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한 상하 관계
- 감독
- 사다오카 사다오
- 제작년도
- 2023
- 출연
- 마츠시타 사에코
개항장에 극장이 들어서기 시작한 이후, 이에 영향 받은 조선인들도 극장을 세워 운영하기 시작했다. 특히 대한제국의 수도 한성은 황제가 사는 공간이라는 상징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다 보니 한성의 극장 역시 황실 의례와 관련해 시작되었다. 조선인이 한성에 설립한 최초의 상설극장은 대한제국 황실에서 1902년 세운 희대(戲臺)이다. 희대는 고종황제의 망육순(望六旬) [필자 주: 육순을 바라본다는 의미로 51세를 가리킴.] 과 어극(御極) 40년을 기념하는 칭경예식(稱慶禮式)을 위해 봉상시(奉常寺) 내에 500석 정도의 규모로 설치되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을 반영하는 원형의 2층 건물로 계단 형태의 객석과 직사각형 모양의 무대를 갖추고 있었다. 황실희대는 통칭 ‘협률사(協律社)’ 혹은 ‘원각사(圓覺社)’라고 불렸다. 이는 희대를 빌려 연희를 공연하던 회사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칭경예식의 날이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은 1902년 9월 토사병이 유행한다. 칭경예식은 다음 해 4월로 연기되었으나, 다음해 4월에도 영친왕의 천연두 발병 등을 이유로 또 다시 연기된다. 이후 칭경예식은 유야무야 되거나 약식으로 치러진 것으로 보인다. 칭경예식을 위해 많은 예인들이 한성에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칭경예식에 소용하는 예인들을 관리하던 삼패도감(三牌都監)의 장봉환(張鳳煥)과 모종의 세력이 합세하여 연희 회사를 세우고 이름을 협률사라 불렀다. 협률사는 칭경예식에 참여하기 위해 한성에 올라온 남녀 예인들의 공연을 희대에 올렸으며 잠시 활동사진관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활발히 전개되던 협률사의 희대 공연은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던 1904년 3월경 폐지되었다. 이처럼 협률사는 황실 극장인 희대가 만들어지고, 칭경예식을 위해 전국에서 올라온 예인들을 이용하여 돈을 벌어보고자 했던 일군의 사람들이 예인을 관리하던 삼패도감의 장봉환과 함께 수익 사업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다. 협률사의 등장과 더불어 비슷한 전문 연예단체들이 생겨나면서, 이들 단체에서 극장을 대여하여 흥행을 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동대문활동사진소를 빌려 사용한 광무대의 박승필을 비롯하여, 박춘재, 김재종 등 유명 연예패들과 임성구, 이기세, 윤백남 등 신파극단을 이끌던 인물들이 극단과 더불어 연흥사, 원각사, 개성좌(開城座) 등의 극장을 함께 운영했다. 러일전쟁 이후, 극장을 이용하여 수익도 얻고 선전장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협률사가 복설(復設)된다. 다방면의 노력 끝에 러일전쟁 직후인 1906년 2월 하순에 복설된 협률사는 김용제(金鎔濟), 최상돈(崔相敦), 고희준(高羲駿)이 조직한 순 사영(私營)의 연예회사였다. 당시 협률사의 운영비는 친일조직인 ‘일진회’(一進會)가 댔으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하려는 세력이 후원했다. 협률사의 복설은, 러일전쟁 이후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한 일본이 조선인의 관심을 흥행물에 돌리기 위해 강구한 조치였다. 따라서 협률사를 혁파해야 한다는 의견이 속출했다. 봉상사(奉常司) 부제조 이필화(李苾和)의 상소로 결국 고종은 1906년 4월 협률사를 혁파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나 일본인 임차인이 오히려 위약금 25만원을 청구하면서 협률사 혁파는 흐지부지된다. 1907년 2월, 관인구락부(官人俱樂部)에서 협률사가 운영하던 희대를 사용하여 각종 연희를 올리고 활동사진을 상영한다. 이어 1908년 7월 26일, 이완용(李完用)의 비서로 일제의 조선침략에 동참하고 있던 이인직(李人稙)과 박정동(朴晶東) 등이 경시청으로부터 희대를 연극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받고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연희를 시작했다. 원각사에는 김창환(金昌煥)을 위시한 창부(唱夫) 40명과 가기(歌妓) 24명, 총 64명의 예인(藝人)들이 있었다. 1911년 10월, 한시적으로 《조선신문》 언문판이 발간된 적이 있었다. 그 기념호에 실린 「연극의 월조(月朝)」라는 글에는 경성고등연예관에서 상영한 <엄비국장(嚴妃國葬)> [필자 주: ‘엄비(嚴妃)’로 알려진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의 장례를 찍은 실사를 일컬음.] 과 원각사에서 개연한 ‘금강산 환등 대회’가 소개되어 있다. △ 일젼에 엄비국장이라ᄂᆞᆫ 활동광고를 돌이기에 본긔자가 일ᄎᆞ 구경 즉 쳐량 감상도 나고 조션 고속된 졀ᄎᆞ도 젼 야 구경치 못 ᄉᆞᄅᆞᆷ의 안목에 가히 흥감ᄒᆞᆯ 만 즉 연극 즁 활동ᄉᆞ진은 더욱 진젹 거동을 구경ᄒᆞᆯ 만 다고 탄식 얏더니 ... △ 원각 에셔 금강산환등을 갈 가 단 다 기에 슈삼 지긔를 잇글고 완상 즉 금강산 일만이쳔봉이 완연이 안즁에 나렬 지라 ( 중략 ) 일 사십여쳐를 완상 니 △ 본 긔 가 의 금강을 구경 지 우금 삼십이년이라 영숙 산쳔과 긔이 고적이 반가온 마음이 졀로 나고 조션에도 여차 셰게에 랑 만 명산 쳔이 잇슴을 감탄 엿슴으로 연극장 쥬무 를 방문 야 그 환등의 력사를 무르니 리희직 ( 李熙直 ) 김진우 ( 金振宇 ) 량씨 본래 지사인 사진사 신장균 ( 申章均 ) 씨와 동행 야 금년 오월에 금강산 탐험 로 쳔신만고를 불구 고 외산 명승고젹을 촬영 야 환등에 삽입 야 구경치 못 동포의 안공에 구경케 니 삼군의 지긔도 흠탄 거니와 구경 시 동포도 응당 감상이 게시 고 신션 졍신도 환셩 지로다 1 위 기사에서 기자는 <엄비국장>에 대해 ‘진적한 거동을 구경할 만하다’고 언급하는 데 그친 반면, 140여장의 금강산 사진에 대해서는 극장 주무자(主務者)를 만나 환등을 제작, 상연한 내역까지 물어 듣고 감탄 어린 소감을 늘어놓는다. 이는 <엄비국장> 상영보다도 ‘금강산 환등 대회’가 조선의 관객들에게 더 많은 흥미를 불러일으켰음을 의미한다. 실제로도 ‘금강산 환등’은 조선인 관객들의 환영을 받아 원각사에서 장안사로 옮겨 흥행을 이어 갔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관객들은 왜 활동사진보다 환등에 더 흥미를 느꼈을까? 당시 활동사진 설명은 전설(前說)뿐이었다. 다시 말해, 간단한 설명 후에 10분 내외의 활동사진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필름은 대부분 쇼트 몇 개를 일정한 속도로 배열한 것이었고, 그 속도에 맞춰 변사가 설명하는 중설(中說)은 당시로써 구사하기 힘들었다. 반면 환등은 하나의 사진을 변사(설명자)가 자세히 풀어줄 수 있었다. 요컨대 관객들은 활동사진보다 환등의 사진을 보면서 더 자세한 정보를 취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활동사진을 상영할 때나 환등을 비출 때나 다 변사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는 1910년 경성고등연예관이 탄생하고 나서야 조선에 변사가 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경성고등연예관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변사의 연행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황실희대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하는데, 내부대신 송병준(宋秉畯)이 변사들에게 활동사진 연설의 방침을 전했다는 기사가 있는 것이다. 사진 2. 변사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애국부인회 활동사진 기사(《황성신문》 1908년 6월 24일자.) 위 사진의 기사는 경성고등연예관에서부터 변사 연행이 본격화되었다는 일반적 견해에 의문을 제기한다. 조희문 역시 경성고등연예관 설립 이전에도 직업적 변사는 아닐지언정 일시적으로 활동사진 설명에 나선 인물이 있었으며, 단성사, 연흥사, 장안사 등 조선인이 세운 극장이 탄생하던 1907~8년 무렵에는 이미 조선인 변사도 나름의 위치를 차지했음을 여러 명의 변사가 실증한다고 주장한다. 2 나아가 위 기사는 변사의 시조로 불리는 우정식(禹正植)이 원각사에서부터 변사 활동을 시작했다는 심훈(沈熏)의 증언도 뒷받침 해준다. 기사에 언급된 관인구락부는, 상술한바 원각사의 전신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의 변사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극장에서 활동사진이 상영된 것을 계기로 등장했으며, 관인구락부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게다가 서양 혹은 일본의 선진 문물을 조선의 관객들에게 소개해 주는 강사 역할을 했기 때문에, 신문물을 경험해 본 관리 중에 선택된 인물들이 주로 변사로 활동했다는 사실 역시 알 수 있다. 기사에 언급된 인물 중 정운복(鄭雲復)은 오사카상업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영국유학과 구미 각국 시찰을 경험했던 인물로, 일제의 조선침략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언론 계통의 인물이었다. 김상연(金祥演)도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에서 활동한 바 있는 언론 계통의 친일 관료였다. 한석진(韓錫振) 역시 《황성신문》과 그 후신인 《한성신문》에 관여했다. 이처럼 최초의 변사들이라 할 만한 인물들은 서구문물을 경험한 이들로서, 신문물을 조선에 소개하고 근대화를 주장하는 웅변가의 역할을 수행했다 할 수 있다. 1910년을 전후하여 유광관(有光館)이라는 활동사진과 연극장으로 사용되던 원각사는 아쉽게도 얼마가지 못해 영업을 중지했으며 191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1) 「연극의 월조」 《조선신문》 1911년 10월 1일자. 2) 조희문, 『한국영화의 쟁점 1』, 집문당, 2002, 130쪽 참고. * 본문은 필자의 『조선영화의 탄생』((주)박이정, 2018) 40~42, 209~211쪽의 내용을 발췌,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 사진 1(글 상단). 황실희대(원각사)의 외관 [자료] "논설: 술객문", 《황성신문》 1903.01.17. ◎歲月 이 荏苒 야 於焉之間 에 陰曆年終 이 又迫 니 歲暮天寒 에 北風其凉 고 梅花淡屋 에 雪月 이 滿庭 이라 有鄕居一客 이 孤枕冷燈 에 耿耿無寐 야 起拂布袍 고 徘徊月庭 이라가 負手緩步 야 行訪一名士之家 러니 適値諸名士 ㅣ 與京鄕友朋 으로 爛漫會飮 이라 客 이 亦參座末 이러니 數盃酒闌 에 滿座酒人 이 詼諧談笑 로 各自論懷 더니 一人曰 吾輩 從今以後 로 無用於世 로다 何事 를 爲業 지 欲看書而懶厭 고 欲聚財而無資 니 除非親舊之尋訪 이면 終日老屋 에 無聊消遣 니 沁沁難耐 일셰 子 有何消日 고 一人曰 吾亦 云云 일셰 近日 某友家 에셔 西廂記 를 借來 얏더니 此亦語錄 을 難解 야 滋味 가 殊沒 일네 一人曰 我 某友某友 로 一分 기쑤시기로 漿羹飯 을 每夜 喫之 지 然 이나 細雨 도 濕衣 라고 그럭저럭 十餘元 을 見失 네 一人曰 吾儕 가 今夕 에 花鬪 나 이볼가 一人曰 且置 고 協律社 귀경이나 가셰 壯觀 일네 眞壯觀 일네 春香 이와 御史出道壯觀 일네 一人 이 顧謂鄕客曰 彼公 은 무엇 려 京來 나 朝飯夕粥 喂牛突 에 進士主 가 上福 이지 一齋郞 一主事 나 宕巾味 를 甞 랴고 旅舘客苦 何如 고 無錢 면 쓸 업 鄕客曰 아모리 無錢 야도 令監 이나 進賜 셔 數生日 만 苦待 오 說麼執事 네가 數生 야 大臣協辦 地境 에 此漢區處 아니 가 一人曰 數 무슨 數 인가 世上貌樣觀之 니 어늬 時節數生 길지 鄕客曰 齋郞借啣 은 何事故 로 아니터지 고 沓沓 여 發狂 이오 一人曰 必也 터지지 면셔 終宵諧謔 다가 聞鷄罷歸 야 爲余道其問答之說 일 余 ㅣ 曰 悲夫 라 彼好地閥 好家數之諸人 이 若在舊日則 淸班華秩 과 監留宰相 이 卽其倘來之職而不幸當此時節 × 야 官雖淸要 나 無一權利 고 如彼冷寞 이 極甚可咄 니 雖一藝一業 과 一文一字 라도 務欲勤苦做工 야 進就學識 然後 可不受他日之欺侮 어 不此之爲 고 閒游懶怠 야 只以骨牌 花套 西廂記 演戲場之類 로 以爲沁沁破寂之資 니 非但此等名士也 라 我韓全國 에 從前 兩班儒士爲名之人 은 擧皆如彼 고 鄕客 은 尙此以依賴求乞於宰相之門 으로 錮筋着髓 야 牢不可破 니 如此細瑣 가 雖若無關係於國勢 나 國勢之萎靡衰頹 에 日漸濱危 며 日漸墜險 은 實因此而然也 니 豈可謂之以細故而不深憂也哉 아 嗟乎咄哉 로다 [자료] "논설: 원각사 관광의 향객정담", 《황성신문》, 1908.10.13. ◎有兩個鄕客 이 來遊京師 라가 一夕 은 月色 이 如晝 야 九街 가 如洗 라 携手同伴 야 料理店 의 盃酒 를 沽飮 고 因 야 圓覺社 의 演劇 을 觀光 고 拾二點鍾 에 歸來旅舘 야 該社情况 을 互相評論 이 如左 더라 甲曰余 가 在鄕 야 新聞 을 閱覽 니 大韓新聞社長李人稙氏 가 我國 의 演劇 이 淫靡不雅 것을 改良 기 爲 야 圓覺社 를 設立 고 人情風化 에 有助 歌舞 로 倡夫 와 妓女 를 敎導 다 얏스니 氏 社會上開明紳士 로 拾餘年海外文明國 에 滯在 야 文明空氣 를 吸収 며 文明學術 을 鍊習 얏고 其歸國也 에 新聞 의 機關 을 掌握 며 小說 의 著術 을 發行 얏스니 國民 을 開導 고 風俗 을 改良 事業 에 對 야 宜乎好個方針 을 研究發明 지라 於是乎演劇 을 改良 主義 로 圓覺社 를 設立 이니 吾儕 가 思惟 기를 該社演劇 에 乙支文德姜邯贊 의 英雄事業 이나 論介桂日香 의 貞烈芳跡等 으로 新演劇 을 發明 야 國民 의 思想 을 鼓發 이 有 리라 얏더니 今 에 該社情况 을 目覩 則猶是舊日風流 에 沈靑歌 、 春香歌等而已 니 何者 로 演劇改良 이라 謂 지 此 로 開明紳士 의 事業 이라 謂 난지 知得 키 難 事 로다 乙曰李人稙氏 의 事業 은 姑舍 고 該社 에 對 야 同情贊成 者 가 誰也 오 면 皆我國上流社會 에 高等官人 이오 昨日今日 에 聯翩觀覽者 誰也 오 면 現政界 에 某某大官 이라 其政治改良 도 圓覺社 의 演劇改良 과 如 지 不知 거니와 目今我韓 에 國步 의 艱棘 과 民生 의 塗炭 이 何如 境遇 에 在 가 若個有志者流 가 國家思想 과 國民義務 로 敎育 을 倡導 다 實業 을 奬勵 다 야 家產 을 傾 고 心力 을 竭 야도 目下經濟 의 困難 으로 一個事業 도 略無起色 니 其舌 이 獘 고 其淚 가 枯 야 晝夜憂嘆 情况 을 凡有人心者 ㅣ 孰小矜惻 이며 加之地方騷擾 가 經年不息 야 一般同胞 의 死亡 이 不絕 고 流離 가 相續 情况 은 骨爲之冷 이오 鼻爲之酸 이거 當局諸公 은 此 를 不聞不知 지 惟是演劇塲 을 愛好 고 顧存 야 無日不額額 니 諸公 의 意向 은 維新 의 功業 을 已建 고 太平 의 福樂 이 無窮 줄노 認 홈인지 果然諸公 으로 여곰 內閣 을 愛 홈이 圓覺社 를 愛 홈과 如 면 演劇改良 보다 政治改良 의 實效 가 有 지어 胡爲乎內閣 을 愛 홈이 圓覺社 愛 만 不如 지 此 도 知得 키 難 事 라 고 長吁浩歎 타가 一大白 을 滿引 고 頹然而臥 야 東方 의 旣白 을 不知 얏다 云 有人 이 其談話顚末 을 報道 其言 이 雖涉於愚戇 이나 其意 가 實出於憂憤故 로 爲之記載如右 하노라
<춘몽>(유현목, 1965)은 한국영화사 최초로 감독이 ‘음화제작혐의’로 기소되며 ‘음화(淫畫)’ 논란을 촉발시킨 영화다. <춘몽> 사건은 외설 음란에 대한 판례를 남겼고, 식민지시기 이후 검열에서 줄곧 ‘공안’에 가려져 있던 ‘풍속’ 문제가 대두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0년대 후반은 서구에서 시작된 섹스 혁명과 성 담론이 한국에도 유입된 시기였다. 불황에 직면해 있던 한국영화계에서는 이러한 물결과 조응하며 ‘섹스영화’ 2) 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러한 경향은 세계적 조류와는 반대로 나날이 강고해지던 한국의 검열과 부딪히며 음란 외설 논란이 일어난다. 이때 <춘몽>의 판례는 음란 외설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고, <내시>(신상옥, 1969), <벽 속의 여자>(박종호, 1969)와 같은 영화에도 적용되었다. 이후 그러한 기준은 박정희 정권기 내내 한국영화를 통어하며 수많은 ‘불허’와 ‘가위질’의 근거가 된다. ‘음화 반포’가 아닌 ‘음화 제조’ 1966년 1월4일에 유현목 감독은 ‘음화 제조’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다. 그 이유는 “1965년 5월 <춘몽>을 제작할 때 신인배우 박수정(25) 양을 ‘세트’ 안에서 완전 나체로 뒷모습을 촬영” 3) 했기 때문이었다. 두 달 후 유현목 감독은 유죄를 선고받게 되는데, 당시 신문에 공개된 판결 요지는 다음과 같다. ◇ 판결요지 음화제조 서양문화침투로 性의 개방풍조가 과거보다 높아 전통적 성 풍속 감정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나 유방 또는 신체 전부 내지 일부를 함부로 노출시키는 풍속 감정은 우리 사회의 전통에는 아직 찾아볼 수 없고 이러한 노출이 일반화되지도 않아 정상적인 대중에게 혐오 수치의 감정을 주고 선량한 사회의 성적 도의 관념을 파괴하는 한계를 넘어섰으므로 성적 도의와 사회 일반의 이익을 위해 이 점 한계를 그어야 한다. 따라서 지난 65년 5월 일본영화 <白日夢>을 번역한 <春夢> 제작 시 피고인이 여배우 박수정(25) 양으로 하여금 완전 나체를 명령하고 변태 성욕자에게 쫓겨 나체로 6초 동안 20피트나 쫓겨가는 장면을 필름에 담은 것은 음화를 제조한 것으로 인정한다. 4) 명분은 신체 노출의 풍속이나 전통이 아직 우리 사회에 없으므로 ‘정상적인 대중’에게 혐오 수치의 감정을 주기 때문에 음화 제조라는 것이었는데, 그 근거는 최종적으로 표출된 화면이 아니라 제작 과정으로부터 제시되고 있다. 즉 감독이 여배우에게 나체가 될 것을 명령하고 그것을 6초 동안 찍었다는 사실[음화 제조] 자체가 그 장면이 공개[음화 반포]되지 않았더라도 문제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논리상으로는 억지나 궤변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논리 아닌 논리로 <춘몽>은 기소되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 사건의 경위와 그것이 일어난 맥락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용공(容共)에서 음화(淫畫)로 외설이나 음란을 규제하는 ‘풍속’ 차원의 검열은 식민지시기부터 있어온 것이었다. 그런데 식민지시기 규정에서도 ‘공안풍속(公安風俗)’으로 묶어서 명시하고 있듯이, 5) 풍속 검열의 범주는 외설이나 음란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한국영화사 최초의 음화제조 유죄 판결’에 해당하는 <춘몽> 사건에서 영화 <춘몽>이 음화냐 아니냐의 여부가 사건 촉발의 핵심이 아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65년, <7인의 여포로>를 연출한 이만희 감독이 용공 혐의로 기소되자 유 감독은 이만희 감독을 옹호했고, 그러한 태도와 발언 때문에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면서 <춘몽>까지 음화로 기소되었던 것이다. 1965년 7월13일 상오 검찰은 유현목 감독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 구속 여부를 검토 중이라고 발표한다. 그 이유는 유 감독이 1965년 3월23일 한국본부 주체로 서울에서 열린 제21회 세계문화자유회의 문화 세미나에서 발표한 「은막의 자유」라는 글이 반공법에 저촉된다는 것이었다. 6) 「은막의 자유」는 앞서 반공법으로 기소된 <7인의 여포로>를 언급하며 영화 표현의 자유를 주장한 것이었다. 사실 유현목 감독은 월남한 개신교도로서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에 이 발표문도 반공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7) 그러나 이때의 검열은 그러한 진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따져 보면 <7인의 여포로>를 용공 영화로 몬 것부터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당시 정권은 1963년 합법적 집권에 성공한 이후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한 반대 여론이 비등하는 가운데 영화판 길들이기에 나섰고, 평소 비판적인 발언에 거침이 없었던 이만희 감독이 마침 본보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유현목 감독이 <7인의 여포로> 사건에 반기를 들고 8) 국제적인 포럼에서까지 이 사건을 언급하자 정권은 그의 글 중 일부를 트집 잡으며 또 하나의 본보기를 삼았던 셈이다. 당시 기사에 의하면 문제가 된 구절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한국의 작가는 국가적 현실 때문에 주체로서의 권리가 타의에 의해 침해당하고 있다. 아무리 한국적인 현실이 미묘하다 해도 몇 가지의 조문이나 법관복(法官服) 몇 벌의 위력만으로는 작가의 내면생활을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 다정다감한 작가에게 오늘의 정부는 국시에 위배된다는 명목으로 걸핏하면 무서운 눈초리를 보이거나 고랑쇠를 채우곤 한다. 9) 여기에서 결정적으로 빌미가 된 것은 “국시에 위배된다는 명목으로” 작가들을 부당하게 처벌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국시는 곧 반공(反共)이었고 ‘(영화예술에서) 반공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당시 정권의 관점에 의하면 국시[반공]에 반(反)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결과적으로 용공(容共)이었다. 이에 1964년 말에서 1965년까지 한국영화계는 용공 논란에 휘말리게 된다. 그것은 ‘반공이 국시’라는 말이 얼마나 단순하고 포괄적이며 무자비한 권력이 될 수 있는가를 한국영화계가 인지하는 과정이었고, 모든 것에 최우선하는 검열의 원칙을 영화인들에게 깊이 각인시키는 계기가 된다. 10) 그러나 이러한 궤변이 법정에서 관철되기 어려워지자 그 불똥은 엉뚱하게도 형식실험에 치중한 영화인 <춘몽>으로 튀어 유현목 감독은 ‘음화제조혐의’로 기소되기에 이른 것이다. 요컨대 <춘몽> 사건은 검열 당국의 자의적 판단에 의한 용공 시비가 음란과 외설로 옮겨가며 식민지시기 이후 지속되었던 검열 기준에서 성적 표현의 문제가 대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림 1] 한국영화사에서 예술vs외설 논란을 일으킨 <춘몽>의 포스터. “희열과 번뇌의 신음에 젖은 쇽킹한 장면의 연속! 가면을 벗겨본 인간애욕!”, “완전이색의 예술명작”이라는 선전 문구가 눈에 띈다. 포스터 자체가 ‘외설’과 ‘예술’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듯하여 흥미롭다. [그림 2] 연극 무대를 연상시키는 <춘몽>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일본 영화 <백일몽>(테츠지 다케치, 1964)을 리메이크했다는 것 때문에 처음에는 표절 문제가 불거졌으나, 나중에 음란 문제로 비화되었다 . <춘몽>이 음화(淫畫)가 되기까지 <춘몽>의 검열 서류를 통해 이 영화가 우여곡절을 거쳐 개봉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한국영화사에서 최초의 음화 사건이 발생하는 상황이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춘몽>의 제작사인 세기상사는 1965년 1월29일에 제작신고서를 공보부에 접수하는데, 4월22일에 제작신고가 반려된다. 그 이유는 <춘몽>이 일본영화 <백일몽>의 표절이고, 그 내용이 비속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대 참고에서는 ‘비속하다’는 것을 “그 표현방법이 선정적”이라고 바꾸어 말하고 있다. [그림 3] 「극영화 <춘몽> 제작신고 반려」, 공보국 영화과, 1965.4.22. 그러자 제작사는 2월25일에, 저작자의 승인을 받은 ‘공연권 취득증명서’를 첨부하여 제작신고서를 다시 제출한다. 이때 제작사는 공보부장관 앞으로 「극영화 <춘몽> 제작에 대한 건의서」도 제출한다. 그것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부분은 작품의 제작의도를 설명하는 것이고, 뒷부분은 14개 항목에 걸친 자진 개작 부분을 상세히 밝히는 것이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앞부분은 <춘몽>이 이미지를 위주로 한 전위적인 영화이자 예술지상을 모토로 하는 유현목 감독의 실험작이라는 것이었고, 뒷부분은 건의서에서 개작하겠다고 한 14개 장면은 물론이고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상영허가 심사 기준에 저촉될 우려가 있을 경우에는 계속적으로 주의하여 촬영하겠으니 부디 제작을 허가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림 4] 세기상사 대표 우기동, 「극영화 <춘몽> 제작에 대한 건의서」, 1965.4.24. 이 제작신고는 3개의 선정적인 장면을 삭제하거나 개작하라는 시정사항과 함께 5월13일에 수리 통보된다. [그림 5] 「극영화 <춘몽> 제작신고 수리통보」, 공보국 영화과, 1965.5.13. 그리고 5월24일 상영허가신청이 접수되어 5월26일에 필름 검열이 실시된다. 그런데 중앙정보부에서 재심을 요청하면서, <춘몽>은 상영이 허가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그 경위를 기록한 공보부 서류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림 6] 「邦畫 <春夢> 上映許可經緯」, 공보부 영화과, 1965.6.28. (원본) 1965년 5월26일 중앙정보부의 요청에 의해 재심이 실시되고 5월31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보류가 요청되어 영화분과위원회에서 심의가 다시 이루어지는데, 6월5일 다시 중앙정보부가 외설 부분에 대해 관계기관과 협의하라고 공보부에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6월5일 중앙정보부 보안과에서 중앙정보부장 명의로 공보부장관 앞으로 보낸 「영화재심의견통보」에 의하면 “당부에서 영화 <춘몽>에 대한 재심 결과 그 내용이 자학적 변태성의 생태를 묘사한 것으로서 국민 대중으로 하여금 건전한 성도덕을 해할 우려가 지대한 것이며 형법 제243 및 244조에 저촉되는 것으로 사료되어 검찰기관과 협조하여 조치 함이 가할 것으로 사료됩니다.”라고 적혀있다. [그림 7] 「영화재심의견통보」, 중앙정보부 보안과, 1965.6.5. 이후부터 6월21일까지의 과정은 서류로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공보부, 검찰, 그리고 제작사 사이에 일종의 조율과 타협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6월21일에 공보부 영화과는 중앙정보부장 앞으로 “세기상사 주식회사 제작품 <춘몽>에 대한 재심 의견에 관하여 본 작품이 외설이라 관과되는 부분은 영화법 시행규칙 제5조 규정에 의거 대폭 삭제하고 상영허가 조치할 것을 통보합니다.”라는 전언을 보낸다. [그림 8] 「국산극영화 <춘몽> 재심 의견 처리」, 공보부 영화과, 1965.6.21. 그 결과 6월30일자로 상영허가가 통보된다. [그림 9] 「국산영화 <춘몽> 상영허가」, 공보부 영화과, 1965.6.28. 이 서류에서 흥미로운 것은 공보부에서 서류 및 필름을 실사하고 요약한 <춘몽>의 내용이다. 여기에서는 <춘몽>을 ‘이색적 전위영화’로 기록하고 있다. 서류에 적힌 바를 옮겨보자면 <춘몽>은 “善男善女가 齒科에서 治療中 서로 알게 되자 各各 冥○○과 痲醉로서 意識을 잃게 되며 이에 따라 이들의 思惟作用으로서 時空을 超越한 人間性情이 極限相으로서의 幸과 不幸을 醫師를 介入시킨 三角關係로서 ○○하다가 結局 性으로서의 慾情的行爲에 破綻을 結末하고 無限한 悔恨에 울부짖을 무렵 意識을 恢復하여 意情을 풀어가는 異色的 前衛映畫”라는 것이다. 나름대로 줄거리 요약이기는 한데 문장이 어법에 맞지 않아 문맥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마지막 문장을 통해 <춘몽>이 검열관들에 의해 ‘이색적 전위영화’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상영허가 서류에는 ‘제한사항’으로 필름에서 다음과 같은 6개 처를 삭제하는 조건이 붙어 있다. [그림 10] 「국산영화 <춘몽> 상영허가」, 공보부 영화과, 1965.6.28. (제한사항 나와 있는 두 번째 페이지) 위 제한사항에 적혀있는 원색적인 어구들과 영화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요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색적 전위영화’라는 결론적 명시는 너무 불균질해서 코믹하거나 그로테스크하게까지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모순 내지 불균질에는 1980년대 전반기까지도 외설에 관한 검열에서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원리 아닌 원리가 들어있다. 검열관들은 이 영화가 제작사에서 주장하는 대로 전위적 실험영화임을 인정하는 듯하지만, 사실 검열관의 그러한 인정이 실제 가위질을 하는 단계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제한사항을 통해 드러난다. 제한사항은 어차피 여성 신체의 일정한 부분은 노출할 수 없고, 폭행이나 기타 범법 장면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규칙에 따라 기계적으로 선별되기 때문이다. 전위영화라는 정체성 속에서의 그 장면들의 기능이나 역할 등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그것을 고려할 수 있는 검열관도 없다. 검열관들은 시행규칙, 나아가 그것을 하달하는 행정적 검열권력의 시선과 요구를 의식하며 검열을 수행한다. 그 시선이 여성의 젖가슴 노출은 텍스트의 구조나 맥락에 상관없이 외설이라고 명령하고 있다면 일선의 수행자인 검열관은 설사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음란으로 바라보며 삭제할 수밖에 없다. 이는 영화 제작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검열에서 외설로 규정되면 어차피 찍은 필름을 잘라내야 했기 때문에 애초에 그러한 장면을 찍지 않는 것이 가장 손해를 덜 보는 길이다. 그러려면 검열권력이 요구하는 기준에 따라 자진 검열이 사전에 이루어져야 한다. 이때 자진 검열의 주체는 이미 검열권력의 시선을 내면화하고 있다. 검열권력의 보이지 않는 시선을 의식하여 그가 원하는 대로 일정한 부분만을 응시하고 잘라내는 것 자체가 도착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검열권력의 도착적 상상력이 또한 작용한다. 여성의 젖가슴을 음란한 것으로만 바라보는 관점,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는 페티시즘, 그래서 감시라는 명분으로 그것만을 엿보는 관음증(觀淫症)이 언제나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검열의 도착적 상상력 <춘몽>은 위와 같은 상영허가를 받고 1965년 7월3일 개봉한다. 그런데 개봉한 지 6개월이 지난 1966년 1월에 새삼스럽게 ‘음화제조’ 혐의로 감독이 기소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것이 외설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 보여준 권력의 억지 내지 궤변, 즉 그것이 텍스트에 등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세트 안에서 완전 나체로 뒷모습을 촬영했기 때문에 음화제조라는 판결은 검열권력의 도착적 상상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기도 하다. 검열권력은 언제나 텍스트를 보지 않고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을 본다. 검열권력이 상상하는 세계에서 그것은 외설, 즉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 보인 것인데, 언제나 보여서는 안 되는 것만을 찾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든지 상상된 외설의 세계로 편입될 수 있다. 검열권력은 외설의 세계를 상상하기 때문에 외설을 더욱 철저히 금지하는 것이며 무엇으로든 외설을 볼 수 있기도 하다. 요컨대 유현목 감독에 대한 음화제조 판결은 권력이 오버(over)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언제나 일정한 부분 너머[over]를 음란한 것으로만 상상하는 권력이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러한 원리 아닌 원리는 박정희 정권기 내내 한국영화를 지배한 것은 물론이고, 1980년대 신군분 정권에까지 답습되어 한국영화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1. 이 글은 박유희, 「검열이라는 포르노그래피」, 한국영상자료원 편, 『한국영화역사 속 검열제도』, 한국영상자료원, 2016.12, 159-168쪽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2. ‘섹스영화’란 1960년대 말에 한국 신문에 등장하기 시작한 용어로, 처음에는 ‘불륜영화’를 대체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40년대 이후 사라졌던 ‘에로(티시즘)’라는 말이 영화와 합성되어 ‘에로(티시즘) 영화’로 재등장하면서 ‘섹스영화’와 ‘에로영화’는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이후 1980년대까지 두 용어에서는 ‘팔기 위해 벗기는’ 저질 상업영화의 뉘앙스가 점차 강해진다. 3.《경향신문》, 1966.01.04.7면. 4. “영화 <춘몽>에 음화 판결”, 《동아일보》, 1967.03.15.3면. 5. 활동사진필름규칙 제5조에 의하면 “검열관청의 검열을 거친 필름으로서 공안 풍속 또는 보건 상 지장 있다고 인정할 때는 그의 영사를 제한 또는 금지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6. “영화감독 유현목 씨 입건”, 《경향신문》, 1965.7.13.3면; “유현목 감독 입건/ 논문 「은막의 자유」 등 말썽”, 《동아일보》, 1965.07.14.3면. 7. 유현목 감독이 “반공의 국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박유희, 「문예영화와 검열: 유현목 영화의 정체성 구성과정에 대한 일고찰」, 『영상예술연구』 17호, 영상예술학회, 2010, 201-203쪽 참조. 8. “이만희 감독 관대처분을”, 《경향신문》, 1965.02.08.5면. 9. “영화감독 유현목 씨 입건”, 《경향신문》, 1965.07.13.3면. 10. 박유희, 「문예영화와 검열: 유현목 영화의 정체성 구성과정에 대한 일고찰」, 『영상예술연구』 17호, 영상예술학회, 2010, 1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