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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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지난 12월 24일에 공개된 ‘ 미국 NA II 소장 노획영상 컬렉션 ’ 준비 과정 중의 이모저모를 소개할까 한다. 이 컬렉션은 지난 2022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에 의뢰하여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문서고 2관(National Archives II, 이하 NA II)에서 수집과 동시에 연구까지 진행했던 1930~40년대 미군 노획필름 37편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미국 육군 G-2 정보참모부가 적국 정보 수집의 일환으로 제2차 세계대전 말과 6.25 전쟁 당시에 노획한 영상들이다. NA II에서는 ‘해외 노획 기록물’을 묶은 기록군 242(RG 242)에 ‘정보참모부 영화필름’ 시리즈(242-MID)와 ‘정보참모부 일본 관련 영화필름’ 시리즈(242-MID-J)로 분류, 관리되고 있다. 이 필름들은 대부분 선전선동을 위해 제작됐던 것으로서, 일본, 이탈리아, 소련, 북한이 어떤 논리와 방법으로 자신들의 체제를 정당화하고 비인도적인 침략 또는 경쟁국에 대한 흑색선전을 포장했는지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아무리 ‘격동의 현대사’라는 점잖은 표현을 쓰더라도 이 시대가 폭력과 착취의 시대였고 ‘줄을 잘못 서면’ 생존이 위협을 받을 수도 있었던 야만의 시대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런 혼란 속에서 파시스트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체제의 역량을 기울여 선전영상을 만들고 자신들의 세계관을 학습시키고자 했다. 그것이 허구든 실존하는 것이든, 진실이든 거짓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대중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불안정한 시대의 힘 없는 개인에게, ‘믿음’은 합리성보다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래서 노획영상은 태생이 복잡하다. < 황도일본 >(아오키 타이스케, 1940)은 명분 없는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천년 전의 신화집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대전제로 하여 허구 위에 허구를 중첩한다. ‘신의 자손이 신의 명령을 이행한다’라는 신화적 명제를 사실로 포장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창조해낸 개념들의 쓰나미로 보는 이를 압도하고자 했다. 파시즘 우방국 이탈리아는 자신들만의 세계관으로 일제의 침략, 아니 ‘문명의 회복을 위한 전진’에 찬사를 보냈다. 소련은 이러한 ‘제국주의, 파시즘으로부터 인민을 해방시킨 구원자 스탈린’의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러시아 공산당 중심의 새로운 착취구조를 유토피아적 현실로 포장했다. 북한은 스탈린의 권위를 김일성 권력의 정당성의 근거로 덧씌웠고, 소련의 ‘만들어진 유토피아’가 담긴 영상을 수입하여 한국어 웅변을 곁들여 북한 각 지역에 ‘영사 폭격’했다. ‘통일’, ‘해방’, ‘자유민주주의’, ‘평화애호’ 등의 인도적 개념어들은 ‘선의의 친구’ 이미지를 만드는 도구로 의도적으로 수없이 사용됐고,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인플레이션의 늪에 빠졌다. 이와 같이 선전영상들이 대중 대상의 최면효과를 위해 사용한 전략, 그리고 제작 주체가 의도하지 않았던 맥락까지 포함하여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모든 기록영상이 그렇듯이 당장은 쓸모없어 보이는 정보까지도 샅샅이 훑고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한 작업의 결과를 컬렉션 페이지의 자료집 에 수록했다. 기록영상 컬렉션에서 TMI는 ‘Too Much Information’이 아니라 덕목이다. 특히 이번 컬렉션은 잡다하게 아는 것은 많지만 제대로 아는 것은 많지 않은 AI 들과 함께 준비했다. 이들은 STT(sound to text - 채록), OCR(광학문자인식), 이미지 분류(유사이미지 검색), 번역, 레퍼런스 찾기, 자유로운 대화상대 역할로 투입됐다. 필자는 미국 드라마 <하우스>에서 하우스가 화이트보드 앞에 부하 의사들을 앉혀 놓고 희귀병 추리의 단서를 모으듯, 수개월 동안 허당 AI들로부터 힌트를 뽑아내고 경쟁시켰다. *주1 기만의 전문가들이 만든 영상을 착각의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분석한 셈이다. 이렇게 채굴한 TMI 몇 가지를 부록으로 덧붙인다. 부록 1. <동양의 전투>( Battaglia D'Oriente ): 사상이 맞춤법을 지배한다. 이 영상 은 중일전쟁기 중 1938년 10월에 있었던 일본의 중국 광저우 진격 과정을 이탈리아 영화사(ISTITUTO NAZIONALE L.U.C.E)가 이탈리아어 해설을 곁들여 제작한 것이다. NA II 카탈로그에는 ‘1939년에 송출됐다(...was broadcast)’라고 적혀 있다. 이때는 추축국들이 삼국동맹을 체결한 1940년 9월 이전 시점이다. 하지만 1937년에 이미 이탈리아는 독일-일본의 대 소련 방어를 위한 ‘방공협정’에 참가한 상태였다. 그러니,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을 옹호하여 간접적으로 자국민들에게 파시즘의 정당성을 설파할 목적으로 이런 영상을 제작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무솔리니의 관영선전영화제작소였던 ‘L.U.C.E(루체)’가 영상에 ‘L.V.C.E.’로 표기되고 있는 것은 많이 이상하다. (좌) 도입부 #1 / (우) 도입부 #2 이에 대해 AI 하나가 오랜만에 실속 있는 의견을 주었다. 이탈리아 통일 이전부터 ‘로마’는 국민적 숭배의 대상이었다. 이탈리아 통일운동을 뜻하는 ‘리소르지멘토’는 ‘부흥, 부활’이라는 뜻이고, 그 지향점은 ‘위대한 로마’였다. 무솔리니는 로마의 이미지에 더욱 천착하여, ‘이전 시기의 부패한 로마’를 청산하고 고대 로마의 덕목과 정신을 이어받은 파시스트의 국가를 건설하는 ‘문명화 사명’론을 내세웠다. 그래서 이탈리아 파시즘은 철저하게 고대 로마의 신화적 상징을 사용하여 대중적 이미지를 조각했는데, *주2 이 영상 도입부의 독수리상, 고대 로마 묘비에 각인됐을 것만 같은 고전적 글씨체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 집착의 끝은 U 대신에 V를 사용한 것이다. 에트루리아 알파벳에서 유래한 고대 라틴어는 중세에 이르러 V가 U, V, W로 분화하기 전까지는 V만 존재했다. *주3 그래서 고대의 진정한 로마를 계승한 이탈리아 파시즘의 선봉, 국립영화제작소는 L.U.C.E.가 아니라 고귀한 L.V.C.E.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현대 세계의 문명과 질서를 대표하는 일본’에게 ‘기아와 혼란의 시대가 끝났다는 확신으로’ 중국인들이 환대하고 있다는 내레이션 내용은 도입부의 독수리상에 이어지는 도리이(とりい, 일본 신사 등의 관문)와 총칼의 도상으로 이미 예고됐다. 이탈리아인들은 파시즘의 사명을 잇는 일제의 ‘정의로운 전쟁’을 지지하고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그런데, 내레이션 초반에 일본군 지휘관으로 언급되는 ‘왕의 동생 [치치부]’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발음은 [치치부]로 들리고, 다수의 AI가 동일하게 ‘principe(왕족) CCV’라고 채록했다. AI는 위와 같이 대답하면서 1번일 확률이 가장 높다고 했다. *주4 조사해 본 결과, 모두 틀렸지만, 이를 단서로 [치치부]가 쇼와 일왕의 동생 치치부노미야 야스히토임이 밝혀졌다. 그는 당시 현장 지휘관이 아니라 대본영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를 굳이 언급한 것은, 그가 난징대학살과 관련한 군 기강 문제를 지적했다든지, *주5 훗날 삼국동맹을 지지했던 점 *주6 등을 미뤄볼 때, 이탈리아 파시즘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부록 2. <니혼뉴스 제7호>(日本ニュース 第7号): 초조함을 숨길 수 없었던 승전보 속 위치는? 기록영상에서 ‘지명’은 늘 골칫거리다. 근현대 지도에 적힌 지명은 지도마다 제각각이고, 서양에서 통용되던 지명, 타국에서 발음 들리는 대로 표기한 지명, 자국민들이 부르던 지명, 옛날 지명과 이명, (특히 공산주의 국가에서) 정치적 선전과 기념의 목적으로 툭하면 바꾸는 지명까지 모든 것이 뒤엉켜 있는 경우가 많다. < 니혼뉴스 제7호 >(1940)에서 지명 정보는 특히 중요하다. 이 영상은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본의 관심이 온통 중국 국민당 정부의 보급선을 끊는 데에 집중됐던 1940년 여름의 뉴스릴이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중국 북부, 동부의 주요 도시와 기간시설들을 확보했던 개전 초기에는 전황을 낙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제스와 국민당이 내륙으로 이동하여 충칭정부를 세운 후부터 이 전쟁은 보급선을 확보하여 더 오래 버티는 쪽이 승리하는 구도로 전환됐다. 특히 일본군은 비현실적으로 전선이 길게 늘어선 데다가 철도, 도로망이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은 내륙 지방까지의 보급에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난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후 1944년에 감행했던 대륙타통작전(1호 작전) 또한 이런 어려움 속에서 중국 내륙 및 남부까지의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둔 무리수였다. 반면, 중국은 동남부 해상으로부터의 보급로, 버마와 베트남으로부터의 육상 및 공중 보급로를 계속 뚫어내면서 장기 태세에 돌입했으니, 시간은 중국 편이었던 것이다. 그런 배경에서 이 뉴스릴은 줄곧 이러한 장제스 지원 루트, 즉 원장(援蔣)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일본군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첫 번째 소식은 진해(鎮海)를 공격하여 해상 보급로를 차단했다는 내용을, ‘문제의 원장루트, 인도차이나 국경을 공격하다’라는 제목의 두 번째 소식은 베트남에서 출발하는 두 갈래의 원장루트에 관한 내용을, 마지막 소식은 어려움에 처한 일본이 이후 본격적으로 군국주의 체제로 돌입하고 군사적으로 폭주하는 도화선이 된 고노에 내각 출범 소식을 담고 있다. 그런데, 첫 번째 소식의 ‘진해’라는 곳은 어디였을까? 그 단서는 내레이션 중 [셋칸 루트]라고 발음되는 것의 정체를 찾는 데서 출발했다. 가동할 수 있는 모든 AI들은 이를 ‘석관 루트(石管ルート)’라고 채록했다. 그러나, 그런 보급로는 어떤 기록에서도 언급되지 않았고, AI는 그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았다. 권위 있는 기관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AI의 억지 변명이 분명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실마리는 현재 니혼뉴스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는 ‘NHK 전쟁증언아카이브’ 중 <니혼뉴스 51호>의 스크립트 정보 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서 ‘셋칸 루트’는 ‘敵浙 루트’였다. AI는 ‘敵浙’을 ‘절강’으로 번역했고, 지도 검색 결과도 절강성 인근으로 나왔지만, 우리가 아는 절강성(浙江省)의 한자는 다르다. 그래도 이 과정에서 저장성과 장시성 지역을 잇는 철도인 저간선(浙赣铁路)이 이 시기에 이미 있었다는 것과, 저장성과 장시성의 약칭으로 쓰이는 글자가 저(浙), 간(贛)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지도에서 현재의 저간선 경로로부터 해안 쪽으로 탐색해 나가다가 ‘진해(鎮海)’의 현재 표기일 가능성이 높은 ‘전하이 구(镇海区)’를 발견했다. 이렇게 돌고 돌아, 저간 루트로 이어지는 저장성-푸젠성 해안의 보급 거점 위치가 확인됐다. 그런데, 앞선 전쟁증언아카이브의 <니혼뉴스 제7호> 스크립트에는 왜 이 정보가 없었을까? 해당 아카이브를 포함해 이 영상에 대해 현재 알려져 있는 모든 정보 에서 첫 번째 소식은 충칭으로 진격하던 일본군의 ‘사스(沙市) 공략 입성’ 내용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 소식은 < 니혼뉴스 제3호 >의 세 번째 소식을 다시 한번 수록한 것이다. 3호 영상으로 공개했던 내용을 그대로 7호에 다시 수록했던 이유는 무엇인지 현재로서 알 길은 없다. 어쨌든 7호 영상으로 공개된 모든 판본 중에서 NA II 판본만이 유일하게 ‘진해 공격’ 소식을 담고 있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사스 입성’ 소식으로 교체됐다는 것은 분명하다. 부록 3. 일본인 여행 기록, 언제 촬영했을까? 왜 다른 선전영상들과 함께 노획됐는지 알 수 없는 영상이 있다. 이 영상 은 한 일본인 가족이 도쿄, 카마쿠라, 에노시마까지 여행한 하루 일정의 기록이 담겼고 음향은 없다. 유용한 정보가 아니라고 생각되더라도 미리 판단할 수는 없다. 이 가족이 여행한 시점이 언제인지 밝히고자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NA II 카탈로그에는 ‘1937 ?’이라고 기재되어 있고, 근거는 밝히지 않고 있다. 화면의 내용을 근거로 좁혀 갈 수밖에 없다. 우선, 부채질을 하고 있으니 여름 즈음이다. 여행 전에 베티 미용실(ベティ美容室)에서 머리를 하는데, 간판 정보로 보아 매월 정기휴일인 17일, 27일은 아니다. 영업시간 정보를 보니 아침 8시 이후이다. 이어 도쿄 메이지신궁 외원의 성덕기념회화관(聖徳記念絵画館)을 방문하는데, 관동 대지진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면 1937년부터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사이 기간인 듯하다. 센소지(淺草寺) 본당 계단을 내려와 바나나 파는 곳을 지나친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바나나의 일본 수입이 중지됐다는 일본어 위키의 정보를 신뢰한다면 1939년 9월 이전이지만, 참고로만 받아들이기로 한다. 아사쿠사 마츠야 백화점(1931년 건립) 옥상에 있는 유원지를 가로지르는 케이블카가 보이고, 그 앞 스미다(隅田)강에 수상버스가 지나간다. AI는 이런 것들이 1930~1940년대 유행했다고 하면서도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좀 더 결정적인 근거는 우에노 동물원 장면이었는데, 수컷임이 분명한 기린 한 마리가 서성이고 있다. 우에노 동물원이 1982년에 발간한 『 우에노 동물원 100년사 』에는 암수 두 마리의 기린을 1933년 8월 21일부터 사육하기 시작했고, 1937년 7월 11일에 첫 새끼가 태어났다고 적혀 있다. 만일, 이 장면에서 수컷만 있는 이유가 암컷의 출산 때문이라면, 이 영상이 대략 1937년 여름의 것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이 책에 따르면 기린들의 이름이 ‘기린’과 ‘지라프’였는데, 이 책의 사진에는 ‘지라프’라고 적힌 팻말만 보이지만 ‘라벨에 기린과 지라프가 함께 적혀 있다’라는 설명이 달렸다. 영상 속에는 ‘기린’이라고 적힌 팻말이 걸려 있는 것을 보니 수컷의 이름이었던 것 같다. (좌) 영상 속 장면 / (우) 책 속 사진 결국 이런저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영상의 촬영 시점은 1937년 이후부터 1940년대 초 사이의 여름 정도의 범위로 좁히는 것이 최선이었다. 내심, 귀여운 기린 새끼가 태어난 날이었길 바라지만 말이다. 이미 글이 길어졌으므로 다른 TMI들이 궁금하다면 컬렉션 페이지 에서 자료집을 다운로드 받아 훑어보기 바란다. 사실상 국가가 정한 ‘전연령 관람 불가 등급’이라고 할 수 있는 공산권 국가 제작 영상(‘특수자료’)들에 대해서는 정보만 안내하고 VOD로 공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산주의자의 영상에도 TMI는 있게 마련이고, 이런 정보들을 최대한 안내하고자 노력했다. 못 미덥지만 함께 수고했던 AI들에게도 감사를 전하고 싶다. *주7 *** 주1. 물론 필자가 하우스 같은 천재는 아니기에 다소 고통스런 공부가 수반되어야 했지만 말이다. 주2. 최병진, 짐바르도 마르타, 「이탈리아 파시즘 시기 선전물의 쟁점과 어법: 무솔리니의 도상을 중심으로」. 『유럽문화예술학논집』 11호(2), 21~39쪽. 문준영, 「파시즘의 로마 이미지와 로마관, 로마성(Romanità)―그 기원과 변천」. 『역사비평』 139호, 366~400쪽. Coluzzi, Paolo, “The significance of typography in the linguistic landscape during the Fascist period in Italy (1922–1943)”, Forum for Linguistic Studies 5(3):1885, 2023. 주3. “ Latin alphabet ”,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주 4. prompt engineering 효율 측면에서 ‘천황’이라고 언급했다. 명칭은 명칭일 뿐이다. 주5. “ 【独自】秩父宮、軍紀の乱れ懸念…日中戦争初期の書簡見つかる ”, 《요미우리신문》, 2020. 11. 15. 주6. “ 秩父宮雍仁親王 ”, 일본어 위키피디아 주7. 글에는 어쩌다 보니 claude의 프롬프트 화면만 나왔지만, 다양한 AI들과 그 기술이 적용된 툴들이 함께 했다.
1950년대 한국전쟁의 정전(停戰)과 경찰기구 인력 축소는 상이군인과 퇴역 경찰의 증가를 가져왔다. 그들 가운데 생계 방편으로 순업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일부는 지역 청년의 의무이자 반공 국가 ‘국민’으로서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순업을 수행한 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남 군(郡) 지역 가운데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해남군 ‘해남영화반’ 서대호가 대표적일 것이다. 1910년대 출생으로 추정되는 서대호는 식민지시기 해남군에서 전기 관련 업무에 종사하다 해방을 맞이했다. 그는 해방 정국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한독립청년단원으로 활동하면서 ‘G-2’의 요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해방이후 한국에 진주한 미 육군 24군단은 일반참모부(General Staff)와 육군 소속 방첩부대를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G-2는 한국 내 첩보 활동과 정보 수집 그리고 한국인 정치 지도자 사찰을 전담하면서 남한 우익 반공청년단체들과 연계하여 정보 수집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G-2의 활동과 참여 인력 및 신분은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에 서대호의 활동을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작고(作故)한 서대호를 대신하여 그의 아들 서아귀(1937년생)의 구술 증언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서아귀는 부친의 순업을 도와 해남영화반의 영사 기계 정비를 담당하였고 1970년대 해남극장의 운영을 몇 년 동안 맡아보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에 참가한 서대호는 9 ․ 28 수복과 함께 북진하던 도중, 인민군에 의한 부친 사망 소식을 듣고 반공 청년들을 규합하여 귀향한다. 이후 해남군 계곡면 흑석산에 남아있던 빨치산을 대상으로 선무(宣撫) 작업을 하던 중 목과 입을 관통하는 총상을 입게 된다. 부상으로 음식 섭취와 대화가 불편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서대호의 얼굴에 난 상흔은 해남군 행정 기관과 경찰 관료들로부터 예우를 받는 ‘애국의 증거’이자 ‘육화된 훈장’이 되었다. 상이군인에게 주어진 혜택 - 보훈처 상이군인 등록과 연금 지급 등 - 도 마다하고 입버릇처럼 ‘국가를 위해 마땅한 일’을 했다고 되뇌던 서대호는 4 · 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던 즈음, ‘청소년 시청각 교육’을 이유로 지역 학생 대상 무료 영사에 나서게 된다. 교육과 계몽을 앞세운 그의 순업은 퇴역 경찰 및 반공 활동에 참가한 청년운동 후배들이 동참했다. 광주 미공보원으로부터 리버티뉴스(liberty news)를 대여 받고 공보부의 대한뉴스와 문화영화를 챙긴 그는 일주일 또는 보름 단위로 새로운 필름으로 교환해가며 선전 활동에 나섰다. 서대호는 ‘해남영화반’이라는 이름을 걸고 조랑말 손수레에 16mm 영사기와 확성기 그리고 조명에 쓰이는 카보나이트(carbonate)를 싣고 해남군 일대를 순회하였다. 하지만 서대호는 1960년대 초중반 흥행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꾀하게 된다. 주간에 청소년을 대상으로 계몽영화를 상영하는 한편으로 야간에 흥행 목적의 35mm 상업 영화를 흥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에서 수입한 35mm 영사기와 군부대에서 사용된 지프차 엔진을 영사용 발전기로 조립하여 해남군 일대와 강진군과 영암군 일부 지역을 돌았다. 해남군 13개 면(面) 전체와 인근 군 단위 마을까지 아우르기 위해 순회 영사 차량을 세 개 조(組)로 나눴고, 각 조별 순업 인원도 아홉 명에서 열 명에 이르렀다. 당시 필름 간접 배급 체계에 따라 도시 이후 군 단위 상설극장, 마지막으로 순업 차례로 필름이 배급되고 있었다. 하지만 해남영화반은 순회 지역도 넓고 흥행 성적도 좋았던 까닭에 광주의 배급사로부터 신망이 두터웠고, 따라서 군(郡) 지역 상설극장과 비슷한 시기에 새로운 영화를 개봉할 수 있었다. 1960년대 순업이 영화를 상영하려면 해당 지역 경찰서에 집회 허가와 면사무소에 상영 신고를 하고, 이들 각 기관에 영화 대본을 제시해야 했다. 서대호의 경우, 반공 활동 이력이 확실한데다 지역에서 ‘원로’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그러한 절차가 형식적인 경우도 있었다. 1970년대 후반 해남극장을 사들인 서대호는 상설극장을 운영하면서도 해남읍내 인근 마을에서 해남극장과 시차를 둔 ‘동시 상영’ 형식의 순업을 계속했다. 극장으로 올 수 없는 지역민에 대한 배려이자 여전히 돈벌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흑백 TV 보급이 확산되고 1980년대 칼라 TV가 등장하자 관객 수는 급감하기 시작하여 결국 해남극장을 팔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부친을 ‘말로(末路)가 좋지 않았던’ ‘외골수’로 단언하는 서아귀와 달리, 광주전남 지역 필름 배급사가 증언하는 서대호는 지역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 흥행사로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 글: 위경혜
“잡아. 언제까지 잡을 거야. 야 나 권리 말 못하는 거 어디 있어. 나 권리 말 할 수 있어. 왜 내 입 막아. 나 권리 이 한국 땅에 나 권리 이야기할 수 있어. 나 권리 이야기하면은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요”종로에서 이주노동자 강제추방에 저항하며 농성 중이던 이주노동자 비두씨의 외침. 상반신이 탈의 된 채 온 몸으로 절규하는 그의 몸을 붙들어 움직이지 못하게 저지하고 있는 경찰무리들. 그리고 자신의 권리를 외치는 이에게 지나가던 한 (한국인) 행인의 다그침. '도망가려고해 씨발놈이! 빨리 집어넣어.' 다큐멘터리 < 계속된다 >를 떠올리면 항상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다이내믹한 이미지이자, 이 영화에서 담아낸 가장 절박한 장면이다. 7년 전의 일이다.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은 순식간에 ‘불법 거주자’가 되었고, 이들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었다. 그제껏 조용히 자국민들이 기피하는 소위 3D 현장에서 일을 해왔던 이들은 무분별한 단속과 강제추방에 저항하는 운동을 자발적으로 조직했다. 이전까지 남한 사람들이 이주노동자들의 목소리까지 대변해왔다면, 당시의 움직임은 그들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때였고, <계속된다>는 그들의 존재와 목소리를 담아낸 최초의 독립 다큐멘터리였다. 지금까지도 내게 이 영화는 투쟁 현장의 모습만이 뚜렷하게 남아 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주노동자에 대한 목소리가 부재했던 만큼 감독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 단속, 공장에서의 폭력 등을 차분히 들려준다. 영화의 전반은 중동건설붐 시절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일을했던 감독의 아버지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는데, '거기서의 외로움은 말로 못'한다는 아버지의 씁씁한 얼굴은 과거의 남한 사람들 역시 타국에서 외로이 이주노동자로 살아야했던 삶을 증언한다. 그 사이 남한은 노동자 `수출국`에서 `수입국`이 되어, 과거를 잊은 채 일하는 공장을 옮길 수 없고 4년 이상 거주자는 자국으로 떠나야만 하는 `고용허가제`란 노예법에 가까운 규율로 이주노동자를 관리해왔다. 그로 인해 고국 방글라데시로 떠나야 했던 이는 '내 나라가 내 나라 같지 않다'고 씁쓸히 전한다. 전지구적 자본화는 국경을 아랑곳하지 않고 어디로든 넘나들 수 있게 되었지만, 일개 노동자의 삶은 그가 고국에서 날리는 연처럼 공중 높이 떠올라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이 부유하는 존재가 되었다. < 계속된다 >던 감독의 적합한 예측이었던지, 영화를 보았던 2003년의 이주노동자의 모습은 여전히 그때와 다름없이 불투명한 삶 속에 지속되고 있다. 사실 갑자기 이 영화가 떠올랐던 것도 최근 G-20의 개최 여부에 따라 정부의 강화된 단속때문이었다. 필리핀에서 온 친구 미셸은 강제추방에 맞서 2주째 단식투쟁을 하다 건강이 악화되어 (글을 쓰는 시점인 오늘) 7월 6일 병원에 실려갔다. 다양성이니 다문화주의니 하는 시대에도 정작 그 주체인 이들의 삶은 외면당한 채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들은 바로 이곳에 함께 살아가며 온몸으로 자신의 존재를 외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들은 침묵으로 바라볼 뿐이다. 이 변하지 않는 서글픈 상황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건지, 다시 영화를 보니 마음이 무겁게 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