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황건적의 난
- 감독
- 회우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왕쟁, 하육준, 장하명, 후효동
① 황금관 1913년 1월 1일 개관한 황금관은 대장성 관료 출신으로 러일전쟁 당시 조선에 건너온 다무라 기지로(田村義次郞)가 세웠다. 위치는 지금의 을지로 4가인 황금정 4정목에 있었는데 루나파크(Luna Park)인 황금유원(黃金遊園) 내 활동사진관으로 시작되었다. 설립 초기 황금관은 필름 수급의 어려움과 운영상의 미숙으로 고전하였으나 대정관 매점을 운영하던 하야카와 마쓰타로(早川增太郞)가 운영을 맡게 되면서 크게 성장하게 된다. 하야카와는 대정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질이 낮은 영화를 상영했음에도 조선 내 일본인 관객들에게 가장 큰 인기가 있던 변사 유모토 교하(湯本狂波)와 여자 변사 아시자와 하쓰에(蘆澤初江) 등을 고용하여 많은 관객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황금관은 하야카와의 이름을 딴 하야카와연예부(早川演藝部)를 통해 운영되었다. 1914년 하야카와연예부는 텐카츠(天活, 천연색활동사진회사의 약칭)의 선만대리점으로 텐카츠에서 수입, 제작한 2색 칼라영화인 키네마칼라를 본격적으로 상영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서울의 우미관을 비롯해 인천의 표관, 평양의 평안극장 등 지방의 영화관에 필름을 공급하였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필름 값이 폭등하게 되자 일반 영화보다 필름을 두 배 더 사용하는 키네마칼라 필름을 대신하여 활동사진의 일부를 변사들의 실연으로 보여주는 연쇄활동사진을 도입해 경영상의 어려움을 극복했다. 하야카와연예부의 영향력은 당시 조선의 영화산업을 주도하던 대정관의 닛다연예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황금관은 1915년 경복궁에서 개최된 시정5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記念朝鮮物産共進會)를 위해 만들어진 연예관(演藝館)을 사들여 기존 건물 옆에 옮겨지은 후 1916년 6월 10일 새로운 건물로 확장 이전하였다. 성공적으로 운영되던 황금관은 1917년 황금관 소유자인 다무라와 하야카와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유락관으로 그 본거지를 옮긴 하야카와연예부를 대신하여 낭화관의 운영자 니시다 가조(西田嘉三)를 급하게 운영자로 섭외한다. 하지만 니시다는 영화관 운영 경험이 없었기에 영화관이 운영될 수 있게 틀만 잡아 두고 아라키 다이스케(荒木大助)에게 운영권을 넘기게 된다. 아라키가 운영하던 시기 황금관의 가장 큰 성과는 극영화를 제작했다는 점이다. 1919년 2월 21일 상영한 부산의 출정군인 나가부치 센타로(中淵仙太郞) 일가의 비참한 삶을 그린 <누의 가(淚の家)>가 바로 황금관에서 제작한 극영화이다. 이 영화는 경성일보사 기자의 지도하에 제작되었으며, 각본은 황금관 운영자인 아라키가 썼다. 이 영화는 조선거주 일본인들이 만든 최초의 극영화로 부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재조선 일본인들의 삶을 소재로 삼았기에 경성의 일본인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사진] 황금관이 인수한 조선물산공진회 연예관 1919년 텐카츠가 해산되어 국제활영주식회사(國際活映株式會社, 곳카쓰[國活])로 바뀌면서 황금관에서는 곳카쓰(國活) 영화를 상영했으나 고전하게 된다. 1921년 말, 황금관은 유니버설 영화만을 상영하는 서양영화 전용관으로 전환되었다. 당시 서양영화전용관으로 전환하는데 앞장선 이가 새롭게 황금관을 운영하게 된 황금관 전무인 변사 난고 기미토시(南鄕公利)였다. 그는 서양영화의 설명에 능한 인물로 한때 서양영화전용관으로 운영되던 유락관에서 근무하다가 황금관으로 옮겨온 바 있다. 황금관은 1922년 9월 다이카츠 쇼치쿠와 계약을 맺고 쇼치쿠 계통의 영화관으로 운영되다가 1924년 1월부터는 새롭게 등장한 제국키네마(帝國キネマ) 조선 봉절장으로 있었다. 1925년 9월부터 다시 하야카와 마스타로가 운영을 맡았다. 그러나 1926년 2월에 하야카와 마쓰타로가 조선에서의 활동을 접으면서 마키노키네마(マキノキネマ), 도아키네마, 제국키네마 등이 직영하게 된다. ② 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 1928년 4월에는 신문기자 출신으로 외화 수입업자로 활동하던 도쿠나가 구마이치로(德永熊一郞)가 황금관의 운영권을 인수하여 도아키네마(東亞キネマ) 직속 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라는 이름으로 운영했는데 도아키네마 영화뿐 아니라 다른 중소회사의 영화들도 상영했다. 동아구락부의 운영자 도쿠나가 구마이치로는 규슈 출신으로 1920년대 초반 대구로 건너와 흥행업에 뛰어 든 이후 1920년대 중반 서울로 근거지를 옮겨 외국영화 수입회사인 덕영상회(德永商會)를 설립하고 고베의 동서영화주식회사(東西映畵株式會社)가 권리를 가지고 있는 워너브러더스와 FBO영화사의 영화를 수입 배급했다. 덕영상회에서는 외화 수입 외에 도아키네마를 비롯해 중소 규모 영화회사의 필름을 상영했고 덕영프로덕션을 통해 영화제작도 했다. 덕영프로덕션에서 제작한 영화로는 토성회와 함께 제작한 이규설 연출, 복혜숙 주연의 <홍련비련>과 <순정은 신과 같다>와 같은 관청 납품용 교육(문화)영화들이 있다. 동아구락부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이 인기 있는 작품들이 아니어서 저렴한 입장료를 매기는 대신 자주 프로그램을 바꾸면서 많은 관객을 불러 모았다.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 사이 동아구락부는 일본인 상설관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하던 극장이었다. 1930년부터 조선에서 토키영화가 본격 상영되기 시작하자 닙튼 영사기를 구비하여 토키영화를 상영하였다. [사진] 1936년 신축되어 1999년 사라진 국도극장(1961년 경, 출처: 국가기록원) ③ 쇼치쿠좌(松竹座) 1934년 3월 말로 계약이 끝나는 쇼치쿠 영화에 대한 대정관의 독점권을 두고 서울의 극장들이 쇼치쿠 개봉관이 되기 위해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이때 주도권을 쥔 것이 동아구락부였다. 동아구락부에서는 쇼치쿠 개봉관의 지위를 얻게 되자 이를 기회로 극장 이름도 동아구락부에서 쇼치쿠좌(松竹座)로 바꾸었다. 1934년 7월 13일이었다. 쇼치쿠좌는 정원이 1,033명이 들 정도로 거대한 극장으로 보통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으로 불리었다. 하지만 시설이 낙후하여 1935년 6월 토키영화관으로 신축이 결정된다. ④ 황금좌(黃金座) 쇼치쿠좌와 그 뒤 과거 광무대가 있었던 곳을 합하여 총 600평의 부지에 건설비 30만원에 무대장치 완비하여 건설되었다. 개관 당시 쇼치쿠의 흥행권이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에게 넘어가게 되면서 마키노영화를 상영하게 되자 극장 이름을 쇼치쿠좌에서 황금좌로 바꾸었다. 개관일은 1936년 11월 15일이었고 정원은 1,136석이었다. 도쿠나가가 운영하던 황금좌는 1937년 12월 도와(東和)상사 조선지사의 고인문(高仁文)으로 운영자가 바뀌게 된다. 파라마운트를 비롯해 각종 외화를 수입하는 도와상사가 황금좌를 운영하게 되면서 황금좌는 서양영화를 비롯해 조선영화의 상영장으로 자리 잡게 된다. 특히 최남주의 조선영화사는 공식적으로 황금좌를 자사의 봉절관으로 정하게 된다. 당시 외국영화와 일본영화를 함께 상영하도록 했기에 도와상사가 운영하던 황금좌에서는 닛카쓰 영화를 상영하며 닛카쓰 개봉관이 된다. 전통적으로 닛카쓰영화를 개봉하던 희락관은 2번관으로 바뀌게 된다. ⑤ 경성보총극장(京城寶塚劇場) 할리우드영화에 대한 수입제재가 장기화되면서 도와상사의 고인문은 황금좌 운영에서 손을 뗀다. 황금좌 소유자 다무라 미네(다무라 기지로의 미망인)는 황금좌의 운영권을 회수하여 요시모토 흥업과 보총극장이 제휴한 주식회사 경성보총극장에 넘긴다. 황금좌는 1940년 5월 1일부터 이름을 경성보총극장으로 바꾸었다. 주식회사 경성보총극장은 극장 운영을 위해 자본금 85만원의 주식회사를 성립하게 된다. 주식회사 경성보총극장의 진용은 사장 하타 도요키치(秦豊吉, 동보), 전무 하야시 히로타카(林弘高, 요시모토), 취체역 나와 미쓰마사(那波光正, 동보), 하야사 쇼노스케(林正之助, 요시모토), 감사역 온다 다케이치(恩田武一, 요시모토), 마나베 야치요(眞鍋八千代, 동보측)이었으며 실무는 지배인 우메미야 사부로(梅宮三郞)가 맡았다. 1940년대 경성보총극장은 성보극장이라는 약칭으로 불렸다. 이 영화관은 조선영화의 개봉관으로 이용되었는데 <집 없는 천사>(1941), <복지만리>(1941), <창공>(돌쇠의 개제)(1941), <그대와 나>(1941), <신개지>(1941) 등이 경성보총극장에서 개봉되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연예를 통한 선전활동이 강화되면서 1942년 9월 20일 경성보총극장 직속의 성보연예부가 신설된다. 연예보국의 영역을 확장키 위해 만들어진 성보연예부에서는 동보연예배급사 요시모토흥예배급부(吉本興藝配給部)의 지원과 만주연예협회와의 연락을 통해 내지 연극연예단을 조선에 소개하고 조선의 연극연예의 배급과 흥행을 맡았으며 그 산하에 성보이동연예봉사대를 조직하여 각종 위문연예를 제공했다. 경성보총극장은 1943년 7월 30일 조선흥행연합회에서 1급에서 11급까지 등급을 나누었을 때 서울의 영화관 중 명치좌와 약초극장과 더불어 1급관으로 80전의 입장료를 받을 수 있었던 대표적인 영화관이었다. 해방 직전 화재로 인해 문을 닫은 성보영화극장은 해방 이후 내부를 수리하며 재개관하게 되는데 이때 이름을 국도극장(國都劇場)으로 바꾸었다. 국도극장은 1999년까지 운영되었다가 폐관하였다. 현재 극장이 있던 자리에는 호텔이 들어서 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김태현,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김계자,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박이정, 2018. * [사진](상단). 황금유원 설립자 다무라 기지로(『京城府之卷』, 京城府) [자료] ≪경성일보≫,1919.02.21. 淚の家 全五卷 當館封切 黃金館 京城日報記者指導 黃金館主 荒木大助 脚色 釜山出征軍人 中淵仙太郞氏の家族 ▲夫の出征後妻は貧0の身に又一兒を産み産後の患ひより遂に歸らぬ旅0 の人となる、頑是なき七人の子は飢に泣き水よ飯よと取0る0他の見ろ 目 0實に哀れ悲慘の淚なり ●六人の子は飢に泣き妻は臨月の腹を抱つて病床に臥す出征軍人の大 悲慘なる家族、 噫々薄命なる勇士 ●0の難を見て惻隱の情を勤かすは仁の端と云ふ大方の士御觀覽の上一 掬御同情あらん事を43)(0은 판독불가-인용자) [자료] ≪경성일보≫, 1919.02.23. 初日 二日 滿員 黃金館 荒木大助 脚色 事實悲劇 淚の家 ▣ 當館特別撮影 大阪樂天地に京都京座に名古屋新守座に於て連日大盛況の本0は劇以上 に出色せしめたる實に現在釜山にある大悲慘事 此哀れなる寫眞を見られて誰れか泣かれぬ方ありや 本日 晝夜 開演 黃金館45)(0는 판독불가-인용자) [자료] "연기관의 대소요, 연극 즁에 큰 소동, 일반 연극의 주의" 《매일신보》, 1913.2.22. 십구일 오후 십시에, 남부 산림동(山林洞) 황금유원 안 연기관에셔, 한 소요 일이 잇셧 , 연기관에 , 혁신단 림셩구(林聖九) 일 이, 신파연극을 흥 즁, 그 시각에, 그곳에셔 고용 , 광도현인 포 신조(廣島縣人 蒲生信造) 삼십륙셰된 쟈가, 왼편 손에 연극에 쓰 , 폭발약을 만히 쥐고 셧다가, 그릇 불이 이러나, 굉쟝 형셰로, 젼부가, 폭발되얏슴으로 그 근쳐에 잇던, 흔 고용인, 즁셔, 쇼숑, 쇼뎐(中西, 小松, 小田) 등, 삼인도 즁샹을 입어, 젼귀 명을, 즉시 그 부근 지샹의원(池上醫院)으로, 메여다가 치료 즁인 , 그 즁 포 은, 왼편 손이, 젼부가 파괴되얏슴으로, 지샹씨의 집도로, 대슈슐을 시작 야, 팔을 버혓 , 지금 형샹으로 , 명에 , 관계가 없슬 듯 나, 눈망울과 기타 크게, 화샹 곳이 만아, 보기에 우 참혹 다더라. [자료] 《매일신보》, 1918.07.05. 日本天然色活動寫眞株式會社 技術部 新案 米國式 스데-지 기네오라마 應用 事實劇 船長의 妻 黃金館은 新築二週年 記念 特別 大大興行으로 右 天活會社 技術部員 拾數名을 招 야 七月五日부터 公開 다 歐洲戰亂以來 敵 潜航艇으로 因 야 商船의 遭難이 不... 바 昨年 我 日本最初의 武裝船 ○○會社 ○○丸도 其 慘禍에 罹 얏더라 今回 黃金館은 其 巨大 舞臺 一面에 前記 天活會社 獨得의 「스데-지 기네오라마」를 應用 고 電氣仕掛로써 當時의 實況을 看客 諸君에 示코져 今 基 光景을 略述 지면 英國 包台 不飽히 探照燈을 照 야 獨히 潜航艇 並 飛行機의 襲來를 監視 月은 皎皎 야 海 照 고 金波 銀波 靜動中에 我 ○○丸은 警戒 中 航行 天候 俄然히 變 야 數千의 星은 急히 其 光을 沒 야 一天은 忽然 暗黑 敵艇 及 飛行機 其 機를 乘 야 「 버」海峽에 馳來 야 我 ○○丸을 發見 고 .....水雷를 發射 고 又 爆彈을 投下 ○○丸 其 ....의 活躍인 實로 慘劇 其 物을 目擊 에 不異 고 誰何든지 科學의 進步 光學 應用의 巧妙 에 驚치 안이치 못 이라 「스데-지, 기네오라마」에 就 야 內地에 旣히 定評이 有 고 今 玆에 ....言을 不要 고 黃金館은 鮮人 各位의 觀覽에 供 기 爲 야 特히 此 一團을 招聘 얏더라 米國 단호자會社 作 連續 二十三編 四十六卷 連續 大活劇 百萬弗의 秘密 第一 第二篇 上場 臨時觀覽料 特等 七十錢 一等 五十錢 二等 三十錢 軍人學生各等半額 黃金館.
연흥사(演興社)와 장안사(長安社)는 러일전쟁 직후 만들어진 조선인 극장이다. * 연흥사는 1907년 11월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송지만(宋芝萬), 이준동(李俊東), 이종진(李鍾振) 등이 절골, 즉 사동(寺洞) 장윤직(張潤稙)의 집을 개조하여 연희루(演戱樓)를 건축하고자 경시청에 청원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연희장이 연흥사가 아닌가 한다. 이 정확한 위치는 탑골공원 왼편 훗날 조선극장 자리로,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130번지이다. 1912년 연흥사에서 연극공연을 본 바 있는 연극인 박진(朴珍)의 회고에 따르면, 동향(東向)에 비계목(飛階木)으로 만든 이층짜리 건물이었으며 일층 객석은 나무로 만든 장의자를 길쭉길쭉하게 놓았고 이층에는 삿자리를 깔았다고 한다. 당시 여느 조선인 극장과 마찬가지로 객석은 성별에 따라 나누어져 있어서 일층은 남자석, 이층은 여자석이었다. 1912년 여름에는 극장 천장에 선풍기를 달아 관객들로 하여금 한여름의 더위를 피할 수 있게 하여 관람의 편의를 높였다. 사진 2. 딱지본 소설 『산천초목』의 표지에 그려진 연흥사의 모습(이해조, 유일서관, 1912) 초기 극장이 대게 그러하듯 운영자는 자주 교체되었다. 1908년 연흥사는 박원근(朴元根)이 총무를, 송종오(宋鐘五)가 감독을 맡았다. 개장 초기에는 창극을 주로 공연했으나, 극장을 경영해본 경험이 일천했던 데다가 전황으로 경영난이 닥치자 극장을 방매한다. 이후 전당포 주인 석숭환(石崇煥) 등이 돈을 대어 유지해 나갈 수 있었는데, 1909년 당시 석숭환이 연흥사에 투자하여 손해 본 액수만 3만 냥에 이르렀다고 한다. 연흥사가 언제부터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단, 1908년 초부터 신문지상에 연흥사 광고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본격적인 흥행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대 들어 연흥사는 다른 어떤 극장보다 신파극을 자주 공연한다. 이로써 경영난을 극복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신파극은, 1910년대 초반 조선인 극장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는데, 특히 연흥사는 신파극 공연을 올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신파극 전용 극장이라 선전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박진 역시 연흥사에서 이뤄진 임성구(林聖九)의 혁신단(革新團) 공연을 기억하는 것으로 보아, 당대 사람들에게 연흥사는 신파극의 본산으로 인식되었던 모양이다. 혁신단의 연흥사 공연은 1912년 2월 18일 <육혈포강도>를 기점으로 본격화되었다. 같은 해 5월에는<수전노(守錢奴)>, <소위휘선사자친죄(少尉揮善捨子親罪)> 등의 작품을 올렸는데, 쌀값 폭등으로 불경기가 도래하자 임시로 공연을 중단, 다시 개연하여 <선탐후개(先貪後改)>, <서승어적(庶勝於嫡)> 등을 공연했다. 이후 <눈물>이나 <장한몽> 같은 대표적 신파극 레퍼토리 공연이 큰 인기를 끌면서, 임성구의 혁신단은 신파극의 대표 주자로 인정받게 된다. 예컨대 <눈물> 공연을 본 ‘사동생’이라는 이름이 독자는, “나는 눈물 연극 구경을 갓다가, 부인셕에셔 일졔히 우는 것을 보면은, 졀로 눈물이, 것잡지 못하게 쏘다져요” 1 라며 극장의 분위기를 전했다. <장한몽>을 본 '애극생'이라는 관객은, “연흥샤 쟝한몽 연극은, 참 재미잇습듸다. 사람은, 엇지도 그리도, 만히 드러 가는지 매일 여젼하던 걸이오. 잇흔날브터는 즁편이라지오, 샹편 보고, 즁편 안 볼 슈 잇나, 불가불 일즉 언이 가, 보아야 하겟스니, 할인권 백인 신문이나, 오날은 일즉이 돌이게 하십시오” 2 라며 연흥사의 신파공연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을 표현했다. 신파연극의 흥행 성공과 더불어 연흥사는 탕자음부가 모이는 곳이라는 오명도 쓰게 되었다. 이에 조산부(助産婦)양성소의 자선연주회 같은 공익적 역할의 공연을 개최하는 등 인식 개선에 나서기도 했다. 1914년 10월 8일, 연극장이 협소하여 공연하기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경무청에서 허가를 취소함으로써 연흥사는 돌연 문을 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이 바로 철거되지는 않았는데, 신파극을 대신하여 김창환, 이동백 등 명창들의 판소리 공연장으로 활용되다가 1915년 5월 무렵 철거된다. 철거된 자리는 빈터로 남아 있다가 7년 뒤인 1922년에 조선극장이 들어선다. * 장안사는 동구(洞口) 내(內) 장대장동(張大將洞) 장사골에 건립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박진은 장안사의 위치에 대해 “낙원동과 익선동 사이, 즉 단성사에서 동관대궐이라던 창덕궁을 향해 가는 큰 길과, 낙원동에서 경운동으로 가는 큰 길과의 사이”에 “동궐나뭇장(柴場)이라고 해서 넓은 공지가 있었는데 그 공지가 장안사가 있던 터”라고 회고했다. 장안사의 건설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단성사, 연흥사와 비슷하게 1907년 말에서 1908년 초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개장 초기에는 전통 연희를 비롯하여 중국의 경극을 상연하고, 활동사진도 상영했다. 개관 초기에는 관람자가 적어 여타 극장들처럼 경영난을 맞았지만, 연흥사나 단성사에서 연행하지 않는 “꼭두각시의 홍동지, 박첨지놀음과 광대 줄타기, 남사당패의 무동 서기, 서도잡가, 경기 입창 등”의 전통 연희를 주요 레퍼토리로 삼아 공연하면서 장안사만의 전문성을 살려 나갔다. 사진 3. 장안사에서 상연된 중국연희 공연(《황성신문》, 1909년 4월 21일자, 3면.) 장안사는 최홍석(崔弘錫)이 사장이던 1910년 4월 무렵 활동사진 영사기를 도입하여 프랑스 파테회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활동사진을 상영하기 시작했다. 3 이에 학부(學部)에서는 장안사에서 상영하는 활동사진을 중등 이상의 학교 교육에 활용하도록 지도하기도 했다. 4 같은 해 5월부터는 파테회사가 아닌 일본인 흥행업자 가즈토키(和常)와 필름 배급계약을 체결하고 일본에서 오는 필름을 상영했다. 5 1912년에는 잠시 서양인이 극장을 임대하여 지만관(志滿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사진을 상영했다. 요컨대 1910년대 초반 장안사는 활동사진관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1912년 말 대정관, 우미관, 황금관 등 본격적인 활동사진관이 설립되어 운영되기 시작한 이래로는 송만갑, 김창룡 등의 명창이나 채란, 해선 등의 기생들에 의한 노래 공연이나 소위 구(舊)연극을 상연하는 장소로 더 유명했다. 장안사는 1915년경에 문을 닫은 것으로 추정된다. 단성사가 화재로 소실된 뒤 단성사에서 연행하던 김재종(金在鍾) 일행이 장안사로 옮겨 연행을 계속한다는 기사가 있는 한편, 그들이 연흥사에서 연행한다 기사도 있다. 미루어 짐작컨대, 장안사의 극장 상태가 공연에 부적절했다기보다 시설이 괜찮은 연흥사를 택해 연행한 것이 아닌가 한다. 장안사는 아마도 이즈음 폐관된 것으로 보인다. 1) 「독쟈구락부」, 《매일신보》, 1913년 10월 29일자, 3면. 2) 「독쟈구락부」, 《매일신보》, 1913년 11월 4일자, 3면. 3) 「광고」, 《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1일자, 3면. 4) 「교육에 활동」, 《황성신문》, 1910년 4월 17일자, 2면. 5) 「활동사진 계약」, 《황성신문》, 1910년 5월 17일자, 3면. * 참고문헌 유민영, 『한국근대극장변천사』, 태학사, 1998, 116~151쪽.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50~52쪽. * 사진1(상단). 혁신단 단장 임성구(《매일신보》, 1914년 2월 11일자, 3면.) [자료] 《대한매일신보》, 1906.03.30. 奉常劃提調李苾和氏가 人民敎育하기를 爲하야 上䟽한 全文이 如左하니 續 此臣所謂敎育一事庶可以爲日後來復之基也雖然所謂敎育者亦有古今之異其泥於古而昧於今者子莫之執也 若專尙今而棄舊則忘其本者也盖有國有民必有宗敎故宗敎興則其國興宗敎衰則其國衰環天下亘萬古不易之典也 夫孔孟之道我 國之宗敎也惟我邦國之不振由於宗敎之不興如欲振興其邦國必先懋興其宗敎也 今以遭世界更新之運不得不學今之學者又事勢之不得已也孔孟之敎係是三綱五常之道也必使幼冲之子弟經之以三經五常之道使不失其本然之彜性然後學今之學則中散萬事末合一理可以並行之不悖矣臣願 陛下深留聖意於斯亟令學部益勵敎育之責任 規模則先興孔孟道學之宗敎次修開明之新學節次則特加尊崇文廟仰瞻羹墻而俎豆絃誦升降拜揖使靑年子弟咸知慕聖之本義而尊重其宗敎焉 以成均舘爲大學校而京師則一署各置一中學校而一面各置小學校一里各置一村塾 小學校卒業之人陞之中學校焉中學校卒業之人陞之大學校焉定其課程第其高下歲拔其優等者薦之於政府而充補其相當職不出十年之間而仕於 朝者皆大學校卒業之人至於農商工亦莫不然而隨其人才派送各國各修其藝焉 又錄其敎師之勤者而薦用之又採私立學校者優施補助者而褒賞之不數年之內不費國金而學校之設必遍滿於 國中 然則三千里內養成之聰明子弟亦不少矣夫何患乎人才之不能就乎雖然敎育一事爲近日之例套語而已則終未見其效而今日之勢惟在實踐二字而已 臣願 先下詔勅令學部改定敎育一致之法上自太學至于各郡鄕校置大中小學校實行其作成人才之方 今漢城及各道道臣上 奏學校私立之人以勳章褒章以勸以奬焉臣雖不學的知今日 國家之興惟在敎育之興惟在宗敎之興故 忘其僭陋而爲 陛下國家一言之伏乞 陛下勿以臣之卑微而少 垂察其言則 國家幸甚生民幸甚 完 [자료] 《황성신문》, 1906.04.19. ●李氏上疏 奉常副提調李苾和氏가 皇帝陛下께 上䟽한 全文이 如左하니 伏以臣向以興學校振敎育一事猥陳荒說優蒙 聖批至有令政府禀處之旨旣而大 詔煥發如綸如綍使於敎育人才事方專心講究俾有實効臣伏讀 詔書感極涕發窃有少湏臾無死之願而計以爲此時此 詔不啻若大旱之逢甘霈則其舉而行之宜必汲汲如不及以對揚休命矣伏竢累日以臣之躁妄實不能無滋惑焉盖今日百獘之本惟以虛文二字爲詐飾若幷此敎育一事而亦歸虛文則臣所謂國家來復之基永無其望矣然則臣安得不心枯膓焦疾聲㪅籲於 天陛之下哉我國素穪文明而至于近日禮義都毀而學問盡味則昔之爲文明者旣不可復見矣又於新學問者亦未有一人能窺其藩籬者然則可謂東敗西傷矣爲今之計莫如尊重太學申明先聖之道責任學部篤習當時之務使宗敎復明繼聖訓開來學以忠愛爲義務然後弱可爲强野可爲文國權可以光復文運可以賁篩臣旣以敎育不行爲憂而冒此煩陳則固不當㪅攙他說而區區忠激之意有不容不一陳者尙有數事焉其一即掌禮院旌褒例納錢事也夫忠孝烈旌閭乃是國家所以扶植綱常敦尙風化之大柄也有其實者亦當精擇審知然後可許其棹楔之典况乎無其實者乎今則不然不問事行之虛實惟視例納金八百之有無而許之碍之則是行迹爲虛而例納爲實也雖有忠孝烈實蹟必湮沒於千古而不得闡揚於世矣此豈 廟堂立法之本意哉伏乞 亟下嚴勅于掌禮之臣永革其旌閭例納錢凡干係 恩典者必令道臣博釆而審知之然後 奏聞請褒若有循私納賄誣虛而爲實者該呈狀人及道臣幷論罪以勵風化千萬幸甚其一即判任官及地方官俸金與兵丁巡檢掖庭所屬吏胥皂隷之月料事也夫仕者祿足以代其耕然後可以忘父母妻子之憂而能盡心職事不生他念矣今夫判任官及地方官之俸給僅足以資其一身而不能食其父母妻子則雖持心淸白者不爲事勢所牽者鮮矣書曰旣富方糓富而後能善古昔帝王之使臣工先富其身而使善其心此所以必先重祿使之忘其憂也伏乞陛下垂察焉內而府部院廳判任官巡檢兵丁掖庭所屬吏胥皂隷之屬外而觀察守宰鄕將吏輩使喚之屬當厚其俸給使之忘其家憂而盡其職事如是而有不用命者論罪而正法綱焉則千萬幸甚其一卽協律社貽獘事也臣聞孔子於顏子以爲邦之道必曰放鄭聲今夫協律社者臣雖不知其主倡之爲何人然臣聞其通宵設戱男女雜遝鬪爭易起亂淫相屬此豈非鄭聲乎大抵習舞演劇之戱於外國亦皆有之不過是俳優丐賤之軰區區營生者而如今協律社之穪以 宮內府所管發票營利者東西列邦所未聞見事也淫聲亂色眩惑耳目傷風敗俗年少之學問實業一不留心淫風從生實爲國家人民憂者此也伏乞 陛下亟令警廳不日嚴禁以絕亂階申飭掌樂之臣復講法樂千萬幸甚右臣所言諸條雖皆當今之可行而語其最急且大者則果能上下一心務進敎育之實而國家人民之知識一開則如貪賂之俗淆雜之風亂淫之戱雖不禁而人自耻焉而不爲矣伏望 陛下留 神裁察焉하소셔하얏더라
지금 와서 박철수 감독의 < 학생부군신위 >를 다시 꺼내 보는 것은 이상한 데자뷔를 느끼게 한다. 박철수 감독은 얼마 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떴다. <학생부군신위>는 죽음과, 죽음 이후의 장례를 다룬 영화다. 그는 자신의 예기치 않은 죽음을 미리 알고 있었을까. 그는 하늘 저 멀리서 자신의 장례가 제대로 치러지는가를 보고 있었을까. 영화에서처럼. 영화가 그랬듯이. < 학생부군신위 >는 박철수 영화인생에서 가장 불꽃 같던 나날 가운데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1996년을 전후해 박철수는 < 삼공일 삼공이 >와 < 산부인과 > < 가족 시네마 > 등 주옥같은 작품을 찍었다. 종횡무진이었다. 박철수 는 늘 삶과 죽음의 원초성에 관심이 많았다. 산다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목을 하나하나 밟아 가는 것일 뿐이며 거기엔 일정한 추상과 패션이 없다, 그 모든 게 허상일 뿐이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가능하면 날 것 그대로의 문법과 어구를 영화 속에 나열하려 애썼다.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감성을 전달하는 것이 영화의 몫이라고 봤다. 늘 그는 영화를 통해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산다는 것이 뭐 별것이겠어? 먹고 싸고 (섹스)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냐. < 학생부군신위 >는 시골에 있는 한 남자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으로 타지에 나가 있던 아들 딸들이 돌아 온다. 자신을 모시고 살던 둘째 아들을 중심으로 장례 절차가 준비된다. 동네에서 전통의식 꽤나 아는 사람들이 모이고 집 주변은 이내 시끌벅적해진다. 이상하게도 영화는 조용하거나 차분하지가 않다. 박철수 는 의도적으로 영화 전반에 산만하고 두서없이 이야기를 주단처럼 깔아 놓는다. 한편으로는 비교적 어려운 장례 의식과 절차가 설명되는가 하면(임종이니 수시, 고복, 발상, 전, 부고 같은 단어들) 한편으로는 온갖 사람들이 고인 앞에 달려들어 와 자신이 그의 인생에 있어 최고의 적자(嫡子)임을 주장하며 좌충우돌 해프닝을 벌인다. 박철수에게 있어 장례란, 그리고 죽음이란 세익스피어식 한여름밤의 소동극이다. 소동은 슬픈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기쁘고 즐거운 것만도 아니다. 그저 요란스러울 뿐이다. 그 요란(搖亂) 속에 인생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져 있다, 고 그는 봤다. 희와 노, 애와 락은 따로따로 존재하거나 순차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몸으로 존재하며 마치 변증법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것이다. 때문에 죽음은 슬퍼할 것만이 아니다. 거기엔 축제의 요소가 있다. 반대로 삶도 그렇다. 기쁘고 찬란한 것만이 아니다. 거기엔 늘 고통이 수반된다. < 학생부군신위 >가 기발한 것은 순간순간의 유머와 재치가 남다르다는 것이다. 아들 간에 종교 싸움이 벌어지는가 하면,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전통 의식을 알지 못하는 동생, 곧 자식들 삼촌이 설레발을 치고, 동네 청년들은 장례식도 때아닌 잔치랍시고 오랜만에 돼지를 잡아 그 자리에서 간을 썰어 먹으면서 서로 좋다고 낄낄댄다. 영화는 생과 사의 갈림길, 그 경계가 그리 크지 않음을 심각한 척하지 않고 재미있게 보여 주려 애쓴다. 이런 장면도 있다. 어울리지 않게 시골 장터의 다방 레지가 장례식에 와서 엎어진다. 그녀는 자신이 죽은 노친네의 살아생전 소원만 들어줬어도 그가 이렇게 허망하게 가지 않았을 거라며 꺼이꺼이 댄다. 그 소원이란 것, 안 들어도 뭔지 다 아는 얘기다. 또 한 사람, 별로 이 집안과 관계가 없을 법한 남자도 영정 앞에서 자빠지는 수준이다. 그 사람 역시 노친네가 죽은 것이 자기 책임이라는 것이다. 자전거 바퀴의 바람만 넣어 줬어도 노친네가 논두렁에 처박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는 절규한다. 근데 웬 절규? 그 모든 게 다 쇼처럼 느껴진다. 코믹하다. 이들의 장면을 보고 있으면 역설적으로 삶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박철수 식의 통찰이 느껴진다. 영화 < 학생부군신위 >는 문어체와 구어체를 오간다. 픽션과 리얼을 오간다. 때로는 영화 속 영화를 보는 느낌을 준다. 실제로 큰아들로 출연하고 있는 박철수 는 영화 속에서 장례식 장면을 영화로 찍는 모습을 보여 준다. 영화 속에서 큰아들은 영화감독이기 때문이다. 장례식을 영화로 찍는 큰아들의 모습은 박철수 본인이 영화와 현실을 끊임없이 오가며 삶과 죽음에 대해 계속되는 착시와 직시 속에 살았음을 보여 준다. 어쩌면 예술은 그런 것이다. 실재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영화감독은 매작품마다 걸작을 만들어 낼 수가 없다. 특정 시기에 예술혼이 반짝하는 것일 뿐이다 < 학생부군신위 >는 박철수 의 영화 미학이 절정으로 치달았던 시기에 만들어졌다. 영화가 꽤나 번득인다. 이 영화 한 편만으로도 박철수는 우리에게 영원히 기억돼야 할 감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