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섬
- 감독
- 송일곤
- 제작년도
- 2001
- 출연
- 최지연, 정승길, 박길수, 김홍수, 백현진, 류동원, 조영찬, 임유진, 김혜나, 손병호, 서주희, 유인수, 장영규, 볼빨간, 김일, 김주복, 최민금, 고용하, 김다은
영화 < 꽃섬 >이 불러일으키는 환각은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판타지가 아니다. 그래서 더 특별하다. 이 이야기는 사실임직함(vraisemblance)의 원칙을 어기는 로마네스크의 진실에 가깝고, 그리하여 내면을 되돌아보게 한다. 2001년 처음 이 작품을 접했을 때 ‘작가영화’란 단어를 떠올렸다. 확실히 <꽃섬>은 상업영화의 반대지점에서, 엘리트적이고 까다로운 예술영화의 취향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하지만 15년 후 다시 보니 ‘문학적 해석의 뉘앙스’가 풍부하다는 점이 돋보인다. 두 종류의 화면이 교차되는 까닭에 이미지는 지속적으로 파편화되고, 장르적 기대치는 엇갈린다. 로드무비의 요소를 갖추었지만 ‘자동차’ 혹은 ‘도로’가 상징하는 개인의 자유가 이곳에는 없다. 지도상의 남해는 공식적 지명일 뿐, 그곳에 가는 방법은 소개되지 않는다. 꽃섬 역시 짐작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지형뿐 아니라 개별 요소도 마찬가지다. 마치 호러영화 장면처럼 칼을 꺼내 든 운전사는 극적 소명을 다 하자 북쪽으로 사라지고, 산속에서 만난 노인은 여인을 치료해준 뒤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요컨대 이 극에서 악의, 혹은 선의에 대한 되갚음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사건이나 목표가 존재하고, 이를 되돌리기보다 ‘운명성’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꽃섬>은 지독히 금욕적인 영화다. 이 작품이 지닌 고아한 아름다움의 비밀은 실상 이 고행적인 성격으로부터 나온다. 2000년 초반의 한국영화의 환상성은 ‘현실’과의 관계 맺음을 통해 자신을 조율했다. 비슷한 시기 나온 < 동감 >(2000)이나 < 시월애 >(2000), < 번지점프를 하다 >(2000)와 < 소름 >(2001) 등과 비교해도 그렇다. < 꽃섬 >의 이야기는 불합리한 상황을 출현시키기 위해 현실적 전제, 또는 비정상적인 것의 토대가 되는 정상적 범주를 소개한다. 공포의 효과를 직접 드러내는 것보다, 이처럼 노스텔지어적 개별 과거가 재현될 때 극은 더 진실해진다. 더불어 의사 현실(pseudoreal)의 경향은 관객에게 실재의 이미지가 아닌, 현실감각에 바탕을 둔 아날로그적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만든다. 현실 유리적인 상황이 스크린의 유토피아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바깥 현실이 방해하더라도, 내적 상상력은 커질 것이다. 인물들은 멈추지 않고 꽃섬으로 나아가고, 그곳에 도달하더라도 정말 도달했다고 단언할 수 없게 된다. 테오도르 모노의 말처럼 ‘유토피아’는 실현 불가능하지 않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허상의 장소이다. 마찬가지로 꽃섬에서 인물들의 불행은 사라지지 않는다.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고, 현실은 여전히 그로테스크하다. 어쩌면 영화의 감동은 이 현실과 비현실의 균형 감각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장르 혹은 미학적 측면이 아닌, 내면의 초자연적 경험을 통해 영화는 ‘시간의 일탈’을 완성한다. 결정적 사건의 부재에서 시작된 시간의 상쇄는, 디지털 이미지의 콜라주를 통해 조합된다. 혜나의 손에 들린 디지털카메라가 그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한때 어느 것보다 무거웠지만 이제는 한 인물의 머리보다 작은 뉴미디어의 등장,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의 머릿속에 미래가 반사된다. 무언가가 분명히 사라질 것이란 불안감이 정서를 장악한다. 노스텔지어란 모름지기 새롭게 만나게 되는 것을 볼 때 발생하는 감정의 추락이다. 이처럼 불시에 출현하는 디스트락시옹의 테마가 < 꽃섬 >의 패치워크를 완성하는 동력이 된다. 다시 말해 이 영화의 로드무비적 동력은 자동차의 모터가 아니라, 사라짐의 미학이다. 쇠락의 아름다움을 통해, 35mm 은판 영화술을 대체할 ‘디지털 시네마’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면 너무 과장된 비유가 될까. 다시 보니 송일곤 의 < 꽃섬 >은 ‘영화감독의 영화’라는 작가적 인상보다, 상징적 뉘앙스가 가득한 시에 더 가깝다. 한때 ‘폐기된 무언가’였던 인물들이 ‘폐기될 무언가’로서 아날로그 필름을 직시하고 있다. 마치 고다르의 현대영화가 지닌 리리시즘을 2000년대 초반의 송일곤은 추종했던 듯 보인다. 하지만 이 과도한 서정성의 위험에서 연출자는 끝내 자신을 보호한다. 현기증의 연속인 내면의 시간은 현실과 어우러진 설득력을 얻고자 타협한다. 극 중반을 스쳐 지나간 다양한 에피소드들은 결단코 전체의 하모니를 부수거나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다만 더 나은 것을 향한 기다림으로 포장될 뿐이다. 기다림이야 늘 좌절되는 것이니 실망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과거로의 함정이 <꽃섬>의 성공 전략이 된다.
사고를 당해 수술을 받은 강민. 그가 깨어나 처음 한 말은 거미숲에서 두 사람이 죽었다는 것. 그리고 발견된 사체는 강민의 상사와 강민의 연인. 그로 인해 강민은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지만 그의 조각난 기억과 지워진 시간은 도무지 맞춰지지 않는다. 간간이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들을 이리저리 맞춰보며 사건과 자기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혼란스러워하던 강민은 ‘거미숲의 전설’에 대한 제보를 받고 취재를 떠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초현실적인 일련의 일들과 마주치면서 자신의 머리 속에 헝클어져 있는 기억의 끈을 잡아낸다. 송일곤 감독의 < 거미숲 >은 산문이 아닌 시다. 따라서 헐리우드 스타일의 내러티브 영화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구석이 있다. 제목과 시놉시스만 가지고는 스릴러 영화의 범주에 들지만 실제로 영화의 전개는 시간의 흐름을 좇아가며 사건을 해결해가는 쾌감을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면에 저장되고 각인된 무엇을, 그 조각을 따라가며 하나씩 맞춰가는 고난도의 퍼즐 같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고 모든 일의 발단이며 기억의 혼재 그리고 일그러진 시공간이 되는 거미숲은 결국 강민의 무의식과 다름 아니며, 그의 의식이 교묘하게 자신에게 유리하게 기억의 조각들을 편집하고 있을 때 그에 대항해서 혹은 그에 상관없이 기억과 경험을 뭉뚱그려 그러안고 있는 무의식으로 고개를 돌려 내면을 직시하게 하는 근원인 것이다. 숲은 신비로운 곳이다. 숲은 아늑하고 아름다운 곳인 한편 위험하고 불안한 곳이다. 숲으로 들어가는 사람에게 보호와 안식을 주기도 하지만 숲에 들어온 사람을 위협하고 출구를 막아버리기도 한다. 그런 숲은 결과적으로 강민의 무의식 속에서 해체되고 재편집된 일련의 사건들과 무의식 속에 녹아있는 기억을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게 하는 비밀스럽고 은밀한 공간이 된다. < 거미숲 > 개봉 즈음, 송일곤 감독과 인터뷰를 하면서 “당신의 영화에는 어딘가 구도적인 느낌이 있다”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 꽃섬 >이후 <거미숲>에서도 실재하는 공간 같지만 실재하지 않는 공간,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꿈을 꾸는 것처럼 단편적인 장면들이 툭툭 던져지는 전개, 내러티브가 있고 줄거리가 있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어서 헐리우드 영화보다는 미장센을 중시하는 유럽의 영화와 많이 닮아있는, 그리고 인간의 외면으로 사건을 돌리지 않고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기법이 시와 구도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 것이다. 감독 스스로는 구도적인 의도로 영화를 만들지 않았지만, 인간에 대해 존중감을 갖고 있고 안간 내면을 들여다볼 줄 아는 눈을 가진 그의 무의식은 아마도 그런 부분을 영화에 반영해 놓았던 것이리라. 그 숲에 가면 기억은 길을 잃는다,던 영화의 카피처럼 영화는 당신에게 설명하거나 당신을인도 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당신은 강민과 함께 숲-무의식을 헤매며 강민의-당신의 기억의 단편들을 손에 쥐고 혼돈과 절망 속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문득 강민의-당신의 기억이 의식의 표면위로 떠오를 때 예리하고 또렷한 통증과 슬픔을 함께 느끼게 될 것이다. < 거미숲 >은 한국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무의식 속을 구도자처럼 걷게 만드는 드문 영화이자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거울과도 같은 작품이다. 사실 우리 인간은 나약하다. 나약해서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스스로의 무의식과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한다. 아니 무의식의 혼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무의식의 세계는 이성적으로 설명되고 판단할 수 있는 코스모스가 아니라 카오스의 세계이기 때문에. 하지만 마주보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우리 자신의 본질과 마주쳐 극복해야 우리 자신을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시킬 수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