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컷 그녀의 금욕 폭발
- 감독
- 아사기리 키요시
- 제작년도
- 2022
- 출연
- 무카이 아이
지루한 영화를 보는 것만큼 우리를 소외시키는 경험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영화는 몰입감과 소외감을 동시에 느끼도록 함으로써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고, 길을 잃게도 하며, 끝내 좌절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혼란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두 가지 중 하나이다. 첫 번째 스토리를 해석하는 인지 활동에 몰두하는 것, 두 번째 혼란을 유발하는 퍼즐을 풀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혼란 자체를 경험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혼란에 투항할 때 발생하는 쾌감에 자신을 의탁하는 것이다. 혼란의 출구를 찾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일 것이나, 때로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해보는 것이 즐거움을 제공할 수도 있다. 방향감각의 상실은 모 아니면 도의 문제가 아니며, 우리가 어떤 종류의 혼란에 처해 있는지에 주목하는 것이 영화의 성취를 이해하는 데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해피엔드 >(1999)는 이와 같은 관람의 속성 안에서 혼란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엿보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외환위기가 조성한 환란의 무드 아래 실업과 파산, 자멸의 사연들이 곳곳에 넘쳐나고 세기말의 불확실성과 새로운 세기에 대한 불안이 교차하던 20세기 말 한국 사회의 공기를 배음으로 깔고 있다. 성별 위계질서의 변화, 여성 권리의 부상, 근대적 국가 정체성과 남성성에 대한 회의(懷疑), 가부장제의 위기 따위로 요약되는 당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징후들을 드러낸다. 영화의 도입부는 불륜과 추리, 애틋한 로맨스를 골자로 하는 대중 소설에 탐닉하는 남자 서민기(최민식)를 등장시켜 두 가지 중추적인 플롯 포인트를 설정한다. 플롯의 핵심을 이루는 사건은 민기의 부인인 최보라(전도연)와 그녀의 애인 김일범(주진모), 그리고 민기의 뿌리뽑힌 관계 사이에서 벌어진다. 민기는 (아마도) IMF의 여파 속에 실직한 뒤 딸을 돌보고 공원에서 소설을 읽는 한가로움에서 보람을 느끼는 전직 은행원이다. 민기의 아내 보라는 어학원을 운영하는 성공한 커리어우먼으로 군대에 징집되어 몇 년 전에 헤어진 전 남자친구 일범과 혼외관계에 빠져 있다. 처음에는 보라와 민기를 묶는 불운한 결혼을 제외하고는 인물들이 거의 교차하지 않는다. 보라와 일범은 열정적인 연애와 사진 촬영에 몰두하면서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민기는 자신의 도피처인 헌책방에서 매일 탐정 소설과 로맨스 소설을 읽는 것에서 성취감을 느낀다. 민기가 탐닉한 세계는 보라와 일범이 누리는 세계와 닮아있는데, 우리가 영화를 통해 전달받게 될 사연은 바로 이 두 장르(탐정 + 로맨스)를 결합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서로에게 매료된 불륜 커플이 섹스 이상의 것을 갈망하는 동안 민기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게 되면서 점진적으로 파국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간다. 조용한 탐정의 역할을 수행하던 민기가 평정심을 잃게 되는 이유는 보라가 일범을 만나기 위해 아이에게 수면제를 탄 우유를 먹였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이다. 민기의 상처 난 가부장의식이 발동하는 순간 살의도 피어난다. <해피엔드>의 전체적인 톤은 무기력하고 조용히 인간을 갉아먹는 메스꺼움 같은 불안, 때때로 폭발적인 폭력으로 표출되는 비극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극중 보라가 지저분한 일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전도연이 캐릭터에 부여한 감정적 깊이 때문에 우리는 그녀에게 동정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보라는 항상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민기는 금욕적이고 심지어 시들어있는 모습이다. 단란한 가족의 소중함을 알고 있지만 보라는 새로 찾은 사랑의 포로가 되었고, 일범은 두 번째 이별을 상상할 수 없다. 민기는 이미 파탄이 난 부부관계에 큰 미련이 없지만, 가정을 파괴할 생각이 없으며 보라가 가족의 안위를 해칠 행동을 했을 때 분노한다. 어떤 캐릭터도 완전히 잘못했다고 말할 수 없고, 그들의 행동이 완전히 정당화되지도 않는다. 모두 현실에서 벗어나 섹스와 혼외정사, 사진 또는 책을 통해 자신만의 위안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인물들이 거짓에 의존할 뿐 아니라 그들의 행동은 거짓에 의해 자극을 받는다. 하지만 환상(거짓)에 오래 빠져들수록 현실의 위기는 깊어진다. ‘거짓의 위기’를 통과하는 이 인물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해피엔드>는 어떤 의미에서 경제적 몰락이 결혼, 성 역할, 고용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사회적 논평이자 심리적 황폐화, 그리고 일부 관객들에게는 가슴 아픈 로맨스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야기이다. 이와 관련하여 보라가 떠다니는 풍등을 붙잡으려 애쓰는 <해피엔드>의 몽환적인 라스트 신은 주목할 만하다. 이 장면은 한국영화 사상 가장 아름답고 수수께끼 같은 결말 중 하나이다. 클라이맥스에서 엔딩으로 이어지는 20여 분의 시퀀스는 이전까지 느슨하게 얽혀 있던 서사의 실타래를 태피스트리로 묶어내려는 시도로부터 도리어 멀어진다. 이 신으로 넘어옿기 전 민기는 잔혹한 방식으로 보라를 살해했다. 이야기 안에서 처음으로 응집력 있는 흐름이 발생하고 가시적인 잔학 행위가 벌어지는 국면이다. 촘촘한 형식과 정서적 강렬함을 가진 이 영화의 모호한 결말 구조는 곱씹어볼 만한 여지를 남긴다. 이 혼란스러운 이중 결말은 먼저 민기가 보라를 살해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뒤에는 보라의 죽음을 의심하게 하는 호환되지 않는 결말이 이어진다. 혼란, 우발성, 자의성에 기초한 정지우의 영화를 돌이켜보면 이 이중 결말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연결고리를 미묘하게 도입하여 관객의 반응을 수정하게 만드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감독이다. 여기서 정지우는 실패한 관계의 잔해 위에서도 낙관적인 미래를 갈망하는 사람들에 관한 탁월한 미장센을 전개한다. 거울이 놓인 화장실에서 민기가 ‘장미빛 인생’이라고 적힌 성냥 케이스 안에 보관된 은반지를 변기 속에 던져버리고 폴라로이드 사진 안에서 행복하게 웃는 보라의 이미지에 불을 붙이는 순간, 녹아내리는 모양으로 타들어 가는 사진은 아파트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는 보라의 이미지로 오버랩된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보라의 시점으로 주황색 풍등이 바람이 실려 떠오르고 걸쇠에 잠시 걸려 보라의 눈앞에 머무르던 풍등이 다시 하늘로 솟아오른다. 손을 뻗어 그것을 잡으려는 보라의 제스쳐에도 불구하고 풍등은 잡히지 않는다. 이어지는 쇼트에서 온화한 햇살 아래 아이와 함께 잠들어있던 민기가 깨어난다. 보라는 그의 곁에 없는 것 같다. 민기는 보라를 살해한 것인가 또는 풍등을 잡으려는 보라의 애절한 몸짓은 민기의 꿈인가? 정지우는 확실히 혼란과 방향 감각의 상실에 관심이 있는 작가이다. < 사랑니 >(2005)와 < 모던 보이 >(2008), < 은교 >(2012)로 이어지는 필모그래피는 자의적이고 우발적인 사건들에 직면함으로써 방향 감각을 잃는 인간에 대한 탐구로 요약될 수 있다. <해피엔드>의 결말이 야기하는 혼란과 방향 감각 상실은 영화의 의미와 방법 모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일련의 신들의 교환은 현실과 바깥을 왕래하면서 이야기의 목표가 성취되었다는 안도감을 주지 않는다. 결과 없는 원인, 울림 없는 행동, 긴장의 끈이 풀려버리는 이 결론은 민기가 읽고 있는 소설과 비슷하다. 민기의 살인 행각과 소설은 모두 허구이지만 죽음은 실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가 그려내고자 하는 세계를 관객들이 모두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예술이 삶을 모방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개념을 가지고 노는 이 영화의 방식이다. <해피엔드>를 한국 사회가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남성의 불안과 폭력에 대한 비판적인 해부도를 제시한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정교한 카메라 워크와 편집은 여성 캐릭터가 다양한 비판적 관점을 대변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실, 진실과 허구가 뒤섞인 후기 자본주의 도식 아래서 곪아 터진 분노의 초상화를 통해 남성 관음증의 폭력성과 여성의 새로운 주체성에 대처하지 못하는 남성의 무능력을 그려낸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내러티브와 비유적 전략은 허구의 인물에게 우연적인 것이 반드시 관객에게 자의적인 것으로 경험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따라서 방향 감각 상실은 영화의 에너지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증폭시켜 우리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동하게 한다. 이보다 더 생산적인 활동이 있을까?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늑대-여자들 어떤 영화로 리뷰를 쓸까 고민하며 올해 뽑은 나의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를 한참 노려보다 특정 형상이 떠올랐다. 그건 세대도, 국적도, 상황도 다른 ‘늑대-여자’의 형상이었다. 무정부주의적 에코 페미니스트인 노년의 늑대-여자, 수의대 신입생 통과의례로 날고기를 먹은 후 낯설지만 강력한 자신의 힘을 지각하게 된 식인 늑대-여자, 돌연변이 유전자 실험으로 태어나 초능력을 지닌 십 대의 늑대-여자. < 스푸어 >(아크네츠카 홀란드, 2017)의 두셰이코, < 로우 >(줄리아 듀콜뉴, 2016)의 쥐스틴, < 로건 >(제임스 맨골드, 2017)의 로라가 바로 그들이다(늑대가 아닌 다른 동물로 더 확장해 논의하면 <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일디코 엔예디, 2017)의 주인공으로, 소 도축장 품질검사관이자 사슴이 된 마리어까지 포함할 수 있겠지만 지면의 한계 상 제외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종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이접, 혼종, 합종하며 인간성, 더 정확히는 자본주의적이고 가부장제 적이며 인간 중심적인 인간성에 실존적이고 윤리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인간은 이 상태로 존재해도 되는가?’이다. 그러나 두셰이코, 쥐스틴, 로라는 인간성을 질문하기 위해 인간 존재의 의미를 깊게 파고 들어가며 또다시 인간 중심성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방식을 비껴간다. 오히려 폭력적인 악당으로서의 인간은 캐리커처화되고 종을 횡단해 동물성을 탐험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그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본 동물성이 아니라 동물이 되어 감각하는 동물성이다. 인간은 그 스스로도 동물의 일부면서 특히 자신 내부의 야만성, 폭력성, 자기중심적 욕구충족, 비성찰성, 폐쇄성, 생존을 위한 이기심과 무한경쟁 등을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묘사하기 위해 ‘동물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왔다. 그러면서 인간을 동물에서 분리해 예외적 특권을 가진 존재로 가정한다. 이러한 위치선점은 인간의 지구 지배를 정당화하고 여타의 동물을 타자화한다. 그러나 < 스푸어 > < 로우 > < 로건 >의 늑대-여자들은 늑대와 혼종하며 동물성을 다르게 감각한다. 그녀들은 절대적 공감, 기존의 기표에 포섭되지 않는 소수자의 욕망, 경계와 고정관념을 흐리며 배치를 다르게 만드는 공동체, 자율과 야성성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소수자를 지지하는 연대를 특징으로 한다. 늑대-여자들은 아웃사이더이며 순응적이지 않고 폭력적이기도 하지만, 고립되지 않고 불가능할 것 같은 공동체를 형성한다. 때문에 ‘짐승 같은 야만성’을 강조하는 남성들의 영화가 늘 떼로 몰려다녀도 결국은 반복적으로 ‘고독한 늑대’로 결론 맺는 것과는 현격한 차이를 갖는다. 늑대-여자들이 주인공인 이 세 영화에서 기성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남성과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이기심에 반격하는, 그래서 살인과 식인도 서슴지 않는 동물성은 소수자의 욕망이다. 두셰이코Duszejko “블랙코미디 요소를 지닌 무정부주의적인 페미니스트의 범죄 이야기”라고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이 스스로 정의내린 이 영화는 리벤지 스릴러, 미스터리, 액션,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가 섞여 있어 때때로 영화가 덜컹거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 덜컹거림, 그 이종적이고 이질적인 것들의 혼종이 바로 이 영화의 주제이고 미학이며 즐거움이다. 그 혼종성은 이 영화의 포스터에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커다란 늑대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한쪽 눈은 인간의 눈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재미를 위해 잔인하게 동물을 사냥하고, 제도, 법, 종교가 그 폭력을 승인하는 사회(법은 계절별로 사냥 가능한 동물을 지정하고, 종교는 사냥꾼을 축복한다)에 두셰이코는 늑대가 되어 복수를 감행한다. 사냥꾼들은 단지 동물만 죽이지 않는다. 여성과 아이 등 사회의 소수자들에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고 폭력을 가한다. 즉 사냥은 인간의 동물성이 아니라 권력과 위계의 문제다. 서사적으로 보면 이 복수는 사계절에 걸쳐 일어난다. 대부분의 리벤지 스릴러는 최종 보스를 만나는 장면에서 가장 스펙터클하게 액션을 감행하며 억압되어 있던 분노를 터트리는 식으로 진행되지만, 이 영화는 반대다. 복수는 천천히 이뤄진다. 이러한 서사는 동물과 여성에게 가해왔던 폭력이 그만큼 길고, 오래, 일상적이고 체계적으로 지속되어왔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 폭력은 한 명의 남성 악당이 아니라 남성 중심 네트워크가 조직적이고 구조적으로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형식의 측면에서 보면 이 영화에서 동물을 보여주는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동물은 단순히 풍경이 되지 않는다. 총성이 울릴 때 동물들이 도망치는 인서트에서 흔들리는 카메라는 사냥하는 쪽의 액션이나 스릴이 아니라 도망치는 쪽의 위급함과 다급함을 재현하며, 살인현장에 나타난 늑대와 사슴들은 그들의 시점 쇼트를 갖는다. 그것은 쇼트와 역쇼트의 형식에서 비가시적이었던 시점이다. 동물의 시점 쇼트는 늑대가 되어 복수를 감행했던 두셰이코와 마찬가지로 관객들로 하여금 종을 가로질러 사슴이나 늑대가 되게 하고 그들의 정념을 감각하게 한다. 쥐스틴Justine < 로우 >는 장르적으로 < 캐리 >나 < 진저스냅 > 같은 공포영화의 전통에 닿아 있다. 이 공포영화들은 10대 중후반 소녀의 섹슈얼리티를 위험하고 비규범적인 것으로 규정하며, 그 은유로 주인공 여성이 초능력이나 이질적인 정체성을 지각하게 한다. <로우>는 이 서브 장르를 차용하면서도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혐오하는 클리셰를 반복하지 않고 가장 급진적인 페미니스트 정치학으로 향한다. 부모, 언니가 모두 수의사이고 엄격한 채식주의자이자 모범생으로 자랐던 쥐스틴은 수의대 신입생 통과의례로 강제로 토끼의 생간을 먹게 된다. 그녀가 경험한 수의학과는 동물을 존중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위계가 심한 남성 중심적인 문화로 가득한 곳이다. 여자들은 성적 희롱의 대상이 되고, 게이인 남성은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 와중에 이상한 허기 속에 쥐스틴은 날고기를 먹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충족감을 느낀다. 영화는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 사이의 경계와 금기를 거부하고 비체적인 피부 발진, 머리카락, 날고기, 물어뜯기, 오줌 싸기, 토하기 등을 보여주며, 여성의 몸에 대해 질문한다. 날씬한 몸을 위한 식이통제, 가랑이 털을 밀어버리는 비키니 왁싱(자매의 비키니 왁싱 장면은 공포영화사에 남을 명장면이다!)은 무엇을 위한 고통인가. 이것은 정말 인간적인가. 자신의 식인 욕망이 모계로부터 왔다는 것을 안 쥐스틴은 윤리적 선택에 직면한다. 엄마처럼 엄격한 채식주의자로 살 것인가, 언니처럼 자신의 욕망을 풀어놓고 사회의 심판을 받을 것인가. 그러나 부계 혈통의 < 늑대아이 >와는 달리 이 선택은 그렇게 깔끔하지 않다. 쥐스틴은 여성으로서 어떠한 곳에 맞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감정을 먼저 극복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식인 정체성뿐만 아니라 여성 정체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자신의 어두움이 어디서 오는지 알아야 윤리적 선택도 가능하다. 쥐스틴과 같은 젊은 여성이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할 때 느끼게 되는 일상적 폭력, 불쾌함, 분노는 잔인한 유머와 함께 클로즈업과 롱테이크, 촬영 속도를 변화시키며 흐르는 듯한 움직임과 거리를 둔 으스스한 금욕적 설정 쇼트를 오가는 카메라를 통해 우아하게 구현된다. 로라Laura 전통적인 남성 장르로 여겨졌던 서부극과 슈퍼 영웅 액션의 혼종인 < 로건 >은 고독한 ‘늑대-남자’의 죽음이자 새로운 종(트렌시젠) ‘늑대-여자’의 시작을 그린다. 이 영화에서 로라를 비롯해 실험실에서 태어난 뮤턴트 아이들은 위의 두 영화에 등장한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 우리에 갇혔다. 이제 늙고 병든 울버린보다 힘이 센 로라는 포스트페미니즘 시대에 걸 파워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아빠 딸 Daddy’s Girl‘이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을 유지할 수 없는 남성들은 딸들의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그들이 자신의 힘을 여전히 확인하는 방식은 그 딸의 힘이 엄마가 아닌 자신에게서 왔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로건>이 흥미로운 슈퍼 영웅 액션 영화인 것은 거기서 더 나아간다는 것이다. 로라는 울버린이 포기하고 프로페서 엑스가 망쳐버린 뮤턴트 공동체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는다. 여전히 ‘고독한 늑대’로 서부극의 남성 멜로드라마를 만드는 울버린과 달리, 그의 죽음 후 로라는 다른 뮤턴트 아이들을 이끌고 함께 떠난다. 모가장의 공동체를 이루었던 두셰이코,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법을 고민하는 쥐스틴, 억압받는 이들의 공동체를 재건하는 로라, 늑대-여자들은 홀로 떠나지 않는다. 모계를 강조하고 부계와의 단절을 말하는 이 영화들은 사실 세 세대의 페미니즘을 명시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60대 여성인 두셰이코의 페미니즘은 급진적 변화를 원했던, 즉 혁명적 비전을 가졌던 이들의 것이다. 그녀들은 기성 시스템을 말 그대로 꺼버리고 무정부주의적 혁명을 원한다. 세계는 다시 변화할 것이고 새로운 사이클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것을 기다린다. 그래서 < 스푸어 >에서 모든 버려지고 배제된 존재들이 모여 있는 환상적인 공동체는 사적인 소망성취라기보다는 아직 오지 않은 현재다. 쥐스틴의 페미니즘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몸이 고정관념과 편견 속에서 얼마나 억압되고 비인간적으로 통제되고 있는지를 비판하는 2세대 페미니즘의 전통에 있다. 가부장제, 규범성으로부터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해방시키는 것은 여성들에게 엄청난 힘을 돌려줄 것이다. 로라는 여성 또한 강한 힘을 갖고 리더가 될 수 있다고 보는 포스트페미니즘의 걸파워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거침이 없으며 타고난 재능과 힘을 주저하지 않고 발휘한다. 이 세 세대의 페미니즘은 연대기적이지 않다. 이 다양한 페미니즘은 소위 ‘페미니즘 리부트’ 속에서 함께 공존한다. 공통적으로 이들은 동물 종을 가로지르며 그동안의 인간성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되어 왔는지를 비판한다. 또한 부계의 전통하에 있던 장르들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모계화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전히 폭력과 살인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소수자의 욕망을 위해 사용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영화 < 꽃섬 >이 불러일으키는 환각은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판타지가 아니다. 그래서 더 특별하다. 이 이야기는 사실임직함(vraisemblance)의 원칙을 어기는 로마네스크의 진실에 가깝고, 그리하여 내면을 되돌아보게 한다. 2001년 처음 이 작품을 접했을 때 ‘작가영화’란 단어를 떠올렸다. 확실히 <꽃섬>은 상업영화의 반대지점에서, 엘리트적이고 까다로운 예술영화의 취향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하지만 15년 후 다시 보니 ‘문학적 해석의 뉘앙스’가 풍부하다는 점이 돋보인다. 두 종류의 화면이 교차되는 까닭에 이미지는 지속적으로 파편화되고, 장르적 기대치는 엇갈린다. 로드무비의 요소를 갖추었지만 ‘자동차’ 혹은 ‘도로’가 상징하는 개인의 자유가 이곳에는 없다. 지도상의 남해는 공식적 지명일 뿐, 그곳에 가는 방법은 소개되지 않는다. 꽃섬 역시 짐작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지형뿐 아니라 개별 요소도 마찬가지다. 마치 호러영화 장면처럼 칼을 꺼내 든 운전사는 극적 소명을 다 하자 북쪽으로 사라지고, 산속에서 만난 노인은 여인을 치료해준 뒤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요컨대 이 극에서 악의, 혹은 선의에 대한 되갚음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사건이나 목표가 존재하고, 이를 되돌리기보다 ‘운명성’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꽃섬>은 지독히 금욕적인 영화다. 이 작품이 지닌 고아한 아름다움의 비밀은 실상 이 고행적인 성격으로부터 나온다. 2000년 초반의 한국영화의 환상성은 ‘현실’과의 관계 맺음을 통해 자신을 조율했다. 비슷한 시기 나온 < 동감 >(2000)이나 < 시월애 >(2000), < 번지점프를 하다 >(2000)와 < 소름 >(2001) 등과 비교해도 그렇다. < 꽃섬 >의 이야기는 불합리한 상황을 출현시키기 위해 현실적 전제, 또는 비정상적인 것의 토대가 되는 정상적 범주를 소개한다. 공포의 효과를 직접 드러내는 것보다, 이처럼 노스텔지어적 개별 과거가 재현될 때 극은 더 진실해진다. 더불어 의사 현실(pseudoreal)의 경향은 관객에게 실재의 이미지가 아닌, 현실감각에 바탕을 둔 아날로그적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만든다. 현실 유리적인 상황이 스크린의 유토피아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바깥 현실이 방해하더라도, 내적 상상력은 커질 것이다. 인물들은 멈추지 않고 꽃섬으로 나아가고, 그곳에 도달하더라도 정말 도달했다고 단언할 수 없게 된다. 테오도르 모노의 말처럼 ‘유토피아’는 실현 불가능하지 않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허상의 장소이다. 마찬가지로 꽃섬에서 인물들의 불행은 사라지지 않는다.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고, 현실은 여전히 그로테스크하다. 어쩌면 영화의 감동은 이 현실과 비현실의 균형 감각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장르 혹은 미학적 측면이 아닌, 내면의 초자연적 경험을 통해 영화는 ‘시간의 일탈’을 완성한다. 결정적 사건의 부재에서 시작된 시간의 상쇄는, 디지털 이미지의 콜라주를 통해 조합된다. 혜나의 손에 들린 디지털카메라가 그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한때 어느 것보다 무거웠지만 이제는 한 인물의 머리보다 작은 뉴미디어의 등장,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의 머릿속에 미래가 반사된다. 무언가가 분명히 사라질 것이란 불안감이 정서를 장악한다. 노스텔지어란 모름지기 새롭게 만나게 되는 것을 볼 때 발생하는 감정의 추락이다. 이처럼 불시에 출현하는 디스트락시옹의 테마가 < 꽃섬 >의 패치워크를 완성하는 동력이 된다. 다시 말해 이 영화의 로드무비적 동력은 자동차의 모터가 아니라, 사라짐의 미학이다. 쇠락의 아름다움을 통해, 35mm 은판 영화술을 대체할 ‘디지털 시네마’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면 너무 과장된 비유가 될까. 다시 보니 송일곤 의 < 꽃섬 >은 ‘영화감독의 영화’라는 작가적 인상보다, 상징적 뉘앙스가 가득한 시에 더 가깝다. 한때 ‘폐기된 무언가’였던 인물들이 ‘폐기될 무언가’로서 아날로그 필름을 직시하고 있다. 마치 고다르의 현대영화가 지닌 리리시즘을 2000년대 초반의 송일곤은 추종했던 듯 보인다. 하지만 이 과도한 서정성의 위험에서 연출자는 끝내 자신을 보호한다. 현기증의 연속인 내면의 시간은 현실과 어우러진 설득력을 얻고자 타협한다. 극 중반을 스쳐 지나간 다양한 에피소드들은 결단코 전체의 하모니를 부수거나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다만 더 나은 것을 향한 기다림으로 포장될 뿐이다. 기다림이야 늘 좌절되는 것이니 실망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과거로의 함정이 <꽃섬>의 성공 전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