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난 용감해질거야
- 감독
- 장건재, 임철민, 김성철, 이종필, 기채생, 채기, 신수원, 최아름, 정지연, 김종찬, 박종빈, 박재평, 이진우, 신이수, 김민경, 장훈
- 제작년도
- 2010
- 출연
- 이민지
젊은 시인은 오늘따라 일이 많다. 아침엔 도장을 하나 새로 팠다. 직거래로 카메라도 처분했다. 오후엔 누나를 만나서 방 키를 받았고 출판사에 가서 계약서도 썼다. 이 모든 일들을 성실히 처리하는 동안, 어쩐 일인지 시인 얼굴이 어둡다. 술 한잔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시인은 시가 담긴 수첩을 잃어버렸음을 알게 된다. 최아름 , 신이수 의 < 이름들 >은 잃어버린 수첩에 담긴 ‘소음들’에 대한 영화다. 영화 내내 낮은 소음들이 맴돈다. 자동차의 소음,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웅성대는 목소리들이 시인을 따라다닌다. 그 소음들은 시인의 수첩 안에 모두 기록되어 시가 되었다. 한편 <이름들>은 ‘반사''''의 이미지로 만들어진 영화이기도 하다. 많은 장면에서 영화는 유리창에 반사된 주변 환경들을 보여준다. 반사된 이미지들은 유리창 안의 시인과 겹쳐서 마치 시인 안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를 이렇게 정리할 수도 있겠다. 시인이 서울을 배회하면서 만나는 ‘소음’과 ‘반사’의 주변 환경들이 시인의 몸을 통과해 배출되는 ‘시’에 대한 이야기라고. 문제는 그 시가 담긴 수첩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에 있다. 수첩은 어디로 갔을까? 누나에게서 받은 키가 열쇠 구멍에 들어가지 않자 시인은 옥탑방 난간에 기대어 생각에 잠긴다. 시인은 하루의 일과를 하나씩 떠올려 보면서 수첩이 어디 있는지 헤아려 본다. 영화 내내 시인을 맴돌았던 소음이 그 순간 천천히 사그라든다. 잠시 우리는 침묵 속에서 시인의 민얼굴을 본다. 그는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다. 화면이 전환되고 한 남자의 시 낭송이 울려 퍼진다. 이 남자의 낭송이 끝나고 나면 한 여자의 낭송이 이어진다. 놀랍게도 이들은 모두 시인의 수첩을 읽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 이 영화의 마술 같은 힘이 있다. 분명 잃어버린 수첩은 하나였을 텐데, 습득한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이 스스로 복제되어 무한 증식이라도 하는 걸까. 수첩을 가져간 첫 번째 사람은 직거래로 카메라를 사 갔던 남자다. 그는 영화의 첫 장면에 시 속의 이미지처럼 등장했다가 영화의 중반에 다시 등장했었다. 두 번째로 수첩을 습득한 사람은 시인의 친누나다. 누나는 동생과 사이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아마도 수첩 속의 시를 통해 동생의 마음 안으로 처음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 제시되지는 않지만 출판사 여직원 하나도 시인의 수첩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시인의 새로운 이름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다. 이런 방식으로 시인은 오늘 스쳐 지나간 사람들에게 시를 돌려주었다. 수첩은 사라졌지만 시가 그 자리에 남았다. (전략) 누나, 나는 언제나 누나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어 엄마 아빠가 늙어가는 것 언젠가 우리가 들어가야 할 텅 빈 집과 그때 우리가 울지 않고 해야만 하는 일들에 대해서 누나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누나가 우는 이유 내가 했던 잘못들에 대해서 하지만 나는 성의도 없는 거짓말로 내 먹을 밥과 태어나지도 않은 강아지들의 이름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잖아 누나는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지나야 할 시간이 아직 많다는 게 언제나 무섭다고 누나에게 말하고 싶었어 누나, 나는 무서워 내가 본 최아름 , 신이수 의 < 이름들 >은 시를 통과시키기에는 너무 버거운 세상을 통과하는 시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고통을 받고 찢어지면서도 시인들은 여전히 시를 쓰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젊은 시인에게는 지나야 할 시간이 아직 많다. 그는 이 시간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단편영화 < 송한나 >를 얼마 전에야 보았다. 진작부터 보고 싶었던 영화인데 그동안 기회가 닿지 않았다. 내용은 이렇다. 송한나는 가난한 연인들에게 돈을 받고 자기 옥탑방을 빌려주고 정작 자기는 다른 건물 옥상에서 텐트를 치고 잔다. 그런 송한나를 따라다니는 남자애는 송한나가 걱정되어 밤새 텐트 앞에서 왈츠를 춘다. 송한나는 얼마 전 어떤 애를 좋아하게 되었다. 향기만으로도 그를 알아챌 수 있지만 마주치면 부끄럽다. 송한나는 그의 사물함에 엉뚱한 사진들을 몰래 넣어놓곤 하지만, 그 애가 다른 애와 자기 방을 빌리려 하자 절망한다. 영화가 담고 있는 송한나의 사랑이 첫사랑인지 아니면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사랑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송한나는 서로 함께 좋아하는 사랑은 아직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고,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게 된 그 애의 향기에 무척 설레고 그 애와 마주치는 눈길이 부끄럽고 그 애가 다른 애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깊이 절망한다. 송한나의 곁에는 송한나를 걱정하고, 송한나를 절망하게 한 자를 소심하게 응징하고 송한나를 위해 몸을 숙여 발판이 되어 주는 애가 있다. 그는 송한나가 나오는 많은 장면에 함께 등장하여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 같지만, 나는 이 인물도 송한나를 완성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송한나가 바라보는 사랑과 송한나를 향한 사랑. 송한나가 좋아하는 애와 송한나를 좋아하는 애.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영화 < 송한나 >에서 이름을 가진 인물은 송한나 뿐이다. 결국 이 영화는 송한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성인인지 청소년인지 모호하게 묘사된 송한나의 서툰 사랑들. 서툰 사랑이 끝나면 아마도 이것이 이대로 잊혀져버리는 건 아닌지, 조금은 떨리는 모양이다. 영화 마지막 “송.한.나” 삼행시는 그래서 더 애틋하다. < 송한나 >는 < 개를 키워 봐서 알아요 >(2009)와 < 애드벌룬 >(2011) 등을 연출한 이우정 감독의 2008년 작품인데, 그 이전까지 여러 독립영화에 스태프로 함께하고 몇몇 영화에는 출연하기도 했던 ‘이우정’이라는 사람을 재능있는 ‘감독’으로 인식시킨 어쩌면 첫 번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우정 감독은 윤성호 감독의 여러 작품들을 비롯해 < 나를 떠나지 말아요 >(2006, 신이수) , < 경주여행 >(2010, 김지현 ) 등의 영화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배우이기도 하다. 독립영화전용관 인디플러스와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가 함께 기획한 “감독과 배우 사이: 독립영화 감독-배우 열전”에서 <송한나>와 <경주여행>이 상영될 예정이어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이 기획전은 10월 18일부터 21일까지 인디플러스에서, 11월 1일부터 4일까지는 영상자료원에서 열린다.
영화 < 나를 떠나지 말아요 >의 줄거리. ‘ 윤주 와 형근 은 동거하는 연인이다. 형근이는 옛날 여자 친구 우정 이를 만난다. 둘은 시시하게 헤어졌다. 둘은 다시 시시하게 헤어진다. 윤주는 이상한 남자랑 영화를 본다. 둘은 술도 마시고 잠도 잔다. 윤주와 형근은 서로의 공간에서 예감을 갖게 된다. 둘은 헤어진다.’ 이 영화의 내용은 몇 줄 안 되는 저 시놉시스와 꼭 같다. 이게 전부다. 사람마다 ‘위로’받는 무엇을 가지고 있을 텐데, 그 ‘위로 목록’에 들어찬 것도 제각각일 테다. 음악이거나 영화거나 사람이거나 혹은 또 다른 어떤 것들이거나. 남에겐 특별할거 없어 보이는 것이 “네게는 무엇 때문에 위로를 주느냐” 물으면, 딱히 할 말이 없다. (내게 필요한 위로를 ‘너’ 대신 다른 것이 주는데, 그 위로의 형태에 대해 설명하라면, ‘너’가 가진 언어로 ‘나‘의 부족에 대해 설명하라는 것인데. 진이 빠지는 일이다.) 좋은 영화, 훌륭한 영화들이 많다. 최근에 주목할 만한 영화들도 많다. 하지만 굳이 2006년에 만들어진 오래된 영화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영화가 성취한 보편적 칭찬보다 내 개인에게 위로를 줬던 영화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던 영화가 좋아 영화 영역에서 일을 하고 이들에겐, ‘영화=일’ 그야말로 영화가 일이 되어버리는 역전상태가 오곤 한다. 그러다 가끔 ‘난 어떤 영화를 좋아하지, 어떤 영화로 위안을 받았지’라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 나를 떠나지 말아요 >가 떠올랐다. 오래전 이 영화에 대해 어딘가 글을 쓸 때, ‘연애 이야기이며, 기억에 관한 이야기’라고 썼다. 당시에도 이 영화로 인해 받은 위로는 충만한데 그 위로를 표현할 언어가 짧아 애를 먹었다. 이는 지금도 같은데, 이유를 생각해 보니 이 영화를 일로 분석하려들지 않고 관객으로서 받은 위로에 대해 설명하려 하니 답이 없는 것이다. < 나를 떠나지 말아요 >의 영화적 미덕에 대해 칭송하자면 못할 것 없다. <나를 떠나지 말아요>를 영화적으로 분석하고 흠을 찾자면 못 찾을리 없다. 하지만 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어떤 영화들은 누군가에게는 흠이 될 부족함을 누군가에게는 위로를 줄 무엇으로 대체해 버리곤 한다. 2012년 다시 본 < 나를 떠나지 말아요 >는 2006년 당시 나에게 줬던 위로와 다를 수 있겠다. 하지만 영화 속, 순간의 대사들은 지금도 유효하다. 논리적이지도 않고 기승전결에 따라가지도 않는, 무의미해 보이는 대사들에 개인적으로 고단한 마음까지 싣게 한다. 무의미한 대사에 무의미한 대사로 응대하는 배우들의 말들로 위로를 받는다. 가끔은 말없이 이해 받고, 말없이 공감 되었으면 할 때가 있다. 아마도 이 영화를 다시 생각한 것은 누군가에게 저러한 공감을 얻고 싶어서인지 모르겠다. 감독 또한 자신의 영화를 꺼내 놓을 때 영화에 대한 분석도 바라겠지만 진심 가득한 ‘참 좋네요’ 한마디에 기운이 나기도 할테니까. 당시 신이수 감독이 < 나를 떠나지 말아요 >를 통해 말하던 무언가가 지금도 유효한지는 모르겠으나, 2006년 당시 영화를 보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은지 모르겠으나 <나를 떠나지 말아요>는 그대로 있어서 반갑다. <나를 떠나지 말아요>에 출연한 이우정, 류형근 배우들은 현재 독립영화진영의 중요한 배우, 감독으로 함께하고 있어 즐겁다. 더불어 치열하게 고민하고 악전고투 하면서도 유머와 감수성을 잃지 않는 신이수감독의 영화들도 기다려진다. 이번 초이스, < 나를 떠나지 말아요 >를 통해 누군가가 위안을 받게 된다면 기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