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해출격
- 감독
- 금보
- 제작년도
- 1989
- 출연
- 성규안, 오시마 유카리
한국영화의 못다 한 이야기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도시 공간 ' 에서 계속되기도 합니다. 조금의 시차는 있지만, 카메라가 남긴 이미지와 함께 그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1980년대 초반의 서울은 독특한 매력을 품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GNP)이 1천 달러를 넘어서면서 적어도 보릿고개는 면할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1988년 하계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면서 ‘세계도시’의 말석에 자리하게 된 시점이 바로 이 무렵이다. 1974년 최초의 지하철 개통으로부터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2, 3, 4호선이 거의 동 시기에 착공되었으며, 1979년 800만 명을 돌파한 서울의 인구는 단 4년 만에 다시 100만 명이 증가하는 등, 1980년대 초반의 서울은 약간의 과장을 보태서 하루가 멀다 하고 발전과 팽창을 거듭하는 도시였다. 이 시기에 형성된 서울의 도시구조, 다양한 건축과 교통, 토목 인프라 시설은 2020년대의 서울에도 상당 부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서울의 팽창을 지탱한 이들은 더 나은 삶을 찾아 지방에서 상경한 노동자들이었다. 1981년에 개봉한 김수용 감독(1929-2023)의 < 도시로 간 처녀 >는 바로 이 시기, 1981년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실존하는 미아운수라는 시내버스 회사를 배경으로, 지방에서 상경한 버스 여차장(안내양)과 버스 기사, 그 주변인들을 중심으로 당대 노동자들의 희로애락을 그려낸 이 작품은, 영화진흥공사가 선정한 우수 영화로 대종상 작품상 후보에까지 오르는 등 당대에 이미 가치를 인정받은 영화였다. 한편으로는, 첫 개봉 당시 운수업 종사자의 실상을 왜곡했다는 이유 등으로 한국노동조합총연맹으로부터 상영 중지 요청을 받고 일단 극장에서 내려진 후, 문제 장면의 삭제와 재촬영 등을 통해 재개봉이 이뤄졌다는 특이한 일화를 가진 영화이기도 하다. 개봉으로부터 40년이 흐른 지금, 이 영화를 둘러싸고 다양한 평이 존재하지만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당시로서는 시의적절하고, 제법 화제가 되었던 영화였다는 총평에는 아마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서울 시내의 안내양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답게, <도시로 간 처녀>의 카메라는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버스의 움직임을 쫓아서 1981년 상반기의 서울 구석구석을 담아낸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분명 안내양들이지만, 그들의 일터이자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인 1981년의 서울 또한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발휘한다. 이미 1960년대부터 서울의 모습은 총천연색 컬러로 영화 속에 담기기 시작했으나, 1981년이라는 시점은 현재의 서울과 더욱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 이 시기에 젊은 시절을 보낸 이들이 여전히 또렷한 기억을 가지고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시로 간 처녀> 속 서울은 ‘가까우면서도 살짝은 멀게 느껴지는’ 과거의 서울과 현재의 서울을 이어주는 매개체로서, 더욱 깊이 들여다볼 가치를 지닌다. 청량리역 구 역사 영화는 주인공인 문희( 유지인 )가 기차를 타고 청량리역에서 내리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1분경에 등장하는 청량리역의 모습과 지금의 청량리역 주변을 비교해 보면 과연 같은 역이 맞나 싶을 정도이다. 영화가 촬영되던 시기엔 영동선, 중앙선의 열차가 반드시 청량리역에서 시종착을 했지만, 지금은 많은 열차가 서울역까지 연장 운행을 하고 있다는 점 또한 청량리역이 가지는 의미를 상당 부분 변화시켰다. 지방에서 출발한 열차가 서울역까지 직통 운행을 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상경한 이가 청량리역 광장에 내렸을 때의 느끼던 두려움과 낯섦은(여전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과거만큼은 못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 장충단 입구 교차로의 시내버스 (하) 남대문 부근의 시내버스 2분 40초경에서 3분에 걸쳐서, 카메라는 장충단 입구와 남대문 부근의 버스 행렬을 훑는다. 지금도 이 일대는 버스로 넘쳐나기는 하지만, 지금보다도 버스의 대중교통 분담률이 높았던 시대답게, 도로를 빼곡히 메우는 버스의 행렬은 가히 장관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스카라극장의 내부. 특유의 둥근 파사드가 눈에 띈다. 19분경, 영옥( 이영옥 )은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바람을 맞고 돌발적으로 극장 구경에 나선다. 이 장면이 촬영된 극장은 실존하던 스카라극장 (1935년 준공, 2005년 철거)으로, 특유의 둥근 전면 파사드가 인상적인 근대건축이었다. 이 무렵에 청춘을 보낸 이들에게는 당연히 익숙한 공간일 테지만, 이 시기를 살아보지 않았던(특히 1990년대 이후에 태어난) 젊은 세대들에게, 총천연색으로 담긴 스카라극장 내부의 모습은 정말로 소중한 사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 시청 방면에서 바라본 서대문 고가차도의 시점부 (하) 지하철 공사 바리케이드 36분경에는 서대문 고가차도를 미끄러지듯 내려온 버스의 주변에 서울시의 공식 휘장과 ‘지하철’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리케이드가 화면에 잡힌다. 이 일대(지금의 아현역-충정로역 사이)가 1980년부터 시작된 지하철 2호선 공사 현장이었음을 드러내는 의도하지 않은 미장센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도 여전히 시내버스는 서울시 대중교통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지만, 지하철 1호선과 2호선 일부 구간만이 운행되던 40년 전에는 아침 출퇴근길에 있어서 시내버스의 존재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살포시 등장하는 지하철 공사 바리케이드는, 시내버스의 절대적인 존재감이 점차 옅어지는 과도기를 나타내는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압구정현대아파트와 성수대교 49분에서 50분에 걸쳐서, 문희와 광석( 김만 )이 조각배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곳은 지금의 강변(뚝섬한강공원 일대)으로, 한강 건너편의 압구정현대아파트와 성수대교가 배경으로 잡힌다. 이 무렵 압구정현대아파트는 이미 준공되어 입주가 완료된 때였지만, 한강종합개발사업(1983년 착공)이 이뤄지기 전 무언가 삭막한 한강변의 모습은 지금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이 장면에 담긴 푸른 빛깔의 성수대교는 영화 촬영으로부터 불과 13년이 지난 19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일으키면서 완전히 철거되어 현재는 전혀 다른 새로운 교량으로 거듭났다. (상) 고속터미널 청사와 아치 (하) 고속터미널 아치의 2011년 모습 (필자 촬영 및 제공) 66분부터 69분에 걸쳐서, 문희가 원양어선을 타고자 하는 광석을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장면에서는 1981년 10월의 전면 개업을 코앞에 둔 강남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이하 고속터미널)의 웅장한 모습이 곳곳에 담겨있다. 특히 69분 언저리에서, 광주고속 소속의 벤츠 고속버스가 거대한 고속터미널의 청사를 배경으로 옛 랜드마크였던 거대한 출입구 아치를 통과하는 모습은, 당시 고속버스를 타고 상경하던 이들에게 서울 입성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고속터미널의 아치는 이후 터미널을 본뜬 구조물로 바뀌었고, 2011년 말 2012년 초 사이에 철거되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다. 압구정현대아파트와 주변의 미개발지 영화의 말미, 86분에서 88분에 걸쳐서 카메라는 다시 압구정현대아파트를 찾아가 그 옆의 빈곤층 거주지를 훑는다. 1980~81년 무렵만 해도 강남 일대는 토지구획정리만 진행되었을 뿐 주택이 들어서지 않은 땅이 지천에 존재했으며, 이들 지역에는 개발 이전부터 살아온 원주민 혹은 구 도심에서 떠밀려 온 저소득층이 곳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가난한 가정의 실상을 담아내기 위한 감독의 의도였을까, 카메라는 시종일관 판잣집을 겨우 면한 가옥과 뒷배경의 산뜻한 압구정현대아파트, 그리고 새로운 아파트 공사장을 원경으로 잡으면서 대비를 시도한다. 이렇듯 <도시로 간 처녀>는 경관과 건물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서울 곳곳의 경관을 비춰주면서 빠져들도록 한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눈에 익은 곳이 등장할 때, 기뻐하지 않을 관객(특히 서울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40년 전 노동자의 일상과 다면적인 서울의 모습을 미디어의 발달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총천연색으로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다시금 감사함을 느낀다. 참고문헌 송아름, “ 두번의 검열과 <도시로 간 처녀>(2) : 어떻게 버스안내양들의 고난이 감추어졌는가?(1970년대)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2018. 4. 16. 김영준(도시공학 연구자) ㅣ일본 도쿄대학에서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계획사로 박사학위 취득 후, 연구원으로 일하며 '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라는 필명으로 도시 경관을 기록해오고 있다. 영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배경 속 도시 공간을 읽어내는 법을 계속해서 탐구한다. 『영화와 서울: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2022), 『새시각 #01 : 대전엑스포'93』(2021) 집필(공저).
사이버 세상에 대한 몽상 일주일 내내 밤을 샜다. 조너선 크레리의 [24/7 잠의 종말]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책이 없었다. 어차피 읽을 시간도 없었다. 언제부턴가 집에서 책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책장 구석에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포털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될 정도다. 처음에는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한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에게 책을 빌려준 게 언제였더라? 정지돈에게 프랭크 커머드의 절판된 [종말 의식과 인간적 시간]을 빌려준 건 기억나는데. [유령과 파수꾼들](2018) 출간 기념으로 유운성 님과 함께 북토크를 하느라 그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아닐 수도 있고. 분명한 건 아직 책을 돌려받지 못했다는 건데, 괜찮아요 지돈 씨… 그런데 정말 그 행사는 뭐였을까? 나는 구글에 ‘유운성 정지돈 북토크’라고 쳐보았지만 내가 찾는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이라고 할까? 에이아이는 내게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사람들’과 ‘Kmdb 정지돈’이라는 관련 검색어를 제시해주었는데,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유운성 님을 뵈었을 때 조너선 크레리 책을 번역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게 떠올랐고,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하는 생각도 든다. 신이 있다고 해도 아마 그것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무언가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에이아이가 유일하지 않을까. 요 며칠 트위터에서 화제를 모았던 n행시 짓는 에이아이가 지은 삼행시를 보면 심증은 더 강해진다. 허공에의 질주 내가 밤을 샌 건 김쿠만과 나일선의 소설집에 해설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두 작가의 작품 모두 영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개들만이 안달루시아에서 산다’라는 단편으로 시작하는 나일선의 소설집에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루이스 부뉴엘, 리차드 라우드, 앙리 랑글루아, 차이밍량, 장 뤽 고다르, 장-마리 스트로브 같은 영화인들의 이름들이 이어진다. 네이버에 검색하면 AI가 알아서 김주만이라고 정정해주는 김쿠만이라는 이름은 실은 쿠엔틴 타란티노와 이만희에게서 한 글자씩 빌려온 것이다. 어차피 돌려주지 않을 것을 빌렸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지돈 씨… 덕분에 나는 [축음기, 영화, 타자기](프리드리히 키틀러), [소리의 정치](이화진), [경성과 도쿄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정충실), [영화와 소리]와 [영화의 목소리](미셸 시옹)처럼 영화에 관련된 책들을 읽고,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앨런 식수), [음악 인류](대니얼 J. 레비틴), [사탄 박사의 반향실](루이 추데 소케이), [역사](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내용 없는 인간](조르조 아감벤), [아케이드 프로젝트](발터 벤야민), [미래가 사라져갈 때](자넷 폴), [레트로 마니아](사이먼 레이놀즈), [리믹솔로지에 대하여](데이비드 건켈), [소설의 이론](게오르그 루카치), [미래 이후](프랑크 베라르디 ‘비포’), [자본주의 리얼리즘](마크 피셔), [허구세계의 존재론](미우라 도시히코)처럼 영화와 큰 관련은 없는 책들을 읽었지만 원고는 쓰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비평, 평론, 해설, 뭐라고 부르건, 다른 사람들의 작품에 대해 쓰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고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 작품에 대해 말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말하지 않기. 둘. 최후의 최후까지 마감을 미루고 있다가 더는 미룰 수 없는 순간이 닥치면 눈을 감고 후다닥 써버리기. 한기 씨는 글이 안 써지면 눈을 감고 쓴대요, 언젠가 정지돈은 내게 말했고 그것은 분명 효과가 있다. 가끔(실은 자주) 내가 무엇을 쓰는지 나조차 몰라야 글을 쓸 수 있는 때가 있는 것이다. 중력을 모르기 때문에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처럼. 나는 지금 <루니 툰Looney Tunes>의 로드러너와 와일 E. 코요테의 클래식 루틴을 떠올리고 있다. 배고픈 코요테는 호시탐탐 로드러너를 노리지만 잡을 수 없다. 로드러너가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무슨 방법을 써도 로드러너의 발끝도 못 쫓아가던 코요테가 로드러너를 앞지르는 순간이 오는데, 그건 로드러너가 절벽 앞에서 급제동을 할 때다. 절벽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코요테는 걸음을 늦추지 않고, 로드러너를 지나쳐 허공으로 질주(Running On Empty)한다. 짧은 순간이지만 그때 코요테는 의기양양하고, 자신감에 차 있으며, 공중에 떠 있다. 자신이 공중에 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 전까지는. 비극 주인공이 종국에 도달하는 앎은 자신의 불행을 낳은 오류에 대한 앎이었다, 라고 랑시에르는 [모던 타임스: 예술과 정치에서 시간성에 관한 시론]에서 말한다. 나는 내가 공중에 떠 있어도 절대 모를 거야. 꿈에도 모를 거야, 라고 TV를 보던 어린 나는 다짐한다. 정지돈의 말마따나 내가 “대체로 정신이 나가 있다고 할 수 있다”면 아마 내가 어린 시절의 다짐을 아직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연과 상상 1) 어제와의 이별 - 김쿠만 해설의 결말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아 괴로워하며 트위터 타임라인을 새로고침 하고 있는데 나일선의 트윗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영화 이미지 두세 컷과 직접 찍은 책의 구절(혹은 부감으로 찍은 커피잔)의 이미지를 데쿠파주한 잠언풍의 트윗이었다. 첫 두 장은 검은 화면 위에 적힌 독일어 문장의 이미지였는데, 그 아래 “우리를 어제와 이별하게 만드는 것은 / 균열이 아니라 위치의 변화다”라는 한글 자막이 달려 있었다. 이건 어디에 나오는 거죠? 나는 나일선에게 멘션을 보냈고, 알렉산더 클루게의 어제와의 작별 시작 부분입니다, 라는 친절한 답을 받았다. 그때 나는 비로소 며칠을 끌어오던 김쿠만 해설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마지막 단락은 이렇게 시작한다. “알렉산더 클루게의 영화 < 어제와의 이별 >(1966)은 “우리를 어제와 이별하게 만드는 것은 균열이 아니라 위치의 변화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그것이 김쿠만이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을 통해 하는 일이다…” 2) 메멘토 - 이번 ‘한영한사’는 시간에 대해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영화가 시간을 공간으로 바꾸는 픽션의 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시간이 없고, 가난한 사람이 돈을 생각하듯 내가 시간을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물론 돈도 생각하고… 그런 생각으로 트위터 타임라인을 보고 있는데, 내가 지난해 12월 4일에 ‘한영한사’ 업데이트 소식을 알리며 “쇼미는 끝났지만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한 것 같네요 이번 화에서는 자비스 코커와 토니 블레어와 노엘 갤러거와 벤앤제리가 혼톨로지 음악의 리듬에 맞춰 노래합니다 그래요 뮤지컬이죠”라고 쓴 트윗을 누군가 리트윗 했다는 알림이 떴다. 뜬금없이? 이 시대를 살아가며 SNS를 하는 다른 많은 작가들처럼 혹시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그게 지금 털린 건가? 벌벌 떨며 링크를 클릭해 ‘한영한사’ 9화를 읽었는데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나는 내가 이번 화에 쓰려던 모든 것을 그때 이미 써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론적으로 순수한 선행 기억상실’이라는 소제목을 붙인 단락을 나는 이렇게 쓰고 있었다. 모든 것은 시간 문제다. 요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원고를 마감하는 것도 시간 문제고, 밀린 책을 쓰는 것도 시간 문제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우리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돈? 물론 중요하지. 그렇지만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그러니까 시간이 있기만 하다면. 시간과 관련된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시간과 관련된 문제는 또 있다. 뭘 보고 듣고 읽고 생각하건 약간의 시간만 흘러도 까맣게 잊혀진다는 사실이다. 정지돈이 말하는 몇몇 고유명사들은 나도 익히 아는 것들이었다. 나는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축음기, 영화, 타자기]를 읽었을 뿐만 아니라 역자 유현주 선생을 모시고 출간 기념 북토크를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내용은 내개 전혀 새롭게 들렸다. 혼톨로지? 물론 알지. 사이먼 레이놀즈의 [레트로 마니아]와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물론 혼톨로지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책은 아니지만)을 두어 번은 읽었으니까.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도 읽었다. 반쯤. 나원영과 강덕구가 번역한 마크 피셔의 글들도 읽었고, 큰 상관은 없지만 베리얼의 첫 두 앨범을 최근 LP로 구입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것들은 내게 매번 새롭게만 느껴지는 걸까… 3) 긴 복도 그렇다면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새롭게 하자, 지금껏 내가 한 번도 가져오지 않았던 레퍼런스를 가져오자, 나는 생각했고 조너선 크레리의 [24/7 수면의 종말]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책이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책은 보이지 않았고, 책장 구석에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포털이 있는 건 아닌지 투덜거리면서 트위터 타임라인을 보고 있는데, 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과 e-flux가 연계 온라인 상영을 해서 정여름의 < 긴 복도 >를 볼 수 있다는 트윗이 올라왔다. 나는 링크를 따라 e-flux에서 <긴 복도>를 플레이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책들이 사라지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환상의 빛 김쿠만 해설, 나일선 해설, 한영한사, 그리고 정지돈 작가론까지… 4중의 마감에 시달리다 정지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내 전화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국 영화 속 싸대기 액션, 혹은 액션으로서의 싸대기에 대해서. 혹시 그건 제 싸대기를 때리고 싶다는 뜻인가요? 나는 묻지 않았다. 마감에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는 데 그중 하나는 크고작은 피해망상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지돈은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싸대기는 할리우드에는 없는 한국의 고유한 액션입니다. 그것의 목적은 단순히 상대를 제압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계도 나아가 계몽의 수단인 거죠. 정연씨, 모르시겠어요? 뺨을 맞으면 눈 앞에 빛이 번쩍하는 빛이 바로 계몽의 빛이라는 걸! 라이트 오브 엔라이트먼트(Light of enlightenment)! 과거에 싸대기는 부정적인 액션이었습니다. ‘아부지 뭐하시노?’라는 김광규의 대사, 그리고 이어지는 무자비한 싸대기를 떠올려보세요! 그때 싸대기는 권력의 부조리하고 억압적인 폭력을 상징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그것은 참교육이라는 이름의 사이다가 되어버렸죠. < 베테랑 >이 천만 관객을 넘은 건 황정민이 유아인의 뺨을 때리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장면에 아트박스 사장으로 나오는 마동석을 기억하세요. 황정민에게 바통을 이어받은 마동석이 싸대기 액션의 대명사가 되어 헐리우드까지 진출한다는 사실을요! -하지만 싸대기는 김치 싸대기 아닌가요? -뭐요? -김치 싸대기요. -그게 뭐죠? -김치 싸대기라고요 지돈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그러니까 미래는 드라마다. 정서경 작가가 각본을 쓴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티저 예고편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짧은 영상을 통해 내가 파악한 바로는 가난하지만 구김살 없이 살아보려는 세 자매 앞에 어느날 700억이 든 가방이 나타나고 가질 것인가 돌려줄 것인가 고민하는 사이 사건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게 된다는 내용인 것 같았다. 이건 드라마보다는 영화에 어울리는 시놉시스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던 기억도 난다. 그래서 의아하다기보다는 더욱 기대가 됐다. 지난 원고에서 정지돈은 맨날 보는 애들만 보면 뭐하냐, 안 볼 사람도 봐야 진짜 예술이지, 그래서 문학은 끝났고 영화는 아직 가능성이 있다, 라는 임재철 님의 말씀을 인용했다. 내 생각은 다르다. 기나긴 팬데믹을 거치며 영화 역시 이제는 보는 사람만 보는 매체가 되어 가고 있다. N차 관람러들 아니었으면 내 인생은 공허했을 거라는 박찬욱의 말을 떠올려보라. ‘그’ 박찬욱의 영화도 거듭 관람하는 팬들이 아니었으면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나만 해도 그렇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영화는 거의 보지 않지만, 올해 본 드라마만 해도 벌써 <스물다섯 스물하나>(마지막 두 편은 안 봄), <우리들의 블루스>, <나의 해방일지>, <우린폭망했다wecrashed> 그리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까지. 모두 더하면 영화를 최소한 40편은 볼 수 있었을 시간이다! 마담 보바리, 그것은 바로 나다, 라고 플로베르는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바로 대중이라고 말해야겠다. 지금보다 어리고 민감하던 시절엔 나도 내 취향이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안다. 내 취향은 정확히 대중적이라는 것을, 다만 남들보다 조금 느릴 뿐. 요즘 내가 즐겨 듣는 노래는 2010년대의 히트곡들이다. 정작 그때는 그게 히트했었는지도 몰랐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 마감 때문에 마음이 소금밭인데 홍대에 갔다.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진행하는 영화인 교육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오진우 평론가의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 특강. 길지 않은 특강이었지만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특히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을 직접 제작하는 사람으로서의 경험담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던 점이 특히 좋았다.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의 위상이 너무 애매해서 만들다 보면 차라리 글을 열심히 쓰거나, 영화를 만들거나, 유튜버가 되거나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같은 부분이… 한국의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의 역사와 현황을 일별하는 와중에 박유정의 <The Futures of Future 1>, 정여름의 <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 같은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 작품뿐 아니라 김병규 평론가 같은 분들이 [씨네21] 지면을 통해서 이미지들과 텍스트를 병치시키며 그 자체로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에 대한 스크립트가 될 수 있는 작업을 한 것들을 예로 들며 우리의 ‘한영한사’가 지나가듯 언급되기도 했다. “그리고 정지돈 작가와 금정연 작가가 연재하고 있는 ‘한국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이 있는데… 거의 유일하게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을 이야기하시는 분들이죠. 글쎄요, 영상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데, 뭐랄까, 영상화가 되기를 바라지만… 이루어지기는… (크흡) 모르겠습니다…” 오진우 평론가가 최근에 하고 있는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 작업도 잠깐 소개했는데, 매일매일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모은 <덧 없는 이미지들>(2022)도 그렇고 아이폰으로 직접 촬영한 영상만으로 만든 <영상자료원 가는 길>(2022)도 그렇고, 다른 영화의 장면들을 직접적인 재료로 하지 않는다는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이 글을 통해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엥? 어느 부분이? 라고 되물으신다면… 한국 영화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인용)을 하지 않는다는 부분이…? (*출처: 오진우 평론가의 블로그 https://blog.naver.com/jinu_montage/222855477268 )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지돈 씨에게, 우리가 통화한 게 화요일이던가요? 전화를 끊기 전에 제가 그랬죠. 지돈씨 걱정마세요, 10시까지 제가 김쿠만 해설 쓰고 아침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한영한사 원고 써서 보내드릴게요. 그러니까 와, 좋아요, 하더니 이렇게 물었잖아요. 근데 정연씨, 여태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어요? 그때도 말했지만 있습니다. 최소한 한 번은, 어쩌면 두 번쯤, 생각을 백 번 했다면 그중에서… 지금은 금요일 아침이고 저는 오늘도 밤을 꼬박 새고 말았네요. 그렇지만 김쿠만 원고에 이어 이렇게 한영한사 원고도 마감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제가 그랬잖아요. 저는 무척 대중적인 사람인데 단지 조금 느릴 뿐이라고. 원고도 마찬가지에요. 저는 마감을 칼 같이 지키는 사람입니다. 단지 조금 느릴 뿐이죠… 사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고 싶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지돈씨가 좋아하는, 그리고 저도 좋아하는 요아킴 트리에의 신작을 개봉하는 날이었거든요. 게다가 트위터를 보니(이번 원고에 트위터란 말이 몇 번이나 나오는지 정말 알고 싶지도 않네요) 아트나인 9관에서 8시에 영화를 관람하는 모든 관객들에게 <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 모자를 준다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무척이나 예쁜 초록색 모자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극장에 가지 않았어요. 그리고 이 원고를 썼죠. 결과적으로는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나일선 해설과 정지돈 작가론 두 개만 남았으니까요. 하하. 가끔은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누구도 잘못하진 않았어요. 저도 알아요. 제가 궁금한 건, 그렇다면 왜 저는 매일 이렇게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걸까요? 가끔은 정말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쓸데없는 말이 너무 길어졌네요. 하지만 너무 걱정마세요. 지돈씨 원고의 도입부는 벌써 생각해두었거든요.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에 붙인 나탈리 레제의 서문의 한 구절을 인용하려고 합니다. 이런 부분이에요. 바르트가 죽었을 때 그의 타자기 위에는 스탕달에 대해 진행하던 연구의 원고 한 장이 끼어 있었고, 그 제목은 "인간은 항상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데 실패한다......"였다. 이만 총총. (*출처: 그린나래 미디어 트위터 https://twitter.com/greennaraemovie )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 극장전 >(2005)은 타임라인의 재구성을 혼란에 빠트리는 홍상수 의 평판작들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선택적 경로의 내러티브를 보여준다. 서사는 두 개의 분리된 라인을 따르는데 플로팅은 그들을 교차커팅하지 않고 나란히 배열한다. 두 개의 내러티브 가닥은 서로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두 부분의 왜곡된 대칭은 추상적 사고를 독려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형식적으로 격정적이고 유머러스한 톤을 가진 이 영화는 젊은 청년의 이야기와 그의 이야기를 묵상하며 하루를 보내는 영화감독의 스토리를 병치시키는데 둘은 영화 속 영화, 내지는 영화에 대한 구조로 엮인다. 전상원(이기우)의 스토리 A와 김동수(김상경)를 주인공으로 한 스토리 B는 명확하게 규정된 대조 또는 편집된 병치 안에서가 아니라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서로를 가리킨다. 서로를 희롱하는 앞과 뒤를 쫓는 두 개의 단락의 잇는 것은 여주인공 최영실(엄지원)이다. 서사적으로 A와 B는 각자 생명이 위중한 영화감독 이형수가 만든 단편영화 스토리와 영화를 보고 나온 그의 후배 동수의 허허로운 여정으로 설정된다. 느슨한 구조는 캐릭터와 플롯에 새로운 차원을 덧붙일 뿐 아니라 두 단락의 절정부에 놓은 죽음의 그림자처럼 장난기가 묻은 거울구조가 작동한다. A에서 B로 이행하면서 인물들은 말과 제스처, 대사 또는 감정의 경련을 반복하거나 부인하면서 행위의 동기와 결정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조금씩 말해준다. ‘극장전’이라는 제목은 극장(영화)에 관한 이야기라는 표층적 의미의 단순함 아래 이 영화가 홍상수의 가장 급진적이고 복합적인, 전환기적 문제작 중 하나라는 사실을 숨긴다. 그의 초기작들과 구별되는 특성으로 거론되었던 줌과 보이스오버가 최초로 나타났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대다수의 장면 안에서 이 둘은 병합되어 등장한다. 이러한 계시적 형식을 초월하여 각 장면들은 활성화된 카메라 워킹을 구사한다. 한편으로 미장센은 바깥 이야기의 시선이라는 상대적인 외부성으로부터 뻣뻣하고 신속한 좁은 범위의 팬을 통해 신중한 프레임 구성과 분석적인 카메라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는 관계의 체계를 시각적으로 묘사하는 반면 빈번하고 폭력적이며 갑작스러운 줌의 확대/축소를 사용함으로써 보이스오버와 운을 맞춘다. 스타일의 변절이라는 의미에서 이러한 장치들을 만나는 것은 후속작들에서는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제까지 홍상수 영화의 엄격한 형식미에 비추어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전반부에 보이스오버의 상대적인 우위에도 불구하고, <극장전>의 라스트 신은 홍상수 영화에서 첫 번째로 나타난 논-디제틱(Non-Digetic) 보이스오버로 꼽을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 모든 여정을 마친 후 거리를 걷는 동수의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은 다음과 같다. ”인제 생각을 해야겠다. 정말 생각이 중요한 거 같애. 끝까지 생각하면 뭐든지 고칠 수 있어. 담배도 끊을 수 있어. 생각을 더 해야 돼.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죽지 않고 오래 살 수 있도록.” 이 장면의 재현 방식은 동수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스토리 세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다시 말해 인물의 실제 생각이 아니라 인물에 대한 하나의 메모로서 읽힌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동수의 보이스오버는 스토리 A에서 빈번하게 나타난 상원의 그것과 구별된다. “돌아다닐 맘이 꽉 차서 처음으로 돈을 막 쓸 생각이었다”거나 “괜히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 담배 한 갑을 샀다”는 말, “이러다 우리 사고내겠다”는 상원의 진술은 스토리 세계 안(단편영화)에 속한다. 이렇듯 영화에서 보이스오버란 작중 인물의 내면의 목소리로 개입하여 상황과 심리, 전개에 대한 기술(記述)로 쓰인다. 하지만 라스트 신에서 동수의 보이스오버는 내러티브 기능에 종사하거나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다. 허다한 디테일들이 축적된 이후에 그것의 중요성은 뚜렷해진다. 영화의 말미에 영실은 병원 앞에서 바로 전날 밤 차가운 섹스를 나눈 동수를 우연히 만난다. 이 장면에서 영실은 동수의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것은 관계를 계속할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탐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욕망 없는 섹스에 대한 씁쓰레한 기억을 털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인물들을 당혹과 무력, 환멸 속으로 밀어넣음으로써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일까? 홍상수는 관객들에 대한 대담한 믿음을 가지고 의미와 구조를 조립하는데 있어서 엄청나게 많은 책임을 그들에게 지운다. 그러나 텍스트의 요구를 만날 수 있는 관객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을 둘러싼 세계, 예술 그 자체를 바라보는 방식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이는 관습적인 영화가 결코 제공할 수 없는 형태의 보상으로 반복의 환영을 조성하는 전략에 의해 뒷받침된다. 위 의제와 관련하여 <극장전>에서 상호 반향하는 거울구조의 기하학적 형상은 음악적 단서에 의해 신호된다. 장엄하게 동수의 이어폰을 울리는 ‘라데츠키 행진곡’, 음주에 곁들인 채 영화의 안과 바깥을 타고 흐르는 노래들은 분리된 두 개의 스토리 주변을 감싼 압력을 형상화한다. 예를 들어보자. 스토리 A에서 영실과 상원이 저녁을 대신하여 호프집에 갔을 때 ‘다시 사랑한다면’이라는 대중가요가 흘러나온다. 공간의 배경을 장악한 반주는 후속하는 노래방 신으로 이어져 영실이 같은 노래를 부르도록 만든다. 스토리 B에서 ‘다시 사랑한다면’은 남산타워로 향하는 오르막길을 걷는 동수의 핸드폰에서 흘러나와 동수의 흥얼거림으로 연결되고 곧바로 지인들의 회합이 열리는 한식당 ’남문정‘의 노래방 기계 앞에서 영실이 부르는 노래로 이어진다. 일련의 노래의 흐름은 평행구조에 대한 홍상수의 독특한 접근 방식을 예시한다. <극장전>은 인간 지각의 본성, 반향효과 및 기타 영화적 전략을 통해 하나의 시청각적 기표가 동일한 방식으로 교호하는 평행주의(Parallelism)의 전통적인 구성을 문제화한다. 그의 내러티브 전략은 병렬성을 실제로 평행한 것으로 인식하여 관객들이 그 안에서 내포적 의미를 찾도록 하는 관습을 대담하게 파괴한다. 전체 구조 안에서 이러한 전개와 종결 방식은 탁월하게 작동한다. 대표적으로 “함께 죽자”는 말의 반복은 서사의 앞부분을 이루는 단편영화의 중심부에서 극중 상원의 대사로 등장한다. 그러나 삶이 예술을 모방한다고 단순하게 말하는 것을 넘어 이 이야기는 영화가 우리들의 정신의 근간이 되는 방식을 보여주려고 한다. 인물들의 불가사의한 열정은 종종 기이하고 기괴한 방식으로 영화와 뒤얽힌다. 이전에 홍상수 영화에서 나타난 적이 없었던 극적 줌인과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라는 단편영화의 형식적 스타일은 그와 평행하게 놓인 실재 부분에서 반복된다. 홍상수는 이러한 형식적 장치들이 영화 속 영화의 특징이라고 생각하도록 관객들을 현혹하고, 정적인 침묵의 영역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했을 때 이 기교들을 반복함으로써 사실과 허구 사이의 선을 흐린다. 여기에는 개별 영화(들) 사이의 반향도 존재한다. 일례로 롱테이크로 찍힌 떠들썩한 음주 장면들과 음주의 결과로서 이어지는 견실하고 정적인, 그러나 김빠진 섹스에 대한 묘사를 들 수 있다. 음주는 굴욕의 미장센을 이끌면서 개별 신 사이의 대결을 위한 촉매를 제공하고, 영화의 안과 바깥에서 서로를 마주보는 섹스 신은 미세한 차이를 두고 반복되는 카메라 셋업으로 찍혔다. 죽어가는 감독 이형수(김명수)의 영화와 홍상수의 영화를 구별하기 위해 가상과 실재를 거의 동일한 스타일로 촬영하기로 선택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솜씨 좋은 유희는 우리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든다. 함께한 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영실은 동수에게 “영화를 정말 잘못 보신 것 같아요”라고 일갈한다. 이 진술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스토리 안에서 실패한 관계의 반복을 완성한다. 반복되는 삶 속에서 어떻게 실패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런 류의 영화가 지닌 참된 가치가 한 번이 아니라 거듭하여 숙의할 때 드러나는 것처럼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그래서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으리라는 다짐이 필요하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