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향하는 나방들
- 감독
- 마티아스 프리츠
- 제작년도
- 2004
전(前) 육군 대령 출신의 사회운동가 지만원은 북한이 보낸 일명 ‘광수’들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활동을 주도했다는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기하학적 분석에 몰두해 있다. 요지는 인간을 식별하는 표식 중 하나인 지문의 원리와 마찬가지로 얼굴 역시 페이스 라인을 연결한 외곽선의 형태가 일치하면 동일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는 원리이다. 지씨에 따르면, 일베 영상분석가 ‘노숙자담요’가 항쟁을 기록한 사진 한 장에서 발상한 추적은 사진에 기록된 시민군의 페이스 라인, 미간 사이의 거리, 주요 요소들이 배치된 좌표의 연결선 등 얼굴의 기하학적 형태를 추출한 이미지 아카이빙으로 진화하였고 이를 북한 발(發) 이미지들과 대조하여 총 561명의 광수를 찾아내기에 이른다. 얼굴에 대한 기하학적 분석에 동기를 제공한 것은 제1광수라고 명명된 한 시민군 청년의 사진이었고 그는 2010년 평양 노동자회관에서 열린 5.18 30주년 기념식에 참가한 사내, 북한에서 농업상까지 지낸 김창식과 동일인물이라고 지씨는 주장한다. 매서운 눈초리와 어깨 골격의 생김새, 기관총을 다뤄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화기(火器)를 다루는데 있어서의 능숙함 등이 심증으로 제시된다. 지씨의 주장은 “광주 사람들이 시위대를 형성한 적은 없고, 광주에서의 시위는 북한군 600명이 와서 저지른 폭동이며, 광주 사람들은 여기에 부나방처럼 끼어들어 부역을 할 것이다. 따라서 민주화 시위도 없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지만원의 주장과 달리, 다큐멘터리 영화 < 김군 >의 도입부 전개에서 사진 속 청년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광주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중년 여인 주옥이 사진을 보고 그의 얼굴을 알아보면서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주씨는 지만원에 의해 북한군 김창식과 동일인물로 지목된 ‘제1광수’가 자신의 집에 수시로 드나들며 교분을 쌓았던 청년 ‘김군’이라고 주장한다. 항쟁 당시 시민군을 지원했던 주옥은 어느 날 어머니와 시민군들의 군용 트럭에 주먹밥을 올려주고 있었는데, 그때 김군과 재회했다고 말한다. 그녀는 “날카롭고 남자답게 생겼다”고 김군에 대한 인상을 전한다. 주옥의 아버지 주대체는 김군이 ‘왕대포 시음장’으로 불렸던 자신의 술집에 자주 왕래하였으며, 광주시 동구에 위치한 원지교 아래에서 천막을 치고 살던 성명불상의 넝마주이 고아였고, 7-8명의 또래 청년들과 그룹을 이뤄 다녔노라고 증언한다. 당시 넝마주이들이 항쟁의 주동이 되었지만 항쟁 이후 사람과 천막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 주옥이 이름 없는 청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은 강렬하고 그녀의 기억은 역사에 대한 인식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 지만원과 주옥의 추적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김군>은 이 둘을 대비하면서 이미지의 속성과 진실을 담지한 아카이빙 기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연출자 강상우는 지만원의 분석과 주옥의 기억을 진실에 접근하는 것을 두 극점에 두는데 여기서 지만원의 기하학적 분석은 과학에 근거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주옥의 것은 직관적이다. 김군의 얼굴을 찾아가는 이 로드무비의 여정은 5·18 기록 보관소에 안장된 한 장의 사진에서 우연히 출발하였다. 강상우는 역사적 증거와 증언을 번갈아가며 기록물과 삶의 이야기, 집단 기억과 기억 상실, 이미지의 메커니즘의 복잡한 역학을 서사화한다. 다큐멘터리의 구성 요소 중 생존자들의 인터뷰는 이미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사이의 역학을 탐구하는데 기여한다. 김군의 흔적을 찾기 위해 생존자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의 꼭짓점에 놓인 인물이 최진수이다. 장발에 반곱슬로, 하는 행동이 어리숙했던 청년 최진수의 등장은 미스터리의 영화적 해결방식을 보여준다. 시민군 최영철에 의해 1980년 5월 24일 발생한 송암동 학살사건 관련자로 지목된 최진수는 흑백의 사진으로 구체화하기 시작하여 1989년 2월 22일 제28차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에서 국회의원 김인곤의 질문에 답하는 모습으로 육화된다. 송암동의 그날을 생생히 기억하는 청년 최진수의 시점이 현재의 최진수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카메라는 그의 얼굴이 아닌 손을 클로즈업하고, 이에 상응하는 이미지로 동아일보 기자 최형주의 펜을 쥔 손도 클로즈업한다. 송암동 학살사건에서 죽은 희생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김군을 지목하는 과거의 최진수가 진술을 이어가는 동안 이미지 트랙에서는 현재의 최진수와 최형주 기자의 대화, 흑백의 자료 사진, 어두운 도로를 비추는 자동차 안에서의 쇼트, 운전석에 앉은 최진수의 측면 쇼트, 진상조사위원회에서 지도를 그리는 최진수 - 최형주 기자 앞에서 흰 종이에 지도를 그리는 현재의 최진수 이미지가 몽타주된다. 송암동의 민가에 피신한 시민군을 쫓아 온 공수부대에 의해 “김뭐라고만 알고 있는 동지”가 관자놀이에 총격을 받고 사망했음을 고지하는 증언은 과거의 최진수와 현재의 최진수가 합일되는 순간이다. 이때부터 현재의 최진수에게 음성이 부여되고 과거와 현재는 연속성을 획득하며 영화의 추적도 종착점에 다다랐음을 암시한다. 현재의 최진수를 시각화하는 시퀀스에서 프로필에서 정면으로 이행하는 쇼트의 전개 방식은 역사적 미제에 접근하는 영화의 스타일을 대변한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개의 공명하는 이미지와 맞닥뜨리는데, 최영철이 송암동 사건을 진술할 때 등장한 자동차 앞 유리로 보이는 어둑신한 도로와 주옥이 “원지교 아래에서 쓰레기를 줍는 고아”로 김군을 묘사했을 때 다리 아래를 묘사하는 풍경 쇼트이다. 이 연결은 만난 적이 없는 좌표 상에 놓인 이미지들을 하나로 꿰어 배열한다. 최영철이 떠올린 최진수가 김군을 불러내고, 최진수의 호명이 주옥의 김군을 소환하는 것이다. <김군>은 송암동의 희생자(들)가 김군일 것이라고 단정하지 않지만 이 기나긴 탐색의 과정이 스스로 말하게 함으로써 하나의 지도를 완성한다. 2022년 5월, <김군>에 영감을 제공했던 청년이 차복환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차씨는 각종 증거들을 통해 김군으로 지목된 사진 속 청년이 자신임을 입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학살의 후과를 상징하는 인물이 생존해있다는 것이 이미지의 권능을 의심하는 이 영화에 깃든 의미와 가치를 훼손하지는 않는다. <김군>은 다큐멘터리의 재현 양식, 이미지의 신실함에 대한 혼란에 기초한 영화이다. 공개 및 비공개 영상과 문서, 보도사진, 100명 이상의 생존자와의 인터뷰 등 방대한 컬렉션을 토대로 하여 엄밀한 조사 과정을 삽입하였지만 특정 양식이 진실을 생성하지는 않는다는 결론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지만원과 주옥의 관계로 돌아가서, 지만원이 신뢰하는 안면 인식 기술과 주옥이 발동한 기억-감각은 그 간극이 크지만 과학적 탐사와 인간의 기억은 모두 확실한 진실을 제공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의 소명과 관련하여 에롤 모리스(< 가늘고 푸른 선 >(1988), <전쟁의 안개>(2003), < 언노운 노운 >(2013))는 “진실은 스타일이나 표현에 의해 보장되지 않으며 진실보다는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다큐멘터리가 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진실은 모호하고 또 알아내기 어렵다는 믿음에 기초한 이 영화의 탐사는 예정된 목표지점에 도달하는 어떤 다큐멘터리와도 다른 길을 갔다. 탐정 이야기와 비선형 배열의 조합은 관객의 판단을 위해 미스터리 속으로 들어가고 실제로 벌어졌던 일을 찾아가는 과정에 무게를 둔다. <김군>은 다큐멘터리 효과를 쟁점으로 하여 도구적 합리성에 대한 반성적 비판을 실천하며 혁신적이고 논쟁적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진다.진실 추구의 상대적인 방법론들 사이에 얼마나 많은 옵션이 존재하는가? 현대 다큐멘터리의 주요 의제 중 하나인 역사적 사건에 관한 진실을 발견하는 일 안에 내재한 거짓, 불일치, 모호함을 쟁론화하면서 동시에 기록물, 인터뷰, 아카이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다큐멘터리의 역설을 가리키고 있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 김용훈 , 2020)은 그 제목에서부터 자신이 어떠한 인물을 담고 있는지 밝히고 있다. 그 제목에 따르면 그들은 ‘짐승들’이다. 영화는 그들이 짐승이 되어가는 과정보다는 짐승들이 얽히고설키며 서로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잔혹한 광경을 보여주는 일에 방점을 찍는다. 나는 이 잔혹한 풍경을 보면서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죽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것이 짐승들로 가득한 세계의 이치라고 말한다면 나로서는 할 말이 없긴 하다. 하지만 생존이 삶의 유일한 목표가 되어버린 세계를 반복적으로 바라보면서도 그것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이야말로 ‘비평적 개입’을 포기하는 일이자 스스로를 짐승의 세계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어쩌면 <지푸라기라도…>는 오로지 생존만을 위해 전력 질주하는 인물들이 지배하는 지금의 한국영화(또는 한국사회)를 또 다른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징후인지도 모른다. <지푸라기라도…>는 돈가방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우리는 누가 이 돈가방의 주인인지 알지 못한다. 영화가 원하는 것은 이 돈가방의 주인이 누구인지가 아니라, 이 가방 안에 돈이 담기는 과정에서 탐욕에 눈먼 자들이 보여주는 짐승 같은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애인이 사라지며 짊어진 빚을 허덕이며 크게 한탕을 노리는 태영( 정우성 ), 그런 그를 이용해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은 연희( 전도연 ), 돈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 사채업자 두만( 정만식 ), 하루하루의 생활비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중만(배성우)은 각자의 사연으로 돈가방을 차지하기 위한 사투를 벌인다. 물론 돈가방을 사이에 둔 쟁탈전에서 인물들의 광기어린 탐욕을 보여주는 것은 장르 영화의 클리세다. <지푸라기라도…>가 여섯 개의 장으로 에피소드를 나누고, 과거의 사연을 현재의 사건인 전개하는 트릭을 쓰며, 신체를 요란하게 절단하는 잔인한 장면 등을 보여주는 하드고어적인 표현을 차용하는 등의 잔재주를 부린다 해도 이 전형성에서 탈피하지는 못한다. <지푸라기라도…>는 돈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독하고 잔악해질 수 있는지 그리려 한다. 애인을 배신하는 것 정도는 애교에 가깝고, 차로 산 자를 깔아뭉개고 신체를 난도질하는 살인도 서슴치 않는다. 가진 것 없는 자에게 더 매정하게 구는 것이 자본주의의 이치고, 그래서 돈 앞에서 절박해지는 것이 없는 자들의 인지상정이긴 하지만, 인물이 절박한 것과 그런 그들의 행동이 설득력을 갖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들은 각자의 사연을 보여줄 뿐, 그것을 가지고 자신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불나방처럼 돈에 날아가 자신의 몸을 불태울 뿐이다. 그러니 관객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의미한 피의 향연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다. 그들은 ‘살아남는 것’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설득력을 갖지 못한 절박함을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고문 같은 일이다. 이러한 면에서 <지푸라기라도…>의 제목에 삽입되어 있는 ‘짐승’이라는 단어는 일종의 알리바이 역할을 한다. 그들은 짐승이기 때문에 인간성이 거세되어야 하고, 그래서 돈가방 앞에서 자동기계처럼 자신의 탐욕을 분출하면 그만이다. 그들은 ‘살아남는 것’이 삶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지금 한국사회의 초상화다. 이러한 면에서 <지푸라기라도…>가 하나의 징후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는 < 곡성 >과 < 부산행 > 이후 유행하는 좀비 영화에서 오로지 살아남는 일에 천착하는 인물들을 마주하곤 한다. 지금의 한국 영화가 관객에게 전시하는 것은 (유무형의) ‘괴물’ 앞에서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는 인간군상의 모습이다. <곡성>의 종구( 곽도원 )는 칼에 찔려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왜 이런 파국을 맞이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부산행>과 <서울역>, < #살아있다 >의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세계에서 인물이 할 수 있는 것은 안간힘을 다해 도망치는 것이 전부다. 한마디로, 오로지 생존만을 위한 전력 질주. <지푸라기라도…>와 일련의 좀비 영화 등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삶’이 아니라 ‘생존’의 절실함이다.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일에 가까워질 때,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 그래서 지금의 한국 영화에는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생존은 인간적 삶의 기본 전제다. 그렇기에 생존 그 자체는 아름다운 것도 추한 것도 아니고, 선도 악도 아니다. 생존의 추구가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인간이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쓴다는 것과 그것만이 유일한 가치로 자리매김 되어 있는 것은 구분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푸라기라도…>은 그 엔딩에서 (원작과는 달리) 중만의 부인(진경)에게 돈가방을 선물한다.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돈가방의 존재를 몰랐던 인물에게 돈가방이 흘러 들어간다는 점에서 어떤 아이러니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 결말은 영화적인 우연 그 이상이 아니다. 돈가방은 생존을 가능하게 할지라도 삶의 가능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것이 삶의 희망이 아니라 서사적 기만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 한국영화를 휩쓸고 있는 생존주의는 “사회적인 것의 성스러운 환상이 벗겨진, 인간의 생물학적 나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사회적인 불가능이 생산하는 마음의 형식”(김홍중, <사회학적 파상력>, p.292)이다. <지푸라기라도…>가 절망스러운 것은 단지 생존주의에 빠진 인물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상상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절박한 인물을 낭떠러지 앞으로 몰아가는 지금의 한국 영화가 앓고 있는 병일 것이다.
새벽은 태양이 뜨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는 시간이다. 동이 틀 때를 기다리는 풀과 나무, 소음을 내기 시작하는 도로와 각자의 하루를 시작하려 하는 사람들. 기대와 호기심으로 가득 찬 시간은 무엇이든지 시작할 수만 있을 것 같다. 반대로 해가 막 지고 밤이 오기 직전의 하늘 또한 마찬가지이다. 소모했던 에너지들이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고 고요함과 고독을 기다리는 상태로 돌아간다. 움직이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 본다면 푸른 하늘의 빛은 곧 아침이 오는 것인지 밤이 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런 혼란과 혼돈은 약간의 광기를 동반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미친듯이 뜀박질이 하고 싶다거나 깊숙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 아무도 찾지 않고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지게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모순적인 시간을 블루아워라 칭한다. 전혀 만나지 않을 것 같은 양극단의 두 시간이 언젠가는 하나로 겹쳐지는 시침과 분침처럼 마주치는 순간이 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서른살의 CF감독 스나다(카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으로부터 지쳐간다. 재미없는 남편과의 결혼과 촬영 현장에서의 스태프와의 연애, 조용하게 넘어갈 날 없는 하루. 하지만 스나다는 술만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기요우라(심은경)를 만나게 되고 고향으로 오라는 엄마의 말에 무작정 함께 떠나게 된다. 스나다의 고향은 이바라키의 작은 시골마을로 보이는 것은 산과 밭, 그리고 그다지 달갑지 않은 가족뿐이었다. 스나다는 이런 고향을 좋아하지 않는다. 촌스러움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반면 기요우라는 이바라키의 모든 것이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마치 아이처럼. 비가 많이 오던 날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스나다의 본가에서 하루를 보내게 된다. 엄마는 수다스럽고 아빠는 퉁명스럽다. 오빠와는 거의 남과 같다. 맥주를 찾으러 부엌의 냉장고를 열었을 때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삼각김밥 무더기를 보고 스나다는 표정이 일그러진다. 여기서부터 스나다가 고향에 대해 가지고 있는 양가감정이 조금씩 드러난다. 스나다는 분명 따뜻한 밥과 된장국이 먹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차가운 삼각김밥은 따뜻한 기대를 무너뜨렸다. 진심을 말해야 하는 순간은 고통이 뒤따른다. 우선 그 진심이 좋든 나쁘든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어른스럽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어른스럽지 못한 사람은 회피한다. 거기서 도망쳐버린다. 잠깐은 안심이 될지 모르지만 언젠가 도망쳤던 자신을 마주해야 된다는 불안이 엄습할 것이다. 스나다는 도망을 택했다. 그리고는 근처의 한 술집으로 기요우라와 도망쳤다. 불을 보고 뛰어드는 나방처럼 마을의 남성들은 그곳 여성들에게 야한 농담을 해댔다. 시끄러운 노래 소리와 웃음 섞인 음담패설을 듣고 있는 스나다는 이곳마저 벗어나고 싶어했다. 만나고 있던 스태프와 문자를 주고 받으며 견디고 있었다. 핸드폰만 바라보며 웃는 스나다에게 술집 주인은 한 마디 한다. “정말? 그래서 웃는 거야? 난 그런 웃음 별로던데. 솔직히 싫어. 다들 예쁘다고 하나본데 습관 되니까 조심해. 사실 추하거든.” 주인은 유일하게 스나다를 꿰뚫어보는 사람이다. 시골은 구질구질하고 도시는 쿨하고 이바라키는 추하고 도쿄는 세련됐다고 생각하는 스나다에게, 자신을 속이고 연기를 하고 있던 스나다에게 조금 더 솔직해지라고 연기는 그만하고 억지 웃음을 버리라고 이야기 한다. 그렇지만 스나다는 여전히 두렵기만 하다. 자신과는 다르게 기요우라는 마이크를 잡고 촌스러운 노래도 곧잘 불러서일까. 다음날 새벽 스나다는 운동화를 신고 어렸을 때처럼 동네 산길을 걷기 시작한다. 점점 빨라지는 발걸음. 아침인지 밤인지 모르는 빛과 어둠 사이에서 뜀박질을 시작한다. 그러다 문득 자리에 멈춰선다. 뒤로 돌아보았을 때 손을 흔들고 있는 기요우라가 보인다. 머뭇거리는 스나다에게 손짓을 한다. 스나다는 그토록 미워하던 고향과 점점 가까워지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좁혀지는 마음의 거리를 은유하는 것은 바로 스나다가 신은 운동화이다. 첫번째로 도쿄에서의 운동화. 여기서 운동화는 깨끗하다. 회식 후 길거리 벤치에서 잠이 들어 굴러 떨어지고 풀린 운동화 끈도 신발 속으로 아무렇게나 욱여넣는다. 하지만 고향집에 도착하자 내리치는 비 때문에 운동화는 호졸근히 젖어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산길에서의 뜀박질 때문에 운동화는 흙투성이가 된다. 비와 흙으로 물들어가는 운동화는 스나다가 고향에 대한 마음을 조금씩 열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어느 순간 어른이 되어있는 것처럼 스나다도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고향에 물들고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더러워진 운동화로 보일 수 있다. 비와 흙이 묻은 신발은 예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이 전부가 아니다. 스며든 비와 흙 속에는 과거의 기억과 과거의 내가 있다. 그리고 그 신발을 현재의 내가 신고 미래로 달려나간다. 그게 혼란스럽고 모호한 블루아워라고 해도 말이다. 스나다가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 하나가 고향이라면 다른 하나는 동물에 대한 거라고 할 수 있다. 스나다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기요우라에게 들려준다. 오빠와 함께 곤충의 날개를 떼서 장난친 것, 차에 치일 뻔 한 강아지를 대수롭지 않아 한 것. 반대로 돌봐주던 길고양이를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자 분노한 일 따위를 들려준다. 스나다는 그때 느꼈던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상대가 기요우라여서 가능한 일이었을까. 기요우라는 어떤 사람일까. 기요우라의 첫인상은 발랄하고 명랑한 사람이었다. 어딘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웃고 말했다. 어른의 행동이라기엔 어딘가 이상했다. 아이들을 생각하니 그 의문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겁은 나지만 하고 싶은 걸 해보고 때로는 착한 거짓말로 상대가 상처받지 않게 배려한다. 스나다와 엄마의 대화 중에서 엄마는 스나다에게 너는 어느쪽 사람이냐 묻는 장면이 있다. 기요우라는 도시 사람의 티가 많이 난다고 했다. 그렇다면 기요우라는 도시 쪽 사람일까. 아니다. 스나다는 이바라키와 도쿄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기요우라는 그런 스나다를 도와주고 위로해 줄 어린 스나다인 것이다. 공책 속에 그려진 그림처럼 스나다는 기요우라 같은 친구를 원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자신이다. 어렸을 때의 감정이 무뎌진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기요우라는 나타난 것이다. 스나다가 진짜 스나다로 성장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결국 부정하고 싶었던 과거를 스나다는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내일 먹을 빵을 사오라는 남편의 문자에 전화를 걸어 “나 말이야. 아침은 밥이 좋아. 된장국도 있어야 된다고! 콩도 좋아해! 콩도 좋아한다고!”라고 외친다. 마법 같은 순간이다. 이제 스나다를 도와 줄 친구는 사라져버린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스나다는 어른이 된 것이다. 블루아워는 다 지났다. 대신 노을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혼란스러운 마음도 끝이 보이는 걸까. 스나다는 어린 자기의 목소리의 작별인사를 받는다. 바이바이. 눈물을 참을 수 없다. 눈물은 나지만 입으로는 웃어 보인다. 시골 싫어! 촌스러워!라고 소리지르면서. 이에 기요우라는 말한다. “진짜 바보네요. 스나 씨 원래 촌스러워요. 촌스럽다는 거 괜찮지 않아요? 진짜 살아 있는 것 같고. 난 스나 씨 고향에 와 보길 잘한 것 같아요. 사람들 말하는 거 절반은 뭔 말인지 못 알아들었지만 역시 시골은 스릴 있네요.” 촌스럽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