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장 보러 가는 날
올해 나온 모든 다큐멘터리를 본 것도 아니고, 또 아직 남은 시간동안 더 봐야할 다큐멘터리가 남아있기도 하지만, 이번 KMDb에 소개할 다큐멘터리는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을 고르기로 했다. 올해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지난 3월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처음 소개된 후 전주국제영화제, 인디포럼,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등에서 상영된 원태웅 감독의 < 장 보러 가는 날 >이다. 55분의 중편이라고 할 수 있는 <장 보러 가는 날>은 '부모님은 한 달에 두 번 가게에서 사용할 식자재를 구입하기 위해 퇴촌에서 서울집으로 올라오신다. 중고자동차를 구입한 후 부모님과 함께 장을 보러 다니게 되었고, 덕분에 서울에서 퇴촌으로, 퇴촌에서 서울로의 반복되어 쌓여가는 여행을 시작한다'는 몇 줄로 간단히 요약될 내용을 담고 있다. 등장인물은 감독인 나와 부모님 세 명이고, 장을 보고, 차에서 타거나 내리고, 밥을 먹고, TV를 보는 일상이 쌓이고 쌓여갈 뿐, 별다른 사건이나 이야기가 펼쳐지지도, 기승전결의 내러티브가 있는 것도 아니다. 퇴촌에서 서울집에 올라온 부모님은 같이 밥을 지어 먹고, TV를 보고, 마늘을 까거나 낮잠을 잔다. 그리고는 대형마트와 도매시장 등으로 장을 보러 다닌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면 세 사람은 자동차를 타고 퇴촌으로 향한다. 퇴촌에 도착하면 세 사람은 나란히 짐을 내리고, 내린 짐을 창고로 옮긴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TV를 보고, 잠자리에 든다. 다음날 나는 홀로 퇴촌을 떠나 서울로 향한다. 몇 장면을 제외하면 카메라는 멀찍이 떨어져서, 자동차 안에, 혹은 세 식구가 집을 나선 텅 빈 집에, 건물의 옥상에, 마을 주차장에 고정된 채 이 세 사람의 반복되는 시간을 기록한다. 공간 역시 특정한 위치나 지역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동네 골목길, 마을의 주차장, 집 건물 옥상에서 둘러본 마을 전경, 집 안의 풍경들은 계절이 바뀌고, 변하지 않는 듯 조금씩 변하지만 서울의 어느 동네일 뿐, 정확히 어디에 위치한 곳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이들이 장을 보러 다니는 대형마트나 도매 시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공사가 진행 중인, 사람 하나 없는 퇴촌 역시 어디에 위치한 곳인지 드러나지 않고, 헐벗고 파헤쳐진 산과 강에 둘러싸인 모습은 다소 기이하고 이질적이며 비현실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동네와 시장과 이들이 지나치는 공간은 가끔 이 세상에 속해있지 않은, 혹은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어떤 곳인 듯한 느낌을 준다. 가끔 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은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이 일상적인 것들이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전국노래자랑’ 같은 TV프로그램에서 흘러나오는 시끌벅적한 노랫소리나, 자동차를 타며 듣게 되는 라디오 DJ의 멘트 소리뿐이다. 감독은 카메라를 고정시킨 채, 감독 자신을 포함한 세 사람의 시간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그 기록을 짜맞춰 그 고요하고, 적막한(이 세 명이 대화를 나누거나, 서로에게 말을 거는 일은 거의 드물다) 시간이 바뀌어 쌓여간 그 흔적들에 어떤 느낌과 감정, 그가 반복된 여행을 하며 몸에 새겨졌다고 말하는 노곤함, 헛헛함, 익숙함,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어떤 감정들을 담아낸다. 아마도 감독은 그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시간과 반복적인 일상이 주는 어떤 기이한 감정 같은 것들을 기억하고, 붙잡아두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의 마음과 몸에 새겨졌을 아무렇지 않은, 하지만 결코 ‘아무렇지 않은 것’이 아닐 그 기억과 감정들. <장 보러 가는 날>은 그렇게 우리 각자가 지닌, 우리 각자에게 새겨진 그 무엇을 환기시키고 흔들어놓는다. 이 영화가 마음에 남았던 것도, 오랫동안 가라앉아있던 어떤 감정들과 기억들이 살아났기 때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