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선구자들 : 대한민국예술원 영화인 회고전
- 감독
- 이경배
- 제작년도
- 2016
누군가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소소한 일상의 흔적과 기억이 담긴 사진첩 속에서 그 누군가는 영화 한 편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진첩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죠. 그렇다면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한 ‘어느 영화인의 사진첩’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영화인들이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 사진첩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경기도 시흥군 동면 안양리(현 안양시), 얼핏 봐도 백 명은 족히 넘어 보일 정도로 인파가 북적이는 이곳.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이리도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일까? 흙먼지 폴폴 날리는 공사장에 말이다. 화기애애한 표정으로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고, 짓고 있는 중으로 보이는 콘크리트 건물 앞에서 멋들어지게 늘어서서 단체 사진은 또 왜 찍고 있는 걸까? 혹시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해 모인 것일까? (좌) 홍찬, 현제명 등 / (우) 박계주, 조경희 (좌) 한형모, 허백년, 이진섭 등 / (우) 김학성, 유계선 등 엄청나고 대단한 것이 들어설 것 같은 흥분으로 가득한 이곳은 다름 아닌, 동양 최대 규모의 영화 스튜디오가 될 수도영화사(대표 홍찬 ) 안양촬영소 정초식 및 상량식(이하 정초식) 현장이다.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 속 여러 장에 걸쳐 발견되는 일련의 사진들에는 수도영화사 사장 홍찬과 현제명 박사, 문학가 박계주 와 조경희, 시나리오 작가 유한철 과 이진섭 , 영화평론가 임영 과 허백년 , 스틸 작가 백영호 , 감독 한형모 , 배우 이민 과 유계선 등의 인물들이 포착되어 있다. 생전 이 사진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던 촬영감독 김학성 의 모습 역시 박혀있다. 그러나 이 행사에는 문화계 인사만 자리한 것이 아니었다. 단신에 가까운 신문 기사와 이승만 대통령의 동정을 따라가는 <대한뉴스>에서 확인되는 이날의 공식 기록은 이러하다. 안양촬영소 정초식은 1956년 10월 17일 오전 11시, 경기도 안양리 공사 현장에서 수도영화사 사장 홍찬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여기서 현제명 박사는 공사 경과를 보고했고, 이승만 대통령과 최규남 문교부 장관의 축사가 이어졌다. *주1 그 밖에도 여기에는 당시 민의원 의장이었던 이기붕과 내무부 장관이었던 이익흥 등의 정부 인사 역시 자리했다. 영화배우 주증녀 가 영화인 대표로서 단상에 올라 대통령에게 꽃다발을 전달했고, 정초식 이후 대통령은 공사 현장을 둘러보고 촬영소 모형도를 살폈다. *주2 이 같은 공식 기록을 놔두고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의 사진들이 유독 눈에 띄는 이유는 그것이 다름 아닌 ‘개인의 기록’이라는 데 있다. 객관적인 사실을 열거하며 대통령의 동정에 초점을 맞춘 공적 보도와 달리, 이 일련의 사진들은 순수하게, 안양촬영소 건립에 들뜬 영화인의 시선으로 기록된 것들이다. <대한뉴스>에서 전달되는 근엄하고 정제된 분위기와 달리, 사진은 어딘가 다소 어수선하고 북적인다. 눈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시각 요소만 담겨 있지만, 그럼에도 왠지 이곳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재잘거리는 대화 소리, 북적이는 인파와 공사장의 소음이 그대로 들리는 것만 같다. 공적 기록과 달리 정제되지 못한 개인의 사진(심지어 이 사진들은 인화되지 못한 채 필름으로 남아 있다)은 이렇게 예상외의 것마저 전달한다. 그렇다면 영화인뿐 아니라 여러 문인과 정부 관계자들이 나서서 모두 축하하고 있는 안양촬영소 건립이란 당시에 어떤 의미였을까? 일제강점기 때부터 국내의 영화인들은 영세한 자본에다 촬영소는 물론이고 변변한 영화 기자재도 없는 현실을 탄식하며 탄탄한 자본력을 가진 영화 기업을 기대했고, 영화 예술을 위해 헌신하는 굴지의 독지가가 나타나길 바라는 비현실적인 꿈을 꾸기도 했다. 해방을 맞이했지만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고 한국전쟁으로 그나마 있는 시설마저 파괴되었으니, 영화인들이 느꼈을 실망과 좌절은 굳이 말하지 않더라고 쉬이 짐작 가능하다. < 춘향전 >(이규환, 1955년 국도극장 개봉) 흥행을 계기로 영화 제작에 숨통이 조금 트였다고는 하지만, 안양촬영소가 개소하기 전까지 국내에 있는 영화촬영소라고는 미국의 아시아재단 원조로 들여온 기자재를 관리하기 위해 설립된 정릉 스튜디오와 < 자유부인 >(한형모, 1956)의 제작사 삼성영화사가 서울 군자동에 설립한 삼성스튜디오 정도였다. 이마저도 모두 안양촬영소가 한창 공사 중이던 1957년의 일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1956년 10월의 안양촬영소 상량식이 영화계, 나아가 문화계 전반의 큰 행사이자 축제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실제로 안양촬영소는 대지 면적 32,000평, 건평 5,400평의 규모로, 자타공인 당시 동양 최대 스튜디오였다. 한국영화 1세대 촬영기사이자 테크니션이던 이필우 의 설계를 바탕으로, 3개의 스튜디오(500평, 380평, 150평)와 래보라토리(105평), 녹음실(60평), 소도구 및 대도구 제작실(150평), 분장실(100평), 촬영 장비 저장소(100평) 등을 구비했고, 식당과 샤워실, 총 3,300kW 출력이 가능한 변전실 3개 등의 부대 시설까지 완비했다. 기자재로는 당시 접하기 힘들었던 미첼 NC 카메라 3대와 웨스트렉스 녹음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최신 설비와 시설을 자랑했다. *주3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확인되는 이 같은 모습을 차츰 갖춰가고 있던 1956년 10월, 사진 속의 이날은 그렇기에 더욱 흥분과 경이로 가득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근사하게 차려입고 이곳에 모인 많은 이들의 상기된 표정은 안양촬영소가 영화인들에게 와닿는 의의를 설명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한편 안양촬영소가 여전히 한창 공사 중이던 1957년 3월의 어느 날, 수도영화사 대표 홍찬은 《국제영화》와의 인터뷰에서 촬영과 조명, 소품, 의상, 메이크업 등의 기술 스태프 500여 명을 전속으로 기용할 예정임을 은연중에 밝히기도 했다. *주4 홍찬이 발표한 이 말이 사실이라면, 수도영화사의 안양촬영소 건립은 영화인들에게 또다시 경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속’이라 함은 곧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도영화사가 안양촬영소 건립과 함께 제시한 청사진은 영화인들이 불안정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기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수도영화사와 전속 계약을 맺은 스태프가 누구였는지,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지만, 위 사진들의 원 소장자 김학성이 수도영화사와 촬영감독 전속 계약을 맺은 사실은 그의 컬렉션을 통해 확인된다. 김학성의 수도영화사 전속 촬영감독 임명장 (한국영화박물관 상설 전시 자료, 우측은 필자의 한글 병기) 수도영화사의 전속 촬영감독으로서, 김학성은 이곳에서 수도영화사 안양촬영소 창립 작품 < 생명 >(이강천, 1958)의 촬영을 담당했다. 그 과정에서 그에게도 수도영화사 전속 촬영감독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안양촬영소 상량식 사진들 못지않게,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에는 그가 <생명>을 촬영할 당시에 찍은 사진들이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도영화사 사무실에서 촬영된 필름을 검토하고 있는 모습부터 <생명> 고사 현장, 한강 로케이션 촬영 현장과 안양촬영소 세트장에 이르기까지, 사진 자료만도 89점에 달한다. 이는 그가 참여한 작품에 관한 컬렉션 사진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인들의 환대를 받으며 성대하게 지어진 수도영화사 안양촬영소의 수명은 안타깝게도 그리 길지 못했다. 수도영화사는 창립 작품 <생명>에 이어 < 낭만열차 >(박상호, 1959)를 제작했지만, 두 작품의 잇따른 흥행 부진으로 수십억 부채를 떠안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안양촬영소는 1959년 4월 부도 처리되며 상업은행의 관리로 넘어갔다. 이후 선민영화사와 홍성기 감독, 범아영화사가 잠시 운영을 맡기도 했지만, 한동안 방치되었고 1966년,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에 인수돼 안양필름(1967~1968), 안양영화제작주식회사(1970~1973) 등의 스튜디오로 활용되었다. *주5 *** 주1. “안양촬영소 정초식 성대”, 《조선일보》 1956. 10. 18., (석)3면. 주2. “ 대통령 각하, 안양촬영소 정초식에 임석 ”, <대한뉴스> 제94호, 1956. 10. 주3. 안재석, 「 안양촬영소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주4. “[신춘대담 no.3] 현란한 문화기업의 개화전: 영화산업의 왕자 ‘수도’의 구상”, 《국제영화》 1957년 4월호(15호), 93쪽. 주5. 안재석, 앞의 글; 조준형, 『영화제국 신필름』, 한국영상자료원, 2009.
[사진]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에 출연한 김동원, 오른쪽은 배우 신성일 구경꾼들 폭소 자아낸 <밤의 태양>의 야외 촬영 1948년 밀수 근절을 위한 수도청 후원의 정책 홍보영화 <밤의 태양>(박기채 감독)에 출연한 김동원(金東園)은 신극배우로서 은막에 진출한 첫 사례가 된다. 그동안 극단 황금좌를 중심으로 활약하다가 영화에 출연한 황철, 심영 등 해방 전 신파배우들과는 달리 그는 신극을 지향한 극예술협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상대역은 최은희, 조연으로 전택이, 한은진 등이 합류했다. 그는 영화가 연극과 장르는 달라도 연기의 이치는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막상 카메라 앞에 서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관된 흐름 속에서 전개되는 무대 연기와는 달리 감독의 콘티에 따라 진행되는 토막 촬영이어서 감정을 잡지가 쉽지 않았다. 거리에서 교통사고로 쓰러진 애인(최은희)을 안아 일으키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긴장한 나머지 여자를 안고일어서다가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구경꾼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졌음은 물론이다. 그의 첫 출연은 이렇게 ‘실망스럽게’ (김동원, 『미수의 커튼콜: 나의 예술과 삶』, 태학사, 2003, 144~145쪽) 끝났다. <밤의 태양>에 출연한 후 다시는 외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김동원이 문화영화 <코리아>(신상옥, 1954)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그로부터 6년 만이었다. 명승지와 그곳에 담긴 일화를 소개하는 이 영화에서 그는 남원을 무대로 전개되는 <춘향전>의 이몽룡 역할을 맡아. 춘향 역인 최은희와 다시 호흡을 맞추게 된다. 그사이 그는 악몽 같은 ‘6,25 동란’을 겪었다. 극단 신협이 앙코르 공연으로 마련한 번역극 <뇌우(雷雨)>(부민관)가 끝난 지 이틀 만이었다.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종로구 필운동 처가에서 숨어 있다가 붙들려 한밤중에 연극인 일행과 함께 북으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임박한 때였다. 그러나 다행히 평양을 지나 대동강 중류 연안의 순천지역에 이르렀을 때 유엔군과 함께 진격해온 국군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된다. (김동원, 앞의 책, 173~180) <자유부인> 이후 형성된 신사풍의 캐릭터 김동원이 관객들의 시선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1956)부터였다. 1954년 선풍적인 인기를 끈 정비석의 서울신문 연재소설(215회) 『자유부인』을 영화화한 이 작품에 양품점 주인 안태석 역이 주어졌다. 검열 당시 그가 유부녀 오선영을 끌어안은 포옹 장면과 그녀가 이웃청년 신춘호(이민)와 가진 키스 장면이 한국의 도덕 기준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상영이 보류될 위기 (“키스 장면이 말썽, <자유부인>도 상영 불허”, 『동아일보』, 1956.6.9) 를 맞기도 했으나 수도극장에 개봉되면서 15일간 15만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안태석 역할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영화평론가 이봉래는 ‘완전한 미스캐스트’라고 전제하고 “그 신파조의 대사와 움직임이 없는 생경한 연기는 이분이 어떻게 연기를 한 분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근래의 쾌작, 영화 ‘자유부인’”, 『한국일보』, 1956.6.7)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동원은 이 영화의 성공과 함께 대중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그런 후광 덕인지 그는 잇따라 같은 해에 김소동, 김한일 형제 감독에 의해 각기 만들어진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1956)와 <여성의 적>(1956)에 출연하게 된다. [사진] <자유부인>(한형모, 1956)에 출연한 김동원, 상대역은 여주인공 오선영을 맡은 배우 김정림 이후 그는 홍성기 감독의 <실낙원의 별>(1957)을 비롯한 <장미는 슬프다>(박상호, 1958), <별아 내 가슴에>(홍성기, 1958), <한말 풍운과 민충정공>(남홍일, 윤봉춘, 1959)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신상옥, 1959), <연산군>(신상옥, 1961), <유정>(김수용, 1966), <엘레지의 여왕>(한형모, 1967),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 <엄마 결혼식>(조문진, 1973) 등 160여 편에 캐스팅 된다. 이 가운데 주연급이 ‘영화연기로서의 이행을 확실히 실증 ’(유한철, “57년 영화계 총평”, 『조선일보』, 1957.12.26) 한 <실낙원의 별>(소설가 역) 등 60편에 이른다. 1950년대 중후반 김동원은 그동안 연극배우로서 누려온 정상의 위상에 버금하는 인기를 누렸다. 이 사실은 당시 월간 대중지 《희망》이 독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현역 남녀배우 인기투표’ 결과 (“제2회 배우 인기투표, 제1위에 남 김동원, 여 조미령”, 『조선일보』, 1957.8.3) 가 말해 준다. 그는 2위의 전택이, 3위의 최무룡을 제치고 대중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배우로 선택받았다. 그동안 그는 왕(<왕자 호동과 낙랑공주>, <연산군>)이거나, 회사 사장(<장미는 슬프다>), 독립운동가(<별아 내 가슴에>), 충신(<한말풍운과 민충정공>,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대학교수(<낭만열차>(박상호, 1959), <일월>(이성구, 1967)) 소설가(<실낙원의 별>, <장군의 수염>), 초등학교 교장(<저 하늘에도 슬픔이>(김수용, 1965)) 등 악역과는 거리가 먼 점잖은 신사풍의 인물들을 만들어 내었다. [사진] <장미는 슬프다>(박상호, 1958)에 출연한 김동원, 상대역은 여배우 김지미(사진제공: 김종원) 일본 유학 시절의 단역 출연 김동원은 1916년 11월 14일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에서 양화점을 경영하는 김경순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혁(東爀)이 본명이었으나 해방이 되는 해 11월 <검찰관> 공연 때부터 획이 많고 딱딱한 본명 대신 대중들이 알기 쉽게 평소 좋아한 작가 이광수의 아호 ‘춘원’에서 원(園)자를 따서 새로 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개성제일공립보통학교 4학년이 되자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서울로 이사했다. 보통학교 과정을 마치자 배제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한 후 처음 유진 오닐의 〈고래〉로 연극무대에 섰다. 부풀어 오른 그의 ‘대배우로의 야망’은 결국 일본대학 예술과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유학시절 그는 조선유학생들끼리 동경학생예술좌라는 연극 서클을 조직하여 본격적인 연극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일생에 연극의 동반자가 된 이해랑을 만나게 된다. [사진] <실낙원의 별>(홍성기, 1957)의 한 장면, 왼쪽이 여배우 주증녀, 오른쪽이 노경희(사진제공: 김종원) 이 무렵 그는 쇼치쿠(松竹) 영화사의 연기자 모집에 응모하여 8개월 동안 연수를 받고 ‘얼굴도 보이지 않는 단역’ 몇 편에 출연하기도 했다 .(김동원, 앞의 책, 70쪽) 그러나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결국 1939년 5년간의 일본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귀국에 오른다. 이후 그는 신협 등에서 활약하며 국내 최초의 <햄릿>(1951)에 출연, ‘한국의 로렌스 올리비에'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정확한 발성과 화술로 중후한 연기를 보여줬던 김동원은 2006년 5월 13일 아흔 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사전정보 없이 읽고 있는 시나리오가 언제 쓰였는지 알아내려면 무엇을 체크해야 할까? 여러 가지가 있는데, 내 경우는 욕설을 먼저 보는 편이다. 많이들 무시하는데 욕은 수명이 굉장히 짧다. 그 때문에 요새 욕설을 7, 80년대 배경의 영화에서 쓰면 정말 이상해져 버리는데, 사람들이 그걸 모르는 것 같다. 하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영화 속에 나오는 욕설들은 어느 정도 검열된 버전이었으니 아주 좋은 지표는 아니다. 다른 지표로는 에티켓을 들 수 있다. 특히 서비스업 종사자에게 대한 기초적인 예의. 60년대 영화를 보면 ‘멋진 남자주인공’들이 이런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다짜고짜 반말을 해서 (“야, 거기 보이!” “이리 와, 기사!”) 요새 관객들에게 재수 없게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당시엔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당연하다고 해서 그 때 옳은 일이었던 건 아니다. 당연하다며 옳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뿐. < 공포의 여덟 시간 >에서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던 것도 택시에 올라탄 악당들이 택시 운전사에게 던지는 반말이었다. (“이봐, 좀 더 빨리 달릴 순 없나?” “라듸오나 틀어.”)이 장면은 이들이 무례한 악당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대놓고 악당처럼 굴고 있는 건 아니고 택시 운전사도 별 반응이 없으니 손님이라고 반말을 찍찍해도 그게 큰 문제가 안 되었던 시절의 작품이다. 다른 단서들도 있다. 이 영화의 경찰들은 종로 보석상을 턴 강도들이 이미 시내를 벗어났고 부평, 인천 방면이 가장 위험하다고 말한다. 지리상 당연히 언급되어야 할 부천이 쏙 빠져 있는데, 그건 이 영화가 부천이라는 도시가 존재하기 전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강도들이 턴 보석류가 시가 이억 환 상당이라니 화폐개혁 이전이기도 하다. 답을 말하면 김묵 이 감독하고 김효천 이 각본을 쓰고 유한철 과 곽일로 가 윤색한 < 공포의 여덟 시간 >는 1962년 작품이다. 화폐개혁 힌트 때문에 몇 년 앞으로 잡은 독자들도 있을 텐데, 그렇다고 크게 틀렸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 공포의 여덟 시간 >(1962), < 키 라르고 >(1948) 영화의 내용은 낡은 호텔에서 예비역 소령과 마피아 일당이 대치했던 < 키 라르고 Key Largo >(존 휴스턴, 1948)와 설정이 비슷하다. 한 무리의 강도가 경찰에 쫓기다 산장호텔에 몸을 숨긴다. 그냥 조용히 숨었으면 별일이 없었을 텐데, 뒤늦게 온 두 명이 산장까지 올 때 차를 세워두고 ‘LOVE에 취해있는’ 두 커플을 권총으로 위협해 인질로 삼아 끌고 오는 바람에 그들의 정체가 산장 내에서 탄로가 나고 만다. ‘LOVE에 취해 있는’. 다시 한 번 읊게 된다. 60년대 대한민국 청춘에게 사랑이란 대문자 영어로 쓸 수밖에 없는 외제 사치품이었던가. 자, 이제 강도들은 산장호텔의 주인 가족과 손님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 < 키 라르고 >에서처럼 허리케인이 불어닥친 것도 아닌데 쓸데없는 짐을 만든 것이다. 여기서부터 작가들을 믿을 수가 없게 된다. 이들이 반드시 인질들을 접선장소까지 끌고 가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경찰은 아직 그들의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 그냥 택시를 잡아도 된다. 택시를 잡기 어렵다면 전화로 연락을 해도 되고. 하여간 수많은 자잘한 해결방법이 있는데, 이들은 굳이 데려온 인질로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호텔 사람 전체를 상대로 하는 바보짓을 한다. 일은 점점 커진다. 손님 중 한 명은 알고 보니 밀수업자다. 나중에 손님이 또 두 명 오는데 그 손님은 밀수업자와 약속이 있다. 회사원이라면서 죽어도 신분증을 내놓지 않으려는 손님이 하나 더 있는데 (당시는 주민등록증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던 때였다는 걸 잊지 말자) 그는 나중에 밀수업자를 미행하던 형사임이 밝혀진다. 여기에 임시 검문을 나온 또 다른 형사가 들어왔다가 잡힌다. 그러는 동안 강도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고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형사는 손님들에게 힘을 모아 강도와 맞서자고 선동한다. 하지만 밀수업자인 손님들은 또 자기만의 생각이 있다. 물론 이런 상황 속에서 악당들이 호텔 안 여자들을 가만둘 리가 없다. 그리고 강도 중 한 명인 백곰이 인질로 끌려 온 숙희에게 추근거릴 때 지문은 이 장면을 이렇게 찍는다. “KISS 하려 한다.” 하긴 사랑도 LOVE였으니 키스도 마찬가지로 수입품이었겠지. 강도( 황해 , 박노식 , 구봉서 ) 이 정도면 심심하지는 않겠다. 그리고 강도를 연기한 황해 , 박노식 , 구봉서 의 연기가 궁금하다. 암만 봐도 이 영화는 무게 중심이 강도 쪽에 쏠려 있는 작품이며 가장 좋았을 부분도 강도들의 내분을 그릴 때이다. 하지만 이 부지런함이 영화적 재미로 이어졌을지는 알 수 없다. < 키 라르고 >에서는 험프리 보가트와 에드워드 G. 로빈슨의 대결로 드라마가 압축되었다. 하지만 < 공포의 여덟 시간 >에서 등장인물들은 브라운 운동을 하는 공기 입자처럼 사방으로 마구 튄다. 착한 편에 험프리 보가트가 맡았을 법한 카리스마 있는 캐릭터가 없는 건 실수다. 밀수업자를 쫓던 형사 종국은 기능적인 역할 이외 어떤 개성도 없고 액션도 기계적인 반응에 불과하다. 하긴 당시엔 착한 편인 주인공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남자답고’ 정의의 편, 그러니까 사법부의 편이고 싸움을 잘하면 주인공 자격으로 충분했다. 결국 산장호텔의 전화선이 끊겨있다는 사실을 안 경찰들이 들이닥치고 강도들은 한 명씩 끔찍하게 죽는다. 이 살상의 대부분은 거의 사람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은 종국에게 책임이 있다. 나중에 그는 “희생자 없이 해결을 못 한 나 자신을 괴롭게 생각합니다”라고 하지만 난 안 믿는다. 더 믿을 수 없는 것은 보석을 짊어지고 산장호텔로 들어와 난리를 친 악당들의 동기이다. 언제나 최악의 길만 일부러 가는 것 같은 자칭 강도들의 행동을 보면, 그들이 요란한 자폭을 계획한 자살 클럽의 멤버라는 게 거의 확실해지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