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꿈꾸던 올림픽 금메달!
- 제작년도
- 2010
< 괴물 >(2006)은 서울 도심의 한강에서 거대한 돌연변이 생물이 나타나 사람들이 붐비는 공원을 날뛰다가 여중생을 꼬리에 움켜쥐고 납치하는 기둥 설정 위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이다. 장르에 대한 성공적인 전복의 사례인 < 살인의 추억 >(2003)과 마찬가지로 장르의 꼴을 갖추고 있는 <괴물>에서 봉준호는 괴수영화의 관습을 이용하여 현대 한국의 사회, 정치적 현실을 다룬다. 미군 기지를 발원지로 하는 환경 사고의 산물인 괴물은 미국을 상징하는 대상으로 쉽게 읽히지만, 영화가 전개되면서 더 복잡한 그림이 드러난다. 납치된 소녀 현서(고아성)는 한국의 자랑스러운 경제 기적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사회적, 경제적으로 소외된 박씨 집안의 구성원이다. 현서의 가족은 느리지만 헌신적인 아버지 강두(송강호)와 강변 매점을 강두와 함께 운영하는 할아버지 희봉(변희봉)으로 구성돼 있다. 결정적인 순간 얼어붙는 버릇이 있는 양궁 선수 이모 남주(배두나)와 한때 급진주의자였으나 지금은 실직한 주정뱅이인 삼촌 남일(박해일)도 있다. 국가는 이 가족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 괴물의 공격이 있은 후 정부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숙주라며 가족을 비롯한 괴물과 접촉한 모든 사람을 격리한다. 하지만 강두는 괴물에게 납치당한 뒤 한강을 따라 배치된 미로 같은 하수구에서 노숙자 소년과 함께 숨죽이고 있는 현서의 전화를 받는다. 박씨 가족 일행은 아둔한 병원의 통제 시스템을 벗어나 현서를 찾기 위한 자경단의 여정을 시작한다. <괴물>은 장르와 양가적 관계를 구현한다. 봉준호는 괴수 장르의 발전 도상위에서 자신의 영화를 할리우드와 더 밀착시키고자 했다. 실제로 이 영화는 괴물의 충격적이고 갑작스러운 등장으로부터 시작하여 위기에 처한 여러 인물들의 예상치 못한 용감한 행동으로 절정에 이르는 고전 괴수영화의 시각적, 서사적 관습을 따른다. 스토리는 전국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무대, 즉 수도 서울의 상징인 한강변을 배경으로 한다. 시각효과 스튜디오 오퍼니지와 협력한 할리우드 수준의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퀄리티 이면에 놓인 봉준호의 야심은 괴수영화와 슬랩스틱 코미디의 관습이 충돌하는 장르의 미학을 전개하는 것이다. 노란색 방호복을 입은 방역 요원이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넘어지거나, 강두에게 총알이 한 발 남았다는 말을 들은 희봉이 아들이 총알의 수를 잘못 세었다는 것을 깨닫고 괴물에게 최후를 맞는 장면 등에서 이런 충돌이 가시화된다. 봉준호는 괴물의 실체를 초반에 드러내거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괴물의 입에서 빠져나온 현서가 가족의 간청에 화답하지 않고 비극을 맞이하는 가슴 아픈 장면 등에서 할리우드 주류 장르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장르의 관습을 전복한다. 봉준호는 장르 관습의 조각들을 한국적 문맥에 맞게 배열하는, <살인의 추억>에서 시작한 연출 전략을 이어간다. 가장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장면 중 하나는 클라이맥스, 거리 시위대와 진압 경찰이 격렬하게 대치하는 가운데 강두의 가족들이 한강변의 노숙자(윤제문)와 함께 괴물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는 신이다. 정치적인 함의가 강력하게 폭발하는 이 장면에서 노숙자는 남일이 배낭을 벗어 던지고 불타는 화염병을 던질 준비를 하는 동안 괴물의 목구멍에 휘발유를 붓고 병이 손에서 미끄러져 발밑에 부딪히자 놀란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본다. 이때 남주가 활을 들고 나타나 절묘한 타이밍에 화염이 이는 화살을 괴물의 입을 향해 발사하고 강두는 쇠파이프로 괴수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이 장면이 강렬한 이유는 할리우드의 장르 관습과 한국의 역사적 현실이 완벽하게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불덩어리가 되어 쓰러지는 괴물에 대한 조직적인 공격은 괴수 영화의 전형적인 관습 아래 있다. 괴물을 처단하는 공격의 수단은 너무나 한국적이다. 배낭을 멘 청년이 화염병을 던지는 모습은 민주화시대를 통과한 한국인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선명한 도상은 1980년대 민주화 시위부터 2000년대 초반 미군 장갑차에 압사당한 미선이, 효순이 사건, 세계화 및 자유무역 반대 시위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젊은이들이 참여했던 20여 년간의 거리 시위를 환기한다. 이러한 시위 중 상당수가 억압적인 군사정권을 지지하거나 점령군의 부당한 지위를 남용하고, 신(新) 자유주의 경제 의제를 추진한 미국을 겨냥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저류에는 뚜렷한 반미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활과 화살을 든 남주의 이미지에는 한국의 여성 양궁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싹쓸이해 온 국가적 색채도 담겨 있다. 괴물과 미국의 연관성을 고려할 때 이 장면들은 글로벌한 미국인-타자에 대한 한국인들의 정치적 주장으로 읽힌다. 그러나 이것은 노숙자, 실직자, 정치적 액티비스트, 삼류 운동선수 등 사회적, 경제적 주변성과 실패한 인물들을 통해 한국성을 표현하려는 또 다른 맥락이 있다. 봉준호는 국가의 대리인이 아닌 이들을 도덕적으로 정당한 한국성의 구현으로 지지한다. 범죄 드라마가 아닌 괴수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괴물>은 표면적 범죄와 심층적 범죄라는 <살인의 추억>의 구조를 이어받는다. 납치와 실종의 상황은 <괴물>에서 반복되는데 괴물은 내러티브에 구조를 부여하는 장치이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초점은 아니며 실제로 괴물은 플롯이 전개되는 동안 점차적으로 중요성을 상실한다. 흥미로운 것은 대도시의 표면 아래 숨겨진 현서를 찾는 가족의 여정이 현대 한국인의 삶에 깊숙이 자리한 범죄의 실체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박씨 일가가 관료 조직과 자본에 얼키고 설키면서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의 상징물인 한강 다리 아래를 전전할 때 그들은 정부가 자신들을 보호할 수 없고 그저 경멸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부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존재에 대해 거짓을 말하고, 경찰은 현서의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병원은 현서를 찾기 위해 격리를 해제하지 않으며, 강변을 소독하는 방역 요원들은 쉽게 뇌물에 굴복한다. 남일은 급진주의 액티비스트 시절의 정치적 이상을 고액 연봉과 교환한 친구 뚱게바라(임필성)에게 배신을 당한다. 한국의 자랑스러운 경제적 성공을 연상시키는 고층 빌딩 꼭대기에 있는 통신회사 사무실에서 뚱게바라는 휴대폰 추적을 통해 현서의 위치를 찾아내지만 카드빚을 갚기 위한 신고 포상금을 노리고 경찰에 남일을 신고한다. 이러저러한 삽화들을 통해 봉준호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환상을 야유하고 경제적 기적을 돌연변이 괴물로 재탄생시켜 근대화를 얻기 위해 지불한 사회적, 도덕적 비용의 크기를 가늠하고자 한다. <괴물>이 폭로하고자 하는 가장 높은 단계의 범죄는 한국과 미국의 관계이다.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프롤로그는 돌연변이 생물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이 장면은 주한미군 사령부이자 서울 중심에 위치한 용산 미군기지(이곳 근처에 현재 한국 정부가 터를 잡았다는 사실도 기이한 반향을 불러온다)의 영안실을 배경으로 한다. 미국인 영안실 의사가 한국인 부하 직원에게 포름알데히드 병을 하수구에 버리라고 명령하고, 소극적으로 항의하던 부하는 이내 순순히 복종하여 수백 병의 독극물을 싱크대에 쏟아 붓는다. 이 장면은 고전 공포영화의 클리셰인 미친 과학자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더 미묘한 공포는 부하가 미친 과학자의 명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불안을 조성하는 이 장면은 자국민에 극도로 해로울 수 있는 범죄를 종용하는 미국의 명령에 순응하는 한국 정부의 종속성을 재현한다. 한 병원 장면에서 기괴한 방호복을 입은 미국 관리가 한국인 의사에게 강두의 뇌를 뚫으라고 명령하는데 이 가학적이고 비논리적인 행위를 한국인 의사는 묵묵히 수행한다. 이와 같은 장면들은 괴물이 자연이나 과학, 심지어 미국의 군사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종이라는 정치적 태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주장한다. 괴물을 만드는 것은 미국인 영안실 의사가 아니라 한국인 조수이다.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인 ‘숙주’는 미국에 기생하는 한국의 지위를 가리키면서 심오한 범죄의 본질을 암시하는 셈이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이렇게 매력 충만한 영화가 극장 개봉을 못 하다니, 좀 억울하지 싶은 생각이 든다. 스크린으로 못 보는 것도 그렇고, 덕분에 마케팅의 기회를 잃어 소개될 기회도 제한된다는 생각이 드니 그런 안타까움이 급증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 코너가 그래서 생겨났지 하는 생각에 일단의 안도감을 느끼며. < 더 브론즈 >는 굳이 카테고리를 찾자면, 스포츠영화다. 뼈대로만 보면 17살 체조선수가 부상 후 실의에 빠져 있다가 몇 년 후 후배 선수를 양성하며 다시 자아를 찾아 나가는 예측 가능한 형태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손쉽게 설명하고 말아버리면 영화의 매력이 손가락에서 모래 빠져나가듯이 쉬쉬쉬 다 빠져나가 버리고 만다. 기존 스포츠영화가 가진 식상한 도식들에서 벗어날 비장의 무기들을 잔뜩 챙겨가지고 있으니, 부디 일단은 빨,파,흰색 조합의 헐렁한 트레이닝복을 걸친 멜리사 로치의 < 나폴레옹 다이너마이트 >스러운 스틸 컷에 일단 혹해주길 바랄 뿐이다. 호프 앤 그레고리(멜리사 로치)는 미국 중서부의 작은 마을 애머스트에서 나고 자란 영웅이다. 올림픽 체조 동메달 선수로 명성을 얻어 마을 입구 비석에는 ‘세계 제일 사암의 고장’이라는 수식과 함께 ‘2004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호프 앤 그레고리의 고향’임이 자랑스럽게 표기되어 있다. 그녀의 동메달이 화제가 된 건 2004년 올림픽 도중 발목에 부상을 입은 채로 아픈 다리를 수습하고 이단 평행봉에 도전한 스포츠 정신을 높이 사서다. 그렇게 그녀는 일숨에 에머스트의 천사가 되었다. 착지의 순간, 브라운관을 빠져나온 카메라가 잡는 건 화면을 보며 쾌감에 젖은 현재의 호프다. 호프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그녀의 현재에는 ‘가망’이 없다. 부상으로 체조를 그만둔 그녀는, 일생 최고의 환호가 쏟아지던 순간을 되감기 하며 침대에서 자위를 하고 약물을 흡입하며 시간을 보낸다. 단둘이 사는 아버지에게는 온갖 짜증과 욕설을 퍼붓고, 우체부로 일하는 아버지의 우편물을 뒤져 돈을 훔치기 일쑤다. 마을 곳곳 상점에 동메달을 목에 건 빛바랜 사진으로 간신히 명성을 입증해야 하는 삶.(그러고 햄버거 할인을 받는 정도랄까) 호프의 현재에는 그러니까, 문제가 넘쳐흐른다. 호프 앤 그레고리가 가진 문제의 핵심은 그녀가 한때 ‘공주’였으며, 공주가 아닌 현재의 그녀가 여전히 그 ‘한때’를 놓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온다. 부상으로 더 이상 선수생활은 불가능한데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선수, 연금이 이미 다 바닥났는데도 여전히 자신의 수익으로 집안이 유지된다고 믿는 자신감. 그 갭과 괴리감을 다른 누가 메꾸어 줄 수나 있을까. 일단 차림새부터 짚고 넘어가자면, 어딜 가나 호프 앤 그레고리를 모를 새라 등에 큼지막하게 U. S. A가 새겨진 낡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자를 보면서 찬란했던 그녀의 과거를 유추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호프를 추락한 지금의 일상에서 끄집어내는 계기는, 자신이 지금 지도 중인 매기를 올림픽에 나가게 해준다면 50만 달러의 유산을 호프에게 상속해 주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택한 그녀의 전 코치에게 있다. 현실을 위해 50만 달러의 가능성을 수락하지만, 사실 호프에게 중요한 건 돈보다, 대중에게 천사로 군림해 온 자신의 자존심이다. 전도유망한 후배 선수 매기에게 기름진 햄버거만 먹여 망쳐놓는 건, 그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돋보이게 해 줄 코치가 아니라 여전히 자신만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주인공이고 싶어 하는 열망에서 기인한다. 그녀가 현실과 과거에서 오는 영광의 갭을 줄이지 못하는 걸 탓하지 못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이 인정욕구 역시 호프가 별나서가 아니다. 올림픽 출전을 꿈꾸며, 메달을 향해 달려왔던 이 영화의 선수들 모두가 그렇다. 호프와 티격태격하며 시종 그녀를 시기하는 팀 코디네이터 랜스 터커는 그리하여 이렇게 폭발한다. “난 금메달, 은메달 다 땄는데, 사람들은 모두 동메달 딴 ‘호프의 기적’만 대단하다고 말한다고!” 체중 조절을 위해 ‘한 달 동안 수박주스만 먹어, 씹는 법을 새로 익혀야 할 정도’인데다, 가슴이 나오지 않도록 붕대로 가슴을 꽁꽁 싸매고 다닌 호프 같은 사춘기의 선수들에게 대중의 인정은 곧 폼 나는 삶을 유지할 동력이다. 경쟁, 시기, 낮은 자존감, 부상 같은 변수들 앞에서 영화의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 모두 자신이 획득한 영웅의 자리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 무시무시한 공포를 끌어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비정상적인 어른이 되어갈 뿐이다. 호프는 결국 매기가 올림픽 영웅이 될 수 있도록 돕게 되지만, 그러기까지는 환호 속에 존재하던 자신이 더 이상 주인공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이 씁쓸한 현실 어디에도 여느 스포츠 영화의 ‘재기와 갱생의 프로젝트’가 들어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 그리하여 < 더 브론즈 >의 장면 중 마음을 흔드는 하나의 장면은 올림픽 경기에서 매기가 환호를 받는 순간 자신의 영광을 뒤로하고 멀어져가는 호프의 뒷모습이다. 관중은 새로운 영웅을 주목할 뿐, 그 순간 과거의 영웅은 빛을 잃는다. 그 교체의 시간을 안타깝고 길게 응시해주는 건 호프의 아버지뿐이다. 브라이언 버클리 감독은 체조경기의 쾌감은 모두 덜어낸 채, 오롯이 대중의 심리가 움직이는 역동성 안에서 벌어지는, 이 감정의 분투를 지켜본다. 이 영화가 신기한 지점은 욕쟁이 호프를 위시한 어느 하나 선뜻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호프 정도는 좀 포장해줄 법한데, 그러지 않는다는 데 오히려 점수를 주고 싶다. 시트콤 < 빅뱅 이론 >에서 독특한 목소리로 시종 웃음을 끌어내는 베르나데트 역의 멜리사 로치가 심통스런 호프 역을 맛깔나게 연기할 뿐 아니라, 그녀의 남편 윈스턴 로치와 공동 각본을 집필했는데, 그녀의 코믹함을 십분 투여했지만 그게 <빅뱅 이론>에서처럼 귀엽고 유쾌한 웃음과는 거리가 좀 멀다. 그들은 그냥, 지질하고 있는 그대로여서 웃길 뿐이다. 아, 호프와 랜스가 급작스럽게 돌진하는 19금 체조 섹스 장면에서만큼은 호프의 캐릭터만큼이나 제대로 ‘병맛’ 살린다. 미국을 대표하는 남녀 국가대표 체조의 다양한 동작들이 격렬한 체위로 수행되는 그 과정에 대해 랜스 역을 연기한 세바스티안 스탄은 인터뷰를 통해 “어떻게 하면 병맛을 살릴지 스태프들과 함께 엄청난 구상과 아이디어를 통해 만들었다“고 밝힌다. IPTV 서비스로는 안타깝지만 그 장면이 모자이크 처리가 되는 바람에, 그렇게 고심해서 찍었을 게 분명한 정말 중요한 장면 하나를 놓치고 만다는 걸 미리 알려둔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비밀이 있다. 그건 절대로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금기이며, “너도 그러고 있지?”라는 듯한 눈빛을 통해 은밀하게 소통되는 것이다. 어쩌면 차라리 ‘공범 의식’에 가깝다. 유치원이든 고등학교든 ‘학부형’에겐, 자신이 옳지 않은 시스템의 부역자이며 석연치 않은 계략의 공모자라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차마 말할 순 없다. 터놓고 말하자면 너무나 끔찍하고, 사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는 이유다. 정지우 감독의 < 4등 >은 고통스럽다. 이 영화는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아이를 위한다는 것이 부모의 체면 때문이며, 교육은 결국 폭력을 수반하며, 오로지 원하는 건 1등일 뿐이며, 경쟁은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 아니라 조장된 이데올로기이며, 부모는 아이의 미래를 생각한다는 면죄부로 현재를 학대한다. 절대 극적 과장이 아니다. 모두 알고 있었지만 묵인했던 진실. 우린 들켜버렸다. 영화는 의외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흑백 화면으로 처리된 도입부는 주인공 소년 준호(유재상)가 아닌, 장차 준호의 코치가 될 광수(정가람)의 10대 시절 이야기다. 그는 국가대표 수영선수이며 에이스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이 유력하다. 타고난 천재이며 승부욕도 대단하다. 젊은 날이기에 일탈의 유혹 앞에서 약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본업을 해치진 않는다. 그러나 집단주의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고, 코치의 체벌에 저항한 그는 선수촌을 뛰쳐나온다. 시간은 흘러, 똘망똘망하던 눈빛은 흐리멍덩해졌다. 어른이 된 광수(박해준)는 구민 센터에서 수영을 가르치며 살아간다. 이때 소문 듣고 찾아왔다며 정애(이항나)는 아들 준호와 함께 광수를 만난다. 정애는 4등만 하는 아들을 1등으로 만들어달라고 매달리고, 그렇게 준호의 지옥 훈련은 시작된다. < 4등 >은 ‘질문의 영화’다. 준호가 아닌 광수로 영화를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다. 폭력이 싫어 메달을 포기했던 광수는, 이젠 준호를 1등으로 만들기 위해 몽둥이를 들고 매질을 시작한다. 여기 <4등>이 던지는 첫 번째 물음표가 있다. 왜 우린 교육을 폭력과 결부시키는 구조에 익숙한가? 이것은 단지 물리적 폭력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아들이 맞는 것보다 4등 하는 게 더 무섭다는 엄마의 논리, 아이의 멘탈을 끊임없이 깎아내리는 폭언, 1등을 하지 않으면 인생의 낙오자가 될 거라는 협박은 아이를 주눅들게 만든다. 그리고 광수는 시간이 지나고 보니, 때려서라도 자신을 잡아주려 했던 사람이 진짜 스승이었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교육과 결합되어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우리 사회에선 결코 낯설지 않은 경구이자 전통처럼 내려오는 교육 철학이다. 물론 이것은 모두 거짓이다. 폭력은 준호를 1등으로 만들지 못했다. 준호는 혼자만의 노력으로,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 제일 먼저 결승점을 통과한다. 그런데 아이는 크게 기뻐하거나 들뜨지 않는다. 대신 거울 속의 자신을 본다. 준호는 비로소 자신을 발견했고, 그 모습엔 코치와 엄마의 다그침 없이도 뭔가를 해냈다는 떳떳함이 있다. 이 장면은 ‘폭력-교육’의 고리에서 해방된 아이의 위엄이며, 이 영화의 간절한 메시지다. 폭력의 역사는 우리 대에서 끝내자는 것이며, 더 이상 준호의 엉덩이에 피멍을 만들진 말자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때리고 맞는 시스템에 익숙했던 세대에게 이것은 희생이자 각성이다. 자신이 폭력의 피해자였지만 가해자가 되기를 포기해야 하기에 희생이고, 세상이 어떻게든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수반되어야 하기에 각성이다. 이 세상에 ‘맞을 짓’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관성적으로 때리는 자가 존재할 뿐이다. 그러면서 < 4등 >은 두 번째 물음표를 던진다. 그 질문은 소박하면서도 만만치 않다. 준호는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준호에겐 1등이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그 아이가 수중에서 발견한, 포근하면서도 신비로운, 물과 빛이 만들어낸 세계를 보여준다. 그 세계는 1등이든 4등이든 꼴등이든 중요하지 않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공간이다. 그런데 아이가 환상적인 경험을 하는 동안, 어른들은 밖에서 스톱워치를 들고 소리친다. 빨리 밖으로 나와 레이스에 참여해 등수를 가리라고. 하지만 이 모든 건 아이들끼리의 일이다. 어른들은 침묵해야 한다. 광수도 준호에게 말하지 않던가. “넌 엄마만 없으면 1등 할 수 있다”고. 엄마의 말처럼 4등 한다고 해서 인생 꾸리꾸리해지는 것 아니며, 코치의 말처럼 때려서라도 바로 잡아준다고 해서 1등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리고, 설사 1등을 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건 더욱 아니다. “1등 하면 기분이 어때요?” 준호는 선배 선수에게 묻고, 후배 선수도 준호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 이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1등 하면 행복한가요?” 아이들이여, 부디 행복하자. 세상의 폭력으로 아프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