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담 (아바타와 비담이 만났을때)
- 제작년도
- 2010
사진: “ 부천에서 우주 속을 걷다 뉴미디어 끝판왕 프로그램 ‘비욘드 리얼리티 ’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아바타를 제외한 3D가 산업과 영화에서 사라진 것처럼, 새로운 영상의 미래처럼 울려 퍼지던 VR의 장밋빛 미래가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앞다퉈 VR 영화를 내세우던 영화제들은 AI가 등장하자, 이제는 AI가 영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바꿀 것처럼 쉽게 갈아탔다. VR 영화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VR이 갖고 있는 잠재성과 미학을 아직 우리는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VR 360° 영상은 구면 전체(수평 360°, 수직 180°)를 제공하지만, HMD는 사용자가 고개를 돌리는 방향을 중심으로 장치에 따라 약 110°(수평) × 90°(수직) 안팎의 제한된 영역만 보여준다. 따라서 관객이 정면을 중심으로 머무를 때, 실제로 한 순간에 지각하는 영역은 구면 전체가 아니라 정면을 중심으로 한 제한된 시야다. 관객들은 VR 영화에서 360° 시야를 다 관람할까? YouTube VR 시청 분석에 따르면 사람들은 360° 영상에서 재생 시간의 75%를 정면 90° 안에서 보낸다고 한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정적인 360° 장면을 처음 접했을 때 관객들이 넓은 영역을 탐색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특정 영역으로 시선이 수렴하는 현상이 관찰되기도 했다. 360° 영상이 제공하는 시야와 관객이 실제로 사용하는 지각적 영역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360°의 공간 전체가 주어졌다고 해서 관객이 그 전체를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VR 영화 시청 시 관객은 주로 정면 영역의 요소에 집중하고, 고개를 크게 돌려야 하는 뒤쪽 영역은 덜 찾아본다. 관객이 몸을 움직여 돌아볼 때도 화면 안의 사건이나 서사가 제공하는 중심적 단서를 따라가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일부 VR 영화 제작 현장 가이드에서는 관객의 주의가 정면 중심 90° 원뿔 안에 집중되므로, 서사적 이미지는 정면 중심 90°~120°에 집중되도록 설계해야 한다고 안내한다. 360° 공간 전체를 활용하려면, 감독이 관객의 360° 시선의 이동을 설계하고 유도해야 한다. 지금까지 VR 영화 연출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관객의 시선을 특정 방향 중심으로 고정하거나 감독이 의도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데 집중해왔다. VR 영화 < 동두천 >(김진아, 2017)의 도입부, 동두천 역 앞에 배치된 360° 카메라가 롱테이크로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적하고 활기가 없어 보이는 거리, 역 앞이지만 오고 가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미군처럼 보이는 누군가가 역 앞을 지나간다. 프레임 안에 무엇을 따라가야 할지 모르겠다. 커다란 변화가 없는 화면이 계속된다. 관객의 시선을 유도하는 서사도, 명징한 피사체도 없는 화면이 지속된다. 이 지루한 화면이 VR이란 매체의 선입견과 만나면서 관객은 체험을 스스로 찾기 시작한다. 앞을 주시하던 머리와 시선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래도 자극적이거나 시선을 끄는 장면이 없다. 이제는 몸도 움직인다. 회전의자에 앉은 몸이 무언가를 찾아 돌기 시작한다. 머리와 몸이 움직이고 이 시간의 지속을 함께하다 보면 화면 안 낮은 해상도를 넘어 아주 사소하고 작은 움직임과 변화들이 나타난다. 바람이 부는 것 같다. 먼지가 날리고 비닐봉지가 바람에 날린다. 평소에 관심도 갖지 않은 비닐봉지가 화면 안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보인다. 이 비닐봉지는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관객의 머리와 몸이 360° 화면 안에서 그 위치를 향하고 있지 않다면 만날 수 없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화면 안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지만, 관객의 신체가 그 방향을 향하지 않는 순간에는 현재의 지각적 이미지가 되지 않는다. 또 다른 컷에서는 어딘가 강아지가 들어온다. 내 몸이 놓인 위치에 따라 우연히 등장하는 이 강아지를 처음부터 목격할 수 있고, 내 몸이 다른 위치에서 시작되었다면 강아지가 프레임 인 될 수도 있다. 화면 안 피사체의 등장과 퇴장도 우연이지만, 그 피사체가 화면 안에 등장하는 시간도 나의 신체와 만나면서 우연적으로 구성된다. 이때 발생하는 이미지는 화면 안의 피사체와 헤드셋을 쓰고 멈춰 선 나의 신체가 만나 발생시키는 몽타주다. 아주 사소한 화면 안의 변화들을 따르거나 변화를 발견하지 못해도, 컷 안의 물리적 시간을 따라가다 보면 헤드셋을 쓴 머리와 몸이 회전한다. 머리와 몸이 작은 움직임을 찾아 따라 움직이다 다음 컷으로 전환된다. VR 360°의 특성상, 관객의 머리와 몸이 자신이 향하고 있던 방향에서 다음 컷의 첫 장면을 만난다. 두 번째 컷도 360°의 화면을 담고 있지만, 컷이 이어지는 순간 관객이 현재 향하고 있는 방향을 중심으로 한 제한된 시야에서 시작된다. 이때 만들어진 두 컷 사이의 몽타주는 전통적인 2D 영화에서처럼 하나의 공간적 관계로 완전히 결정된, 감독이 계산한 몽타주가 아니다. 감독이 결정하는 것은 두 쇼트의 시간적 순서와 절단의 순간이지만, 그 절단이 일어나는 순간 관객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는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다. 사진: “ BIFAN의 순간들 Ⅶ : 비욘드 리얼리티 Beyond Reality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시간적 절단은 감독의 것이지만, 공간적 접합은 관객의 몸에 의해 발생한다. 관객은 변화를 좇거나 멈춘 자리에서 다음 컷의 첫 이미지를 만난다. 이렇게 이어진 두 컷의 몽타주는 편집실에서 하나의 관계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관객의 몸이 찾고 머문 신체의 흔적을 통해 그때마다 다르게 발생한다. 관객의 몸이 변화를 찾다가 만난 이미지와 다음 이미지의 관계가 하나의 몽타주를 만든다. 화면 안의 체험을 따라 몸이 움직이고 몸의 반응에서 다음 컷을 만난다. 첫 번째 컷과 두 번째 컷의 연결로 발생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세 번째 컷에도 같은 관객의 신체가 만드는 몽타주가 발생한다. 이러한 몽타주가 축적되면서, 하나의 작품 안에서도 관객마다 서로 다른 이미지의 연쇄가 만들어진다. 한 명의 관객이 동일한 작품을 여러 번 봐도, 서로 다른 관객들이 같은 작품을 봐도 그때마다 동일한 상영 안에서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이미지의 관계가 계속해서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이 VR 영화가 만날 수 있는 체험이 아닐까. 감독 개인의 생각과 의도로 배치되고 읽혀야 할 영화에서 감독은 시간에 대한 선택과 공간에 대한 카메라의 배치를 결정하고, 관객은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신체를 움직이며 자신이 만나는 이미지를 구성한다. 이때 관객은 감독을 대신하여 영화를 창작하는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도 자신의 신체가 만나는 이미지를 바탕으로 매번 다른 영화를 발생시키며 관객이 또 다른 창작자가 되는 순간이다. 영화의 완성된 이미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관객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적 경험을 통해 매번 다른 이미지의 몽타주를 발생시키는 관객이 되는 것이다. 감독과 관객의 위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영화의 한 부분을 결정하는 권한이 감독에게서 관객의 신체로 이동하는 순간이 발생한다. 감독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관객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전통적인 영화의 관계와 달리, 관객 모두가 감독이 되는 순간을 맞이하는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 VR 영화일지 모른다. <동두천>의 도입부는 그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의 중반, 낮의 공간이 밤으로 바뀌고 한 여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컷들은 그 여인의 이동 경로를 따라 카메라가 서고 관객들은 어둠 속의 골목에서 어디론가 향하는 그녀만을 바라보게 만든다. 앞선 장면에서 관객의 몸이 스스로 공간을 탐색하고 이미지와 이미지를 연결했다면, 이 장면부터는 영화가 관객의 시선이 향해야 할 방향을 강하게 지정하기 시작한다. 또 다른 창작자로서 영화를 체험하고, 자신의 신체를 통해 영화의 공간적 관계에 참여하며 각자 다른 영화를 만나던 관객들의 시선은 그녀를 따라가게 만드는 감독의 개입으로 시선은 고정되고, 몸도 묶인다. 그리고 어느 방으로 안내된다. 방 안에 카메라는 오랫동안 머문다. 하지만 첫 컷이 준 이미지와 달리 이후의 장면은 보다 강력하게 시선을 유도한다. 영화가 처음에 스스로 열어놓았던 VR 영화의 잠재성이, 하나의 강력한 의미와 서사 안으로 다시 수렴한다. 어쩌면 아직 도래하지 않은 VR은 바로 그곳에 있을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360°의 공간이 아니라, 관객의 몸이 영화의 구성 안으로 들어오면서 비로소 발생하는 새로운 영화적 관계 속에. <열차의 도착> 중 / 사진: IMDb( 1 , 2 ) 뤼미에르 < 열차의 도착 >(루이 뤼미에르, 어거스트 뤼미에르, 1895)이 상영되었을 때, 당시 사람들은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오는 기차를 처음 경험했다. 그 강렬한 체험으로 시작된 영화는 기존의 지각을 바꾸고, 과거의 인습적인 사유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첫 영화의 등장은 객석이라는 고정된 공간에 관객의 신체를 묶어 놓은 채 일어난, 강제적이며 수동적인 지각과 사유의 변화였다. 반면 VR은 관객이 몸을 구속받지 않고 능동적 신체로 맞이할 수 있는 체험이다. VR 영화는 <열차의 도착> 이후 가장 큰 체험과 사유의 변화를 품고 있다. 영화가 등장하면서 우리는 한 지점에서 회화를 감상하는 시각이 아니라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촉각을 갖게 되었다. 그 지각의 변화는 인습적인 사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줬다. 감각이 바뀌면 지각이 바뀌고, 지각이 바뀌면 사유가 바뀌며, 행동과 삶이 바뀔 수 있다. 그것이 영화가 갖고 있는 사유의 능력이다. 들뢰즈는 세계가 이미지들의 체계이며, 영화는 그것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영화는 이미 도래했지만 우리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현실인지도 모른다. 들뢰즈는 영화가 인간적 지각을 넘어설 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지각을 만나고, 그 지각이 사유를 연다고 말한다. 그 출발점에 신체를 둔다. 『시네마 2(Cinéma II)』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내게 신체를 달라. 이것은 먼저 일상적 신체 위에 카메라를 걸쳐 놓는 것이다.” [1] 들뢰즈에게 신체는 화면 속 인물의 신체였다. VR 영화는 카메라를 관객의 신체 위에 얹는다. 헤드셋을 쓴 관객의 머리가 곧 카메라의 방향이 되고, 관객의 몸짓이 이미지와 이미지의 관계를 만든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매번 앞의 장면을 지우면서 현재의 장면을 만난다. 현재의 새로운 지각은 때로는 기억과 만나 내 안에 다른 이미지를 만든다. VR에서는 같은 영화를 봐도 관객마다 서로 다른 지각의 경로가 생긴다. 동일한 이미지의 공간 안에서 누군가는 왼쪽을 보고, 누군가는 뒤를 본다. 서로 다른 이미지들을 만나고, 서로 다른 영화를 경험한다. 각자의 신체를 통해 서로 다른 영화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관객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여러 지각들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며 도래한다. 들뢰즈에게 ‘민중’은 이미 존재하는 집단의 재현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집단으로 불러내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동일한 집단으로 수렴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집단이다. VR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은 새로운 매체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다. 관객의 몸이 영화의 구성 안으로 들어오면서 발생하는 새로운 영화적 관계 속에서, 우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지각의 집단, 아직 구성되지 않은 영화적 주체의 탄생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서로 다른 방향을 선택한 몸들이 하나의 시선으로 통합되지 않은 채, 같은 영화 안에 함께 있다. 어쩌면 이것이 도래하지 않은 민중의 도래일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신체가 서로 다른 지각의 관계를 만들면서 하나의 작품 안에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관객 모두가 창작자가 되어, 관객의 몸이 영화의 구성에 들어와 매번 다른 영화를 발생시키는 것. 어쩌면 VR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n명의 감독을 도래시키는 매체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영화를 통해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민중의 도래를 맞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 [1] 질 들뢰즈, 『시네마 2(시간-이미지)』, 이정하 옮김, 시각과언어, 2005, 378쪽. More Than 라이브 액션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박홍열(촬영감독·다큐멘터리 감독) l 홍상수 감독의 < 하하하 >(2010)에서 < 밤의 해변에서 혼자 >(2016)까지 10여 작품, < 원더랜드 >(김태용, 2024), <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박동훈, 2021), <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2016), < 간신 >(민규동, 2014) 등 100여 편이 넘는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현대미술 등의 촬영감독으로 활동. < 반칙왕 몽키 >(2026), < 음악만세 >(2026), < 풍경드리프팅 >(2024), < 나는 마을 방과후 교사입니다 >(2023), <이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1 , 2 ) 등 다큐멘터리 연출. 현재 《씨네21》에서 ‘박홍열의 촬영미학’ 기고 중.
사진: “ Back to the future ”, IMDb 영화제작에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게 이제는 드문 일이 아니지만, 영화계의 일자리를 뺏는다는 세간의 우려가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이 문제를 구석으로 밀어둔 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아직 영화를 대체할 정도는 아니나 장편 영화의 일부 장면과 후반 작업에서의 역할을 보면 앞으로의 쟁점은 결국 ‘어떻게 막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더 가까워 보인다. 디에이징과 특정 장면 생성만 보아도, 인공지능 기술은 이미 영화 안으로 들어와 있다. 우려와 기대, 그 양가적 감정.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글이 다소 흩어져 보일 수 있겠다. 쟁점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아서다. 지금 영화가 맞닥뜨린 인공지능의 문제는 그만큼 단선적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 몇 갈래로 나누어 보았다. 1. 우선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 1985년 < 빽 투 더 퓨처 >에서 기술적 상상력과 대중적 서사 감각을 겸비한 감독으로 이름을 알렸는데, 타임머신 자동차의 불타는 타이어 자국과 번쩍이는 빛으로 시간 여행을 표현한 그였다. 당시 SF영화에서는 시각효과가 강조됐고, 저메키스는 서사 안에 시각효과를 정교하게 배치하며 그 일선에 섰다. <빽 투 더 퓨처> 중 9년 뒤인 1994년, 이번에 그는 < 포레스트 검프 >에서 다른 방식으로 디지털 기술을 다루었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를 떠올려 보자. 구름 낀 하늘. 깃털 하나가 떠다닌다. 작고 하얀 깃털은 손가락 한 마디쯤 될 만큼 가늘고 여리다. 가장자리의 결은 반듯하지 않고 조금씩 흐트러져 있어, 바람을 만날 때마다 제 몸을 접는다. 공중에 떠 있을 때 그 깃털은 결코 수직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한 번은 기울고, 다시 맴돌고, 또 한 번은 제자리에 머무는 듯하다가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진다. 깃털이 누군가의 신발에 닿는다. 깃털을 집어 든 남자, 포레스트다. 가방에 넣은 뒤, 그는 옆자리 여성에게 무언가를 건네며 말한다. “초콜릿 드실래요?” <포레스트 검프> 중 (사진: “ Forrest Gump ”, IMDb / © 1994 Paramount Pictures) 약 2분가량 이어지는 이 롱테이크 장면에서는 컴퓨터 그래픽이 사용됐다. 디지털 합성과 페인트 작업은 깃털의 움직임을 하나의 연속된 흐름처럼 보이게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디지털 기술이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메키스는 포레스트의 삶을 감싸는 운명과 부유하는 시간의 감각을 시각적으로 암시하는 연출의 일부로 이 깃털을 배치했다. <빽 투 더 퓨처>에서 시각효과를 서사의 속도감 속에 밀어 넣었던 그가, <포레스트 검프>에서는 디지털 기술을 상징과 정서의 층위로 끌어올린 셈이다. 이제 최근의 이야기다. “3년 전만 해도 못 만들었죠” You couldn’t have made this movie three years ago. - The New York Times (2024), WIRED (2024) 재인용 2024년 저메키스가 < 히어 >를 선보이며 한 말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디지털 기술을 인물과 시간의 문제 한복판으로 밀어 넣었다. 톰 행크스와 로빈 라이트가 한 인물의 생애를 가로질러 직접 연기할 수 있도록 AI 디에이징이 활용된 것이다. <히어> 배우를 대상으로 한 AI 기반 디에이징 사용 전후 (사진: Brahma AI , © BRAHMA AI 2026) 영화에 사용된 기술은 Metaphysic Live라는 AI 기반 디에이징 시스템이다. 톰 행크스와 로빈 라이트의 기존 출연작 이미지를 바탕으로 머신러닝 모델을 학습시키고, 얼굴의 움직임과 피부 질감, 조명 조건을 분석해 필요한 연령대의 모습으로 실시간으로 변환했다. 배우들은 촬영 직후 모니터를 통해 자신의 달라진 얼굴을 확인하며 연기 방향을 조정했다. 저메키스는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TIME) 인터뷰에서 이를 “결국 디지털 분장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아바타를 만드는 게 아니라 인물의 시간을 타임머신처럼 통과하도록 돕는 기술이라고 선을 그으면서 말이다. 저메키스의 표현대로라면 이 영화는 3년 전만 해도 만들 수 없었다. 그 말은 곧 이 작품에서 인공지능이 선택지가 아니라 완성을 가능하게 한 조건이었다는 뜻이다. 흥미로운 점은 인공지능이 배우를 밀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우의 연기를 더 먼 시간까지 확장했다는 데 있다. 배우의 몸짓과 말투, 시선의 결을 더 긴 생애 위로 펼쳐 보이게 했다. 이때 인공지능은 대체의 기술이라기보다 표현의 반경을 넓히는 기술에 가깝다. 어디까지가 보조이고 어디부터가 대체인지는 여전히 더 따져야 할 문제지만 말이다. 2. 학생 A가 영화제작 수업 과제를 두고 했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친구가 인공지능으로 과제를 했는데 결과가 꽤 좋았대요”라며 효용성을 앞세웠다가, “주제와 장르만 프롬프트에 넣으면 인공지능이 영화를 뚝딱 만들어줬으면 좋겠지만, 아직은 인공지능이 영화를 완벽하게 만들어 주진 않는 거 같아요”라고 아쉬움을 토로하던 때였다. 새로운 기술이 가져오는 변화는 교육 현장에서 빠르게 감지된다. 거대 자본의 스튜디오보다, 오히려 영화를 막 배우기 시작한 학생들의 작업실에서 더 적나라한 모습이 드러난다. 학교의 실습 현장에서는 그것이 훨씬 직접적인 질문으로 나타난다. 어디부터가 도움이고, 어디까지가 의존인지. 인공지능 기술로 영상 생성은 쉬워졌는데, 왜 영화는 아직도 쉽게 완성되지 않는가. A의 말이 흥미로웠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인공지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겼다. 더 빠르게, 더 쉽게, 더 그럴듯하게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인공지능은 분명 매력적인 도구였다. 그러나 그 학생이 가장 먼저 부딪힌 것은 효용보다 한계였다. 영화는 장면 하나를 생성하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톤과 질감, 호흡과 리듬, 쇼트와 쇼트 사이의 연결이 맞아떨어져야 비로소 영화가 된다. 인공지능은 영상 이미지를 만들어 줄 순 있어도, 아직 영화 전체의 문법까지 대신 책임져 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 문제는 교육 현장에서 더 선명해진다. 학생들은 누구보다 먼저 기술을 받아들이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빨리 그 기술의 빈틈과 마주한다. 그 기대와 난점을 다음 대화에서 풀어본다. 필자 : 과제는 어떻게 되어가니? 학생 A: 찍은 장면들은 거의 정리됐어요. 그런데 중간에 달 장면을 넣고 싶어서 인공지능으로 만들어봤거든요. 달 표면에 혼자 서 있는 인물 컷이요. “SORA 2”가 생성한 이미지 학생 A : 그런데 편집하면서 붙여보니까 좀 이상했어요. 필자 : 뭐가 이상했어? 학생 A : 제가 직접 찍은 장면이랑 인공지능이 만든 장면이 질감부터 달라요. 인공지능 영상은 너무 매끈하고 깨끗한 느낌이에요. 카메라 움직임도 거의 없고, 있다고 해도 움직임이 너무 미끄러지듯 가요. 영상 이미지도 너무 사실적이라 제 영화 안에서는 좀 튀는 느낌이에요. “SORA 2”가 생성한 이미지 필자 : 장면 하나만 놓고 보면 괜찮은데, 영화 안에 들어오면 어색하다는 거구나. 학생 A : 맞아요. 그 장면만 따로 보면 멋있어요. 그런데 제 영화 안에 넣으면 혼자 다른 질감으로 떠 보여요. 색도 다르고, 어쨌든 느낌이 미묘하게 달라요. 차라리 전부를 인공지능 영상으로 만들면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필자 : 그럴 수 있지. 학생 A : 사실은 프롬프트만 잘 쓰면 해결될 줄 알았어요. 달나라 장면이 필요했으니까, 그 분위기만 비슷하게 뽑아주면 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제가 상상한 장면을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하고, 결과도 한 번에 안 나와서 여러 번 다시 생성해야 했어요. 필자 : 이 기술의 역설이지. 쉬워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사용자의 판단을 요구해. 예전에는 찍을 수 없는 장면이 문제였다면 지금은 만들어 놓고도 붙여보면 이상해지는 게 문제야. 더 섬세하게 써야 하는 거지. 학생 A : 그럼 아직은 인공지능을 쓰기 이른 걸까요? 필자 : 그렇게 볼 일은 아니고, 오히려 반대지. 이제는 쓸 수밖에 없어. 다만 질문을 달리 해야 해. 인공지능으로 만들 것이냐가 아니라, 네 영화의 문법 안으로 길들일 수 있느냐 로. 학생 A : 결국 인공지능이 다 해주는 게 아니라, 제가 더 많이 결정해야 한다는 말씀이네요. 필자 : 그렇지. 인공지능이 너의 상상력을 대신해 주는 건 아니야. 오히려 네 상상력이 얼마나 구체적인지를 시험하는 쪽에 가까워. 영화는 선택의 예술이야. 무엇을 보여줄지, 무엇을 감출지, 어디서 컷을 나눌지, 어떤 리듬으로 밀고 갈지, 그런 판단은 아직도 우리의 몫이지. 학생 A : 보조 도구군요. 필자: 적어도 지금은 그래. 인공지능이 재료를 줄 수는 있어도, 그 재료를 어떤 의미로 묶을지는 네가 결정해야 해. 영화 전체를 끌고 가는 건 여전히 연출자의 판단이고, 인공지능은 그 판단을 대신하는 존재라기보다 보조하는 도구에 가까우니까. 3. 여기서, 질문이다. ‘인공지능의 파고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하나?’ 영화의 표현 범위를 넓혀주는 도구가 인공지능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다만 모든 도구가 그렇듯, 그것이 누구의 손에 쥐어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일부 영화인이 인공지능을 경계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기술은 빠른 속도로 노동의 자리를 흔들고, 창작의 책임을 흐리며, 인간의 얼굴과 목소리까지 손쉽게 재가공할 수 있게 만들었다. 2023년 미국 작가조합(WGA)과 배우노조(SAG-AFTRA)가 인공지능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 것도 그래서였다. 작가들은 인공지능이 대본을 쓰고 고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자리를 잠식할 것을 우려했고, 배우들은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 움직임이 동의와 보상 없이 복제될 수 있다고 반발했다. 편리한 기술은 늘 반갑게 도착한다. 그러나 그 편리함의 비용은 대개 가장 약한 자리부터 흔든다. 이 불안은 그래서 과장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적이다. 인공지능은 영화 안으로 거창한 방식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장면 하나, 목소리 하나, 배경 하나, 후반 작업 하나. 그렇게 작고 세세한 대체의 형태로 스며든다. 처음에는 보조 도구처럼 쓰인다. 그러나 반복되면 표준이 되고, 표준이 된 뒤에는 비용 절감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의 자리가 줄어든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밀려나는 것은 대개 이름이 잘 드러나지 않는 영화인이다. 그래서 이는 노동의 문제이고, 윤리의 문제이며, 결국 영화가 누구의 예술이어야 하는가를 묻는 문제다. 영화가 본래 집단 창작의 산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인공지능의 도입은 더욱 신중해야 한다. 끝내 붙들고 싶은 것은 ‘완성할 권리’다. 앞으로 인공지능의 역할이 더 커질 수는 있겠지만, 영화를 완성하는 일만큼은 끝내 우리의 몫이어야 한다. 영화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덜어낼지 선택하는 예술이다. 장면을 생성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영화로 승인하고, 서사 안에 배치하고, 의미와 감정을 완성하는 일은 우리의 판단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어디까지를 기술에 맡기고 어디서부터 인간의 감각으로 되돌릴지 결정하는 권한 역시 우리에게 남아 있어야 한다. 영화에서 인공지능 활용의 핵심은 효용성이 아니라 통제다. 동의 없는 얼굴의 사용은 허용되어서는 안 되고, 노동의 축소에는 정당한 보상이 따라야 하며, 작품을 최종적으로 승인할 권한은 끝내 인간에게 남아 있어야 한다. 영화를 완성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존재 역시 결국 영화인이어야 한다. More Than 라이브 액션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이석창(강원대학교 교수, 영상제작자) l 강원대학교 영상문화학과 교수이자 영상제작자. 무엇보다 영화를 좋아한다.
사진: “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 ”, 부산국제영화제 올해 국내 극장에서 마주할 수 있었던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화들을 곱씹어 본다. 어떤 영화들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침탈이 꼬박 한 세기가 넘은 문제임을, 과거의 가자 지구를 (재)발견함으로 이야기한다(< 그 꽂은 조용히 서서 지켜본다 >, < 하산과 가자에서 >). 어떤 영화들은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제노사이드에 분노하고 자신이 감각하는 무기력함을 고스란히 담아내길 시도한다(<공존이라니, 웃기시네!>, < 힌드의 목소리 >, < 해피니스 >). 어떤 영화들은 학살이 벌어지며 폐허가 된 가자의 현재를 팔레스타인 바깥으로 전파하기 위해 노력한다(<끝나지 않는 밤>, < 노 어더 랜드 >, < 그라운드 제로로부터 >). 어떤 영화들은 팔레스타인 바깥에서 어떻게든 가자 지구로 카메라를 향하게, 그럼으로써 관객과 자신이 속한 사회 공동체의 시선을 움직이고자 한다(<언허드: 마사페르 야타를 지켜라>, < 팔레스타인을 위한 두 대의 카메라 >). 또 어떤 영화는 그럼에도 존재하는 가자에서의 삶과 생 자체를 기록하고 이곳 또한 사람이 살아가는 곳임을 천명한다(<가자에서 파쿠르>). < 슈퍼맨 >이나 < 주토피아 2 >와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묘사된 지정학적 분쟁이나 침략이 이스라엘의 제국주의나 나크바(النَّكْبَة)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등장했던 것도 이러한 영화관람의 연장선이랄까. 영화제나 소규모 상영회를 통해 올해 국내 상영된 영화가 더 있겠지만, 개인이 챙겨볼 수 있는 영화는 이 정도였다. 아참, 한 영화를 빼먹었다. 알렉스 바크리의 다큐멘터리 <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 >(2025)이다. 이 영화는 앞서 언급한 작품들과 다르게 현재 팔레스타인에서 진행되는 이스라엘의 제노사이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영화의 주인공은 영사기사 ‘후세인 다르비’, 서안지구 예닌(Jenin) 지역의 영화관 ‘시네마 예닌’에서 일했던 베테랑이다. 하지만 그는 실직자다. 1987년 1차 인티파다 이후 극장은 문을 닫았고, 장기간 방치된 공간은 폐허에 가까워졌다. 2008년, 독일의 영화감독 마르쿠스 베터(Marcus Vetter)는 이스라엘과 EU의 지원을 받은 일종의 문화적 회유정책인 ‘예닌 극장 재개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는 독일의 극장 기술자를 데려와 예닌 극장을 재건하고자 하고, 이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촬영해 <시네마 예닌>(2011) [1] 이라는 제목으로 공개했다.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의 감독 알렉스 바크리는 <시네마 예닌>에 촬영으로 참여했었으며, 프로젝트가 진행되던 2008~2010년 사이 후세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시네마 예닌> 중 예닌 극장의 모습 (사진: “ CINEMA JENIN ”, MUBI) 여러 맥락에서 시네마 예닌을 필름 극장으로 재개관한다는 프로젝트는 시대착오적이다.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은 그것을 숨기지 않는다. 다만 영화는 폐관하기 이전의 시네마 예닌에서 일을 배웠으며 43년의 영사기사 경력을 갖고 있는 후세인에게 주목한다. 이 영화의 제목에 극장이 아니라 후세인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베터의 <시네마 예닌>이 자신의 평화주의적 문화예술 프로젝트에 대한 기록이라면,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은 그것이 얼마나 탈정치적이며 시대착오적이고 평화적이지 않았는지를 드러낸다. 베터의 프로젝트에서 예닌이나 서안지구에서 일하고 있는 영화관 산업 관계자는 배제되어 있었다. 영사기사 후세인은 그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이 극장의 영사기사임을 주장한다. 극장의 재건은 서구와 이스라엘의 펀딩을 통해서만 가능한 프로젝트이지만, 그것의 존속은 결국 (역사, 정치, 문화 등이 뒤섞인) 해당 지역의 문제다. 베터의 프로젝트가 간과했지만 후세인은 알고 있던 사실, 그렇기에 후세인은 시네마 예닌에서 다시 일하기 위해 영화 내내 동분서주한다. 오래된 영사기의 컨디션을 테스트하고, 근처의 극장을 찾아 탄소봉과 렌즈를 빌려 오고, 영사기 설치에 필요한 부품을 구하기 위해 검문소를 넘어 텔아비브로 향하길 시도한다. 알렉스 바크리의 카메라는 ‘백인 구원자’ 서사에 자신을 투사하는 마르쿠스 베터와 그의 팀의 이면에서 구원받지 못한 한 인물을 담아낸다. 영화는 시네마 예닌의 재개관 행사에서, 마땅한 초대석은 물론 프로젝트 구성원으로 호명조차 되지 못한 채 구석에 서 있는 후세인의 모습을 담아낸다. 위험천만한 이동을 감행하면서도 고집을 꺾지 않던 후세인의 천진난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을 목격하던 관객들은 망연자실한 채 재개관 행사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을 다시 목격한다. 이때 우리는 후세인의 얼굴에서 다른 팔레스타인 민중의 얼굴을 발견한다. <그 꽃은 조용히 서서 지켜본다>에서 영국인 선교사들이 촬영한 필름에 담긴 100년 전의 팔레스타인 인민들, <하산과 가자에서>에 담긴 밤새 벌어진 이스라엘군의 총격 흔적을 보며 허탈한 웃음을 짓는 20년 전의 가자 지구 주민, 이스라엘 정착민의 공격에 시달리는 <노 어더 랜드> 속 사람들. 자신의 땅을, 생활을, 직업을, 삶을 강탈당한 사람들의 일관된 표정은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에도 담겨 있다. (상) 사진: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 좌 , 우 )”, 부산국제영화제 (하) 사진: “ 하산과 가자에서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좌) / “ 노 어더 랜드 ”, 부산국제영화제(우) 여기서 주목할 것은 프로젝트가 진행되던 기간이다. 2008~2010년은 극장 시스템에 있어 일종의 전환기다. 국내의 상황만 살펴보더라도, 와이드릴리즈로 디지털 배급을 시도한 2006년의 천만 영화 < 괴물 >과 3D 광풍을 불러온 2009년의 < 아바타 >를 거치며 디지털 상영이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디지털 시네마 이니셔티브(Digital Cinema Initiatives)가 디지털 영사의 표준 포맷인 DCP의 1.1 버전을 내놓은 것도 디지털로 촬영부터 배급 및 영사까지 이루어진 최초의 사례 [2] 로부터 대략 10년이 지난 시점인 2007년이었다. 그 이후의 변화는, 모두가 알다시피 영사기사라는 직종의 점진적인 소멸이다. 마르쿠스 베터의 재개관 프로젝트에는 이러한 고려가 결여되어있다. 그는 시네마 예닌을 35mm 필름 영사기를 사용하는 극장으로 재건하고자 했으며, 디지털 영사로의 이행기에서 이는 필연적인 실패로 이어진다. 실제로 시네마 예닌은 2010년 8월 재개관했지만 7년 뒤 다시금 폐관했다. 물론 여기에는 재개관과 운영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탈정치적 성격을 가졌다는 것, 그것이 프로그래밍은 물론 영화관 자체에 대한 평판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포함되지만 말이다. 독일에서 영사기를 공수해 시네마 예닌에 설치하고자 하는 마르쿠스 베터의 아이디어, 더불어 독일에서 넘어온 기술자가 영사기를 설치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동안 영사기의 구조를 파악하고 필요한 부품을 구하러 다니는 후세인의 모습은 필름에서 디지털로 이행하는 시기의 혼란을 그대로 가져온다. 마르쿠스와 그의 팀이 프로젝트에서 후세인의 노고와 그가 지켜온 영사의 유산에 알맞은 보수와 명예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사기사 후세인이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마르쿠스의 프로젝트가 보여주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무지와 평화주의를 내세우는 정치적 평탄화가 영화의 한 축을 이룬다면, 이러한 지점들은 영화의 기초적인 지지체로서 필름과 필름영사기, 그것들을 다루는 영사기사의 쇠락은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의 다른 한 축이 된다. 영사기사 후세인이라는 인물은 이러한 두 축이 결과적으로 만들어내는 것, 일종의 문화 제국주의와 필연적인 미디어 변화로 정당화되는 자본주의적 이행 사이에 껴있는 존재가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2017년 시네마 예닌이 재개관한 지 7년 만에 재폐관하고 건물이 철거된 현장에서의 인터뷰다. 후세인은 다시금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철거된 극장을 바라본다. 시네마 예닌의 철거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후세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자막이 등장하고 영화가 끝난다. “영화의 죽음”이라는 해묵은 테제를 다시금 떠올린다. 시네마 예닌은 이스라엘의 펀딩을 받은 독일 감독의 바람과 달리 팔레스타인 공동체를 위한 무언가로 작동하지 못했으며, 후세인은 끝없이 프로젝트의 외곽으로 밀려나 영사기사라는 직업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은 한 사람을 통해 애초에 달성될 수 없던 프로젝트의 죽음과 영화의 죽음, 나아가 그것이 긴밀하게 얽혀 있음을 드러낸다. 평화로운 공존이라는 환상, 역사와 유산에 대한 무지, 문화(culture)의 경작(cultivate)이라는 관점의 부재,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은 팔레스타인을 위한 NGO의 프로젝트는 물론 영화의 향유와 그것을 통한 문화의 형성 또한 서구적 관점에서 짜여 있음을 지적한다. 이 영화는 2017년에 마무리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2025년에야 공개되었다.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당시 알렉스 바크리 감독은 이 영화가 지금에서야 공개된 것이 순전히 ‘운’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2025년의 시점에서 시네마 예닌과 영사기사 후세인의 이야기를 목격하는 것은, 우리를 이전과 다른 맥락으로 인도한다. 팔레스타인과 관련된 영화를 보러 다니고, 그 영화들에 관해 짧은 평이라도 남기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상영 소식을 공유한 것은 영화평론가이자 (이제 막 석사를 마쳤을 뿐이지만) 상영 활동에 관한 논문을 쓴 연구자로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자는 자그마한 다짐에서 출발한 일이다. 이러한 다짐은 물론 영화사의 여러 작품을 종으로 횡으로 엮어내는 비평적 프로그래밍을 통해 팔레스타인에 관해 발언하고자 하는 필름 콜렉티브 로트링겐의 스크리닝 [3] 이나, 다양한 스크리닝과 이벤트를 통해 팔레스타인과의 연대를 확장하고자 하는 해방을 꿈꾸는 씨네클럽 [4] 의 활동에 비하면 작은 것일 테다. 정치철학자 배세진은 가자에 관해 쓴 짧은 팸플릿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국 우리가 이러한 연결된 세계의 연결된 위기 속에서, 다르게 말해 오늘날 지금 여기 우리가 놓여 있는 이 현실 즉 현행성 속에서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동료 시민을 위해 투쟁하고 사랑하며 연대한다면, 이는 오롯이 가자를 위한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5] 그 또한 같은 글에서 쓰고 있듯, 지난 1년 사이 벌어진 내란 국면에서 살아온 한 사람으로 가자 지구와 팔레스타인에서 자행되는 위기는 그것과 연결된 우리의 위기이며 (일정 부분) 의무이기도 하다. 다시 한번 배세진의 말을 빌리자면,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볼 것인가? 사진: “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 ”, 부산국제영화제 *** [1] 국내에선 2012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를 통해 공개되었다. [2] 1998년 북미 개봉한 <더 라스트 브로드캐스트>가 촬영, 편집, 배급, 영사 등이 모두 디지털로 이루어진 최초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3] 해당 스크리닝은 원고를 쓰고 있는 시점에선 아직 진행되지 않은 '새벽에서 황혼까지, 강에서 바다까지: 페터 네슬러, 아니크 르루아, 뤼디거 노이만, 장-마리 스트로브 & 다니엘 위예(2025. 12. 20.~12. 21. 진행)'이다. 자세한 정보는 로트링겐의 홈페이지 소개글( 링크 )을 참고. [4] 해방을 꿈꾸는 씨네클럽 인스타그램( 링크 )을 참고. [5] 배세진,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 금붕어, 레닌, 그리고 가자』, 출판공동체편않, 2025, 17~18쪽. 박동수(영화평론가) l 보고 듣고 읽고 쓰는 일을 반복하는 사람. 2021년 독립영화비평상 당선.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회원.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