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물체
- 감독
- 박준석
- 제작년도
- 2011
- 출연
- 장민현, 이우진
2012년 인디포럼 폐막작이었던 박준석 감독의 < 낯선 물체 >가 상영되었을 때, 영화 초반부터 적잖은 사람들이 영화 보기를 포기하고 극장을 나서는 걸 목도했다. 제목처럼 낯설기 짝이 없는 영화였을까? 개중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힘들어요. 못 보겠어요.” 하기는 영화 중반까지 단 한 마디의 대사도 나오지 않고, 뚜렷한 내러티브도 없이 복도를 한없이 오르내리는 한 남자에 관한 이 실험적인 흑백 필름은 대중성과는 아예 담을 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엔 친절함 따윈 없다. 대중영화에 익숙한 눈으로 보기엔 그저 거친 흑백의 질감과 반복적인 사운드가 길게 정렬되어 있을 뿐이겠다. 하지만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이 영화가 단 한 컷도 반복적이지 않다는 걸 알아챌 것이다. 이 영화의 컷들은 전부 다르다. 매번 다른 각도와 다른 사이즈로 촬영된 것이다. 이쯤 되면 컷을 분할하고 배열하는 감독의 강박증이 무서울 정도다. 하지만 < 낯선 물체 >는 강박증적인 형식미 아래 어떤 단단한 서글픔을 숨겨 놓고 있다. 이 영화는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다. 낯선 공을 찾으러 하염없이 학교를 떠도는 청년에 관한 이야기가 1부라면, 2부는 액자 밖의 이야기다. 1부의 영화를 만드는 가난한 영화과 학생이 주인공인데, 가난하고, 찌질하고, 짝사랑하는 여학생에게 변변히 말마디도 못 건네는 소심한 청년이다. < 낯선 물체 >에는 아핏차퐁 영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1부와 2부를 즐겨 분할한 채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아핏차퐁의 < 정오의 낯선 물체 >에서처럼 낯선 물체가 쫓는 행위가 곧 영화의 줄기를 이루고 있는 것도 그렇다. 감독은 꿈을 상실한 청년들을 은유화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정작 이 영화는 광장공포증과 가난의 이중주 속에서 힘들게 영화를 찍어가고 있는 감독 자신에 대한 측은한 연서이기도 하다. 그 탓에, 드디어 낯선 공과 주인공 청년이 조우하게 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차곡차곡 차올랐던 측은지심이 출렁이게 된다. 대중적 호흡이라는 낡고 강박적인 시각을 한 꺼풀 버린 채 자수처럼 느릿느릿 꿰어지는 이 흑백의 작품을 감상한다면, 아마 당신도 나처럼 가난하고 고단한 삶 속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건 무엇일까? 우리에게 꿈이라는 건 저 낯선 공처럼 출처가 없는 것일까? 에 대한 질문 앞에서 먹먹한 얼굴로 침묵하게 될 것이다. 박준석 감독의 스타일은 낯설다. 강박적으로 형식미를 추구하는 낯선 영화기하학이다. 며칠 전 내놓은 신작 <사선의 빛> 또한, 스틸 사진들을 한데 묶어놓은 것처럼 통제된 미쟝센과 컷의 규칙적 분할로 가득하다. 흡사 비명을 잽싸게 집어삼킨 거울처럼 차갑다. 우리 시대 또 한 명의 영특한 실험영화 감독이 태어날 것 같은 조짐, 흥분된다.
몇 지난 지금에 와서 돌이켜봐도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데뷔작 < 정오의 낯선 물체 >는 태국이라는 나라와 그들의 언어만큼 낯설고도 신비한 영감으로 가득찬 영화이다. 이 기묘한 영화의 내러티브를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할테지만(그 이유는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한번 달리는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방콕의 풍경으로부터 시작해 태국 전역을 여행하는 정오의 낯선 여정을 따라가보도록 하자. 이내 차는 어느 마을에 선다. 흑백 필름으로 촬영된 화면에 생선 파는 여성이 등장해 어린시절 부모가 단돈 몇푼에 자신을 팔아버린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훔친다. 곧 관객이 이 여성의 기구한 인생사에 빠져들어 동정할 자세를 취할 쯤, 카메라 뒤에서 감독은 뜬금없이 우리가 기대했던 내러티브를 벗어난 요구를 한다. '다른 이야기를 해주세요. 그것이 진짜이든 사실이든.' 그러자 그 여성은 지체장애 소년과 그의 가정교사인 도그파에 대한 꾸며낸 이야기를 들려준다. 감독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태국의 여러 마을들을 이동하며 만난 할머니, 청각 장애인, 십대, 초등학생 등의 불특정한 사람들에게 이 극이야기를 덧붙어 만들어 주길 요청하고, 이들 인터뷰와 동시에 연출된 극영화로 소년과 도그파의 극영화가 교차적으로 펼쳐진다. 인터뷰를 통해 이 극이야기는 점차 연관성없는 상황들로 구성되기 시작하는데, 가령 이런식이다. 도그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비한 물체인 구슬을 낳고 그것은 곧 별아이가 되는데, 별아이는 도그파를 옷장 속에 가둬버린다. 그러나 도그파는 아무 일 없던 듯 다시 나타나 소년은 놀라고, 곧 그녀는 별아이가 변신한 가짜 도그파란 것이 밝혀진다. 가짜 도그파가 소년을 죽이려 하자 이웃집 사람이 별아이의 목을 졸라 소년을 구해주고, 그 이웃은 도그파의 목을 치료하기 위해 복서가 되기로 결심하고, 종국에 이르러서는 마녀 호랑이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반영한 비약과 단절로 점철된 극이야기는 어떤식으로 진행될 지 종잡을 수가 없다. 더군다나 영화 속 극이야기가 발전함에 따라 어디까지가 다큐멘터리이고, 극영화인지조차 따라잡을 수가 없게 되는데, 마을 사람들의 전통공연을 통해 극이야기가 재현되기도 하고, 극영화를 촬영하는 모습이 중간에 그대로 노출되기도 한다. 영화를 본 뒤 당신을 이 질문에 맞딱드릴 것이다. 이것이 다큐인가 픽션인가? 물론 이 영화는 허구로 구성된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모큐멘터리도, 마이클무어와 같이 극화된 다큐멘터리도 아니다. 실상 영화는 그러한 선을 두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스토리텔러인 태국 민중들의 목소리를 통해 그들의 삶을 반영된 무의식을 바라보게 되고, 구전되는 민담이 어떻게 설화로 변해가는 지를 체험하게 된다. <오후의 낯선 물체>를 본다는 것은 다큐와 극, 이야기하기와 듣기, 현실과 환상, 현대와 신화 사이의 경계들을 넘어선 영화 만들기와 서사를 체험하는 영화적 해방구에 들어서는 것과 같다. 이 글을 읽은 당신이 해야할 일은 어떤 방법으로든 영화를 찾아 볼 것, 그 다음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다음 영화들, < 친애하는 당신 >과 < 열대병 >을 보는 것이다. 아마 당신은 이후의 영화들에서 이 영화의 풋티지가 어떻게 접합되는 지(< 친애하는 당신 >의 첫장면>), 초등학생의 상상 속 마녀 호랑이가 어떻게 태국의 집단 무의식으로 유령으로 귀환하는 지를(< 열대병 >의 호랑이) 보게 될 것이다. 이후 영화의 원형들로 가득 찬 <오후의 낯설 물체>는 시작부터 창대했던 낯선 이국의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란 신세계를 향한 첫걸음이 되어줄 것이다.