바레즈였다. 라이는 상금으로 5천 달러를 받았다. 이 성과에 힘입어 라이는 <프리 래디컬스>가 미국 내에서 성공적으로 배급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공식 상영된 곳은 아모스 보겔이 개최했던 ‘시네마 16’뿐이었고, 상영료로 50달러를 받은 것이 전부였다. 라이는 제작 후원을 구하고 실험적인 영화에 대한 지원을 촉구하기 위해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고(비서로부터 답장을 받긴 했다), 미국 해외공보처, 문화교류재단 등에도 편지를 보냈지만 성과는 없었다. 뉴욕현대미술관에 <프리 래디컬스> 프린트 가격으로 4천 달러를 제시했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라이는 1959년에 「영화는 예술인가? Is Film Art?」라는 글을 쓰고 영화작가로서 파업을 선언한 뒤 키네틱 조각으로 전향했다. 1960년대 피터 쿠벨카는 여러 차례 라이에게 회고전을 열고 싶다고 요청하였으나, 그는 자신은 키네틱 예술가라며 번번이 거절했다. 이와 같이 <프리 래디컬스>는 일련의 영화작업이 수렴되었던 마침표이자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기 위한 쉼표와 같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라이의 대표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프리 래디컬스>가 라이의 작품 이력에서 더욱 흥미로운 점은 그가 1979년에 키네틱 조각에서 영화로 돌아와 다시 대면했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프리 래디컬스>는 1979년에 라이가 재편집했던 판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라이가 키네틱 조각을 경유하면서 받은 영향들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라이의 키네틱 조각 작품들의 제목과 작업 방식을 보면 차라리 <프리 래디컬스>가 이후의 작품들을 예비했다고 볼 수 있다. 라이가 품었던 ‘춤추는 원자’라는 생각은 그의 키네틱 조각들에서 더욱 다채롭게 전개되었다. 라이의 키네틱 조각은 최소한 32개의 작품이 만들어졌거나 고안되었다. 이 작품들의 목록은 새로 발굴되는 자료가 추가되면서 지금도 확장되고 있는데, 그중에 작품들의 제목을 일부 나열하면 <원자적 춤 Atomic Dance> <벨 막대기 Bell Wand> <춤추는 원자 Dancing Atom>, <뒤집기와 두 개의 회오리 Flip and Two Twisters(일명 삼부작 Trilogy)> <우주 Universe(일명 루프 Loop)> 등이다. 라이는 이 개별 작품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한데 모아놓고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일부에서 번개의 신으로 숭배되었던 샹고(Shango)의 신전을 만들려고 했다. 라이는 개별 조각 작품들의 복제품을 만들었을 때, 같은 스케일로 제작한 적이 없고 늘 변주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제목도 하나 이상인 경우가 많다. 관람객이 촬영한 <우주> 관람객이 촬영한 <뒤집기와 두 개의 회오리> 라이는 키네틱 조각을 만들 때, 그가 낙서(doodling)라고 부는 행위에서부터 출발했다. 낙서는 재료를 만지고 흔들거나 휘어보면서, 재료에서부터 파생되는 운동(에너지)의 형상을 몸으로 느껴보는 행위를 의미했다. 낙서는 그가 영화를 만들었을 때에도 작업 방식을 설명하는 핵심어였다. 라이는 조그만 필름 표면 위에 일상의 다양한 도구들로 그리거나 긁어내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재료를 느끼며 형상을 낙서해나갔다. 낙서는 초현실주의의 자유연상과 유사한 방법인데, 라이가 뉴질랜드에서 런던으로 이주했던 직후 초현실주의자들과 교류했던 영향이 반영된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라이는 초현실주의가 지나치게 문자적이고 상징적이라고 비판했고 언제나 몸을 중심에 놓고자 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라이의 낙서는 추상표현주의자들이 그리는 행위를 강조했던 것과 유사한 맥락에 있다. 라이가 주로 사용했던 재료는 금속으로, 가늘고 긴 조각(strip), 막대, 판(sheet), 롤(roll) 등의 기본 형태들을 선호했다. 이러한 형태들은 필름 재료로도 가능하기 때문에, 키네틱 조각에서도 필름의 물성 자체에 대한 라이의 관심이 연장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라이는 금속 재료로 기본 형태를 만든 뒤에 모터나 전자석을 붙여서 움직이게 만들었는데, 이 과정을 애니메이션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의 키네틱 작품들은 지속시간이 그의 영화들의 평균과 같이 4분에서 5분 정도였다. 라이는 재료에 열처리를 하거나 표면을 사포로 긁어내서 질감에 변형을 주고, 이에 따라 반사되는 빛의 차이들을 실험했다. 재료의 소리도 중요했다. 라이는 키넥틱 조각품에서 나는 소리들을 따로 녹음에서 사운드트랙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 사운드트랙은 아이튠즈에서 판매 중이다.) 그는 키네틱 작품을 전시할 때, 각각의 작품들에서 반사되는 빛과 소리가 대위(counterpoint)를 이루도록 배치했다. 이러한 작업 방식들은 아래에 삽입한 두 편의 다큐멘터리에 잘 드러나 있다. [영상 3] <낙서: 렌 라이의 인상들 Doodlin’: Impressions of Len Lye>(1987) [영상 4] <뒤집기와 두 개의 회오리 Flip & Two Twisters>(1995) 라이는 <프리 래디컬스>를 재편집한 이후 <공간 속의 소립자들 Particles in Space>(1979)을 만들었다. 평자들에 따라서 후자를 더 중요한 작품으로 간주하기도 하는데, 스탠 브래키지는 특히 이 작품을 좋아했다. 물론 <프리 래디컬스>에 대해 “믿을 수 없이 엄청난 걸작”이라는 평가도 빼놓지 않았다. <공간 속의 소립자들>에서 사용된 소리는 라이의 키네틱 조각에서 나는 소리들이 녹음된 것이다. <프리 래디컬스>와 <공간 속의 소립자들> 사이에 라이의 키네틱 조각을 놓으면 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떠오른다. 스케일이다. 개인적으로 <프리 래디컬스>를 라이의 대표작으로 꼽는 이유를 물어본다면, 그 답을 스케일에 대한 경이로운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라이는 소립자의 운동과 태양의 운동은 에너지란 측면에서 같고, 서로 통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영화로 번역하면 16mm의 작은 표면 위에 새겨진 미세한 운동은 영사기를 통해 투사되는 이미지의 운동과 에너지라는 측면에서 같다. 다만 필름이 스크린에 투사되어 확장되었을 때, 필름 표면 위의 미세한 운동은 어마어마한 에너지로 증폭되고, 기념비적인 스케일의 움직이는 조각이 된다. 조각은 삼차원이고 영화 스크린은 평면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라이가 필름 위에 몸으로 새긴, 그래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힘의 차이는 필름 이멀전의 두께를 다르게 만들고, 이는 스크린 상에서 깊이의 환영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머리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케일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몸으로 반복해서 느껴야만 터득될 수 있다. 영화의 초창기, 그토록 많은 조형 예술가들이 영화에 매료되었던 것은 기념비적인 조각을 구현할 때 직면해야 하는 수많은 현실적 장애들을 영화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매혹되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매혹적이고 경이로운 경험은 오늘날 컴퓨터로 영화를 만들고 보던 학생이 영화제의 상영작으로 꼽혀 처음으로 자신의 영화를 극장에서 보았을 때 느끼는 당혹감이 되어버렸다. 대부분 이 당혹감을 자신의 미숙함을 탓하며 부끄러움 속에 감추어버리지만, 사실 이러한 스케일의 차이는 탐구되어야 하는 영역에 속한다. <프리 래디컬스>를 볼 때에는 가능한 작은 스크린을 통해서 먼저 본 이후(만약 스마트폰에서 본다면 가급적 세로로), 최대한 큰 스크린으로 다시 보기를 권하고 싶다. ※ 이 글에서 언급된 영화들과 렌 라이에 관한 사실들은 로저 호록스(Roger Horrocks)가 2001년에 펴낸 「렌 라이: 자서전 Len Lye: A Biography」과 2010년에 출간한 「움직이는 예술: 렌 라이의 작품 Art that Moves: The Work of Len Lye」을 참고하여 정리한 것이다. 렌 라이에 관한 문헌 목록은 http://sensesofcinema.com/2007/great-directors/lye/#film에 잘 정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