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가부채특별법 그 후, 우리농업의 살 길은 무엇인가
- 감독
- 권우정, 남태제
- 제작년도
- 2001
난 실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애매모호한 표현들과 정서들로 채워진 장면들을 매번 해석해야 할 때, 감독은 마치 나를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 매우 직설적이고 명쾌한 영화들을 좋아하는 단세포 관객인 나에게 감독의 이름만으로 선택한 실험영화가 있다. 문정현 감독. 그가 실험영화를 주로 다뤘던 이원우 감독과 함께 만든 첫 작품 < 붕괴 >. 이 작품은 2014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피프메세나 상을 수상했다. (문정현 감독을 찬미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간 매우 명쾌한 다큐멘터리를 작업했던 그가 뜬금없이 실험영화라는 장르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런 중에 읽게 된 작품의 시놉시스가 나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둘째 아이가 장애아일 수 있을 확률을 통보받았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나는 출산의 순간만을 초조하게 기다린다. 그리고 과거 10년 동안 장애인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을 되돌려본다. 마침내 불안과 공포에 떨었던 나의 과거와 현재의 얼굴들을 발견한다.’ (서울독립영화제 2014 발췌) 영화의 프롤로그에서 보이듯, 차곡차곡 배치했던 도미도(노력)들이 한순간 무너지는 것처럼, 다큐멘터리 < 붕괴 >는 감독의 수많은 가면들과 위선이 붕괴되는 순간의 감정들을 상당히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문정현 감독이 왜 실험영화를 선택했는지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그의 현재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기 위한 나름의 최선의 선택이라고 보인다. 문정현 감독이 10여 년 동안 장애인 단체에서 지녔던 위치, 감독 이전에 친밀함으로 쌓여왔던 장애인들과의 관계, 그것은 영화 안에서 그가 장애인들과 통화하는 장면들 속에서도 매번 쉽게 알 수 있다. 가족에게도 말 못한 고민을 들어주는 무지 편한 형으로서 말이다. 그러나 프레임이라는 경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장애인과 그와의 안전한 관계가 현실로 다가왔을 때, 즉 둘째 아이가 장애아 일 수도 있다는 의사의 통보가 10여 년간 지켜왔던 그의 수많은 가치와 안도감을 순간적으로 불안하게 만들어 버렸다. 하나하나 번호로 매겨지는 내레이션의 숫자가 거듭될수록 이상으로 높여냈던 아름다운 가치들이, 그리고 화면 밖에 있었던 그와 화면 안 대상들과의 경계가 더욱더 크게 붕괴되고 있었다. 임신과 더불어 둘째 아이가 장애아일 수도 있다는 공포와 불안 속에 집안 경제는 어려워진다. 주거 공간 주변의 철거, 가장이자 감독으로서의 위치, 그 수많은 붕괴 이미지들, 아니 현실의 시련들. 그 안에서 마치 백조처럼 수면 밖으로 드러난 우아함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까? 그것 또한 얼마나 위선적인 것인가? 화면 밖으로 숨기 좋은 감독이라는 위치를 과감히 버리고, 문정현 감독은 < 붕괴 >에서 자신을 주인공으로 결코 잘생기지 않은 얼굴과 가족들의 고통을, 그리고 상당히 세속적인 자신의 감정들을 결심하듯 드러내고 있다. 그런 과감한 용기가 불편하기보다는 장르에 대한 첫 도전으로, 더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숨고 싶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위로와 연민으로 귀결시켜 내고 있다. 이러한 붕괴의 파편들이 내러티브 없이 계속 이어졌다면 나 같은 관객에게 이 영화는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둘째 아이의 출산이 가까워질수록 그에게 가해진 현실의 무게감과 자신 안의 갈등들이 하나하나 증폭되고 관객과 함께 불안과 공포 속에 맞이하는 출산의 순간까지 진행되는 일종의 ‘공감적 내러티브’는 이 영화가 갖는 매우 매력적인 요소 중 하나다. 영화의 후반부, 둘째 아이의 건강한 출산과 안정된 삶의 터전들. 그것은 마치 모든 것들이 붕괴되어도 변치 않을 것이 있다는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평화로운 집안을 비추는 카메라가 조금씩 움직이며 창문 밖으로 비추어지는 철거의 모습. 그 안에서 마주친 노동자를 가리켰을 때 우리의 믿음은 다시금 붕괴된다. < 붕괴 >는 감독 스스로 자신을 붕괴시키며 스크린 밖에 응시의 대상으로 존재한 관객들마저 모두가 붕괴의 주인공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결코 우울하지 않다. 붕괴와 더불어 재창조되는 붕괴할 것들. 그것들과 함께 불안하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공존의 방법을 하나쯤은 터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 밤늦게 허전해서 TV를 틀 때가 있는데 무의식적으로 리모컨을 누르다가 눈여겨보게 되는 채널이 하나 있다. 선댄스 영화제에서 상영된 작품들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선댄스 채널. 해외 독립 영화를 안방에서 시청할 수 있는데, 특히나 영화제에서 인상 깊게 봤던 영화들이 TV로 방영될 때는 옛 친구를 만났듯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날도 그랬다. 선댄스 채널에서 방영하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에 확 꽂혀 버린 것이다. 잠깐만이 어느새 한 시간이 되고 90여 분의 영화 한 편을 극장이 아닌 TV로 올곧게 본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 니콜라스 바클레이의 진실 The Imposter >(2011). 이 영화는 3년 전 사라진 소년이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면서 그동안 숨겨졌던 진실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미국 샌 안토니오 출신 소년이 갑자기 사라지고, 3년 후 스페인 길거리에서 여행객들에 의해 발견된다. 실종된 기간 동안 소년은 유괴된 채 온갖 성적 학대와 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가족들은 그가 있는 스페인으로 소년의 누나를 먼저 보낸다. 그곳에서 처음 소년을 만난 누나는 소년의 달라진 외모가 유괴기간 겪은 시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는 그동안 익숙한 가족의 해후를 다룬 따뜻한 휴먼 다큐멘터리처럼 비친다. 그러나 그가 가족들이 있는 미국으로 귀향하면서 하나씩 밝혀지는 사실들과 반전. 영화는 여러 이면들의 진실을 한꺼번에 풀어내기보다는 하나씩 하나씩 관객의 감정이 점점 증폭되는 구조로 휴먼 다큐가 아닌 스릴러 영화를 만들어 냈다. 금발을 가진 푸른 눈의 소년이 사라지고 난 후 어떻게 흑발에 갈색 눈동자로 변할 수 있을까? 옛 사진 속에 보이는 소년의 귀 모양(일종의 지문과 같다고 한다)과 돌아온 소년의 귀 모양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가족들은 알면서도 왜 모르는 척하는 걸까? 사건을 기억하는 모두(탐정, 관련 공무원 및 수사관, 언론 등)가 사라진 소년이 그(니콜라스)가 아님을 주장하지만 가족들은 오히려 그들의 주장을 외면하거나 때로는 분노하며 돌아온 소년을 변함없이 가족으로 인정한다. 왜일까? 진실과 거짓. 영화제목 그대로 한 사기꾼의 협잡극으로 영화는 시작하지만 누가 사기를 당하고 누가 사기를 쳤는지는 점점 모호해지는 영화다. 나 또한 불리한 조건에서 뜻하는 답을 찾지 못할 때 그 원인을 내가 아닌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할 때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어’, ‘내가 아닌 누구도 이렇게 할 수밖에 없을 거야’ 등등. 자기최면, 자기만족은 개인의 심적 고통과 부담을 해결해주는 일종의 방어기제 같은 것이다. 영화는 인간 모두가 외부의 충격과 닥쳐진 사실이 던지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자주 스스로를 반복해서 최면화 하는지, 그 안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때로는 스스로도 판가름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인 한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확장될 때 가질 수 있는 충격적 공포도 함께 말하고 있다. 또 하나, 영화에서 눈여겨 볼 것 중 하나는 실종 소년과 가족들의 증언을 배우를 통해 ‘재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간의 다큐멘터리가 재연의 범위를 현실에서 찍기 어려운 과거의 사건들을 극화하는 것에서 머물렀다면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 고유의 장치로 여겨지는 ‘인터뷰’까지 그 범위를 확장해 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장치는 영화를 끝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고 보게 만드는 아주 매력적인 ‘장치’로 활용되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수많은 증언들 안에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끊임없이 추리해야 하는 영화, 마치 감독은 “자 여기까지 봤을 때, 누가 사기를 치는 거 같아?” 라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고 관객은 영화의 ‘퍼즐 맞추기’가 끝날 때까지 긴장을 놓칠 수가 없다. 그리고 마지막 ‘퍼즐 하나’가 보여주는 충격의 여파는 시간이 지나도 긴 여운으로 남을 것이다. 나에게는 이 영화가 주는 ‘질문’이 영화 안에서만이 아니라 지금 이곳,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충격적 사건과 집단의 ‘사기극’에서도 변함없이 적용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기당하지 않고 끊임없이 ‘진실’을 목도해야 하는 것, 그리고 또 다른 니콜라스가 반복 재생되지 않도록 이처럼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로 여기 한국에서도 수많은 다큐멘터리스트들에 의해 생산되어 관객과 함께 소통되어지기를 바라본다.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상상을 해 본다. 산업통상부 장관이 되어 대국민 기자회견을 통해 그간 정부의 에너지 산업정책에 대한 문제들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에 따른 후속조치로 ‘전국의 원자력 발전소 즉각 폐쇄 및 추가 건설 계획 전면 백지화’ ‘밀양을 비롯한 송전탑 건설계획 전면 철회’ ‘기업들의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 등을 발표한다면. 혹은 광화문 사거리에서 조선일보 특별판을 무료로 배포해 국가보안법 폐지, 박근혜 정부의 통일정책 비판 및 조건 없는 대북 지원 그리고 고 박정희 대통령의 과거 친일 행적이 기사화된다면. 바쁜 출근길, 직장인들이 이 특별판을 보았을 때 표정들이 어떠할까? 그리고 조선일보 관계자들의 표정은? 생각만 해도 실소가 나온다. 이런 상상이 현실로 된다면 어떠할까? 영화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럴수도... 하지만 이 얘기들은 미국 사회에 두 명의 괴짜 예스맨(앤디와 마이크)들이 벌인 일이고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제대로 한방을 먹인 사실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한 다큐멘터리 < 예스맨 프로젝트 >. 이 영화는 흥행에 힘입어 책으로도 발간되어 나름의 인기를 얻었다. 새삼 이 작품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길어졌는데, 현재 기획단계인 다큐멘터리 < 핵 마피아 > 제작에 참여한 나로서는 이런 상상들이 제작의 주요 아이디어가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다큐가 앞뒤 떠나 ‘핵 마피아’에 대해 뭔가 한 방 먹여보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제작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나라 핵 산업의 문제와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번에는 좀 다르게 풀고 싶었다. 멀쩡히 잘살고 있는 고향을 떠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에너지 정책인지, 여름마다 반복되는 에너지 절전 캠페인은 정작 기업들은 제외한 채 왜 우리만 열심히 해야 하는지. 실체가 보이지 않는 고통의 ‘가해자’가 누구인지 직접 찾아가고, 만나보고 캐묻고 싶다. 그리고 그들에게 실재적 한방은 아니어도 조금은 균열을 낼 수 있는 유쾌한 펀치를 날려보고 싶다. 그렇게 기획되고 있는 ‘핵 마피아’이기에 예스맨 프로젝트의 통근 사기극들에 대해 이리저리 뜯어보며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고심하게 된다. 예스맨(앤디와 마이크)들이 벌이는 여러 사기극들은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세상을 바꿔보자는 야심 찬 계획에서 출발한 그들의 ‘사기극’은, 현실의 모순들이 갖고 있는 원인과 배경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들 나름의 행동으로 책임지려고 한다. 인도 보팔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공식 사과와 물적 보상(120억 $)을 약속하는 다국적 기업 다우(Dow) 대변인이 BBC와 진행한 공식 인터뷰. 특종은 주변 언론들까지 합세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크게 이슈화된다. 물론 이 보도는 대변인으로 분한 예스맨들(앤디와 마이크)이 벌인 사기극이었다. 언론은 자신들의 실수를 덮고자, 예스맨들의 거짓말이 보팔 사건 피해자들을 분노하게 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한다. 그리고 이후에도 이어지는 예스맨들의 사기 행각에 대해 언론은 지속적으로 그들의 거짓말이 피해자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실제로 예스맨들이 만난 사건의 피해자들은 이들이 벌인 사기극에 대해 통쾌해하며 즐거워한다. 오히려 피해자들은 정부와 기업, 언론이 긴 시간 거짓말을 했다고 주장한다. 다국적 기업 다우(Dow)의 윤리적 행동이 주주들의 이탈을 필두로 한 주가 하락으로 귀결될 때 예스맨들은 새로운 결론을 내린다. 시장경제체제의 원리 안에서는 기업의 윤리가 경제적 이윤으로 귀결되지 못함을. 그렇다면 기업만이 아니라 기업의 수익을 보장하는 정부와 주류 경제학자들의 이론적 지원까지 사기극의 대상으로 지명되면서 영화는 정부와 언론으로 확대된 예스맨들의 사기극들을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실소를 금할 수 없었던 것은 밖에서 보면 뻔히 보이는 거짓말과 말도 안 되는 논리와 상품들이 실제로 그 내부에서는 말이 되고 돈이 된다는 것이다. 대안에너지로 발표한 시체 에너지?, 미래 환경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 가능한 거대 풍선 옷 등... 야유와 비난의 대상이 될 거라 예상한 예스맨들의 발표와 상품에 대해 관련자들은 너무나 진지하고 때로는 적극적인 관심을 표한다. 이것이 어쩌면 신자유주의의 맹목성이 갖는 아이러니와 비극이 아닐는지. 영화는 예스맨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그들의 사기극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여전히 다우(Dow)는 보팔 사건 피해자들을 모른 체하며 기업 홍보에 천문학적인 액수를 쏟아 붓고 뉴올리언스 이주정책은 가난한 주민들을 여전히 거리로 내몰고 있으며, 언론은 정부와 기업의 오래된 거짓말 보다 예스맨들의 작은 거짓말에 더욱 분노한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은, 뉴욕타임즈의 거짓 특별판을 보며 짧게나마 행복함과 웃음 짓는 시민들을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예스맨들의 사기극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는 희망을 전해준다면 이들의 사기극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영화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사기극이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아닐지 한번 해보자며 막무가내로 시작한 ‘핵 마피아’ 다큐멘터리도 (물론 예스맨이 갖고 있는 국제 변호인단의 지지도 없다) ‘핵 마피아’들에게 유쾌한 한방의 사기극을 벌이길 원하는 수많은 잠재 관객들이 있기에 용감한 다큐멘터리 제작에 한번 박차를 가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