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행자
- 감독
- JOSEPH R. JULIANO
- 출연
- VIC CAESAR, DOMINIC MICELI
© 나비클럽 마스터플롯, 공통언어로서의 서사 『마스터플롯』을 쓰게 된 것은 순전히 H. 포터 애벗(H. Porter Abbott)의 『서사학 강의(The Cambridge Introduction to Narrative)』(2002)에서 정식화한 마스터플롯(masterplot) 개념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플롯이란 사건의 배열과 연쇄를 결정하는 구성적 논리를 의미하지만, ‘플롯’이라는 용어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이 개념을 서사 구성의 내적 논리 정도에 한정해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강조했듯이, 마스터플롯은 작품과 병행하고 교차하며 우리 시대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큰 틀의 이야기 골격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때의 골격이 그저 작품 내적인 서사의 틀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의 틀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구조주의 서사학을 주된 이론적 도구로 삼아 소설에 대한 내재적 분석을 주로 해왔던 나에게 마스터플롯은 그 자체로 과잉 개념처럼 보였다. 일개 연구자의 주관적 접근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 실제 독자를 반영하는 수용자 이론에 대해서도 언제나 아득한 기분이 들었는데, 하물며 ‘대중’의 ‘마음’을 읽어내는 방식의 접근법이라니(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스터플롯에 대하여 강한 매력을 느낀 것은, 이 개념이 가진 넓은 적용력과 포괄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 매력이 실제 집필로 이어진 데에는 뜻밖의 지면이 계기가 되었다. 전작 『이것은 유해한 장르다』(2024)를 함께 만들었던 나비클럽에서 펴내는 《 계간 미스터리 》에 2025년 한 해 동안 마스터플롯에 관한 글을 연재하게 된 것이다. 학술 논문의 틀 안에서 몇 차례 다뤄온 개념이었지만, 계간지의 지면은 전혀 다른 요구를 해왔다. 각주와 선행 연구 뒤에 숨을 수 없는 자리, 개념을 처음 만나는 독자를 첫 문장부터 데리고 가야 하는 자리였다. 연재를 거듭하면서 나는 이 개념을 학술적으로 정확하게 쓰는 일 못지않게, 유연한 흐름 속에서 마스터플롯이 무엇이고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 더 어렵고 또 더 절실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은 그 연재 글들과 기존의 연구들을 한 권의 흐름으로 다시 엮고 고쳐 쓴 결과물이다. 연재 당시의 원고는 2장‧3장‧5장‧7장에 배치되어 있으나, 추가적으로 전체적인 톤의 일관성과 구성의 명확성을 위해서 많은 내용을 고치거나 다시 썼다. 이 책에서 다루는 대상 텍스트는 대부분 10년 이내의 작품들이면서도, 영화나 애니메이션, 만화 등의 매체에서 대중적인 선호가 높았던 작품들이다. 물론 이러한 선별은 대단히 자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마스터플롯이라는 개념을 실천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최대한 대중의 수용과 시장의 흥행이라는 통제하기 어려운 변수를 굳이 작품에 대한 이해와 결부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책의 기본적인 조건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흔히 ‘걸작’이나 ‘명작’이라 불리는 정전화된 작품에 대한 접근과는 차별화되면서도, 대중적 작품에 대하여 으레 따라붙는 평가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이 책의 핵심적인 태도이자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성이나 완성도에 대한 고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너무 끌려간다면 대중성 기반의 작품을 살펴보기 어렵고, 반대로 흥행 수치만으로는 대중성을 판단하기 어렵기에 보정이 필요하다. 마스터플롯을 포괄적 개념으로만 접근하면 마스터플롯의 사례 역시 무수히 많아진다. 따라서 이 책의 기본적인 조건으로서의 ‘장르성’+‘로컬리티’에 기반한 마스터플롯으로 추려냄으로써, 흥행이라는 일차원적인 접근을 벗어나 개념화에 적합한 작품들을 추려내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 <오징어 게임>(황동혁, 2021),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소토자키 하루오, 2020) © Netflix / ufotable, 워터홀콤퍼니㈜, ㈜NEW, 에스엠지홀딩스㈜ 피할 수 없는 조건 중에 하나는 소위 ‘천만 관객’ 영화들이다. 우리는 대중적 성공의 높은 지표처럼 여겨지는 천만 관객 영화에 대하여, 그 영화적 완성도를 믿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이러한 영화들의 특정한 감정적 과잉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나 멜로드라마에 대한 기존의 여러 연구가 강조하듯이, 특정한 서사적 패턴이 구성해 내는 감정주의는 공동체적인 차원에서의 수용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한국적 사회와 로컬리티를 벗어나서는 이해될 수 없는 그 무엇이 한국에서는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구체적인 흥행의 숫자로 번역되어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마스터플롯이라는 개념을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나의 이론적인 틀은 로컬리티를 포괄하는 사회적 구조가 좀 더 패턴화된 감정적 구조를 가진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적 구조가 그러한 사회적 구조와 병행하는 일련의 서사적 구조에서도 동형성을 가지고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마스터플롯은 서사적 구조와 감정적 구조의 교차적 양상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사회적 구조를 일정 부분 암시한다. 따라서 마스터플롯은 작품 내적인 것이 아니라, 작품 내외를 오가는 상호적 개념에 가까워지는 셈이다. 마스터플롯과 비슷한 자리를 겨냥하는 다른 개념들도 있었다. 워치(James Wertsch)의 도식적 서사 템플릿(schematic narrative template)을 활용할 수도 있었지만, ‘도식’이라는 말이 지워버리는 역동성이 아쉬워 플롯을 택했다. 빅터 터너(Victor Turner)의 사회극(social drama) 이론에서는 사회극과 무대극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를 구성하며 순환한다는 발상을, 웨인 부스의 규범(norm) 개념에서는 작가와 독자를 포함한 서사 참여자들이 도덕적 감수성을 주고받는 호혜적 매개라는 발상을 빌려 왔다. 이 책의 마스터플롯에 대한 논의 역시 이야기의 주제와 규범으로 대변되는 공통언어로서의 서사라는 위상을, 문학 이상의 다매체적 현실에서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마스터플롯을 우리 시대의 공통언어로 발견하고 공유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소극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확장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조건들을 두루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마스터플롯은 단순한 창작자만의 창작물이 아니라, 다매체 환경에 노출된 수용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서 형성되는 허구적-대화적 플랫폼이 된다. 이때 마지막으로 조정해야 했던 것이 허구성 개념이다. 장르로서의 픽션(fiction)과 수사적 양태로서의 허구성(fictionality)을 분리하면, 허구성은 허구 서사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논픽션에도 존재한다. 이 책이 경계하는 음모론이 대표적이다. 믿는 이들에게 음모론은 명백한 논픽션이므로, 그것은 허구성을 가진 논픽션이다. 이러한 허구 개념의 이중성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마스터플롯은 허구이자 논픽션으로서의 다양한 서사 구성을 연결하는 중간적 위상을 획득한다. 이것은 마스터플롯 개념을 복잡하고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공동체적 상상력을 수렴하는 공통언어의 문법에 다가가는 일이다. 수치의 강가에서 존엄을 수습하기 © ㈜온다웍스, ㈜비에이엔터테인먼트, ㈜쇼박스 『 마스터플롯 』 을 출간하고 나서, 2장에서 다루었던 명예와 존엄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많다는 점은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다. 그것은 우리 시대가 이러한 마스터플롯에 명백하고 강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반응은, 책에서 다루지 못했으나 정확하게 이 마스터플롯에 해당하는 장항준 감독의 < 왕과 사는 남자 >(2025)를 추가로 살펴볼 필요를 느끼게 했다. 국내 상영 영화 중 역대 2위의 흥행 성적을 거둔 이 작품의 이야기는 사실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것이다. 1457년 영월 청령포를 배경으로,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된 어린 임금 이홍위( 박지훈 )와 그를 맞이하는 촌장 엄흥도( 유해진 )의 이야기. 이 영화를 두고 어김없이 감정적 과잉과 신파의 혐의가 거론되었지만, 앞서 말했듯이 흥행의 수치는 완성도의 지표가 아니라 공동체적 수용의 지표다. 물어야 할 것은 이 영화가 얼마나 세련되었는가가 아니라, 1457년의 이야기가 2026년의 관객들과 어떤 공통언어로 접속했는가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 공통언어의 문법은 명예와 존엄과 수치심의 논리로 풀이된다. 이 영화의 권력은 수치심의 기술자다. 수양대군의 권력은 조카를 죽이는 대신 강등한다. 왕을 상왕으로, 상왕을 노산군으로, 군을 서인의 처지로 끌어내리는 이 단계적 격하는 물리적 제거보다 정교한 통치술인데, 목숨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존엄을 회수하는 것이야말로 찬탈한 권력이 자신을 정당화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한명회( 유지태 )는 이러한 통치술의 집행자다. 요컨대 이 영화의 악은 죽이는 권력이 아니라 수치를 배분하는 권력이며, 이것은 오늘의 관객을 공통의 언어로 묶는 문법이다. 계유정난의 정치와 우리 시대 청년 세대가 직면한 현실 정치는 유사한 골격을 공유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수치의 정치에 맞서는 마을의 논리가 처음에는 전혀 숭고하지 않다는 점이다. 유해진이 연기하는 엄흥도는 의인이 아니라 계산가로 등장한다. 이웃 마을이 유배 온 양반 덕에 번성한 것을 보고, 더 높은 신분의 유배자를 유치해 마을을 부흥시키겠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다. 유배지 유치 경쟁이라니, 이것은 명예가 곧 경제인 세계, 명예 경제의 노골적인 희극이다. 폐위된 왕은 마을에 도착하는 순간 거지 취급을 받는다. 명예의 후광이 사라진 존엄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주는 이 도입부가 있기에, 이후의 전개가 힘을 얻는다. 소년이 마을의 존경을 얻는 것은 왕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호랑이 앞에서 아이를 구했기 때문이고, 그가 마을의 일원이 되는 것은 진상품 덕분이 아니라 아이에게 글을 가르치는 이웃이 되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회수한 존엄을, 공동체가 국가 바깥의 방식으로 되돌려주는 것. 조정의 문서에서 그는 노산군이지만 광천골의 마당에서 그는 다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이 영화가 명예와 존엄의 관계에 대해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결말부에 있다. 탈출 시도가 한명회의 함정으로 무너졌을 때, 소년은 엄흥도가 자신을 밀고했다는 거짓 연기를 펼쳐 그를 살리고 홀로 붙잡힌다. 명예의 문법으로 보면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다. 그는 자신을 배신당한 자로, 상대를 배신자로 만듦으로써 상대의 목숨을 구한다. 명예를 버리는 방식으로만 지킬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 ㈜온다웍스, ㈜비에이엔터테인먼트, ㈜쇼박스 그리고 저 유명한 마지막 장면. 소년은 활줄에 목을 맡기고, 문밖에서 그 줄을 당기는 것은 엄흥도다. 사약도 자객도 아닌 이 기이한 연출은 자살과 타살을 겹쳐놓음으로써 역사 기록의 모호함을 끌어안는 동시에, 이 영화 전체의 논리를 완성한다. 자신의 명예를 박탈한 수양의 손에는 죽지 않겠다는 것, 자기 죽음의 형식만은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것은 존엄의 마지막 주권이다. 그리고 그 주권의 집행을 소년은 국가가 아니라 이웃에게, 자신을 거지 취급했다가 벗이 된 사내에게 맡긴다. 왕과 ‘사는’ 남자였던 엄흥도는 왕의 죽음을 대신 감당하는 남자가 됨으로써, 이 영화의 제목이 품은 동거의 의미를 끝까지 밀고 간다. 『 마스터플롯 』 2장에서 나는 미국의 자경단 서사가 개척민 신화 속에서 ‘애국자라는 명예’를 보상으로 받아온 것과 달리, 한국에는 서사적 보상으로서의 명예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지 않다고 적었다. 국가가 보호하지 못하는 자리를 대신 감당한 이들은 보상은커녕 명예 회복조차 받지 못하기 일쑤라고. 엄흥도는 정확히 그 계보에 위치한다. 역사의 엄흥도는 아무도 시신을 거두지 못하던 때에 “옳은 일을 하다 화를 당하더라도 내가 달게 받겠다”라는 말과 함께 왕의 주검을 수습하고 사라졌으며, 그의 명예가 회복된 것은 수백 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말하자면 한국형 마스터플롯에서 명예는 언제나 후불이며, 그 지불을 보증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후대의 이야기다. 역사가 언젠가 갚아줄 것이라는 서사적 후불제. 이 영화의 대중적 흥행은 그 문법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증거처럼 보인다. 보상 없이 존엄을 수습하는 사람의 이야기에, 보상 없는 감당에 익숙한 공동체가 반응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허구성의 논점이 이 영화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확인해 두자. 관객은 단종과 엄흥도가 역사임을 알고, 그들의 우정이 허구에 불과한 것임을 알며, 알면서도 운다. 같은 ‘역사의 빈칸 채우기’라도 음모론과 사극을 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허구적 신호의 유무다. 음모론이 허구를 논픽션으로 위장해 공동체를 닫힌 확신으로 몰아넣는다면, 이 영화의 허구성은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존엄의 가능성을 공동체의 상상 속에 열어 놓는다. 마스터플롯이 허구이자 논픽션으로서의 중간적 위상을 가진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1457년의 강가에서 수습된 것은 한 소년의 주검이지만, 2026년의 극장에서 수습되고 있는 것은 수치의 시대를 건너는 공동체의 존엄에 대한 감각이다. 그 수습의 언어가 우리의 공통언어이고, 그것을 읽고 다시 쓰는 일이 이 책이 독자에게 건네고 싶었던 작업이다. © ㈜온다웍스, ㈜비에이엔터테인먼트, ㈜쇼박스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박인성(문학평론가) |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으로 등단했다. 소설, 영화, 드라마, 웹소설, 만화, 게임, 인터넷 밈까지 대중문화와 서브컬처의 서사를 읽어내는 비평을 쓴다. 저서로 『이것은 유해한 장르다』(2024), 『마스터플롯』(2026)이 있고, 피터 브룩스의 『정신분석과 이야기 행위』(2017)를 번역했다. 부산가톨릭대학교 인성교양학부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서, 나는 두가지 특별한 사적 감흥을 느낀다. 하나는 화면이 젖어 있다는 것이다. 비가 오거나 안개에 잠겨 있지 않아도 그레이의 화면은 멜랑콜리아의 습기라고 할만한 기묘한 물질감이 감싸고 있다고 느낀다. 아마도 이점과 깊이 연관되어 있을 다른 하나는 친구 혹은 연인과의 투 숏에서도 심지어 가족의 회합 장면에서도 그레이의 인물은 절대적 고립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에서 감정은 표현되는 게 아니라, 보는 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신체에 스며들고 번져가며 전염되는 것 같다. 그레이의 최고작으로 여겨지는 < 투 러버스 >(2008)보다 이 점을 잘 느끼게 하는 영화는 없다. 주인공 레너드(호아킨 피닉스)는 그가 사랑하는, 하지만 종잡을 수 없는 여인 미셸(기네스 펠트로)과 있을 때에도, 그를 사랑하는 가족과 있을 때에도 철저히 고립된 존재이며 외로움의 심연에 가라앉은 인물로 감지된다. 가장 뛰어난 장면은 마지막 시퀀스에 있다. 미셸이 떠난 뒤 레너드는 다시 자살을 시도하려다 포기하고 가족과 그를 아끼는 따뜻한 여인 산드라(비네사 쇼)의 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미셸에게 주려던 반지를 그녀에게 끼워준다. “우는 거예요?”(산드라), “행복해서 그래요.”(레너드). 가족들, 유태인 친척들이 작은 파티를 벌이고 있는 따뜻한 집에서 두 남녀는 키스하고 포옹한다. 놀라운 점은 외관상 가장 포근하고 평온한, 그리고 남녀의 결합으로 마무리된 이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레너드의 속수무책의 고립을 사무치게 체감한다. 그레이의 영화에서 우울과 외로움은 이야기의 주제이기 이전에, 매 숏에 담긴 물질적 표정 혹은 운명적 공기와 같은 것으로 느껴진다. 물론 이 느낌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고, 적시할 수 있는 한 숏 내부의 특정 요소들의 효과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카메라와 인물의 거리 및 앵글, 인물의 표정과 동작과 말, 음악과 사운드, 숏의 길이와 편집의 리듬 등이 이야기와 결합된 복합적 효과일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의 남다른 점은 그가 두드러진 스타일을 구사하지 않을 뿐더러, 특정한 사건을 앞세우지 않으면서도, 연출의 영역에 속한 갖가지 요소들의 유기적 조합을 통해 유례를 찾기 힘든 높은 밀도와 강한 전염성을 지닌 감정의 강도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레이의 영화를 말할 때야말로 감정 대신 정동(情動)이란 단어를 쓰고 싶게 된다. 그런 점에서 그레이는 동세대의 어떤 감독보다 고전적인 작가라 할 수 있으며, 그가 영화적 스승으로 거론하는 인물에 속하진 않지만, 니콜라스 레이의 진정한 후예라고 나는 생각한다. < 애드 아스트라 >(2019)는 공간이 우주로 확대되어도 화면에는 농축된 감정의 밀도가 압도하는 매우 제임스 그레이적인 영화이다. 어쩌면 우주의 텅빈 그리고 무한대의 시공간이야말로 그레이의 인물이 벗어날 수 없는 고립과 외로움의 물질적 거처로 가장 적합할 수도 있을 것이며, 이것이 그레이가 SF로 눈길을 돌린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애드 아스트라>의 우주는 모험의 사건과 미래의 변화에 열린 확장적 공간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의 절대적 고립을 재확인하는 내성적이고 수축적인 공간이다. 우주비행사 로이 맥브라이드(브래드 피트)는 지적 생명체를 찾아 해왕성으로 떠난 뒤 16년째 소식이 끊긴 아버지이며 우주탐험의 전설 클리포드 맥브라이드(토미 리 존스)를 찾아 떠난다. 스토리라인은 머나먼 정글에서 광기의 왕국을 건설한 미친 유사 아버지를 수색하는 병사의 이야기 < 지옥의 묵시록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1979)을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모티브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다 그를 찾아나서는 아들 텔레마코스에게서 빌려왔다. 텔레마코스는 누구인가. 이타카의 왕이자 전쟁영웅 오디세우스가 전쟁 원정으로 왕국을 20년간 비운 동안, 난봉꾼 왕자와 귀족들이 그의 재산과 왕위를 빼앗기 위해 어머니를 희롱하고 결혼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한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의 귀환으로 자신의 땅에 정의가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기다리다, 아버지의 행적을 쫓아 목숨을 건 여행에 나선 아들. 그런데 제임스 그레이는 이 인물의 어떤 점에 영감을 얻었을까. 결말을 떠올리면 <애드 아스트라>는 오이디푸스의 살부(殺父) 의식에 가까운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살부와 근친상간은 법의 위반과 욕망의 실현이라는 차원에 놓여 있다. <애드 아스트라>의 로이는 사실상 법의 충실한 집행자다. 그의 목숨과 여러 사람의 생명이 걸린 그의 해왕성 행은 아버지의 우주선 이상으로부터 비롯된 지구의 위기를 구하기 위한 그리고 상부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고 로이가 상부의 명령이나 미션의 대의에 완전히 동일화하는 건 아니다. 로이는 아버지의 우주선 리마의 파괴 임무를 맡은 우주선 세피우스에 무단으로 탑승하고, 그를 제압하려는 세피우스 승무원들을 미필적 고의로 모두 죽인다. 제임스 그레이의 인물이 흔히 그렇듯 우리는 로이의 욕망을 정확히 알기 힘들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맥박수가 80을 넘지 않는 냉담한 사람이다. 그의 행동으로 추론하면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아버지를 만나는 일이다. 평생 복종해온 명령, 특히 이번엔 부당하기는 커녕 지구의 안녕이 걸려있는 중대한 명령을 거부한 것도 세피우스의 제거 작전이 성공하기 전에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것을 그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보지 못했고, “아버지를 만나는 일이 항상 두려웠다.”고 독백한다. 마침내 조우한 아버지도 “난 아내에게도 너에게도 관심이 없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매정하게 말한다. 다시 물어보자. 로이는 왜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만나려 하는가. 이 질문은 이 영화를 본 관객의 당연한 권리이지만, 제임스 그레이는 적어도 대사를 통해서는 이 질문에 정확히 답할 수 없도록 만든다. 그레이의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을 모르는 것처럼 말한다. 그레이는 그 무지를 존중한다. 아버지 클리포드는 말한다. “나는 지구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 우리는 과학이 부인하는 지적 생명체를 찾아내야 돼. 이건 신의 소리야. 난 이 여정을 멈출 수 없어.” 그의 친구인 동료 우주비행사 프루이트 대령(도널드 서덜랜드)은 로이에게 말한다. “오랜 우주 비행으로 내가 깨달은 바는, 탐험 비행이 때론 탈출 수단이 될 수도 있다네.” 지적 생명체에 대한 종교적 믿음, 지구에 대한 혐오, 탈출의 은밀한 욕망. 우리는 어느 말을 믿어야 할까. 내 생각에 가장 신뢰할만한 말은 영화의 결말부에 있는 로이의 독백이다. “아버지는 없는 것만 찾았고 눈 앞에 있는 소중한 건 보지 못했다”.” 그러느라 동료를 죽이고 지구를 위험에 빠트린 미친 사람이다. 그런데 정작 로이 자신은 어떠한가. 그 역시 우주 비행에 미쳐서 아내를 떠나보낸 남자 아닌가. 로이와 클리포드는 아들과 아버지이기 이전에 완전히 동질적인 인간이며, 둘은 말하자면 쌍생아다. 로이의 혹독한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그리운 아버지를 만나려는 가족애의 여정이 아니며 아버지의 율법을 살해해 자신의 욕망의 법을 세우려는 아들의 모험도 아니다. 그것은 온전히 자기자신을 대면하려는 여정이다. 지구 혹은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것’을 혐오하고 피안을 향해 탈출하려는 자신의 욕망, 그 욕망의 잔혹함과의 대면이다. 그 대면을 위해 로이 역시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다. 아버지와 대면하고서야 로이가 아버지와 똑 같은 과정을 거쳐 그 대면에 성공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지적 생명체나 인류의 진보 같은 그들의 언어가 아니라, 그들의 정확한 동형의 여정이다. 이제 선택은 두가지다. 집으로 돌아오느냐, 아니면 더 멀리 떠나느냐. 아버지 클리포드는 후자를, 아들 로이는 전자를 택한다. 로이에게 아버지는 주인 기표도 율법의 표상도 아니다. 요컨대, 로이는 오이디푸스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안티오이디푸스도 아니다. 호메로스의 텔레마코스는 하염없이 아버지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가 기다리는 건 아버지이자 왕인 오디세우스이지만, 그것은 권력의 복원이나 주인의 귀환에의 기대가 아니다. 이탈리아 심리학자 마시모 레칼라티의 말을 빌리면, 텔레마코스는 아버지에 대해 오이디푸스의 절연과 달리 상속의 관계를 맺는다.(<버려진 아들의 심리학>, 윤병언 옮김, 책세상) 하지만 상속은 과거의 권력이나 재화, 혹은 영광스런 기억의 선사가 아니다. 레칼라티의 논지를 요약하면 정당한 상속은 아버지의 증언을 참조함으로써 이뤄지는 말의 계율과 욕망의 재설정이다. 그렇다면 상속은 완료가 불가능한, 반복되는 실패를 경유할 수밖는 끝없는 여정이다. 그러므로 “모든 상속자는 고아다.” 또한 그러므로 상속이란 “아버지의 구조적 부재라는 열린 틈새를 메우는 일이 아니라, 항상 그것을 통과하는 일이다.” 제임스 그레이는 텔레마코스의 이야기에서 상속의 약속 없는 상속자의 여정이라는 모티브를 본 것 같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를 찾아 세상을 헤맸지만 오디세우스를 만난 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고향에서다. <애드 아스트라>의 로이는 여정의 끝에 아버지를 만났지만 그 아버지는, 아내와 아들을 위해 불멸에의 꿈을 포기하고 돌아온 오디세우스와 달리, 자신의 욕망을 조금도 조정할 줄 모르는 눈먼 광인일 뿐이다. 텔레마코스는 이제 상속의 과정을 본격화할 것이다. 하지만 로이가 이른 곳은 아버지의 삶, 그 복제으로서의 자신의 삶이 모두 눈 먼 광인의 소동으로 드러나는 황량한 공허이다. 그는 홀로 지구에 돌아온다. “삶에 의욕을 느껴요. 내 주변 상황에도 주의를 더 기울이게 됐죠. 이젠 소중한 것에만 집중하며 살 겁니다.” 이어지는 결말의 언어들은 계몽적이고 달콤하나 <애드 아스트라>의 우주를 가득 채운 우울증의 공기는 무관하다. 우리는 이 평온한 결말의 언어와 비슷한 것을 그레이의 전작에서도 만났다. < 위 오운 더 나잇 >(2007)에서도 만났다. 경찰학교 졸업식장에 앉은 경찰 형제(마크 왈버그, 호아킨 피닉스)가 나누는 마지막 대화. “사랑한다, 동생아.” “나도 사랑해, 형” 그리고 앞에서 인용한 <투 러버스>의 마지막 대화. “우는 거예요?“ ”행복해서 그래요.“ 이 장면들이 뼈저린 것은, 인물들 특히 호아킨 피닉스가 분한 남자에게 이 말이, 이 말의 실현불가성에 대한 필사적인 부인의 몸짓이기 때문이다. 이 거짓말이 역설적으로 그의 가장 절박한 진실이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서 가족(때로 유태인 공동체)은 주인공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내면적 강박처럼 등장한다. 이 점에서 그레이의 서사는 주인공이 이 강박을 정당한 상속으로 전환하려는 모험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결말에서 만나는 것은 결말의 언어가 숨기고 있는, 하지만 관객 누구라도 느끼는 있는 상속의 실패다. <애드 아스트라>의 로이 역시 임무수행에는 성공했지만 상속에 실패한, 하지만 그 실패를 필사적으로 부인하려는 텔레마코스다. 제임스 그레이의 인물은 여전히 출구 없는 멜랑콜리아의 안개 속을 떠돌고 있다.
최근 한국영화가 발명한 장르가 있다. 바로 ‘ 마동석 이라는 장르’다. 배우에게 일반적으로 ‘변신’이 미덕으로 여겨진다면, 마동석은 그 반대편에서 범죄 스릴리라는 장르 안에 자신만의 둥지를 틀고 있다. < 악인전 >( 이원태 , 2019)는 그 정점이다. 클리셰로 구성된 장르 영화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서 마동석은 자신이 구축해왔던 나름의 영역을 완성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악인전>은 두 겹의 텍스트다. 표면적으로 <악인전>은 조폭 두목과 미친 형사와 연쇄살인마라는, 범죄 장르에서 지겹게 반복되었던 캐릭터를 한 데 모아 새롭게 재조합한 영화다. 여기서 마동석은 또 하나의 겹을 만든다. 그는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는 원동력이 되면서 ‘마동석 영화’의 본색을 보여준다. 마동석은 감독의 페르소나가 되기를 거부하는, 스스로 페르소나를 만들어가는 배우다. 그가 맡은 캐릭터들은 모두 마동석의 분신이자 배우 자체처럼 여겨지는데, 이런 위력은 한 명의 배우가 장르와 동의어가 되는 원동력이다. 세 악인의 팽팽한 대결처럼 보이지만, <악인전>의 중심은 마동석이 맡은 캐릭터인 장동수다. 여기서 ‘마동석 영화’의 첫 번째 법칙. 마동석은 언제나 ‘룰’(rule)을 만드는 사람이다. 응징이든 복수든 정의 구현이든, 그는 언제나 자신이 원칙을 만들고 그 안에서 움직인다. <악인전>에서도 이 영화에서 ‘게임의 법칙’을 만드는 사람은 장동수다.(“먼저 잡는 사람이 갖는 거지”) 이 과정에서 그는 형사 정태석( 김무열 )과 상의 같은 건 하지 않으며(“우리 애들 쓰고, 진행비도 내가 내. 정보 공유하고”), 현실의 법 따위엔 관심 없다.(“법으로 못하는 일 하는 게 우리 일이니까”) 그리고 최후의 응징자가 된다.(“사내 셋이 목숨 걸고 게임을 했는데 끝을 봐야지”) 여기서 장동수의 포지션은 흥미롭다. 법을 만들지만 그는 법 밖에 있는 사람(조폭)이다. < 범죄도시 >( 강윤성 , 2017)의 마석도처럼 형사일 때도 있지만(그럴 때조차도 그는 법을 따르지 않지만), 마동석의 캐릭터는 공권력을 부여 받지 않았음에도(범죄자인 경우에도) 법의 집행자가 된다. 그는 평범한 승객(부산행), 수산물 가게 주인(성난 황소), 체육 교사(동네 사람들), 유도 도장 관장(원더풀 고스트)이면서 악당과 맞선다. 그는 한국영화에선 드문 일종의 자경단원 같은 역할을 반복하는데 그 상징적 시작은 카메오로 출연했던 < 베테랑 >( 류승완 , 2015)의 ‘아트박스 사장’이다. 화면에 그가 등장했을 때 관객들이 느꼈던 기대감, 즉 ‘완력을 이용한 즉각적 응징’은 마동석이라는 배우가 지니는 가장 큰 장르적 매력이다. 압도적인 피지컬로 그 어떤 적도 제압할 것만 같은 파워의 소유자. 마동석은 그런 면에서 범죄 영화 장르의 슈퍼히어로 같은 존재다. 그럼에도 마동석의 액션이 절대 판타지처럼 느껴지지 않는 건, 개인적 동기가 사회적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악인전>에서 장동수가 강경호(김성규)를 잡으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경기 이남 최고의 조폭인 자신에게 칼을 꽂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개인적 복수는 연쇄살인마를 감옥에 가두는 결과로 이어진다. < 성난 황소 >( 김민호 , 2018)에서 아내를 구하는 과정에서 납치 조직을 소탕한다. < 부산행 >( 연상호 , 2016) < 동네 사람들 >( 임진순 , 2018) < 원더풀 고스트 >( 조원희 , 2018) 등도 그런 구도다. 가정과 이웃을 위하는 소박한 행동은 집단에 위협적인 존재를 처단하는 공익적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같은 이미지를 지나치게 소비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마동석의 행보는 한국영화가 오랜만에 접하는 경험이다. 서민극의 김승호 , 청춘 영화의 신성일 , 액션의 박노식 과 장동휘 , 멜로의 문희 등 과거 한국영화는 스타와 장르의 반복적 결합을 통해 전성기를 누렸다. 이후에도 박중훈 (코미디), 최민수 (액션), 전도연 (멜로) 등의 배우들이 한때 그런 역할을 했다. 지금은 마동석이다. 그는 범죄 스릴러 장르에서 형사든 범죄자든, 한국영화 100년 사상 가장 두꺼운 팔뚝을 휘두르며 강렬한 ‘한 방’의 액션을 선보였고, 그것은 이미 익숙한 쾌감이 되었다. <악인전>은 엔딩의 ‘살인 미소’와 함께 그 쾌감의 끝을 보여준 영화이며, 아마도 마동석이라는 장르는 좀 더 우리 곁에 머물며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