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희
- 감독
- 양지은
- 제작년도
- 2014
- 출연
- 채민서, 조한철, 양은용, 홍서준, 안민영, 윤채우, 김보은, 전한나, 이서원, 최민주, 박영, 이미윤, 강영구, 손강국, 유병훈, 김재열, 김재록
< 우리 손자 베스트 >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리는 것 같다. 대체로 평단에서 나온 호평들은 그간 한국영화가 깊게 들여다본 적 없던 일베와 어버이연합을 전면화하고 있다는 점을 거론한다. 반면 일부 SNS를 통해 짐작되는 일반 관객들의 혹평은 주로 이 영화의 거친 만듦새와 다루는 대상들, 특히 여성 인물들에 대한 남성 인물들의, 나아가 영화의 왜곡된 시선을 문제 삼는다. 한쪽은 영화 안의 폭력적 상황들을 ‘헬조선’의 괴물성에 대한 구체적 진단으로 인식하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영화 자체의 위험한 태도와 등치 시키고 있다. 전자는 이 영화의 내용적 시의성을, 후자는 형식적 결함을 지적한다. 나는 이 영화를 지지한다. 하지만 그 이유가 이러한 두 개의 주장들 중 어느 하나에 찬성하고 다른 하나에 반대해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내게 이 둘은 상이한 맥락과 입장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성과와 한계를 모두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로 소화하고 있고, <우리 손자 베스트>가 우리에게 안기는 일련의 당혹감을 단순화된 논리로 압축해버린다는 의미에서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영화의 소용돌이 안으로 들어가길 망설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에 대한 반문을 안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우리 손자 베스트>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토를 초과하는 곳에서 활동하는 세계다. 이 영화를 움직이는 괴이한 혼종성과 불균질한 층위들과 위태로운 리듬에 닿기 위해 지금부터 나는 위와는 좀 다른 길을 상상해보려고 한다. < 우리 손자 베스트 >를 보는 내내 우리를 따라다니며 혼란하게 만드는 물음이 있을 것이다. 가해자의 서사를 만든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의 서사를 경험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가해자의 서사를 구축하면서 영화가 그것과 완전히 거리를 두는 일은 가능할까. 그 거리는 어떻게 생길까. 그 거리는 착각일까. 더욱이 가해자의 행위를 사회 구조적인 차원 안에서 설명할 의지가 별로 없어 보이는 이와 같은 영화 앞에서라면 더욱 난감해진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는 우리를 안도하게 할 만한 일관된 가치판단의 기준 같은 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요컨대, 영화의 시선은 인물들을 체제의 피해자로 이해하려는 쪽에 가까운가, 공모자로 공격하는 쪽에 무게를 두는가). 시선은 모호하고 서사에는 도덕의 자리가 없다. <우리 손자 베스트>를 지속시키는 유일한 영화적 윤리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추하고 부패한 세계를 비판적으로 판단하고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그 추하고 부패한 세계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영화의 몸을 맡기는 행위와 관련된다. 그러니까 대상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대상과의 유희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가 경험하는 이상하고 당황스러우며 종종 불쾌한 기분은 어쩌면 당연한 감정인 셈이다. 혐오의 언어들, 혐오의 행위들과 유희라니, 이 영화는 결국 혐오의 운동에 동조하고 있을 뿐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인가. 언뜻 그럴듯해 보이는 반문이지만, 이 영화를 지탱하는 유희의 활동은 그런 반문에 무너질 만큼 단순한 차원의 것이 아니다. < 우리 손자 베스트 >의 관심은 일베와 어버이연합을 즉각적으로 상기시키는 두 인물의 심리를 분석하는 데 있지 않다. 이것은 세계와 충돌하는 병적인 인간존재를 궁금해하거나 그들의 비뚤어진 행위를 관음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것은 ‘말’에 대한 영화다. 이 영화의 혼종성은 인물들의 신념을 체화한 말의 내용이 그 저열함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거름 장치 없이 영화적으로 나열되는 데서 비롯된다기보다는, 수많은 층위에 놓인 말들의 비일관되고 교란된 움직임들이 물질화되는 데서 비롯된다. 이 영화는 인물들이 아니라, 말의 움직임과 도발적이고 공격적으로 유희한다. 영화의 도입부, ‘너나나나베스트’ 회원인 교환(구교환)은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던 중,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주시하던 동영상을 훔쳐본다. 그것은 경찰이 물대포로 시위대를 진압하는 영상인데, 교환은 먹잇감을 발견한 듯, 자신이 하던 게임 속 성우의 목소리를 조작해서 그 영상에 입힌다. 영화는 단지 교환의 그러한 행동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렇게 희화화된 영상을 우리로 하여금 큰 화면으로 다시 마주하게 만든다. 이 장면은 불편하다. 처절한 시위의 현장을 간교한 편집으로 농락한 교환의 행동을 보는 일도 힘들지만,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그 영상이 우리에게 특정 사건을 연상시키는 실제의 기록이라는 점, 무엇보다 가공된 게임의 세계를 지배하던 전능한 목소리가 그 참혹한 기록을 한순간 인공적인 이미지로 돌변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사실을 지시하지 않는, 아니, 사실 자체에 완전히 무감한 텅 빈말의 선정적인 힘이 여기,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장면에, 이 영화를 관통하는 논쟁적인 질문이 있고 이제 우리는 그 질문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 우리 손자 베스트 >는 사실(교환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팩트’다. 물론 그가 사용하는 ‘팩트’라는 단어는 팩트와 가장 먼 자리에 있다)의 진위를 탐구하고 밝히려는 영화가 아니라 말의 저 위태로운 활동을 보려는 영화다. 팩트에 조응하거나 팩트를 지시하고 설명하는 말의 기능이 아니라, 팩트를 진공상태에 두고서도 전혀 균열되지 않는 말의 뻔뻔한 표면, 말의 경박한 생동감을 따라가 보는 것이다. 그 생동감은 어떤 이성이나 논리도 없이 오직 경박한 차원의 감정으로만 지탱된다. 너나나나베스트와 어버이별동대의 입에서 나오는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조롱과 혐오의 말들뿐만 아니라, 교환과 영어 선생님이 얼굴을 대면하지 않고 전화로 나누는 대화를 보라. 사실 영어 대화라고도 할 수 없는 그들 사이의 말들은 언어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암묵적인 규칙조차 사라진 일차원적인 감정의 잔여물들에 불과하다. 그것은 조롱과 혐오의 발언들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저급하기 짝이 없다. 한 장면이 있다. 고엽제 후유증으로 사망한 동료의 장례식장에서 해병대 전우회 소속의 한 남자와 어버이별동대에 속한 사내들이 모여 있다. 그들은 고작 육개장이나 얻어먹으러 온 듯한 모양새지만, 겉으로는 현실에 대한 강한 불만과 분노의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말이라기보다는 무질서한 소란에 가깝다. 그때, 그들 사이를 오가던 영화는 갑자기 모든 소리들을 다 죽여 버리고 침묵 속에서 잠시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풍경을 쳐다본다. 그러니까 이 말들의 간교한 힘을 내용적인 교정 등으로 순화시키거나 옳은 길로 인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 힘을 그저 죽이는 것만이 그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아주 잠깐이나마 이 장면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걸 알면서도 이 영화가 그처럼 무식하고 폭력적인 말들의 집요한 활동에 ‘영화적으로’ 대면하는 방식은 그래서 더욱 놀라운 것이다. < 우리 손자 베스트 >는 진짜 팩트를 제시하거나 파고드는 방식이 아니라, 그 말들의 활동에 자신의 몸 전체로 휩쓸려보고 반응하며 치열하게 대응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나는 이 영화가 현실에 대한 패러디나 풍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이 영화는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울타리도 세우지 않은 채로 무모하고 위험하게 돌진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영화 자신이 부서질 수도 있으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 말들에 오염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손자 베스트>는 그걸 겁내지 않는다. < 우리 손자 베스트 >가 ‘말의 영화’라고 할 때, 우리는 영화 속에서 성우로 등장하는 한 여인(김상현)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베와 어버이연합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야기임에도 이 영화에는 그들과 싸우는 반대진영이 등장하지 않는데,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그들과 충돌하는 존재가 있다면 바로 이 여인이다. 그 존재가 여자라는 사실만큼 중요한 건, 그녀가 성우라는 사실이다. 비록 그녀의 목소리는 교환에 의해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비인칭적으로 비열하게 사용됨으로써 처음 나오지만, 그 훼손된 목소리는 그녀의 등장과 함께 이내 온전한 육신을 회복한다. 여러모로 그녀의 음성은 그 성질상 너나나나베스트 회원인 교환, 혹은 어버이별동대 단장인 정수의 그것과 구별된다. 전자는 논리적으로 사실을 설명하고, 타자를 향하며, 감정에 동요하지 않고 나지막하고 품위 있게 명령한다. 반면 후자는 비논리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자기를 향하며, 극단적으로 흔들리고, 시끄럽게 분노한다. 말의 차원에서라면, 성우의 말은 너나나나베스트나 어버이별동대의 말보다 우위에 있다. 그녀의 말이 내용적으로 더 객관적이고, 옳으며, 진정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녀의 말에는 형식이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요컨대, 교환이 그녀를 납치한 후, 목욕탕에서 벌어지는 요상한 상황을 보자. 밧줄에 묶인 그녀는 교환이 시키는 말을 내뱉는다. “김일성 개새끼, 김정은 돼지 새끼.” 그러나 곧 상황은 반전을 맞고 이번에는 교환이 포박된 채, 그녀 앞에서 말한다. “이승만 개새끼, 박정희 삐, 전다크 삐, 이명박 삐, 미스 박 삐, 방 씨 일가 삐..” 내용의 수준으로 볼 때, 어느 한 쪽이 더 우월하거나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양자 모두 천박한 말장난이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그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교환의 말은 자기 만족적으로 두서없이 상대를 위협하지만, 성우의 말은 자신을 위협하는 상대의 말을 마치 거울로 반사하듯, 고스란히 되돌려 보내어 그 말에 수치심을 안긴다는 점이다. 경찰서와 목욕탕 장면에서 그녀는 교환에게 담담히 명령하지 않았는가. ‘내가 저 밖에 나가서도 소리가 들릴 정도로 너의 언어를 크게 말하지 않으면 너를 고발할 것이다.’ 서로 다른 두 층위의 말이 (내용이 아닌) 성질로 팽팽하게 겨룬 후, 오직 말의 힘으로 그녀는 교환을 이긴다. 말과 관련해서 가장 통쾌한 성우의 장면에 대해 이야기를 했으니, 이번에는 가장 소화하기 힘든 다른 여성의 장면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일명 ‘박카스 아줌마’로 불리는 숙희(박명신)는 노인들에게 몸을 팔며 생계를 유지한다. 그녀는 거의 언제나 술에 취해 있고, 기지촌에서 일했던 자신과 같은 여자들이 이 나라를 살린 거라고 거의 매번 같은 내용의 술주정을 한다. 그녀는 이상하게도 자신을 언어로 학대하고 때리는 정수( 동방우 )를 쫓아다닌다. 영화 중반 이후에는 교환과 섹스를 하다가 그에게서까지 모멸을 겪는다. 질문은 이것이다. 영화는 무엇 때문에 그녀의 존재를 필요로 한 것일까. 그녀가 등장하는 거의 모든 장면은 그런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녀 또한 우리의 어두운 현실이기 때문에, 혹은 그녀를 통해 너나나나베스트와 어버이별동대의 사악함을 더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라고 말하는 건 당연히 설득력이 없다. 여전히 그 장면들 앞에서 고심하는 나는 지금으로서 두 가지 추측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단 한 장면의 힘을 보는 것이다. 등장인물들 모두가 그녀를 천대하지만, 한 남자만큼은 그녀를 아낀다. 어버이별동대에 속한 것 같지도 않고, 정수 무리들에게 늘 얻어터지는,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어딘지 온기가 느껴지는 이 남자는 깁스를 한 채, 숙희를 식당으로 데려간다. 남자는 국밥을 시킨 후, 그녀에게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한다. “그대에게 밥상을 수여함.” 숙희는 자신을 향한 소박하고 따뜻한 환대를 수줍게 받아들인다. < 우리 손자 베스트 >에서 가장 이질적이며 정겹고 평온한 순간이다. 이 순간의 영화적 울림은 바로 전에 등장한 장면의 기운과 부딪치며 생성된다. 우리는 저 아름다운 ‘밥상’ 수여식을 보기 직전, 나라사랑유공자 보훈처에서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하고 화가 난 채 빈손으로 나오는 정수의 모습을 보았다. 허황되고 속이 빈 이데올로기의 상과 정직하고 구체적인 마음의 상. 영화는 두 상을 나란히 붙여두고, 상이라는 말이 영화적으로 온전히 물질화된 순간, 말이 하나의 세계가 된 순간의 공기를 ‘밥상’의 장면에서 구현하는 것 같다. 물론 다음 장면에서 또다시 술에 취한 숙희가 정수를 찾아오고, 정수가 그녀를 따라온 깁스 한 남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면서 세계는 불행하게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지만 말이다. 다른 하나는 그녀를 성우와의 대척점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성우의 경우, 우리는 그녀의 사적인 삶이나 과거를 알지 못한다. 김상현이 영화 밖에서 실제 성우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녀는 ‘성우’라는 직업인으로서만 접근 가능하다. 그리고 그녀는 앞서 언급했듯, 말의 형식(음성과 태도와 논리)으로 남자들의 위협을 제압한다. 그러나 숙희의 경우, 그녀의 말에는 그러한 권위가 부여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녀의 말이 그녀를 멸시하는 교환과 정우의 말처럼 사실을 농락하고 우롱하는 광기 어린 신념의 언어도 아니다. 말과 삶과 육체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과 내용과 형식, 이 모든 것들이 경계 없이 뒤엉키고 뭉개지는 순간들을 우리는 숙희에게서 본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그녀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한 인물을 찾기 어렵지만, 정작 그녀는 이 영화에서 그 속이 잘 들여다보이지 않는, 가장 알기 어려운 자다. 말의 형식으로도, 말의 내용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지만, 그 세계 안에서 가장 질기게 살아남아 있는 존재. 우리가 그녀의 장면들을 편히 바라보기 어려운 건, 그녀가 등장하는 장면들의 폭력적 수위 때문이 아니라, 그 사실 때문인지 모른다. 현실의 극단적인 사건이나 현상을 영화 안으로 불러들일 때, 실재의 외설성과 선정성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좋은 작품들은 자기만의 영화적 방어선을 견고하게 구축한다. 그 방어선이란 실제 사건이나 현상을 끌고 오되, 그 내용에 기대지 않고서도 독창적으로 이야기를 지속하게 만드는 동력이자 ‘나는 현실이다’가 아니라 ‘나는 영화다’라는 점을 내내 각성하게 하는 힘이다. < 우리 손자 베스트 >는 일베와 어버이연합이라는 우리 현실의 극단적인 얼룩에서 출발했으나 그 얼룩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거나 사실적으로 그리는 데 관심을 두는 영화가 아니다. 이와 관련해서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초반 우리를 헷갈리게 만드는 장면이 있다. 교환의 집이 처음 등장하는 이 장면은 이상하다. 아버지와 딸이 한 쇼트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고, 아들은 혼자 밥을 먹고 있으며, 엄마는 집을 나서는 중이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하거나 서로를 향해 말을 하지만, 어쩐지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는 것 같지 않다. 이들 사이를 오가는 말의 내용들은 중의적이다. 더욱이 딸이 엄마의 목을 조르던 앞선 장면과 엄마가 구급차에 실려 가기 직전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모습, 죽음의 기운이 어른대는 대화들은 이 집 장면을 죽음 이후의 시공간으로, 인물들을 유령이나 환영으로 느껴지게 한다. 영화의 중반, 집을 두고 편의점에서 괴이하게 재회하는 가족들의 장면도 마찬가지다. 인물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말들은 더없이 무의미하고 행동들은 뜬금없으며 이들의 등 퇴장 방식은 갑작스럽다. 교환이 정수를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에 데려온 날, 그가 거실 벽에 걸린 가족사진들을 보며 한 말이 있다. “영정사진 같죠?” 그날 그는 술에 취해 방에서 낮잠을 자다가 거실에서 엄마가 낯선 남자와 섹스하는 장면을 문틈으로 보게 되는데, 그 순간 엄마 또한 교환을 응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교환의 가족은 구체적인 실체가 아니라 교환에게 끊임없이 돌아오는 망상 같은 것이다. 이 가족에 얽힌 상처를 추론하고 그에 근거해 교환의 행동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영화는 비웃는다. 영화는 말 그대로 그의 집(가족)을 텅 비게 만듦으로써, 너나나나베스트에 경도된 자의 근원을 가정적 배경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무화시킨다. 대신 영화는 인과관계를 이룰만한 요소들의 고리를 끊어 곳곳에 흩뜨려 놓음으로써, 한국 사회가 탄생시킨 이 광적인 존재들의 비상식적인 에너지에 오직 영화 내적인 활력만으로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결론 또한 마찬가지다. 암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 정수는 교환과 현충원에 간다. 아무도 없는 한밤중에 둘은 무덤을 파고 교환은 정우의 부탁대로 삽으로 그의 머리를 내리친다. 쓰러지기 직전, 정수는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가 진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현충원을 나서는 교환이 “자주 올게요”라는 말을 했으니, 그가 죽은 것 같지만, 교환이 그의 얼굴에 흙을 뿌릴 때, 그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우리 손자 베스트”라고 중얼댔으니, 그는 죽지 않은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교환은 머리를 짧게 자른 모습으로 광화문 광장에서 춤을 추며 외친다. “내가 찾는 팩트는 바로 나다!” 정수와 교환의 마지막 장면들에는 어떠한 의미작용도 없다. 정수와 교환이 마지막에 보여준 것들은 그들이 영화 내내 보여준 행각들 중 가장 위악적인 퍼포먼스일 따름이며, 그들이 남긴 문장들은 여전히 상투적이거나 무의미하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김수현 이 그들을 퇴장시키며 섣부르게 어떤 견해를 밝히거나 영화적 처벌 혹은 깨달음으로 은밀히 이동하는 대신, 어떻게든 끝까지 그들을 영화적으로 운동하게 하면서 그들을 향한 질문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니 당신이 < 우리 손자 베스트 >를 통해 일베와 어버이연합에 대한 영화 나름의 정리된 결론을 기대했다면, 이러한 마지막을 두고 무책임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는 그 집단들과 현상들에 대해 답을 내리는 일이 자신의 몫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토록 망가진 사회를 살면서, 자기검열에 경직되지 않고도, 도덕에 짓눌리거나 주눅 들지 않고도, 그 사회의 한가운데서 구정물을 뒤집어쓰고도, 세계의 온갖 비루한 운동들을 향해 과연 영화적 활동만으로 다시 질문할 수 있을까. <우리 손자 베스트>는 이 질문에 대한 김수현 의 대답이다. 올해 경험한 수많은 영화들 중에, 우리가 사는 이 현실에 대해 이보다 더 논쟁적이고 담대하고 치열하게 질문하는 세계를 나는 알지 못한다.
한국영화사상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여배우를 꼽는다면 단연 < 월하의 맹세 >(1923)의 이월화 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출생지는 물론 부모가 누군지, 성조차 모른 채 젖어머니 손에서 자라나 배우가 됐으나 기생 노릇을 하다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댄서생활을 하던 끝에 심장마비로 죽은 그 일생 자체가 꾸며낸 한 편의 비극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석금성 (石金星)도 이에 못지않은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출생 신분이 분명하고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랐다고는 하나 성인이 된 후 겪은 세상살이는 참으로 모진 것이었다. 일찍이 생살을 도려내는 아픔으로 피붙이와 헤어지고, 가까이 있는 자식과도 거리를 두고 살아야 했던 그녀의 삶은 이월화보다 더 비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인이 되기 40일 전의 얘기 내가 석금성 여사를 마지막으로 뵌 것은 작고하기 40일 전이었다. MBC가 제작하는 TV다큐멘터리 촬영을 끝내고 그가 묵던 남영동 한 여관 부근에 있는 다방에서였다. 많은 얘기 끝에 여사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신상에 대해 털어놓았다. “해방 후 생활이 어려워 옷가지 등을 동두천에 나가 쌀과 바꿔다 끼니를 잇곤 했지. 하루는 황철 (黃徹, 월북배우)에게 자식들을 먹이고 공부시킬 자신이 없으니 남편이 있는 북으로 데려가달라고 부탁했어. 그래서 4남매 모두 월북하게 된 거야.” 그런데 1991년부터 북으로 간 자녀와 연락이 닿았다고 한다. 일본을 통한 간접적인 소식이었다. 18세 때 ‘샘물터에서’라는 노랫말로 재능을 인정받은 막내딸 최로사(崔露砂, 당시 65세가 량)는 손꼽히는 시인으로 성장했고, 막내아들 호섭(57세 가량)은 고모 최승희의 영향을 받아 안무가로 활동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동안 ‘말 못할 사정’을 털어놓으면서 들고 있던 북한 화보잡지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막내딸의 근황을 알리는 글과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의 처지를 이해한 국가안전기획부의 묵인 아래 일본을 통해 전달받은 것이라고 했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한숨을 길게 내쉬던 그녀는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죽기 전에 자식들의 모습을 보는 일이라고 했다. 순간 여사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그녀는 얼른 손에 든 담배 연기가 매워서 그렇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그녀는 하루 세 갑의 담배를 피우는 애연가였다. 1991년 북으로 간 자녀로부터 연락이 닿기 전까지만 해도 여사에게는 아들 이택균 (李澤均)과 며느리 강숙희 (姜淑姬)가 있었다. 그들은 1950년대부터 활약한 부부배우였다. 이택균은 원래 화가 지망생이었으나 1949년 안진상 감독의 <육탄 십이용사>의 단역인 성사 역으로 캐스팅되면서 영화계에 나왔다. 이후 < 낙동강 >(1952), < 최후의 유혹 >(1953), < 미망인 >(1955), < 교차로 >(1956) 등 주로 멜로드라마에서 주연 및 조연을 했고, < 처와 애인 >(1957) 때는 아내와 주연을 나눠 맡았다. 여사는 그들에 대해 묻자 뜻밖에도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 지 소식이 없다”고 냉정하게 말했다. 며느리에 대해서는 남 얘기하듯이 “1950년대 중반에 할리우드에서 왔다는 배우가 있었다.”고 전제하고 “ 윤인자 를 만났더니 그애는 택시를 타도 건방지게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하더군. 하루는 나일구다방(명동)에서 약속하고 이병일 감독하고 기다리는데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났어요. 하도 고까와서 ‘선배 앞에서 웬 검은 안경이냐’고 야단을 쳤지. 그때는 택균이와 연애하는 줄도 몰랐거든.” 이렇게 들려주었다. 그의 직선적인 성품이 잘 드러난 자리였다. 두 번의 혼인과 남북으로 갈린 혈육 1907년 12월 3일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석금성 의 본명은 정의(丁義)였다. 일찍이 서울의 진명여학교를 다니다가 극단 토월회와 인연이 닿으면서 1925년 연극계에 투신했다. 이 무렵 충청도 갑부 이충직과 결혼, 1926년 장남 이택균 (李澤畇)을 얻게 된다. 그러나 3년 만에 남편과 헤어지고 1929년 김영환 감독의 < 약혼 >으로 영화에 첫발을 디디게 된다. 잇따라 김상진 감독의 < 종소리 >(1929)에 출연했으나 기대만큼 빛을 보지 못했다. 그 뒤 프로문학운동에 가담한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崔承一)과 가정을 이루고 슬하에 2남2녀를 둔다. 그녀는 연극 무대에 서다가 잊을 만하면 영화에 얼굴을 내미는 식으로 1930년대와 40년대에 걸쳐 <심청>(안석영, 1937)의 단역 장승상 부인과 내선일체를 강조한 친일 어용영화 < 너와 나 >( 허영 , 1941)에 주인공 나카다 겐지로(永田絃次郞, 한국명 김영길)의 어머니역을 맡는다. 이때 처음 창씨 개명한 이름 가야마 사다코(桂山貞子)를 사용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를 보낸 마감한 석금성 은 광복 후 < 마음의 고향 >(1949)을 비롯해 < 춘향전 >(1955), < 장화홍련전 >(1956), < 그 여자의 일생 >(1957), < 마도의 향불 > < 자유결혼 >(1958), < 청춘극장 >(1959), < 장희빈 >(1961), < 성난 코스모스 >(1963), < 치마바위 >(1964) 등 150여 편을 통해 퇴기나 악독한 계모, 독부, 작부, 주모 등 주로 성격이 강한 캐릭터를 소화해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더욱이 < 화촉신방 >(1966) 이후 스크린과 멀어진 상태에서 거의 16년 만인 76세의 나이에 정진우 감독의 <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1982)로 컴백, 흑산도의 악덕 주모역할을 맡아 제3회 영화평론가협회상 특별상을 받는 관록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뒤 8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분례기>(1992, SBS), <친애하는 기타 여러분>(1993, SBS) 등 TV 드라마에 출연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신극의 모태인 토월회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말년에도 늘 짙은 마스카라, 매니큐어와 루즈가 선명한 화장을 즐겼던 석금성 여사는 화려했던 한때의 각광을 추억으로 간직한 채 아흔 살을 눈앞에 둔 1995년 9월 3일 오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 홀로’ 남영동 여관과 광명시에서 홀로 어렵게 살다가 눈이 펑펑 내리는 산골 간이역 대합실에서 교도소에 간 아들을 기다리는 자신의 출연 TV드라마 <사평역(沙平驛)>(1981)의 노모처럼 북에 있는 혈육을 보지 못한 채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사전정보 없이 읽고 있는 시나리오가 언제 쓰였는지 알아내려면 무엇을 체크해야 할까? 여러 가지가 있는데, 내 경우는 욕설을 먼저 보는 편이다. 많이들 무시하는데 욕은 수명이 굉장히 짧다. 그 때문에 요새 욕설을 7, 80년대 배경의 영화에서 쓰면 정말 이상해져 버리는데, 사람들이 그걸 모르는 것 같다. 하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영화 속에 나오는 욕설들은 어느 정도 검열된 버전이었으니 아주 좋은 지표는 아니다. 다른 지표로는 에티켓을 들 수 있다. 특히 서비스업 종사자에게 대한 기초적인 예의. 60년대 영화를 보면 ‘멋진 남자주인공’들이 이런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다짜고짜 반말을 해서 (“야, 거기 보이!” “이리 와, 기사!”) 요새 관객들에게 재수 없게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당시엔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당연하다고 해서 그 때 옳은 일이었던 건 아니다. 당연하다며 옳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뿐. < 공포의 여덟 시간 >에서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던 것도 택시에 올라탄 악당들이 택시 운전사에게 던지는 반말이었다. (“이봐, 좀 더 빨리 달릴 순 없나?” “라듸오나 틀어.”)이 장면은 이들이 무례한 악당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대놓고 악당처럼 굴고 있는 건 아니고 택시 운전사도 별 반응이 없으니 손님이라고 반말을 찍찍해도 그게 큰 문제가 안 되었던 시절의 작품이다. 다른 단서들도 있다. 이 영화의 경찰들은 종로 보석상을 턴 강도들이 이미 시내를 벗어났고 부평, 인천 방면이 가장 위험하다고 말한다. 지리상 당연히 언급되어야 할 부천이 쏙 빠져 있는데, 그건 이 영화가 부천이라는 도시가 존재하기 전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강도들이 턴 보석류가 시가 이억 환 상당이라니 화폐개혁 이전이기도 하다. 답을 말하면 김묵 이 감독하고 김효천 이 각본을 쓰고 유한철 과 곽일로 가 윤색한 < 공포의 여덟 시간 >는 1962년 작품이다. 화폐개혁 힌트 때문에 몇 년 앞으로 잡은 독자들도 있을 텐데, 그렇다고 크게 틀렸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 공포의 여덟 시간 >(1962), < 키 라르고 >(1948) 영화의 내용은 낡은 호텔에서 예비역 소령과 마피아 일당이 대치했던 < 키 라르고 Key Largo >(존 휴스턴, 1948)와 설정이 비슷하다. 한 무리의 강도가 경찰에 쫓기다 산장호텔에 몸을 숨긴다. 그냥 조용히 숨었으면 별일이 없었을 텐데, 뒤늦게 온 두 명이 산장까지 올 때 차를 세워두고 ‘LOVE에 취해있는’ 두 커플을 권총으로 위협해 인질로 삼아 끌고 오는 바람에 그들의 정체가 산장 내에서 탄로가 나고 만다. ‘LOVE에 취해 있는’. 다시 한 번 읊게 된다. 60년대 대한민국 청춘에게 사랑이란 대문자 영어로 쓸 수밖에 없는 외제 사치품이었던가. 자, 이제 강도들은 산장호텔의 주인 가족과 손님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 < 키 라르고 >에서처럼 허리케인이 불어닥친 것도 아닌데 쓸데없는 짐을 만든 것이다. 여기서부터 작가들을 믿을 수가 없게 된다. 이들이 반드시 인질들을 접선장소까지 끌고 가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경찰은 아직 그들의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 그냥 택시를 잡아도 된다. 택시를 잡기 어렵다면 전화로 연락을 해도 되고. 하여간 수많은 자잘한 해결방법이 있는데, 이들은 굳이 데려온 인질로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호텔 사람 전체를 상대로 하는 바보짓을 한다. 일은 점점 커진다. 손님 중 한 명은 알고 보니 밀수업자다. 나중에 손님이 또 두 명 오는데 그 손님은 밀수업자와 약속이 있다. 회사원이라면서 죽어도 신분증을 내놓지 않으려는 손님이 하나 더 있는데 (당시는 주민등록증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던 때였다는 걸 잊지 말자) 그는 나중에 밀수업자를 미행하던 형사임이 밝혀진다. 여기에 임시 검문을 나온 또 다른 형사가 들어왔다가 잡힌다. 그러는 동안 강도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고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형사는 손님들에게 힘을 모아 강도와 맞서자고 선동한다. 하지만 밀수업자인 손님들은 또 자기만의 생각이 있다. 물론 이런 상황 속에서 악당들이 호텔 안 여자들을 가만둘 리가 없다. 그리고 강도 중 한 명인 백곰이 인질로 끌려 온 숙희에게 추근거릴 때 지문은 이 장면을 이렇게 찍는다. “KISS 하려 한다.” 하긴 사랑도 LOVE였으니 키스도 마찬가지로 수입품이었겠지. 강도( 황해 , 박노식 , 구봉서 ) 이 정도면 심심하지는 않겠다. 그리고 강도를 연기한 황해 , 박노식 , 구봉서 의 연기가 궁금하다. 암만 봐도 이 영화는 무게 중심이 강도 쪽에 쏠려 있는 작품이며 가장 좋았을 부분도 강도들의 내분을 그릴 때이다. 하지만 이 부지런함이 영화적 재미로 이어졌을지는 알 수 없다. < 키 라르고 >에서는 험프리 보가트와 에드워드 G. 로빈슨의 대결로 드라마가 압축되었다. 하지만 < 공포의 여덟 시간 >에서 등장인물들은 브라운 운동을 하는 공기 입자처럼 사방으로 마구 튄다. 착한 편에 험프리 보가트가 맡았을 법한 카리스마 있는 캐릭터가 없는 건 실수다. 밀수업자를 쫓던 형사 종국은 기능적인 역할 이외 어떤 개성도 없고 액션도 기계적인 반응에 불과하다. 하긴 당시엔 착한 편인 주인공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남자답고’ 정의의 편, 그러니까 사법부의 편이고 싸움을 잘하면 주인공 자격으로 충분했다. 결국 산장호텔의 전화선이 끊겨있다는 사실을 안 경찰들이 들이닥치고 강도들은 한 명씩 끔찍하게 죽는다. 이 살상의 대부분은 거의 사람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은 종국에게 책임이 있다. 나중에 그는 “희생자 없이 해결을 못 한 나 자신을 괴롭게 생각합니다”라고 하지만 난 안 믿는다. 더 믿을 수 없는 것은 보석을 짊어지고 산장호텔로 들어와 난리를 친 악당들의 동기이다. 언제나 최악의 길만 일부러 가는 것 같은 자칭 강도들의 행동을 보면, 그들이 요란한 자폭을 계획한 자살 클럽의 멤버라는 게 거의 확실해지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