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의 종말
- 감독
- 양도
- 출연
- 장영진, 유상경, 화윤
사진: 필자 제공 회생(回生) < 회생 >(2026)은 제목 그대로 회생(回生)에 관한 영화다. 거의 죽어가다가 다시 살아가고자 하는 그 지난한 과정이 얼핏 담겼다. 곡절을 겪는 메마른 인물들이 언젠가 흠씬 웃기도 하고 때로는 비난이 칭찬으로 바뀌기도 하며 무겁던 세속도 일순간 탈속으로 변하기도 한다. 언뜻 회생이란 것이 타자의 구원이라거나 은총을 매개하여 전제하는 사건처럼 보인다. 하지만 변화란 다만 자신의 고통만을 전제한다. 구제를 자처하거나 이에 도통하려는 타자의 개입은 별개의 문제이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주체는 나 자신 말고는 없다. 살아내는 것도 스스로 살아내는 것이고 스스로를 사지로 내모는 것도 나 자신이다. 그간 마셔보지 못했던 환희의 숨이 내 몸에 스며드는 순간에 선행되는 것은 다름 아닌 숨 끊길 듯 숱하게 비애를 몰아쉬었던 자신의 고통이다. 날마다 심폐소생을 받아야 할 만큼 저마다 꽉 막힌 삶을 살아가고 있으나 겨우 숨 붙들고 그런대로 곧잘 살아가는 이유, 변화의 가능성은 오로지 나 자신에게 있다. 고통은 변한다. 그리고 변화는 그 대가를 안다. 평상심을 얻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변화는 격정에 쫓기던 시절을 기억한다. 자칫 욕심내거나 성내게 되면 감당 못 할 채무를 떠안는다는 걸 기억한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비범한 나날을 좇으려는 어리석음으로 회생 불가의 지경에 이른다는 걸 잊지 않는다. 그리하여 변화는 괴로움에 급급하여 미처 눈여겨보지 못했던 삶의 구체적인 면면에, 평안에 이르기 위한 원리금을 꾸준히 상환하고자 한다. 고통과 격정으로부터 다시 빚 독촉을 받지 않기 위하여 변화는, 주고받음이 정확한 우리 삶에 실재하는 대차(貸借) 관계, 곧 업(業)에 따라 간신히 처신한다. 이러한 변제 행위는 기도가 된다.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 이문재의 시 「오래된 기도」 중 회생한 자가 있다면, 거의 죽어가던 끝에 원인 모를 힘이 생겨 갑자기 살아낸 것이 아닐 것이다. 위와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에 자신을 일일이 맡겨보려는 무의식과 더불어 일상을 껴안게 된 몸이 저절로 평안을 찾아갔을 터이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시기만 해도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걸 한 번 믿어보려 했기에 엉겁결에 회생이란 변화를 맞이한 것이 아닐까. 업(業) <회생>의 영어 제목은 카르마(Karma)다. 그래서 이 작품은 ‘행위’에 관한 영화다. 카르마란 불변의 법칙도 운명도 아니다. 나의 사소한 몸짓과 말씨, 스치는 한 생각으로도 빚어내는 행위들이 언젠가 자기 삶에 크고 작은 굴곡을 남긴다는 오래된 상식에 가깝다. 당장 갚지 못할 금전 채무이든, 오래도록 쌓인 마음의 빚이든 이러한 상식선에서 정확하게 나타나고 또한 사라진다. 문제는 무지(無知)다. 고통의 근원이다. 과도한 빚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파산에 이르기 전까지는 스스로 어떤 행위를 짓고 살아가는지 좀처럼 모르는 것이다. 스스로 사지로 걸어 들어가고 있으면서도 이를 모른 채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끝내 죽는다. 자신의 서슴없는 행위들이 자의에 의한 죽음에 일조하고 있다는 걸 모른다. 반면 알게 되면, 즉시 멈춘다. 빚에 대한 오해가 깊다. 빚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이는 아군을 향한 오인 사격과 같다. 빚은 다만 출현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너무나 모르고 살았기에 이를 넌지시 일러주고자 불현듯 찾아오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고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고 걷기만 해도 남 부럽지 않은 충만에 이를 수 있다는 삶의 신비를 부디 모르고 살지 말라며 삶으로부터 부득이 요청되는 것이다. 빚은 마치 제 할 일을 다한다는 듯 무지와 인위에 허덕이는 이들을 저마다 찾아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결국, 빚은 단지 삶의 불화와 갈등이 몸 밖으로 드러난 통증에 지나지 않는다. 과도한 빚을 진 자가 더 이상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순간, 그제야 그는 그동안 곪아 있던 속살을 마주한다. 돌연 조급해진 그에게 상처는 안중에도 없다. 애꿎게 자신과 타인을 꾸짖는다. 죄책감은 속살 깊이 파고들어 상처를 더욱 곪게 한다. 그러나 별안간 본모습을 드러낸 빚을 맞이할 수 있다면 기어이 치유의 겨를이 생겨난다. 오랫동안 차마 들여다볼 수조차 없었던 그 환부를 보살필,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때 빚은 짐이 아니다. 새살이 움트는 자리가 된다. 회생은 빚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둠은 다만 빛의 부재이다. 따로 어둠이라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무지는 앎이 비추는 곳에서만 걷히고 빚 또한 회복을 상실한 삶이 드러낸 양태에 불과하다. 불교식 표현을 빌리자면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곧 괴로움과 깨달음은 애초에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깊은 번뇌야말로 삶을 크게 돌이키는 인연이다. 회생이란 삶을 다시 배워가며 보듬어보는 일이다. 회생(懷生) 빚 몇천 몇억 탕감받기 위해 그저 회생절차를 이용하고자 법무사사무소에 구비서류만 툭 내던져놓고 가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살면서 이런 곳에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끝내 통곡을 두고 가시거나 지나온 삶의 회한에 이제는 말조차 잃은 듯 허공만 바라보다 가시는 분들이 있다. 이분들에게 드릴 수 있는 말이 과연 무얼까 고민이 짙었다. 어쩔 줄을 몰랐다. 차분히 말 듣는 것과 맡은 일 정확하게 처리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말이 있으려나 싶었다. 그런데 마주한 자의 비감을 견디질 못하고 몇 마디라도 건네야 할 것 같으면 사무원으로 일하는 나 역시 법무사인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라 말하곤 했다. 처음 보는 제 앞에서 어렵게 눈물을 보이셨지만 그래도 빚을 갚으며 살아내려는 당신의 모습이 되레 제게는 큰 위로가 된다며. 더는 말을 아끼고 속으로 되뇐다. 이곳에 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당신의 사망진단서와 폐쇄 가족관계등록부 몇 장으로 가족들이 대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당신 스스로 온 것이니까. 그래서 <회생>을 처음 기획하면서 언젠가 완성이 되면 고개 푹 숙이고 있는 분들에게 그저 군말 없이 이런 영화도 있으니 시간 되실 때 한번 보시라 말씀드리고 싶었다. 이 영화가 회생(懷生), 모든 살아 있는 무리, 곧 중생을 위한 영화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건 너무나 순진하고 어리석은 서원이었다는 것을 날마다 절감한다. 예컨대 1999년경 사망한 어머님 생전의 1989년 발생한 은행 채무를 2026년이 되어서도 상속받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 그러니까 채무가 발생한 1989년 이후 30여 년 동안 총 네 차례나 양도된 채권을 최근까지 보유한 대부회사가 2026년 들어 시효연장의 소를 제기했다는 사실을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된 사람에게 이 <회생>이라는 영화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인간 영혼의 불안을 잠재울 그 어떤 예술과 종교도 그 채무를 대신 없애주지는 못한다. 대물림을 막기 위해서는 시효연장 소장을 송달받은 날부터 14일 안에 추후보완항소를 제기해야 하고, 상속채무의 존재를 알게 된 날부터 3개월 안에 특별상속한정승인심판을 청구해야 한다. 결국 현실의 채무를 해결하는 것은 법률이다. 그렇다고 예술이 무력한 건 아닐 것이다. 영화 < 죽은 시인의 사회 >(피터 위어, 1989)에서 키팅 교수는 “법률과 의술, 사업과 기술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고귀한 일이지만, 시와 아름다움, 낭만과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라 말하지 않던가. 영화는 상속채무의 대물림을 막아낼 수는 없겠지만, 빚을 짊어진 한 인간을 이해하게 한다. 내면을 돌보는 일이야말로 삶의 목적이다. 금전 채무를 당장 탕감받는다고 해서 삶의 근원적인 병폐가 곧바로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회생과 파산사건에는 법률대리인을 둘 수 있을지언정, 법적 절차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알 길 없는 내면의 문제만큼은 그 어떤 대리인도 선임할 수 없고 그 어떤 절대자도 대신 살아 줄 수 없다. 삶이 요구하는 것은, 그저 자기 마음을 스스로 제때 돌보는 일이다. 마음이 문드러졌다면 그 또한 몸처럼 치유의 대상이 되며, 그 치유에도 적절한 시기와 나름의 절차가 있다. 오랫동안 몸집을 키운 상속채무를 떠안지 않기 위해서는 추후보완항소와 특별상속한정승인심판 청구를 정해진 기간 안에 해야 하듯, 마음이라는 세계에도 놓쳐서는 안 되는 시기가 있다. 적기를 놓쳐버리면 누군가는 끝내 돌이키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그때 그 마음은 이미 오래도록 무거운 짐에 짓눌려온 육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랜 세월 사무원으로 일하며 시를 써온 김기택 시인은 마음을 두고 이렇게 썼다. 마음이란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육체이다. 살처럼 꼬집거나 때리면 아프고 상처가 난다. 닭살도 돋고 주름살도 생기고 때도 낀다. 마음이란 육체이므로 음식과 물을 주지 않으면 굶어 죽는 것은 당연하다. 햇빛과 공기가 닿지 않으면 말라가는 것은 당연하다. 늙는 것도 병이 나는 것도 당연하다. 여느 육체와 마찬가지로 잘생긴 것과 못생긴 것이 있고 큰 것과 작은 것,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이 있다. 그러나 마음이란 성감대보다 민감하고 오감보다 예민한, 섬세한 그만큼 망가지기 쉬운, 육체이다. - 김기택 시집 『바늘구멍 속의 폭풍』(1994) 중 법무사사무소에는 상처 입은 마음이 찾아온다. 목을 매기 직전에 가까스로 어머니의 몸을 들어 올린 아들의 마음, 실종신고 끝에 차 안에 홀로 있던 아들을 겨우 찾아낸 아버지의 마음, 이자율 1000%가 넘는 불법 사채에 휘말린 자식 좀 도와달라며 울며 발만 구르는 어머니의 마음이 밀려온다. 그러한 마음에는 아직 새살이 돋을 겨를이 없다. 깊이 패인 상처는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한다. 흉터가 되기 전까지 붕대로 감겨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다큐멘터리가 함부로 담아서는 안 될 한 가지가 있다면,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다. 흉터가 되었거나, 적어도 회복의 기미가 보여야 지나온 흔적을 다른 이에게 어렵사리 꺼내 보일 수 있다. 다큐멘터리는 상처를 내맡긴 대상과 믿음을 나누는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 그렇기에 이 예술이 되려 상처를 헤집게 된다면, 법과 종교의 오래된 폐단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을 다만 작품의 소재로, 사건의 구실로, 끝내는 구원의 대상으로까지 여기게 된다면 정작 돌보아야 할 저마다의 마음을 놓쳐버릴지 모른다. (그 믿음은 촬영 대상에 머물지 않는다. 함께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스태프와 감독 자신까지 이어진다. 2023 DMZ Docs 피치에서 만난 <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5)의 김영조 감독은 다큐멘터리는 세 가지 신뢰 위에 선다고 말해주었다. 감독과 스태프 사이의 신뢰, 감독과 대상 사이의 신뢰, 그리고 감독 자신에 대한 신뢰.) 다시 회생(回生) 법무사 아버지를 더 미워하다가는 내 마음에 더 큰 병이 날 것만 같았다. 그가 세상 떠난 뒤에 미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 싶었다. 그래서 그가 숨이 붙어 있는 한 함께 채무를 갚아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내고서부터 이상한 일들이 이어졌다. 정말 하늘이 감응한 것인지 사무실 수입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매달 고정된 변제금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형편이 갖추어졌다. 밥 굶지 않고 잠잘 곳 걱정하지 않을 정도의 생계는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매달 둘이서 힘겹게 번 돈이 변제금으로 모두 나갈 때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기분이 들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 허탈한 리듬에 몸과 마음이 곧바로 적응한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이번 달 변제금은 겨우 마련했는데 다음 달은 어떻게 하지 또 어떻게 버티나’ 하는 걱정이 컸다. 그러나 매달 새로운 의뢰인들이 이곳을 찾아왔고,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또 한 달이 지났다. 6개월, 24개월, 48개월이 흘렀다. 언제부터 빚을 갚기 시작했는지 또 얼마의 빚이 남았는지 세어 본들, 돈이 뚝 떨어지고 빚이 갚아지나 싶었다. 도대체 몇 건의 회생 파산과 채무 관련 사건을 다룬 것인지조차 모를 지경에 이르렀고 그렇게 아홉 해가 흘렀다. 빚을 갚아나가는 삶의 운율이 이제는 아예 몸에 배어 버렸다. 혹여나 한꺼번에 남은 빚을 모두 청산할 기회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 또한 또 다른 업이 되어 되돌아올까 두렵다. 업무를 두고 법무사님과 의견이 엇갈려 서로 화를 내고 감정이 상할 때면 문득 언젠가 찾아올 그리움에 대해 떠올려보려 한다. 그러면 화가 좀 가라앉는 것 같다. 아, 이 순간도 언젠가 얼마나 그리워질까. 그렇게 여기면 좀 진정이 된다. 제발 청소 좀 하라며 핀잔을 늘상 주어도 기어코 구정물 묻은 신발로 사무실 바닥을 누비고 다니는 그 발자국이 얼마나 그리워질까. 방금 전까지 다시는 말 안 걸 것처럼 다투다가도 ‘어제 쓴 서면 꽤 잘 썼더라’라는 한마디에 토라진 마음 풀리는 일은 또 얼마나 그리워질까. 서로 뭔가를 끼적여 각자의 자리 벽에 붙여놓고는 훈훈한 날이면 ‘이건 어디서 주워온 글이냐’며 서로 품평하는 시간도. 각자 퇴근한 뒤에 서로 미안하다며 자기 전 짧게 문자를 주고받는 일은 언젠가 또 얼마나 그리워지려나.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김종삼의 시 「묵화」 어떠한 종속이 현실을 외면하는 체념이 된다면 그보다 지독한 구속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종속이 현실을 긍정하는 수용이 된다면 외려 그 안에서 자유를 배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 나는 믿고 싶다. 사무실에서 이런저런 마음을 품고 지내다 보니 그제야 나는 어머니에게 마음의 깊은 빚을 지고 살아왔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무리 빚을 줄여나가도 끝없이 다채로운 빚이 찾아오는 이곳에서야 그녀와의 인연이 지닌 무게를 헤아릴 수 있었다. 그녀가 왜 비구니가 되었는지, 정확히는 왜 다시 비구니가 되었는지는 어린 내가 알 리 없었다. 자식을 둔 비구니라는 사실은, 어린아이가 알아가는 세상과는 도무지 들어맞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존재를 숨기기에 바빴고 가까운 이들이 이를 알게 될까 늘 무서워했다. 학창 시절은 물론 성인이 된 뒤에도 나는 늘 그랬다. 군대 신병교육대 수료식 날에도 보살님들과 함께 나를 보러 온 그녀에게 그냥 차 안에 계시라 했다. 그녀는 가만히 차 안에서 날 기다렸다. 군 제대 하고 2주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지금 네 아버지 곁에 누군가 좀 있어야 할 것 같다며 주변에 그를 도울 사람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제대한 뒤에야 이 이야기를 내게 꺼낸 것은 그녀 나름의 배려였던 것 같은데, 당시 나는 세상 다 무너진 것처럼 꽤 충격을 받았다. 내 첫 반응은 그랬다. 어쩌라고. 나보고 어쩌라고.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몇 있다. 사법고시를 공부하러 고시원에 간 그가 부처님 오신 날이면 절에 와 연등을 달고, 눈 많이 오면 눈 쓸러 오거나 절의 작은 하꼬방에 기숙하러 왔다가 넷마블 알까기를 하던 모습. 다시 무거운 가방을 들고 고시원으로 향하는 뒷모습. 그런 희미한 기억 품고서 법무사를 한다는 그의 사무실로 갔다. 꼬질꼬질한 모습이 그대로였다. 이 사무소에서 수많은 이들의 기구한 사연과 삶의 몸짓을 듣고 본 뒤에야 나는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녀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남긴 사찰 빚을 대신 갚고자 다시 승복을 입고서 아무도 갚지 않으려는 빚을 스무 해 넘도록 묵묵히 갚아왔다는 사실이 비로소 가슴에 사무쳤다. 새벽녘 도량석을 마치고 향냄새 풍기며 어린 내가 자는 곁으로 와 다시 잠들던 그녀가 지금의 나처럼 자신의 아버지가 남긴 빚을 갚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는 걸 그토록 몰랐다.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원망은 지금도 나를 부끄럽게 하고 아직도 나를 짓누른다. 비구니 스님은 어린 내게 라면을 종종 끓여주었다. 라면 냄비 안에 떠 있는 긴 머리카락을 발견하고는 나는 스님에게 투덜거렸다. 왜 머리카락이 여기 있느냐며, 머리카락이 들어간 음식은 먹기 싫다고. 나는 머리카락을 끄집어내고 다시 라면을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스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머리카락 한 올 없는 스님은 제 머리카락 하나에 씩씩대며 다른 이를 탓하는 어린 내가 얼마나 우스웠을까. 아버지의 상처가 될 수도 있는 그의 빚을 굳이 드러내고자 했던 내 욕망은, 그간 어머니의 존재를 숨기느라 그녀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고자 했던 부채감에서 비롯된다. 어쩌면 그 청산 과정에서 시심(詩心)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사무소 출퇴근길마다 많은 시인들의 시를 외웠다. 언젠가 그들처럼 살아보겠노라 다짐했으나 내게는 시 쓰는 재주가 없다는 걸 일찍이 알았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고마운 시를 내어준 시인들에게도 참 많은 빚을 졌다. 그러다 운 좋게도 다큐멘터리와 연이 닿았다. 이 인연은 또 언젠가 얼마나 큰 빚으로 남게 될는지. 부모에 대한 영화를 만들며 안도현 시인의 시론 [1] 을 여러 번 읽었다. 시는 부모와 절대자에게 마음을 바치는 양식이 절대 아니라고 한다. 부처를 우러르면 불경을 읽고 절을 하면 되는 것이고 부모를 공경하면 지극히 효도를 다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도 부처와 예수와 부모를 시에다 쓰고 싶어 못 견디겠으면 부처의 말씀을 관념의 테두리 안에 가둬버리고 실천할 줄 모르는 자들에 대해 쓰고 또 부모의 비겁함과 치부와 죄를 찾아 쓰라 한다. 무엇을 위해서도 누구를 위해서도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나는 역시나 시 쓰기에 실패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는 먼저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 시든 시적인 것이든 그 이후의 일이다. 이 영화의 한글 제목 ‘회생’이 법무사(아버지)라는 외피를, 영어 제목 ‘KARMA’가 비구니(어머니)라는 내피를 나란히 품기를 바랐다. 어린 시절의 내게 이 둘은 결코 만나서는 안 되는 세계였다. 다만 이 영화에서만큼은 승과 속이 본래 둘이 아님을 믿고 싶었다. 서로를 배척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세계를 한 스크린에 놓아두고자 그 사이에서 나는 좀 앓았다. 비구니 스님이 울린 범종 소리로 끝맺는 <회생>의 마지막 장면은 앞서 언급한 이문재 시인의 시 「농담」 [2] 의 마지막 연에 빚을 졌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 [1] 안도현,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한겨레출판, 2023. 3. 17. [2] 이문재, 『제국호텔』, 문학동네, 2012. 12. 17. 김면우(영화감독) l < 회생 >(2026) 연출.
조선극장 흥행광고 3호 중 일부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조선극장 은 단성사 와 더불어 식민지기의 대표적인 조선인 극장으로 손꼽혔던 곳이다. 그러나 ‘경성의 일류 극장’이라는 명성이 무색할 만큼 조선극장은 유독 ‘스캔들’의 진원지로 호명될 때가 많았다. 객석에서 발생한 삐라 살포 사건이나 극장 주위에 진을 친 폭력단들의 범죄행위도 여러 차례 신문 지상에 오르내렸지만, 무엇보다 빈번했던 것은 극장 경영권을 둘러싼 내홍 에 얽힌 이야기들이었다. 실제로 조선극장의 운영 기록(1922~1936)을 살펴보면, 일시 휴관을 선언하고 극장 문을 닫는 일이 적지 않았는데 주된 원인은 경영권 분쟁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으며 극장이 재개관할 때는 대개 새로운 경영주의 취임 소식을 동반하곤 했다. [1] 이는 단성사가 경영주 박승필 의 수완과 카리스마에 힘입어 안정적인 경영 체계를 구축해 나갔던 것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사실 조선극장의 경영권 분쟁은 탄생 시점부터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던 사태였다. 동양생명보험회사 경성지부장으로 근무하던 일본인 시택근차랑(矢澤近次郞)은 얼마간의 자금을 모아 사업에 뛰어들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이때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사업 파트너가 바로 황원균이었다. 두 사람은 극장업을 시작해보기로 의기투합한 후 본격적인 절차에 착수했다. 시택근차랑이 자금을 대고, 황원균이 흥행장 건축허가를 비롯한 실무를 담당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 실질적인 지배권은 시택근차랑에게 있었겠지만 문제는 서류상의 소유주가 황원균의 이름으로 명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당연히 시택근차랑은 명의변경을 요구했고, 황원균은 영업 개시 전에 명의변경을 하면 신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약속을 차일피일 미뤘다. 결국 두 사람의 갈등은 법정 공방으로 이어지기에 이른다. 이후 시택근차랑은 건물 소유권을 동경 건물회사에 판매한 후 조선극장에서 발을 뺐다. 다만 동경 건물회사는 조선극장의 흥행권, 즉 직접적인 운영에 관여하지는 않았고, 실질적인 운영 책임을 담당한 것은 ‘지배인’으로 취임한 조선인 흥행주들이었다. 점차 흥행권은 소유권과 별개의 권리처럼 유통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고 조선극장의 흥행권을 양도했던 사례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2] 1926년에는 변사 김조성 이 새로운 흥행주로 취임하게 되었으나 극장 자금을 유용했다는 혐의를 받아 관원들과 갈등을 빚은 끝에 3개월 만에 물러나게 되었고, 차영호, 현철, 김영식, 이필우 , 이태진 등이 공동 혹은 개인 명의로 경영권을 승계했으나 대개는 1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만큼 1920년대 조선극장의 경영은 불안정했던 것이다. 심지어 1928년 8월에는 연이은 휴관사태 속에 위기의식을 느낀 관원들이 공동명의로 흥행주 역할을 맡아 1년간 경영을 이어나가기도 했을 정도였다. 조선극장의 경영이 비교적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안봉호와 신용희 가 이태진으로부터 경영권을 인수한 1929년부터의 일이었는데, 안봉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경영권을 넘기고 손을 뗐기에 실질적으로 조선극장의 흥행권을 행사했던 인물은 지배인으로 취임한 신용희였다고 볼 수 있다. (좌) 조선극장의 모습 (사진: “ 조선극장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 조선극장 개관 관련 신문 광고 (사진: “ 개장피노 ”, 《동아일보》, 1922. 11. 7.) 한편 조선극장의 경영구조는 1931년부터 기존과 사뭇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1931년 7월에 창립한 조선흥행주식회사 는 흥행업에 포함된 제반 사업들을 모두 아우르는 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 즉, 제작, 배급, 상영의 수직적 통합 을 통해 최대한의 이익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선극장은 개인 경영 방식을 벗어나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직영관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사장은 평양에서 고무공장을 운영하던 사업가 정완규가 맡았으며, 안봉호로부터 경영권을 인수한 정현국은 전무취체역을 담당했다. 그리고 신용희는 조선극장 지배인과 조선흥행주식회사 상무취체역을 겸임하게 되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창립과 직영관 제안은 조선극장 입장에서도 충분히 매력을 느낄 만한 사안이었다. 발성영화로의 전환 과정에 직면한 식민지 조선의 극장들은 기로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무성영화보다 과중한 필름 대여료를 지불해야 했고, 장비 설비에도 목돈을 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전면적인 발성영화 전환을 천명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관객들의 취향이 무성영화를 ‘재래의 저급 취향’으로 낙인찍는 경향이 현저해지고 있던 상황에서 무조건 무성영화의 재탕 상영을 반복하기도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금 8만원을 들여 출범한 조선흥행주식회사는 든든한 뒷배 역할을 해 줄 수 있었으며, 실제로 조선극장은 라이벌 관계에 놓여 있던 단성사보다 적극적으로 발성영화 전환을 시도 하며 시장의 트렌드를 주도해 나갔다. 재계 공황의 영향으로 말 못 된 흥행계는 예년에 비하야 참경에 빠진 셈인데 더구나 영화계는 조금도 새로운 면목을 보여주지 않고 다만 재삼 상영한 영화를 최염가의 관람료로써 상설관의 수명을 연장시켜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형편이었으나 기신양행(紀新洋行) 겸 조선극장의 지배인 신용희(申鎔熙) 씨가 일본에 갔다 오고 일본 동화상사(東和商事) 사장이 구라파에서 돌아오는 길에 동화상사 조선지점장인 고윤묵(高潤黙) 씨와의 회견으로 기신양행 측에서는 순전한 『토-키-』 배급 , 동화상사 측에서는 구라파 특작 무성영화 로써 영화배급전이 개시될 모양인데 무성영화 측에서는 이미 명작을 계약하야 수입 중이라 하며 기신양행 측에서는 조선극장에 불일간 『토-키-』영사기계를 장치하여 일반의 목을 놀래일 예상 인데 실패한 기왕에 일본제의 『토-키-』영사기계와는 달라서 이번의 것은 순미국제를 사드려 임이 『파라마운트』 회사의 『모로코』를 위시하야 『명작 토-키-』를 계약하였으므로 조선극장에서는 가을에는 얼마동안 『토-키-』 전문으로 흥행- 『단성사』에서는 무성구라파영화로써 영화전이 개시될 모양이라 한다. 기신과 조극 측에서는 과연 완전한 토-키-를 보여줄 것이며 동화상사 측에서는 과연 구라파의 명작을 가지고 『토-키-』의 새 진영을 돌파할지 일반 영화『팬』의 흥미를 자아내고 있다 한다. - 기사, “금추 흥행계는 발성 무성 영화전 - 기신 측엔 토-키- 상사 측엔 무성”, 《조선일보》, 1931. 8. 25. - 한국영상자료원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1 』, 1,114쪽. 1931년 가을 흥행 시즌 당시 단성사와 조선극장이 보여준 노선은 명확하게 엇갈렸다. 단성사가 명작 무성영화 전문관을 표방하며 유럽산 특작 영화들을 전면에 배치하려 한 반면, 조선극장은 기신양행과 손을 잡고 “순전한 토키”들로 프로그램을 채우고자 한 것이다. 주목할 것은 조선극장이 기왕의 일본제 발성영사기보다 훨씬 우수한 미국제 장비(RCA)를 전격적으로 사들였다는 점이다. 구매 시기를 고려할 때, 조선극장이 이처럼 공격적인 설비 투자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자본력에 힘입은 바 컸다고 볼 수 있다. 조선극장과 달리 유럽산 특작 무성영화를 전면에 내세운 단성사의 모습 (자료 출처: 『大京城都市大觀』(朝鮮新聞社, 1937), 映畫常設館ノ部 / 사진: “ 단성사 ”, 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역사박물관) 단성사와 조선극장의 상반된 행보는 여러모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싸움의 승패는 곧 발성영화 전환 문제에 있어 향후의 행보를 결정지을 만한 바로미터가 될 것이라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승부는 발성영화 전환이라는 과제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임을 각인 시키는 결과로 낙착되었다. 이듬해인 1932년 4월에 단성사와 우미관은 발성영사기를 구매하고 토키의 상영 비중을 늘려나가며 뚜렷한 노선 변화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1932년 7월에 지난 1년간의 사업 융창을 자축하는 의미의 기념 상영회를 열었을 만큼 조선극장과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렇기에 1932년 10월에 조선극장 지배인 신용희가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은 것 은 굉장히 갑작스러운 조치처럼 여겨질 만한 일이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 측은 신용희가 배임 행위를 저질렀다고 지목하면서 지배인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종용했는데, 신용희가 격렬하게 반발함에 따라 조선극장은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이나 일시 휴관 사태에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보도된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인생안내』 계약이 발단 / 정(鄭), 신(申) 양파로 대립 / 지배인은 건물 소유자와 악수 / 알력의 전말 내용 조선극장은 소화 四년 九월에 건물 소유자인 부내 황금정(黃金町) 二정목 五十九번지 동경건물주식회사(東京建物株式會社)와 임차계약(賃借契約)을 안봉호(安奉鎬) 씨가 체결하고 보증금(保證金) 六천 五백원을 내게 되었는데 그 후 소화 五년 七월에 정현국(鄭鉉國) 씨가 一만원을 내고 영업권리권(營業權利權)을 양수(讓受)하여 주식회사로 조직 후 조선흥행주식회사(朝鮮興行株式會社)를 조직한 나머지 정완규(鄭完圭) 씨가 사장(社長) 으로 취임하고 신용희(申鎔熙) 씨는 지배인(支配人) 으로 취임하여 정씨는 금전에 관한 일절 책임을 지고 신씨는 영업에 책임을 맡아 이래 경영을 하여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날로 업적을 나타내어 작년에는 二, 三천원의 순이익까지 보게 되어 주주들 간에 상당한 배당까지 하게 되었다. 지난번에 인생안내(人生案內)라는 영화를 상영하려고 영화배급소와 계약 체결을 할 당시 조선극장 간부의 승낙 없이 자기 개인으로 약 四백원에 계약을 하여 가지고 극장 간부와는 五할 배당을 하자는 조건을 제출하였는바 이에 극장 간부 측에서는 동 극장에 지배인의 지위에 잇는 사람으로 당연히 극장을 대표하여 계약을 체결할 것인데 불구하고 개인의 계약이라는 것은 배신 행동이라 하야 지난달 중순경에 신씨에게 해임장을 발송 하게 되었다. 이에 분개한 신(申)씨는 극장 건물 계약관계자인 목미(木尾) 씨에게 그 사실을 말하게 되자 전기 목미 씨는 신씨를 지지(支持)하는 터이라 결국은 정씨 일파와 신씨 일파 사이에 분쟁을 일으키게 되어 페관의 운명에까지 이른 것 이라고 한다. 관객을 위하야 애석한 일 - 사장 정완규 씨 담(談) 금번 분규사건에 대하여 사장 정완규(鄭完圭)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선에서 몇 개 안 되는 흥행계에 극장 간부들의 분쟁으로 휴관까지 하게 된 것은 조선흥행계를 위하야 일반 사회 각 방면 인사에게 진실로 미안하기 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간부는 어떠한 일이 있든지 양보를 하고 원만 해결을 지으려 합니다. 극장세만 하야도 九월에 七백 五十원 하든 것을 十월에 八백원을 내라고 하야도 아모 이의도 업시 그대로 다 지불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회사 규정에 의하야 부정한 행동이 있는 지배인 하나를 처치하엿다고 극장 계약자가 흥행을 못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 횡포한 일 이 아닌가 합니다. 지난번에 처분한 신 지배인에 대하여도 처분을 관대하게 하기 위하야 九백원이라는 퇴직금까지 보내었습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목미(木尾) 씨가 극장을 사용치 못하게 한다는 것은 신씨와 어떠한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일반대중을 위하여 너무나 애석한 일입니다. 장래를 위하야 해결에 노력 - 지배인 신용희 씨 담(談) 일찍이 동 극장의 지배인으로 있던 신용희(申鎔熙) 씨는 말하되 금번에 소위 배임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지난번 인생안내(人生案內)를 계약하였을 당시에 四백원을 내 돈을 내어 계약을 하였다는 것이나 그것은 당시 간부들이 너무나 사진값이 비싸다고 계약하기를 주저하므로 만약 다른 극장에서 계약이나 하여 사진값이나 오르면 더욱 극장에 손해가 될 듯하기에 내가 먼저 계약을 한 것 입니다. 여하간 사실에 잘잘못은 어찌 되었든지 조선극장의 장래를 위하여 원만히 해결을 짓는 것이 좋을 듯하기에 해임장을 받고서도 정씨(鄭氏)를 방문하고 무조건으로 잘못하였다고 사과까지 하고 앞으로 사업을 계속하자고 하였으나 끝끝내 거절을 하므로 나는 부득이 극장 계약관계자 목미(木尾) 씨에게 그 사유를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목미(木尾) 씨의 방침은 사리를 모르는 회사 당국과는 계약은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며 회사라는 명칭을 떠나 개인으로 계약을 하고 싶다고 하는 중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목미(木尾) 씨는 나를 신임하느니만큼 내가 빠지어 다른 사람과는 계약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중인데 현 간부 측에서는 나를 배척하니 앞으로 어찌될지 조선흥행계의 장래를 위하여 적지 아니한 걱정입니다 운운. - 기사, “『토키』영화의 전당 조선극장의 분규 - 휴관한 지 일개월에 아모 해결 업서”, 《매일신보》, 1932. 11. 28. - 한국영상자료원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2 』, 1,382-1,383면. 사건의 발단은 한 편의 수입영화 계약을 둘러싼 이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소비에트 영화 <인생안내>(니콜라이 에크, 1931)의 흥행가치에 주목한 신용희는 간부들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개인 명의로 필름을 선구매했으며, 회사에는 추후에 수익금을 배분하리라고 통고했다. 그는 다른 극장과 경쟁이 붙어 필름 대여료가 폭등할까 우려했기에 불가피한 조치를 한 것이라 항변했지만,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이것이 엄연한 배임 행위라고 보았던 것이다. 다만 <인생안내>가 신용희의 기대처럼 수익 창출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회 부랑자 청소년들이 철도 노동자로 재탄생하여 사회주의 건설에 기여한다는 이야기를 담아낸 <인생안내>는 ‘노력영웅’의 숭고한 희생을 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을 뿐, 계급투쟁을 전면적으로 다룬 작품이라 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신용희는 <인생안내>가 무난하게 검열을 통과할 것이라 보았고, 상영을 앞두고 주요 일간지에 특별광고를 커다랗게 게재했을 만큼 자신감을 보였다. [3] 그러나 <인생안내>는 개봉 다음 날 “사정에 의하야 중지”하게 되었다는 공지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린다. [4] 필름 검열은 통과했지만, 조선극장에서 자체 제작한 선전문이 문제시되어 압수됨에 따라 상영 불허 처분이 사후적으로 내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5] (좌) 조극 흥행광고 3호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우) <인생안내> 포스터 및 스틸 (사진: “Putyovka v zhizn( 1 , 2 )”, IMDb) 그러나 상영이 중지되었다고 해도 <인생안내>는 신용희가 개인 명의로 구입한 필름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조선극장 측의 손해가 아주 컸다고는 보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흥행주식회사는 굳이 이 문제를 끄집어내어 신용희를 몰아내고자 했다. 아마도 이는 신용희의 개인 행동을 용인하게 된다면 장차 무척이나 불리한 선례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흥행주식회사는 극장업뿐 아니라 배급업에도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었기에, 신용희가 정상적인 배급 절차를 건너뛴 채 임의로 이익을 분배하게 되면 회사 측의 이익을 결정적으로 침해할 우려가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위험의 싹을 미연에 잘라 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조선흥행주식회사가 신용희를 쉽게 몰아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조선극장에 대해 완전한 장악력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조선극장의 흥행권에 대해서는 일정한 처분 권한이 있었을지 몰라도, 최종적인 결정권은 어디까지나 건물 소유주인 동경 건물회사 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해임장을 받은 신용희는 동경 건물회사 측 대리인을 맡았던 일본인 목미호지조(木尾虎之助)를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했고, 평소 신용희의 사업 수완을 신뢰했던 동경 건물회사는 즉각 극장 문을 닫으며 조선흥행주식회사를 압박했다. 동경 건물회사는 양자 간에 원만한 합의를 이루도록 종용했지만 신용희와 정완규의 협상은 끝내 결렬되었고, 조선극장은 조선흥행주식회사와 결별하는 길을 택한다. 조선흥행주식회사의 투자가 주로 발성영화 상영 환경을 마련하는 데 집중되었으므로, 새롭게 설비된 장비들의 소유권 또한 조선흥행주식회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2년 12월에 조선흥행주식회사는 단성사와 새로운 계약을 맺고 조선극장에 설비되어 있던 발성영사 상영 장비를 철거해 단성사로 옮겼다 . 단성사는 1932년 4월에 일제 발성영사기를 도입했지만, 음향이 희미하고 잡음이 많았기에 장비 개선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이었다. 계약 체결 직후 단성사는 최신의 미제 RCA 상영기를 장만했다는 점을 대대적으로 광고하며 모리스 슈발리에 주연의 발성영화 < 오늘 밤에는 사랑해 주세요(Love Me Tonight) >(로우벤 마물리안, 1932)를 상영하게 되었다. <오늘 밤에는 사랑해 주세요> 포스터 및 스틸 (사진: “Love Me Tonight( 좌 , 우 )”, IMDb) 창졸간에 장비를 잃은 상황에서 신용희는 새롭게 영사기를 장만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때 시간을 벌어 주었던 것이 바로 극장 대관업 이었다. 1932년 12월에는 새롭게 창단한 명일극장과 문외극단이 조선극장에서 연달아 연극을 올리게 되는데, 이는 극장을 마냥 닫아둘 수만은 없었던 흥행주의 입장과, 명망 있는 큰 무대에 서기 원했던 신생극단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신용희는 1929년에 지배인으로 취임한 직후부터 자체 레뷰단을 조직하여 공연을 올리고, 극단들에 무대를 대여해 주며 조선극장의 운영난을 타개해 나갔던 전력이 있었다. 영화 상영에 위기가 닥쳤을 때, 대관업을 적절히 병행하며 융통성을 발휘하는 데 능했던 그의 경영 노하우가 또 한 번 발휘된 순간이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와 신용희의 갈등은 연예사업 종사자 간에 일어난 단순한 알력관계를 넘어 여러 흥미로운 논점들을 수면 위로 밀어 올린 사건이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영화의 제작, 배급뿐만 아니라 상영까지 포괄 가능한 회사를 목표로 삼았으며, 이는 영화산업의 수직적 통합 을 염두에 둔 행보였다. 그러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던 신용희 해고사태가 함의하듯 경영권 (조선인) 과 소유권 (일본인) 이 분리된 식민지 극장의 특수성 은 이러한 통합을 불가능하게 한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신용희를 비롯한 조선인 극장의 경영자들이 발성영화 전환에 따른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서 대관업을 십분 활용 해 왔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즉, 1930년대 초반의 발성영화 전환기에 연극 흥행은 프로그램 운영의 윤활유 역할을 담당했으며, 극장업자들이 최소한의 자율성이나마 확보할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 주었던 것이다. *** [1] 이승희, 「조선극장의 스캔들과 극장의 정치경제학」, 『대동문화연구』 72,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0. [2] 1929년에는 안봉호가 이태진으로부터 6,500원에 경영권을 인수했으며, 1930년에는 정현국이 안봉호로부터 1만원에 경영권을 인수하였다. [3] 조선극장 특별광고, 《동아일보》, 1932. 9. 1., 2면. [4] 조선극장 광고, 《동아일보》, 1932. 9. 3., 6면. [5] 이 선전문은 전량 압수당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 전해지는 “조극 흥행광고 3호”가 <인생안내> 특별편으로 구성되었으며, 9월 1일자로 발간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것이 바로 문제가 된 선전문일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다.(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료로 보는 일제강점기 극장문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20, 196쪽.) “조극 흥행광고 3호”는 <인생안내>의 예술성과 제작진의 우수성을 상찬하는 내용으로 서두를 꾸몄는데, 불온성을 지적할 만한 내용이 크게 눈에 띄지는 않는다. 영화 줄거리에 대한 소개 역시 신문에 게재된 개요보다 약간 더 상세할 뿐 큰 차이가 없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인생안내>에 삽입된 노래들의 가사를 옮겨놓았던 부분이다. <인생안내>를 “젊은 노서아”의 太息이자 熱로 소개하면서 ‘권로가’, ‘유랑의 노래’, ‘철도사역’의 가사가 나열되고 있는데, “무로가 영원히 매장되도록” “진흙 속에 영원히 무너버리고저 한다”라는 선언이나, “ᄯᅡᆼ을 긁지만 말고 / 정말로 파 업흐라”라는 구호, “낡은 세계를 ᄲᅮ리채 / 단연히 잘나낼 것은 이 손이다” 등의 구절은 시각에 따라 직접적인 선동으로 해석될 만한 내용들이었다.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나는 덜컹거리는 좌석에 앉아있다. 새벽부터 감질나게 내리던 비가 차창 밖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창 밖으로는 처음 보지만 익숙한 시골 풍경이 그보다 빠른 속도로 흘러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지금 나는 이 글을 지방 어딘가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쓰고 있다. 그리고 이 글을 마칠 때 즈음이면, 아마 추측하건대 나는 또 어딘가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단편 영화 배급이라는 것은 나에게 항상 이런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 독립영화계에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생소할 이 직업은, 내가 처음 일을 시작할 때에도 모호했지만, 곧 십오년 경력을 달성하게 되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어떤 일인지 딱 정리하기엔 애매하다. 그래서 십여년 전부터 나는 이 직업을 인디아나 존스 같은 모험가라고, 맘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딘가 이상한 합리화 같지만, 실제로 나는 이 생각이 꽤 그럴싸하다고 여겨왔다. 인디(이럴 수가 심지어 이름도 ‘인디’잖아!)의 직업은 대학교에서 재직하는 고고학자이다. 그의 일상은 학교의 연구실이나 도서관에서 수많은 책들 속에 파묻혀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상의 다른 한편으론, 놀랍고 신기한 보물을 찾아 전세계를 누비는 모험의 삶 또한 존재한다. 단편 영화 배급이란 직업도 지루한 일상과 두근거리는 모험의 기묘한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업무 자체의 대부분은 온라인으로, 사무실의 모니터 앞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수많은, 어떻게 보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 서류 작업의 시간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새로운 영화와 관객을 찾기 위해 세상을 누비는 모험의 시간이 항상 같이 따라 붙는다. 인디는 시리즈 몇 편에서인가 그런 말을 했었다. 고고학은 도서관의 책 속이 아닌, 바깥 세상에 존재한다고. 마찬가지다. 배급은 결코 서류에서 끝나지 않는다. 영화도, 창작자도, 관객도 그들 모두는 서류와 모니터 밖에 있는 현실 세계에 존재한다. 정말 좋아해서 배급을 하게 된 한 영화가 모니터 속 서류와 파일로만 존재하다가… 마침내 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나게 될 때- 관객들이 그 영화를 나처럼 좋아하게 되었다고 느끼게 되는 멋진 순간이 있다. 그것은 내가 이 일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이 문장을 쓰고 있는 나는 이제, 경상도 해안 도시 어딘가의 한적한 카페에 앉아있다. 얼마 남지 않은 커피를 홀짝이며 방금 쓴 문장을 되뇌자, 나는 몇 개의 과거 속에 남아있는 행복한 감정을 떠올린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씁쓸한 기억의 흔적이 함께 어렴풋이 떠오른다. 얼마 전에, 몇 년 전부터 인연을 맺고 있는 한 감독의 새 단편 영화를 배급하게 되었다. 그는 유독 GV(관객과의 대화)에 집착을 하고 있었다. 영화를 보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그는, 초청된 모든 영화제의 GV 시간을 꼼꼼하게 체크하고 또 체크했으며, 입고 갈 의상과 그 날의 질의응답을 거듭 준비하곤 했다. 나는 그의 열띤 모습이 좀 의아했다. 나는 그에게, 이전 영화로 이미 꽤 많은 GV를 하지 않았었냐고 물었다. 왜냐하면 그의 이전 영화는 그 해 가장 주목받고, 또 많은 영화제에 초청되었던 작품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대답을 들은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저는 그 영화로 GV를 거의 해 본 적이 없어요.” 그의 이전 작품은 2020년, 팬데믹 시대의 영화였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나와 똑같은 느낌으로 팬데믹 시기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굉장히 힘들었고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어렴풋한 기억, 그리고 마치 꿈이라도 꾼 것처럼 그 기억은 점점 뿌옇게 흐려져가고 있다. 언젠가는 힘들었다는 추상적인 기억과 땀이 찬 마스크의 축축한, 기분 나쁜 감촉만이 기억 날지도 모르겠다. 팬데믹의 기억에 대한 이 이상한 감각은 단편 영화들이 겪었던 이상하고, 때론 의심스러웠던 수많은 일들의 기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처음 팬데믹이 시작되었을 때, 아니 처음 나의 현실을 덮쳐 왔을 때가 기억난다. 나는 어딘가로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 어느 영화제 스태프들과 배급사 담당자들 간의 미팅 자리로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 뉴스의 해외 단신에 나오던 새로운 역병은, 조금씩 뉴스의 메인 꼭지로 다뤄지는 빈도가 높아져 가고 있었다. 그 날의 미팅도,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안전한 영화제를 진행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을 예정이었다. 미팅 장소로 향하는 나는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한편으론 좋은 쪽으로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란 평소와 같은 열띤 흥분이 조금 더 강했다. 하지만 그 장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나의 핸드폰으로 새로운 이메일과 동료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상영은 취소되었다. 영화제는 온라인으로 진행될 것이다. 그렇게 나의 일은 균형을 잃기 시작했다. 그 뒤에 내가 맞이한 세상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비대면”, “뉴노멀”. “새로운 세상이 온다”. “기존에 알던 우리의 세상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모두가 힘들었지만, 단편 영화들에 있어서는 유독 모진 시기였다. 이렇게 말하자면- 더 힘든 사람들, 더 끔찍한 일을 겪은 영역도 있다고 하겠지만...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단편 영화는 “중요하지 않은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더 모질었다. 강력한 방역 조치와 거리 두기가 시행되자 그토록 많던 상영과 행사들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갔다. 그것들은 아주 간단하게 “온라인”으로 대체되었다. 수많은 영화제와 상영회들이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영화를 상영했다. 창작자들이 서로 만나 밤새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은 ‘메타버스’의 이상하고 어색한 사교 활동으로 바뀌었다. 그 결정을 내린 사람들과 단체들이 가벼운 마음이 아니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 그 결정들이 “변곡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몰랐다. 언젠가는 온라인 상영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될 수도 있겠지. 미래에는 극장이 사라질지도 몰라. 분명 그런 생각은 팬데믹 이전에도 있어왔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그런 변화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언젠가 올 것이라 생각했던 수많은 일들이 너무나 빨리 우리 앞에 현실로 닥쳐왔었다. 팬데믹 시대, 나의 일은 두배 세배의 모니터 앞 서류 작업으로 변질되었다. 일의 양도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이 일에 ’모험’의 두근거림이 사라지고 끊임없이 ‘일상’만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아무리 많은 서류 작업을 하고 어떤 좋은 영화를 영화제에 진출시켜도, 나는 내 노력의 결과를 느낄 수 없었다. 그 시기 내가 배급했던 영화들은 많은 경우, 온라인 상영 결산 서류의 숫자가 되어 나에게 돌아왔다. 수많은 온라인 상영과 가상 공간에서의 행사들. 그것들은 오프라인에 있던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벗어난 새로운 기회인 것 같았다. (최소한 그렇게 포장했다) 하지만 실제 결과는 많이 달랐다. 조회수는 꽤 자주 처참했고, 아바타 대화는 종종 무의미했다. 그리고 불과 2년여의 시간이 지났다. 팬데믹의 공포가 옅어져 가고, 답답한 마스크를 더 이상 매일 쓰지 않아도 될만큼 시간이 지났다. 우리의 미래인 양 얘기했던 그 수많은 변화들은 “놀라울 만큼” 빠르게 사라져갔다. 영화제의 온라인 상영은 이제 단편 영화를 제외하곤 거의 하지 않는다. (사실 왜 단편영화들만 온라인 상영을 계속 하는지는 나의 소소한 의문이다) 혼란스러운 시대를 틈타 사람들을 현혹시켰던 NFT나 메타버스는 이제 사람들의 우스개소리로, 누군가의 실패한 주식 테마주로만 기억된다. 나도 이제 다시 도시에서 도시로, 산과 바다로 돌아다니며 새로운 영화와 관객을 찾는다. 나의 일은 다시 균형을 찾았다. 문제는,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혹은 떠올리기 싫어하는 그 시기의 기억 속에, 어떤 것들은 남겨졌다는 것이다. 팬데믹 시대의 단편 영화와, 그 작품의 창작자들은 아직도 그 망각 속에 남아있다. 팬데믹 시기, 그들의 단편영화를 세상에 내놓았던 이들에게 나는 무척 안쓰럽고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누군가에게는 일생 일대의 기회였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앞으로 영화를 계속 해나갈 응원일 수도 있었을 순간들을- 그들은 누리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의 노력과 성취에 응당 따라 왔어야 할 보상이었다. 나는 이 일을 하며 그런 보상들이, 그 크기와 화려함의 정도와는 별개로 사람들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여러 차례 봐왔다. 나는 이제 이 글의 마지막 단락을 쓰며 또 다른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그곳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꽤 만날 것이고, 운이 좋다면 새로운 인연도 만나게 될 것이다. 작은 상영관에 모여 앉은 관객들은 어쩌면 그들이 새로 좋아하게 될 어떤 영화를 찾을지도 모른다. GV에 집착하는 그 감독도 내일 있을 또다른 영화제 때문에 조금 상기된 모양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번엔 꽤 신경 쓴 정장을 챙겨 둔 모양이다. 그는 다행히 새로운 영화를 만들었고, 두번째 기회를 잡아냈다. 나는 그의 행운이 정말 기쁘다. 하지만 팬데믹의 기억 속에, 누군가는 끝내 남겨져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