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설이다
- 감독
- 프란시스 로렌스
- 제작년도
- 2007
- 출연
- 윌 스미스, 아리스 브라가, 대쉬 미혹, 찰리 타한, 파라독스 폴락, 스터링 울프, 샐리 리차드슨
<백룸> 중 (사진: IMDb / © A24) 기억에 남는 불안이 있다. < 1917 >(샘 맨데스, 2019)에서 데번셔 연대의 무모한 돌진을 막아낸 스코필드가 블레이크의 형을 찾아 야전병원 막사에 당도했을 때, 나는 영화가 쌓아온 서스펜스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불안에 사로잡혔다. 막사 저 멀리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 순간부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화 내내 스코필드에게 밀착해 있던 카메라가 거의 유일하게 인물을 놓아두고 홀로 날아오르기 시작했고 끝내 그 나무 아래서 이야기의 문을 닫는다. 눈을 뜬 남자가 한바탕 소동을 끝내고 다시 나무 아래서 눈을 감는 이야기. 헛웃음이 나올 만큼 도식적인 수미쌍관 구성은 경탄스러운 카메라 무빙을 한 편의 허탈한 동화로 바꿔놓았다. 극장을 나서며 이렇게 적었다. “대체로 무용(無用)한 것들을 사랑하는 편이다. <1917>은 카메라의 쓸모, 자신의 효용을 수다스럽게 떠들어대는 것 같아 왠지 안쓰러웠다. 문득 침묵할 줄 알았던 카메라들이 그립다.” 당시 편협한 판단을 요약하면 이렇다. <1917>은 촬영 방식이 제일 앞자리에 놓인 영화다.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 스스로 밝혔듯 이 영화에서 물리적인 아날로그 롱테이크는 최장 7분 남짓, 나머지는 교묘한 트릭으로 이어 붙인 착시다. 끊어지지 않는 카메라를 위해 서사가 설계됐는데, 결과적으로 이야기 구성은 기이하리만치 게임에 가까워졌다. 참호에서 트럭으로, 불타는 마을에서 강물로 이어지는 여정마다 이름난 배우들이 마치 게임 속 NPC처럼 배치되어 병사를 다음 구간으로 안내하는 방식이다. 요컨대 서사를 위한 카메라가 아니라 카메라를 위한 서사가 되어버렸다. 말하자면 <1917>의 연결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의 결과가 아니라 ‘연결시키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산물이다. 그 유려한 롱 컨티뉴이티 숏은 전장을 재현하는 대신 관객을 안전한 가상현실로 소환해 버린다. 영화적인 것,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을 극한까지 추구한 결과가 역설적으로 영화로부터 멀어지는 기이한 종착지에 다다른 셈이다. 2020년 무렵의 나는 그 어긋남을 두고 ‘영화를 향한 향수병’이란 딱지를 붙였다. 한없이 가까워지고 싶지만 끝내 다다를 수 없는 곳을 바라보며 앓는 병. 향수병은 애초에 돌아갈 수 없음을 전제로 성립하는 상태이므로 그리움에 사로잡히는 순간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뒤늦게 고백한다. 그땐 일말의 허세와 더불어 형식주의자를 향한 결벽 비슷한 감정이 작동했던 것 같다.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에 유난히 위화감을 느끼는 편이다. 스타일에는 목적과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고 싶은 말이 어떤 결과물로 이어진 형태가 곧 형식이어야 한다고 믿어왔다. 그렇기에 방향과 결과, 의지와 형태가 어긋난 순간들을 만나면 한참 생각에 잠기곤 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원래 하고 싶었던 게 뭘까. 시간이 흘러, 정확히는 새로운 세대의 물결을 겪으며 질문의 방향이 슬며시 바뀌는 중이다. 그렇게 마르고 닳도록 입에 올리던 ‘영화적인 것’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런 고정불변의 대상이 있긴 한 걸까. 영화가 무엇인지 묻는 것만큼 본질적이고 동시에 바보 같은 질문도 없다. 그건 목적지라기보단 그저 지향에 불과하다. 본래 큰 질문에서는 답을 이끌어내기 어려운 법이다. 현 시점 내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건 ‘영화적인 것’이란 지표에 절대성 따윈 없다는 믿음이다. 아주 협소한 경험에 근거하여, 영화적인 것의 실체는 ‘경험에 근거한 익숙함’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한 시절의 관습이다. 심지어 이 관습의 수명은 길어야 20~30년, 대체로 한 세대보다 짧은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체험을 절대적인 것이라 믿는 경향이 있다. 1950년대에 완성된 몇몇 형식들을 ‘시네마틱’이라 일컫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거칠게 말해 오늘날 영화적인 것이라며 유통되는 상당수의 기법은 1950년대 이후, 좁게 잡으면 1970~80년대에 유행하거나 영향을 미친 스타일에 가깝다. 이를테면 슬로우 시네마가 롱테이크를 거쳐 시간을 활용하는 방식이 그렇다. <1917>의 롱 컨티뉴이티 숏이 증명하고자 한 ‘영화적인 접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로저 디킨스의 카메라도 그저 본인이 만들어온(그리고 지나온) 영화라는 영토에 대한 향수에 잠긴 게 아닐까 싶은 의심. <1917> 중 (사진: IMDb / © Amblin Entertainment, ㈜스마일이엔티, ㈜씨제이이엔엠) 의심을 심화시킨 건 < 남매의 여름밤 >(윤단비, 2019)이었다. 그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내내 윤단비 감독의 심경을 상상했다. 이 젊은 창작자가 그리워하는 대상은 무엇일까. 윤단비 감독의 영화에는 지난 세기의 끝자락, 그 언저리의 여름이 고여 있다. 2층 양옥집과 낡은 선풍기, 대야에 담긴 수박, 한없이 늘어지는 오후. 흥미로운 건 영화가 재현한 그리움에 정확한 원본이 없다는 점이다. 적지 않은 시네필들이 직접 살아보거나 겪어본 적 없는 1980년대 대만 뉴웨이브의 골목을 그리워한다. 요컨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추억하기, 원본 없는 노스텔지어라고 해도 좋겠다. 엉뚱한 고백 하나 하자면, 나는 이 영화를 보다가 헤어진 적 없는 연인을 그리는 노래들을 떠올렸다. 최신 K팝, J팝을 들으며 애틋한 이별을 앓는 요즘 세대와 마찬가지로 돌이켜보면 나 역시 신승훈의 노래를 들으며 아직 겪은 적 없는 사랑을 먼저 배웠다. 그 감정은 가짜인가. 당연히 아니다. 경험의 원본이 없을 뿐, 패턴과 표현 방식을 공유하는 순간 감정은 실제로 발생한다. <남매의 여름밤>의 공간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인식 하에서 존재한다는 것처럼. 지정학적 시간에 얽매이지 않은 채 그리움의 새로운 층위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하여 그 여름밤은 감독의 것도 나의 것도 아니면서 결국 우리 모두가 지나온 무언가를 자극한다. 직접 겪지 않아도 향수병을 앓을 수 있다. 이 단순한 사실이 내게는 작지 않은 균열을 남겼다. <남매의 여름밤> 중 / © 오누필름 최근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유튜버들을 보며 다시 생각에 잠긴다. < 백룸 >(케인 파슨스, 2026)과 < 옵세션 >(커리 바커, 2026)은 흥미롭게도 모두 고전적 문법의 영화다. 10대의 침실에서 태어난 유튜브 영상 <백룸>은 캐릭터도 서사도 없이 노란 방과 형광등 소음의 이미지를 가운데 두고 해석과 재창작을 댓글창과 위키트리에 맡긴 열린 텍스트다. 반면 영화 <백룸>은 오리지널 각본 위에 배우의 얼굴을 세우고 트라우마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통과하는 닫힌 이야기다. 배우 중심의 단단한 서사, 처음과 끝이 닫힌 세계. 하지만 정작 케인 파슨스는 <백룸>을 영화화하면서 자신을 스타로 만든 유튜브의 작법을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니 그럼에도 젊은 관객들이 극장으로 몰려들었고 함께 집단체험을 공유했다. 누군가에게는 이 영화가 극장에서 본 인생 공포영화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장소가 주는 경험의 확산은 바야흐로 새로운 세대가 극장영화로 융합되는 신호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든 것이 한 번에 변하는 경우는 없다. 어떤 것은 바뀌고 어떤 건 바뀌지 않으며 디졸브 된다. 기성영화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그러하듯 프리 프로덕션 중심의 예술이다. 현장에서 찍는다는 행위 자체에 무게가 실린다. 반면 디지털 미디어는 포스트 프로덕션 중심이다. 렌즈가 포착한 진짜보다 소프트웨어로 빚어낸 진짜를 신뢰한다. <백룸>의 VHS 질감이 아날로그 카메라가 아니라 무료 3D 소프트웨어의 후반작업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파슨스가 극장에 가져온 것은 유튜브의 문법이 아니라 유튜브의 프로세스였다. 문법이 아니라 프로세스의 융합. 무엇보다 그는 새로운 문법에 집착하지 않았다. 새로움을 향한 과도한 집착이 오히려 길을 가릴 수도 있는 법이다. 디지털 네이티브가 소프트웨어로 아날로그의 유령을 위조해낸 이 제작 방식이야말로, 겪지 않은 것을 그리워하는 우리 시대의 뒤틀린 향수에 대한 완벽한 은유 아닌가. <백룸>의 배경은 1990년, 화면의 질감은 VHS다. 주 관객층인 20~30대는 그 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백룸>의 모방된 질감이 의도와 달리 그들에게 기이한 안락함을 주었으리라 짐작한다. 왜냐하면 <백룸>의 리미널 스페이스는 연결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쓸모를 강요받지 않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디지털에는 그리워할 게 참 많다. 사진을 지브리풍으로 바꾸는 필터가 유행하고, 멀쩡한 고화질 영상을 VHS 질감으로 되돌리는 레트로 변환이 놀이가 된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아도 상관없다. 질감 그 자체가 그리움의 대상이, 마음을 눕힐 안정감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남매의 여름밤>으로 대표되는 시네필 세대 창작자들과 본질적인 패턴은 다르지 않다. 사실 이건 봉준호 , 박찬욱 같은 앞 세대도 마찬가지였다. 비디오 가게와 시네마테크에서 자란 이들에게 영화는 태어나기 전의 시간까지 소급되는 고향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영화라는 고향에서 시간을 초월해 만난다. 심지어 디지털은 이 영토를 무한정 확장해 우리 앞에 소환 중이다. <백룸> 중 / 사진: IMDb( 1 , 2 ) / © A24 <백룸>을 극장에서 본다는 건 시간의 때가 묻은 노란 벽지와 형광등 불빛, 낡은 카펫에서 안식을 찾는 세대가, 인류가 가장 오래 사용해 온 어두운 방에 모여 함께 악몽을 꾸는 일이다. 생각해보면 극장이야말로 현실에서 두 시간 동안 잠시 미끄러져 나가는 이행의 공간,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리미널 스페이스다. 그리하여 출구 없는 방은 무섭고, 동시에 그립다. 아무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 공간이 과잉 연결의 시대를 사는 세대에게는 지옥이면서 동시에 도피처가 되는 셈이다. 무서움과 그리움이 한 몸이라는 이 양가성이야말로, 겪지 않은 것을 추억하는 마음과 함께 한 세대를 극장으로 데려온 힘일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고전적인 영화는 그리워할 대상인가. 그럴 수 있다. 그럼 그 시절의 감각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향수병에 빠진다, 고 생각했다.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향수에 빠진 사람들은 가만히 병을 앓는 대신 온갖 것을 시도한다. 로저 디킨스는 끊어지지 않는 카메라로, 윤단비는 원본 없는 여름밤으로, 파슨스는 위조된 VHS의 유령으로. 어쩌면 새로움은 바로 그 발버둥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도달할 수 없지만 계속 향할 수밖에 없는 욕망. 일치할 수 없음에도 한없이 가까워지고자 하는 마음. 그것은 영화와 현실의 관계이기도 하고,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창작의 동력이 될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1917>을 향수병이라 명명했을 때 내 감정의 바탕은 안타까움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겪어보지 못한 것을 얼마든지 추억할 수 있는 시대라면, 돌아갈 고향이 없다는 사실은 더 이상 병의 조건이 아니라 창작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달리 말하자면 애잔함보다는 멈추지 않는 도전과 활력을 느낀다. 그 시절 나는 극장을 나선 뒤에도 질척거리며 달라붙어 있는 영화를 더 보고 싶다고도 썼다. 어쩌면 그건 시대를 구분하며 벽을 치는 태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가 실시간으로 마주하는 건, 매체 간 문법이 섞이면서 공유되는 확장의 순간들이다. 침묵할 줄 알았던 카메라들이 그립다는 문장은 지금도 유효하다. 다만 이제 그 그리움은 앓는 소리가 아니라 무언가를 빚어내는 소리로 들린다. 향수병은 나을 수 없다. 하지만 어떤 불치병은 도리어 불사의 동력이 되기도 하나 보다. 문득 윌 스미스 주연의 < 나는 전설이다 >(프란시스 로렌스, 2007)가 떠오른다. 이것이 절멸의 길인지 아니면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길인지 아직 단언할 순 없다. 내가 서 있는 장소가 구 인류의 땅인지, 신 인류에 편입될 수 있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이미 무언가 변했고 부지런히 더듬어가며 뒤따르는 중이다. <백룸> 중 (사진: IMDb / © A24) 다시, 비평 과거에 봤던 영화가 요즘은 달라 보인다면, 관점은 언제부터, 어떻게, 어떤 이유로 달라진 걸까. 시간을 따라 서로 다른 형태와 색깔을 남긴 비평의 궤적을, 필자가 직접 뒤따라가 봅니다. 송경원(씨네21 편집장) l 영화 논문, 비평, 기자 글쓰기까지, 영화에 대한 서로 다른 리액션 사이에서 흔들리고 방황한지 15년. 이제야 영화 글쓰기가 나의 직업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2023년 《 씨네21 》 편집장이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 밤하늘의 별자리를 찾듯 영화를 보고, 읽고, 쓴다. 2009년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 2011년부터 부일영화상, 부천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서울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심사위원 등 역임. 『프로듀서』(2019), 『만화 웹툰 작가 평론선―이충호』(2021), 『마음의 일렁임은 우리 안에 머물고』(2021, 공저), 『얼룩이 번져 영화가 되었습니다』(2024) 등 집필.
영화사들이 보내는 수많은 보도자료 속에서 ‘서바이벌리스트’란 제목의 영화를 발견했다. 극장 개봉 없이 IPTV로 직행했다는 선입견에 ‘서바이벌리스트’란 제목이 더해지면서 과거 비디오가게 주인아저씨들이 독신 남성 고객들에게 추천해주었을 법한 액션영화들이 떠올랐다. 아마도 주인공은 전직 군인. 초야에 묻혀 살지만, 어느 날 그의 액션본능을 일깨우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그는 다시 살인 병기가 될 것이다. 할리우드 어디에선가 제작됐을 그 영화들도 한국에서는 극장 개봉 없이 동네 비디오 가게로 직행했다. 그럼에도 ‘서바이벌리스트’가 달리 보였던 건, 풀숲을 배경으로 찍은 한 장의 스틸 때문이었다. 주인공 남자의 얼굴이 너무 말랐던 것이다. 이렇게 삐쩍 마른 남자는 살인 병기일 수가 없다. 영화를 보고나니, 과거의 비디오가게 독신 고객들이 봤으면 잠시 현실을 잊기는커녕, 더 큰 외로움에 사무쳤을 이야기였다. < 서바이벌리스트 >는 ‘인류멸망’ 이후의 세계를 그리는 영화다. 이 소재는 재미를 보장한다. 멸망이 다가오는 시점을 포착한 영화들, 이를테면 < 딥 임팩트 >나 < 월드워Z > < 눈먼자들의 도시 >와 같은 작품은 거대한 스케일로 관객을 만족시킨다. 멸망 이후의 영화들은 세상을 리부트한 후, 새로운 상상력을 채워 넣는 재미가 있다.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나 < 12 몽키즈 > <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 같은 영화가 그렇다. 인류는 어떤 과정으로 새로운 사회를 구축할 것이며 또 어떤 시스템에서 살아가게 될 것인가. 임모탄 같은 무시무시한 독재자의 지배하에 살 수도 있고, 진화한 유인원들과 싸워갈 수도 있고, < 나는 전설이다 >의 로버트 네빌 처럼 다른 사람을 애타게 찾으며 살 수도 있다. ‘인류 멸망’이란 소재가 영화를 만드는 이들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이유다. 영화의 사이즈를 키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의 불합리성을 지적할 수도 있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철학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인류 멸망’의 소재를 다루면서 거대한 스케일도 없고, 새로운 시스템의 사회를 그리지도 않는 데다, 배경은 숲 속의 오두막뿐이고, 등장인물은 3명뿐인 영화라면 어떨까? 이야기의 배경은 어느 숲이다. 주인공 남자(이 남자의 이름은 없다)는 시체를 옮기는 중이다. 시체의 발목에는 큰 상처가 있다. 이 남자는 < 나는 전설이다 >의 로버트 네빌 처럼 자신이 사는 오두막 주변에 덫을 설치해놓았다. 그가 경계하는 건, 좀비도 아니고 정체 모를 바이러스도 아닌 그냥 사람이다. 그에게 ‘타인’이란 그저 자신을 죽이고 식량을 약탈해가려는 괴물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외부인을 경계하는 동시에 자신이 먹을 작물을 키우며 하루를 보낸다. 씨앗을 심고 자신의 소변으로 거름을 주는 일을 반복하는 그의 일상은 < 마션 >의 마크 와트니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에게 외로움이 없는 건 아니다. 그는 시체의 품에서 찾아낸 여러 사진들을 보다가 누군지 모르는 여성의 사진을 간직하며 잠시 위로를 받기도 한다. 영화는 숲을 돌아다니며 먹을 걸 찾고, 작물을 키우고, 때로는 사람을 죽이고, 밤이 되면 모든 불을 끄고 잠드는 그의 일상을 약 19분에 걸쳐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남자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혼자 있기 때문에 말이 없는 게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모녀가 그의 오두막을 찾아온다. 그들은 작물을 나눠달라고 간청하지만, 남자는 거절한다. “좀 나눠줄 수 있잖아요? 충분해 보이는데…” 영화가 시작한 지, 약 19분 만에 남자의 첫 대사가 나온다. “그런 생각이 세상을 망쳤지.” 엄마는 딸의 몸을 주는 대가로 하룻밤 묵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제안한다. 남자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딸과 하룻밤을 보낸다. 그리고 다음날. 엄마는 “딸이 당신을 마음에 들어한다”며 데리고 살 생각이 없는지 묻는다. 외로움에 지칠 대로 지친 남자는 잠시 멈칫한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그들을 내보내려는 순간, 딸은 남자의 수염을 면도해주겠다고 다가온다. 그렇게 하룻밤뿐일 거라고 생각했던 인연이 계속 이어진다. 남자는 여전히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지만, 세 사람은 함께 작물을 키우고, 함께 먹고, 한 집에서 함께 자며 지낸다. 하지만 이 모녀는 남자를 죽일 기회를 엿보는 중이다. < 서바이벌리스트 >에서 인류 멸망의 계기는 매우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설명된다. 비슷한 소재의 영화에서는 흔히 전쟁을 비추는 뉴스릴을 연이어 보여주며 설명하지만, <서바이벌리스트>가 사용하는 건 단 두 개의 선이다. 빨간 선과 파란 선. 빨간 선은 세계 인구를 나타내고, 파란 선은 석유 생산량을 나타낸다. 두 선은 곧게 상승곡선을 그린다. 그러다가 파란 선이 먼저 하향곡선을 그리고, 그래서 상승곡선에 있던 빨간 선은 잠시 후 하향곡선을 타기 시작한다. 자원이 고갈되면서 인류도 함께 감소하기 시작했다는 간결한 설명이다. 영화 속 주인공 남자의 첫 대사가 뜻하는 맥락이기도 하다. “(충분하다는) 그런 생각이 세상을 망쳤지.” 자원의 양과 세계 인구의 그래프가 평행선을 그린다면 세상은 평화롭겠지만 <서바이벌리스트>가 배경으로 삼은 것은 인구에 비해 자원이 턱없이 부족한 시점이다. 약탈과 살인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먹어야 살아남는다. 하지만 사람은 많고 먹을 건 부족하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을 죽인다. < 서바이벌리스트 >는 이 단순한 명제들을 가지고 100여 분의 시간을 풍부한 긴장감으로 채우는 영화다. IMDb 크레딧은 마틴 맥캔이라는 배우가 연기한 주인공 남자만을 ‘서바이벌리스트’로 표기했지만, ‘서바이벌리스트’는 그와 모녀, 그리고 어딘가에 살고 있을지 모르는 또 다른 사람들 모두를 뜻한다. 모두 ‘생존주의자’인 것이다. 세 사람에게 잠시 평화가 찾아온 이유는 마음속 어딘가에서 서로를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식량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날 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들이 남자의 밭을 습격하고 난 후, 이들은 다시 계산을 하기 시작한다. “저 남자를 죽이면 남은 식량으로도 우리 두 사람은 살 수 있어.” 스케일이 거대하지도 않고, 공간은 한정적이고, 인물도 적고, 대사도 거의 없는 영화가 때로는 진정한 영화적인 재미를 알게 해주곤 한다. 더이상 더할 수 있는 게 없을 때, 영화는 인물과 이야기에 더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 서바이벌리스트 > 또한 간결하고 집중력 있는 연출이 오히려 영화적인 재미를 증폭시킨 경우다. 영화를 연출한 스티븐 핑글턴 감독은 2012년에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당시 그가 세운 목표는 “CG 없이 만드는 SF영화”였다. 인류 멸망 이후 어느 숲 속에서 벌어지는 생존투쟁이라는 이야기는 그의 목표에 매우 부합하는 콘셉트였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는 할리우드의 당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와 같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드라마인데도 블록버스터가 될 수 없는 시나리오였으니 그랬을 것이다. 결국 영화는 우여곡절 끝에 처음 구상보다 더 작은 규모로 제작됐지만, 그 결과 <서바이벌리스트>는 감독의 비전을 더욱 명확히 구현한 작품이 되었다. 영화는 과감한 생략으로 당연히 이어질 장면들은 관객의 상상에 맡겨버린다. 대신 이들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는 순간에서는 공간의 감각까지 담아내려 공을 들인다. 흥미로운 건, 이러한 연출의 태도가 극 중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매우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총은 있지만, 총알은 2개 밖에 없기 때문에 이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총알을 아끼면서 살아간다. 끝내 누군가 죽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남아있는 총알을 걱정한다. 스티븐 핑글턴 감독은 ‘스크린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영화는 별다른 음악이 없었기 때문에 사운드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게 매우 중요했다”고 말했다. 주어진 것을 가지고 최대의 효과를 끌어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가. 영화 속 인물들과 영화의 밖의 감독은 이 질문을 함께 감당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 충돌하는 상황을 그리고 있지만, < 서바이벌리스트 >가 궁극적으로 전하는 감정은 그리 1차원적이지 않다. 영화 속 인물들은 살고자 하는 본능과 인간에 대한 연민 사이에서 끊임없이 배회한다. 연민보다 본능의 힘이 더 강했던 탓에 인류의 멸망이 찾아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찾아온 이 거대한 질문 앞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영화의 선택은 차가운 동시에 쓸쓸하지만, 결국 희망적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관객 또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바이벌리스트>는 ‘인류 멸망’이란 소재로 영화가 할 수 있는 것들 가운데 ‘사이즈’를 키우는 것만 빼고 나머지 모두를 구현한 흔치 않은 사례다. 영화적인 재미와 현실의 조명, 인간에 대한 문제 제기까지. 거대한 사이즈의 인류멸망 스토리를 좋아하는 관객에게도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