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의 고심
- 감독
- 김도산
- 제작년도
- 1919
- 출연
- 김도산, 신극좌일행
<단성사> 올해는 한국영화 100주년의 해다.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김도산 이 연출한 연쇄극 < 의리적 구토 > 이후 1세기, 한국영화는 100년을 살았다. 올해 한국영화계는 그 세월을 기념하는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많은 영화제에서 100주년을 기념하는 섹션을 만들었고, 학계와 관련 기관에서 학술 작업이 이뤄졌다. 그 중심은 한국영화1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로, 10월 27일 ‘영화의 날’에 포커스를 맞춰 여러 사업과 학술 행사와 공연을 준비했다. 100명의 감독이 100초의 러닝타임으로 단편영화를 제작했으며, ‘한국영화 100장면’을 담은 책자도 발간되었다. 타임캡슐 이벤트, 영화인과 대중의 만남, 관련 전시 등도 있었다. 풍성했다. 하지만 하나가 빠졌다. 100년이라는 역사는 있건만, 그 역사를 담은 책은 없다. 한국영화 100장면에 대한 책이 나온다고 하지만, 그건 여러 필자들의 조각 글을 모은 것일 뿐이다. 역사가의 관점이 투영된, 한 세기의 우리 영화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한 책은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이하는 2019년에 나오지 않는다. 기술되지 않은 역사를 역사라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겐 물리적으로 100주년이 왔을 뿐, 역사적으로 100년이 정리된 것은 아니다. 물론 한국영화사를 다룬 책은 종종 나왔다. 여러 필자들의 논문을 모은 전문서나 사실 나열 중심의 연보 스타일 서적이 있었고, 핵심을 간추린 소책자 형식도 있었다. 하지만 한 명의 역사가가 자신이 선택한 자료와 방법론과 관점을 통해 만든, 이른바 ‘통사’는 한국영화사를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이 시점에 나오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런 책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50년 전인 1969년, 지금은 세상을 떠난 이영일 선생이 <한국영화전사>를 내놓았다. 반 세기 한국영화에 대한 통사인 이 책은, 내가 접한 유일한 ‘제대로 된’ 한국영화 통사 서적이다. 여기서 ‘제대로’라는 건 저술 자체의 퀄리티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이 책을 쓸 당시 선생의 나이가 30대 중반 정도였고 전범으로 삼을 만한 선행된 작업도 없었으니, 꽤 두툼한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젊은 영화사가는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덤벼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통해 한국영화 50년은 비로소 역사가 되었다. <한국영화전사>가 나온 지 50년이 흘렀다. 그 50년 동안 그 누구도 통사다운 통사를 쓰지 않았고, 이제 100주년을 맞이했다. 이번 기념사업을 제대로 의미 있게 하려고 했다면, 공모를 통해 몇 년 전부터 뜻 있는 연구자를 선정해 지원하고 올해 그 성과물을 내놓아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업회는 부랴부랴 꾸려졌고, 그런 비전을 품기엔 시간이 너무 없었다. 적잖은 영화제와 저널과 기관에서 100주년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특별전을 하고 리스트를 뽑을 뿐이다. 조금은 아이러니다. 한국영화가 100년이 되었다는데, 우린 그 100년의 정체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 그저 몇 편의 영화 제목과 감독과 배우의 이름이 환기될 뿐이다. 바란다면, 한국영화 100주년이 한국영화 역사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 서술의 계기라도 되었으면 한다. 특정 시기를 다룬 시대사나 배우나 정책 같은 특정 테마에 관한 개별사, 혹은 감독과 배우에 대해 계보를 그린 책들은 있었고 그 성과들도 꽤 된다. 이젠 그런 연구 성과들을 토대로, 다수의 연구자들이 각자의 시점을 견지하며 이영일 선생이 채우지 못한 50년을 아우른 한국영화사를 정리할 때가 왔다. 여기엔 지구력 있는 공적 자금의 지원이 필요하고, 어떤 사명감을 지닌 영화사가가 필요하며, 그들에겐 자유롭게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좀 더 바란다면, 조금은 개성 있는 통사가 나왔으면 한다. 지금까지 한국영화사가 몇몇 남성 작가 감독들을 만신전에 봉헌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면, 이젠 그들을 조금은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도 있겠다. 역사적 사실 나열이 아닌, 당대의 문화적 맥락이 반영된 해석 중심의 영화사도 있었으면 좋겠다. 장르나 산업 같은 키워드를 중심으로 100년을 재해석한 작업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본다. 1세기를 맞이한 한국영화. 올해 화려한 이벤트 이후엔 ‘비로소’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지난 5월, < 기생충 >(2019)으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한 봉준호 감독은 수상 소감에서 “한국영화 100주년에 주는 선물”이라고 말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이었다. 그 의도가 한국영화(사)를 알리기 위함이든 아니든, 봉 감독 덕분에 대중은 한국영화가 100주년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는 “< 하녀 >( 김기영 , 1960)를 보면서 계단의 이미지와 기운을 얻었다”고 밝힘으로써 한국 고전영화에 많은 애정과 깊은 의미를 부여했다. 사실 이 칼럼을 쓰게 된 것 역시 모두 봉 감독의 발언 덕분이다. 순전히 그의 주장에 힘을 얻었다. 많은 이들이 <기생충>이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놓고 있으니, 필자 역시 숟가락을 딱 한 번만 올리겠다. (감독님, 리스펙트!) <하녀> <기생충>의 수상과 함께 한국영화 성장이나 국내 관객 ‘2억명 시대’ 등이 언론에서 많이 다뤄졌지만, 정작 우리가 ‘한국영화 100주년’을 어떻게 맞이할 지는 이야기하고 있지 못하다. 영화진흥위원회와 한국영화1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이미 4월 한국영화 100년 기념사업을 구체적으로 발표한 바 있다. 100주년 옴니버스 영화, 다큐멘터리 제작, 단행본 출판(한국영화 100년 100경(가제)) 및 한국영화의 디지털 복원화 등이 주요 골자다. 단성사에서 1919년 10월 27일 상영된 < 의리적 구토 >( 김도산 )를 한국영화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으니, 10월이 다가오면 본격적으로 100주년 관련한 축제의 장이 열릴 것이다. 하지만 과연 100주년 행사가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줄 수 있을까? 혹은 이 축제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새롭게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기우(!)에 사로잡힌다. <아리랑> 최초의 한국영화나 전설의 영화 < 아리랑 >( 나운규 , 1926)을 볼 수 없고, 그 영화들을 상영한 단성사 역시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개인적으로 장훈 감독의 < 택시운전사 >(2017)를 봤을 때 초반부부터 마음이 아팠다. 지난 세기를 같이 한 을지로의 국도극장이 현실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라진 극장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더욱이 한때 영화의 메카로 불리던 충무로는 이미 노쇠해진 지 오래다. 휴대전화로 간편하게 예매를 할 수 없던 시절, 임권택 감독의 < 서편제 >(1993)를 보기 위해 아침부터 단성사에 줄을 서는 놀라운 광경은 이제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어떤 영화를 특정 상영관에서 봤다는 식의 기억이나 그 극장에서만의 느낌이나 정서(심지어 <기생충>이 일깨운 냄새까지) 등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획일화된 멀티플렉스의 시대에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다소 사적인 체험인 것이다. 그래서 일까? 100년이라는 굳건한 영화의 역사를 현실의 대기 속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불안감을 숨길 수 없다. <서편제> 봉 감독이 이른바 ‘계단 시네마’라고 얘기한 대로, 가족이 중심이 된 한국영화 안에는 계단이 등장하는 영화가 많았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 이만희 감독의 < 마의 계단 >(1964)부터 손재곤 감독의 < 이층의 악당 >(2010)과 <기생충>까지. 개인적으로 <이층의 악당>을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이 영화가 신상옥 감독의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61)의 유머러스한 패러디이자 중요 공간인 계단이 나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층의 악당>이나 <기생충>을 본다는 것은 한국영화의 역사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밖에 없는 과정이다.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다. 오래 전에 1960년대 한국영화를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을 굳이 의식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고 살아간 것이다. 물론 아주 쉽게 말하면, 그 영화들에 대한 기억, 추억, 향수가 우리에게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지극히 당연한 주장이지만,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이하는 첫 단추는 한국영화사를 이해하고, 한국 고전영화를 보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만약 내 안에 한국영화의 옛 숨결이 살아 있다면 다시 일깨워야 한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굳이 한국영화를 방화(邦畵)라고 부르며 상대적으로 폄하하던 시기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시네필이라고 자처하는 젊은 영화광조차 한국영화의 역사(1950, 60년대 전성기)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하다. 한국영화의 클래식이나 정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그런 영화가 없어서가 아니라 안타깝게도 대중이 옛 한국영화에 대해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6월에는 서울극장에서 ‘한국영화100주년 특별전, 합동영화사와 함께’,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세계 속의 한국영화, 한국 안의 세계영화’ 프로그램 등이 진행되었다. 성과를 떠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전영화 프로그램들이 일반 대중과의 접점을 찾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오늘날 한국 고전영화를 보기 위해선 누구나 한 번쯤 한국영상자료원(여기서 다양한 세대가 고전영화를 함께 경험하는 것은 지극히 소중하다)과 사랑에 빠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한국영화에 대한 기억, 경험 등을 너무 빨리 잊은(혹은 잃어버린) 지도 모른다. 100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영화산업과 영화인들의 의미를 되살리는 것은 중요하지만, 한국영화가 항상 대중과 함께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대중이 함께 그 시대의 기억을 공유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하루아침에 문화 이식이나 학습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단성사도, 국도극장도 없지만, 영화(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재 한국 고전영화의 디지털 복원이 무척 시급한 상황이고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역시 관객이 고전영화를 즐기고 더 많은 영화를 요구하는 지지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100년을 맞이한 한국영화의 미래를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은, 고전영화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지금의 세대에게 선물하는 것이다. 그것이 100세를 맞이한 한국영화를 위한 화답이다.
해방 후 영화인들은 재빠르게 변신했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 군용열차 >(1938)를 시작으로 조선 영화계는 친일 국책영화의 시대로 선회하였고, < 아리랑 >(1926) 이후 짧은 기간 애써왔던 민족문화로서의 ‘조선영화’ 활동은 수명을 다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어느 날 해방이 되었다. 해방 후부터 전쟁 전까지를 일컫는 해방기에 영화인들은 해방을 기뻐하는 항일영화, 나라의 재건을 독려하는 계몽영화, 독립지사들을 기리는 전기영화를 재빨리 만들었다. 그리고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후에는 사상적 갈등을 그리는 반공영화가 추가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조선(한국)영화는 어떠해야 하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두고 영화인들 사이에 활발한 담론이 전개되었다. 이들은 조선영화는 ‘민족문화를 담은 계몽영화’이어야 한다는 점에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신생 국가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민족적 로컬 컬러를 담은 계몽적인 예술영화를 만들어 내기 위한 염원으로 활동에 매진한다. 그즈음 만들어진 영화가 < 해연 >(1948)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3개월 후 일취월장한 작품이 나왔는데, 그 작품이 바로 1949년 2월에 개봉한 < 마음의 고향 >이다. 이 영화는 극작가 함세덕 이 1939년에 쓴 희곡 「동승」을 각색한 작품으로 많은 비평가들이 입을 모아 “해방 후 조선영화 최고봉의 신기록을 지은 수작”이라고 평가했다. 그런 만큼 물자와 인력이 부족한 해방기 영화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영화적 구성과 만듦새가 탄탄하다.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조선영화를 지키고자 했던 영화인들의 역량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영화는 조선영화에 의례적으로 따라오는 신파성을 배제하려 하고, 모정을 그리워하는 소년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세계를 서정적인 감각으로 구현한다. 극적인 서사 진행을 위한 억지스러움에 가까운 우연성이 있지만, 이는 당시 영화적 수준을 고려해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다. 당시 필름 공급원이 일정치 않아 코닥, 후지, 아그파 등 쪼가리 네가 필름으로 촬영하여 완성된 작품의 화질이 고르지 않은 문제가 있지만, 이 영화를 제작하고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이강수가 1993년 세상에 내놓은 < 마음의 고향 >의 16mm 필름은 해방기에 제작된 68편의 영화 중 현재 남아있는 7편 중 한 편이며,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선물이다. 이 작품은 종로3가에 위치했던, 지금은 사라진 수도극장에서 개봉돼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절간에 버려진 12살 소년 도성은 친어머니가 언젠가는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이라는 희망으로 주지 스님과 젊은 스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도성은 어느 날 자식을 잃고 공양을 드리기 위해 절로 온 젊은 미망인 서울 아씨를 보고 마음을 빼앗긴다. 도성이 서울 아씨와 가까워지기 위해 애쓰는 에피소드들은 연인들의 줄다리기처럼 애틋하면서도 흐뭇하게 전개되며 영화에 골고루 잘 스며들어있는 희로애락은 보편적인 인간적 감정에 호소한다. 영화에는 떠나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슬픔, 아씨와 도성이 새롭게 맺는 따스한 정, 아씨의 수양아들로 가게 된다는 기쁨, 그리고 주지 스님의 노여움으로 인한 파국 등이 여러 차례 서사의 굴곡과 함께 펼쳐진다. 유력가 집안의 서울아씨가 새의 깃털로 만든 부채를 늘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힘으로 부채를 만들어 선물하고픈 도성의 천진함은 결국 살생을 저지르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에 노한 주지 스님은 도성의 입양을 취소하고 절에서 죄를 씻도록 한다. 이 사건을 겪으며 훌쩍 성장한 도성은 봇짐을 메고 홀로 절을 떠나 속세로 내려가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친어머니를 찾기 위해 산 아래로 떠나는 도성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하며 그의 뒷모습은 한결 가볍다. 도성의 바람이 좌절로 바뀌며 한없이 슬퍼지던 영화 전개는 마지막에 작은 반전으로 기쁨을 준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역동적인 촬영이 전개되어 놀라움을 주며, 서사는 극적인 구성을 갖추고 있고, 친어머니 존재에 대한 제한된 정보는 미스터리한 분위기까지 만들어낸다. 서울로 떠나는 날 친어머니가 등장하는 다소 억지스러운 우연한 사건이 있지만, 우연과 과잉의 신파성이 특징인 당시 여느 영화들과 달리 절제된 감정과 상징적 장면들, 복선과 반전이 있는 효과적인 영화적 묘사로 영화는 한층 격조 있게 보인다. 또한 해방 후 자유를 향하는 개인들의 집단적 갈망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압축적으로 담긴다. 이 영화를 연출한 이는 윤용규 감독으로 1913년 대구 출생이며 일본 도호영화사에서 연출과 이론을 공부하고 돌아온 유학파이다. 그는 이 영화로 데뷔했고, 크게 호평받았지만 한국전쟁 전 월북하였으며, 북한에서 감독 및 배우로 활동하며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롱쇼트에서 산사를 트래킹으로 훑는 역동적인 장면과 도성이 꾸는 꿈과 현실의 유연한 연결, 뛰어가는 그를 따라가는 카메라의 움직임 등 촬영이 돋보이는데, 촬영감독은 다름 아닌 훗날 < 자유부인 >(1956)으로 흥행감독의 반열에 올라선 한형모 이다. 서울 아씨를 연기하는 이는 전쟁 후 최고 스타가 된 최은희 인데, 이 영화에서 20대 초반의 젊고 풋풋한 데뷔 초기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새로운 맹서 >(1947)로 데뷔한 최은희는 < 마음의 고향 >을 통해 확실한 주연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도성을 따뜻하게 감싸는 은은한 정을 발휘하는 그녀의 단아한 모습은 단연 한눈에 들어온다. 섬세한 내면 표현과 절제 있는 대사 전단력은 훗날 < 동심초 >(1959),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61) 등을 거치며 기품 있는 한국적 여인상으로 자리매김하는 근원이 되었다. 서울 아씨의 어머니를 연기하는 석금성도 일제강점기 영화계를 호령한 배우인데, 기생 출신으로 카프 영화에도 다수 출연하였다.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인 작가이자 연극인 최승일이 그녀의 남편이다. 석금성 은 남편과 달리 월북하지 않고, < 춘향전 >(1955), < 삼등과장 >(1961), < 김약국의 딸들 >(1963) 등 전후 영화에서 연기파 성격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진다. 주지 스님을 연기하는 변기종 은 김도산 의 신극좌 소속으로 젊은 시절부터 노역 연기를 전문적으로 해온 연극인인데, <마음의 고향>으로 영화에 데뷔하였다. 첫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노련한 연기자이기에 카리스마 있는 강한 연기가 빛을 한껏 발한다. 친어머니를 연기한 김선영은 해방 전후 신극무대의 대표 배우로 활약하다가 전쟁 중 월북하여 북한에서 인민배우 칭호를 받을 정도의 최고 배우가 되었다. 이후 이 영화는 두 차례 리메이크되었다. 2002년 주경중 감독의 < 동승 >과 2014년 박영철 감독의 < 내 마음의 고향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