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Me
- 감독
- 김민수
- 제작년도
- 2013
태양계 궤도를 도는 에베레스트 크기만한 새로운 혜성을 발견한 천문학과 박사 과정의 케이트(제니퍼 로렌스). 다른 동료들의 열렬한 축하를 받는 가운데 지도교수인 민디 박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궤도 계산을 하다 거의 100%에 가까운 확률로 6개월 안에 지구와 충돌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부딪치는 순간 종말이 펼쳐질 게 명백한 상황이기에 케이트와 민디 박사는 NASA에 보고하는데 이때 정부 관계자들이 극비리에 개입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익숙한 SF 재난 블록버스터를 떠올릴 법하지만, < 돈 룩 업 >은 그 쉽고 흔한 길을 걷지 않는다. 이 영화는 혜성 충돌의 고전적인 마스터피스 <세계가 충돌할 때>나 < 지구의 대참사 >도, 할리우드 스케일의 위력을 담은 < 아마겟돈 >이나 < 딥 임팩트 >도, 운명적인 < 너의 이름은 >이나 로맨틱 코미디의 < 세상 끝까지 21일 >도, 그리고 암울한 아트하우스의 < 멜랑콜리아 >도 보여주지 않았던 세태 풍자에 집중한다. 무능한 정부는 정치 스캔들에서 벗어나 중간 선거에 이기기 위해 혈안이 돼있고, 언론은 심각한 분위기를 피해 가십으로만 소비하려 한다. 여기에 이익에만 눈이 먼 기업과 전문가들의 경고를 외면하고 기만하는 대중들이 가세하며 환장의 대(大)콜라보를 이룬다. SNL 작가 출신으로 윌 페럴과 함께 많은 코미디를 작업한 아담 맥케이 감독은 기후 환경 문제와 막장의 끝을 달린 트럼프 정부 그리고 제작과정 중 실시간으로 터진 코로나 상황을 혜성에 빗대 마치 실제 인류의 대위기 앞에서 벌어질 법해 정말로 무서워(!)지는 블랙 코미디를 완성해냈다. 제니퍼 로렌스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메릴 스트립, 조나 힐, 마크 라일런스, 케이트 블란쳇, 타일러 페리, 티모시 살라메, 론 펄만, 아리아나 그란데, 키드 쿠디, 히메시 파텔 등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며, <돈 룩 업>은 넷플릭스에서 성공의 지표로 뽑는 “공개된 지 28일 동안 가장 많이 본 영화” 중 < 레드 노티스 >에 이어 역대 2위를 차지했다. 비판의 대상이 다소 편향적이라는 지적과 반복적이고 단선적인 플롯과 고압적인 자세가 불편하다는 반응도 있는 등 호불호가 갈렸지만, 2021년 오스카를 비롯해 각종 연말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각본상 등 후보에 오르며 완성도에서 호평을 얻었으며, 현재 미국 사회가 가진 문제점과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극찬도 받았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한심한 작태를 풍자하는데 주력한 작품이지만, 이 극도로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웃음과 재미, 감동을 이끌어내는 건 바로 적당한 거리두기를 통해 나름 객관성을 유지하는 니콜라스 브리텔의 명민한 음악 덕분이다. 니콜라스 브리텔 배리 젠킨스의 < 문라이트 >와 <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 >으로 오스카를 비롯한 각종 시상식 음악상 후보에 오르며 단숨에 주목을 받은 니콜라스 브리텔은 1980년대생 할리우드 영화음악가들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이력을 쌓고 있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다. 뉴욕의 유대 가정에서 자란 브리텔은 피아노에서 발군의 실력을 드러내며 고교 시절 줄리어드 음대의 프리 칼리지 프로그램을 이수했으나, 왜 인간이 음악에 매료될까에 궁금증을 느껴 하버드 심리학과에 지원할 정도로 괴짜이자 수재였다. 학부 시절 내내 힙합 연주그룹에서 키보드 주자로 활동하며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심취했고, 자신의 하버드 심리학과 동기였던 배우 나탈리 포트만이 처음 연출한 단편 <EVE>에서 그의 소품 “Forgotten Waltz No.2”가 쓰이며 영화음악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이후 포트만이 참여한 < 뉴욕 아이 러브 유 >의 한 꼭지를 비롯해, 각종 다큐멘터리에 참여하며 음악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럼에도 브리텔은 본격적으로 음악을 업으로 삼지 않고 월스트리트에서 잘 나가는 해지펀드 매니저이자 외환 딜러로 활동했는데, 그가 결국 다시 음악으로 마음을 돌리게 된 계기가 된 건 < 노예 12년 >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스티브 맥퀸 감독의 부탁으로 한스 짐머가 <노예 12년>의 스코어를 맡았지만 영화 전반에 삽입될 소스 음악들에 대해선 다소 부담을 느끼고 있던 터라 새로 외부 음악가를 수혈했는데, 그게 바로 니콜라스 브리텔이었다. 그는 전혀 녹음된 바 없고, 제대로 전승되지도 못한, 잃어버린 노예들의 음악을 위해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실제 유행하던 스타일에 맞춰 철저한 고증 끝에 새롭게 만들어 빌보드 매거진으로부터 “<노예 12년> 음악의 비밀병기”란 극찬을 받았다. 금융권 출신답게 브리텔은 비즈니스적인 관점에서 제작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단편 영화에 제작으로 참여하기도 했으며(그게 바로 데이미언 셔젤의 < 위플래쉬 >였다!), 후에 이 영화가 장편화되며 음악에서 일부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확고히 영화음악가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건 앞서 언급한 배리 젠킨스와 아담 맥케이와 함께 한 일련의 작품들이 성공한 덕분이 크다. < 빅쇼트 > 때 브리텔의 대본에 적힌 전문적인 금융(음악이 아니라!)업계 용어 메모에 놀라 아담 맥케이가 반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사실 그의 음악이 가진 매력은 대단히 놀랍다. 이미 <빅쇼트>와 < 바이스 >를 통해 복잡하고 민감한 경제와 정치 생태계를 깔끔하고 명료하게 음악적으로 정리한 바 있는 니콜라스 브리텔은 이번 <돈 룩 업>에서도 멸망을 앞둔 경박한 사회적 혼란과 진실이 잘못된 정보 앞에 덮이는 아이러니, 무능한 정부를 비꼬는 다양하고 세련된 스코어들을 들려준다. 신랄한 풍자와 날 선 묘사들로 불쾌해질 수 있는 영화의 공격성을 최대한 무마하고, 널뛰는 코미디와 진지한 드라마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는 여러 고민 끝에 혼란이 절정에 달했던 2차 세계대전 시기 유행한 업 템포의 빅밴드 사운드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이를 메인 테마의 색채로 잡는다. 광기와 혼돈을 묘사하면서 멸망이라는 실존적인 문제 앞의 우울함과 슬픔을 내재해야 하고, 동시에 코미디 음악으로서 희극적인 면모도 갖춰야 하기에 복잡하고 미묘한 톤을 유지해야 하는데, 브리텔은 절규하듯 울부짖는 브라스섹션에서 절묘한 부조리의 묘미를 찾았다. 그래서 주인공들이 필사적으로 혜성 충돌을 경고할 때마다 빅밴드 사운드는 더 처절하게 조증 기조를 발하고, 격렬하고 활력 넘치는 사운드는 이들이 무기력하게 실패할 때마다 공허하게 울려 퍼지며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뒷받침해준다. 또한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 X’와 스티브 잡스의 ‘애플’, 그리고 마크 저커버그의 ‘페이스북’ 사이 어딘가에 위치할 영화 속 대기업 BASH의 다양한 징글(방송이나 광고, 벨소리에서 쓰이는 짧은 곡)을 배치해 공허한 낙관론과 가짜 희망주의를 조롱하며 음악적 효과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니콜라스 브리텔은 이를 위해 영화 속에 나오는 모든 핸드폰 벨소리와 기업 프레젠테이션 속 영상, 방송 시그널과 CF 음악들을 일일이 작업했다. 여기에 영웅적인 블록버스터 사운드(물론 이마저도 비웃기 위해 사용되었다!)나 휴머니즘에 입각한 정통적인 할리우드 스코어까지 활용하며 음악적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장르적인 방식뿐만 아니라 악기에서도 베이스, 드럼, 트럼펫 그리고 색소폰 트리오 등의 빅밴드나 전통적인 오케스트라는 물론, 밴조와 만돌린, 토이 피아노, 첼레스타, 파르피사 오르간, 차임벨, 힙합 비트를 포함한 각종 일렉트릭 효과까지 특이하고 독특한 종류를 혼합해 유희적이고 절충된 사운드스케이프를 펼쳐 보인다. 일견 스코어만 듣고 있으면 짧은 큐들에, 워낙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두서없이 펼쳐져 응집력이 떨어져 보일 수 있지만, 영화 내에서 각각 장면마다 강력하게 작용하며 존재감을 발휘한다. 또한 영화 내에선 니콜라스 브리텔이 공동으로 참여한 두 곡의 노래도 흘러나오는데, 극중 커플로 나오는 아리아나 그란데와 키드 쿠디가 영화 중반 소행성과 충돌을 경고하기 위해 콘서트장에서 부르는 “Just Look Up”과 동면에서 깨어나 새로운 세상에 진입하게 된 지구인들의 쿠키를 담은 엔드크레딧에 흐르는 “Second Nature”다. 아리아나 그란데와 키드 쿠디의 듀엣송으로 전통적인 사랑 노래처럼 시작하는 “Just Look Up”은 후반 2절에 이르러서 무지한 대중들의 계몽을 일깨우는 과격한 가사로 영화의 조롱 강도를 더한다. 아름다운 파워 발라드에 이질적인 가사가 던지는 격차야말로 이 노래의 백미로, 2021년 강력한 오스카 주제가상 후보였지만 아쉽게 탈락하고 말았다. “Second Nature”는 브리텔과 인디 밴드 본 이베어의 리더인 저스틴 버논이 함께 만든 곡으로, 혜성 충돌 후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에서 먹먹해진 감성과 풍자로 쓰린 속을 다스리기에 좋은 몽환적인 포크송이다. 권력과 재력으로 새로운 세상에 이주한 이들을 위한 노래가 아닌, 현시점에 지구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올바른 선택과 희망에 대해 화두를 던지는 응원가이자 송가라 할 수 있다. 코로나 시기 비장의 OST 중 하나였던 <돈 룩 업>으로 자신의 세 번째 오스카 음악상 후보에 지명된 니콜라스 브리텔은 아담 맥케이와 함께 HBO에서 4시즌까지 방영된 드라마 <섹세션>과 디즈니 플러스의 새로운 스타워즈 시리즈 < 안도르 >를 통해 안방 데뷔에도 성공했으며, 24년 배리 젠킨스와 새롭게 도전하는 라이온 킹의 실사화 속편이자 프리퀄인 <무파사: 더 라이언 킹>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Track List 1. "Just Look Up" by Ariana Grande & Kid Cudi 2. Discovery 3. Ephemeris 4. On Hold 5. The Call 6. C-5 Galaxy 7. Don't Look Up (Main Title Theme) 8. BASH Corporate Ident ("Liif") 9. Hyperobject Approaches 10. My Boyfriend Broke Up With Me 11. The Arrest 12. It's A Strange Glorious World 13. The Launch 14. The BASH Presentation 15. Kate Goes Home 16. FEMA-BASH Commercial 17. Arrival At The Hangar 18. There Is A Comet 19. The Comet Appears 20. The Prayer For Stuff 21. The BASH Launch 22. Twenty-Four Drones Is Enough 23. It All Comes Down To This 24. Thanksgiving (Overture To Logic And Knowledge) 25. The End? 26. Memento Mori 27. Don't Look Up (End Credits Suite) 28. Logic Waltz In B Major (Bonus Track) 29. Don't Look Up (Main Title Suite; Bonus Track) 30. Ode To Science (Bonus Track) 31. "Second Nature" by Bon Iver
1993년 여름의 나를 사로잡은 질문은 그것이었다. 누가 로라 파머를 죽였는가? ‘충격적인 컬트’라는 수식어와 함께 심야 시간대 KBS2에서 방영되었던 데이빗 린치의 <트윈 픽스> 1화 오프닝은, 그때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의 내가 돌이켜보건대, 지금까지 내 인생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의 정수를 담고 있었다. 이 드라마는 1화 첫 장면부터 ‘시체를 던진다’. 금발머리에 푸른 눈, 학교 축제에서 여왕으로 선정될 만큼 트윈픽스 마을의 최고 미인으로 꼽히던 고등학생 로라 파머가 강가에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차가운 강물 속에 몇 시간 동안 떠다녀서인지, 그의 피부는 잿빛으로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입술도 생기를 잃은 채 푸르죽죽했다. 젊음과 아름다움이 그대로 ‘박제’된 시체가 주는 불편한 매혹. 또래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부유한 가족의 외동딸로서 사랑을 듬뿍 받았으며 심지어 봉사 활동에도 열심이어서 누구에게나 칭찬을 듣던 밝고 화사한 소녀 로라 파머가 시체로 발견된 뒤, FBI 요원 데일 쿠퍼가 전담 수사관으로 트윈 픽스 마을에 도착한다. 그리고 비밀이 하나씩 드러난다. 한낮의 햇살 같던 로라에게 실은 암흑 같은 어두움이 스며들어 있었고, ‘공인된’ 남자 친구는 한명이었지만 다수의 남성들이 로라 주변에 존재했다. 심지어 마약과 매매춘, 새디스트의 고문이라는 엄청난 단어들이 FBI 요원의 입술에 오르내린다. 트윈 픽스는 어떤 곳인가. 침엽수림이 우거지고, 큰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새들이 평화롭게 우짖으며, 미국 최고로 맛있는 체리 파이와 뜨거운 커피를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영업 중이고, 새롭게 유입된 사람은 거의 없이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끼리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지내는 그런 마을이다. 따스한 세피아 톤 화면 속에서, 서로 마주치면 미소와 덕담을 주고받은 마을 사람들의 과장되게 따뜻한 관계가 넘쳐나는 곳이기도 하다(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나오미 왓츠가 처음 할리우드에 도착하여 노부부와 주고받는 밝고 희망차고 부자연스러운 연기를 떠올려보라). 그러나 대화가 끝나고 뒤돌아서면 그 사람의 얼굴에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표정이 떠오른다. 웃음기가 가신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리거나, 음험하고 차갑고 비열한 표정은 시청자들만 볼 수 있는 일종의 ‘방백’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누가 로라 파머를 죽였냐고? 모두에게 혐의가 있고, 모두가 비밀을 숨기고 있으며, 모두가 떳떳하지 않다. 심지어 가장 선하고 정의로운 인물로 제시되는 데일 쿠퍼마저도 극이 진행됨에 따라 모종의 변화를 겪는다. 종국엔 가장 무시무시한 표정이 그의 얼굴 위에 얼어붙는다. 애거사 크리스티로 대표되는 고전 미스터리의 익숙한 전제이지만, 드라마로 이런 이야기를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누군가 살해당했고, 모두가 수상하고, 모두가 그 죽음에 책임이 있다. 겉으로는 그토록 아름답고 아늑해 보이는 마을이지만, 그 안에는 죽음과 부패와 심지어 악마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다. 린치의 <블루 벨벳>의 유명한 오프닝 신처럼, 장미꽃 아래 떨어져 있던 사람의 잘린 귀 같은 그런 세계. 그리고 <트윈 픽스>의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육체관계로 얽혀 있는데, 문제는 이 모두가 치정 혹은 제도적으로 용인받지 못할 관계라는 것이다. 배우자 몰래 저지르는 불륜이라든가, 죽은 친구의 연인과 사랑에 빠진다든가, 재산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맺은 관계라든가.... 그들은 우울한 현실과 복잡한 삶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연애를 선택했고, 그 말로는 당연히 모두 처참하다. 배신과 기만, 거짓된 정체성의 폭로. 이별과 살인과 자살. 이 복잡한 치정 관계들은 로라 파머 사건과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지만, 중요한 단서로 작동하면서 정교한 추리를 완성하는 수단으로 제시되진 않는다(시리즈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데일 쿠퍼는 추리하지 않는다. 그는 ‘계시’를 받는다). 로라 파머의 죽음 이후 연루된 이들의 사소한 비밀이 수사 과정에서 밝혀지거나, 당사자가 그 폭로를 막기 위해 어떤 행동에 나서면서 연쇄적으로 다른 사건들이 터지는 식이다. 즉 확실한 인과관계 없이 충동적인 생존본능에 의해 저질러지는 이러저러한 사건들이 주요 플롯을 이룬다. 그런 면에서 <트윈 픽스>는 일일드라마적 전통(내지는 미국의 소프 오페라, <가이딩 라이트>라든가 <제너럴 호스피털> 같은 드라마의 전통을 다시 쓰기 한 작품) 1) 에 가깝지 않은가 하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물론 회가 거듭할수록 악령과 명상, 신비로운 체험이 줄줄이 등장하면서 이야기의 장르는 오컬트 스릴러의 색깔이 상당히 진해지지만 말이다. 작년부터 왓챠를 통해 <트윈 픽스> 시즌 1, 2를 다시 본 다음 가장 최근작인 (25년 만에 돌아온) 시즌 3의 초반까지 챙겨보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데이빗 린치가 이끄는 대로 넋을 놓고 따라가며 그 낯선 세계의 토끼 굴을 탐험했다면, 이후의 무수한 자칭 타칭 ‘포스트 <트윈 픽스>’들까지 충분히 경험했던 2021년의 관람자로서 새롭게 느낀 점은 <트윈 픽스>가 얼마나 느슨한 이야기였나 하는 점이다. 이를테면 마크 프로스트가 로라 파머 살인 사건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은 실제 사건이 있다. 스무 살의 헤이즐 드루(Hazel Drew)는 1908년 강변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수사 기법이라는 게 전혀 확립되지 않은 20세기 초의 그 살인 사건은, 남자들과 쉽게 어울렸고 낯선 사람도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던 예쁜 아가씨의 죽음을 둘러싼 수상쩍은 호기심과 무성한 소문과 함께, 이 남자 혹은 저 남자 모두가 의심스러운 정황에 대한 모호한 가능성만 여럿 남긴 채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마크 프로스트가 헤이즐 드루 사건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꼬마 시절 할머니가 잠자리에서 들려준 일종의 유령 이야기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할머니는 꼬마들이 밤에 집 밖으로 나가 놀면 안 된다는 교훈을 심어주기 위해 미제로 끝났던 헤이즐 사건을 다소 무시무시하게 각색하며 초자연적인 무언가와 섞어서 마크 프로스트에게 들려주었다고 했다. 프로스트에게는 그 비극적인 사건의 주인공 헤이즐에 대한 상상이 뇌리 어딘가에서 계속 맴돌고 있었고, 결국 수십 년 뒤 헤이즐은 로라 파머로 재탄생했다. 2) 그리고 그 수수께끼 같은 죽음의 이야기가 재탄생한 1990년 전후의 시기는 어떨까. 인터넷 등의 각종 통신 수단이 발달하기 직전이었던,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대’ 이전의 시기다. 비밀은 얼마든지 감출 수 있었고 이중생활이 얼마든지 가능했으며 심지어 악마가 인간 세계에 끼어드는 것도 가능했던 시기다. 그래서 프로스트와 린치는 그 모호한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여, 정확한 전개라든가 캐릭터의 일관성 같은 요소들은 거의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유연상 작용처럼 드라마를 만들었는데, 그런 헐거운 흐름과 자유로운 리듬이 전형적인 드라마투르기에 익숙했던 당시 시청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을 것 같다. 작가가 완전히 장악하여 정확하게 짜놓은 세계 속에서 편안하게 누워 감상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구전 설화를 듣는 것처럼, 화자가 말하던 도중에 갑자기 잊어버리고 다른 주제로 휙 건너가는 것처럼 다소 맥락 없고 뒤죽박죽된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쩌면 눈으로 본다기보다 귀로 듣는 옛 이야기의 부활을 목격한 것 같은 착각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드라마 내내 과잉처럼 쓰이는 바달라멘티의 음악 역시 그 효과를 강화시킨다). 조금만 뒤로 물러서서 다시 큰 그림을 보자. 데이빗 린치는 드라마 <트윈 픽스> 이후 영화 <트윈 픽스(Twin Peaks: Fire Walk With Me)>(1992년)를 재차 만들었다(웨이브와 구글 플레이 무비즈에서 대여 혹은 구매로 볼 수 있다). 이는 시즌 1의 프리퀄로서, 드라마에서는 늘 누군가의 회상 신이나 대사를 통해서만 언급되던 로라 파머가 처음으로 주인공으로 극 전체를 장악하며 살아 움직인다. 드라마에선 ‘냉혹한 미녀’처럼 그려지던 로라 파머가 영화에선 좀더 순진하고 따뜻하고 가련한 인물로 재해석되었음을 목도하게 된다. 그리고 데이빗 린치의 딸이자 영화감독 겸 작가인 제니퍼 린치는 소설 <로라 파머의 비밀 일기(The Secret Diary of Laura Palmer)>를 썼다. 이것은 로라 파머가 생전에 썼던 비밀일기장의 내용을 상상하여 완성한 책이다. 1990년의 드라마 시즌 1과 시즌 2사이에 출간된 스핀오프다. 당시 22살이던 제니퍼 린치는 데이빗 린치와 마크 프로스트로부터 로라 파머에 대해 처음 듣고 자신이 그 인물과 대단히 가깝다고 느꼈으며, 마치 ‘자동기술’을 하듯이 즉각적으로 이 소설을 써내려갔다고 밝혔다. 3) 헐거운 ‘트윈 픽스’ 세계관에서 작가와 감독이 미처 신경쓰지 못했던(혹은 않았던) 빈 공간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을 때, 시청자들이 의외로 그 여백에 열렬히 반응하며 새로운 디테일을 적극적으로 요구했을 때, 감독은 별개의 영화와 그리고 25년만의 새로운 시리즈로 그에 응답했다. 감독의 딸이자 또다른 크리에이터는 거기서 파생된 로라의 일기라는 새로운 픽션을 완성했다. <트윈 픽스> 시즌 1이 시작될 무렵에는 미처 계획하지 않았던 디테일과 주석이 지속적으로 덧붙여지면서, 트윈 픽스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도 그만큼 확장된 것이다. 드라마 시즌 1~3, 독자적인 장편 영화와 장편 소설까지, 이것이 지금의 우리에게는 상당히 널리 알려진 팬픽션 혹은 유니버스와 그렇게 많이 다를까? 어쩌면 유니버스라는 개념이 지금처럼 확고하게 대중적인 무언가로 정착되기 이전의 초창기 버전의 형태였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어쩌면, <트윈 픽스> 제작진마저 데일 쿠퍼처럼 트윈 픽스의 세계에 갇혀 버린 건 아닐까? <트윈 픽스> 시즌 3의 2화에서, 외팔이 남자는 데일 쿠퍼에게 묻는다. “이건 미래인가요? 아니면 과거인가요?” 과거에서 상상한 미래라고 해야 할까. *** 1) 아래 아티클에 따르면, 각본가 마크 프로스트는 극중극 형태로 등장하는 <사랑의 초대(Invitation to Love)>를 소프 오페라의 노골적인 패러디로 작심하고 썼다고 한다. https://www.dazeddigital.com/film-tv/article/40177/1/invitation-to-love-soap-within-twin-peaks-david-lynch 2)https://www.dailymail.co.uk/news/article-4336146/The-real-life-murder-Sand-Lake-NY-inspired-Twin-Peaks.html 3)https://en.wikipedia.org/wiki/The_Secret_Diary_of_Laura_Pal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