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동무
- 감독
- 김태일
- 제작년도
- 2004
김태일 , 주로미 감독의 < 올 리브 올리브 >는 팔레스타인의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나야 했던 1세대의 이야기가, 인티파다(민중봉기)와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2, 3세대의 이야기가 그들의 일상생활과 함께 들려진다. ‘민중의 세계사’ 세 번째 작품인 이 영화는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거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민중들의 이야기를 듣는데 역점을 둔다. 1948년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이 그들의 땅에서 쫓겨나기 시작한 시점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일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분쟁의 시작이 아주 먼 과거의 일처럼 생각된다. 마치 우리의 한국전쟁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의 역사가 태곳적 일처럼 느껴지듯 말이다. 게다가 이 폭압의 역사가 팔레스타인 인민들에게는 일상의 비극일진데, 마치 내가 이 이슈를 기사나 뉴스로 접했을 때만 일어나는 특별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내 조부모, 부모, 혹은 내가 경험했던 동시대의 이야기가 먼 시간의 일처럼 느껴지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본질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그 표면의 이슈들만 주입하는 부르주아 미디어에 익숙해진 우리는 대규모 전투와 학살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자살폭탄 현장에서의 절규나 어린 난민의 슬픈 이미지를 소비하지 않는 한 그들의 고통에 무감해진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치 매김 할 수 없는 올리브 나무를 베는 행위보다는 누군가 극적으로 총에 맞아 죽고, 슬퍼하고 절규하는 이미지에 분노하려 나를 준비시킨다. 이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이미지들에 피로해진 우리의 감각들은 결국 평범한 인민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특별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한다. 비이성적이고 명백한 부조리함 앞에 “알아, 그렇지만 나도 힘들어, 항상 그랬잖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라는 신화를 만들어 내고 그 안에서 듣지 않으려 귀를 닫고 보지 않으려 눈을 감았다. 결국 전쟁과 가난에 죽어가는 사람들, 폭압 자본의 고된 노동에 고통스러워하는 인민들과 목숨을 걸고 경계를 넘어서는 수많은 난민들은 내 지각에서 멀어지고 남의 일이 된다. 그리고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현재하는 이야기들을 과거 오래전부터 있었던, 내가 어찌해도 바뀌지 않는 무엇으로 자리 잡게 한다. 그래서인지 1999년 가자지구에서의 폭력적인 상황을 경험했음에도, 2009년 이스라엘 야파(텔아비브)에서 “자기 땅을 들어와 보지 않는 한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이라 웅변하던 팔레스타인 다큐멘터리 감독과의 만남도 나에게는 이미 먼 과거의 일이 되어 있었다. 선물 받았던 팔레스타인 음악 CD는 여전히 내가 즐겨듣는 음악이며 소장품 중 가장 소중한 선물임에도 말이다. 대상 없는 평화를 이야기하며 실체 없는 자유를 외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시간과의 단절, 기억과의 단절에 대해 생각해 본다. 땅이다. 삶의 근간이 되는 땅을 잃어버렸을 때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이들은 땅을 통해 이야기한다. 이스라엘의 점령으로 자신들의 터전에서 이유 없이 쫓겨났을 때도, 근거 없이 매일 매일 그 점령지를 넓혀가고 있는 이 폭력적인 상황에도 돌아가고 싶고 지키고 싶은 것은 바로 이 땅이다. 높이 8m 총길이 720km의 폭력적인 장벽에도 이들이 지키고 싶은 것은 대대로 노동하며 살아왔던 이 땅이다. 지붕 없는 감옥에서 살아가야 하는 수백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언젠가는 평화롭게 숨 쉬고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 싶은 땅이다. 단절된 시간과 기억들을 품고 있는 지켜져야 할 땅이다. 그리고 이 땅이 지켜지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영화 < 올 리브 올리브 >는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점령”으로, 우리의 ‘무관심’으로 지금도 파괴되고 있는 땅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때다. 대항의 역사를 만들어 내고 있는 각 개인들의 삶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과 공명하기 위해 우리 안 고단함의 실체를 인정하고 치열한 성찰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 놓은 내 안팎의 신화를 해체해야 한다. 그리고 이 들음을 통해 지워졌던 시간들과 기억들을 복원해야 한다. 영화 < 올 리브 올리브 >는 들어주는 영화다. 이 영화적 실천이 내 주위의 ‘점령’들을 직시하게 한다. 듣고 공감하며 함께 하는 것, 우리가 이 땅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는 시작이다. 결국 기억에 대한 싸움이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그것도 뭔가 내가 큰일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공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일수록 기록하고 있는 인물이나 사건, 상황에 많은 의미들을 부여하게 된다. 소소한 내 기억이나 가족의 사연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던 나는 이 특수한 이야기를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현장의 사실들을 미화하거나 작위적으로 그 의미들을 과장하는 나쁜 버릇이 생겼다. 물론 창작자로서 재 현실들을 재가공하는 것은 어찌 보면 운명과도 같은 것이겠지만 그 정직한 수위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민스러우며 풀릴 것 같지 않은 숙제로도 보인다. 이런 고백으로 이 글을 시작하는 건 최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김태일 감독의 < 웰랑 뜨레이 >를 소개하기 위해서다. 광주민주항쟁 당시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 오월愛 >를 시작으로 세계 민중사 10부작을 시작한 김태일 감독과 그의 가족(이하 “상구네”)은 그 첫 번째 나라인 캄보디아로 떠난다. 하지만 언어가 통하지도 않는 생소한 지역에서 누군가를 찾아 이야기를 기록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수개월이 지나고 상구네는 우연히 뜨레이 가족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기로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우리는 생존을 위한 뜨레이 가족의 노동만을 볼 뿐이며 이들과 같은 노동을 하며 살고자 하는 상구네의 일상만을 볼 뿐이다. 상구네가 예수교를 강요하지 않는 가족임을 알고 뜨레이 가족은 안심하지만 상구네는 여전히 이들의 삶의 역사를 카메라로 찍어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자화 되지 않은 체 구술로만 전승되는 그들의 전통과 역사를 존중하며 관광지가 되어가고 있는 그들의 삶의 터전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묵묵히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든 이야기를 설정하고 찍어야 할 텐데 상구네는 영화적 대상과의 관계에서의 한계만을 고백할 뿐이다. 솔직히 말해, 나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 많은 이야기를 가진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수소문 끝에 찾아낸 다음, 그들의 동의하에 적당하게 일상을 기록한다. 다음, 적당한 시점에 좋은 배경에 앉혀서 현지 통역들과 함께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한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눈물 찔끔 나게 유도해서 들었을 것이다. 영화의 서사를 위해 시간의 흐름이 있는 역동적인 사건이나 상황 또한 계획적으로 찍었을 것이다. < 웰랑 뜨레이 >는 이 기존의 방식과 닮아 있지 않다. 아니 애초에 방식이라는 것에 신경 쓰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가족과 가족이 첫 대면하는 그 순간으로부터 변화해가는 두 가족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솔직하게 보여주는데 주력한다. 이는 어쩌면 영화적 대상을 카메라로 기록하는 위치에서 벗어나, 면대면으로 만나는, 실존하는 사람들을 내 몸으로 기억하고 싶어 하는 태도의 결과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함께한 자녀들에게 부끄럼 없이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인민들의 살아있는 삶의 모습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뜨레이 가족의 삶을 스크린 안의 이미지가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실재하며 현존하는 삶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다큐멘터리에서 현실과 사실이 나를 자극하는 진실이 되는 순간을 맛보게 되었다. 민중사 10부작을 통한 상구네 가족의 변화과정이 궁금해진다. 특히나 두 자녀들이 성장해가는 과정과 그 과정 안에 부모와 함께 그려낼 민중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긴 여행을 떠나며 첫 여정지인 캄보디아 인민들에게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세계의 인민들에게 ‘우리 이 마음과 태도로 시작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하며 “웰랑?(안녕?)”이라고 상구네 가족이 인사를 건네는 것 같다. 이 인사가 어떻게 진화, 발전될 지 더불어 그 깊이를 가져갈지 기대된다. 상구네 가족의 앞길을 큰 박수로 응원하고 싶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공동체나 신념을 위해 헌신하는 비장한 남성들에 매혹되곤 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난 대학을 졸업할 무렵까지 영화광도 아니었고 심지어 관심도 없었지만, 그러한 남성들에 대한 첫 번째 매혹에 대한 기억은 영화였다. 언제쯤이었을까? 아마 내가 열 살 즈음이었을까? TV에서 방영되는 < 새벽의 7인 >을 보았다. 레지스탕스라는 어려운 용어는 물론이고 나치나 유태인이 뭔지도 몰랐을 그 시절,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나치에 포위된 두 명의 청년이 어느 건물 지하실에서 최후의 저항을 하자, 나치는 지하실로 물을 채워 넣기 시작한다. 그 물이 거의 천장까지 차오르자 이 두 청년은 서로를 끌어안고 각자의 머리에 총을 겨눠 자살을 하고만다. 이 숨막히는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나는 그들이 살아남기를 정말이지 간절히 소망했다. 그들이 투항하기를 바랐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들이 최대한 머리를 지하천장 가까이 치켜들면 익사하지 않으리라는 응원을 열심히 했었다. 그리고 대학시절, 정규 수업은 거의 출석하지 않았고, 사회과학 동아리였던 세미나에 더 열중했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 가져온 <칠레에 관한 모든 기억>을 보게 됐다. 내가 다큐멘터리에 관심을 가지게 한 첫 번째 영화였다. 선거를 통해 집권한 사회주의자 살바로드 아옌데의 혁명과 이에 대한 피노체트 반혁명(쿠데타), 그리고 민중 학살에 관한 작품이었다. 공군 전투기가 산티아고의 대통령궁을 폭격하는 장면이 등장하고, 채 스무명이 안 되는 동지들과 달랑 권총 한 자루 들고 저항하는 아옌데의 마지막 모습, 그리고 그의 육성 라디오 메시지는 내 넋이 다 나갈 정도로 소름끼쳤다. 비장한 남성들에 대한 매혹은 자연스레 운동으로 연결됐고, 그 다음은 영화였다. 그 순간 처음으로 나도 ‘다큐멘터리 운동’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정말로 나는 다큐멘터리 진영에 기웃거렸다. 대학 4학년 즈음에 벌어진 노동계 총파업때(노동법 날치기 통과 반대 투쟁) 학교 영화패 선배를 쫓아 명동 향린교회에 꾸려진 ‘총파업공동영상제작단’을 찾아가 그곳에서 내게 주어진 아주 사소한 심부름을 하면서도 뿌듯해 했다. 이후 대학을 졸업하고 1년 정도는 노동자뉴스제작단에서 꾸린 이론분과에 참여했다. 선배들에게 거창하게 내 포부를 드러내진 못했으나, 나 홀로 각종 다큐멘터리 이론 책들과 논문들을 읽으며(주고 다큐멘터리의 형식주의 관련 논문들) 내가 만들고 싶은 작품을 상상하곤 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결정적으로 ‘운동’ 혹은 ‘다큐멘터리’와 멀어진 것은 영화에 대한 매혹과 지식이 더 커져가면서였다. 얼마 후 ‘씨네21’을 통해 평론가로 등단했고, 이후 다시 ‘영화는 예술이며, 감독은 작가다’를 죽어라 외쳐대는 KINO에서 기자 생활을 하게 됐다. 그 즈음 우연히 만난 노동자뉴스제작단의 이론분과 선배는 내게 농담처럼 ‘배신자’라고 했다. 그냥 웃고 말았지만 쓰리기도 했다. 몇 년 전 모 영상위원회의 ‘독립영화 DVD 제작지원’ 분야 심사에 참여했다. 이번에 < 오월애 >를 연출하신 김태일 감독님 역시 심사에 참여하셨다. 난 그때 심사장에서 그분께 했던 내 질문을 아직도 후회한다. “요즘 다큐멘터리들은 왜 이리 나이브한가요? 형식에 대한 고민들이 없는 것 같아요” 당시 나는 취지와 메시지에는 공감하나 만듦새와 형식이 너무도 불만이었던 한 작품에 대한 선정 여부를 두고 갈등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 질문은 걸작과 작가에 경도된 지금의 영화취향에서 가능한 질문이었고, 한국에서 독립다큐멘터리를 한다는 것이 수반하는 무수한 싸움과 한계들을 외면한 질문이었다. 얼마 전 지인과 < 오월애 >를 보러갔다. 관객은 우리뿐이었다. 덕분에 아무 거리낌 없이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들에 대해 즉각적으로, 큰소리로 토론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영화 초반부 시민군이었던 남자가 뱉어내는 내래이션은 묘하게도 내 가슴을 쳤다. “30년 동안 기억의 감옥으로부터 한번도 자유로운 적 없었다. 해마다 5월이 되면 몸의 감각이 되살아난다,” 소름끼쳤다. 망각에 대한 죄의식, 도청에 대한 논쟁들, 죽은 자에 대한 예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학살과 위정자들. 그 모든 공포들을 상기시키는 작품이었다. 며칠 후, 모 영화과 교수님과 이야기하던 중 < 오월애 >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오월애>의 나이브함이 아쉽다 했다. 정말로 이 작품이 나이브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그 용어를 어떤 의미로 썼는지는 알 것 같다. 30년이 지나도록 미완인 역사, 그것도 망각 속에 봉인되려는 역사에 대한 총체적 시각이나 해석을 제공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증언자들의 진술이 주관적이고 감정적이며, 선택된 인물들은 당시 광주를 상상하기엔 다소 느슨해 보인다. 이 영화엔 여백이 많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나이브함이라 한다면 나는 그것을 오히려 <오월애>의 미덕으로 간직하려 한다. 이 영화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걸작과 작가주의에 경도된 나의 영화적 취향을 너머, 지난 시기 운동과 다큐에 대한 매혹과 열정을 일깨운 작품이다. 80년 광주는 조직화나 체계화된 운동이 아니라, 철저하게 억업받고 빈곤했던 시민들의 삶의 몸부림이었다. 이후 진행된 약간의 민주화니 보상이니, 역사적 재평가니 하는 것들도 어쩌면 지식인인양 하는 자들 혹은 정치인들의 포장되고 왜곡된 언술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 오월애 >의 힘은 당시 광주에, 그날 그곳에서 목숨 걸고 싸웠던 사람들이 직접 이야기한다는 점에 있다. 기층민중의 역사를 지식인들이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의 역사를 그들 스스로 발언하게 하고, 그들을 역사적 주역으로 내세운다는 점에 있다. 영웅화된 몇몇 열사가 아니라, 그곳에서 이름조차 없이 죽어간 무수한 목숨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힘겨운 기억들. 구두닦이, 식당주인, 노점상, 과일행상, 고등학생... <오월애>는 그들의 투쟁과 그들에게 남겨진 상처를 상기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작품인 것이다.(광주나 칠레를 비롯하여 잔혹한 학살을 경험한 희생자들은 이후 수십년 동안 발언을 금지 당한다. 발언 그 자체가 고통이거니와 더 큰 문제는 그것이 또 다른 억압과 처벌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내 유년기에서부터 나를 사로잡았던 영화 속 비장한 남성들, 레지스탕스에서부터 아옌데까지. 그러나 <오월애>는 그 비장한 영웅들의 현실 속 주체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운동으로서의 영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정성’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상기시켰다. <오월애>의 사람들, 그날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그 어떤 압도적 형식미학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월애>는 ‘저항’과 기층민중의 힘을 믿는 작품이다. 그래서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