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깨어져 열릴 때
- 감독
- 엘르 마이자 타이피아더스, 캐슬린 헵번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바이올렛 넬슨, 엘르 마이자 타이피아더스, 바바라 이브 해리스, 소니 수로윅, 찰리 한나
숏을 찍는다는 것 “하스미 선생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사실 최근에 고민이 하나 생겼는데요. 숏을 찍을 때, 한 컷을 찍을 때 어느 정도의 힘을 들이는 게 좋을까 하는 겁니다. (중략) 영화는 숏이 생명이지요. 제가 가진 기술이란 그것밖에 없어요. 그것 외에 제가 잘하는 게 없는 거죠. 그렇지만 숏으로 어디까지 승부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거에요.” “열심히 숏을 찍으려는 노력은 어디까지 전달될까요.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모르는 채로 두는 게 좋은 건지, 억지로라도 알아달라고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은 건지 항상 고민됩니다.” 올해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책 중에 한 권인 『영화 장화』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 책은 일본 영화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와 그의 제자이자 일본 영화계의 작가주의를 대변하는 영화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그리고 아오야마 신지가 나누는 긴 대담집이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일본 영화 내 영향력은 대단했다. 70-80년대 그가 대학에 개설해 강의했던 “영화 표현론”은 영화를 분석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고, 그의 평문들은 젊은 영화광들에게 거의 교본처럼 낭독되었다(심지어 그의 글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 당시 이 수업을 통해 구로사와 기요시와 아오야마 신지가 영화계로 입문하였다. (나는 이 두 감독에게 도대체 하스미 시게히코의 강의 방식과 내용이 무엇이었기에,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열광했는지 물은 바 있다. 아오야마 신지는 관념을 구체화시키는 쇼트를 발견하고 그것이 어떻게 영화 속에 구축되는지, 그 구성원리를 발견했던 방식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최근에 만났던 구로사와 기요시 역시 쇼트의 원리에 관해 이야기 했다. 경제적이고 기술적으로 가능한 쇼트를 통해 영화의 의미와 형식을 축적해 나가는 방법들, 그것은 그가 현재 일본 대학에서 영화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영화 장화』에서 이들이 나누는 대담은 때론 당혹스러우리만치 담대하고 솔직하다. 그들이 존경해마지않는 감독과 작품들에 대해서는 찬탄과 동경을 쏟아내지만, 반면 그들이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영화와 감독들에 대해서는 혹독한 비판과 조소를 마다하지 않는다. 영화에 관한 날카로운 시선과 언어들을 가진 이들의 거침없는 이 대화는 오래전, 스승과 제자로 만나 긴 시간을 함께해온 이들이 나눌 수 있는 아주 사적이고 주관적인 취향의 고백이자, 이론과 현장을 넘나들며 체화되고 정립된 영화 존재론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과 고민들, 변화하는 영화의 위상과 환경에 대한 불안과 매혹을 모두 포함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다 불현듯, 가장 겸손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자신의 오랜 스승에게 새삼 진지하고도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다 “쇼트를 만든다는 것.” 무려 사십여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영화를 만들고 고민해왔던 세계적인 거장에게도 영화는 여전히 변화와 질문으로 가득 찬 모호한 대상인 것이다. 숏을 찍을 수 있는 자 하스미 시게히코는 구로사와 기요시를 당연히 ‘숏을 찍을 수 있는 감독’이라고 칭한다. 단순히 이야기를 전개하는 기능적이고 기술적인 컷들이 아니라, 의미와 형식을 갖춘 가장 영화적인 언어를 구축할 수 있는 예술가인 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에게는 분명 그만의 언어와 모드가 존재한다. 설혹 크레딧을 보지 않고 마주하게 된 영상이라 할지라도, 보는 순간 ‘기요시의 영화구나, 내적 불안과 위기를 파고드는 기묘한 세계가 곧 시작되는구나’를 알아보게 하는 그런 영화적인 언어들이 있다. 웨스 크레이븐 감독이 영화관 체험을 어둠과 빛이 교차하며 시작되는 부두교 주술사의 환각적 제의에 비유하듯(영화관에 드리워진 어둠 사이로 스크린에 빛이 투사되는 순간, 부두교 주술사의 제의가 시작될 때 비현실적 사태를 기대하는 참여자의 흥분이 시작되는 것과 흡사하다고 비유하는 것),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는 늘 시작과 함께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알리는 묘한 매혹과 설렘, 긴장과 공포를 수반한다. <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 予兆 散歩する侵略者 劇場版>(2017)의 오프닝도 바로 그렇게 시작된다. 하스미 시게히코와 구로사와 기요시의 표현대로 ‘숏을 찍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붉은빛의 철제 안전망이 둘러진 공동주택의 현관 앞 계단. 안전망 저편으로는 도시 외곽의 주택들이 보이고, 이내 한 여성이 계단을 올라와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측면으로 비춘다. (문을 열고 들어선다는 것. 기요시 영화에서 ‘문이 열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만지는 행위’(접촉)와 더불어 가장 큰 사건의 추동 행위로 쓰인다) 다음 컷은 현관 입구에 놓인 켤레의 남성 구두, 그리고 조금 전 실내로 들어선 그녀의 발과 다리. 우리는 여전히 여성의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영화 속 여성은 남성 신발을 통해 집안에 남편이 귀가해 와 있음을 알아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의 다음 컷. 이 쇼트야 말고 첫 번째 붉은 철제 안전망이 드리워진 현관 밖 전경을 포착한 장면과 더불어 기요시의 영화적 이미지와 카메라 움직임 모든 것을 망라한다. 기요시의 많은 영화에서 그러하듯, 집안 내부는 여러 격자로 구분되어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열린 창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의해 마치 생명을 지닌 듯 텅 빈 공간에서 너울거리는 커튼의 형상. 창밖에서 비추는 부드러운 햇살과는 대조적으로 죽은 듯이 가라앉은 실내 분위기. 이 화면 내 공간 안으로 현관을 통과한 여성이 거실로 들어와 집 안을 살피다 문득 뒤쪽 커튼 너머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 남편을 부른다. 이때 프레임 외부 공간을 향한 그녀의 시선과 몸짓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발견한 듯 잠깐 멈춘 채 지속되고, 이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화면 밖 공간으로 빠져나간다. 이때까지 관객은 그녀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 없다. 그녀가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간 뒤,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여 (흡사 유령적 시선처럼) 그녀가 머물러 응시했던 시점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그녀의 시선이 머물렀던 커튼 너머의 공간에는 한 치의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남자가 있다. 매우 천천히 그러나 불길한 기운을 암시하며 움직이는 카메라 워킹을 통해 발견되는 남자의 형상은 빛의 조작으로 만들어진 그림자와 더불어 기괴하고, 그것은 흡사 기요시의 전작 < 회로 >(2001)에서 목격했던 유령의 형상을 연상케 한다.(벽이나 난간에 서 있다 얼룩으로 변하며 유령이 되어갔던 형상들). 잠시 뒤, 멈춰 선 화면 안으로 여성이 다시 들어와 남자의 뒷모습을 길게 바라본다. 유령과도 같은 존재감으로 움직이는 카메라가 운동과 정지, 시선과 응시를 구성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기요시가 시작하는 이 새로운 영화적 세계에서, 저 남자에게 이미 무언가 사건이 도래했으며 여자는 이 짧은 순간에 그 모든 불안을 감지했음을 알게 된다. (기요시의 이러한 쇼트에서 카메라의 시선과 움직임은 할리우드 고전기에 구축된 제도적 재현 양식으로서의 촬영과 편집의 비가시적 메커니즘처럼 인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카메라의 유동적 시선과 위치의 전능성을 가시화하며, 영화적 디제시스와 관객, 그 사이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며 내레이션을 전개하고 분위기를 형성하는 주체가 된다) 여자가 한참이나 남자를 말없이 응시하고 나서야, 뒤늦은 대답을 하며 뒤돌아서는 남자는 조금 전의 이상한 기운과는 달리 금새 일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와 아내를 맞이한다. 여자는 남편의 응답을 듣고서야 방향을 돌려 현관 옆에 있는 주방으로 건너간다. 카메라는 천천히 그녀의 동선을 쫓아 그녀가 주방에서 물건을 정리하는 모습을 비춘다. 조금 뒤 남편이 그녀 곁을 지나 화면 밖 방안으로 빠져나가면, 조금 전 밝은 테라스와는 대조적인 어둠에 가라앉은 주방 안 그녀 모습 좌측으로 천천히 이 영화의 타이틀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가 제시된다. 타이틀이 사라지면 여자는 문득 하던 동작을 멈춘 채 의심 어린 시선으로 남편 쪽을 바라보다 천천히 테라스로 발길을 옮긴다. 그리곤 남편이 서 있던 자리에서 그가 바라보고 있었을 무언가를 응시하는 그녀의 모습을 카메라는 길게 비춘다. 이때 시작되는 그녀의 내레이션, “그것은 정말 사소한 위화감으로 시작되었다” 기요시의 전형적인 롱테이크 쇼트라 할 수 있는 이 세 번째 컷은 아파트 실내 공간을 좌우와 전후경으로 구분하는 카메라 워킹, 테라스의 밝은 빛과 주방과 복도의 어두움, 등장인물의 생명력 있는 움직임과 죽은 듯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정지된 순간의 대비. 아파트 외부 공간에서 들려오는 각종 소음들(외화면 소리, 그러나 논리적 근거가 없는 소리들까지 망라하는 기괴함. 기요시는 외화면 공간의 소리 활용에 대해 질문하자 인과론적 출처가 없는 소리들을 영화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즐긴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가령 현장의 스텝들이 실수로 자아내는 소리들, 엔지 사운드, 건물 밖에서 영문 모르게 들려오는 기계음 같은 소리들을 그는 녹음하여 보관하고 영화에 삽입하며 재창조하는 것이다)과 내화면 사운드를 조율하며 그로테스크하고 언캐니(uncanny 두려운 낯설음)한 기요시 특유의 영화적 세계를 안내한다. 예조와 산보 발터 벤야민의 근대적 주체, ‘산보자’ 개념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공연된 바 있는 미에카와 모토히로의 동명 작품 < 산책하는 침략자 散歩する侵略者>(2017)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개념을 상실하는 인간을 통해, 인간의 본질, 불안과 해방에 관한 은유와 풍자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의 기본 설정은 구로사와 기요시 작품과도 잘 맞닿아 있다. 그러나 원작을 각색하기보다는 스스로 시나리오를 써왔던 그의 작품 성향대로 기요시의 <산책하는 침략자> 시리즈는 오롯이 그만의 작가주의적 세계 안으로 흡수되어 재창조되었다. 특히 전작 <산책하는 침략자>가 외계인들의 개념 수집과 살상, 침략과 그 후의 과정까지 묘사된다면,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는 전작에 등장하지 않았던 다른 인물들을 중심으로 침략의 예조(징조)와 과정, 그리고 침략 직전까지의 과정을 이면화처럼 제시한다. 전작이 침략자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예조>는 발생하지 않은 사건, 혹은 드러나지 않은 실체를 직감적으로 감지하고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능력을 가진 지구 여성의 관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전작은 타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인간 존재에 대한 개념적 이해 과정이라면, <예조>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회피하거나 방어하자고 하는 인간 내부의 불안과 공포, 윤리적 갈등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작품은 큰 틀에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영화이다. ‘언어’라는 외부적 질서를 통해 자아를 인식하고 주체성을 학습하며, 동물적인 생존 본능으로 위기에 반응하는 인간들은 때로는 소멸해도 무방할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존재이며, 또 때로는 치명적인 자기 결함과 트라우마, 불안과 공포로 점철된 나약한 존재이고, 또 때로는 외계의 타자조차 감화시켜내는 사랑과 공존의 존재이자, 윤리적 존재이기도 하다. 언어와 주체성, 자아와 타자, 의식과 무의식 등 정신분석학과 구조주의 기호학의 기본 개념을 영화적인 사건으로 묘사한 듯한 이 작품에서 외계인들이 수집하는 기본 개념이 가족, 소유, 자아, 노동, 과거, 미래, 공포 그리고 사랑으로 시작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언어게임을 통해 주체 혹은 인간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기요시 영화에서 이미 낯설지 않다. 그의 걸작인 1997년작 < 큐어 CURE, Kyua >에서 우리는 이미 언어와 목소리라는 권력을 통해 타인을 지배하고 공포와 욕망, 불안과 적대를 끄집어내며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했던 기요시의 테마를 본 적이 있다. 정신의학을 공부하다 초월적 능력을 지닌 극 중 연쇄살인범 마미야는 빛과 목소리를 통해 타인을 지배하고, 그들 내면의 억압된 적대를 폭력과 살인으로 끄집어낸다. 그와 동시에 윤리적 갈등을 제거한다. (<큐어>에서 최면에 걸린 인간들은 억압된 불만을 끄집어내 살인을 저지르고도 윤리적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큐어>의 명장면 중 하나는 경시청에서 경찰 간부와 마미야가 벌이는 설전이다. 마미야는 자신을 비난하며 취조하는 경찰간부에서 반복적으로 ‘당신은 누구인가?’를 질문한다. 경찰 간부(오스기 렌. 이번 영화<예조>에서는 후생성 간부로 출현해 외계인과 비슷한 심문을 벌인다.)는 그 질문에 자신의 직함과 이름을 대지만, 마미야는 지속적으로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현대 사회에서 누구나 자신을 설명하며 이름과 직함을 대지만, 그것이 과연 인간의 본질적인 자아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 <예조>에서 외계인들은 인간의 ‘개념’을 수집하는 방법으로 <큐어>에서의 그것처럼 언어적인 목소리의 권능을 이용한다. 빛과 목소리를 통한 질문들, 그리고 무력하게 응답하고 순응하는 인간. 특정 개념이 상실된 이후 대부분 인간들은 오늘날 인간 사회의 ‘정상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행위와 불안 혹은 해방적 쾌감을 맞보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보태어, <예조>는 외계인들의 가이드로 활동하는 자들의 윤리적 불안을 역시 중요한 테마로 다룬다. 개념을 빼앗을 대상을 선정할 수 있는 권력. 그러나 그 선택 능력은 이내 타인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며, 그들의 죄의식이 육체적 통증으로 발현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것이다. 언캐니와 유령 그리고 영화 <예조>의 초반부, 주인공 예츠코의 공장 동료가 그녀에게 불쑥 이상한 이야기를 꺼낸다. 집에 유령이 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면 안 되는 존재, 그런데 늘 곁에 머무는 존재, 얼핏 아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 더 공포스러운 존재가 집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상함을 느낀 예츠코는 다음 날 동료의 집을 직접 방문하게 되고, 동료가 유령이라 지칭했던 존재가 그녀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동료는 ‘가족’ 개념을 빼앗긴 이 영화 서사의 첫 번째 희생자이다. 친숙하지만 낯선 존재, 이 언캐니한 공포는 1950년대부터 숱하게 변주되며 만들어진 < 신체 강탈자의 침입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 >(1956)의 설정으로부터 시작된다. 형상은 같지만 분명 다른 존재, 돈 시겔로부터 시작되는 <신체 강탈자의 침입>에서 외계인에게 가족의 신체를 강탈당한 사람들은 영문 모를 이질감과 친밀감(언캐니. 두려운 낯섬. 분명 같은데 같지 않은 듯한 느낌이 주는 공포) 속에서 존재의 불안과 공포를 훨씬 크게 체감한다. 이러한 설정은 <예조>에서 비슷하게 변주된다. 어딘지 익숙하기 때문에 더 큰 공포. 예츠코의 동료가 ‘유령’이라고 단정한 그것은 기요시 영화의 공포를 연장한 개념이기도 하다. 예전에 진행됐던 기요시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유령을 본 적은 없지만, 내가 영화 속에서 유령을 표현할 때는 ‘죽음’이라는 개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죽음은 현실세계에서 항상 일어나는 일이고 우리 바로 옆에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죽음은 결국 세계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영화라는 픽션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본다. 아까 영화란 무엇인가를 질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장 현실적이면서 현실에는 없는 것이, 바로 죽음과 영화의 양면성이다. 유령은 죽음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유령이라는 것의 어려운 문제는 그것이 인간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즉 인간이 죽어서 유령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연장으로서 유령이 존재하는 가. 사실 인간이 살아가는 시간은 길지 않다. 죽고 난 유령이야말로 사실은 인간의 본질일 수 있다. 그래서 유령의 모습이 인간의 모습이고 진정한 본질이다. 또 사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 자신을 유령으로 결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과연 인간을 유령으로 상상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결국 나에게 유령이란, 영화의 존재론이자 인간의 존재론을 고민하게 만들고 출발하게 만드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영화 <로프트> 상영 후 나눈 인터뷰) 그의 이러한 유령적 세계관은 <예조>의 후반부, 외과의사 마카베의 신체를 빌어 존재했던 외계인이 죽음 직전에 하는 대사에서 다시금 드러난다. 이미 타인을 살해하면서 공포와 죽음이 연관되어 있음을 터득한 그는 자신이 죽어가는 순간, “나에게도 죽음이 찾아오는구나,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무서워, 하지만 죽음은 언제든 바로 옆에 있어. 이건 운명이야. 받아들이자”라고 말한다. 구로사와 기요시에게 인간-죽음-유령--영화는 긴밀하게 연결되는 실체이다. <산책하는 침략자>와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 모두는 기요기가 최근 가장 다루고 있는 ‘사랑’의 테마를 관철시키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기요시와 러브스토리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그는 확실히 < 해안가로의 여행 岸辺の旅 >(2015)에서부터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인간 존재의 힘으로서 ‘사랑’을 묘사한다. 산책 시리즈 모두 결국 인류를 구원하거나 혹은 죽음 앞에선 개인의 공포를 극복하게 하는 유일한 원천은 사랑이라고 그는 피력한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감상주의나 낭만이 아니라, 이제는 어른이 되어버린 기요시 감독이 느끼는 책무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인터뷰에서 했던 어른으로서의 책임감 발언(그가 왜 <밝은 미래> 이후 더 다크한 영화들을 만들어내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정도로 나빠지는 사회에 대한 불안을 언급했다)은 <산책하는 침략자>에서 소유 개념을 빼앗긴 히키코모리 청년과 가이드가 광장으로 나와 사람들에게 하는 연설 내용, 즉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지기 전에 막아야 한다는 장면과 겹쳐진다. 그러나 영화 속 군중들은 이내 그러한 연설을 외면하고 무시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극 중 캐릭터들 혹은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발견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은 인류의 공존을 위한 사랑일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두 편의 장대한 지구 종말 서사로 구축된 개념적 SF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와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는 개별적 사건을 추적하던 그간의 미시적 스릴러 서사를 넘어, 장구한 인류의 근원과 현재 그리고 미래로 확장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상상하는 모든 것을 디테일하게 시각화하는 디지털 영화의 전능적 시대에, 여전히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상상할 수 있는 것과 재현할 수 없는 것, 영화적인 시간과 공간의 창조능력,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영화의 존재론적인 언어, 쇼트의 개념과 한계를 사유하는 감독의 흥미롭고 실험적인 인류학 에세이는 여전히 흥미롭고 매혹적이며 원숙하다.
< 노트북 >의 제작연도는 매체에 따라 상이하게 기록되어 있다. 1963년이 자주 눈에 띄고 1962년으로 표기된 경우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1940년부터 1962년이라는 기록을 따른다. 이 또한 정확하지는 않다. 아담스 시트니는 <노트북>을 마리 멘켄이 영화 작업을 했던 194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완성된 작품으로, 그 시기를 대략적으로 기술하였다. <노트북>의 제작연도가 특히 불명확하지만, 멘켄의 작품들이 대체로 제작연도를 정확하게 표기하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멘켄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일정한 기간 내에 이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한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주목을 끄는 순간들이나 대상들을 기록해두었다가 여러 조각들을 모아서 한 작품으로 편집하는 방식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70년에 멘켄이 사망하기 직전, 그녀의 스튜디오에 홍수가 들어서 그나마 남아있던 기록들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작품에 관한 정보들도 상당히 부실한 편이다. 또한 멘켄은 작품의 최종본을 거의 만들지 않았고 첫 상영 이후에도 작품을 계속 수정했다. 멘켄의 작품들에 스크래치나 먼지가 많은 이유는 포지티브 필름으로 촬영한 이후 네거티브 프린트를 별도로 만들지 않고 영사기에 돌려서, 원본 필름 자체가 많이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나열한 단편적인 정보들로 미루어볼 때, 멘켄은 ‘작가’로서 ‘작품’을 만든다는 자의식이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멘켄의 작품들이 그녀의 생전에 널리 상영되어 주목을 끌었던 것도 아니고, 진지한 비평의 대상이 되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멘켄과 관련된 주요 문서들은 그녀가 남긴 인터뷰나 그녀와의 일화를 떠올리는 친구들의 인터뷰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멘켄을 중요 작가로, < 노트북 >을 미국 실험영화사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으로 꼽는 이유는 그녀에게 영향을 받았음을 스스로 적극적으로 밝히기를 주저하지 않는 친구들이 1960년대 이후 미국 실험영화의 양대 거목이라 할 수 있는 조나스 메카스와 스탠 브래키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친구들의 목록에는 그녀의 작품 제목에도 등장하는 이사무 노구치, 케네스 앵거, 앤디 워홀 등이 계속 추가될 수 있다. 이를테면 마리 멘켄은 불특정 다수인 관객과의 관계에서 규정되는 작가라기보다는 우정에 기초한 작가들의 공동체 안에서 정의될 수 있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멘켄의 <노트북>을 조나스 메카스와 스탠 브래키지 그리고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서술해보고자 한다. 이 각각의 요소들을 다시 나열하면, 일기영화(diary film), 신체적(somatic) 카메라, 그리고 그녀의 남편 윌러드 마스(Willard Maas)와 함께 했던 작가 집단인 그리폰(Gryphon)이다. < 노트북 >은 총 9개의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부분들을 만든 시기 순으로 나열한 것으로 보인다. 9개 부분들의 소제목은 ‘빗방울 Raindrops’[사진1], ‘신현 축일 Greek Epiphany’, ‘달 놀이Moonplay’, ‘흉내쟁이 Copycat’, ‘종이 자르기 Paper Cuts’, ‘전등들 Lights’[사진2], ‘밤-쓰기Night-Writing’, ‘알 The Egg’, ‘기타 등등 etcetcetc’이다. 이 중에서 앞의 세 부분은 흑백이고, ‘흉내쟁이’는 손으로 그린 애니메이션이며 나머지는 컬러이다. 부분들의 소제목을 보면 ‘빗방울’, ‘신현 축일’, ‘전등들’처럼 촬영한 대상들로 이름을 붙이거나, ‘달 놀이’, ‘종이 자르기’, ‘밤-쓰기’처럼 촬영한 대상과 자신이 수행한 행위가 결합된 제목들이 눈에 띈다. 놀이와 쓰기는 카메라를 흔드는 행위를 지시하고, 종이 자르기는 말 그대로 종이를 잘라서 종이조각들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행위를 의미한다. <노트북>은 완성된 작품이라기보다는 습작들이 미완결인 채로 나열된 것처럼 보인다. ‘달 놀이’와 ‘전등들’ 부분은 각각 동일한 제목의 개별 작품들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노트북>은 마치 나는 이때 이러한 것들을 보았고, 그때 볼렉스(Bolex) 카메라를 이렇게 흔들어 보았거나 이런저런 기능을 써서 촬영해보았다는 정도 외에는 작품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사진1] <노트북>의 ‘빗방울’ 부분 스틸 이미지 [사진2] <노트북>의 ‘전등들’ 부분 스틸 이미지 < 노트북 >이 아마추어의 습작과 같은 인상을 주는 이유는 하나의 통일된 의도나 주제, 혹은 구조 없이 일상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대상이나 사건이 우발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우연하게 배치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식에 준하는 문학 장르는 일기 혹은 에세이(앞으로 일기로만 표기)이다. 일기는 시나 소설과 같은 진지한 장르와는 달리 신변잡기적이고 주변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에 문학이라고 간주되어 오지 않았다. 특히 일기의 작가가 대부분 여성이었기 때문에, 일기는 타인에 대한 깊은 성찰과 거대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한 여성만의 장르라는 비하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이르러 계급보다는 개인 속에서 정치적인 문제들을 발견하고 삶과 예술의 구분을 폐지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일기는 문학 장르로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일기가 한 개인의 유아론적인 진술들이 아니라, 주체가 형성되는 데 개입되는 요소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자기를 발견하고 혁신하는 실천적인 장르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1960년대 문화 전반에 걸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소설가 자신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들이 증가하고, 자기 고백적인 시 양식으로서 일기와 거의 구별하기 힘든 시들이 발표되었다.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의 「미국의 몰락 The Fall of America」(1965-71)과 로버트 로웰(Robert Lowell)의 「노트북 Notebook」(1967-68) 같은 시집들이 이러한 경향을 대표한다. 마리 멘켄은 일기 형식을 영화에 도입한 첫 작가로, < 노트북 >은 일기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작으로 평가 받는다. 물론 일기 형식에 준하는 영화는 그 이전에도 찾을 수 있다. 만 레이는 1923년부터 파리에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일상의 사건들과 인물들을 기록하여 <홈 무비 Home Movies>(1938)[사진3]를 만든 바 있다. 또한 험프리 제닝스(Humphrey Jennings)는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를 새로 태어난 아이를 위한 일기처럼 기록하고 구성한 다큐멘터리 <티모시를 위한 일기 A Diary for Timothy>(1946)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일기영화가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마리 멘켄 이후 1960년대부터였다. 멘켄뿐만 아니라 아말리 로스차일드(Amalie Rotschild), 캐롤리 슈니먼(Carolee Schneemann), 클라우디아 웨일(Claudia Weill)과 같은 여성 감독들이 일기영화를 만들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일기영화가 북미 실험영화의 주요 특징 중의 하나로 나타나는데, 앤드류 노렌(Andrew Noren), 로버트 하우트(Robert Hout), 하워드 구텐플랜(Howard Guttenplan) 같은 작가들이 일기영화를 만들게 된다. [사진 3] <홈 무비>의 스틸 이미지 ( https://www.youtube.com/watch?v=Fl4U01zKI0I ) 멘켄 이후 일기영화를 만든 작가들이 다수 등장하였지만, 일기영화가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며 지금도 실천하고 있는 작가는 조나스 메카스이다. 메카스는 「빌리지 보이스 Village Voice」의 ‘무비 저널 Movie Journal’ 칼럼에서 멘켄을 자신의 영화적 스승으로 언급하기도 했었다. 메카스는 1962년 1월 4일 자 ‘무비 저널’에서 마리 멘켄의 < 노트북 >을 포함한 네 편의 작품을 보고 다음과 같이 평가했었다. 마리 멘켄의 작품은 산문(드라마, 에피소드, 스토리) 영화의 반대편에 있다. 시(poetry)를 내포하는 픽션 작품들은 있지만, 산문을 내포하는 좋은 시, 특히 좋은 서정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리 멘켄은 서정 시인이다. 멘켄의 영화적 문장들, 그녀의 움직임들, 그녀의 리듬들의 구조는 시이다. 그녀는 현실을 시로 바꾼다. 시를 통해서 멘켄은 우리에게 현실의 미묘한 측면들을, 세계의 신비들을, 그녀의 영혼의 수수께끼를 드러내 준다. 멘켄과 메카스는 리투아니아계 미국인으로서 깊은 정서적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 멘켄이 사망한 직후(멘켄이 죽고 4일 뒤에 그녀의 남편 윌러드 마스도 사망했다), 메카스는 1971년 1월 14일 자 ‘무비 저널’에 멘켄과 마스를 추모하는 글을 실었다. 이 글에서 메카스는 멘켄과 함께 했던 어느 시점을 다음과 같이 추억했다. 우리는 그녀(멘켄)가 엄마로부터 들어서 기억하고 있던 오래된 리투아니아 노래를 같이 부르곤 했다. 그 노래들은 매우 서정적이었다...우리가 같이 부르곤 했던 노래들의 일부는 꽃 정원(flower garden)과 그 정원을 가꾸는 어린 소녀에 관한 것이었다. 메카스는 1949년에 뉴욕에 도착했는데, 이때부터 1963년까지 촬영했던 푸티지들로 <로스트, 로스트, 로스트 Lost, Lost, Lost>(1976)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고향을 상실한 비탄, 외로움, 향수와 같은 복잡한 감정들을 다루다가, 시와 영화 공동체를 발견하게 되면서 느꼈던 희열 등으로 전개된다. 이 작품의 초반부에서 비 내리는 장면[사진 4]은 멘켄의 < 노트북 > 중에서 ‘빗방울’ 부분의 인용으로 평가를 받는다. 또한 메카스가 만든 <월든 Walden>(1969)의 막간(interlude) 중의 하나는 그 제목이 ‘마리 멘켄을 위한 꽃들’이라고 붙여졌다. 이 제목은 메카스가 멘켄을 추모하며 언급했던 노래를 떠올리는 것이기도 하고, 멘켄이 만들었던 <정원을 언뜻 봄 Glimpse of the Garden>(1957)을 연상하는 것이기도 하다. 메카스의 작품에서 즐거운 순간들이나 친구들과의 우정과 자연을 예찬하는 장면들이 무작위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특성은 멘켄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메카스의 <월든>는 필자의 연재 목록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설명은 뒤로 미룬다). [사진 4] <로스트, 로스트, 로스트> 초반부의 스틸 이미지 ‘신체적 카메라’는 아담스 시트니가 멘켄의 작품들을 압축하여 표현했던 용어이자, 멘켄이 브래키지에게 미쳤던 영향을 핵심적으로 지시하는 용어이다. 신체적 카메라는 서정영화(lyrical film)와도 통하는 개념이다. 시트니는 서정영화를 영화의 1인칭 시점 주인공으로서 카메라 뒤의 영화작가를 상정하는 영화로 정의했다. 다시 말하면, 영화에 작가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작가가 카메라를 들고 찍음으로서 관객이 작가의 현존을 의식하게 되는 영화가 서정영화이다. 관객이 서정영화를 볼 때에는 작가가 보았던 시각적 대상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작가가 그가 보았던 것에 어떻게 반응하는 지까지 함께 보게 된다. 서정영화에는 주인공이 없지만, 작가의 몸짓이 화면 자체의 움직임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작가의 몸짓을 행위(action)라고 표현하면, 행위를 강조하는 경향은 미술에서 추상표현주의와 같고, 몸짓을 즉흥이라고 표현하면 음악에서 재즈와 같다. 멘켄의 < 노트북 >의 9개 부분은 모두 촬영 대상과 작가의 몸짓이 결합된 형태로 제시된다. ‘흉내쟁이’와 ‘종이 자르기’는 애니메이션으로서 그리는 행위와 종이를 자르는 행위가 전제되고, 나머지 부분들에서는 들고 찍기나 스톱 모션과 같이 카메라를 조작하는 행위가 화면의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시트니가 멘켄의 작품을 ‘신체적 카메라’로 함축해서 표현하는 이유이다. 브래키지는 「필름와이즈 Filmwise」에 실은 ‘제라드 말랑가에게 보내는 편지 Letter to Gerard Malanga’라는 글에서 자신이 멘켄에게 받은 영향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마리 멘켄이 내게 ‘열려라 참깨’와 같았던 것은 < 노구치에 관한 시각적 변주들 Visual Variations on Noguchi >이 카메라를 손으로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완벽하게 활용했던, 내가 본 첫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장 콕토가 젊은 영화작가들에게 핸드-헬드 카메라의 자유를 기회로 삼으라고 했던 조언을 그 당시에 가장 순수하게 따랐던 제자이다...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마리가 기여한 것이 너무도 단순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은 내게 하나의 보는(seeing) 방식 혹은 다수의 방식과 관련해서 영화의 실재 전체를 질문하기 시작하도록 했다. < 노구치의 시각적 변주들 >(1945)은 멘켄이 노구치의 스튜디오에서 그의 조각 작품들을 핸드-헬드 카메라로 찍은 장면들로 구성된 작품이다. 브래키지가 멘켄에게 받은 영향은 그의 표현대로 너무 단순해서, 손으로 들고 찍는 것뿐일 수 있다. 그러나 멘켄이 미친 영향의 실제적 의미는 본다는 것이 눈에만 국한된 시각적 봄이 아니라 신체적 행위라는 생각에서부터 파생될 수 있는 다양한 실천들에 있다. 브래키지의 작품 중에서 멘켄의 영향이 잘 드러나는 작품으로 <밤의 예감 Anticipation of the Night>(1958)[사진 5]이 일반적으로 뽑힌다. 이 작품에서는 < 노트북 > 중에서 ‘달 놀이’, ‘밤-쓰기’와 같은 부분에서 두드러지는 들고 찍기의 효과가 유사하게 발견된다. [사진 5] <밤의 예감>의 스틸 이미지 이제 마지막으로 검토가 남은 사항은 멘켄이 그녀의 남편 마스와 함께 만들었던 작가 공동체로서 그리폰이다. 이 사항은 미학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실천적인 문제일 수 있고 아니면 멘켄의 성품과 관련된 지엽적인 부분일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멘켄이 메카스나 브래키지에게 그토록 깊은 인상과 영향을 주었던 것은 미학적인 측면에서보다 그녀의 성품 혹은 작가적 태도에서부터 나오는 측면이 더 크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멘켄은 1910년 리투아니아 이민자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뉴욕 순수와 산업예술 학교(the New York School of Fine and Industrial Arts)와 예술학생연맹(the Art Students’ League)에서 회화를 공부했었다. 졸업 후, 추상회화 뮤지엄(the Museum of Non-objective Painting, 나중에 구겐하임 뮤지엄으로 재명명되었다)의 첫 번째 큐레이터였던 힐다 르베이(Hilda Rebay)의 비서로 일했다. 멘켄은 1937년에 야도 재단(Yaddo Foundation)에서 장학금을 받아 레지던시를 갔는데, 거기서 마스를 만나 같은 해에 결혼했다. 1942년에 멘켄과 마스는 미육군 통신대(Army Signal Corps)의 애니메이션 부서에 고용되었다. 여기서 그들은 그 당시 노먼 맥라렌의 동성 애인이었던 가이 글로버(Guy Glover)를 만났고, 그의 작업에 영향을 받아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멘켄과 마스는 1942년 습작으로 <코니 섬Coney Island>를 만들었고, 이듬해 그들의 두 번째 작품으로 < 몸의 지형 Geography of the Body >(1943)을 만들었다. 그리폰은 멘켄이 타임-라이프(Time-Life)에서 일할 당시에 받은 크리스마스 보너스로 1950년대 중반에 등록한 프로덕션 회사의 이름이다. 그러나 마스는 그의 회고록에서 그리폰의 시작은 맥라렌이 뉴욕에 머물렀던 194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언급했었다. 그리폰이라는 이름이 그 당시에도 쓰였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작가 집단으로서 활동하려는 멘켄과 마스의 생각은 맥라렌이 뉴욕에 머물렀던 1940년 즈음에 그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맥라렌은 영국에서 일하다가 1940년에 뉴욕으로 이주했고, 힐다 르베이를 찾아가서 제작 지원을 받았다. 이때 멘켄과 맥라렌은 만나서 친구가 되었고, 마스도 함께 어울렸다. 마스의 회고록을 보면, 그 행간에서 마스와 맥라렌이 한때 동성 연인 관계로 지냈다는 암시를 받을 수 있다. 브래키지가 쓴 ‘마리 멘켄’이라는 글에는 일반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마스와 멘켄의 관계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마스는 멘켄과 결혼한 직후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후 여러 남성 작가들과 연인 관계를 맺었지만 멘켄은 죽을 때까지 마스와 함께 했다. 멘켄이 사망한 후 4일 뒤에 마스 역시 세상을 떠났다는 것도 드라마적이다. 브래키지는 이 사실을 마스가 멘켄에게 해준 유일하게 로맨틱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브래키지는 마스를 예술가라는 자의식에 가득 찬 이기적인 사람으로 묘사하는 반면, 멘켄을 사랑과 우정으로 충만했고, 놀라운 직관을 가졌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브룩클린 하이츠에 있던 마스와 멘켄의 아파트에는 수많은 작가들이 머물기도 했고, 자주 들락거리기도 했다. 그 작가들의 목록에는 브래키지 외에도 케네스 앵거, 그레고리 마코폴로스, 로버트 휘트먼, 스탠 반더빅, 앤디 워홀 등이 포함된다. 마스와 멘켄의 아파트가 우정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 한때 머물렀던 케네스 앵거는 그들의 주말이 얼마나 자주 전쟁처럼 끝났었는지를 언급했던 적이 있다. 마스와 멘켄이 주축이 된 그리폰은 단순히 작가들과 교류하거나, 영화 장비를 공유하고 상영회를 조직하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리폰은 일종의 비관습적인 삶을 조직화하려는 확장된 시도로서, 영화에 관심을 가졌던 다양한 작가들이 상호 간에 영향을 주고받아서 그 에너지를 새로운 영화 만들기로 향하게 하고자 했던 의도적인 공동체였다. 일상과 예술의 구분을 거부하고, 관습에 벗어나는 삶을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예술적 형식을 도모하려고 했던 분위기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뉴욕 아방가르드에서, 특히 비트 세대 작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그리폰은 영화 작가들의 공동체라는 이상을 향한 과도기적 특성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이상이 실험영화 제작과 상영의 현실적 토대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메카스가 주도한 뉴욕작가조합(New York Film-makers’ Coop)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멘켄이 메카스와 브래키지에게 미친 실제적인 영향은 어쩌면 영화와 일상을 구분하지 않고 일상을 혁신하는 실천이 새로운 영화적 실천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발상에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영화이론을 설명하면서 일찍이 일기와 영화를 비교했던 세자르 자바티니(Cesare Zavattini)는 “일기와 영화는 존재의 윤곽을 확대하는 스크린을 통해서 관찰될 수 있는 존재의 비가시적인 구성요소들을 재현하고, 일기는 현실을 지시하며 즉각적인 분석을 생산하는 카메라와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생각과 그 생각을 영화적으로 구체화하는 과정 사이의 간극을 제거하기 위해서 카메라의 즉각성과 생생함을 옹호하였다. 자바티니는 “나는 일기가 영화의 가장 완벽하고 진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우리는 현실에 굳건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 노트북 >은 생각과 영화 찍기 사이의 시간적 간극을 무시하고 친구들과 함께 만들고 보는 영화의 즐거움을, 예술가라는 자의식이 부재한 아마추어의 자유로움을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 이 글에서 언급된 영화들과 마리 멘켄에 관한 사실들은 다음의 책과 논문들을 참고하였다. P. Adams Sitney, Visionary Film: the American Avant-Garde, 1943-2000,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P. Adams Sitney, Eyes Upside Down: Visionary Filmmakers and the Heritage of Emers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8. David E. James(ed.), To Free the Cinema: Jonas Mekas & the New York Underground,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2. Jonas Mekas and Gregory Smulewicz-zucker(ed.), Movie Journal: the Rise of the New American Cinema, 1959-1971,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6. Stan Brakhage, Film at Wit’s End: Eight Avant-garde Filmmakers, McPherson, 1991. Juan A. Suarez, “Myth, Matter, Queerness: the Cinema of Willard Maas, Marie Menken, and the Gryphon Group, 1943-1969,” Grey Room 36, Summer 2009, pp.58-87.
그들이 이사 오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찰은 천신만고 끝에 그들을 태워준 운전사를 추적해냈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 그다지 할 말이 많지 않았다. 그저 한 아버지와 어리고 예쁜 딸이 탔었다고 기억했다. 그리고 하나 더. 꼭 밤에 이사해야 한다고 했다. 돈이 더 들어가도, 시간이 걸려도 상관없다고 했다. 그들에겐 그게 굉장히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삿짐도 유달리 적었다. 여행 가는 사람들처럼 최소한의 짐들뿐, 큰 가구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일이 무척 편했다고 느꼈다. 조용히 내리던 눈이 모든 걸 덮어주던 밤이었다. 본인만 모르고 있었을 뿐, 그는 그들을 이곳에 들인 장본인이었다. 경찰이 들려준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이 일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평생토록. 그렇지 않으면 죽은 목숨이란 걸 깨닫고 있었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던 소년은 수영장에서 가해자들을 폭행하고 살해한 소녀와 함께 사라졌고, 엽기적으로 온몸의 피를 뺀 채로 사람들을 죽이던 소녀의 아버지는 병실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그 병원에선 햇볕을 쬐고 자연 발화돼 죽은 여인에 관한 소문이 돌았으며, 그 여인의 남자친구는 소녀와 그 아버지가 머물던 집에서 처참하게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스톡홀름 근교의 도시 블라케베리에는 한동안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들이 겨울 맹추위처럼 배회했다. 교회가 없는 동네라 그런 거란 추측도 있었다. 그러나 자세한 내막은 오로지 사라진 소년과 소녀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수영장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가 쓴 「렛 미 인」은 작가 자신이 태어난 고향 블라케베리를 무대로 뱀파이어가 나오는 자전적인 성격을 띤 소설이었다. 하지만 내용이 괴상하다는 이유로 여러 출판사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으로 투고한 곳에서 연락이 와 2004년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기구했던 시작과 달리 출간 후 반응은 뜨거웠다. 전 세계 23개국에서 번역 출간되고, 독일과 미국 등지에서 영화화 제의가 쇄도했다. 그중 자국의 촉망받는 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구애를 받아들여 작가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매만져 영화로 완성했다. 1980년대 초 냉전이 극에 달하던 시기, 살인사건에 관심을 갖던 왕따 소년이 외톨이 뱀파이어 소녀와 만나 기묘한 관계를 맺게 되는 모습을 때론 서정적으로 때론 무시무시하게 그려낸 영화 < 렛 미 인 >는 트라이베카 영화제,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 등 30여 개 영화제에서 48개의 상을 받으며 2008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국내에선 다소 보기 힘든 북유럽권 영화에, 호러라는 장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입소문을 타며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다. 이후 할리우드에서 재빠르게 리메이크를 진행해 ‘힛 걸’로 떠오르는 신성이 된 클로이 모리츠를 앞세워 원작과는 또 다른 감성을 선보이기도 했다. 서로의 존재에서 생의 이유를 발견하는 두 아이의 외롭고도 가슴 아픈 성장담은 이렇게 세계를 매혹시켰다. 이에 깊은 울림과 서정을 부여한 건 요한 소데르크비스트의 스코어 덕분이었다. 이름만큼이나 생소한 스웨덴 태생의 영화음악가 요한 소데르크비스트는 1966년에 태어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스톡홀름 왕립음악학교에서 작곡과 편곡을 전공했다. 재즈 밴드와 민속 음악그룹에서 활동하며 경험을 쌓던 그는 여느 작곡가들처럼 우연히 영화음악을 맡게 되며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게 되는데, 그에겐 1991년 작 <아그네스 세실리아>와 덴마크 출신의 수잔 비에르 감독 데뷔작 <프로이트의 리빙 홈>이 그런 역할을 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영화뿐만 아니라 TV와 라디오, 연극 등 다양한 분야로 행보를 넓히며 실력과 인지도를 갖춰나갔다.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건 수잔 비에르 감독과 오랜만에 호흡을 맞춘 < 브라더스 >부터. 이 영화로 유로피안 필름 어워드와 칸영화제에서 음악상을 석권하며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이후 그녀와 함께한 < 애프터 웨딩 >과 <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 < 인어베러월드 >와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렛 미 인>까지 연달아 호평받으며 국제적인 유명세를 얻었다. 여전히 유럽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그는 최근 <콘티키>와 < 다시, 뜨겁게 사랑하라! >, < 페인리스 > 등 어드벤처와 로맨틱 코미디, 호러와 같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최고조에 오른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 주로 기타와 피아노를 바탕으로 절제됐지만 애수 어린 멜로디를 선사하는 그는 잘 설계된 풍부한 현악 오케스트레이션을 통해 감성을 자극하는 실력도 지녔다. 게다가 워터폰이나 허디거디, 어레이 마림바 등 독특한 민속 악기들을 활용해 새로운 사운드를 창출하는 등 색다른 시도와 실험을 멈추지 않는 탐구심과 신선한 감각을 드러내기도 한다. 요한 소데르크비스트 Johan Soderqvist <렛 미 인>의 음악은 차갑고 시린 동시에 아름답고 따스하다. 소데르크비스트가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스코어를 쓸 수 있는 드문 기회라고 라이너노트에 적었을 만큼 양면적인 색채가 도드라진다. 전형적인 호러영화음악에서 벗어나 십 대의 성장통과 가슴 아픈 멜로라인까지 보듬어낸 감성적인 분위기는 절절하게 심금을 울리고 가슴을 저미게 한다. 애수 어린 선율은 한없이 우울하고 어두운 영화에 한줄기 구원의 빛처럼 다가오지만, 평온한 안식을 심어주지 못한 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불안함으로 관객들을 괴롭힌다. 그 사이를 잠식하는 건 베이스 워터폰의 허무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잔향들이다. 얼핏 신디사이저로 착각할 만큼 다채로운 사운드스케이프를 선사하는 워터폰의 존재감은 스코어 전반을 지배한다. 공포영화에 쓰이는 악기로 한때 검색어에 오르기도 했던 이 기괴한 몰골의 악기는 리처드 A. 워터스가 1967년에 발명한 것으로 물에 의한 공명 현상과 진동을 통해 독특한 소리를 들려준다. 타악기처럼 두드리거나, 활로 켜는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활용할 수 있는데, 음향에 가까운 낯선 쇳소리로 공포감을 극대화시키는 마력을 지녔다. 마치 차가운 북유럽의 대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스산한 기운으로 고독의 깊이와 세월의 무게감을 전해주는 듯하다. 이를 감싸 안는 건 슬로바키아 내쇼널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짙은 스트링과 피아노, 그리고 기타의 몫이다. 처연하면서도 구슬픈 선율을 연주하는 이들은 워터폰에 맞서 사람다운 일말의 온기를 부여하고 있다. 영화 내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쓰인 건 ‘Eli’s Theme’다. 아름답고 서정적이지만 애달픈 선율의 현악 앙상블은 듣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오랜 세월 어린 모습으로 홀로 버텨온 뱀파이어 이엘리의 심정과 기구한 사연을 대변한 곡으로 ‘The Father’와 ‘Then We Are Together’, ‘Going Home’, ‘Let the Right One In’ 등 여러 차례 변주되며 제법 선명한 잔상을 남긴다. 주로 소년과 소녀가 잠깐 동안 행복한 시간을 가질 때 흘러나오는데, 현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미래의 운명이 그 숨겨진 비극성을 더 강하게 부각시킨다. 결국 ‘Eli’s Theme’는 무기력하고 어두운 생존의 저주를 고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자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모습을 담은 곡으로 음악적 메타포로도 활용된 셈이다. 그 외 부분은 주로 호러적인 감수성을 품고 있는 짧은 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귀에 거슬리는 베이스 워터폰의 잔향과 독특한 음색들을 유감없이 맛볼 수 있는데, ‘The Arrival’이나 ‘The Slaughter’, ‘Hiding the Body’와 ‘Virginia wakes up’, ‘Spotting a Victim’, ‘Death of Hakan’, ‘Lacke Dies’ 등 전반적인 트랙에 걸쳐 엠비언스처럼 사운드 디자인적인 측면으로 다뤄지고 있다. 새로운 시도는 아니지만 초현실적이고 공감각적인 소리의 향연으로 어둡고 나약한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호러영화음악만의 고유한 미덕이 담긴 큐들이다. 요한 소데르크비스트의 <렛 미 인>은 변방에 있던 북유럽권의 영화음악을 세상에 널리 알린 첨병과도 같은 사운드트랙이다. <브라더스>로 자신의 이름을 처음 드러냈다면 <렛 미 인>으로 자신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그는 수잔 비에르 감독과의 협업 외에도 능히 통용될 수 있는 영화음악가임을 스스로 입증해냈다. 어둡고 아름답지만 애잔하고 감미로운 선율을 통해. 이쯤 되면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넘어 독일과 스페인 등으로 보폭을 넓혀가는 그의 다음 행보가 퍽 궁금해진다. Track List 1. The Arrival 2. Eli and Oscar 3. Eli’s Theme 4. The Slaughter 5. Oscar in Love 6. Hiding the Body 7. After the Fight 8. Oscar Strikes Back 9. Virginia Wakes Up 10. The Father 11. Spotting a Victim 12. Giving Up 13. Death of Hakan 14. Virginia Is Bitten 15. Then We Are Together 16. Virginia in Flames 17. Eli Bleeds 18. Related by Blood 19. Lacke Dies 20. Going Home 21. Let the Right One 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