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nnifer Larmore: In Performance!
- 제작년도
- 2001
<축제> 중 (사진: 영화방) 박광수 감독의 < 칠수와 만수 >(1988)의 후반부에는 안성기 배우와 박중훈 배우가 연기한 두 주인공이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우뚝 솟은 거대한 광고판 꼭대기에 앉아 있는 장면이 나온다. 원래는 광고판 도색 작업을 해야 했지만, 두 사람은 작은 저항의 의미로 그곳에 올라 소주를 마시며 도시를 내려다본다. 도색 작업을 하며 우연히 만난 이 두 남자는 함께 일하는 동료가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가장 고통스러운 좌절감과 굴욕감만은 서로에게 숨겨왔다.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사회로부터 외면받았으며, 안정적인 삶을 구축할 공정한 기회조차 거부당한 처지였다. 그러나 광고판 꼭대기에 올라서서야 칠수(박중훈)는 처음으로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진심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실패자이며, 지금까지 했던 모든 자랑이 거짓이었음을 만수(안성기)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라고 말한다. 칠수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 안성기의 얼굴에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 턱은 굳게 다물어지고 눈빛은 무언가에 집중한 듯 강렬해지는데, 말 한마디 하지 않더라도 그 표면 아래에서 감정의 폭풍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동료를 향한 연민과, 사회적 불평등을 견디며 오랫동안 참아온 분노를 동시에 포착해내는 연기를 이토록 훌륭히 해낼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다. 잠시 후, 그는 일어서서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외친다.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 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이 장면은 198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매우 상징적인 순간이다. 만수와 칠수는 대중적인 주류 영화에서 대개 주목받지 못하는, 억압받고 소외된 인물들을 대변한다. 그들은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자신들의 좌절과 분노를 외침으로써, 문자 그대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고’ 자신들의 관점을 드러내며 말할 권리를 주장한다. 유사하게, 1980~90년 세대의 영화인들은 주류 사회가 망각 또는 묵살해버리는 인물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려는 열망에 이끌려 창작에 돌입하곤 했다. 안성기는 만수 역을 맡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였다. 그는 인물 특유의 단단하면서도 씁쓸한 결연함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한편, 그 내면에 자리한 부드럽고 연민 어린 면모를 은연중에 드러냈다. 사실 안성기는 그 시기 한국영화에 등장한 여러 명의 주인공을 맡기에도 아주 적합했다. 그는 특정한 유형의 인물만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었고, 전형적인 “무비스타(movie-star)”로서의 외모나 뚜렷하게 고정된 스크린 이미지를 지니지도 않았다. 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연기한 배역 속에서 자신들을 발견하게 만드는 데 어떤 배우들보다 탁월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꿈과 두려움, 야망, 나약함, 그리고 미덕을 스크린 위에 충실히 구현해냈다.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 깊고 푸른 밤 >(배창호, 1985)의 능수능란한 사기꾼, < 기쁜 우리 젊은 날 >(배창호, 1987)의 수줍은 대학생, < 투캅스 >(강우석, 1993)의 부패한 경찰에 이르기까지, 그는 각 인물을 공감 가능한 생생한 존재로 그려냈다. 1950~60년대에는 배우 최은희 가 이러한 방식으로 관객들과 연결되었는데, 한 세대의 여성들은 그녀가 연기한 다양한 역할 속에서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발견하며 성장했다. 1980~90년대에 그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 배우는 단연 안성기였다. 세월이 흐르며 영화계 안에서 그의 위치는 달라졌지만, 중요성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야기에 즉각적으로 무게감을 더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상대 배우에게서도 최상의 연기를 끌어내도록 했기에, 감독들은 그와의 작업을 고대했다. 조연부터 주연까지 폭넓은 역할을 소화했으며, 대형 블록버스터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작업에 참여했다. 신인 감독이나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하는 프로젝트와의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배우 생활 전반에 걸쳐 수많은 감독과 생산적인 협업 관계를 맺었다. 그중 단 25명의 이름만 꼽아보더라도 김기영 , 임권택 , 배창호 , 이장호 , 이두용 , 유현목 , 이원세 , 정지영 , 강우석 , 이명세 , 박광수 , 박종원 , 장선우 , 이현승 , 류승완 , 김성수 , 오승욱 , 이정향 , 이준익 , 김지훈 , 신연식 , 장률 , 김주환 , 박흥식 , 그리고 김한민 의 영화에 출연했다(여기에 언급하지 못한 수많은 분께 양해를 구한다). <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중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양기주) 그는 영화계 내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스크린쿼터 제도 수호에 앞장섰고, 부산국제영화제 부위원장 및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도 했다. 영화계 내에서의 이러한 위상과 배우로서 이룬 독보적인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를 직접 대면한 이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그의 겸손함과 너그러움이었다. 그는 스타로서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결코 유명 스타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나긋한 목소리로 조용히 행동하며 스포트라이트를 찾아나서지 않았음에도, 그는 영화계의 기둥이자 많은 이들이 우러러보는 리더였다. 영화계의 여러 행사에서 그가 지녔던 존재감은 동료 영화인들에게 깊은 그리움을 자아내겠지만, 다행히 한국영화 속 그의 연기는 여전히 누구나 접하고 즐길 수 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상징적인 역할 중 몇 가지만 고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중 지극히 주관적으로 선정한 일부 목록을 아래에 적어보고자 한다. 물론 그의 경력이 시작하는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에서 보여준 아역 연기를 마주하게 된다. 그보다 전에 김기영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 10대의 반항 >(1959)은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안성기는 이 작품으로 소년 특별연기상을 받았지만, 작품의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다. 그는 1960년대에 5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주로 작은 역할들을 맡아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성인 배우로서의 도약은 1980년대 초에 이뤄졌는데, 이장호의 < 바람불어 좋은 날 >(1980), 이원세의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1981), 임권택의 < 만다라 >(1981), 배창호의 < 꼬방동네 사람들 >(1982)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각 감독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주요 작품들이다. 특히 배창호 감독과 함께하며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는데, 따뜻한 마음을 가진 노숙인을 연기한 < 고래사냥 >(1984),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한 <깊고 푸른 밤>(1985), 그리고 청춘의 성장과 관계를 다룬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이 대표적이다. 이후 20여 년간 국제적인 명성을 쌓게 된 임권택 감독 역시 < 안개마을 >(1982)부터 < 태백산맥 >(1994), < 축제 >(1996), < 취화선 >(2002), 그리고 감독의 마지막 작품인 < 화장 >(2014)에 이르기까지 그와 지속적으로 작업했다. (상) <하녀>, <바람불어 좋은 날> / (하) <안개마을>, <화장> (사진: 한국일보, 백영호)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데뷔한 사회의식 있는 감독들, 이른바 ‘코리안 뉴웨이브’로 불리는 창작자들 역시 안성기와 작업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앞서 언급한 <칠수와 만수>와 박광수 감독의 또 다른 주요작인 < 그 섬에 가고싶다 >(1993) 외에도, 자본주의를 풍자한 장선우의 < 성공시대 >(1988), 이명세의 파격적인 데뷔작 < 개그맨 >(1988), 그리고 날카로운 정치적 통찰을 보여준 정지영의 < 남부군 >(1990)과 < 하얀전쟁 >(1992)이 있었다. 동시에 그는 강우석의 메가 히트작 < 투캅스 >(1993)를 통해 자신의 코믹 연기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감독들은 그를 신뢰했기에, 때로 이례적이거나 의외의 역할에 캐스팅하기도 했다. 이정향의 로맨틱 코미디 < 미술관 옆 동물원 >(1998)에서의 엉뚱하고 유쾌한 모습이나, 이명세의 < 인정사정 볼것 없다 >(1999) 속 잔인한 살인마로의 등장, 전만배 감독의 < 피아노 치는 대통령 >(2002)에서의 대통령 연기가 그 예다. 또한 오랜 동료인 박중훈과 호흡을 맞춘 가슴 따뜻한 음악 드라마 < 라디오스타 >(2006), 정지영의 법정 드라마 장르인 < 부러진 화살 >(2011)에서의 강렬한 변신, 그리고 한국영화사 최초의 천만 관객 영화인 강우석의 < 실미도 >(2003)에서 보여준 군 지휘관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경력의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도 그의 독특한 목소리는 대규모 흥행작인 < 타워 >(2012), < 한산: 용의 출현 >(2022)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인 < 필름시대사랑 >(2015), < 아들의 이름으로 >(2020), < 카시오페아 >(2022) 등 영화계 전반에 걸쳐 친숙하게 자리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대담하고 창의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안성기는 영화라는 예술을 사랑했다. 그가 여러 번 직접 언급해서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그의 행보가 한국영화를 향한 깊은 헌신을 분명히 보여줬기에 알 수 있다. 그가 별세하면서 한국영화계는 길을 밝혀주던 등불 하나를 잃었으며, 그가 없는 이곳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성공시대> 중 (사진: 정기성) 달시 파켓(Darcy Paquet / 영화평론가·번역가) l 영화평론가이자 강연자, 번역가, 그리고 영화제 컨설턴트로서 25년 넘게 한국영화를 지켜봐 왔다. 저서로는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가 있다. * 위 원고는 필자가 영문으로 작성한 아래 원고의 국문 번역본입니다. Remembering Ahn Sung-ki There is a moment towards the end of Park Kwang-su’s 1988 film Chilsu and Mansu when the two lead characters – played by Ahn Sung-ki and Park Joong-hoon – are sitting on the top of a giant billboard at the Express Bus Terminal in Gangnam. They are supposed to be painting the billboard, but in a small act of defiance, they have instead gone up to drink soju and look out over the city. These two men, who met by chance on painting jobs, have become work partners, but nonetheless they have hidden their most painful frustrations and humiliations from each other. Each of them for various reasons have been shunned by society, and denied a fair shot at building a stable life for themselves. But atop the billboard, Chilsu (played by Park Joong-hoon) starts to speak honestly from his heart for the first time. He confesses to Mansu that he’s a failure, that the bragging he has been doing up to now has been lies. “I’m a hopeless guy(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 he says. As Chilsu is speaking, a slow transformation takes place on Ahn Sung-ki’s face. His jaw locks, his eyes take on a focused intensity, and although he doesn’t say a word, we can see a storm brewing just beneath the surface. Not many actors could have done this so well, capturing both the compassion he feels for his colleague and his long-suffering outrage at society’s inequities. A moment later, he stands up and shouts to the city below: “All you upper-class, educated, well-off bastards of Seoul, listen to me now! I'm going to speak out too, from this high place here!”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This is an iconic and deeply symbolic scene for 1980s-era Korean cinema. Mansu and Chilsu represent the kind of downtrodden, disenfranchised characters that are usually overlooked by popular mainstream cinema. By shouting their frustrations and complaints to the city below, they are quite literally “finding their voices,” expressing their point of view and insisting on their right to speak. In a similar way, a whole generation of filmmakers in the 1980s and 1990s were motivated by the desire to give a voice to the sort of characters that mainstream society forgets or simply ignores.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su. He convincingly portrays the hard, bitter determination of his character while giving hints of a softer, compassionate side underneath. But actually,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y of the protagonists of that decade’s cinema. He wasn’t known for playing one particular character type. He didn’t have movie-star looks, or a clearly-defined screen image. But what he did better than anyone else was to make audiences see themselves in the roles he played. He took the dreams, fears, ambitions, weaknesses and virtues of ordinary people, and represented them faithfully on the screen. Whether it was the smooth-talking grifter moving to California and pursuing the American Dream in Deep Blue Night , the shy university student in Our Sweet Days of Youth , or the corrupt policeman in Two Cops , he portrayed each character in a manner that made them vivid and relatable. In the 1950s and 1960s, it was the actress Choi Eun-hee who connected with audiences in this way: a generation of women grew up seeing themselves and their experiences in the many different roles that she played. But in the 1980s and 1990s, the actor who did this best of all was Ahn Sung-ki. As he grew older, his position within the film industry changed, but not his importance. Directors loved to work with him, since his presence in a film immediately gave the story more weight, and he could bring out the best in his co-stars as well. He took on a wide variety of roles, from supporting to leading characters, and worked on everything from major blockbusters to low-budget independent films. He didn’t shy away from working with new directors or less prestigious projects. Over the course of his career, he formed productive working relationships with a huge number of directors. To choose just 25 names, he appeared in films by Kim Ki-young, Im Kwon-taek, Bae Chang-ho, Lee Jang-ho, Lee Doo-yong, Yu Hyun-mok, Lee Won-se, Chung Ji-young, Kang Woo-suk, Lee Myung-Se, Park Kwang-su, Park Jong-won, Jang Sun-woo, Lee Hyun-seung, Ryoo Seung-wan, Kim Sung-soo, Oh Seung-wook, Lee Jeong-hyang, Lee Joon-ik, Kim Ji-hoon, Shin Young-sik, Zhang Lu, Kim Ju-hwan, Park Heung-sik, and Kim Han-min(with apologies to the many other names I’ve excluded). He also played important roles in the film community, serving as chairman of the Korean Film Actors Association, advocating for the Screen Quota system, serving as Deputy Director of the 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as Festival Director of the Asiana International Short Film Festival. And yet despite his stature in the industry and his unmatched accomplishments as an actor, the quality that most impressed people who met him in person was his modesty and generosity of spirit. He didn’t behave like a famous star, even though he possessed a star-quality charisma. Soft-spoken and never seeking the spotlight, he was nonetheless a pillar of the film community, looked up to as a leader. His presence at film events will be sorely missed by fellow filmmakers, but thankfully his performances in Korean films can still be accessed and enjoyed by anyone. Making a list of his most iconic roles is difficult, because there are so many of them to choose from. But I will attempt to make a partial, highly subjective list below. Of course, going back all the way to start of his career, we have his performance as a child actor in one of the most famous Korean films of all time, Kim Ki-young’s The Housemaid (1960). It’s truly regrettable that a copy no longer exists of his previous collaboration with Kim Ki-young, Defiance of a Teenager (1959), which screened at the San Francisco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where Ahn Sung-ki won a special award for his acting. He would go on to act in more than 50 films in the 1960s, often in small roles, but his breakthrough as an adult came at the start of the 1980s in works such as Lee Jang-ho’s Fine Windy Day (1980), Lee Won-se’s A Dwarf Launches a Little Ball (1981), Im Kwon-taek’s Mandala (1981), and Bae Chang-ho’s People in a Slum (1982) – all major films that helped to establish the reputation of their directors. It was with Bae Chang-ho that he would enjoy some of his biggest commercial successes, especially in Whale Hunting (1984) where he played a kind-hearted beggar; the smash hit Deep Blue Night (1985) and the coming-of-age relationship story Our Sweet Days of Youth (1987). Director Im Kwon-taek, who became internationally recognized over the next two decades, often worked with Ahn Sung-ki as well, from films like Village of Haze (1982) to The Taebaek Mountains (1994), Festival (1996), Chihwaseon (2002) and the director’s final film Revivre (2014). The group of more socially-minded directors who debuted in the late 1980s and early 1990s – often referred to as the Korean New Wave – were just as eager to work with Ahn Sung-ki. Aside from the aforementioned Chilsu and Mansu and another important work by Park Kwang-su, To The Starry Island (1994), there was Jang Sun-woo’s capitalist satire Age of Success (1988), Lee Myung-Se’s groundbreaking debut film Gagman (1989), and Chung Ji-young’s politically incisive North Korean Partisans in South Korea (1990) and White Badge (1992). At the same time, Ahn showcased his comic abilities in Kang Woo-suk’s smash hit Two Cops (1993). Directors trusted Ahn Sung-ki enough to cast him in somewhat unusual or surprising roles, such as his whimsical appearance in Lee Jeong-hyang’s romantic comedy Art Museum by the Zoo (1998), his turn as a vicious killer in Lee Myung-Se’s Nowhere to Hide (1999), playing the nation’s president in director Jeon Man-bae’s Romantic President (2002), his role opposite longtime collaborator Park Joong-hoon in the heartwarming music drama Radio Star (2006), his powerful turn in Chung Ji-young’s court drama Unbowed (2011) and his unforgettable role as a military commander in Kang Woo-suk’s Silmido (2003), the first Korean film to sell 10 million tickets. Even to the later stages of his career, his distinctive voice was a familiar presence in big-budget hit films such as Tower (2012) or Hansan: Rising Dragon (2022), to low-budget indie features like Love and… (2015), In the Name of the Son (2020) and Cassiopeia (2022), and everything in between. He was daring and creative in choosing films up to the very end. Ahn Sung-ki loved the art of cinema. We know this not because he said it in so many words, but because over decades, his actions demonstrated his deep commitment to Korean cinema. With his passing, the film industry has lost one its guiding lights, and it will not be the same without him. Darcy Paquet(film critic/translator) l As a film critic, lecturer, translator and film festival consultant, I have been following Korean cinema for over 25 years. Author of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
사진: “ Jonas Mekas. Requiem ”, Francesco Urbano Ragazzi (© estate of Jonas Mekas) 돌아보니 2023년 한 해에만 상복을 네 번 입고, 네 점의 작품을 제작해 전시했다. 남아서 살아가야 하는 자들의 증상은 모든 의식이 끝난 뒤 발현된다. 2024년이 시작되자마자 몸은 소진되었고, 마음은 무력감으로 충만해졌다. 1년간 참 많은 영화와 콘텐츠들을 접했지만 소진된 육체와 무력감으로 충만한 마음으로는 잘 소화시킬 수 없었다. 사사로운 리스트에 올린 영화들은 그런 무감각 속에서 간신히 발견한 것들이다. 특히 요나스 메카스의 < 레퀴엠 >(2019)은 쓸데없이 흘려보낸 시청행위의 흐름을 끊게 된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 요나스 메카스의 유작 <레퀴엠>을 오랫동안 소문으로만 전해들었다. 특히 영상의 주된 사운드인 베르디의 ‘레퀴엠’은 이 영화의 전시 오프닝 때 현장에서 라이브로 연주되었다기에 기대가 컸다. 전시장에서 상영된 필름 영상과 실연된 사운드가 어떤 방식으로 조화를 이루고 관객들에게 전달되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감독은 고인이 되었고, 우리가 기대했던 전시 상영은 이뤄지지 않았다. 만약 감독이 이 영화의 전시 방식에 따른 메뉴얼을 남겨두었다면, 훗날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뉴욕 복합문화예술공간 “The Shed”에서 <레퀴엠> 영상과 함께 작곡가 테오도르 쿠렌치스의 지휘로 연주되는 베르디의 ‘레퀴엠’ (사진: Kate Glicksberg, “ REQUIEM CONCERT PERFORMANCES ”, The Shed) 영화는 필름이란 긴 흐름 위에 감독이 여러 요소들을 자유롭게 띄워놓은 것 같다. 거리에 핀 꽃, 성경 구절과 뒤섞인 작가의 말, 매체로 공유되는 세계의 참상, 그리고 베르디의 ‘레퀴엠’이란 조각들이 영화에 흐름에 따라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이어져 독특한 수평의 흐름을 형성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글자를 읽고, 감독이 촬영한 자연물을 보다, 인쇄되고 방영되는 세계의 참상을 받아들여야 하며, 동시에 약 170여 년 전의 음악도 들어야 한다. 어쩐지 이러한 구성 자체가 베르디의 레퀴엠과 비슷하다. 베르디의 레퀴엠에선 소프라노와 테너를 비롯한 모든 파트가 독립적으로 각자의 아리아를 부른다. 꽤 매끄럽지 않지만 강렬한 조화를 이룬다. 요나스 메카스의 레퀴엠을 이루는 영상과 사운드 조각들이 수평을 이루며 동일한 층위에서 다소 거칠게 연결된 것도 이와 비슷하다. 그래서 이 거칠고 다소 성글게 엮인 조각들을 전시장에서 상영하고 연주했다면 그 효과가 더 뛰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두고두고 남는다. 물론 블랙박스에서의 사운드는 오픈된 공간에서의 라이브 연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감각하게 한다. 감독과 함께 LP판으로 음악을 감상하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마치 기계적 결함이나 일시 정지 버튼에 의해 발생했을 법한 단절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한 사운드의 빈틈은 감독의 신체와 카메라에 의해 포착된 사운드로 채워진다. 잠깐의 침묵, 노인의 숨소리, 무언가를 지칭하는 목소리, 나직한 웃음소리, 자연을 향한 감탄의 언어와 같은 것들이 음소거 된 사운드를 대신한다. 이러한 음악적 구성 외에 요나스 메카스가 수많은 진혼곡 중 베르디의 ‘레퀴엠’을 선택했던 이유를 반교권주의에 있다고 보았다. 요나스 메카스가 반교권주의자라는 얘기가 아니다. 영화 레퀴엠에서 요나스 메카스는 성경 구절을 인용함과 동시에 신에게 말을 건다. 그 말들은 교회가 아닌 DV-Cam 이미 위에서 펼쳐지며, 오직 신과 감독의 말만 존재한다. 신이 인간에게 전한 말씀과 인간이 신을 향해 내뱉는 말 사이엔 어떠한 중계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 관객들은 백지에 기록된 신과 동일선상에서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인간과 마주하게 된다. 그 인간이란 90대의 노인이 되어도 카메라를 놓지 않은 감독 자신일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치 양 끝에 스프로킷뿐인 길고 거친 필름 위에서 감독이 남긴 손짓과 그림자, 그리고 쉰 목소리에 의지해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장황한 사변이나 일기 형식이 아니더라도 잠깐의 감탄사와 읊조림, 그리고 숨소리와 짧은 문장 하나만으로 감독의 존재감이 영화 전체에 걸쳐 드러난다. 필름의 물질성과 감독의 정체성이 고화질의 투명함으로 인해 가려진 동시대의 영화 환경으로부터 크게 벗어나 있기에 가능하다. 때문에 요나스 메카스의 ‘레퀴엠’을 보는 내내 우리는 추구하고 감춰야만 완성할 수 있는 동시대 영화로부터 떨어져 잠시나마 큰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사진: “ Jonas Mekas REQUIEM ”, CURA. / " Jonas Mekas's "Requiem ", e-flux Criticism (© estate of Jonas Mekas) 물론 해방감은 곧 ‘지금 우리는 카메라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담을 수 있을까’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영화 레퀴엠에서 동시대 전쟁과 재난의 장면들은 출판물과 TV화면으로만 제시되고, 거리에 핀 꽃과 자연물들만이 직접 촬영한 것들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습관적으로 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세계의 참상은 리얼하고 스펙터클하게 재현될 것이고 거리에 핀 꽃과 자연물들은 짧게 등장하는 배경으로 치부되거나 편집 과정에서 지워져도 무방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매체를 통해 접한 세계와 몸으로 체험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병치시켜 위계 없는 세계를 보여준다. 스펙터클하게 재현될 참상을 그가 접한 매체의 특성 그대로 담아 그 사건의 본질에 집중하게 만든다. 감독의 카메라에 포착된 거리의 흔한 꽃무더기와 자연물을 보다 보면 우리의 몸이 실제 세계에서 어떤 경험과 체감을 놓치고 살아가는지 질문하게 만든다. 이러한 방식이 무엇에 더 집중하거나 공감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길가에 핀 꽃과 해골이 쌓여있는 지구 반대편 어딘가의 불행을 등치시키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몸으로 보고 듣고 감각하는 실제의 현장과 물리적으로 먼 곳으로부터의 소식과 정보가 전해지고 교환되는 방식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공감 혹은 무감각은 그러한 현장과 방식에 의해 생성되는데, 문제는 이 두 세계의 균형이 깨질 때다. 이 영화는 두 세계를 담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스펙터클에 대한 숭배와 재현 의지, 그리고 작은 것들에 대한 무시 혹은 지나친 감성을 비껴간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을 피사체 삼아도 영화의 정서는 값싼 감성에 치우치지 않는다. 끔찍한 살육과 재난을 목격했을 때 감독은 그 참상이 담긴 매체를 촬영하며 스펙터클과 재현의 의지를 상쇄시킴으로써 오히려 본질적인 공감과 애도에 주목하게 만든다. 결국 그의 영화는 끊임없이 지금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감각하고 경험하고 있는지 되묻게 하는 것이다. 사진: “ Jonas Mekas. Requiem ”, Francesco Urbano Ragazzi (© estate of Jonas Mekas) 물론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조각들은 철저히 감독이 자신의 세계로부터 이끌어낸 것이다. 그의 몸이 경험한 현장과 그가 접한 매체 속 세계로부터 포착한 것이다. 그렇기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자들은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For You”란 문장을 덥썩 물어선 안 된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레퀴엠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어쩐지 90대의 노인이 마지막으로 자신이 습관적으로 바라보고 가치를 부여했던 것들과의 작별로 이해했다. 가령 세속의 가치에 따라 이미지의 층위를 형성하고, 세계를 말끔하고 선명한 화면에 담아내며, 권위에 기댄 말에 복종하는 예술 행위와 같은 것들에 대한 저항 의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이 영화는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결국 감독 자신을 향한 것으로 읽힌다. 필름에 담긴 의식의 조각들 또한 철저히 그의 문제의식으로부터 비롯된 그를 위해 마련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요나스 메카스의 레퀴엠은 결국 그가 자신의 죽음을 위해 미리 마련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평생 열망해 왔고 앞으로도 유일하게 안식할 수 있는 곳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닐까. 오랜 삶만큼이나 죽음 또한 결국 자기 몫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죽음에 대한 애도와 위로 또한 자기 의지로 받고 싶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쩐지 요나스 메카스라면 가족과 친구들이 일반적인 장례식장에 몰려와 관습적 의식에 참여해 본인을 애도하는 방식은 원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오히려 직접 마련한 재단에 손수 만든 도구를 정렬한 뒤 자신의 영혼을 그곳에 뉘여 누구든 언제나 영화를 보고 만드는 행위로 위로하길 바라지 않았을까. 결국 관객의 입장에서 이 영화를 보다 보면 그가 배치한 조각들을 맞춰보고 그 사이에서 육신이 새긴 흔적을 찾게 되니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의 영화를 보는 순간 그가 마련한 레퀴엠에 참여하게 되었다. 무진형제(미디어 작가 그룹) l 무진형제는 3명으로 구성된 작가 그룹이다. 세간의 지배적인 가치와 믿음체계로 굳어져버린 것들을(眞) 의심하고 해체시켜(無) 동시대의 ‘인간-환경 시스템’을 재구성한다. <삼속(三俗)의 담(談)>, <궤적(櫃迹)-기술된 선인(善人)들> 등을 작업했다.
물었다. 왜 떠나냐고, 뭘 하고 왔냐고, 어떻게 살 거냐고. 2016년 초, 영국 유학 소식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1.그 나이에? 2.하던 일은 어쩌고? 3.뭐 하려고? 그리고 1년 후,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니 그들은 여전히 궁금해 했다. 4.뭘 배우고 왔어? 5.뭐가 달라졌어? 6.그래서 앞으로는 뭐 할건데? 먼저 나이로 말하자면, 이미 불혹(不惑)을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에 혹 할 일 들이 많았고 궁금한 것들 투성이었다. 부산에서 보낸 어린 시절, 막연하게 20대에는 서울로 독립하고, 30대에는 뉴욕 같은 대도시에서 살아보고, 40대엔 유럽 어딘가에서 생활하고, 쉰이 넘으면 일본 소도시 같은 곳에서 머물면 좋겠다는 꿈을 꾸었다. 의지가 만들어낸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지난 삶이 꿈꾸던 대로 되었으므로 40대의 영국행은 그리 뜬금없는 행보는 아니었던 셈이다. 하던 일에 대해 말하자면, 다행히도 지금까지는 계속 일 할 기회가 있었지만, 일이란 것이 그저 하고 싶다는 의지나 마음만으로 계속 할 수 없다는 걸 막연하게 느끼게 되었다. 결국 이 유학은 다른 무엇이 되기 위한 야심 찬 단계였다기 보다는, 지금까지 하던 일의 지속 방법을 찾기 위한 절박한 선택이었다. 고백하건데, 1999년 『씨네21』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이후 프리랜서 영화기자가 되어 매주 배우들을 만나고 있는 지난 18년 동안, 나는 아직도 그들과의 인터뷰를 앞두면 막막하다. 익숙해질 법도, 요령이 생길 법도 한데, 매번 길을 잃었다. 막다른 길 아니면 아예 미로 앞에 선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내가 건네는 질문이 한 길 사람 속에 닿기는커녕 수면만 건드리는 공허한 돌 던지기가 아닐까 늘 의심 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 대화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독자나 시청자를 위한 것인가? 배우를 위한 것인가? 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그저 인터뷰라는 관성적인 행위로 채워지는 잡지 지면과 방송 시간을 위한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그들에게 도대체 무엇을 물어야 하는가. 배우들에 대한 궁금증과 경외심의 샘이 마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들에게 던지는 내 질문의 샘은 점점 말라져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나를 타국으로 떠나게 한 것도, 나를 공부하게 한 것도, 딱 하나였다. 만나면 만날수록 더 모르겠는, 그러나 여전히 궁금하고 사랑하는, 배우라는 미지의 종족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2016년 늦여름, 나는 프리랜스 영화기자라는 직업을 잠시 접어두고 마흔 둘의 나이에 런던 유학을 떠났다. 런던대(University of London) 대학원에서 영화학을 전공하며 415일간을 런던에서 보냈다. 배우에 대한 기존의 학계 연구들이 주로 스타 연구(Star Studies)와 퍼포먼스 연구(Performance Studies)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았고, 이 풍성한 연구들 속에 존재하는 사각지대를 파악했다. 즉 배우를 특정한 사회적 기호나 현상으로 파악하거나, 그들의 연기 기술과 방법론을 분석하고 카테고리화 하는 가운데 정작 한 명의 배우를 개별 인간/예술가로 인지하고 접근하는 연구가 비교적 소홀함을 느꼈다. 하지만 내가 만난 배우들은 크던 작던 누구와도 같지 않은 요소들, 비교불가의 영역들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는 존재들이었다. 나는 여기에 독립된 배우를 중심으로 한 수정된 작가주의(Auteur theory) 연구라고 할 수 있는 ‘액톨로지’(Actorology, 배우학)에 대한 제안을 했다. 쉽게 말해 ‘1950년대 할리우드 스튜디오 배우 연구’가 아니라 ‘로버트 드 니로 연구’ ‘톰 크루즈 연구’ 같은 식이다. 물론 한 배우의 다양한 가치(Values)를 분석하는 단계에서 기존의 스타 연구나 퍼포먼스 연구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결국 마지막 졸업 논문은 ‘액톨로지’라는 새로운 분야에 대한 제안을 중심으로 배우 메릴 스트립을 연구하는 방식으로 완성했다. 물론 1년 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의 고민이라 설익은 부분들이 많은 결과물이었지만, 내 스스로는 평생 해나갈 연구의 입구를 찾은 기분이었다. 2017년 10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유학을 떠나기 전 4년 넘게 진행해왔던 올레TV 영화 프로그램으로 다시 복귀했고 각종 영화제 혹은 개봉영화들의 모더레이터로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쓰고, 배우를 만나고, 인터뷰를 한다. 누군가 보기에는 떠나기 전과 하나도 달라질 것이 없이 똑같은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배우 앞에 선 내 마음은 조금 변했다. 나는 인터뷰어로서 결국 실패할 것이다. 배우들의 마음에 닿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하겠지만 끊임없이 내 방법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배우들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시장이 나에게 일을 앗아가는 시기, 혹은 인터뷰의 기회를 주지 않는 시간이 오더라도 평생 연구할 대상이 없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그램에서 종종 나오는 ‘발명왕’이나 ‘특허왕’ 처럼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집요하고 신나게, ‘ 백은하 배우연구소’(Una Labo Actorology)의 첫 번째 ‘배우연구자’로서 앞으로도 이 무모한 탐구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런던에서의 1년은 나에게 사랑하는 것을 계속 사랑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해준 시간이었다. 이것이 이 글의 첫 문단에 받은 1번 부터 6번까지의 질문에 대한, 현재까지의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