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현우]한국어를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서, 이소연 양과 함께
- 제작년도
- 2010
2019년 5월, 4K로 복원된 옛날 한국영화 두 편을 극장에서 보게 되었다. 하나는 < 성춘향 >< 신상옥 , 1961)이고, 다른 하나는 < 파업전야 >(장산곶매, 1990)이다(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말하는 <성춘향>은 144분짜리 복원본이 아니라 영상자료원 한국영화 100주년 기념 ‘발굴, 복원, 그리고 재창조’의 개막식에서 있었던 90분짜리 ‘필름 판소리, 춘향’이라는 공연이다). 두 편의 영화 사이에는 대략 30년의 간격이 있지만 각자가 놓인 시대적 맥락에서 저마다 다른 의미에서 영화적 사건이 되었던 작품이고, 그런 만큼 이미 여러 번 기념 상영되고 그때마다 반복해서 이야기되어왔던 작품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을 함께 묶어 다시 한 번 이야기해보고 싶게 만든 것은, 두 작품이 각각 취하고 있는 ‘공연’과 ‘상영’이라는 공개 방식의 차이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모습으로 거의 동시적으로 나를 찾아온 두 작품을 체험하며, 새삼스럽게 영화의 복원이 지닌 의미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 또는 상념과 마주하게 되었다. <파업전야>의 재개봉 포스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들이 등장한다. ‘90년 노동영화의 전설이 돌아온다!’, ‘4K 디지털 리마스터링, 30년 만에 극장 정식 개봉!’ 등이 그것이다. 30년 만에서 4K로 복원된 <파업전야>를 극장에서 보는 것은 분명 새로운 감흥을 불러일으켰지만, 동시에 복잡한 질문을 품게 만들기도 했다. <파업전야>의 ‘전설’의 많은 부분은 영화의 상영 자체가 투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파업전야>의 필름은 더 높은 해상도로 복원되었지만, <파업전야>의 ‘영화적 사건성’의 어떤 측면, 즉 그 상영투쟁을 둘러싼 온갖 전설과 무용담은 기억되거나 증언될 수는 있을지언정, 복원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 사건성을 근사치에 가깝게 복원하는 방법은 당대에 다양한 위치에서 그 사건을 체험했던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담는 다큐멘터리적인 방식이거나, 에이젠슈테인이 < 전함 포템킨 >이나 < 시월 >에서 했던 것처럼 대규모 대중을 동원하여 그 사건을 재연하고 그것을 영화 안에 담는 픽션적 방식일 것이다. 30년 만에 극장에서 (재)개봉된 <파업전야>는 오직 포스터의 배경 이미지(당대의 사건성을 기록하고 증언하고 있는 다양한 신문 기사들의 스크랩-몽타주)를 통해서 그 사건성의 희미한 흔적을 담아내고 있다. 이번 <파업전야>의 (재)개봉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파업전야>를 다시 보면서, 뒤늦게 발견한 이 작품의 의미 또한 적지 않다. 오프닝의 배우 소개와 엔딩 크레딧에서 배역의 중요도나 역할의 기여도와 상관없이 오직 ‘가나다 순’의 원칙을 따르고 있는 데서 드러나는 ‘장산곶매’의 철저한 ‘공동창작’의 정신은 잊지 말아야 할 소중한 사건성이다. <파업전야>가 80년대 리얼리즘 미학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할리우드 리얼리즘의 개인적 영웅서사와 소비에트 리얼리즘의 전형성의 미학 사이의 긴장을 품고 있다는 점은, 새롭게 이야기될 만한 가치가 있다. 어쩌면 <파업전야>의 리얼리즘이 보여준 사건성은 당대의 노동현실을 충실히 취재-반영한 후 앞서 말한 혼종성의 리얼리즘 스타일로 그것을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운명을 앞서 내다보고 있는 일종의 ‘예지적 리얼리즘’이라는 점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 안에서 한수(김동범)를 비롯한 노동자들이 스패너를 들고 일어나게 한 것이 용역 깡패들의 무자비한 폭력이었듯, 영화 밖에서 <파업전야>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대중들이 각목과 화염병을 들고 떨쳐 일어나게 만든 것은 당시 공안 당국의 과잉 탄압이었다. 영화가 당대의 노동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던 만큼이나, 당대의 정치현실이 영화의 만듦새를 반영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 예지적 리얼리즘의 측면이 <파업전야>의 ‘영화적 사건성’의 중요한 부분이라면, 그것의 복원은 불가능한 것에 가까운 것이다. ‘필름 판소리, 춘향’은 김태용 감독의 연출, 이소연 소리꾼의 판소리 공연, 손성제 및 최혜원 이라는 두 뮤지션의 현장 연주를 통해 재창조된 ‘복합예술 공연’이다. 거의 60년 만에 이루어진 이 공연은 애초에 <성춘향> 개봉 당대의 ‘영화적 사건성’의 반복과는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던 기획이다. 그 공연은 영화 <성춘향>이 재매개한 원전인 판소리 현장 공연과 결합된 것이었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역-재매개로서의 복원이고, 두 뮤지션이 연주하는 전자음향과 결합된 여러 매체 사이의 크로스-오버라는 점에서는 새롭게 반복되는 재매개로서의 복원이다. 2000년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가 한 편의 영화 안에 이 복잡한 재매개 과정을 담아내려 한 시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필름 판소리, 춘향’은 그것을 영화 작품 밖으로 풀어헤쳐 보여주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후자의 시도는 디지털 시대를 맞아 복원된 몇몇 무성영화의 공개 시에 시도되었던 공연을 유성영화인 <성춘향>으로까지 확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디지털 복원은 원래 영화의 시청각적 질료를 최대한 원래의 것과 가깝게 복원해 내거나(<성춘향>의 경우), 심지어 그것보다 더 나은 해상도로 복원해 내기도 한다(<파업전야>의 경우). 그러나 이 복원의 충실도는 매체의 질료의 측면에서 이루어진 성과다. 하지만 한 편의 작품이 갖는 영화적 사건성에는 그 매체의 질료적 차원 이상의 것이 항상 개입되어 있기 마련이다. 상영조건과 상영 형식의 측면(또한 그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당대의 사회적 조건과 관객성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파업전야>의 (재)개봉은 일종의 ‘과소 복원’이고, ‘필름 판소리, 춘향’ 공연은 일종의 ‘과잉 복원’이다(이 ‘과소’ 또는 ‘과잉’이라는 표현은 단지 상대적인 비교를 위한 묘사적인 형용사일 뿐, 어떤 가치 평가적 함축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과소와 과잉은 과거의 영화가 지닌 사건성을 총체적으로 복원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그 총체적 복원 불가능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이 자리를 빌려 말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복원의 정치학을 위해서는 매체의 질료적 측면의 복원만이 아니라, 그것의 공개 형식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과 실험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근래 전 세계 영화제에서 가장 크게 주목받은 러시아 애니메이션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콘스탄틴 브론지트 감독의 <우주 없이 못살아 We Can’t Live without Cosmos>이다. 2008년 <화장실 러브스토리>로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 후보에 올랐던 감독이 그 후 6년 만에 발표한 작품이다. <우주 없이 못살아>는 2015년 5월에 열린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단편 우수상과 관객상을 동시에 받으며 한국 관객의 마음을 얻었고, 같은 해 6월에 열린 자그레브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와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도 단편 부문 대상을 받으며 세계 관객의 마음을 재차 확인했다. 수많은 영화제와 시상식을 사로잡은 <우주 없이 못살아>의 주인공은 우주인 훈련생들이다. 작품은 건장한 청년들이 마주 서 침대 위를 뛰는 장면으 로 시작한다. 바깥은 별이 가득한 밤. 성긴 눈발이 사선으로 날리는 매서운 계절이다. 1203, 1204 나란히 이어진 번호를 받고 같은 방을 쓰는 두 사람은 유모차 타던 시절부터 단짝이다. 그러니까 우주인 흉내를 내며 침대 위를 뛴 것도 하루 이틀은 아닐 것이다. 2015년 3월, 나는 모스크바에서 하룻밤 묵었다. 러시아 작가들이 휴양처럼 생각한다는 오픈애니메이션페스티벌 행 버스가 다음날 출발할 예정이었다. 페스티벌이 제공한 호텔 이름은 코스모스(호텔 클럽 이름은 솔라리스)였다. 3,600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규모지만 객실은 소박했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을 대비해 세운 건물인데 내부 장식도 그때 그대로가 아닌가 싶었다. 호텔 창밖으로 보이는 공원에는 은빛 탑이 예리하게 솟아 있었다. 거대한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공원을 산책했다. 하늘은 아침부터 무척이나 새파랬고 눈이 부실만큼 번쩍이는 탑 꼭대기에는 로켓이 놓여있었다. 거기서 유리 가가린의 조각상을 발견했다. 인류 최초로 우주 궤도 비행에 성공했다는 사람. 그곳은 모스크바 우주 박물관이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 씨가 훈련받은 가가린훈련센터도 모스크바에서 멀지 않다. 러시아 어린이라면 장래희망으로 우주인 정도는 한 번쯤 쓰겠구나 싶었다. 밤마다 함께 우주를 나는 꿈을 꾸던 두 친구는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며 일상적인 체력단련과 수영, 구토를 유발하는 원심력 훈련까지 해낸 끝에 우주인과 예비 우주인으로 선발된다. 1203을 태운 로켓이 흐린 하늘을 지나 별이 빛나는 우주에 다다르자 센터 사람들과 모니터로 지켜보던 1204는 박수치며 환호한다. 그러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그만 교신이 끊긴다. 1990년 일본 최초 우주인의 통역사로 소련을 찾은 요네하라 마리는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이카로스들의 묘”를 만난다. 1) 그녀의 기억에 언론은 1961년 우주 비행에 성공한 가가린을 소비에트의 이카로스라고 불렀다. 그녀는 넓은 기지 한구석의 비석을 보며 야심 찬 성공의 그늘에 가려 적막한 죽음을 맞은 이카로스가 한둘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친구가 떠난 까만 하늘, 가만히 가득한 별들이 흰 눈이 되어 쏟아진다. 지상에 슬픔이 두껍게 쌓여도 삶은 멈추지 않는다. 훈련센터 관리자는 곧장 1203의 기록에 줄을 긋는다. 1204는 이제 다음 차례 우주인이다. 하지만 혼자 남은 그에게 꿈은 더는 같은 의미가 아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기 전 이 영상 편지의 수신인이 뜬다. TO OUR FRIENDS <우주 없이 못살아>는 별이 가득한 우주와 우주비행사를 꿈꾸는 두 친구 이야기다. 둘은 어릴 때부터 수없이 함께 우주를 이야기하며 자랐을 것이다. 우주 없이는 못산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은 꿈을 나눈 친구가 아닐까. ‘우정 없이 살 수 있을까.’ 소중한 친구들에게 보내는 감독의 메시지를 부디 확인하시길 바란다. 주1. 요네하라 마리, 「이카로스와 가가린」, 『교양 노트』, 마음산책, 2010
지난 7월 18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 김태용 감독 단편선’은 내게 그 의미가 매우 특별한 상영이었다. 영화 스태프로 일한 지난 10년의 결산 같은 느낌이었는데, 딱 반환점을 돈 것 같았다. (이대로 10년이나 더? 혹은 앞으로 10년밖에? 란 생각이 들어 시원섭섭한, 매우 복잡한 느낌이었다) 어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조직의 음모로 과거를 잃은 사람이 하나씩 과거의 기억을 되찾는 것처럼 나는 지난 8년간 아무도 모르게 덮어둔 내 기억을, 뭐랄까 공증받은 느낌이었다. 그러한 결산의 맛은 작품의 완성도나 내용을 떠나 그 자체로 상당히 강하고 또 깊었다. 단순하게는 8년 만에 극장에서 다시 보는 작품에 대한 향수 때문이기도 했고 감독님을 알게 된 이후 모든 단편 영화에 참여했다는 일종의 성취감 같은 것 때문이었으리라. 이를테면 그랜드 슬램 같은 것. 이미 며칠 전부터 그러리라 예상은 했지만 상영이 끝나고 꽤 오랜 시간 먹먹했다. 차은이를 떠올려서 그런 것인지 (난 항상 영화 속 차은이 엄마에게 “답답해”란 말을 할 때마다 울컥한다) 그날 처음으로 관객과 만난 < 그녀의 전설 >에 대한 복잡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떨리는 마음으로 관객과의 대화까지 마치고 나니 드디어 진짜, 한 막이 끝남을 느꼈다. 과연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에게 진심으로 즐거운 일인가? 가끔 이런 물음들이 밀려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김태용 감독님과의 현장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영화를 준비하고 촬영하고 마무리하며 느끼는 감정들. 하나의 사이클을 돌면 그것이 어느덧 인생의 한 부분이 되어 있다. 왜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이 현장을 가장 오랫동안 기억할까. 비단 현장에서 욕지거리와 고함(때론 함성), 책임회피와 상처의 피드백이 없어서 그랬던 것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만난 이 현장은 그 이전의 분위기와 무언가 달랐다. (물론 < 달리는 차은 >이 상업영화가 아닌 저예산 독립영화 형태로 제작되었고, 주제적으로도 인권영화란 특수성이 있음은 확실하다) 그건 굉장히 설명하기 힘든 감정인데, 감독님을 위시한 스태프를 함께 묶는 투명한 막 같은 게 있지 않았나 싶다. 유산균을 보호하기 위한 동글동글 캡슐 같은? 이 안에 들어가면 자외선도 차단되고 누군가 흉기를 찔러대도 튕겨 내버릴 것 같은 그런 막. 그것을 이루는 근간에 모두가 믿는 ‘영화’ 그 자체가 자리했던 것 같다. 우리가 만드는 한 프레임 한 프레임의 쇼트는 현실의 우리와 가상의 영화를 이어주는 작업이었다. 모든 스태프가 그것에 집중한다. 분리되지 않는 느낌. 현실과 이상이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김태용 감독님과의 지난 작업들은 그러한 모습이었다. 정말 영화 같은 마법의 순간들이 따라왔다. 영화 제작의 즐거움, 허무함, 성취감, 나아가 인생의 덧없음, 희망, 우연과 필연의 관계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따라왔다.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그러한 과정의 연속이구나, 다른 삶들과 삶들이 연결되는 그러한 느낌. 그리고 나에게 진심으로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은 어두운 극장에서 바라보는 스크린 너머의 세상이 아닌 그 세상을 만드는 과정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만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 특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몇 년간의 단편 작업을 하며 아마도 셀 수 없이 많은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회의를 했을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대부분은 과거의 일들에 관한 것. 그전 작품을 만들 때 겪었던 에피소드들과 즐거움에 대한 것들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끊임없이 삶은 이런 이야기들로 채워졌다. 조감독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 지난 네 편의 단편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본다. 어느 영화인, 어느 포지션이든 10년의 세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수없이 많은 밥차를 만나고 차디찬 새벽 공기를 가르고 무너질듯한 두 다리로 새벽을 지킨 시간들. 김태용 감독님과의 흥미로웠던 네 번의 영화 여행을 소개한다. 우리는 성장한다! < 달리는 차은 > “엄마, 나 답답해…” 아무도 없는 밤안개 낀 트랙을 한 소녀가 달린다. 점점 호흡이 차오른다. 눈물도 차오른다. 그건 억울함 같은 답답함이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는 삶. 그것을 깨닫고 나면 이 세상을 살아내는 것은 마냥 즐겁고 유쾌하지만은 않게 된다. 차은은 달리고 싶다. 나는 영화를 하고 싶다. 비수기는 늘 힘들다. 가장 큰 문제는 ‘생각할 시간’이 많아진다는 것. 2007년 여름. 연출부로 준비하던 장편 영화가 4개월 만에 중단되었다. 내가 받은 보수는 뻐카충(버스 카드 충전) 몇 번이 전부. 허망했다. 처음으로 ‘엎어진다’는 것을 맛보았는데 (이후로는 자주 그래서 무던해지긴 했지만) 정말 좌절감이 컸다. 사회의 한 개체로서 살아내야 하는 나의 또 다른 롤도 있는데 나의 욕심으로 너무 한쪽 코너로 몰리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당시에는 그런 단어가 없었지만 요즘 말로 ‘열정페이’였지 싶다. 2시간 동안 영화에 빠져 나를 잊듯, 영화 작업의 순간들은 그 이면의 현실적인 삶들을 감추어버린다. 반대로 영화 작업을 하고 있지 않으면 현실적인 문제들은 내가 팽개쳐 놓은 만큼 쌓여 무거운 채무처럼 다가온다. 그렇게 짐을 싸고 유난히도 더운 여름을 보냈다. 현실의 삶은 많이 더웠다. 아직 나는 (가족에게) 영화사로 출근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었지만 사실은 하루 열다섯 시간을 두 가지 알바로 보내는 일종의 취업준비생, 일종의 영화 잉여였다. 그러다 엎친 데 덮친 격 야구를 하다 다쳐 수술하였고 일도 그만두게 되었다. 그렇게 청춘의 시간이 너무도 빨리, 아무렇지 않게 죽어가고 있을 무렵, 제안이 왔다. 장편 상업 영화 때 만난 현장 편집기사의 소개로 조감독을 만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연출부의 구성이 좀 특이했다. 조감독 두 명에 연출부 한 명 그리고 스크립터. 연출부 한 명은 나를 말하는 것이었고 다른 세 분은 모두 누님들이었다. 물론 직함과 성별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은 인원으로 준비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해야 하는 업무가 많았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 환경이 연출부의 모든 파트 업무를 해볼 수 있는 꽤 좋은 기회였다. 나는 ‘그 사람’을 몰랐다. 영화 제목을 들어 봤지만 보지는 못했다. 첫 만남의 기억은 특별한 게 없다. 당시에 < 가족의 탄생 >으로 여기저기서 상을 받느라 바빠 보였던 기억만 난다. 하루는 꽃을 엄청 많이 가져왔는데, ‘아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꽃을 받아봤지?’란 생각을 잠깐 했던 기억도 난다. 생각보다 많은 일이 있었다. 영화 제작의 가장 큰 부분은 ‘차은’을 찾는 것이었다. 다문화 가정 환경의 아이를 찾는 것과 실제 육상선수를 캐스팅하는 방법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전라북도의 거의 모든 초등학교에 전화를 걸어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파악하고 직접 찾아다니며 캐스팅을 위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결과적으로는 전국육상대회의 현장에서 감독님이 전수영 학생을 찾았다. 애타게 기다려 온 차은이를 육상대회 현장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것은 정말 마법 같은 일이었다. 또한 이 영화 작업의 묘한 순간이 많았는데 차은의 동생 ‘동민’ 역을 맡은 나겸이의 캐스팅 또한 그러했다. 어떤 캐스팅 매니저의 소개로 온, 연기 경험이 전무했던 어린이였는데 간단히 줄거리를 얘기해주니 “우리 엄마도 필리핀에서 왔는데”라고 했던 것(극 중 엄마도 필리핀 사람이다). 이런 게 운명인가 싶었다. 그리고 TV 인간극장에 나오셨던 아르세니아 씨가 엄마 역을 하게 되었고 나머지 한자리! 차은, 동민의 아버지 역은 나겸이의 실제 아버지가 맡게 되었다. 그렇게 비전문 배우 넷을 데리고 전북 부안으로 내려가게 된다. 차은은 준비할 게 많은 영화였다. 육상부도 등장해야 하고 큰 스타디움도 뛰어야 하고 여러 곳으로 로케이션 장소가 흩어져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제한된 시간 안에 한 번도 연기 경험이 없는 배우들을 데리고 촬영을 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부담이었다. 그런데 수영이는 우리의 걱정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기술적인 것, 영화 연기라는 것에 무지했음에도 열두 살 아이는 있는 힘껏 자신의 감정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표현했다. 무리한 스케줄과 체력적 난이도가 상당했음에도 수영은 영화의 차은이가 되어가며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찍은 소스들을 가지고 편집실에 둘러앉았을 때 우리 모두는 정말 크게 웃었다. 어떻게 해도 어찌할 수 없는 배우들의 서투름과 어색함이 보였기 때문이다. 많은 고민과 함께 현재의 버전이 나왔다. 감추기보다 적극적으로 그들의 살아있음을 살리는 방향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때의 순간들이 생생하다. 영화의 촬영을 완성하는 편집의 위대한 힘을 느꼈다. 그해 인권영화 중 가장 긴 촬영 기간(12회차)과 후반 작업을 통해 영화는 결국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 달리는 차은 > 제작의 원동력은 서두에 말한 것과 같은 현실과 영화 사이의 알 수 없는 힘 같은 것이었다. 모두가 이 영화를 믿는 것처럼 보였다. 배우도 스태프도 모두 이 영화의 제작 순간순간을 사랑했다. 수영이가 차은이 되는 순간을 우리는 함께 했다. 3주간의 촬영이 끝났을 때, 어떤 전시 상황에도 출격이 가능한 하나의 소대가 지금 막 편성된 느낌을 받았다. 모항의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 바다가 보이는 평상에서 우리는 한 아이의 다양한 눈빛을 담았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우리는 1cm씩 성장하지 않았나 싶다. 감독님과의 첫 번째 영화 여행은 그렇게 종료되었다. 제작 과정 자체를 즐길 줄 알고 영화의 마법 같은 순간을 믿고 또 맛보는 그런 여행. 그리고 이 한 번의 여행은 나에게 영화 동지들이란 큰 선물 또한 선사했다. 덧붙임. 1. < 달리는 차은 >의 스태프를 결속시킨 건 숙소의 역할도 컸던 것 같다. 작은 산속에 숨겨진, 이상한 분위기의 숙소였는데, 아마 프랑소와 오종의 < 8명의 여인들 > 한국판을 만든다면 어울릴 법한 그런 장소였다. 하루는 숙소 스케줄 때문에 모든 스태프가 남녀로만 구분, 커다란 방에서 다 같이 잤는데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순간이다. 2. 늘 영화작업의 추억에는 어느 맛집이 포함되는데 변산 ‘털보네 짬뽕집’이 그렇다. 작년, 오랜만에 들린 그곳에는 짬뽕은 그대로 있었지만 말론 브란도를 닮은 털보 아저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잊고 지낸 시간 속에서 아저씨는 멀리 사라졌다. (몇 해 전 갑자기 돌아가시고 현재는 남은 가족들이 장사를 하고 있다.) 3. 차은 역의 수영이는 촬영 당시 육상을 시작한 지 2년 된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었다. 현재는 제주대학교 육상부 2학년으로 2014년 전국체전 육상 여자부 계주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동민 역의 나겸이는 인천의 한 중학교에 다니고 있다. 4. < 달리는 차은 > 때의 스태프 중 촬영, 녹음, 연출, 제작 파트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김태용 감독님과 함께 작업하고 있다. 제주에서 만난 < 그녀의 연기 > “갈까부다 갈까분디 내 님을 따라서~ 갈까부다” 구성진 판소리 소리가 흘러나오는 병실. 이제는 그저 가느다란 실처럼 미미하게 하나의 호흡만 남겨둔 아버지가 누워있다. 철수는 그런 아버지를 위해 영희를 데려온다. 판소리 노래를 선물하는 영희. 그녀의 연기는 무엇 때문이고 우리의 영화는 어떤 연기를 원했는가? 아름다움! 그것은 아름다움 아니었을까? 사람만이 가진 아름다움. 제주의 어느 후미진 주택가 골목. 거나하게 취한 무리들이 강강술래를 돈다. 조금 전에는 식당에서 판소리 한 자락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배우와 스태프들이 모여 추운 겨울날 강강수월래를 한다. 2011년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으로 기억되는 겨울밤. 아마 달도 거의 들어 차 있었던 것 같다. 홍콩영화제에서 아시아의 감독들에게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물었다. 이 단편은 그에 대한 대답. ‘Beautiful 2012’의 김태용 감독 편, 한국어 제목은 ‘그녀의 연기’. 영문 제목은 ‘You are more than beautiful’ 이었다. 합체하면 ‘그녀의 아름다움을 넘어선 연기’ 정도로 말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은 판소리가 관건이었다. 현재 뮤지컬 ‘아리랑’으로 유명한 국립 창극단 배우 이소연 씨가 속성으로 공효진 배우에게 판소리를 사사(?)했다. 공효진 배우의 뛰어난 감각과 노력으로 판소리 ‘춘향가’ 중 ‘갈까부다’가 2주일 만에 완성되었다. 공블리라는 애칭처럼 공효진 배우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영희 역할을 연기했다. 그야말로 그녀의 연기! 그 연기가 철수와 아버지를 이어주고 관객과 그들을 이어주었다. 철수 캐릭터를 만드는 데는 실제 제주에 사는 나의 오랜 군대 친구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말을 돌보고 여자를 멀리하는 철수 같은 친구였는데 지금은 아이 낳고 잘살고 있다. 철수와 영희도 그 이후에 다시 만났을까?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았을까? 그리고 어머님 제사상에 수박도 올렸을지 궁금하다. 프로젝트 초반, 아름다움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제주의 아름다움과 어떤 관계의, 사람의 아름다움을 담기로 이야기를 좁혔다. 감독님이 던진 가족이란 화두, 특히 서먹한 부자지간의 갈등이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해소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아버지와 아들. 언제나 어렵고 어색한 느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철수도 아버지께 직접 얘기하기 힘들었으리라. 어떠한 말이든. 영화 < 만추 >에서처럼 상황극의 활용이 주효했다. 연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또 다른 연기. 실제와 환상의 모호한 경계. 그것을 통해 삶의 아이러니한 순간들을 표현한다. 그렇게 그녀의 연기를 통해 철수는 아버지와 소통하게 된다. 드디어 얘기하기 힘들었던 말들이 쏟아진다. 우리는 어쩌면 연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거대한 삶이란 영화 한 편 안에서 진심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 연기가 거짓이냐 진실이냐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때론 진실이 때론 거짓이 내가 꿈꾸는 아름다움을 위해 상황에 따라 골고루 쓰인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감독님의 조감독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입에 잘 붙지는 않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뭐랄까 감독이란 단어를 포함해서 그랬던 것 같다. 나는 대부분 나를 소개할 때 그냥 연출팀으로 불리길 원한다. 감독을 돕는다는 뜻 이상의 의미를 생각했던 것 같다. 조감독은 감독이 불의의 문제로 부재할 때 그 사람의 역할까지도 대신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 중압감과 전체 조직 그림을 그리고 스케줄을 책임지고 소통의 제1 창구라는 중요한 임무의 매력을 비로소 체감했다. 제주는 정말 아름답지만 촬영을 하기에 정말 어려운 곳이기도 했다. 특히 겨울의 제주는 무섭다. 시시각각 변하는 풍광은 놀라웠다. 바로 어제 확인한 장소가 날씨 탓으로 완전히 다른 곳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예상치 못한 고지대의 폭설과 기온 급강하는 촬영에 상당히 어려움을 주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용이했던 부분도 있다. 병원이나 목장, 해안도로, 국숫집 등의 로케이션은 그야말로 한산함 그 자체였다. 별다른 통제 없이 원활하게 진행됐다. 제주는 보조출연자들을 섭외하기 어려운 곳이기도 하다. 몇몇 업체가 있지만 보조출연 배우들은 대부분 연기경험이 없다. 하루종일 병실에 누워있는 촬영은 보조출연 어르신들에게는 ‘생지옥’ 같았으리라. 처음 한두 시간이야 누워서 진짜로 잠을 자면 그만이지만 원하지 않을 때 누워 있는 것은 좀도 쑤시고 참 곤욕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철수 역의 배우 박희순 이 아버지 역의 출연자에게 촬영 말미에 한 “오늘 촬영이 어땠냐”는 질문에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는 답변이 잊히질 않는다. 덧붙임. 1. 이번 영화 여행에서 건진 또 하나의 수확은 배우 공효진을 통해 알게 된 ‘오는정김밥’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제주에 가면 늘 먹는 음식 중 하나가 되었다. 2. 영화의 매력 중 하나는 영화 작업이 아니면 절대 가보지 않았을 곳을 간다는 것이다. 제주의 구석구석을 돌며 많은 이야기와 계획을 세웠다. 그러한 영감들이 현재 작업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을 보면 많은 것들은 신기하게도 우연으로 시작해 필연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또다시 성장한다 < 피크닉 > 천하장사쏘세지를 넣고 케첩을쫙~ 도시락 김으로 돌돌 말아 착착 썰면 소풍 준비 끝! 동생을 버리러 절로 향하는 꼬마가 있다. 그래! 우리 집의 문제아 동생, 동민이를 버리면 엄마도 좋고 나도 좋고 우리 가족 모두가 행복해질 거야. 3D 안경과 스크린 사이의 마법 같은 공간 속에서 꼬마의 모험 세계가 펼쳐진다. 거짓말처럼 나로호가 발사되어 우주로 향하던 날, 꼬마 수민이는 무엇을 보았을까? 나는 그때 무얼 하고 있었던가? 새로운 도전이었다. 잠시 며칠간 다녀오는 피크닉 이 아니라 원양어선과 같은 오랜 시간의 여행이었다. 큰 예산의 장편을 준비하다 만난 프로젝트였는데 결과적으로 1년 남짓한 시간을 이 단편 영화를 만드는 데 보냈다. 2013년 여름 KAFA에서 진행된 3D 교육에 참석했던 게 프로젝트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일주일간의 기본적인 3D 교육을 받고 작업에 착수했는데 사실 난 3D 영화를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SF, 액션 장르의 영화들이 많았고 시각 피로도가 많이 쌓였던 경험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교육 중 보았던 < 라이프 오브 파이 >를 통해 3D의 매력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었다. 스크린의 x와 y축(가로와 세로) 거기에 덧붙여 z축(깊이)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3D라는 형식과 드라마라는 장르의 결합, 미학적인 접근, 두 대의 카메라 운용, 기존에는 존재하지 않던 스테레오 그라퍼(입체팀), 거기에 몇 가지 큰 CG 작업까지.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교육을 담당했던 KAFA 팀이 카메라 운용과 입체를 담당해주었고 CG를 담당한 덱스터 워크숍 팀이 전반적으로 이를 함께 했다. 약 세 달간의 프리와 8회차 촬영 그리고 약 5개월의 후반 작업을 통해 2014년 5월,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에서 < 신촌 좀비 만화 >(유령-너를봤어- 피크닉 )의 타이틀로 첫선을 보이게 된다. 장편 상업 영화와 비슷한 기간과 인력으로 작업을 하다 보니 예의 단편 작업과는 그 스케일 자체가 좀 달랐던 것 같다. 조감독으로 준비해야 하는 항목들이 많아진 느낌이었다. 넘나들며 백업을 할 수 있는 사이즈가 아니어서 연출부 각자가 맡은 분야를 스스로 준비하고 책임져야 하는 업무의 정확한 분업화가 필요했다. 촬영 때 CG 컷을 진행하며 프리비주얼 - 테크비주얼 작업의 중요성과 현장에서의 CG팀과의 협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도 깨달았다. 프리부터 포스트까지 하나의 파이프 라인으로 구성된 CG 담당 연출부의 필요성을 느꼈고 ‘연출부의 경력 주안점을 어디에 두는 것이 좋은가’란 고민 또한 하게 되었다. (CG 업체 출신일 수도 있고 CG 담당을 많이 한 연출부일 수도 있고 미술팀 혹은 애니메이션 경력의 인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러한 고민은 다음 프로젝트에서 상당히 큰 도움이 된다. 이야기는 민예지 작가(< 달리는 차은 >)와 둘이 시작했다. 짧지만 강력한 그리고 3D, CG 크리쳐 등 테스트 목적의 사안들을 아우르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첫 회의 중 나온 서번트 증후군 아이의 그림에서 모티브를 얻었고 그렇게 시나리오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윤곽이 나오고 감독님과의 각색 작업을 거쳐 촬영에 들어가게 되었다. 프리 작업 때 가장 어려웠던 것은 미술팀, CG팀, 연출팀이 고민한 판타지 세계에 대한 합의였다. 꽤 긴 시간, 많은 콘셉트 아트의 결과물이 버려졌다. 각자의 다른 관념과 이를 구현할 수 있는 환경, 테크닉적인 부분의 실현 가능성 등이 이슈였다. (개인적으로는 거대한 새와 주인공 수민( 김수안 )이 빙판 위에 마주 보고 서 있던 그림이 아직도 생각난다. 채택되지 않았으나 그 이미지의 강렬함이 인상적이었다.) 누가 과연 사람의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오는 것을 쉽게 그릴 수 있겠는가? (대부분 우리가 보아온 몇몇 영화 속 이미지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영혼은 과연 어떠한 움직임을 보일 지에 대한 상상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3D 효과의 장점 또한 살려야 하니 인물 움직임의 방향성이나 그에 따른 촬영방식 등 고민이 많이 필요했다. CG를 위한 배우의 바디 스캔부터 와이어 촬영. VFX, 음악과 사운드 이펙트까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요소들이 결합되어 영혼 분리 장면이 완성되었다. 수민 역의 배우를 찾기 위해 200명가량의 아이들을 만났다. 그러나 이번 역시 쉽게 나타나 주지 않았다. 그러다 기존의 배역 연령을 수정하면서까지 한 아이를 선택하게 되었는데 그 배우가 김수안 이었다. 이제는 관객 대부분이 그 얼굴을 한 번쯤은 보았고 또 기억할 만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배우다. < 숨바꼭질 > < 차이나타운 > (현재는 < 부산행 > 촬영 중이다) 에서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수안이는 연기 천재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올해 초등학교 4학년(당시 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 우주로 날아간 로켓처럼 신비롭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촬영 내내 우리는 그녀의 놀라운 집중력, 이해력, 체력, 자연스러움, 센스 등을 보고 감탄했다. 내 기억으로는 수안이 때문에 NG가 났던 경우는 없었을 정도로 완벽했다. 심지어 여섯 살 동민 역의 지성이를 가르쳤다. “그렇게 연기하려면 하지마. 넌 밥 먹을 자격도 없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김우형 촬영감독님과는 세 번째 작업이었다. 오랜 팬으로서 그분과 작업하는 것은 어떠한 특혜 같은 느낌이다. 대부분은 눈빛으로 말씀하신다. 난 그 무언의 감정과 커뮤니케이션이 좋다. 여담이지만 몇 해 전, 팬으로서 그런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김태용 감독님과 김우형 촬영감독님에게 서로를 언급했는데 요지는 두 분이 함께 작업하는 영화를 언젠가 꼭 봤으면 한다는 그런 얘기였다. 물론 두 분은 그전부터 지인 관계였지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 만추 >의 작업 소식이 들려왔을 때 나는 울컥하기까지 했다. 작은 소원 하나가 이루어진 느낌이었다. 그랬으니 < 피크닉 >의 작업은 얼마나 더 했을까.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작업에 참여한다는 자부심이 상당했고 그만큼 부담감도 컸던 기억이 난다. 덧붙임. 1. 고흥은 참 먼 곳이다. 요즘 어떠한 교통수단을 이용해도 대부분 5시간이 넘게 걸리는 곳은 없을 텐데 이곳은 거의 여섯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고즈넉한 금탑사, 외나로도의 풍광은 자연 그대로 운치를 가졌으며 촬영 여건으로도 매우 좋았던 기억. 지리적 위치 때문에 11월 중순까지 단풍이 머무는 곳이었고 멋진 비자나무가 가득한 숲이 있고 한가로운 포구가 있었다. 나로호의 이름은 나로도에서 온 것이며 이곳이 발사 장소로 선정된 이유 중 하나는 전국에서 인구 분포가 가장 적은 곳이기 때문이란다. (추진체의 낙하 등 여러 이유에서 사람이 없는 곳이 당연히 유리해 보인다) 2. 이곳의 명물은 사실 따로 있었다. 나로호, 우주인 이런 것이 아니라 뜨끈한 달걀 후라이가 올라간 ‘우주반점’의 짜장면이 아닌가 싶다. 나는 그 해 먹은 음식들 중 이 짜장면을 최고라 여겼다. 그건 옆에서 함께 한 수안이 때문이었는지, 백반으로 지겨워진 식단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먹어 본 역대급 짜장면이었다. (우리팀은 요즘도 우스갯소리로 고흥 가서 짜장면이나 먹고 오자고 한다. 물론 쉽지 않다.) 3. 학교 놀이터 장면에 등장하는 우주인은 우리가 묵던 숙소 로비에 있던 조형물이었다. 이 호텔에 러시아 우주과학자 등 많은 연구인이 머물렀다고 한다. 로비에는 그들의 선물인 마트료시카 인형도 전시되어 있다. 촬영 중 묵어 본 이색 숙소 중 하나. 다시 또 제주에서 만난 < 그녀의 전설 > “유진아~ 엄마는 이제 산으로 간다” 바다의 인어, 해녀 엄마가 어느 날 사라졌다. 바다가 지겨웠던 걸까? 엄마는 곰으로 나타나 산으로 들어갔다. 신화와 설화의 천국 제주. 그 제주에서 또 하나의 전설로 남은 한 해녀 이야기. 우리는 언젠가부터 해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환상의 무대 제주 그리고 강인한 여성 해녀. 과연 우리는 한 해녀의 죽음을 어떠한 형식의 장례로 치룰지 고민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한바탕 춤과 노래가 펼쳐진다. UHD, 제주 날씨, 수중 신, 뮤지컬, SFX, VFX, 아역 배우 컨트롤 그야말로 종합선물 세트가 그 뒤를 따른다. 지난 피크닉의 작업이 3D와 VFX에 대한 여행이었다면 이번 그녀의 전설은 SFX 특수효과에 관련한 것이었다. 실종된 해녀가 곰이 되어 돌아온다는 설정. 예산과 한정된 작업 기간, 무엇보다 배우들끼리의(곰과 타 배우들) 보다 긴밀한 교감(인터렉션)이 필요한 드라마였기 때문에 우리는 SFX로 접근하였다. CG 크리쳐를 만드는 작업이 아닌 쉽게 말해 진짜 같은 곰(탈)을 만들어 필요한 부분을 후반에서 CG로 덧입히는 작업의 방식을 택했다. 애니메트릭스는 십여 개의 얼굴 뼈대를 심고 이를 리모트 컨트롤로 작동시키는 원리다. 턱의 상하 움직임, 입술 근육, 눈두덩이 근육, 눈의 깜빡임, 귀의 움직임 등이 두 대의 컨트롤러로 작동되었다. 그리고 특별한, 예로 의인화된 곰의 과장된 표정을 원했던 샷들은 후반에서 CG 얼굴로 갈아 끼우기도 했다. 즉 곰은 그 곰 슈트 자체로 진짜 곰처럼 보여야 했고 또 어떤 장면에서는 의인화된 곰이기도 해야 했다. 접근에 따라 다양한 쇼트플랜이 요구되었다. 약 두 달간의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곰 슈트가 만들어졌다. 곰의 움직임을 연기할 배우의 3D 바디 스캐닝 작업부터 한 땀 한 땀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곰의 근육과 털, 그리고 기술과 노하우의 집약체인 곰의 헤드까지 거의 하루도 쉬지 못하고 SFX팀의 작업이 이어졌다. 움직임은 동물의 동작에 관한 연구를 한 무용수 출신의 (< 피크닉 >의 만화 속 공주 - 이초희 배우의 움직임을 담당하기도 했던) 김재리 선생님이 담당하였고 실제 곰 안에서 움직이는 배우 역시 현업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김기범 무용가가 맡아주었다. 인체의 비율 때문에(엎드리면 뒷다리가 너무 길다. 굽히면 다리의 너비가 넓어지고, 거기에 앞다리부터 뒷다리의 길이, 허리 부분이 인간이 훨씬 짧다) 어쩔 수 없이 실제 곰과 차이가 나기도 했지만 촬영 때 앵글의 선택, 동작의 방향을 활용해 최대한 이를 보완하려 노력했다. 실제 촬영에서의 가장 큰 문제는 배우가 곰 슈트를 입고 십 분도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메카닉이 들어간 헤드의 무게와 모터소리 때문에 배우는 거의 패닉 상태였다. 거기에 화창한 봄날의 기온은 거의 호흡 곤란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중간중간 산소통을 통해 배우의 상태를 관리했지만 전신 털 옷을 두르고 무겁고 빡빡한 헤드를 쓰고 연기를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배우의 시야 확보는 외부 털에 심어진 초소형 카메라에서 보내는 영상을 특수 안경으로 확인하는 방식. 4족 보행이냐 2족 보행이냐에 따라 카메라의 위치가 달라지므로 이 역시 세팅 시간이 필요했다. (움직임 때문에 손과 발도 2족과 4족의 형태가 달랐다.) 디렉션과 상대 배우의 대사 등은 인이어 시스템으로 해결되었다. 이러한 곰의 상태는 촬영 시간을 압박했다. 예상보다 훨씬 더 힘든 작업이었다. 거기에 오락가락하는 날씨(계속 비가 오락가락 내렸다), 컨트롤이 되지 않는 아역배우, 뮤지컬 팀의 안무 합 등 현장에서 많은 기다림의 요인들이 진행을 더디게 만들었다. 이번 작품에도 우연한 혹은 필연적인 만남도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은희 선생님을 만난 것이었다. 예의 다른 작업처럼 이번 역시 캐스팅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엄마 역(목소리 연기)을 맡아 주실 분이 쉽게 나타나지 않았던 것. 우선 제주 방언이 필수고 해녀 분들의 이야기라 실제 해녀 분들을 여러분 만났지만 늘 연기력에 대한 부분이 발목을 잡았다. 연기력을 고려해 제주 내 극단의 배우 분들도 만났고 성우, 제주 출신 배우들까지 알아보았지만 이렇다 할 소득이 없던 차, 제주 씨네마테크의 오주연 대표님 아이디어로 제주 출신이신 은희 선생님을 섭외하기에 이르렀다.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부르셨던 ‘꽃 반지 끼고’ ‘사랑해’가 어렴풋이 기억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찾은 곰의 목소리와 육체의 한계를 시험하는 곰의 몸이 만나 ‘그녀’가 완성되었다. UHD라는 콘텐츠의 포맷은 제주와 잘 어울렸다. 자연, 스펙터클한 풍광을 담기에 좋은 고해상도의UHD는 그중에서도 제주의 아름다운 심해를 훑고 다닐 때 그 느낌이 배가 되었다. 수중촬영 역시 그 과정이 녹록하지 않았다. 우선 날씨에 민감한 작업이고 물 때와 해녀 분들의 컨디션에 따라 섭외, 촬영이 가능한 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약 1주일간의 촬영이 별도의 유닛으로 진행되었다. 영화 현장은 늘 변수들이 발생하고 조감독은 이를 제작팀과 상의하여 다음 대안을 제시하여야 한다. 뒤로 막힌 스케줄과 정해진 예산 안에서 하나의 빠른 판단은 많은 것을 바꾼다. 시원하게 퍼부으면 좋으련만 야속하게도 비는 오락가락 내렸다. 대기 시간은 그저 소비되는 것. 차라리 휴식이라도 제대로 하면 좋으련만. 결국 스케줄은 다시 꼬이게 되었지만 먼저 쳐낼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 다행, 바로 진행 수정에 들어간다. 스텝들이 이동하는 사이에 새롭게 장소를 섭외하고 다른 신을 찍었다. 그렇게 선방하고 다시 퍼즐 맞추듯 스케줄을 수정하니 어느덧 일주일간의 촬영이 끝이 났다. 그녀는 해녀들에 둘러싸여 먼 길을 떠났다. 음 우리 엄마가 곰이 되어 산으로 간다고 하면 그래도 살아있음에 기쁠까? 아니면 이 헤어짐도 죽음과 같아 슬플까?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결국 부재하는 것이지만 본인이 희망하는 곳으로 갔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덜 슬픈 것도 같다. 이번 영화도 나에게 몇 가지 질문들을 던졌다. 외적으로는 조감독의 역할에 대한 재고였고 내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영화적 표현에 관한 것이었다. 아울러 정말 많은 요소들이 배치해 있을 때 나는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준비하여 하나씩 해결해 나갈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덧붙임. 1. 유진( 최강희 )의 아들 민호 역의 호영이는 헌팅지에서 만난 아이였다. 집 후보지였는데 그날 잠시 놀러 온 그 집 손자였던 것. 그 짧은 인연이 캐스팅에까지 이르렀다. 2. 제주 월정리의 ‘고래가 될’ 까페는 몇 년 전부터 즐겨 찾던 곳이었는데 놀라운 일이 생겼다. 이곳이 은희 선생님의 자제분이 운영하는 곳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세상이 참 좁기도 하고 인연이란 것이 참 놀랍기도 했다. 선생님 덕분에 이곳에서 맛있는 회식 시간을 가졌다. 3. 얼마 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그녀의 전설이 다시금 관객과 만났다. 혹시 놓치신 분들은 10월 중순 제주영화제에서 만나시길 희망한다. 네 번의 영화 여행을 돌아보니,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대부분 그 시간이 행복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돌이켜 보는 과거는 늘 긍정적인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아마도 기쁨의 순간들이 핵심 기억으로 남았기 때문이겠지) 어떤 날은 개인사로 감정이 격해져 있었던 날도 있었을 테고 어떤 날은 마냥 이 사람들이 좋아 기분이 좋았던 날도 있었던 것 같고 어떤 날은 이 시간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을 것 같아 초조하기도 했다. 여행은 결국 돌아오게 되어 있는 것처럼 이 영화 여행도 끝은 있을 것이다. 언제가 마지막일지는 몰라도 그때까지 나의 포지션이 무엇이든 난 이 일련의 의미 있는 단편 작업을 지지할 것이다. 그 어떤 직업을 가져도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영화 스태프라는 직업은 그 고민을 주 업무로 하는 직업이다. 얼마나 재미있고 행운인 직업인가. (때에 따라 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여정에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그림을 함께 그리느냐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조감독은 하나의 트레일을 만드는데 가이드와 같은 역할을 한다. 스케줄을 확인하고 목표한 길을 가기 위해 제반 사항들을 점검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감독이 트레일을 개척할 때 그것을 가장 먼저 목격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지난 네 번의 트레일은 소중한 인연들과 만든 아름다운 길이었다. 그 안에서 열정을 보았고 내 열정을 나누었다. 앞으로 10년 뒤에도 그런 길을 닦는 데 함께하고 싶다. 오늘 밤도 영화를 만들며 살 것인가? 영화처럼 살 것인가? 고민하다 잠이 든다. 내게 영화는 아직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