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
- 감독
- 김상현
- 제작년도
- 2021
- 출연
- 이지영
< 우리 손자 베스트 >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리는 것 같다. 대체로 평단에서 나온 호평들은 그간 한국영화가 깊게 들여다본 적 없던 일베와 어버이연합을 전면화하고 있다는 점을 거론한다. 반면 일부 SNS를 통해 짐작되는 일반 관객들의 혹평은 주로 이 영화의 거친 만듦새와 다루는 대상들, 특히 여성 인물들에 대한 남성 인물들의, 나아가 영화의 왜곡된 시선을 문제 삼는다. 한쪽은 영화 안의 폭력적 상황들을 ‘헬조선’의 괴물성에 대한 구체적 진단으로 인식하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영화 자체의 위험한 태도와 등치 시키고 있다. 전자는 이 영화의 내용적 시의성을, 후자는 형식적 결함을 지적한다. 나는 이 영화를 지지한다. 하지만 그 이유가 이러한 두 개의 주장들 중 어느 하나에 찬성하고 다른 하나에 반대해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내게 이 둘은 상이한 맥락과 입장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성과와 한계를 모두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로 소화하고 있고, <우리 손자 베스트>가 우리에게 안기는 일련의 당혹감을 단순화된 논리로 압축해버린다는 의미에서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영화의 소용돌이 안으로 들어가길 망설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에 대한 반문을 안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우리 손자 베스트>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토를 초과하는 곳에서 활동하는 세계다. 이 영화를 움직이는 괴이한 혼종성과 불균질한 층위들과 위태로운 리듬에 닿기 위해 지금부터 나는 위와는 좀 다른 길을 상상해보려고 한다. < 우리 손자 베스트 >를 보는 내내 우리를 따라다니며 혼란하게 만드는 물음이 있을 것이다. 가해자의 서사를 만든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의 서사를 경험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가해자의 서사를 구축하면서 영화가 그것과 완전히 거리를 두는 일은 가능할까. 그 거리는 어떻게 생길까. 그 거리는 착각일까. 더욱이 가해자의 행위를 사회 구조적인 차원 안에서 설명할 의지가 별로 없어 보이는 이와 같은 영화 앞에서라면 더욱 난감해진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는 우리를 안도하게 할 만한 일관된 가치판단의 기준 같은 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요컨대, 영화의 시선은 인물들을 체제의 피해자로 이해하려는 쪽에 가까운가, 공모자로 공격하는 쪽에 무게를 두는가). 시선은 모호하고 서사에는 도덕의 자리가 없다. <우리 손자 베스트>를 지속시키는 유일한 영화적 윤리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추하고 부패한 세계를 비판적으로 판단하고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그 추하고 부패한 세계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영화의 몸을 맡기는 행위와 관련된다. 그러니까 대상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대상과의 유희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가 경험하는 이상하고 당황스러우며 종종 불쾌한 기분은 어쩌면 당연한 감정인 셈이다. 혐오의 언어들, 혐오의 행위들과 유희라니, 이 영화는 결국 혐오의 운동에 동조하고 있을 뿐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인가. 언뜻 그럴듯해 보이는 반문이지만, 이 영화를 지탱하는 유희의 활동은 그런 반문에 무너질 만큼 단순한 차원의 것이 아니다. < 우리 손자 베스트 >의 관심은 일베와 어버이연합을 즉각적으로 상기시키는 두 인물의 심리를 분석하는 데 있지 않다. 이것은 세계와 충돌하는 병적인 인간존재를 궁금해하거나 그들의 비뚤어진 행위를 관음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것은 ‘말’에 대한 영화다. 이 영화의 혼종성은 인물들의 신념을 체화한 말의 내용이 그 저열함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거름 장치 없이 영화적으로 나열되는 데서 비롯된다기보다는, 수많은 층위에 놓인 말들의 비일관되고 교란된 움직임들이 물질화되는 데서 비롯된다. 이 영화는 인물들이 아니라, 말의 움직임과 도발적이고 공격적으로 유희한다. 영화의 도입부, ‘너나나나베스트’ 회원인 교환(구교환)은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던 중,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주시하던 동영상을 훔쳐본다. 그것은 경찰이 물대포로 시위대를 진압하는 영상인데, 교환은 먹잇감을 발견한 듯, 자신이 하던 게임 속 성우의 목소리를 조작해서 그 영상에 입힌다. 영화는 단지 교환의 그러한 행동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렇게 희화화된 영상을 우리로 하여금 큰 화면으로 다시 마주하게 만든다. 이 장면은 불편하다. 처절한 시위의 현장을 간교한 편집으로 농락한 교환의 행동을 보는 일도 힘들지만,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그 영상이 우리에게 특정 사건을 연상시키는 실제의 기록이라는 점, 무엇보다 가공된 게임의 세계를 지배하던 전능한 목소리가 그 참혹한 기록을 한순간 인공적인 이미지로 돌변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사실을 지시하지 않는, 아니, 사실 자체에 완전히 무감한 텅 빈말의 선정적인 힘이 여기,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장면에, 이 영화를 관통하는 논쟁적인 질문이 있고 이제 우리는 그 질문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 우리 손자 베스트 >는 사실(교환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팩트’다. 물론 그가 사용하는 ‘팩트’라는 단어는 팩트와 가장 먼 자리에 있다)의 진위를 탐구하고 밝히려는 영화가 아니라 말의 저 위태로운 활동을 보려는 영화다. 팩트에 조응하거나 팩트를 지시하고 설명하는 말의 기능이 아니라, 팩트를 진공상태에 두고서도 전혀 균열되지 않는 말의 뻔뻔한 표면, 말의 경박한 생동감을 따라가 보는 것이다. 그 생동감은 어떤 이성이나 논리도 없이 오직 경박한 차원의 감정으로만 지탱된다. 너나나나베스트와 어버이별동대의 입에서 나오는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조롱과 혐오의 말들뿐만 아니라, 교환과 영어 선생님이 얼굴을 대면하지 않고 전화로 나누는 대화를 보라. 사실 영어 대화라고도 할 수 없는 그들 사이의 말들은 언어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암묵적인 규칙조차 사라진 일차원적인 감정의 잔여물들에 불과하다. 그것은 조롱과 혐오의 발언들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저급하기 짝이 없다. 한 장면이 있다. 고엽제 후유증으로 사망한 동료의 장례식장에서 해병대 전우회 소속의 한 남자와 어버이별동대에 속한 사내들이 모여 있다. 그들은 고작 육개장이나 얻어먹으러 온 듯한 모양새지만, 겉으로는 현실에 대한 강한 불만과 분노의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말이라기보다는 무질서한 소란에 가깝다. 그때, 그들 사이를 오가던 영화는 갑자기 모든 소리들을 다 죽여 버리고 침묵 속에서 잠시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풍경을 쳐다본다. 그러니까 이 말들의 간교한 힘을 내용적인 교정 등으로 순화시키거나 옳은 길로 인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 힘을 그저 죽이는 것만이 그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아주 잠깐이나마 이 장면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걸 알면서도 이 영화가 그처럼 무식하고 폭력적인 말들의 집요한 활동에 ‘영화적으로’ 대면하는 방식은 그래서 더욱 놀라운 것이다. < 우리 손자 베스트 >는 진짜 팩트를 제시하거나 파고드는 방식이 아니라, 그 말들의 활동에 자신의 몸 전체로 휩쓸려보고 반응하며 치열하게 대응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나는 이 영화가 현실에 대한 패러디나 풍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이 영화는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울타리도 세우지 않은 채로 무모하고 위험하게 돌진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영화 자신이 부서질 수도 있으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 말들에 오염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손자 베스트>는 그걸 겁내지 않는다. < 우리 손자 베스트 >가 ‘말의 영화’라고 할 때, 우리는 영화 속에서 성우로 등장하는 한 여인(김상현)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베와 어버이연합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야기임에도 이 영화에는 그들과 싸우는 반대진영이 등장하지 않는데,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그들과 충돌하는 존재가 있다면 바로 이 여인이다. 그 존재가 여자라는 사실만큼 중요한 건, 그녀가 성우라는 사실이다. 비록 그녀의 목소리는 교환에 의해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비인칭적으로 비열하게 사용됨으로써 처음 나오지만, 그 훼손된 목소리는 그녀의 등장과 함께 이내 온전한 육신을 회복한다. 여러모로 그녀의 음성은 그 성질상 너나나나베스트 회원인 교환, 혹은 어버이별동대 단장인 정수의 그것과 구별된다. 전자는 논리적으로 사실을 설명하고, 타자를 향하며, 감정에 동요하지 않고 나지막하고 품위 있게 명령한다. 반면 후자는 비논리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자기를 향하며, 극단적으로 흔들리고, 시끄럽게 분노한다. 말의 차원에서라면, 성우의 말은 너나나나베스트나 어버이별동대의 말보다 우위에 있다. 그녀의 말이 내용적으로 더 객관적이고, 옳으며, 진정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녀의 말에는 형식이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요컨대, 교환이 그녀를 납치한 후, 목욕탕에서 벌어지는 요상한 상황을 보자. 밧줄에 묶인 그녀는 교환이 시키는 말을 내뱉는다. “김일성 개새끼, 김정은 돼지 새끼.” 그러나 곧 상황은 반전을 맞고 이번에는 교환이 포박된 채, 그녀 앞에서 말한다. “이승만 개새끼, 박정희 삐, 전다크 삐, 이명박 삐, 미스 박 삐, 방 씨 일가 삐..” 내용의 수준으로 볼 때, 어느 한 쪽이 더 우월하거나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양자 모두 천박한 말장난이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그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교환의 말은 자기 만족적으로 두서없이 상대를 위협하지만, 성우의 말은 자신을 위협하는 상대의 말을 마치 거울로 반사하듯, 고스란히 되돌려 보내어 그 말에 수치심을 안긴다는 점이다. 경찰서와 목욕탕 장면에서 그녀는 교환에게 담담히 명령하지 않았는가. ‘내가 저 밖에 나가서도 소리가 들릴 정도로 너의 언어를 크게 말하지 않으면 너를 고발할 것이다.’ 서로 다른 두 층위의 말이 (내용이 아닌) 성질로 팽팽하게 겨룬 후, 오직 말의 힘으로 그녀는 교환을 이긴다. 말과 관련해서 가장 통쾌한 성우의 장면에 대해 이야기를 했으니, 이번에는 가장 소화하기 힘든 다른 여성의 장면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일명 ‘박카스 아줌마’로 불리는 숙희(박명신)는 노인들에게 몸을 팔며 생계를 유지한다. 그녀는 거의 언제나 술에 취해 있고, 기지촌에서 일했던 자신과 같은 여자들이 이 나라를 살린 거라고 거의 매번 같은 내용의 술주정을 한다. 그녀는 이상하게도 자신을 언어로 학대하고 때리는 정수( 동방우 )를 쫓아다닌다. 영화 중반 이후에는 교환과 섹스를 하다가 그에게서까지 모멸을 겪는다. 질문은 이것이다. 영화는 무엇 때문에 그녀의 존재를 필요로 한 것일까. 그녀가 등장하는 거의 모든 장면은 그런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녀 또한 우리의 어두운 현실이기 때문에, 혹은 그녀를 통해 너나나나베스트와 어버이별동대의 사악함을 더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라고 말하는 건 당연히 설득력이 없다. 여전히 그 장면들 앞에서 고심하는 나는 지금으로서 두 가지 추측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단 한 장면의 힘을 보는 것이다. 등장인물들 모두가 그녀를 천대하지만, 한 남자만큼은 그녀를 아낀다. 어버이별동대에 속한 것 같지도 않고, 정수 무리들에게 늘 얻어터지는,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어딘지 온기가 느껴지는 이 남자는 깁스를 한 채, 숙희를 식당으로 데려간다. 남자는 국밥을 시킨 후, 그녀에게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한다. “그대에게 밥상을 수여함.” 숙희는 자신을 향한 소박하고 따뜻한 환대를 수줍게 받아들인다. < 우리 손자 베스트 >에서 가장 이질적이며 정겹고 평온한 순간이다. 이 순간의 영화적 울림은 바로 전에 등장한 장면의 기운과 부딪치며 생성된다. 우리는 저 아름다운 ‘밥상’ 수여식을 보기 직전, 나라사랑유공자 보훈처에서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하고 화가 난 채 빈손으로 나오는 정수의 모습을 보았다. 허황되고 속이 빈 이데올로기의 상과 정직하고 구체적인 마음의 상. 영화는 두 상을 나란히 붙여두고, 상이라는 말이 영화적으로 온전히 물질화된 순간, 말이 하나의 세계가 된 순간의 공기를 ‘밥상’의 장면에서 구현하는 것 같다. 물론 다음 장면에서 또다시 술에 취한 숙희가 정수를 찾아오고, 정수가 그녀를 따라온 깁스 한 남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면서 세계는 불행하게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지만 말이다. 다른 하나는 그녀를 성우와의 대척점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성우의 경우, 우리는 그녀의 사적인 삶이나 과거를 알지 못한다. 김상현이 영화 밖에서 실제 성우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녀는 ‘성우’라는 직업인으로서만 접근 가능하다. 그리고 그녀는 앞서 언급했듯, 말의 형식(음성과 태도와 논리)으로 남자들의 위협을 제압한다. 그러나 숙희의 경우, 그녀의 말에는 그러한 권위가 부여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녀의 말이 그녀를 멸시하는 교환과 정우의 말처럼 사실을 농락하고 우롱하는 광기 어린 신념의 언어도 아니다. 말과 삶과 육체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과 내용과 형식, 이 모든 것들이 경계 없이 뒤엉키고 뭉개지는 순간들을 우리는 숙희에게서 본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그녀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한 인물을 찾기 어렵지만, 정작 그녀는 이 영화에서 그 속이 잘 들여다보이지 않는, 가장 알기 어려운 자다. 말의 형식으로도, 말의 내용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지만, 그 세계 안에서 가장 질기게 살아남아 있는 존재. 우리가 그녀의 장면들을 편히 바라보기 어려운 건, 그녀가 등장하는 장면들의 폭력적 수위 때문이 아니라, 그 사실 때문인지 모른다. 현실의 극단적인 사건이나 현상을 영화 안으로 불러들일 때, 실재의 외설성과 선정성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좋은 작품들은 자기만의 영화적 방어선을 견고하게 구축한다. 그 방어선이란 실제 사건이나 현상을 끌고 오되, 그 내용에 기대지 않고서도 독창적으로 이야기를 지속하게 만드는 동력이자 ‘나는 현실이다’가 아니라 ‘나는 영화다’라는 점을 내내 각성하게 하는 힘이다. < 우리 손자 베스트 >는 일베와 어버이연합이라는 우리 현실의 극단적인 얼룩에서 출발했으나 그 얼룩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거나 사실적으로 그리는 데 관심을 두는 영화가 아니다. 이와 관련해서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초반 우리를 헷갈리게 만드는 장면이 있다. 교환의 집이 처음 등장하는 이 장면은 이상하다. 아버지와 딸이 한 쇼트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고, 아들은 혼자 밥을 먹고 있으며, 엄마는 집을 나서는 중이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하거나 서로를 향해 말을 하지만, 어쩐지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는 것 같지 않다. 이들 사이를 오가는 말의 내용들은 중의적이다. 더욱이 딸이 엄마의 목을 조르던 앞선 장면과 엄마가 구급차에 실려 가기 직전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모습, 죽음의 기운이 어른대는 대화들은 이 집 장면을 죽음 이후의 시공간으로, 인물들을 유령이나 환영으로 느껴지게 한다. 영화의 중반, 집을 두고 편의점에서 괴이하게 재회하는 가족들의 장면도 마찬가지다. 인물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말들은 더없이 무의미하고 행동들은 뜬금없으며 이들의 등 퇴장 방식은 갑작스럽다. 교환이 정수를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에 데려온 날, 그가 거실 벽에 걸린 가족사진들을 보며 한 말이 있다. “영정사진 같죠?” 그날 그는 술에 취해 방에서 낮잠을 자다가 거실에서 엄마가 낯선 남자와 섹스하는 장면을 문틈으로 보게 되는데, 그 순간 엄마 또한 교환을 응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교환의 가족은 구체적인 실체가 아니라 교환에게 끊임없이 돌아오는 망상 같은 것이다. 이 가족에 얽힌 상처를 추론하고 그에 근거해 교환의 행동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영화는 비웃는다. 영화는 말 그대로 그의 집(가족)을 텅 비게 만듦으로써, 너나나나베스트에 경도된 자의 근원을 가정적 배경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무화시킨다. 대신 영화는 인과관계를 이룰만한 요소들의 고리를 끊어 곳곳에 흩뜨려 놓음으로써, 한국 사회가 탄생시킨 이 광적인 존재들의 비상식적인 에너지에 오직 영화 내적인 활력만으로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결론 또한 마찬가지다. 암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 정수는 교환과 현충원에 간다. 아무도 없는 한밤중에 둘은 무덤을 파고 교환은 정우의 부탁대로 삽으로 그의 머리를 내리친다. 쓰러지기 직전, 정수는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가 진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현충원을 나서는 교환이 “자주 올게요”라는 말을 했으니, 그가 죽은 것 같지만, 교환이 그의 얼굴에 흙을 뿌릴 때, 그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우리 손자 베스트”라고 중얼댔으니, 그는 죽지 않은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교환은 머리를 짧게 자른 모습으로 광화문 광장에서 춤을 추며 외친다. “내가 찾는 팩트는 바로 나다!” 정수와 교환의 마지막 장면들에는 어떠한 의미작용도 없다. 정수와 교환이 마지막에 보여준 것들은 그들이 영화 내내 보여준 행각들 중 가장 위악적인 퍼포먼스일 따름이며, 그들이 남긴 문장들은 여전히 상투적이거나 무의미하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김수현 이 그들을 퇴장시키며 섣부르게 어떤 견해를 밝히거나 영화적 처벌 혹은 깨달음으로 은밀히 이동하는 대신, 어떻게든 끝까지 그들을 영화적으로 운동하게 하면서 그들을 향한 질문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니 당신이 < 우리 손자 베스트 >를 통해 일베와 어버이연합에 대한 영화 나름의 정리된 결론을 기대했다면, 이러한 마지막을 두고 무책임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는 그 집단들과 현상들에 대해 답을 내리는 일이 자신의 몫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토록 망가진 사회를 살면서, 자기검열에 경직되지 않고도, 도덕에 짓눌리거나 주눅 들지 않고도, 그 사회의 한가운데서 구정물을 뒤집어쓰고도, 세계의 온갖 비루한 운동들을 향해 과연 영화적 활동만으로 다시 질문할 수 있을까. <우리 손자 베스트>는 이 질문에 대한 김수현 의 대답이다. 올해 경험한 수많은 영화들 중에, 우리가 사는 이 현실에 대해 이보다 더 논쟁적이고 담대하고 치열하게 질문하는 세계를 나는 알지 못한다.
한국 호러 영화가 비루한 조국의 건축 상황 때문에 애를 먹는다는 이야기는 전에도 했다. 성과 대저택이 있어야 제목도 근사하게 뽑고 그림도 나올 텐데, 현대 남한 땅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박윤교 가 감독하고 이종세가 각본을 쓴 < 마녀성 >에도 성은 안 나온다. 대신 영화는 제목의 성을 대체할 나쁘지 않은 공간을 찾아낸다. 바로 화장장이다. 화장장이라고 특별히 무서운 곳이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이 공간에 대한 당시 한국 관객들의 편견을 적절하게 이용했다면 효과가 꽤 그럴싸했을 것이다. 요새 추모공원에 익숙한 관객들에겐 먹히지 않겠지만.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에 등장하는 것도 화장장이다. 지문을 읽어보자. 뇌성벽력이 일면서 비바람이 사납게 분다. (중략) 번개불에 들어나는 화장장의 검은 굴뚝과 을시년스런 건물. (중략) 어디선가 비 바람결에 들려오는 여인의 애절한 통곡소리. 이후 등장하는 것들은 거미줄, 번개, 비바람, 뇌성, 호롱불. 이 정도면 호러 영화 분위기용 소도구들이 총동원된다고 할 수 있다. 포스터 영화의 주인공 희정은 아시아 영화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클럽 가수이다. 당연히 미인이고 (‘백옥같이 아름다운 얼굴, 그 어딘가 우수에 가득 찬 얼굴, 무언가 깊은 사연이 있는 눈동자’) 단골 팬들의 충성도도 높다. 지금 희정은 백영민이라는 모 회사의 전무와 연애 중인데, 영민의 청혼을 계속 거절하는 중이다. 그러는 동안 유부남 시절(현재는 상처한 상태)부터 희정을 따라다니는 스토커가 하나 있는데, 그는 상현이라는 악당이다. 여기서 악당이라는 걸 강조하는 이유는 더 이상 내가, 이런 행동을 나쁜 짓으로 인식하는 게 상식인 문명국에 살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간 대사를 보면 둘이 어떤 관계인지, 상현이 어떤 인간인지, 이 영화가 만들어진 60년대 한국인의 사고방식이 어떤지 드러난다. 생각 같아서는 2010년대 문명인의 관점에서 마구 비웃어주고 싶지만... 하여간 들어보시라. 상현: 딴 놈이 생긴 모양이군. 허지만 난 아직 널 놓아주질 않았어. 이 김상현이가 그렇게 호락호락 할줄 알았나? 희정: 그래서 어떻게 하실 작정이죠? 상현: 어떡하다니? 결혼을 해야지. 희정: 뭐요? 상현: 왜 놀라지? 네게 있어서 나는 처음 남자라지 않았어? 그렇담 내가 책임을 져야지. 희정: 철면피! 그 수많은 여성을 울리고도 아직도 속이 풀리지 않으세요! 흥, 그림자처럼 날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악마! (중략) 상현: 지금 난 어느때 보다도 네가 필요해. 어린것들이 할머니만을 의지하며 자라가는 게 내겐 견딜 수 없는 부담이거든... 아직도 이런 인간을 ‘효자에 상남자’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 걸 생각하면 2010년대 문명인의 자존심은 허물어져 버린다. 상현과 헤어진 뒤에 화장장과 희정의 관계가 드러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희정은 화장장에 산다. 아버지인 이 서방은 화장터의 화부이고 이 직업을 조선 시대 백정처럼 수치스러워한다. 그가 직업 말고 수치스러워하는 건 그의 아내이다. 그에게 “젊은 네가 무슨 죄가 있다구. 어서 네 에미가 죽어야 할 텐데”는 당연한 일상 대화이다. 희정의 어머니이고 이 서방의 아내인 그 인물은 지문에 ‘괴여인’이라고 나온다. 여러 차례 묘사가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헝크러진 기인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허리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낡고 땟국이 흐르는 저고리를 입어 흡사 마귀할멈 같은 꼽추. 나중에 이 여인을 목격한 남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쌀자루같은 혹이 가슴까지 내려온 데다가 머리는 산발을 하고 마귀할멈처럼 아주 흉악한 얼굴의... 가장 중요한 외모 특징이 얼굴의 혹인데 처음 묘사에 나오지 않은 건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각본가가 중간에 추가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하여간 희정이 자기에게 무언가 숨기고 있다고 느낀 영민은 한밤중에 희정을 미행한다. 화장장에서 마주친 이 서방이 그를 되돌려보내려 하지만 그는 몰래 화장장 건물로 다시 들어간다. 그의 뒤를 지문이 ‘캡의 사나이’라고 부른 남자가 미행하는데, 그를 뒤에 붙인 건 상현이다. 이 뒤에 벌어지는 소동은 <스쿠비두>의 한 장면 같다. 화장터 테마의 귀신들린 집에서 두 남자가 벌벌 떨며 돌아다니다가 ‘괴여인’을 만나 기겁해 비명을 지르고 기절하거나 달아난다. ‘캡의 사나이’는 용하게 달아나는 데 성공하지만 영민은 그만큼 운이 좋지 못하다. 지문만 읽으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택시 안에서 ‘캡의 사나이’의 말을 들은 상현이 ‘어쨋던 눈에 가시같던 그 녀석이 상송장이 되어 화구속으로 들어갔다는 건 좋은 현상이야’라고 말하는 걸 보면 정말 죽었나 보다. 그 뒤로 영민은 그냥 안 나오고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Scooby Doo Openings 영민의 실종이 아닌 ‘괴여인’을 갖고 희정을 협박하던 상현은 (“몬도가네의 일급 가수 이희정과...그리고 마귀할멈! 이건 멋있는 탐정소설 감인데 핫핫핫... 어때? 내일 아침 조간에 특종뉴스로 네가 크로즈업 된단 말이야.”) 이번엔 ‘캡의 사나이’와 함께 직접 화장장을 찾는다. 앞에서와 거의 비슷한 소동이 벌어지다가 이번엔 상현이 자기를 공격하는 괴여인을 단도로 찔러 죽인다. 두 남자는 허겁지겁 달아나고 이 서방과 희정은 어머니를 화장한다. 그 뒤의 사건 전개는 어이가 없다. 희정은 정말로 상현과 결혼했다! 이제 이 서방은 화장터 화부 일을 그만두고 상현, 딸, 상현의 어머니 박 씨 그리고 전처가 낳은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아무도 상현이 괴여인의 죽음과 관련 있다고 믿지 않는 거 같다. 이들의 결혼에 상현의 협박이 관여했는지도 알 수 없다. 이후 영화의 무대는 상현의 별장이고, 당연히 귀신이 된 괴여인의 복수가 중심이 된다. 첫 번째 희생자는 ‘캡의 사나이’인데, 지문을 보면... 유리창이 깨어지고 커텐자락이 아무렇게나 바람에 날린다. 그 침대위에 머리를 땅에 박고 거꾸로 처박혀 있는 사나이. 실내의 가구들이 파괴되어 방안이 난장판이다. 암만 봐도 살인 현장인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단지 박씨가 ‘꿈에 볼까 무섭다’며 아들을 현장에 보낼 뿐이다. 화장터에서 사라진 영민의 경우도 그렇고, 60년대 작가들에겐 단역의 죽음 따위는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사소한 일이었나? 그 뒤에 벌어지는 일은 주로 전형적인 한국 호러 영화 깜짝쇼의 연속으로, 굳이 자세하게 언급할 생각은 없다. 단지 권선징악이 고픈 독자들을 위해, 영화가 불타는 별장 속에서 괴여인과 상현이 뒹굴면서 끝난다는 것은 밝혀두어야겠지.
2011년의 갖가지 한국영화 베스트 명단에서 < 창피해 >는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 나는 이 영화를 올해 들어와서 뒤늦게 보았고,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이 코너가 그 생각을 말하는데 적절한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기록이 어디엔가 하나쯤은 남아 있는 게 좋겠다는 믿음으로 쓴다. < 창피해 >에 관한 훌륭한 평(<씨네21> 2011.12.29.)에서 남다은은 이 영화의 대사와 정서가 진부한 소녀 취향을 종종 드러낸다고 지적하면서도, 라스트 씬을 포함한 두 장면을 섬세하고 읽고 그 풍부한 표현력과 함의에 찬사를 보낸다. 망설이지 않고 동의할 수 있는 유일한 평이지만, 나는 그가 스치듯 말하며 지나간 대목, “서로에 대한 기억과 시선 속에 얽히며 과거와 현재, 환상과 현실, 마음과 육체를 오가는 과정에, 아니, 나와 세계, 나와 타자의 경계를 경쾌하게 무화하는 혼돈의 상태... 산만한 과잉이지만 그 과잉이 가볍게 들고 나고 엮인다”는 이 영화의 형식에 대한 언급에 얼마간의 보완을 하고 싶다. 맞는 말이다. < 창피해 >는 산만한 영화다. 영화가 산만해지기는 쉽다. 뜻하지 않은 실수로 산만해질 수도 있고, 아방가르드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의도적으로 혼돈과 산만을 조성할 수도 있다. 말장난 같지만, 한 편의 산만한 영화가 어떻게 산만에 그치지 않고, 산(山)만해질 수 있을까. 고쳐 묻자면, 어떤 산만은 기껏해야 형식의 유희에 그치고 어떤 산만은 영화적 순간에 도달하는가. 물론 이 질문에 대한 일반적 대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 편의 영화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답을 제출할 뿐이다. 2011년의 한국영화 중에서 < 북촌방향 >, < 카페 느와르 >와 함께, <창피해>가 그런 영화 중 하나라고 나는 믿는다. 지우라는 이름을 가진 세 여인이 있다. 화가이자 교수인 정지우( 김상현 분), 그의 모델로 발탁된 윤지우( 김효진 분), 윤지우의 회상 속에서만 등장하는 연인 강지우( 김꽃비 분).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후로는 배우 이름으로 배역 이름을 대신한다. 바닷가에 사진 작업을 나온 김상현 일행의 현재 시점 이야기를 축으로, 김효진의 회상과 김꽃비의 회상 속 회상, 그리고 현실과 회상 장면들 사이에 일견 무작위로 출몰하는 상상 장면들이 삽입된다. 내가 이 영화에 매혹된 첫 장면은 김상현이 김효진을 처음 소개받는 초반의 목욕탕 시퀀스이다. 김상현의 시선으로 김효진이 욕탕에 웅크린 자세로 수면 아래 잠겨 있는 모습을 보는 시점 쇼트가 등장한다. 다음 쇼트는 카메라가 욕탕 안에서 속옷만 걸친 김효진의 웅크린 몸을 찍은 아름다운 장면이다. 김상현의 시선은 물 밖에 있으므로 이 쇼트는 극중 누구의 시선에도 속하지 않는, 카메라라는 기계 장치 혹은 기억 장치 자체의 시선이다. 영화에서 수면은 종종 물 밖과 물 속의 물리적 경계에 그치지 않는 심리적 경계이며, 때론 현실과 환상의 경계, 나아가 한 소우주와 또다른 소우주의 경계가 된다. 물 밖의 카메라가 다음 쇼트에서 갑자기 물 속에 있을 때, 이것은 관음증에의 화답이 아니라, 카메라가 이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겠다는 선언과 마찬가지다. < 창피해 >는 이후로 시점(視點)과 시점(時點)의 관습적 경계를 태연하게 허물며, 시선과 발화 주체 그리고 선형적 시간의 안정성을 교란한다. 예컨대, 한 회상 장면에서 김효진이 자신과 똑같은 옷을 입은 마네킹을 백화점 옥상에서 떨어트렸을 때, 그 밑의 차 안에 있던 김꽃비의 시선에 비치는 것은 마네킹이 아니라 김효진의 얼굴이다. 추락하는 마네킹을 김효진으로 보는 시선의 주체는 누구인가. 아니 어쩌면 이것은 추락을 상상하는 김효진의 시선이 김꽃비를 보는 장면일까. 여기서 시선은 극중 인물의 개별적 육체에 속한 물리적 시선이 아니며, 관객들에게만 허용된 카메라의 특권적 시선도 아니다. 이 시선의 등장은 자신이 보고 들을 수 없었던 것을 보고 듣고, 자신이 속할 수 없었던 시공간에 속하려는 불가능한 욕망이 육화한 순간이다. 그런데 이것은 누구의 욕망인가. 김효진의 욕망인가, 아니면 김꽃비의 욕망인가.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 경계를 넘는 시선에서 사랑하는 이와의 끝내 좁혀지지 않는 거리, 나와 타자 사이의 심연에 대한 탄식임을 느낄 수 있다. 수갑으로 엮여진 김효진과 김꽃비의 손이 서로를 애무하는 순간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일 것이다. 물리적 연계와 분리를 동시에 강제하는 수갑이라는 기계장치를 사이에 둔 두 연인의 손이 서로의 손을 조금씩 더듬어갈 때, 이 장면은 카메라라는 기억장치를 통해 타인의 기억에 자신의 불가능한 시선과 음성을 기입하려는 시도와 아름답고도 애처로운 대구의 운율을 빚어낸다. 완고한 경계들이 슬며시 고개를 숙이자, 그 틈을 타 음성과 시선과 육체들이 서로에게 금지된 세상을 오가며 활동하기 시작한다. 경공술과도 같은 이 활동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 창피해 >를 특별한 영화로 만드는 자질이다. 관습에 도전한 수많은 비주류 영화들이 있었지만 <창피해>의 도전은 형식적 도발에 그치지 않고, 이 쇼트와 저 쇼트, 이 시점과 저 시점, 이 발화 주체와 저 발화주체, 이 소우주와 저 소우주가 서로 애무하면서 일종의 시적 리듬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희귀한 성취다. 다른 한편으로, 영화만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매체적 자질들로 벌이는 축제와도 같다는 점에서 <창피해>는 자신만의 영화적 순간을 보유한다. 물론 이 영화의 존중할만한 점 한 가지는 현실의 혐오스럽거나 거북한 것들, 그러니까 정액과 토사물, 그리고 일상의 추태와 무력감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 요소들은 영화의 균질성을 위협하며 < 창피해 >는 그로 인한 균열을 감수한다. <창피해>는 명실상부한 걸작은 아닐지라도, 2011년의 한국영화 중에서 가장 시네마틱한 체험을 선사한 세 편 중의 한편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