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드라마, 운명적 사랑
- 감독
- 김태현
- 제작년도
- 2006
중앙관은 1921년 10월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에서 영락정 상품진열관 앞에 세운 영화관이다. 중앙관을 세운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朝鮮活動寫眞株式會社)는 1920년 8월 나카무라 히코(中村彦) 외 두 명이 영락정 상품진열관 건너편에 극장을 짓기로 출원하자, 이를 계기로 세키상점(關商店)의 운영주이자 경성상업회의소 상의원 대표인 세키 시게타로(關繁太郞)와 마쓰모토 민스케(松本民介), 이와모토 요시후미(岩本善文), 후지토미 구니다로(藤富國太郞), 나리키요 다케마쓰(成淸竹松), 사노 히고쿠라(佐野彦藏), 미나미 겐베이(南源兵衛) 등 경성의 일본인 실업가들이 중심이 되어 자본금 50만원에 불입금 12만 5천원 규모로 세운 흥행 목적의 주식회사이다. 1921년 4월 설립한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에서는 활동사진관 신축에 나서 1921년 10월 15일 중앙관을 개관했다. 개관 당시 중앙관은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 직영관이자 제국키네마(帝國キネマ) 특약관으로 “막대한 자본과 좋은 입지조건, 그리고 비교적 잘나가는 변사와 오케스트라로 경성 키네마계를 지배”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중앙관에서 상영한 필름은 제국키네마에서 제작한 일본 영화와 이태리 영화가 중심이었다. 중앙관 신축을 시작으로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는 경성과 인천에 있는 활동사진관을 인수하여 흥행 및 배급을 강화하고 영화촬영소를 세워 영화제작에 나설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풍부한 자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의 이러한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중앙관에 근거지를 둔 영화제작 조직은 극동영화구락부(極東映畵俱樂部)였다. 극동영화구락부는 1922년 9월,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의 주요 인물들인 나리키요 다케마쓰, 이와모토 요시후미, 이와타 센타로(岩田仙太郞)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다. 나리키요 다케마쓰의 아들인 쇼치쿠 촬영기사 나리키요 에이(成淸榮)가 전속 촬영기사였으며 중앙관에서 연쇄극을 공연했던 오미 후미노스케(五味文之助)가 이끄는 연쇄극단이 전속 배우로 합류하였다. 극동영화구락부에서는 가장 먼저 경성일일신문사(京城日日新聞社)에서 주최한 오사카마이니치신문사(大阪毎日新聞社)와 만철(滿鐵) 간의 야구경기의 실사 영화를 촬영했고 이어 극영화 <국경>을 제작했다. 극동영화구락부에서 제작한 <국경>은 조만국경 지역을 배경으로 조선인 무장독립운동가들로 상상할 수 있는 마적단을 토벌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23년 1월 13일 단성사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조선인 학생들의 야유로 인해 상영이 중단되었고 이후 상영이 재개되지 않았다. 영화 개봉 하루 전, 경성 시내에서 김상옥(金相玉)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조선인을 자극시킬 만한 내용의 영화를 상영하는 것을 경찰이 금지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극동영화구락부는 제대로 된 활동 없이 문을 닫았다. 1920년대 중앙관은 제국키네마의 영화를 비롯해 마키노키네마, 동아키네마 등의 영화를 상영했다. 개관 당시 중앙관은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 직영으로 제국키네마의 영화를 상영했는데 1922년 10월에는 제국키네마가 중앙관을 직영하게 되면서 이름을 제국관(帝國館)으로 바꾸었다. 제국키네마에서는 새로운 경영진을 보내 중앙관을 운영했는데 개관 당시 경영을 맡았던 히라노 후쿠마쓰(平野福松)를 비롯해 나카야마 로게쓰(中山朧月)가 다시 경영자로 들어왔으며 변사진도 새롭게 바꾸었다. 하지만 제국관으로의 전환은 큰 효과를 얻지 못한 채 적자만 누적되자 문을 닫게 된다. 1923년 제국관의 운영권을 인수하여 이름을 중앙관으로 다시 바꾼 인물이 오모토(大本)와 모리(森) 두 사람이었다. 이들 새로운 경영자들은 제국키네마와 관계를 끊고 오사카로 건너가 쇼치쿠 을부(乙部)영화를 수입하기로 하고 쇼치쿠 특약관으로 전환했으나 경영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관은 경성의 유서 깊은 여관인 파성관(巴城館) 주인이자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의 주주인 마쓰모토 민쓰케가 경영권을 인수한 후 후지모토 쇼죠(藤本省三)를 지배인으로 내세워 경영을 시작했다. 후지모토는 쇼치쿠 영화를 대신하여 마키노키네마의 영화를 상영하였는데 마키노 영화에 대한 호평이 늘어나면서 중앙관의 운영은 점차 안정되었다. 1925년 마쓰모토 민쓰케가 중앙관 운영에서 손을 떼고 마키노키네마와 합병한 도아키네마(東亞) 직영으로 바뀌었으나 마키노 쇼죠가 도아키네마에서 나와 마키노프로덕션을 설립하게 되자 중앙관은 도아키네마 직영에서 마키노프로덕션 직영으로 바뀌게 된다. 자연히 중앙관의 영화도 마키노 계통의 영화를 상영하였다. 이 시기 중앙관은 다른 영화관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불황과 1926년부터 시행된 필름검열 수수료 부담으로 인한 비용 증가 등으로 경영상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따라 1930년 8월 15일부터는 위층 20전, 아래층 10전의 입장료를 받는 등 프로그램에 따라 입장료를 탄력적으로 운용하면서 경성의 일본인 상설관의 가격 인하를 주도하였고 캐러멜회사와 제휴하여, 입관자들에게 캐러멜을 위층 6개 아래층 4개씩 나눠주는 프로모션을 진행하기도 했다. 중앙관은 1930년 1월 경성의 일본인 극장 중 처음으로 토키영화를 상영하였으며 1930년 4월 25일 데이코쿠키네마의 히트작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는가>(何が彼女をさうさせたか)를 시작으로 데이코쿠키네마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조선극장에서도 상영되었는데 5년여 동안 조선으로부터 차단된 제국키네마 영화가 조선에서 상영되는 계기였다. 1931년 11월 중앙관은 오다 유키치(小田勇吉)가 경영을 맡았다. 이 당시 데이코쿠키네마가 신코키네마로 바뀌면서 중앙관 역시 신코키네마의 특약관으로 있었다. 하지만 중앙관 운영권을 둘러싸고 문제가 생기자 중앙관 경영자 오다는 1934년 11월 경성흥행협회 회장인 경성극장(京城劇場)의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와 부회장인 조일좌(朝日座)의 오이시 사다시치(大石貞七)를 공동경영자로 끌어 드렸다. 1936년 들어 약초극장과 명치좌, 황금좌 등 신축 영화관이 새롭게 등장하면서 경성의 영화관은 크게 요동치게 된다. 같은 해 9월 중앙관은 신코키네마와 절연하고 다이토영화사의 조선봉절관으로 새롭게 시작하게 되지만 경영 악화로 인해 고전하게 된다. 1940년 10월 17일 중앙관 역시 새롭게 개장 후 개관하게 되면서 이름을 중앙영화극장으로 바꾸고 신코키네마 2번관이 된다. 운영자 역시 바뀌어 조일좌 운영주 오이시 사다시치가 맡았다. 하지만 중앙영화극장은 인근에 위치한 신코영화 봉절관인 경성극장에 비해 입장료가 불과 10전 밖에 차이나지 않았기에 관객들을 유치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경성극장이 영화관으로 전용된 후 경성의 일본인 전용 연극극장이 전무하던 상황이었기에 운영자 오이시는 중앙영화극장을 연극극장으로 전환할 것을 고민하게 된다. 오이시는 가장 먼저 조선악극단에 위탁경영을 제의했으나 교섭에 실패했다. 이어 조선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있던 도호와 협의를 시작하여 1940년 12월 중앙영화극장을 신코영화의 2번관에서 도호의 2번관으로 전환하기로 하고 이름도 동보문화극장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문화극장이라는 이름이 문화영화와 시사영화 전문 상영관이라는 인상을 주었기에 1941년 7월 이름을 동보중앙극장으로 개칭하였다. 영화배급 통제가 실시되면서 홍계 상영관으로 있었던 동보중앙극장은 1944년 9월부터 연극장으로 전환하게 되면서 중앙극장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1945년 5월에는 전창근, 김태진 등이 주축이 된 극단 태양을 전속 극단으로 두었다. [자료] 1960년대 중앙극장(국가기록원) 해방 후 중앙극장은 연극전용관에서 영화관으로 바뀌었으며 흥행업계에서 오랫동안 활약하던 김상진(金尙鎭)이 적산관리인으로 있었다. 1950년대 벽산그룹의 모태가 된 불이무역(不二貿易)의 김인득(金仁得)이 소유하고 있던 중앙극장은 1998년 3개의 스크린을 가진 멀티플렉스영화관으로 전환하며 이름을 중앙시네마로 바꾸었으나 벽산그룹이 도산하면서 2010년 폐관하였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김태현,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김계자,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박이정, 2018. * [사진](상단) 중앙관 개관 광고(《경성일보》, 1922.10.15) [자료] 매일신보, 1921.03.09. 경성 ( 京城 ) 에 우 ( 又 ) 상설관 ( 常設館 ) / 일홈은 즁앙관이고 자본금은 오십만원 경셩의 연예계ᄂᆞᆫ 종ᄅᆡ로 잘 발뎐이 못되고 도리혀 쇠하 야 가ᄂᆞᆫ 모양이오 졈졈 활동사진을 인하야 시민의 연예와 오락 ᄎᆔ미가 ᄉᆡᆼ기여 오ᄂᆞᆫ 바 현ᄌᆡ는 내디인 편이 활동사진 상설관이 셰시나 잇고 됴션인 전문의 상설관은 다만 둘밧게 업ᄂᆞᆫ데 또 이것ᄲᅮᆫ으로도 시민의 긔ᄃᆡ를 맞츄어 줄 설비와 ᄉᆡ로운 ᄉᆞ진을 속히 뎨공하지 못하ᄂᆞᆫ 것이 유감되여셔 이 결ᄒᆞᆷ을 보츙하고 ᄯᅩ 됴선 만주에 자랑ᄒᆞᆯ만한 완전히 설비한 상설관을 건설하야 보려고 지ᄂᆞᆫ번 ᄅᆡ로 시ᄂᆡ 유지ᄌᆞ들에 의하야 그 계획이 진ᄒᆡᆼ되ᄂᆞᆫ대 이번에 아죠 허가를 엇어셔 됴선활동사진주식회사가 츌현하게 되엿ᄂᆞᆫ대 ᄌᆞ본금은 오십만원이요 쳐소ᄂᆞᆫ 영락뎡 1 뎡목 상품진렬관 압이오 ᄅᆡ월에 챵립 총회를 열고 쇽히 역사를 하야 ᄶᅡ른 긔ᄀᆞᆫ에 쥰공하고 즁앙관 ( 中央館 ) 이라고 일홈을 진다ᄂᆞᆫᄃᆡ ᄆᆡ우 찬셩자가 만타더라 . [자료] 매일신보, 1921.03.08 . 조선활동진보 ( 朝鮮活動進陟 ) 경성 영락정 상품진열관 전 ( 前 ) 에 상설관을 건설하고 활동사진 급 ( 及 ) 차 ( 此 ) 에 부대하ᄂᆞᆫ 영업을 행ᄒᆞᆯ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는 기보와 여 ( 如 ) 히 창립사무가 진척하여 발기인의 부담주를 정한후 찬성주의 할당에도 착수하였ᄂᆞᆫᄃᆡ 하여간 자본금 50 만원으로 총 주수 1 만주에 불과ᄒᆞᆷ으로 주주를 광 ( 廣 ) 히 일반 시민에 모집하고 발기인의 독점의 폐를 피 ( 避 ) 키 위하야 발기인의 특주ᄂᆞᆫ 150 주씩 4 천주로 정하였ᄂᆞᆫ대 발기인 중에 다수히 주를 요구하ᄂᆞᆫ 자가 유하야 점차 주식분배 상 부심 ( 腐心 ) 중인바 여하여간 유리한 활동사진흥업의 영리 회사임으로 찬성인이 속출하야 기히 이배 반의 신입 성적을 거 ( 擧 )하 얏스며 일양일 ( 一兩日 ) 중에 찬성주의 할당을 요 ( 了 )하 고 일천주를 할 ( 割 )하 야 일반에 모 ( 募 )하 기로 ᄒᆞᆯ 터이며 창립사무소를 영락정 경매조합에 치 ( 置 )하 야 창립사무를 급속히 하ᄂᆞᆫ 중이라더라 . [자료] 매일신보, 1921.03.16 . 조활창립총회(鮮活創立總會) 조선 활동사진 회사 래 ( 來 ) 십구일부터 이십삼일 지에 제일회 불입을 료 ( 了 ) 고 래 사월 칠일 창립 총회를 개최 터인대 창립 총회 종료와 공 ( 共 ) 히 직 ( 直 ) 히 상설관 건축에 착수 다더라 . [자료] 매일신보, 1921.10.11. 중앙관 개관 ( 開館 ) 피로 ( 披露 ) 예 ( 豫 ) 히 공사중이든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 경영에 의한 중앙관 ( 영락정 1 정목 ) 은 수 ( 遂 ) 히 공사 준공 되얏슴으로쎠 10 일 당국 검사를 종료하얏슴으로 13 일 개관피로연을 겸하여 제국활동사진을 시사ᄒᆞᆯ터인대 초대 인원은 관민 유력자 신문기자 주주 전부에 긍 ( 亘 ) 하야 약 1,500 명의게 각각 초대장을 발하얏더라 . [자료] 매일신보, 1924.06.26. 미국영화 상영중지 / 대정관과 중앙관 일본이 미국의 쳑하 형셰 로 고됴되야 최근에 이르러셔 젼국에셔 각죵 물품을 쳑하 동시에 일반 화 ( 華客 ) 의 환심을 사고 부심하 민쳡 상인들은 벌셔브터 간판 ( 看板 ) 의 미국이라 글발을 삭졔하며 혹은 미국품을 팔지안는다 광고를 널리하야 연히 미 긔분이 농후하야 가는 터인바 경셩 활동 진 상셜관 ( 活動寫眞 常設舘 ) 에셔 내디 각 디방에서 미국 「 필림 」 을 쳑하 영향을 바다 관 들도 미국 사진을 죠와하지 안는 경향이 잇슴으로 대졍관 ( 大正舘 ) 에셔 솔션하야 불일간 미국영화 ( 米國映畵 ) 를 즁지하고 시대물 ( 時代物 ) 로써 보츙하고 계획한다하며 한 동업 즁앙관 ( 中央舘 ) 에셔 이에 공명하야 미국 진 대신에 목야 ( 牧野 ) 의 독특한 시대극 ( 時代劇 ) 으로쎠 보츙하고자 게획중이라 대 대졍관에셔 벌셔브터 문압을 장식하야 잇 만국긔에셔 미국긔를 여바렷드라 .
경성극장은 일제강점기 본정 3정목 94번지에 위치했던 대표적인 일본인 극장으로 1921년 8월 개관하여 해방 직후까지 존속한 극장이다. 경성극장은 지금의 충무로 남산스퀘어빌딩 북편, 과거 수좌(壽座)가 있던 자리에 들어섰다. 그 곳은 1907년 이전 설립된 판본좌(坂本座)가 있었던 곳으로 서울의 일본인 극장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유서 깊은 곳이다. 경성극장의 전신이자 판본좌의 후신인 수좌는 1908년 건립되었고 1921년 그 자리에 경성극장(京城劇場)이 신축되었다. 경성극장의 설립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인한 호황으로 주식회사의 형태의 대형 극장이 우후죽순 격으로 설립되던 상황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경성의 일본인 자본가들은 본정 2정목에 위치한 수좌(壽座)를 신축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주식회사 경성극장을 설립한다. 1919년 10월 기존의 수좌는 헐려 원산으로 이전되었고, 1921년 8월 가부키나 연극, 무용과 같은 무대공연을 할 수 있는 경성극장이 만들어졌다. 경성극장의 주주와 경영진은 경성의 주요 실업인들이 주축이 되었다. 경성극장 제4기 대차대조표에 표기된 중역의 이름을 살펴보면, 취체역 회장 고조우 간도(古城菅堂), 전무취체역 무라카미 코지로(村上幸次郞), 취체역 구기모토 도지로(釘本藤次郞), 카지와라 수에타로(梶原末太郞), 야자와 긴지로(矢澤近次郞), 사노 히코조(佐野彦藏), 고가와 카츠헤이(小川勝平) 감사역에는 이케다 쵸베이(池田長兵衛), 미타 마사지로(三田政治郞), 시이키 우노스케(椎木宇之助), 세키 시게타로(關繁太郞), 야마자키 시카조(山崎鹿藏)이었다. 이중 회장 고조우 간도는 일본인 의사이자 실업가로 조선상업은행의 대주주 중 한명이었으며 전무 무라카미 코지로는 무라카미 텐신(村上天眞)이라는 이름을 쓰던 무라카미 사진관의 주인이었다. 취체역 중 한명인 구기모토 도지로는 조선의 철물왕으로 불리던 인물이었고 야자와 지로는 동양생명보험회사의 경성지점장이었다. 이처럼 경성극장의 주요 인물들은 경성의 대표적인 일본인 실업가들이 망라되었다. 경성극장에서 일본의 텐카츠(天勝)나 텐와(天華)와 같은 유명한 연예단이나 연극단, 가부키단이 경성에 와서 공연을 했다. 특히 시즈마 고지로(靜間小次郞)는 이기세(李基世)가 그 문하에 있었을 정도로 일본 연극계의 지도자 중 한명이었다. 이와 같은 일본 연극계의 유명 인물이 이끄는 단체들이 경성에서 공연 할 때에는 경성극장이 중요한 공연장으로 활용되었다. 경성의 대표적 흥행 장소였던 경성극장은 1929년 2월 13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당일 화재는 오전 5시 40분경 경성극장에서 발화되었고 6시 30분경 진화되었는데 당시 바람이 심하여 극장 내 집기들을 꺼내지 못한 채 극장이 전소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경성극장은 극장가격 12만5천원, 집기 2만 여원 도합 15만 여원의 피해를 입었다. 화재 발생 직후 경성부에서는 불탄 그 자리에 극장을 재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주주의 일부가 주식회사의 해산을 주장했다. 이때 일본국수회 경성지부장이자 야쿠자 두목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가 주주총회를 요구하며 1.극장신축, 2.다른 극장(중앙관)과의 합병, 3.해산 중 하나를 선택하여 결론을 내자고 주장했다. 1930년 2월 27일 열린 경성극장 주주총회에서 주주 18인이 불탄 옛 자리에 10만 2천 여원 예산으로 극장을 재건하기로 결정하면서 새로운 극장의 설립이 추진된다. 1931년 9월, 과거 경성극장이 있던 자리에 신축된 극장의 이름을 경성연예관으로 정하고 와케지마 슈지로의 분도흥행부에서 극장운영을 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와케지마는 흥행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분도흥행부(分島興行部)를 대일본흥업회사(大日本興業會社)로 확대한다. 특히 와케지마는 영화제작을 추진하기 위해 원산프로덕션의 도야마 미츠루(遠山滿)를 끌어들였는데 당시 도야마는 경성운동장 근처에 원산프로덕션 경성촬영소를 설립하고 영화촬영을 시작했다. 원산프로덕션에는 조선의 유명 영화인인 나운규가 합류하여 영화 제작에 참여하고 있었다. [자료] 원산프로덕션 경성촬영소 개소식(《조선신문》, 1930.12.14.) 설립 초기 대일본흥업회사는 사장 와케지마 슈지로, 전무취체역 나루키요 다케마쓰(成淸竹松), 취체역에는 도야마 미츠루, 사토 카츠타(佐藤勝太)가 맡았다. 대일본흥업회사 원산프로덕션에서는 나운규가 출연한 <금강한>(1931)을 비롯해 <남편은 경비대로>(1931), <경성 온 퍼레이드>(1931)와 같은 영화가 제작되었다. 하지만 대일본흥업회사의 영화제작 활동은 평탄치 않았다. 도야마 미츠루가 회사를 탈퇴하자 영화제작은 한동안 소강상태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쇼치쿠에서 활약하던 야마자키 유키히코(山崎行彦)가 합류하고 무용가 배구자(裵龜子)의 극장 설립을 돕고 있던 이필우가 합류하면서 대일본흥업회사는 경성극장 뒤편에 경성촬영소를 짓고 영화촬영을 재개하게 된다. 이로써 와케지마의 경성촬영소는 제2기를 시작한다. 1934년부터 1937년 사이에 경성촬영소에서는 3편의 무성영화와 6편의 토키영화가 제작되었다. 이중에는 조선 최초의 토키영화인 <춘향전>(1935)과 나운규의 마지막 작품인 <오몽녀>(1937)가 포함되어 있다. 경성의 대표적인 연극장으로 운영되던 경성연예관은 1935년 9월 3일 개축되었다. 종래의 기석(寄席) 형태의 극장에서 좌석을 확대하여 정원을 늘리고 끽연실, 휴게실, 화장실 등을 정비하는 등 극장 안팎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이름도 종래의 경성극장으로 되돌아갔다. 경성극장의 운영주 와케지마 슈지로는 1937년 명동 중국영사관 부지를 인수하여 극장을 세울 계획을 세우지만 실패한다. 와케지마는 경성촬영소를 고려영화협회에 매각하고 1939년 봄 강원도 철원의 철원극장을 인수하여 근거지를 철원으로 옮기게 된다. 이에 따라 1939년 3월 1일부터 경성극장의 운영권은 와케지마에서 도쿄 후지흥행부의 마쓰오 구니조(松尾國三)에게 넘어가게 된다. [자료] 상설영화관으로 바뀐 경성극장( 『キネマ旬報』(제57호), 1942.08.21) 새로운 운영자들은 경성극장을 영화관으로 개축하였다. 1939년 9월 개축공사가 완료되고 상설영화관으로 인가를 얻게 되자 경성극장은 10월부터 신코키네마의 조선봉절관으로 운영된다. 신코키네마 봉절관이던 경성극장은 영화법 제정과 함께 영화산업의 통폐합으로 1942년 신코키네마가 해산되어 다이에(大映)로 통합되자 다이에 직영관으로 운영되었다. 당시 영화순보의 기록을 토대로 살펴보면 1943년 현재 경성극장은 흥행주는 다이에, 지배인은 가와무라 타다시(川村正)였으며 총 7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경성극장은 해방 후 이름을 서울극장으로 바꾸었으며 적산관리인은 강상률이었다. 하지만 국제극장이 시공관으로 바뀌게 되자 1947년 12월 전 국제극장 관리인이던 김양성이 강상률을 대신하여 서울극장의 적산관리인이 된다. 김양성이 운영하던 서울극장은 6.25전쟁 중 파괴되어 재건되지 못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김태현,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김계자,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박이정, 2018. * [사진](상단) 1921년 설립된 경성극장 [자료] 매일신보 1929.02.14. 십삼일 조(朝) 본정(本町)에 대화(大火), 폭풍에 불길 날려, 경성극장 소실! 화재원인은 실화인모양, 전부 사호(四戶) 사동(四棟) 전소(全燒) 작13일 5시35분에 본정3정목 경성극장 2층에서 실화(목하 조사 중)로 불이 일어나 때마침 불어오는 맹렬한 폭풍에 불길은 기세를 얻어 동극장 360평 3층 1동을 전소하고 이웃집 4동 4호를 회신한 후 동6시40분경에 진화하였다. 손해 십여만, 사상( 死傷) 도 있다, 소방조원의 결사적 활동, 마치 활동사진 같이 이번 불은 금년 이래 제일 큰 화재로 그 피해금액은 십여만원의 거액에 달하며 더욱이 福田소방조원이 참사한 희생까지 있었고 이 외에도 동극장의 하인 崔順吉의 일개월 가량의 화상과 소방조원들의 부상도 다수하였다. 화재의 당소는 상점, 회사, 요리점 등의 宏大한 건물이 즐비하야 남부 일대의 시민의 소동은 그 극에 달하였고 소방조원의 연소를 방어하는 활동 등 실로 전란의 한 당면을 방불케 하였다. 보험은 7만원 금번 재난을 당한 경성극장은 주식제로 古城사장, 村上전무의 손으로 경영하여 오든 터인데, 동극장은 일직 7만원의 화재보험이 있었고 동일 10시경부터 본정 3정목에서 중역회의를 개최하고 선후책을 토의하는 중이더라. [자료] 동아일보 1927.05.09. 경극(京劇)에 불경사건(不敬事件), 천황폐하 어진으로 흥행타 임장한 경관에게 발각되어, 배우 6명 본서에 인치(引致) 동경에서도 이름 있는 현대극단 원산만(遠山滿) 일행 47명이 재작 칠일 밤부터 시내 수정(壽町) 경성극장(京城劇場)에서 연행을 하게 되었던바 동 아홉시 경에 둘째로 상연한 현대극 피묻은 군도(血染軍刀) 제3장에 이르러서 황실 존엄에 대한 불경한 거조가 있다고 하야 돌연히 임장하였든 소관 본정서 횡산(橫山) 경부보가 중지를 명령하는 동시에 극단장 원산만이라는 본명 소원록(小原綠)(35) 등 배우 영정복(永井福)(34) 무대감독 파가철조(破家哲助)와 및 동 극장 막짓는 사람 길미말태랑(吉尾末太郞)(49)과 원산극단측 막짓는 사람 인여정칠(人與淸七)(51)과 옥정자삼(玉井滋三)(34) 등 여섯명을 본정서로 데려다가 검속한 후 동극단의 경성흥행을 중지케 한 사실이 있어서 일시는 대 혼잡을 이루었다는데 그 내용은 전기 각본은 니항(泥港)에서 전사한 성야소좌(星野 少佐)에 대한 연극인대 제3장은 “성야가의 안방”이라고 한 장면인바 성야 소좌가 전사한지 일 년 제일을 당하야 그 미망인 추자(未亡人 秋子)가 성야 소좌의 사진을 불단에 놓고 제를 지내고자 할 즈음에 그와 비밀한 관계가 있는 등전광(藤田光)이라는 남자가 들어와서 그 사진을 깨처버리고자 하며 불의의 짓을 하는 마당인데 그 불단에 올려놓은 사진을 성야 소좌의 사진 대신 모 일문신문 3월 5일부 부록인 천황폐하(天皇陛下)의 어진을 모시어 놓고 그와 같이 연극을 행한 것이라더라. [자료] 동아일보 1939.09.29. 신흥 봉절관(封切館)으로 / 경성극장 개관 개축공사가 완성된 경성극장은 그간 신청 중이던 상설영화관으로서 인가도 되겠음으로 1일부터 4일까지 동보단원(東寶劇團) 일행 100여명의 출연으로 개관. 5일부터 신흥키네마 조선 제일 봉절관으로 본격적 흥행에 들어설 모양이다. 이에 앞선 30일은 피로초대관극회(披露招待觀劇會)를 개최한다는 바 이로써 경성에도 송죽의 명치좌, 동보의 약초극장, 일활의 황금좌와 함께 신흥의 경성극장이 서로 꽃다운 홍업전을 연출하게 되었다.
ㅁ 1. 유락관 유락관은 오쿠라구미(大倉組)의 오쿠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郎)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자본금 7만5천원의 연예주식회사가, 세계관이 가진 활동사진흥행권을 5,000원에 매수하여 1915년 설립한 영화관이다. 개관식은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가 한창이던 1915년 9월 12일에 열렸다. 9월 19일에는 개관과 영업을 축하하는 신축낙성축하회(新築落成祝賀會)가 개최되었고 영업은 9월 20일 오후부터 시작되었다. 극장의 운영은 출자자 중 한명인 경성호텔(京城ホテル)의 나카하라 테츠오미(中原鐵臣)가 맡았다. 유락관은 혼마치 중심지에 건립되었는데, 인접해 있던 다카키상점(高木商店), 미쓰코시오복점(三越吳服店), 백삼십은행(百三十銀行), 쓰카타니잡화점(塚谷雜貨店) 등이 화재의 위험을 이유로 설립에 항의하면서 당국으로부터 월 2주의 활동사진흥행 허가만을 얻었다. 또한 대정관과 수좌가 상영하고 있는 닛카츠 필름을 똑같이 상영하면서 일본인 상설관 3곳이 닛카츠 필름을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유락관은 개관 초기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1915년 말에 이르면 5,000원에 가까운 적자를 보았고 극장운영을 책임진 마쓰이(松井) 지배인이 야반도주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자료] 희락관의 외관(山田勇雄, 『大京城寫眞帖』, 中央情報鮮溝支社, 1937) 개관 이후 장기간의 휴관과 개관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유락관은 결국 매물로 나왔고 황금관을 운영하던 하야가와 마쓰타로가 이를 매수, 황금관을 대신하여 근거지로 삼게 된다. 하야가와연예부가 운영하는 유락관은 1917년 3월 22일 개관했다. 이후, 1917년 7월 27일부로 연중무휴의 활동사진 흥행 허가를 받은 유락관은 고바야시상회에서 필름을 배급받게 되면서 황금관과의 필름 중복문제도 해결하여 큰 폭의 약진을 하게 된다. 유락관은 닛카츠나 텐카츠에 비해 소규모 영화회사이던 고바야시상회의 필름을 공급받았기에 연극부 변사들을 이용한 연쇄극과 실연을 통해 관객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고바야시상회가 도산하여 유니버설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되자 유락관에서는 유니버설로부터 필름을 공급받아 유니버설의 연속영화와 블루버드, 레드페더 영화를 상영하는 양화관으로 전환하게 된다. 하야가와연예부는 유락관으로 이전하기 직전, 울산 배경의 연쇄극 <문명의 복수(文明の復讐)>를 제작하여 황금관에서 상연한바 있었다. 이후 유락관으로 이전하고 나서는 황금관과 경쟁하기 위해 영화제작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19년 황금관에서 제작하여 상영한 부산의 출정군인 나카후치 센타로(中淵仙太郞) 일가의 비참한 삶을 그린 <누의 가(淚の家)>에 자극을 받아 유락관에서도 조선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제작했다. 하야가와연예부에서 직접 각색하고 도쿄의 고바야시상회에 의뢰하여 제작한 <아, 스즈키교장(嗚呼鈴木校長)>이 바로 그 영화이다. 1918년 12월 5일에 용산 원정심상고등소학교(元町尋常高等小學校)에서 발생한 화재로 교사가 소실되자 그 책임에 불속에 몸을 던져 자결한 스즈키(鈴木志律衛) 교장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1919년 4월 28일 개봉되어 5월 6일까지 연장 상영되었다.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하야가와연예부는 유락관을 나가사키에 근거지를 둔 만카츠에 매각하였다. 만카츠가 인수한 유락관은 1919년 5월 8일 만카츠의 다른 극장들과 마찬가지로 희락관(喜樂館)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닛카츠계통의 영화관으로 운영된다. 2. 희락관 1919년 5월 8일 만카츠 직영으로 개관한 희락관은 서양영화 전문관으로 쇠퇴하고 있던 유락관과 달리 일본영화와 서양영화를 섞어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이중 일본영화로는 대정관이 독점하고 있던 닛카츠 영화를 상영하였다. 1920년 닛카츠가 경성출장소를 설치하고 고지마 사다시치(小島定七)를 주임으로 임명했다. 닛카츠의 부사장 요코다 에이노스케(横田永之助)가 희락관의 주주이었던 관계로 희락관은 만카츠 직영에서 닛카츠 직영으로 바뀌었다. 만카츠가 직영하던 시기부터 희락관에서 활약하던 요코야마 후미오(橫山富美雄)가 계속하여 운영을 맡았는데 요코야마가 운영하던 희락관은 설명을 잘하는 변사가 많기로 유명했다. 닛카츠 직영인 희락관이 닛카츠의 주요 영화를 상영하게 되면서 닛카츠 조선대리점인 대정관과 갈등을 빚게 된다. 희락관은 대정관과 협의하여 대정관에서는 마키노 쇼조(牧野省三)가 연출하고 이치카와 아네조(市川姉藏)가 출연하는 니카츠 대장군촬영소(大將軍撮影所) 제2부의 영화(현대물)를 주로 상영하고, 희락관은 일본 최초의 대스타이자 1,0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한 오노에 마쓰노쓰케(尾上松之助)가 출연하는 닛카츠 대장군촬영소 제1부의 영화(시대물)를 상영하기로 협정을 맺었다. 대정관과 희락관의 협정은 1921년 닛다연예부가 더 이상 닛카츠 영화를 상영하지 않기로 하면서 깨졌고 이로써 희락관은 경성의 유일한 닛카츠영화 개봉관이 된다. 1922년, 희락관의 운영자가 요코야마 후미오에서 유바 시게미츠(湯場重光)로 바뀌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평양 해락관(偕樂館)에 있던 마쓰다 마사오(松田正雄)가 운영을 맡게 된다. 마쓰다가 운영하던 시기 희락관은 영화선전에 가장 능한 영화관으로 정평을 얻었고 경성의 일본인 상권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기에 대표적인 경성의 일본인 영화관으로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당시 수준 낮은 오락영화라고 평가받던 연속영화나 오노에 마쓰노스케가 주인공을 맡은 인술(忍術)영화를 주로 상영하여 언론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위치상 이점으로 인해 희락관은 다른 영화관들에 비해 많은 관객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1924년 대정관을 경영하던 닛다연예부의 닛다 슈키치(新田秀吉)가 마쓰다 마사오를 지배인으로 두고 희락관을 잠시 경영한 적도 있었다. 닛다 슈키치는 1925년부터 대정관 운영에서 손을 떼고 희락관을 쇼치쿠 계통의 영화관으로 전환하려 했지만 희락관의 대주주가 닛카츠의 요코다 에이노스케였기에 이에 실패한다. 닛다 슈키치에 이어 마쓰다 마사오가 다시 희락관의 운영자가 되면서 희락관은 경성의 흥행계를 주름잡게 된다. 1927년 무렵 닛카츠 직영관 중 굴지의 수익을 올리고 있는 경성 제일의 인기관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1928년 무렵 경성과 용산 사이에 위치한 경룡관이 닛카츠 계통이 되고 과거 경성부청 자리인 혼마치 입구에 제국키네마 영화를 상영하는 낙천지(樂天地)가 생기면서 희락관은 관객 동원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당시 희락관의 주요 관객들은 영화관 뒤편의 게이샤 거리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희락관은 닛카츠 시대극이 인기를 끈다는 평을 얻었다. [자료] 마지마 우메기치의 모습 (조선신문 1937.02.09) 1930년대 들어 희락관의 운영주는 마쓰다 마사오(松田正雄)에서 마지마 우메기치(間島梅吉)로 바뀌게 된다. 희락관의 새로운 경영자가 된 마지마는 일찍이 조선으로 건너와 명치정에 마지마상회(間島商會)를 열어 크게 성공한 실업인이었다. 희락관을 운영하게 된 마지마는 1931년 10월 거액을 들여 희락관을 증축하기로 계획하고 스팀설비를 갖추는 것을 비롯해 발성영사기 설치, 관람석의 개조, 해설 음악 선전부를 충실히 하는 등 대대적인 개조를 하게 된다. 여기에 1933년 4월 1일부터 닛카츠가 가지고 있던 희락관에 관한 권리를 포함하여 일체를 인수하게 되면서 희락관은 닛카츠 직영에서 마지마흥행부로 그 운영 주체가 바뀌었다. 희락관을 인수한 마지마는 종래와 마찬가지로 닛카츠와 특약을 맺고 우수한 토키영화를 상영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자료] 희락관의 개장기념 광고 (조선신문, 1931.10.10) 희락관은 1936년 9월 다시 한 번 크게 개축된다. 희락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가장 크고 호화로운 영화관인 명치좌가 들어설 예정이어서 희락관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1939년 토키영화관으로 신축한 황금좌가 오랫동안 희락관이 가지고 있던 닛카츠 개봉관이라는 지위를 빼앗아 가면서 낡은 영화관이라는 인식이 있던 희락관은 닛카츠 2번관으로 전락하게 된다. 희락관의 위상과는 상관없이 희락관 운영주 마지마의 영향력은 점차 커졌는데 1935년 마지마는 경성부위원에 당선되었고 1942년 조선흥행연합회 이사장의 지위로 일제가 전시체제 하의 영화배급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조선영화배급사의 이사로 있었다. 희락관은 해방 직전까지 운영되다가 일제의 패전 직전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는데 해방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소실되기 전 희락관은 총 1,050석의 객석을 갖추고 있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김태현,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김계자,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박이정, 2018. [자료] “巡回活動 「愛の極み」 劇 撮影終了す”, 《京城日報》, 1922.03.21. 來月十五日から釜山から 全鮮を巡回上場す 來る四月十五日から本紙愛讀者慰安の爲め全鮮を巡廻する本社活動 寫眞は本社員八島柳當氏脚色 愛の極み を上演する事となり二月初旬 より撮影にかゝり仁川月尾島,京城市街,朝鮮の代表的靈山金剛山等を 背景に幾多の苦心を費し去る十七日漸く撮影を終り直に現像し旣報の通 り來月十五日から釜山を振り出しに鮮內各地を巡回上演の筈である。 劇の梗槪 本社主催仁川海水浴場大會が催された日は晴れ亘った、一際の凶變に は應はしからぬ日であったが、暑い陽光の降り注ぐ下を群を離れて獨り貝 拾ひをしながら磯を傳って行く小鳥の樣な乙女があった、彼女が岩を亘り 步くうちに可憐な凶變が釀されて居たのである。此の麗しの乙女こそは、今 京城に時めく銀行家朴炳熙氏の令孃貞玉で今日の催しに京城から伴れ來 のであった。又此の時, 名も無い一人の京城に在住する畵家が仁川の海邊 で熱心に、陽の下に憂鬱を海のスケッチに懸って居った、時の經ると共に潮 は膨れ上がって來て地續きで有った磯邊には急に島となる樣な處が多 かった。此の翼を持たぬ小鳥貞玉も亦何時かその離れ小島の孤獨な守人 となって了った、然し未だ未だ潮は膨れ上がって來る。島は沈んで行く。彼 の女の悲鳴が平靜な溱の中に凶々しい悲調を投げた。一方スケッチに心を 取られて居った畵家はこの慘々しい悲鳴に依って呼び覺まされ小舟を求めて、 浪間の岩より貞玉を救ひ出した。事も無げに畵家に再び畵架に向った。 名を貞玉のために語ることをも仕なかったが、貞玉は繪道具の隅から勝 木と云ふ姓を認めた、又その執筆中の繪には今の危い岩も有った。勝木と は勿論畵家の姓で名は忠雄と云った。彼は父を戰場に失つて眼の惡い病 弱の母と妹の露子と三人のために、京城日報の配達に從事して居った。子 の苦鬪を見兼ねた病母は遂に自殺して失った。彼等兄妹の數日の後まで 續いた。そのうち勝木か或る鮮人邸に配達した時門前で思ひ懸け無く貞玉 に會った。 貞玉は恩人の忠雄を逃して失った貞玉は其の頃同じ銀行家の令息趙永 植から結婚の申込を受けて居ったが彼の女の魂の中では忠雄位光って居 るものはなかった。 其頃の京城では稀らしく盛大な新進畵家の展覽會が京城日報社の來靑 閣で行はれた、勝木忠雄も或海岸を出品した、その作品を見出して買び 上げたのは婦人であったが、婦人の求め樣とする價額の高價は淸廉な忠雄 を驚かした。婦人は忠雄の高潔な言葉を取次がれて益々憧れの心を燃し た。間も無く勝木は朝鮮美展出品製作のために金剛山に出た。兄を金剛山 に送るために妹の露子は工場に通って居ったが、自然の惡戱は益々烈しく なって來た工場の歸途一臺の自動車は彼の女を轢き倒した。車の中から驚 き飛び出して來たのは貞玉であった。露子は貞玉の家に引き取られた。姉妹 の樣に成つた貞玉と露子はふとした話から勝木との因緣を知り二人其金 剛山の忠雄を慕ふたので遂に二人は金剛山に向った。 是を見て驚いたのは貞玉に思ひを寄せる趙永植である、彼は直に彼女等 の自動車を追った。次は山中の光景であるが、誤つて趙永植が谷間に墜落 したので、露子が救け樣として是は遂に一命を落すに至る負傷をした。人の 性は善と云ふ例え、永植は立派に貞玉と走せつけた忠雄の爲めに彼等の握 手を助けた。遂に貞玉と忠雄の夢が現實と成る日か來たのである。 妹を失って戀人を得た忠雄は男の心を亂して悲喜交々として露子を歸らぬ旅 へ送り、貞玉をその傷める胸に抱き締めて泣した。此處に始めて勝木は人 生の明るみに出て來た樣な幸福を感したのである。 此の劇の中に植付けられた人情は總て可憐な美、正しきもの、淸楚なも のである是を以て本社が讀者の慰安會材料と爲すに決した事は家庭的見 物として實に應はしいからである。幸ひに讀者諸士よ、此の貧しい節書きを 離れてそのフヰルムの中に如何なる情景、如何なる美景が取入れてあるか な待たれよ。 愛の極み 撮影を了りて 八島柳堂 愛の極み の作者として又脚色から撮影監督迄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 た私は可也の苦心を味はされた第一筋が高尙であらねばならぬと云ふ事 と內鮮人向きたるは勿論學生に觀せそも差支のないものと云ふ難しい條 件附きなので何うしたら此條件を全ふし面白く觀せる事が出來るかに就 て隨分頭を疲れさせた。 或時は出張先の宿屋で思索に耽る事黎明四時に及びやっと書き上げて 脚色の段となって此處も工合が惡い彼方も拙いで又一苦勞させられた 愈々撮影に取掛って見ると折角選定して置いた室が意外にも暗くて撮影 技師から苦情を申込まれたりして眞實に苦しい思ひをさせられた、而し役 者は藝術の爲めにはドンナ事でもすると云ふ約束もあったので私の云ふ 事をよく聞いて働いて吳れた貞玉と云ふ婦人を貧乏畵家が救助の場面等 は此寒空に海ベラの夏衣裳で荒浪の海中へ飛び込まして活躍をさせたの で四肢の感覺を失ひ 殺す氣ですか と悲鳴をあげられたり又或場面では 妹に粉した女優に自動車に轢かれよ運轉手は彼を轢けと命じ今から思ふ とゾッとする程危險を犯させた又金剛山中の墜落の場面では高い斷崖か ら實際に墜落せよと命じ 恐いわよ恐いわよ と女優に泣かれ實際同情せ ずにはゐられなかった是は替玉を使へば何んでもない事であるが眞實に劇 を生かして見せる上から云ふと此位の危險は犯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 危險を敢て犯かさせた而し大した怪我もなくって胸を撫でなから天祐を 嬉んだ役者諸君は撮影監督としての私を隨分恨んだ事であろう而し之も 立派な寫眞が作り度い一念からであ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